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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림자 기록하기, 공원의 비인간 행위자들과 나눈 느린 대화
절경의 봉우리에서 버려진 섬으로, 숨겨진 폐허의 정수장에서 숭고의 미감을 발산하는 공원으로 운명이 바뀌어온 선유도. 어쩌면 선유도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공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비인간적’은 비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빛과 바람, 물과 이끼, 부스러진 콘크리트와 녹슨 철근이 모두 주체가 되어 장소의 행위자(agent)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선유도공원은 인간만이 도시의 거주자가 아님을, 인간만이 공원의 주인이 아님을 감각하게 한다. 산업의 폐허 사이사이를 비집고 생명체가 스며든 선유도공원은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무력화하는 복합체 경관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 선유도공원에 또 하나의 조용한 흔적이 내려앉았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선유담담’의 하나로 조성되어 지난 4월 23일 모습을 드러낸 김아연(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의 설치 작품, ‘그림자 아카이브’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의 정수장 구조물(비인간 사물)과 식물(비인간 생명체)이 빚어내는 오랜 거주의 기억과 현재를 시아노타입(cyanotype)이라는 고전적 인화 기법으로 포착한다. 진청색 감광천에 새겨진 그들의 그림자는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인간들이 단지 기록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풍경의 주체임을 증명한다.
시아노타입은 19세기 식물학자들이 빛과 물, 약품을 이용해 식물 표본을 기록하던 인쇄 기법이다. 얼마 전까지 설계 도면을 만들 때 쓰던 청사진도 시아노타입의 일종이다. 햇빛으로 이미지를 현상하기 때문에 ‘선 프린트’라고도 불린다. 김아연은 이 오래된 기록 방식을 공원의 시간과 풍경에 겹쳐놓는다. 그는 “관찰과 발견과 느낌과 상상”을 통해 감각한 선유도공원의 “무위의 풍경을,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자라는 생명을, 오늘의 잠깐을, 물과 햇빛과 약품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시아노타입을 택했다. 공원 곳곳에서 발견하고 채집한 사물과 식물의 윤곽을 햇빛에 감광시켜 인화했다.
그러나 김아연의 기록은 정밀한 재현이 아니다. 실루엣과 흔적, 즉 그림자만을 남긴다. 바람에 흔들리며 명확히 찍히지 못한 경계들, 색의 농도에 따라 드러나는 미세한 잔상들이 그림자로 남아 짙푸른 캔버스에 감광된다. 버드나무, 억새와 수크령, 노린재, 바닥의 몽돌, 철재 펜스, 계단. 어떤 건 바람에 날려 일부만 드러나고, 또 어떤 건 그림자조차 희미하다. 이 불완전성이야말로 ‘그림자 아카이브’의 본질이다. 존재는 흔들리며 기록되고, 완전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선유도공원의 설계는 조경가가 했지만, 실제로는 여러 비인간 생명체와 사물이 끊임없이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김아연의 작업은 비인간들의 자기표현을 도와주는 일에 가깝다. 그들의 자율적 행동과 흔적이 드러나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작가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록자이며, 그들은 대상이 아닌 공저자가 된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가 기록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명확성과 명명 가능성에 균열을 낸다. 대신 그것은 도시의 이름 없는 존재들의 자취를 감광해 ‘인간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김아연의 아카이브는 과학적 분류와 세밀한 묘사를 담은 도감이 아니다. 공원에 잠재한 비인간 존재들과 느린 대화를 시도하는 일종의 청취 행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다시 도시에 되돌려주는 것. 선유도공원 수생식물원을 바라보는 긴 정자이자 한강 풍경의 병풍이기도 한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시는 누구의 삶을, 무엇의 존재를 기억하는가.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흔적, 이름조차 없는 잡초의 자취를 빛의 언어로 기록한 김아연의 설치 작업에는 도시에서 잊혀온 비인간들의 그림자가 정성스레 담겨 있다. 명명과 통제가 아니라 감응과 연대의 방식으로.
짙푸른 ‘그림자 아카이브’는 계속 변해 갈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완전히 탈색되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 정해진 생애를 마치면 겸허히 퇴장해야” 하는 것처럼, “그림자 아카이브는 그 기록 장치로 행복한 삶을 살다 서서히 서서히 사라지기를 희망”한다고 김아연은 말한다. 이번 호 지면에 담은 그의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시길, 책장을 덮자마자 양화대교행 버스에 올라타시길 권한다.
지난 5월호부터 일상의 ‘다양한 공원 사용법’을 청취하는 꼭지, ‘슬기로운 공원 생활’을 새로 마련했다. 매달 다른 필자가 하나의 공원과 그 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0년 6월호부터 이어온 ‘풍경 감각’을 이번 호로 맺는다. 무려 만 5년이 넘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긴 기간을 통과하며 늘 따뜻한 글과 그림을 보내준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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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창문으로 들어오는 손님
매일 아침 베란다 창문을 연다. 식물들이 햇빛과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도록 방충망까지. 그런데 열린 문으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도 찾아온다. 가장 단골은 파리. 근처 텃밭 퇴비 더미에서 날아왔으리라. 위생이 나빠 보이지만 밝은 쪽 다른 창을 열어두면 금방 날아가기에 내쫓기 수월하다. 드론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손님은 말벌이다. 위험하다고 하니 스스로 나갈 때까지 안전한 방에서 지켜봐야 한다. 나방은 더럽거나 무서울 게 없어 방심했는데, 종종 나타나 입맛에 맞는 화초를 골라 몽땅 먹어 치우던 애벌레가 이 녀석의 유생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꽤 근사한 손님들도 있다. 작업실 옆의 숲에서 온갖 나비가 날아와 꽃 꿀을 더듬고 있으면 날개 표면에서 산란하는 오색 빛을 구경할 수 있다. 꽃잎에 우아하게 앉는 나비와 달리 꿀벌은 꽃에 얼굴을 쑤셔 박은 채 꿀과 꽃가루에 열중한다. 투명한 날개 아래로 씰룩거리는, 노랗고 귀여운 엉덩이들. 언젠가 다홍색 무당벌레가 찾아와 며칠 동안 화분의 진딧물을 싹 청소해 준 적도 있다. 무당벌레는 진딧물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깡충거미’라는 거미 하나가 별 일 없이 찾아와 지내며 몬스테라 잎사귀 사이를 깡충거리며 놀았다. 다가가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쭈뼛대던 그 친구 덕분에, 징그럽게만 여겼던 거미가 이제는 어깨에 내려앉아도 아무렇지 않다.
