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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가시티 네트워크:한국현대건축서울』展
    168일간의 유럽 순회전시회를 마무리하는 귀국전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배순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건축 해외그룹전인『메가시티 네트워 크: 한국현대건축 서울』展을 2009년 12월 23일 시작하여 2010년 3월 7일까지 개최한다. 이 전시는 2007년 말 프랑크푸르트 독일건축박물관에서 처음 열렸고 현지 건축계와 언론의 호평을 받은 이후 베를린의 독일건축센터, 에스토니아 탈린의 에스토니아건축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로니아건축사협회 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총 168일간의 유럽 순회전을 마쳤다. 이번 전시는 지난 2년 간의 전시를 마무리하는 귀국전으로 그 의미가 색다르다 하겠다.메가시티 = 서울메가시티는 인구 1,000만 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지역을 일컬으며, 현재 한국의 수도서울은 동경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메가시티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메가시티 네트워크’에서는 초고밀도, 고층화가 주도하는 거대 도시의 냉혹한 건축 시장에서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창의적 건축가들의 네크워크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전시의 총괄 기획을 맡은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는“‘메가시티 네트워크’는 한국의 거대도시에 일견 무질서하게 흩어진 건축이 엮어내는 잠재적 연결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의 도시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건축은 그 중간지대에 분산되었다. 그러나 서양이 갖지 못한 거대도시의 역동성과 건축의 이질성은 역설적으로 혁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그리고“일본과 중국의 건축문화에 가려졌던 한국현대건축의 혁신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건축가들이 직면한 문제가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과감히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전시구성 및 주요작품이번 귀국전은 96개의 알루미늄 금속판 위에 16인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 32점의 도면, 사진, 모형을 배치하고, 영상작가 안세권이 포착한 서울의 도시 풍경을 전시장 벽면에 스펙터클하게 투사하였던 유럽전의 배치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참여 건축가들의 최신작과 그들의건축관을보여주는공간을새롭게마련하였다. 전시는 한국 도시의 현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세계 건축의 보편성과 연결시킨 지난 10년 간의 완성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이번에 참여한 건축가 16명은 신진 건축가에서 중견 건축가, 아틀리에 사무소에서 대규모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을 대표한다. 이들은 한옥, 고층 아파트, 교회, 주상복합 건축, 사무소, 공공 건축, 미술관, 도서관, 병원, 경기장, 폐광촌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특별히 이번 귀국전에는“유럽의 눈으로 본 아시아 현대 건축”을 주제로 한 독일 건축박물관장인 피터 슈말의 강연회와“건축가와의 대화”란 시간을 마련해 참여 건축가들이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총 4회에 걸쳐서 진행되는 본 행사에서는 매 회 참여 건축가 3~4명과 건축비평가 1인이 자신들의 작품과 건축관을 소개하고, 도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을 전개할 것이다.
  • 『메가시티 네트워크:한국현대건축서울』展
    168일간의 유럽 순회전시회를 마무리하는 귀국전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배순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건축 해외그룹전인『메가시티 네트워 크: 한국현대건축 서울』展을 2009년 12월 23일 시작하여 2010년 3월 7일까지 개최한다. 이 전시는 2007년 말 프랑크푸르트 독일건축박물관에서 처음 열렸고 현지 건축계와 언론의 호평을 받은 이후 베를린의 독일건축센터, 에스토니아 탈린의 에스토니아건축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로니아건축사협회 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총 168일간의 유럽 순회전을 마쳤다. 이번 전시는 지난 2년 간의 전시를 마무리하는 귀국전으로 그 의미가 색다르다 하겠다.메가시티 = 서울메가시티는 인구 1,000만 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지역을 일컬으며, 현재 한국의 수도서울은 동경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메가시티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메가시티 네트워크’에서는 초고밀도, 고층화가 주도하는 거대 도시의 냉혹한 건축 시장에서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창의적 건축가들의 네크워크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전시의 총괄 기획을 맡은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는“‘메가시티 네트워크’는 한국의 거대도시에 일견 무질서하게 흩어진 건축이 엮어내는 잠재적 연결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의 도시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건축은 그 중간지대에 분산되었다. 그러나 서양이 갖지 못한 거대도시의 역동성과 건축의 이질성은 역설적으로 혁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그리고“일본과 중국의 건축문화에 가려졌던 한국현대건축의 혁신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건축가들이 직면한 문제가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과감히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전시구성 및 주요작품이번 귀국전은 96개의 알루미늄 금속판 위에 16인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 32점의 도면, 사진, 모형을 배치하고, 영상작가 안세권이 포착한 서울의 도시 풍경을 전시장 벽면에 스펙터클하게 투사하였던 유럽전의 배치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참여 건축가들의 최신작과 그들의건축관을보여주는공간을새롭게마련하였다. 전시는 한국 도시의 현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세계 건축의 보편성과 연결시킨 지난 10년 간의 완성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이번에 참여한 건축가 16명은 신진 건축가에서 중견 건축가, 아틀리에 사무소에서 대규모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각 영역을 대표한다. 이들은 한옥, 고층 아파트, 교회, 주상복합 건축, 사무소, 공공 건축, 미술관, 도서관, 병원, 경기장, 폐광촌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특별히 이번 귀국전에는“유럽의 눈으로 본 아시아 현대 건축”을 주제로 한 독일 건축박물관장인 피터 슈말의 강연회와“건축가와의 대화”란 시간을 마련해 참여 건축가들이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총 4회에 걸쳐서 진행되는 본 행사에서는 매 회 참여 건축가 3~4명과 건축비평가 1인이 자신들의 작품과 건축관을 소개하고, 도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을 전개할 것이다.