이 글을 끝으로 ‘풍경 감각’을 마무리한다. 처음엔 그림에 글을 붙이는 것도, 잡지의 가장 앞쪽에 자리잡은 것도 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유난히 작업이 어려웠던 몇 달간 휴재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 아침 창문을 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아니길 바라지만, ‘풍경 감각’의 몇 편은 누군가의 베란다에서 파리나 나방 같을지도 모르겠다. 나비나 무당벌레는 욕심인 듯 하고. 그래도 바라건대 깡충거미쯤 되었으면 좋겠다. 귀한 지면을 내어주신 편집부와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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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카이브
Shadow Archive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
계속 걷기: 단서가 생각이 될 때까지
1. 선유도는 한강이라는 물이 만든 섬이며, 물을 정화하던 정수장이었고, 물이 풍부한 공원이 되었습니다. 선유도는 ‘물의 기록’입니다.
2. 물을 정수하기 위해서는 화학 약품이 필요합니다. 미세 입자들을 응집시키거나 소독하는 과정에 몸에 해롭지 않은 여러 화학 약품을 씁니다.
3. 섬은 햇빛이 풍부합니다. 고층빌딩의 간섭 없이 햇빛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으니까요.
4. 햇빛은 세상의 무언가를 만나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생각납니다. 그림자는 누군가의 분신이자 정체성이기도 하지요. 햇빛과 그림자는 한 쌍일 텐데, 우리는 만져지지 않는 그림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공모전을 시작할 무렵, 몇 개의 단상이 머릿속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디자인 초반은 추리소설 같습니다. 몇 개의 단서를 발견하지만 아직 그 조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파편들이 몇 개의 생각 덩어리로 응집되어 침전될 때까지 선유도를 꽤 자주 오래 걸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선유도에서 목격한 풍경들과 개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 몽글몽글해졌습니다. 수생식물원의 남측 산책로를 멀리서 영화 장면처럼 지켜본 적이 많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많은 연인이 자작나무 사이를 오가며 꽃을 건네고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줄을 지어 소풍을 나왔습니다. 노년의 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을 했습니다. 강아지들은 먼저 다녀간 친구를 찾아 나무 밑동을 킁킁거립니다. 자작나무 사이로 매일, 매 순간 단편 영화의 푸티지(footage)가 펼쳐집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필름처럼 이어지는 이 40m의 산책로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가면, 원래 설계도에 없던 못생긴 안전 난간과 아무도 앉지 않는 조악한 벤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을 등지고 앉지 않습니다. 난간을 없애면 몸을 돌려 근사한 수생식물원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네 벤치에서 흔들거리는 한가로운 풍경도 선유도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오랫 동안의 관찰과 발견과 느낌과 상상은 이런 무위(無爲)의 풍경을,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자라는 생명을, 오늘의 잠깐을, 물과 햇빛과 약품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바람이 되어갑니다. 선유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경관을 바라보는 아주 긴 정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공부하기: 생각이 개념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가끔 물어봅니다. 어떻게 개념을 만드냐고요. 대단한 방법은 없습니다. 두뇌에 땀이 나도록 생각할 수밖에요. 햇빛, 물, 기록, 그림자, 화학 약품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열심히 검색을 해봅니다. 그 과정에서 제 눈에 들어온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애나 앳킨스(Anna Atkins)가 해조류와 수생 식물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시아노타입(cyanotype) 기법입니다. 앳킨스는 세계 최초의 사진집을 만든 여성입니다. 그녀의 시아노타입 기록 작업은 사진사, 식물학자, 예술가의 교차점에 위치한 선구적인 시도입니다. 대학 시절, 학과사무실의 꾸릿꾸릿한 냄새의 원흉이던 청사진 기법이 같은 원리입니다. 너무나 익숙했던 청사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추억 여행은 잠깐, 이제 시아노타입에 대해 공부합니다. 구연산 제2철암모늄과 페리시안화칼륨을 적정 비율로 물과 섞어 숙성시킵니다. 액체를 종이나 천에 바른 뒤 잘 말려 감광지 혹은 감광천을 만듭니다. 물론 햇빛을 완전 차단해야 하니 암실에서 작업해야 합니다. 이미지를 얻고 싶은 물체나 OHP 필름 뒤에 이 감광지를 대고 햇빛에 20~30분 정도 노출시켰다 물로 세척하면 이미지가 나옵니다. 햇빛을 받은 부분은 파랗게, 빛을 받지 못한 부분, 즉 그림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흰색이 됩니다. 태양광에 감광되는 화학 처리된 천에 실재하는 사물의 외곽선과 그림자를 깊은 푸른색으로 인화하는 햇빛 프린팅(sun printing), 즉 시아노타입으로 선유도의 풍경을 기록하고, 그 위에 매일의 그림자가 중첩되며 선유도의 시간을 쌓아간다는 그림자 아카이브의 개념이 드디어 명료해지기 시작합니다.
실험하기: 개념이 실체가 될 때까지
공공미술 심사와 심의 때 몇몇 위원이 묻습니다. 시아 노타입을 다른 작품에서 해봤냐고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의심의 눈초리 가 쏟아집니다. 오랜만에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제 작업이 잘 안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의심이 제기됩니다. 아마 제가 ‘미술’이라는 말에 너무 심 취해 있었나 봅니다. 새로운 시도에 너그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1/3의 책임감, 1/3의 오기, 1/3의 호기심 으로 수많은 테스트의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직사광선 에 파란 빛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약품과 물의 비율 을 어떻게 해야 할지, 흐린 날과 맑은 날은 노출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 얼마나 밀착해야 이미지가 선명해지 는지, 어떤 천이 적절할지. 여러 번 실패하고 다시 해봅 니다. 납작한 식물 표본이 아니라 현장에서 입체를 다루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감이 그라데이션으로 나타납니다. 광량, 햇빛의 각도와 강도, 화학약품의 배합과 숙성 시간, 세척에 걸리는 시간 등 여러 변수로 인해 하나도 같지 않은 푸른색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집니다. 버리는 시간만큼 자신이 생깁니다. 이러한 수고로운 경험지(經驗知)를 소중히 여깁니다. 보통의 조경 일에서는 실패나 실수를 거듭할 사치를 부리기 어렵습 니다. 그래서 ‘미술’이라는 말이 감사했습니다.