  • EDAW, 그리고 AECOM
    AECOM으로 새롭게 태어난 70년 전통의 회사 EDAWEDAW의 역사와 AECOM으로의 재탄생조경이라는 개념이 인류와 함께 해 온지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전문 업종으로 분류된 지는 백여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짧은 역사이니만큼 지금의 조경학·조경업이 있을 수 있도록 노력을 해 온 초창기 회사들은 현대 조경학이 태동한 미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회사의 역사나 규모면에서 단연 으뜸인 회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EDAW이다.EDAW는 1939년 현대 조경학의 대부 가렛 에크보가 조경설계가이자 환경계획가인 에드워드 윌리엄스와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의 캘리포니아에 세운 조경설계회사가 그 시초다. 에크보는 좋은 디자인이 사회적 자산을 증진시킨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진정한 디자이너였고 윌리엄스는 오픈 스페이스의 열렬한 신봉자이면서 동시에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해 도시 성장을 엄격히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환경운동가였다. 도시와 자연을 바라보는 이 둘의 시각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조화시켜 개인 정원 설계에서부터 도시의 녹지체계계획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프로젝트에서 그들만의 신념을 잘 녹여내었고 이것이 70년 동안 EDAW가 업계에서 지속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1945년, 조경설계가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학, 예술, 사회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이 융합된 ‘Total Landscape’라는 인식이 강해짐에 따라 회사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도 그 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기존의 에크보, 윌리엄스로 이루어진 양자 파트너십으로는 이 모든 프로젝트를 소화하기에 무리였고, 따라서 로버트 로이스톤이라는 새로운 조경가를 영입해 Eckbo, Royston & Williams라는 3자 파트너십을 구축하였다. 1953년에는 또 다른 조경가인 프란시스 딘이 합류했고, 1958년, 로버트 로이스톤이 떠나면서 다시 3자 파트너십으로 운영되다가 1964년, 조경가 돈 오스틴이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1967년, 회사의 명칭이 Eckbo, Dean, Austin, and Williams로 바뀌었다. 이것이 EDAW의 전신이며 1973년, 드디어 지금까지 약 45년간 불리워지게 된 EDAW로 개명하였다. EDAW로 출범한 이후, 1980, 90년대에 회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 전에도 해외 프로젝트를 한 경험이 다수 있지만 주로 캘리포니아 인근에서 발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면 이 시기에는 미 서부를 넘어서 미국 전역, 유럽, 중동,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아시아 지역으로 활발히 프로젝트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현지에 지사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자연히 회사의 규모는 커졌다. 또한 회사가 점점 성장함에 따라 프로젝트의 성격도 다양해지게 되었다. 개인 정원이나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부터 기업의 캠퍼스나 정부가 발주하는 큰 규모의 도시 설계·계획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2005년 EDAW는 또 한 번 도약한다. AECOM이라는 미국 업계 최대 규모의 건축/엔지니어링 회사에 합류하면서 더 크고 안정된 시스템 안에서 EDAW가 70년간 추구해온 디자인 철학과 지속가능한 친환경 개발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청사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AECOM 또한 기존의 건축/엔지니어링 디자인 분야를 넘어서 환경/지리정보 기술분야, 정부 사업 운용 관리 분야, 교통/토목 분야, 에너지/수자원 분야 그리고 경제 분석/계획 분야 등의 전문 기업을 인수, 합병함으로써 도시 인프라 전반을 총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글로벌 회사로 거듭났다.2009년 10월, EDAW에서 AECOM으로 몇 년간의 전이기간을 거친 후 EDAW는 AECOM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Design+Planning부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70여년간 현대 조경계의 가운데에 서서 디자인 이념과 가치를 전승해 오던 유서 깊은 기업이 이제는 그 이름을 역사에 묻고 AECOM이라는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새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혹자는 디자인 회사가 거대 기업의 시스템에 묻혀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양한 학문 간의 협력, 국제적인 감각과 사고,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지역적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현대의 트렌드 아래에서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일하고 있는 45,000여명의 AECOM 전문가 집단이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그들의 다양한 문화적, 학문적 배경과 그로부터의 경험,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교류와 협업이 분명 좋은 디자인, 더 나은 디자인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찰스 왈드하임, 하버드 GSD
    2009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디자인대학원 조경학과에는 새로운 학과장이 임명되었다. GSD의 교수진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저명한 디자이너도 아닌, 더군다나 건축 교육을 받았으며 건축가로서 실무 경험만을 쌓은 찰스 왈드하임의 조경학과 학과장 임명은 누군가는 혹시 기대는 했을 수 있으나 대부분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AA스쿨에서 모센 모스타파비를 디자인스쿨 전체 학장으로 위촉한데 이어, 조경 실무 경험이 전무한 젊은 이론가인 찰스 왈드하임을 조경학과 학과장으로 모시고 왔다는 사실은 지난 50여년간 전 세계의 건축 관련 학교들 위에 군림해 온 하버드 GSD에 본격적인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시사했다. 찰스 왈드하임은 임명과 함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기존의 교수진을 배제하고 동시에 아니타 베리즈베이타, 피에르 베랑저, 크리스 리드 세 명의 교수를 뽑았다. 유펜 조경학과의 가장 중요한 교수진 중 한 명이었던 아니타를 데리고 온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제대로 지어진 프로젝트가 몇 개 있지도 않은 크리스 리드, 그리고 역시 아직은 두드러진 학문적 업적이 없는 피에르 베랑저를 데리고 왔다는 것도 일종의 파격이었다. 여전히 어느 정도 제임스 코너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 교수진들의 기용은 당연히 무수히 많은 소문을 불러 일으켰다. 혹자는 GSD와 유펜 조경학과의 연대를 점쳤으며, 혹자는 이 개혁을 그동안 최고라고 자부하던 GSD의 오만함에 대한 유펜의 반격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아직 어떠한 변화가 구체적으로 나타날지는 가시화가 되지는 않았으나 단순한 학교 이상의 학교인 GSD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GSD의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에 현재 찰스 왈드하임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GSD의 방향보다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때문에 찰스 왈드하임이라는 인물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대상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지향하는 조경가들의 그룹이 있다기 보다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찰스 왈드하임이라는 인물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따라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찰스 왈드하임이라는 인물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학자로서의 치열함이 엿보이는 그의 건축 관련 연구에 비해 선언문에 불과한 듯한 인상을 주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관련 저술들. 그리고 그가 건축에서 조경으로 관심을 바꾸면서 등장하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배경. 미국의 도시를 말하면서 유럽의 사례를 인용하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들. 찰스 왈드하임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매혹적이기는 하나 결코 그 전체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특정한 곳에 닻을 내리지 않고 부유하는 수수께끼였다. 따라서 <환경과조경>과의 논의를 거쳐 찰스 왈드하임과의 인터뷰를 기획했고, 두 달에 걸친 연락 끝에 힘들게 찰스 왈드하임을 인터뷰할 수가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크게 두 가지 의도로 기획되었다. 세계 조경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학교인 하버드 GSD의 새로운 방향을 예상하는 것이 하나이며, 여전히 국내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직접 이론의 주창자에게서 듣고자 함이 그 둘째였다. 대화는 문자와는 다른 종류의 정보를 선사한다. 예상되는 비판에 대비하고 사고의 허점을 감추기 위해 방어적인 자세로 쓰여지는 논문이나 저술에 비해서 대화는 자유롭다. 문자에 비해 사고의 치열함이나 논리적인 견고성은 부족하나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그 어느 저술에서도 알 수 없었던 생각의 근원을 보기도 한다. 또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생각의 단편들은 때론 극히 개인적인 사례에서 출발을 할 수도 있으며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한 시간이 채 못되는 제한된 시간에서 행해진 이 대화는 일부 유학파들의 허세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던 하버드 GSD라는 학교의 본질, 그리고 지금까지 저술들이나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면이나 핵심을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GSD 조경학과의 새로운 방향 김영민 _ 우선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학과장이 되신 것을 축하 드립니다. 왈드하임 _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김영민 _ 이 인터뷰는 한국의 조경 전문지인 <환경과조경>의 요청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과조경>이 GSD의 학과장을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약간 특별한데요.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학과장 임명과 함께 GSD 조경학과의 근본적인 변화, 혹은 적어도 상당한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GSD의 새로운 방향이 이번 인터뷰의 중요한 질문사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과 관련된 교수님의 명성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조경뿐 아니라 건축이나 도시 분야에서도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인터뷰에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에 관련된 질문 역시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첫 질문은 GSD 조경학과의 새로운 방향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다른 학과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GSD 조경학과에서는 학과장이 과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조경가들이 교수진으로 포진하고 있던 조지 하그리브스 재임 당시 GSD는 참신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디자인에 상당한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학과장인 니얼 커크우드는 기술적인 측면과 생태적인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요. 이제 사람들은 학과의 새로운 방향이 어떠할지, 혹은 학과가 이전의 방향을 얼마나 유지할지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해주실 수 있을까요? 왈드하임 _ 다시 한번 방문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학과장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GSD 조경학과는 이 분야에서 가장 유서 깊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저희 학과는 많은 강점을 지녀왔습니다. 학교 시설, 훌륭한 교수진과 학생들, 열성적인 직원들, 그리고 전 세계에 비교할 수 없는 동문들이 그러한 강점들입니다. 따라서 조경 실무에 초점을 맞추어온 역사적 전통과 세계 최고의 조경가들을 교수진으로 모시는 일은 계속해서 우리의 우선 과제가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저희 과의 전통적인 전문 분야인 오염지 복원과 경관 생태학, 이 두 분야는 뛰어난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점들을 유지할 것입니다. 