제작하기: 실체가 작품이 될 때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테스트를 열심히 한다고 작품이 저절 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작업의 취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솜씨 좋은 파트너들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에는 그들의 노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월에 개장을 해야 하니 모든 테스트 작업을 겨울에 해야 합니다. 지난겨울 흐린 날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 매일 햇빛의 강도에 그토록 예민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의 젊은 팀원들과 해가 나오면 뛰어나갔습니다. 햇빛이 참 귀하다는 생각을 자주, 어쩌면 처음 한 것 같습니다. 2월의 맑은 며칠 동안 선유도의 곳곳을 누비며 햇빛 프린팅을 진행합니다. 빛에 취약한 감광천 은 첩보원처럼 검은 천으로 휘감아 조심스럽고 민첩하 게 다뤄집니다. 가장 조바심 나는 시간은, 낮에 햇볕을 쪼인 천들이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는 그 한 시간입니 다.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좁은 세탁실에 쪼그리고 앉 아 푸른색으로 인화된 이미지를 비로소 처음 마주하 는 시간입니다. 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을 통과해야 비 로소 정수장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니. 말장난을 하 면서 혼자 재미있어 합니다. 물을 경관적, 놀이적, 관리 적 요소로만 생각하던 오랜 습관에 균열이 가는 느낌 이 듭니다. 그렇게 세탁한 천은 매끈하게 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천을 발수 가공하기로 합니다. 공장으로부터 기계 작업하기 위해 천들을 1.5m×25m 롤로 만들어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프린트 이미지 하나는 여 백을 포함하여 고작해야 60~70㎝ 에 250㎝ 정도이니, 발수 가공 기계에 들어가려면 20개를 재봉질로 이어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퇴근 후 밤마다 제 아이와 번갈아 미싱을 돌립니다. 발수 가공이 끝난 천은 다시 낱 개로 분리하여 다림질을 또 해야 됩니다. 다림질이 끝난 천은 폴리카보네이트 투명 패널에 부착되고 철재 프레임에 조립됩니다. 자외선 차단 스프레이도 골고루 뿌려줍니다. 빨래, 바느질, 다림질. 우리 어머니들이 지 루하게 했던 가사 노동을 집약적으로 반복합니다. 천이 라는 재료를 선택한 순간에 내정된 일이었을 텐데, 당 시에는 이 고단함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구조체는 어떤가요. 자작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모든 작업은 장비 없이 나무를 피해 한 땀 한 땀 진행됩니다. 경사진 땅을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 게 평평하게 만들고 선유도공원 원 식재 도면의 붉은 인동과 홍자단을 섞어 식물을 심어봅니다. 패널 조립 과정도 놀랍습니다. 그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창의 성과 숙련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 많 은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협업하기: 작품이 생태계가 될 때까지
그림자 아카이브의 또 다른 주인공은 그림자 캐릭터입니다. 물과 식물이 있는 곳에는 늘 곤충이 찾아오지요. 곤충은 꽃가루받이, 유기물 분해, 먹이망 유지 등 생 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해충을 조절하고 토양 을 건강하게 만들며, 다양한 생물의 먹이로서 생물 다 양성을 지탱합니다. 또한 환경 변화에 민감해 생태계 건강을 알리는 지표종이기도 합니다. 곤충이 사라지면 생태계 전체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벌레 포비아가 만연해 있죠. 잘 알지 못하면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기 십상입니다. 우리 생태계에 중요 한 곤충 친구들을 친근하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 도움을 요청 합니다. 우선 곤충 전문가와 추운 겨울날 흔적을 찾아 선유도에 사는 50여 종의 곤충을 발견합니다. 따듯한 날이었다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선유도에 사는 곤충 탐사 결과를 캐릭터로 개발하고 3D 프린 팅해 패널 안팎에 숨깁니다. 낮의 햇빛, 밤의 조명을 받아 벌레들은 그림자로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밤의 불빛이 살아있는 곤충들을 더 불러 모으겠죠. 사람들이 민원을 넣을까봐 걱정이 앞섭니다. 터파기를 하는 어느날 잠자던 두꺼비 커플을 깨웠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물가로 조심스럽게 옮겨주었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줄 거라 현장의 여 러분이 즐거워합니다. 그렇게 두꺼비가 또 다른 그림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선유도의 친구들입니다.
검증하기: 작품이 시설이 될 때까지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개장을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습니다. 선유도의 풍경과 생태계의 기록이라는 작품의 의도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 었습니다. 사람들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난간을 더 조밀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햇빛에 파란색의 천이 바래가는 햇빛 탈색(sun bleaching) 역시 작품의 일부라고 항변해 보지만, 얼마나 바래면 교체할 거냐는 끊임없는 질문에 아직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 합니다. 처음이니까요. 작품은 개장과 동시에 하자 교체 대상의 시설물이 됩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기 위해 식물을 밟습니다. 힘 좋은 청소년들이 패널과 그 네 벤치를 미친 듯이 흔들어댑니다. 그네의 기초 공사를 더 깊고 더 강하게 해야 합니다. 목재에 얼룩이 생긴대서 색이 있는 오일 스테인을 덧대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공원 시설로 존재하기 위해 부족해 보였습니 다. ‘공공’의 무게감이 타협을 요구합니다. 공사가 끝나면 즐거울 거라 생각했지만, 작품의 개장은 걱정과 우 려와 보수 공사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합니다. ‘안전’이라는 단어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수년 전 해외 놀이터 답사에서 매우 가파른 언덕 위 야외 데크에 안전 난간이 없는 게 너무 놀라워 담당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애들 떨어지면 어떡하냐고요. 담당자가 얘기합니다. 난간이 없어야 엄마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아이들을 계속 지켜본다고요. 참 다른 문화입니다. 공급 자가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는 장치를 만드는 사회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용자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사회의 차이는 오랫동안 축적된 어떤 태도의 차이 일까요. 보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잊었던 그 난간 없는 놀이터가 불쑥 생각났습니다.
기다리기: 작품이 사라지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라지지 않음을 욕망하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지구상에 태어난 누구나 태어나서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악착같이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할까요. 얼마 못 버티는 것에 공공의 예산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젠가 정해진 생애를 마치면 겸허히 퇴장해 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록 이 의미가 있겠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영속된다면 기록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가서 보면 되니까요. 아카 이브는 사라지기 싫어하는, 혹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기꺼이 보낼 수 있는 가볍고 아름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찰나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 풍경의 순간적 단면 위에 하루의 낮과 밤의 빛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의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 기록과 소멸 사이의 관계를 시각화한 풍경적 필름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어느 시점의 인상을 펼쳐놓은 병풍입니다. 선유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물의 경관을 바라보는 긴 정자입니다. 여기서 시민들의 일상과 계절의 변화가 겹치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계속 수집 되겠지요. 이 작품이 완결된 오브제로서의 공공미술이 아니라 진행형 아카이브, 혹은 공동의 아카이빙 실천이길 바랍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공원에 대한 오랜 학습과 흠모의 결과이자 선유도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소소한 연대의 기록물입니다. 선유도의 기억을 조금 더 푸르고 충만하게 축적할 수 있도록, 그림자 아카이브는 그 기록 장치로 행복한 삶을 살다 서서히 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글 김아연
사진 유청오
작가 김아연
그림자 캐릭터 디자인 김소연, 토드헴커
디자인팀 스튜디오테라(안형주, 김선주, 박근우, 박인경, 이한슬, 유다연)
디자인 지원 서울시립대학교 조경설계연구실(김소영, 김진현, 박형근, 신나경, 장계용, 적우예)
제작 및 설치 총괄 초록선(배용은, 이환명)
디자인 감리 안형주, 박근우
금속 각재 기원(이원길)
패널 금속 및 스윙 벤치 제작 선철제작소(김선철)
목재 가공, 패널 조립 및 설치 김승봉, 김명수
목재 천일우드(조상현)
도장 미도페인트(이명례)
전기 및 조명 다온태화이앤씨(주은성)
패브릭 발수 가공 비트패브릭
폴리카보네이트 패널 제작 흥왕(김경희, 이승우)
구조 설계 케이엔지니어링(권우현)
구조 자문 황경주
곤충 탐사 손윤한
영상 제작 이동웅
전시기획 및 시행 시월이앤씨
주최·주관 서울특별시 디자인정책관
재료 아연도각관에 도장, 옥스퍼드천, 목재, LED조명, 식물 등
위치 서울시 영등포구 선유로 343
규모 W364×H307.5×L4,475㎝
완공 2025. 4. 23.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번 그림자 아카이브를 기획,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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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메슈 리버프런트
Someș Riverfront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Cluj-Napoca)시를 가로지르는 15㎞ 길이의 소메슈강은 도시의 역사 중심지, 산업 및 주거 구역을 관통한다. 수세기 동안 도시는 강과 밀접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유대가 점차 약화됐다. 강은 단순히 물과 에너지를 운반하는 인프라 시설로 여겨졌고 수변을 활성화하는 프로그램도 전무했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수로는 강과 도심 사이에 단차를 발생시켰고, 결과적으로 강과 도시를 물리적, 시각적으로 단절시켰다. 2017년 클루지나포카시는 소메슈강(Someș River) 재생과 시민 참여 활성화를 위해 국제설계공모를 개최했다. 당선안으로 선정된 프락티카(PRÁCTICA)의 설계 목표는 중요한 생태 통로로 기능할 수 있는 대상지의 잠재성에 주목하는 동시에 단절됐던 소메슈강과 도시 사이의 연결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녹색 연결축
소메슈강을 인근 녹지 공간과 연결하는 생태 통로로 디자인했다. 시미온 버르누치우 중앙 공원(Simion Bărnuțiur Central Park)과 체타추야 공원(Cetățuia Park)을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를 통해 수변과 연결했다. 모래 해변, 수변 스탠드 공간과 함께 기존 주차장을 개조해 강을 조망할 수 있는 광장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기존보다 수변 공간을 두텁게 하는 동시에 공공 공간의 활성화를 꾀했다. 궁극적으로 강변을 거닐며 수경관을 감상하며 사색과 여가를 즐기고, 야생 동식물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공 공간으로 기능하게 했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글 PRÁCTICA
Architects PRÁCTICA(Jaime Daroca, José Mayoral, José Ramón Sierra)
Landscape Architecture Landlab
Local Architects Planwerk
Collaborators Blanca Ámoros, Raúl Brito, Cesia Campos, Amanda Castellano, Gonzalo Cortes, Elisabetta Gravina, Andrea Navarro, Iglesias Palomares, Alonso Rosa, Costan Svinti, Sofía Valdivia, Beatriz Whithman
Engineering AquaProciv, Costin si Vlad Birou de Proiectare & EuroBB Energy
Construction ACI Cluj, Socot, Simacek&Nord Conforest
Coordination Execution Baseli Drum Consult
Client Cluj-Napoca Municipality
Location Cluj-Napoca, Romania
Area 332,137㎡
Completion 2023
Photograph Imagen Subliminal(Miguel de Guzmán+Rocío Romero), Adrià Goula, Sergiu Razvan, Cluj-Napoca Municipality
프락티카(PRÁCTICA)는 하버드 GSD 출 신의 건 축가 하 이메 다 로카(Jaime Daroca), 호세 마요랄(José Mayoral), 호세 라몬 시에라(José Ramón Sierra)가 설립한 건축 디자인 스튜디오다. 스위스, 영국, 미국 등에서 다양한 국제적 경험을 쌓았으며 헤르조그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 등 유명 건축가들과 협업했다. 건축, 도시계획, 디자인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다학제 디자인을 추구하며 다양한 관점을 기반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인 해결법을 제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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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사커 생태 공원
Ecological Urban Park Vlasakker
블라사커 생태 공원(Ecological Park Vlasakker)(이하 블라사커)은 코르트레이크(Kortrijk)의 오픈스페이스 네트워크의 중요한 생태적 연결축이다. 이 공원은 과감한 정책적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는데, 본래 과학 기술 단지 용도로 지정된 대상지의 오픈스페이스를 활용해 호흐 코르트레이크(Hoog Kortrijk)의 녹색 허파로 만들었다.
도심 한복판의 블라사커는 약 17헥타르의 규모로 에티엔 사벨란(Etienne Sabbelaan), 만다흐베흐(Maandagweg), 타르베펠트/클라버펠트(Tarweveld/Klaverveld) 주거 지역, 비베스대학교(VIVES University College), KU 뢰번 퀼라크 코르트레이크 캠퍼스(Leuven Kulak Kortrijk Campus) 사이에 위치한다. 2024년 6월 완공된 공원은 호흐 코르트레이크의 녹색 오아시스로 기능하며 새로 심은 수백 그루의 교관목을 통해 풍성한 녹지 공간을 시민들에게 선사한다. 또한 굽이진 산책로, 다양한 휴식 공간과 놀이 구역은 방문객이 쾌적한 환경에서 편히 쉬고 머무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원 캠퍼스 모델
블라사커는 생태 공원으로서 대상지의 여러 교육 기관을 위한 녹색 전략의 일환으로 그린 인프라를 구축하는 원 캠퍼스 모델(one campus model)의 토대가 된다. 설계 과정에서 시정부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과 협업하는 동시에 워크숍, 프레젠테이션, 설문조사 등을 진행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종 설계안을 도출했다.
기존의 경관과 생태적 특성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목초지가 풍부한 북쪽의 유서 깊은 농업보호구역과 기존 저류지 인근의 주변 숲을 보존하거나 강화했다. 또한 대상지 내 수로를 보강하고 교목 식재를 통해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고자 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협의 과정을 통해 더 발전된 형태의 공원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공원은 지역 생태계 발달과 함께 완성도 높은 공원의 기능을 결합했다. 다양한 녹지 공간은 일관성 있는구조를 만들어내는 투과성 포장 산책로로 연결된다. 여러 휴식 공간이 공원 입구부터 내부까지 곳곳에 배치됐다. 산책로 데크는 다채로운 색감을 선사하는 초지를 가로지르고, 저류지 인근의 목재 데크에서는 수경관을 독특한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이곳에서 서식지를 형성하면 방문객들과 자연 애호가들의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가 될 것이다.