저는 학과장으로서의 임무를 보다 넓게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스톤 스캇(건축과 학과장)과 학장인 모센 모스타파비는 각자의 목표를 대학교 전체와 저희 디자인대학원에 따라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가 역사적 전통을 반영하는 한편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몇 가지 전략적인 조정이 필요할 때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조정은 무에서 시작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드류 파우스트(하버드대학교 총장)는 하버드 대학이 각 교수진들의 집단이 아니라 대학교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디자인대학원은 각 학과로서 역할을 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학교로서 역할을 하도록 그 목표를 규정해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목표가 고도로 전문화되고, 생태적이며 기술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직제와 디자인으로서의 조경 분야의 세계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GSD와 조경학과에 대한 인식을 더 굳건히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제 학과장 임명은 단지 한 가지 변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니타 베리즈베이타, 피에르 베랑저, 크리스 리드 외 여러 명을 교수진으로 초빙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학과의 전통을 반영하고 숙고할 기회며, 우리는 더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비록 학과가 전통적으로 역사와 이론에서 강점을 보여왔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가들과 이론가들이 학과 교수진으로 있지만 저희의 조경 이론과 역사와 관련된 전반적인 수업 구성을 본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이루리라고 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조경 표현 방법론에 관련된 수업을 본다면 우리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조경을 그려내며 더 나아가 전반적으로 조경을 어떻게 표현하려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분야는 이미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었고 현재 뛰어난 인재들을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분야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야 하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는 전통적으로 영역적 생태학, 즉 과학의 하부 분야로서의 생태학에 많은 초점을 맞추어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리처드 포먼(경관 생태학자)과 다른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문가들을 교수진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생태학적 관심을 유지하면서 저는 앞으로 몇 년 안에 특정한 주제나 디자인 스튜디오가 아니라 학과가 제공하는 전반적인 프로그램에서 흥미로운 생태학적 주제를 보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생태학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범위까지 이 주제를 끌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앞으로 더욱 많은 수업과 관심 사항을 공유하면서 각 프로그램들과 학과 사이에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며, 각 프로그램들을 통틀어 생태학적 관심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디지털 미디어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며, 역사와 이론 분야에도 역시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김영민 _ 다른 학과와의 연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는 어바니즘 혹은 도시적 맥락과 관련하여 경관의 개념을 재구축해왔습니다. 조경학과는 앞으로 건축학과, 그리고 도시계획과와 어떠한 관계 를 맺게 될까요? 왈드하임 _ 늘 그래왔듯이 GSD 내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의 독립된 학교로서 존재해왔고 어떤 때에는 GSD의 한 부분으로 역할도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GSD는 최근 여러 학과와 연계된 수업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과목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주제와 우리가 지금까지 개설한 과목들을 보시면 우리가 경관 생태학, 태양열 건축 환경분야, 그리고 다른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교수진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은 학과라는 틀 안에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이 이러한 지식을 배우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때문에 한편으로 이는 구조적인 질문이 될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다양한 범위의 지식을 배울 수 있도록 수업이나 일정을 조정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학장의 리더십에 따라 최초로 여러 개의 여러 학과를 넘나드는 수업을 개설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지속가능성이며, 하나는 디지털 미디어이고, 하나는 도시와 관련된 수업들입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수업은 이번 학기에 시작되었고 이제 매우 특별한 과목이 되었습니다. 그 수업은 이제 건축학과 1학년과 조경학과 1학년생들의 필수전공 과목입니다. 이는 지금의 학과 구조나 전통, 미래를 바꾸지 않으면서 학교 재원을 기반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제시하는 과목들을 만들어가는 간단한 예가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한 학생들의 많은 관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하게 하버드 대학교 환경센터가 연구자들을 위한 특별한 자원이며 매년 대학교 전체에 환경 관련 수업을 제공하는 포괄적인 카탈로그를 출판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일들이 우리 조경학과 학생들이 통합 교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조경학의 전문적인 지식을 탐구하고 유지해야 하는 한편 그 핵심인 지식들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 두가지 목표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두 가지 일을 함께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현재 지도적인 디자인 학교들의 현위치를 말해줍니다. 저희는 조경의 미래를 키워온 학교의 명성을 유지해야하며 유지할 것입니다.