생태 도시공원의 정체성 강화
생태 녹지 공간 구조의 보존과 강화, 편안한 휴식 공간과 레크리에이션 공간의 결합을 통해 생물 다양성을 확보하고 미래지향적 공원으로서 입체적 공원 경험을 제공했다. 자연 소재를 최대한 활용해 산책로를 투수성 석재로 포장하고, 기존 저류지 산책 데크와 휴게 플랫폼을 팀버 목재로 제작했다. 벤치나 공원 입구 안내판, 자전거 방호벽 등 작은 디자인 요소에도 목재를 활 용했다. 이러한 자연 소재는 생태 도시공원이라는 정 체성을 강화한다.
그린 오픈스페이스
블라사커는 코르트레이크의 도시 오픈스페이스를 위한 그린 네트워크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코르트레이크 지역 내 비서헴(Bissegem)시의 시티그린 겔링크(Citygreen Ghellinck) 생태 공원에도 블라사커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생태 녹지 공간이 마련됐다. 둘 다 동일한 포장 재료와 공원 인프라 요소들을 활용해 설계됐다. 이처럼 시민을 수용하며 디자인적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춘 생태적 공공 오픈스페이스는 자연과 도시의 조화를 꾀하는 도시공원으로 기능하게 된다.
글 OMGEVING
Main Assignment HolderDesign OMGEVING
Main Works Contractor Roadworks Ockier
Project Partners Hesselteer(Ecologist)
Arborist/Supplier of Plants Boomkwekerij Schepers
Manufacturer/Brand of Pavement Nobre Cal
Manufacturer/Brand or Distributor Street Furniture Grijsen
Manufacturer Water Elements/Fountains Roadworks Ockier
Client City of Kortrijk
Location Etienne Sabbelaan, Kortrijk, West Flanders, Belgium
Area 17㏊
Completion 2024
Photograph Karel Debedts, Karel De Kesel
옴헤빙(OMGEVING)은 건축가, 조경가, 도시계획 및 환경 계획 전문가와 함께 다학제 디자인을 추구하며 회복탄력성이 있는 도시 경관과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마을과 도시, 오픈스페이스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규모의 복잡한 공간 문제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을 시도한다. 시민들의 생활 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기후 위기에 대응한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내며 미래지향적인 해결법을 도출한다. 이러한 지향점은 연구를 비롯한 디자인 전 과정에 담겨 있으며,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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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스타칼니스 공원
Skaistakalnis Park
공원의 역사
스카이스타칼니스 공원(Skaistakalnis Park)은 리투아니아 파네베지스(Panevėžys)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네베지스(Nevežis)강을 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공원에는 언덕과 숲, 작은 개울, 연못이 있다. 사실 이곳은 19세기 말 무렵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저택의 일부였다. 20세기 초반 공원 내에 있던 시인의 저택이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쓰이기도 했다. 이후 다양한 체육 시설이 추가되며 공원은 훈련과 운동 경기의 무대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 운동 시설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그 결과 공원은 수십 년간 방치되었고 잡초가 무성해졌다.
파네베지스에서 가장 오래된 녹지의 재활성화
변화가 시작된 건 2016년, 파네베지스 시정부는 스카이스타칼니스 공원을 비롯한 공공 공간, 예술, 문화에 투자해 도시 이미지와 삶의 질 향상을 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7년 공원과 역사적 유산인 저택을 재설계하는 공모가 개최됐고, PUPA/라이프 오버 스페이스(PUPA/Life Over Space)의 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주요 목표는 공원의 자연적인 숲 성격을 유지하면서 엔터테인먼트와 레저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저택 내 아트센터 인근에는 모임과 문화 행사를 위한 공간
을, 중앙 다리 옆에는 운동과 활동적인 액티비티를 위한 구역을 조성했다. 공원 곳곳에 벤치가 있는 작은 모임 공간이 마련됐다. 새로운 다리와 보행로는 그간 숨겨져 있던 지역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새로운 액티비티 구역, 보식으로 풍성해진 녹지와 그로 인해 향상된 생물 다양성은 시민들이 스카이스타칼니스 공원을 한층 더 즐겁게 이용하도록 만든다.
다리
다리는 스카이스타칼니스 공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새로 조성된 다리는 나무판자를 수직으로 세운 난간으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리모델링된 네베지스강을 건너는 중앙 다리에는 휠체어, 유모차, 자전거 이용자도 사용할 수 있는 경사로와 휴식과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됐다. 소규모 하천에 놓은 작은 다리들은 공원의 경관에 매력과 즐거움을 더한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글 PUPA/Life Over Space
Architect PUPA/Life Over Space(Tadas Jonauskis, Justina Muliuolytė, Ignas Račkauskas, Lukas Kulikauskas, Augustas Makrickas)
Landscape Architect Terra Firma LT(Ramunė Baniulienė, Linas Ūsas)
Playground and Sport Equipments Kompan playgrounds
Collaborator MUTUUS
Client Panevežys City Municipality
Location J. Biliūno g. 3, Panevėžys, Lithuania
Area 29.7㏊
Design 2017~2019
Completion 2023
Photograph Aistė Rakauskaitė, Norbert Tukaj
PUPA/라이프 오버 스페이스(PUPA/Life Over Space)는 리투아니아빌뉴스시를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펼치는 도시·조경 스튜디오다. 수십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사회·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도시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조경, 도시, 리서치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조경은 단순한 녹지 공간이 아닌 커뮤니티, 질 좋은 삶, 회복탄력성을 길러내는 활력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라 믿는다.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를 배양하기 위해 꼼꼼한 연구, 컨설팅을 통한 커뮤니티 참여, 장기 활용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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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산 공원
Lion Mountain Park
라이언산 공원(Lion Mountain Park)은 중국 쑤저우(Suzhou) 지역 역사와 신화에 자주 등장했던 라이언산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조성됐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인근의 타이거산(Tiger Mountain)을 마주하고 있는 라이언산은 지역 마을을 수호했다고 전해진다. 한때 놀이공원이었던 대상지를 산과 호수가 조화를 이루는 산수 개념을 적용한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랜드마크로 복원했다. 순환 프롬나드는 산과 새로 조성된 호수를 하나로 묶어주며, 자연과 문화의 정신이 어우러진 경관을 완성한다.
라이언산의 복원
쑤저우의 장엄한 라이언산은 오랜 세월 도시를 지켜온 역사적이고 자연적인 상징물이다. 지역의 여러 산봉우리 사이에서 타이거산을 향해 우뚝 솟은 이 산은 예로 부터 지역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고대의 지역 문인들은 산의 가파른 탐방로를 따라 놓인 바위에 ‘18경’이란 시를 새겼다.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포함한 놀이공원의 각종 놀이 기구, 공중 트램으로 인해 호수의 규모가 축소되는 등 대상지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됐다. 특히 산의 경사면은 대형 광고판과 현수막으로 도배됐다. 2016년 국제설계공모에 당선된 TLS는 지역 랜드마크인 라이언산의 위상을 복원하고 새로운 호수와 공원, 문화 지구를 조성하기 위한 설계를 시작했고, 9년의 긴 작업 끝에 공원을 완성했다.
설계의 목표는 호수의 확장 및 개발을 통해 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호수의 개성을 드러내고, 산과 조화를 이루는 풍성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흘러온 유출수는 습지 테라스와 사이프러스 숲을 통과하며 정화된다. 덕분에 물놀이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호수의 수질이 개선됐고, 소형 보트 체험 등 놀이공원을 대신할 수 있는 여가 프로그램이 활성화됐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글 TLS Landscape Architecture
Lead Landscape Architect Tom Leader
Project Manager Zheng Huan, Fan Wei
Competition Team Chen Wei, Pablo Alfaro, Mario Accordino, Zhong Xin, Su Hang, Chen Yi-Shan, Robert Cabral, Zhang Wenmo
Detailed Design Team Yu Yang, Ye Shuping, Kathryn Drinkhouse, Huang Dawei, Yu Zhaowei, Kushal Lachhwani, Zheng Si, Sun Chen, Xing Xiaoye, Zu Wanpeng, Li Qianyu, Chen Jiawen, Bao Aiai, Wei Ying, Xing Mengyao, Shi Xiayao, Li Chunjin, Ivan Valin, Thor Anderson, Scott Getz
Landscape Architect of Record Suzhou Architecture Gardens Landscape Planning Design
Sponge City Design Consultant Jiangsu Zhuyan Design & Consulting
Pavilion Design Kuth Ranieri Architects
Client Suzhou Shishan Plaza Development
Location Suzhou, Jiangsu, China
Area 72㏊
Completion 2024
Photograph Xi Chen, TLS Landscape Architecture
TLS(TLS Landscape Architecture)는 2001년 톰 리더(Tom Leader)가 개소한 조경설계사무소로 캘리포니아와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계획과 공공 분야에서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독창적이고 실체적 경험을 디자인으로 구현하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를 지속하고 있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에 접근하고,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의 매력을 탐구한다. 규모와 상관없이 가치 있는 실험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로 아시아에서는 문화적 뿌리를 기반으로 한 지속적인 도시 성장을 이끌어내고자 하며,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라이언산 공원, 항저우 스틸워크 공원 등이 있다.
- TLS Landscape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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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브뤼네트 베이스캠프
Skovbrynet Basecamp
스쿠브뤼네트 베이스캠프(Skovbrynet Basecamp)(이하 베이스캠프)는 혁신적 주택 콘셉트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학생, 연구원, 노인을 위한 700여 채의 아파트가 마련됐다. 이 주거 지역의 외부 공간을 자연, 건강, 모빌리티를 강조하며 도시의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숨 쉬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륑뷔(Lyngby)시의 매력적인 녹지대에 자리 잡은 베이스캠프의 북동쪽에는 소르엔프리(Sorgenfri) 공동묘지가, 서쪽에는 륑비 호수가 있다. 부지 전체를 둘러싼 생울타리와 관목은 풍성한 녹음을 자랑한다. 대상지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바람이 통하는 보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통일성 있는 경관을 만드는 것이 설계의 목표였다. 공원 같은 경관을 만들면서도 수목을 곳곳에 흩어 심고 변동적인 식재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 까다로우면서도 포괄적인 외부 공간을 계획했다. 건물 6층까지 이어지는 공공 녹지 보행로를 따라 오르면 구불구불한 건물 옥상의 모습과 륑비 호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건물 옥상에는 높이 자란 그라스가 우거진 풍경을 연출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보행로를 조성했다.
베이스캠프의 옥상은 아름다움과 지속가능성, 기능이 한데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옥상에서 직조되는 유기적 형태의 구불구불한 소로는 주민과 방문객이 이 공중 경관을 탐구하도록 불러들인다. 경계석 없이 설계된 소로는 건물의 자연스러운 윤곽을 따라가며 외부 공간과 아래 건물 사이를 매끄럽게 전환시킨다.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디자인은 주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도 기억의 남는 경관을 자아낸다.
옥상과 연계된 테라스는 휴식과 사색의 공간을 제공한다. 테라스들은 옥상 정원의 고요함을 즐기기에 이상적이며, 주민뿐 아니라 공공에게 열려 있어 다양한 커뮤니티 구성원에게도 공중 녹지를 거닐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공원 같은 환경, 소르엔프리 공동묘지, 륑비호수를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조망점을 제공하는 이 공유 공간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독려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글 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 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ure and Urban Design
Architect Lars Gitz Architects
Collaborator JFP, AFRY
Client ST Skovbrynet student Aps, BC Skovbrynet Residential Aps
Location Lyngby, Denmark
Area 34,000㎡
Completion 2020
Photograph Sofie Cold Ravnkilde, DronePixels
크라그&베릴룬드(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ure andUrban Design)는 2003년 한스 크라그(Hans Kragh)와 요나스 베릴룬드(Jonas Berglund)가 설립한 창의적 스튜디오다. 스칸디나비아의 설계 원칙을 기반으로 혁신적이고 지속가능한 조경 설계를 실천한다. 건축, 경관, 도시설계를 아우르며 프로젝트의 중심에 항상 사람을 둔다. 코펜하겐, 스톡홀름, 오슬로에 사무소를 두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목표로 다양한 도시, 경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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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재료과학 국가연구센터
Shenyang National Research Center for Materials Science
융합의 정원
융합의 정원은 선양 재료과학 국가연구센터(이하 선양 연구센터)에 조성된 공공 오픈스페이스다. 선양 연구센터의 남북 축을 이루는 이 정원은 주요 건축물과 센터의 동서 방향을 물이 흐르는 수경 요소로 연결한다. 융합의 정원이 센터 남측 주출입구의 배경을 이루는 만큼, 국가연구센터의 위엄과 상징성을 드러내면서도 일상적 활용을 고려한 경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남쪽 광장
남쪽 주출입구에 위치한 광장은 모든 방향에서 주목할 수 있는 시각적 배경으로 만들었다. 약 3천㎡ 규모의 광장에 몽골참나무 열두 그루를 자연스럽게 배치해 모임과 흩어짐, 지나침과 머묾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몽골참나무 군락은 멀리서 보면 건축물의 규모와 어우러지는 개방적이면서도 녹음이 풍성한 경관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독특한 세부 요소를 살피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곳곳에 배치한 흰 벤치는 구름 형태이며, 수목 보호대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사용해 주변 경관과 나무 그림자가 독특한 형태로 맺히게 했다.
수경 시설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수경 시설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만들기 위해 노랑꽃창포를 띠 형태로 식재했다. 이는 건축물 입면이 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부드럽고 한층 더 자연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녹지가 부족한 공간의 단점을 시각적으로 보완한다.