  • 서울디자인올림픽 2009
    우리 모두가 디자이너다; i-Design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하는 서울디자인올림픽은 서울시가 2010년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개최하는 시민디자인축제이다. 서울디자인올림픽 2009의 주제는 ‘i-Design’. ‘우리 모두가 디자이너’란 뜻이다. 감성의 시대에 디자인으로 도시경쟁력을 상승시킨다는 서울시의 의지가 담겨있다. ‘디자인으로 불황 극복’도 같은 이유에서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서울시 주최로 잠실주경기장과 한강공원, 그리고 서울 도심지 곳곳에 걸쳐 10월 9일부터 21일동안 진행된 ‘서울디자인올림픽 2009’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야깃거리를 쏟아내며 그 성대한 막을 내렸다. “21세기 경쟁력인 디자인은 그것을 알아봐주는 소비자층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디자인올림픽은 시민들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데 목적이 있다”라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회사. “디자인은 어려운 시기에 더욱 발전한다”라는 뉴욕타임즈의 기사(2009년 1월 3일자)를 동시에 떠올려보며, 우리시대 불황극복의 실마리로 떠오르는 ‘디자인’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작년에는 플라스틱 벽, 올해엔 ‘디자인 하늘’ 지난해 잠실종합운동장을 둘러쌌던 거대한 플라스틱 벽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는 잠실주경기장 하늘 속에서 ‘디자인 하늘i-Sky’을 볼 수 있었다. 열린 하늘에 희망을 상징하는 하얀색 천들이 경기장 하늘을 가득 메우며 색다른 볼거리를 연출하였다. 해치 퍼레이드, 엣지 넘치는 해치 모형 한가득 궁궐 입구에서 근엄한 자태를 뽐내는 해치상이 잠실에도 둥지를 틀었다. 풍자와 해학을 입혀서. 플라스틱 페트병으로 형태를 만든 대형 해치를 비롯하여,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공작날개를 등에 달고 있는 해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해치까지 각양각색 해치 모형들이 호돌이광장과 종합운동장 내부에 서서 사람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 신현돈, 조경설계 서안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 개장 후 한 달여가 흘렀다. 개장 초기보다는 많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물결이 광장 곳곳에 흐르고 있고, 각종 매체에도 아직까지 광화문광장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 추가로 설치되는 세종대왕 동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광화문광장의 상징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상징성 때문일까? 오랜 시간 차량에 점거되었다가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온 광화문광장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반가움 못지않게 우려와 안타까움도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플라워카펫과 프로그램분수, 완공 후 추가된 각종 시설물들이 광장다움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물론 플라워카펫이나 프로그램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추가된 가설 시설물에서 그늘을 피해가며 휴식을 취하고, 그럼으로써 지금의 광화문광장을 즐기는 시민들도 상당하다.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만약 지금과 달리 최종 당선안대로 공사가 되어서 완공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연히 완공 이후 그늘과 쉴 곳이 부족하다는 여론에 떠밀려 급하게 설치된 상당수의 그늘막과 벤치도 없었을 테고, 설계자와 소통도 없이 들어선 플라워카펫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부터 광화문까지의 너른 공간에는 지금 설치예정인 동상보다 작은 규모의 세종대왕 동상과 우측으로 흐르는 역사물길만이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광장다움의 멋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늘과 쉴 공간을 요구했던 여론은 오랫동안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가며 공사를 하더니 볼거리 하나 없다고 타박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참 쉽지 않은 문제다. 아이디어공모 당시 선정된 5개 당선작 가운데 조경설계 서안의 안은 가장 광장답게 공간을 비워낸 안이었고, 턴키 당선작 역시 그러했다. 오죽하면 설계자인 신현돈 소장은 이렇게 공간을 비워도 아이디어공모나 턴키에서 당선될 수 있을까, 고심이 컸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비워냈고, 당선이 되었다. 그렇지만, 완공된 모습은 사뭇 다르다. 전체적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비워졌던 곳에 추가된 몇 가지 요소들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뉴스를 통해 미리 선보여졌던 조감도와 다른 모습으로 시민들을 맞이한 광화문광장을 보며 들었던 궁금증과 의아함은, 사실 지난달에 수록된 집담회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주요소인 프로그램분수는 설계 지침에서 꼭 포함시키도록 명문화되어 있던 부분이고, 플라워카펫 등은 전술한 바와 같이 협의 없이 추가되었고, 특정 기간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세종문화회관 계단부터 광장까지를 폭넓게 야외 행사를 위해 쓸 수 있도록 우측에만 계획했던 역사물길이 시공과정에서 좌측까지 추가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집담회 이후 신현돈 소장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지면에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과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경험을 예로 들려준 대목에서, 특히 그러했다. 하여 이번달 조경가 인터뷰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청계천(1공구와 청계광장)에 이어 광화문광장을 설계한 조경설계 서안(주)의 신현돈 소장을 모시고, 광화문광장부터 초기 작품인 승지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남기준_아이디어공모에 이어 턴키까지 두 차례의 경쟁을 거치며 고민도 많았을테고, 특히 광화문광장 일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광화문광장 조성의 가장 큰 의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신현돈_과거 육조거리가 있던 한양의 도시 용량은 인구 10만의 수도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거대도시의 하나로 인구 1,000만이 넘는 메가시티가 되어버렸다. 광화문광장이 육조거리가 있던 터에 들어섰지만, 과거의 장소와는 아무래도 다른 역할과 도시기능(교통, 도시인프라, 상업지구 등)을 수렴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광화문광장이 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분리대라는 비판적 시선도 있는데, 이번에 조성된 광화문광장은 하나의 시발점이자 허브로서 현대판 육조거리의 비종결적Open Ended 설계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번의 광장 조성이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인 사업이 아니라 새로운 원도심 구조의 재편을 촉발하는 발화점이 되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다. 