중앙의 넓은 수면에는 원형 수상 플랫폼이 있다. 플랫폼 중심부에 높낮이가 다른 금속 패널을 여러 겹 겹쳐 만든 원형 회랑(파빌리온)과 우주를 은유하는 알루미늄 조각을 설치해 주요 경관 요소로 삼았다. 최소한의 요소만을 사용해 장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친수 공간
친수 공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조성했다. 동쪽은 포장 면적을 넓히고 점진적으로 수면에 접근할 수 있는 친수 플랫폼을 설치하고, 곳곳에 긴 벤치를 배치했다. 반면 서쪽은 수변에 맞닿은 정박형 공간으로 조성했다. 포장면의 수목 보호대를 안쪽으로 기울인 형태로 디자인하고, 콘크리트 단 위에 등받이를 설치해 공간을 더욱 가볍고 개방감 있게 연출했다.
경직성 완화
건축물과 포장 공간이 만나는 경계 부분에는 두께 8cm 이상의 석재를 사용하고, 리아트리스를 심어 경계의 경직성을 완화했다. 이곳에서는 지피 식물의 색 상과 형태보다는 식물의 존재 여부 자체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일상 속 비일상
융합의 정원은 과도한 장식, 기이한 형태, 형식적 포장 패턴, 다양한 재료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표면 처리, 마감, 조합 방식, 단차 등 모든 세부적 요소에 서 비일상적인 정교함을 지향하며 국가연구센터라는 장소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절제 속 자유로 움, 간결함 속 풍요로움이 융합의 정원이 추구하는 일상 속 비일상의 디자인이다.
글·사진 R-land
Design R-land
Concept Design Zhang Junhua, Zhao Changjiang, Zhang Peng, Li Ruijing, Zhao Yanying, Shi Wanrong
Construction Documents Design Zhang Junhua, Zhao Changjiang, Yan Yili, Yu Feng, Jiang Chongjian, Liu Lixing, Ji Qian, Dai Jing, Zhang Wenxu, Zheng Yunfeng, Bai Zuhua, Hu Haibo
Architect Song Dongmi
Electrical Installation Xu Feifei, Zhang Yali
Structure Ma Aiwu, Shen Shiru
Construction China Railway 19th Construction Bureau
Client Shenyang Wanbo Development and Construction
Location Chuang Xin Lu, Liao Ning Sheng, China
Area 1.71㏊
Design 2019. 11. ~ 2021. 12.
Completion 2024. 5.
Photograph R-land
베이징 웬수경관계획설계사무소(源樹景觀規劃設計事務所, R-land)는 2004년 설립된 중국의 환경 전문 설계사무소다. 경관 계획, 공공 공간, 관광·휴양지, 테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대지 경관 설계와 자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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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허난설헌의 풍경
허난설헌과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을 낳은 강릉. 그곳에 뭔가 특별한 기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번 5월 귀국 길에 강릉행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다. 허난설헌 기념공원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역에 가서 기차표 끊으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5월 초 연휴가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기차표도 고속버스표도 일찌감치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차를 임대해서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래 봐야 강릉의 정기는커녕 고속도로에 줄지어 선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스트레스만 한가득 충전하여 돌아올 것이 뻔했기에 포기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러 차례가 보긴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둘러본 것이 아마 2008년경인 것 같다. 용평에 머물며 정원을 하나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강릉이 멀지 않았으므로 경포대도 볼 겸 겸사겸사 주말에 길을 떠났다.
강릉에 도착해 경포 해변으로 내려가다가 혼비백산하고 돌아섰다. 언덕의 능선을 결딴낸 호텔과 펜션, 어지럽게 번득이는 오색 등불,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 주차장에 종으로 횡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등, 아수라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아수라장을 통과했더라면 백사장으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토록 망가진 풍경에 대한 노여움이 불같이 치솟아 도저히 머물 수가 없었다. 지금 갔더라면 달라졌을까? 대형 호텔과 펜션, 횟집과 주차장의 자동차들 사이에서 난설헌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위대한 시가 그 추해진 풍경을 다 덮을 수 있을까?
혹시 난설헌이 강릉의 풍경을 거듭 노래했더라면 이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강릉시가 풍경을 보존하려 노력해 보지 않았을까? 난설헌의 시는 풍경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수많은 풍경을 노래했지만 강릉을 노래한 시는 단 한 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강릉땅 강가에 있어 / 문 앞 흐르는 물에서 비단옷을 빨았지요 / 아침에 목란배를 한가히 매어 두고는 /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어요.”(번역: 허경진) 그 외 난설헌의 시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아주 먼 중국이나 혹은 그보다 더 먼 신화의 세계로 향해 있었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나
허난설헌은 1563년에 출생해 1589년, 만 26세로 요절했다. 연대로 본다면 황진이와 신사임당의 손녀뻘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 여인이 모두 16세기를 살다 갔다. 문득 궁금해진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을까? 조금 더 좁혀보자면 연산군(1476~1506)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중종, 인종, 명종 대의 조선이다. 성리학이 아직 경직되기 전이었다. 붕당 정치가 태동했으나 세도 정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사림 주도의 서원 문화가 활성화되어 온 나라에 무기 철렁이는 소리 대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신분제도 역시 세분되어 가는 과정에서 계층 간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네 번의 사화가 모두 16세기에 일어났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였다. 황진이의 시를 빌려 표현해 본다면 15세기는 청산처럼 단단했고 16세기에 오히려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흐름과 변화가 있었다.
가부장제도 역시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사임당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혼인 후에도 평생 친정에서 맘 편히 살며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난설헌은 아뿔싸, 친영례(각주 1)가 도입된 직후에 혼인하여 시집살이를 시작한 1세대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에 이따금 서릿발이 내비치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설헌의 두 개의 삶
난설헌 허초희는 만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 김성립과 혼인했고 이 혼인을 전후로 확연히 구분되 는 삶을 살게 된다.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하루아침에 낯선 가문, 낯선 가풍의 어린 며느리가 되었다. 친영례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으므로 시집살이에 관한 매뉴얼도 아직 없었을 것이다.
친정 아버지 허엽, 오빠 허성과 허봉, 동생 허균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난설헌과 함께 허씨 5 문장이라 불렸다. 그중에서도 난설헌의 문장이 가장 격조 높았다고 평가된다.(각주 2)아버지 허엽은 지 난 호에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황진이와 함께 수학했던 열린 사고의 인물이었다.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장려했으며 오빠들도 초희를 지극히 아꼈고 동 생 허균도 누이를 매우 따랐던 것 같다. 이 시절에 어린 초희는 마음껏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다 혼인과 함께 초희의 세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남편 김성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 의 갈등도 컸다고 전해진다. 각별했던 둘째 오빠 허봉이 글을 다시 쓰라고 붓을 보낸 것으로 보아 마음 놓고 글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 둘을 낳아 한때 행복했으나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에 역병으로 죽고 뱃속의 아이마저 잃게 된다. 곧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오빠 허봉은 당파 싸움 끝에 귀양을 다녀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난설헌도 죽는다.
죽음의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났다’라는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제 그만 살겠 다고 작정하고 곱게 누워 영혼을 떠나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기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 듯,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라는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남겼다.(각주 3)그토록 줄기차게 노래했던 신선의 세상으로 훌쩍 떠나간 것일까? 『난설헌집』의 머리말을 썼던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을 선계에서 인간 세계로 잠깐 귀양 와 구슬 같은 시를 쏟아낸 선녀라고 소개했다.(각주 4)
유선사, 난설헌의 현실 초월일까 아니면 자아가 머무는 곳이었을까
난설헌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선계를 노래한 ‘유선사(遊仙詞)’다. 전해지는 210여 편의 시 중반이 넘는 128편에서 선계를 노래했다. 그중 총 87수로 이루어진 ‘유선사 연작’이 있는데 여기서 난설헌은 인간계의 굴레와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장엄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펼쳐낸다. 서왕모로부터 시작하는 신선들의 복잡한 계보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무한한 세상에 관한 이 대서사시는 해독이 쉽지 않다. 수많은 지명, 신선명, 인명 및 사건을 이해하려면 백과사전을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
난설헌의 유선사는 혼인 후의 갑갑한 인생에서 도피하기 위해 쓴 것으로만 이해할 일은 아니다. 선계에 관한 동경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달달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는 송나라 책 『태평광기太平廣記 』에 실린 7천여 에 달하는 이야기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선계의 이야기가 어린 난설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 같다. 여덟 살에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각주 5)이라는 글도 선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87수 연작의 서사시로 귀결했고 마지막 시도 선계로 장식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과 재미로 출발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계는 난설헌의 진정한 자아가 머무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난설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꼬마 초희가 하늘의 명을 받 아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을 지어냈다고 하고 “구절이 아름답고 문장도 굳 세어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썼다.(각주 6)죽기 전에도 흡사한 주장을 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선녀들을 만났는데 시를 한 수 지어보라 해서 지었더니 선녀들이 이건 신선의 글이라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이태백에 견주었다.(각주 7)
나무에 붉은 말고삐를 매는 청년은 누구일까
유선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난설헌의 시제는 매우 다양했다. 거의 모든 세상만사를 한번 쯤은 시로 읊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일을 묘사한 궁사 연작도 있고 ‘죽지사’라고 하여 풍속 이나 연정을 노래한 것도 적지 않다. 그중 연가 몇 수는 “절창이지만 방 탕하여 문집에 실 수 없다”라는 금지곡 선언을 받기도 했다.(각주 8)
그 모든 난설헌 시를 꿰뚫는 공통점이 있다. 4백 년 전에 쓴 시임에 도 불구하고 꼭 어느 영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다. 그건 아마도 시마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인물을 등장시켜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함으 로써 영화의 스틸 컷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난설헌 시의 남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버들가지 노래’라는 시에서는 이런 장면을 그렸다. “청루 서쪽 언덕에 버들꽃 흩어지자 / 아지랑이 낀 가지가 난간 을 스치는데 / 어느 집 청년인가 백마를 채찍질해 와서 / 버드나무 그 늘에다 붉은 고삐를 맨다.”
나무에 말고삐를 매는 청년 혹은 귀공자는 난설헌의 시에 꽤 자주 등장한다. 청년의 말고삐와 채찍의 색상이 바뀌고 장소도 달라져 궁궐 로 출근도 하고 장안 길가에도 나타났다가 기생집 앞에 말고삐를 매기도 한다. 마치 시그니처처럼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말고삐를 매는 이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혹시 난설헌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스스로를 이태백과 견준 난설헌의 기개로 볼 때, 그리고 “조선에서 여자 로 태어난 것과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3대 불행으로 꼽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도 오빠들처럼 벼슬길에 올라 궁으로 출퇴근도 해보고 자유롭게 나들이도 하며 기생집 기둥에 말고삐도 한번 매보고 싶지 않았을까?
허난설헌의 다원적 자아 - 선인, 궁인, 귀공자, 전장의 장수
입새곡(入塞曲), 새하곡(塞下曲) 내지는 출새곡(出塞曲)이라는 한시의 장르가 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와 병사들에 관한 시다. 난설헌은 입새곡 5수, 새하곡 5수, 출새곡 2수를 남겼다. 아마도 그녀의 시 중 가장 의외적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말고삐를 매는 청년티를 그만 벗고 장수가 되어 하늘 높이 걸린 석양을 바라보며 칼 차고 만 리 출정 길을 떠나 보고 싶었던 것일까? 깊은 구름 자욱한 사막에서 봉화 살펴보고 나서 밤 평원을 달려가는 기병들을 그리기도 했고 열 겹 포위망을 뚫고 흉노를 무찌른 뒤 백마를 타고 눈을 밟으며 돌아오는 장군의 노래도 불렀다. 그대로 웰메이드 사 극의 한 장면 같고 소설의 시놉시스 같다.
16세기의 조선에 갇혔던 난설헌은 시를 통해 선계에서 수만 년을 보내고 문득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와 베를 짜는 가난한 여인도 되어 보고 궁녀가 되었다가 상인이 되어 강상을 누비기도 했다. 붉은 말고삐를 쥐고 길 떠나는 청년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자아를 무수히 쪼개가며 살았다. 그녀가 그렸던 풍경도 그만큼 다채로웠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녀의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국립발레단이 허난설헌의 시를 무용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서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감우는 난설헌이 드물게 자신의 정서를 직접 표 출한 감성시로서 4수로 이루어졌다. 그중 1수에 난초와 서리, 즉 난설이 나타난다. 몽유광상산은 문자 그대로 선계에 있다는 광상산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지은 것으로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는 바로 그 장면이 묘사된 시다. 난설헌은 이 시에 특별히 서문을 지어 첨부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이태백에 견준다.
그녀의 난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형상화하기에는 기념공원보다는 오히려 오페라나 발레 무대, 혹은 영상 예술이 적합할 수 있다.
이렇듯 난설헌은 20세기 후반부터 다각도로 크게 조명을 받고 있 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난설헌이 다시 태어나 한번 마음껏 훨훨 살아주었으면 생각해 본다.
**각주 정리
1. 신부가 시댁에 가서 일생을 보내는 제도.
2. 임미정, “허난설헌 시자료의 재검토”,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42호, 2021, p.80.
3.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
4. 홍경진, 『허난설헌 시집-10(한국의 한시)』, 평민사, 1987, p.227.
5. 선계의 광한전이라는 궁전에 백옥으로 된 누각을 새로 지었는데 그 대들보에 넣어둘 상량문을 상상해서 쓴 것이다.
6. 4번 책,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p.203.
7. 위의 책, p.211.
8. 난설헌과 동갑이었으나 더 오래 살았던 이수광(李睟光, 1563~ 1629)이 한시를 정리하며 그리 평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