즉 광화문광장을 허브로 해서, 주변의 경복궁, 정부종합청사, 시민열린마당, 미대사관, 문화체육관광부 건물 등이 새로 네트워킹 되고 재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이 일대가 서울다운 경관 브랜드,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브랜드로서 재탄생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대사관 뒤편인 중학천길에 있던 한양 북촌과 백운동천이 흘렀던 효자동 일대의 서촌과 같은 문화적 잠재자원들도 있으니, 그런 큰 틀에서의 도시공간 재편이 체계적으로 추진되기를 바래본다. 남기준_9월호 에디토리얼에도 썼지만, 개인적으로 해치마당에서 점진적으로 올라가면서 바라보이는 스카이라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설계자로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신현돈_이번 광화문광장 설계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차량과 은행나무가 점령하고,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된 국가상징축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서울의 원도심을 과거의 기억으로 환원시키고 서울의 역사자원을 드러내고 경관을 강화시킴으로써 국가 상징축의 회복이라는 이상을 실현코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어느 나라 수도에도 없는 서울만의 독특한 경관요소이자 잠재력이라 할 수 있는, 주산인 북악산과 조산인 북한산, 정궁인 경복궁과 광화문이 만들어내는 웅장하고 서정적이며 서사적인 경관을 점진적으로 연출하여 국가상징 경관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기억을 담아내고 싶었는데, 이를테면 육조거리의 폭은 역사물길로 표현해놓았고, 국가 중심축은 광화문 홍예문의 중심에 장대석 포장으로 되살렸으며, 해태상의 원위치 복원과 월대 표현, 황토현 재해석 등을 시도했다. 또 역사물길은 경복궁의 명당수 개념을 재해석한 것이고, 물의 출수부 디테일은 향원지의 열상진원과 창경궁 통명전의 열천 등에서 선인들의 지혜를 빌어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광화문 사거리를 횡단하는 역사물길도 좋아하는 부분인데, 획일화된 도시에서 작은 제스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검토 단계에서 차량 통행으로 파손될 수 있다며 우려가 많았는데, 과거 한양의 물길을 재해석한 이런 작지만 의미 있는 디테일이 역사 고도古都의 시각적 흔적을 표현함으로써 서울 도심의 경직성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아이디어 현상 때는 세종문화회관 지하 유턴 차도를 도심재생 문화갤러리로 만드는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 ‘광화문 연가(年歌), 시계를 되돌리다’ 展 개최
    600년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광화문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광화문 광장의 600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광화문 연가(年歌), 시계를 되돌리다’ 展을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지난 7월 30일 개막을 시작으로 9월 2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광장조성을 계기로 광화문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시계를 되돌려 광화문의 역사와 문화, 국가와 시민의 밀고 당김,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되돌아 보는 ‘세월의 노래(年歌)’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광화문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구성 및 주요작품 전시는 도입부, 5개 존의 본 전시,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는 시대 흐름을 연결시켜주는 이미지 연표, 각 시대 광화문 일대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는 모형과 항공사진, 그리고 사진, 영상, 실물 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 _ ‘시간역전’에서는 광화문 발굴 지층 이미지를 통해 광화문에 쌓인 600년 세월의 두께를 보여준다. 1존 _ ‘조선의 주작대로’ 육조거리를 거닐다대형 모형을 통해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양정도와 육조거리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2존 _ 광화문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우뚝서니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 1914년 육조거리에는 ‘광화문통’이라는 낯선 이름이 붙었다. 나아가 그 자리에 식민통치의 최초기관이 들어서고 ‘광화문’마저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 앉자 500년 왕도정치를 실현하던 ‘육조거리’는 조선 사람들을 식민통치 하기 위한 ‘광화문통’이 되고 말았다. 2존에서는 대형 모형을 통해 일제강점기 훼손되고 왜곡된 광화문 풍경을 보여주고, 일제식민정부가 그들의 통치를 선전하고 홍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3존 _ 전쟁과 혁명…“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36년 만에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선포되었으며, 1948년에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경성부는 서울시로, 광화문통은 세종로로 다시 태어났다. 3존에서는 이 과정에서 광화문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힘겨루기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역사의 중심무대로서 광화문의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4존 _ ‘화려’와 ‘남루’ 사이에서4ㆍ19 혁명으로 막을 내릴듯 하던 독재와 권위주의는 5ㆍ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그 뒤 다시 20여 년 동안 지속됐다. 4존에서는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 이순신 장군 동상 설치, 세종문화회관 건립 등 경관 변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공론의 장으로서 광화문, 그리고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와 이를 재현한 영상 등이 전시된다. 5존 _ 광화문의 주인은 누구인가88올림픽 이후 조선총독부 철거, 지구의 날, 밀레니엄2000, 월드컵 응원, 촛불시위 등‘국가의 공간’에서 점차 ‘시민의 광장’으로 전이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을 살펴보며, 새로 조성되는 광장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드넓은‘광장’이 되기를 바라본다. 에필로그 _ 광화문 정경(情景), 우리 삶의 기억월간 포토넷(www.mphotonet.com)에서 기획한 사진 전시회다. 1940~1970년대까지 광화문의 모습을 촬영한 현일영, 이형록, 한영수, 한정식, 주명덕, 전민조 등 6명의 사진작가가 본 광화문의 정다운 풍경들을 전시한다.
  • 이수학, 아뜰리에 나무(Lee, Soo Hag․Landscape Architecture Atelier Namoo)
    인문학적 풍경 01, 이국의 땅에서 시인 정끝별이 이야기했듯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국의 땅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이란 생소한 학문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써내려간 그녀의 네 번째 시집인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말미에는 "고고학적 상상력과 시"(성민엽)라는 제목의 해설이 붙어 있다. 문학을 위해 고고학을 공부했다던 그녀는 이제 다시 문학의 자리로 돌아온 듯하지만, 몸은 아직도 이국의 땅을 딛고 있다. 어떤 인터뷰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의 형식을 택하는 것"이라며 "삶을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 가운데 시야말로 가장 강력한 형식"이라고 말했던 그녀의 글에는 적지 않은 울림이 있었고, 때론 결연함이 때론 처연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의 『초벌그림을 그리다』(도서출판 조경, 2006)에 실려있는 “고고학적 풍경 02”란 타이틀이 붙어 있던 ‘전곡선사박물관 국제현상설계’ 출품작을 들여다보며 허수경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터뷰 중에도 허수경이 먼저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녀가 배운 고고학에 대해, 고고학적 상상력에 대해서 언급하자 그제서야 고고학적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터뷰 때 나눈 허수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아 그러고보니 그의 가방에 들어있던 그녀의 첫 번째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가 있었다. 그래도 그날의 주연은 오규원이었다. 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오규원이 최고라고 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계속 허수경이 맴돌았다. "나에게 조경은 한 편의 시와 같다"던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했기에 오규원의 시로부터 풀어가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독일어도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홀연히 독일로 떠나버린 허수경을 생각하며 늘 궁금했듯이, 그에게도 비슷한 궁금증이 생겨서 그랬을까? "갓 배운 언어를 익히면서, 슈퍼마켓에서 산 생필품 꾸러미를 작은 몸으로 끙끙대고 나르면서" 적응한 독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허수경은 어느 인터뷰에서 (독일로 떠났을 때를 돌아보면서) “20대가 저무는 나이였고 그대로 있다간 굳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며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내몰았다”고 했다. 남기준_프랑스 유학 이야기부터 해보고 싶다. 전에 들었거나 전해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입학 통보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무작정 떠났다. 나 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같다. 불어는 원래 잘 하는 편이었나? 이수학_그 어처구니 없음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놀라울 뿐이다. 유학 갈 형편도 아니었고, 실력도, 돈도 없었다. 불어는 유학 떠나기 전 석달 동안 학원 새벽반을 다닌게 전부다. 그 덕분에 프랑스에 도착한 다음 1년 후에야 입학할 수 있었다. 발단은 후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였다. 미국 유학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출국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후배가 그랬다. "선배는 유학 안 가나?" 그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며칠을 몸살을 앓았다. 소금쟁이처럼 쉽게 움직이며 사는 삶에 대해서 늘 이야기했었기에, 가서 굳이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시간을 보내고 올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철저하게 준비해서 떠난 유학이 아니었다. 남기준_그럼 그렇게 불현듯 홀연히 떠난 프랑스에서의 시간들은 만족스러웠나, 아니면 실망스럽고 힘들기만 했나?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는데, 무엇을 배우고 얻었나? 이수학_사실 설계를 배우고 싶어서 떠났는데, 이론만 실컷 배웠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다행이다 싶다. 선생님이 모두 다섯 분이었는데, 건축사회학, 지리학, 유럽의 생태, 정원의 역사, 서양에서 경관이란 무엇인가, 동서양 비교 경관론, 설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조경이론들을 배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선생님 다섯 분이 모두 자기 책이 있었고, 거기에 자신만의 이론이 담겨 있었고, 그 책이 곧 교재이자 수업의 전부였다는 점이다. 사실 그래서 불어 실력이 부족해도 어느 정도 수업을 따라 갈 수 있었다. 또 라쉬스 교수가 작품을 발표하면 다른 교수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아티클을 발표했다. 그 글들을 모아 펴낸 책도 있을 정도인데, 그렇게 이론과 실제가 끊임없이 만나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공고히 다져나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론 시트로엥 공원을 설계했던 질 끌레망처럼 다른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의견을 표명하고 글을 발표했다. 그때 거창하게 이론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런 생각들이 나중에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커져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완전히 무작정 떠난 것은 아니고 한 가지를 가지고 갔다. 좀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로 창덕궁 후원이었다. 학교 다닐 때 한번 갔었고, 유학 가기 바로 전에 친구를 따라서 한번 더 가볼 수 있었는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정말 너무 좋았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여러 책들을 뒤적거렸는데, 기존의 정원 관련 책에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없었다. 나중엔 아트란띠끄 정원만을 소재로 논문을 완성했지만, 처음엔 창덕궁 후원과의 비교 연구를 주제로 생각했었기에, 프랑스에 있는 동안 끝까지 놓지 않은 연구 주제가 결국 창덕궁 후원이 되었다. 공부를 하는 동안 파리에 있던 한국문화원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그곳엔 영인본 홍재전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필요로 했던 기본 자료들이 모두 있었다. 결국 창덕궁 후원에 대한 공부가 조선의 역사로까지 확장되었고, 라쉬스 교수를 비롯 여러 선생님들의 이론적인 안목이 어느새 내게로 전해졌는지, 나중엔 작지만 나름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결과도 내놓을 수 있었다(한국조경학회지에 수록된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 기존의 책에 원하는 대답이 없다고 해서 과연 내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새로운 창덕궁 후원과 만나게 된 셈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 큰 장점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적 거리가 어떤 사실을 굉장히 객관화시켜준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프랑스에 있는 동안 '한국은 일본과 중국과는 무엇이 다르냐?' 우리는 공자나 맹자, 노자의 사상을 마치 우리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건 중국 것이 아니냐'면서, 한국의 사상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런가하면 산수화에 대해서도 중국과 일본, 한국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했다. 그런 상황들 덕분에 프랑스에 있으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우리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들이 이어졌고, 탁월한 식견이 돋보이는 김윤식의 글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옥성 안-바롱의 한국 산수화에 대한 글에서 몇 가지 단서들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정리된 것들이 발표한 논문 이외에 더 있는데, 게으름 때문에 모두 정리하진 못했다. 다시 해야되는데 이러고 있다.
  • 안계동, 동심원조경
    시작은 용산으로 당연히 서울숲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했었다. 인터뷰 질문지의 작성이 거의 끝나가던 때여서, 출력만 해놓고 읽지 못한 라펜트 블로그의 포스트 하나만 정독한 후에 한두 가지 질문을 추가하거나 문장만 가다듬으면 ‘이제 질문지는 쫑이다’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녁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저녁 약속 자리에서 우연히 나온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이하 용산 공모) 이야기는 첫 질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자리를 함께 했던 이는, 타분야 전문가나 일반인, 학생들은 많이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조경설계사무소에서는 용산 공모에 많이들 참여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디어 공모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예전에 그야말로 단발적인 홍보성 이벤트에 그치고 말았던 아이디어 공모 사례들도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본 게임을 위해 자신의 히든 카드를 숨겨두고 싶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억원이란 상금은 학생들이 열광할만한 금액이란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용산처럼 사회적 관심이 크고 뜨겁고 무거운 사이트라면, 제대로 준비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과 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야 할테니 말이다. 지난달 에디토리얼을 ‘조경인들에게 주어진 큰 질문인 용산공원의 미래에 대해 조경가들의 지혜로운 대답이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마무리했었는데, 너무 순진했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번달의 인터뷰이는 용산 공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래서 달라진 첫 질문은 아래와 같다. 참, 이번호 인터뷰의 주인공인 (주)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동심원)의 안계동 소장은 올 상반기에 개최된 잠실 한강공원 설계공모(동심원+경원대 최정권 교수+서울대 정욱주 교수), 동탄2 신도시 커뮤니티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현상설계공모(삼우종합건축+디에이그룹+동심원)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남기준 _ 인터뷰를 위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월간 <GQ> 잡지에 “The Seoul Builders"라는 타이틀 아래 서울숲 설계자인 안소장님을 인터뷰한 꼭지였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었다. “용산은 서울숲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다. 서울의 실제적인 심장부다. 서울의 도시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용산의 부지를 전부 공원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반대다. 용산공원이야말로 자연 위주의 공원 보다는 도시에 활력을 주는 일상적인 공간이 돼야 한다.” 환경단체도 그렇고, 몇몇 건축가나 도시 전문가들은 용산공원을 최대한 생태적인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거나, 아예 극단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두자는 의견까지 제안한 바 있는데, 그것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의견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이번 용산 공모에 참여할 계획이 있는지, 또 그 인터뷰 때 이야기했던 생각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궁금하다. 안계동 _ 우선, 용산 공모에는 참여할 계획이다. 상금이 큰 것도 아니고 후속설계에 대한 메리트도 없어서 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지만, 일종의 책임감이랄까? 이번 아이디어 공모전은 조경분야 교수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경 전문가들이 이 중요한 땅의 미래에 관여하고 있는데, 정작 조경설계분야에서 외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성격의 땅이 아니라서, 이걸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프로젝트 하나를 포기해야겠지만, 원래부터 갖고 있던 몇 가지 생각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용산은 그동안 타의에 의해 막혀 있어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고, 도시의 혈관이 제대로 흘러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용산 미군기지는 서울의 도시 구조가 현대적으로 짜여지기 전부터 그 땅에 들어서서, 주변부의 원활한 연결을 가로막았고 토지이용도 왜곡되었다. 단순히 담과 막사를 헐어내고 모두 공원으로 만드는게 능사가 아니다. 서울 전체를 들여다보는 거시적인 도시계획을 통해 도로망을 짜고, 토지용도를 재정리하고 필요한 만큼만 공원을 만드는 것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아무튼 디테일한 그림을 그리기 보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강하고 핵심적인 아이디어 몇 가지를 바탕으로 출품안을 짜볼 생각이다. 서울숲 옆 동심원 남기준 _ 일부러 서울숲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울연못 부근을 좀 둘러보고 천천히 걸어왔는데, 참 행복한 동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펴보니 동심원이 서울숲과 바로 맞닿은 이곳에 사옥을 짓고 입주한 때가 2002년 10월 25일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옆의 부지 개발계획이 문화관광타운에서 공원으로 바뀐 것이 2003년 1월이다. 서울숲 설계공모가 나왔을 때, “동심원은 현장 답사를 참 쉽게 많이도 했겠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대표작 바로 옆에 사옥이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일 것 같다. 완공된 지도 5년여가 지나가는데, 서울숲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다. 안계동 _ 나는 설계자와 땅과의 만남에는 어떤 운명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래서 새로운 땅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충실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일을 가리거나 마다하진 않는 편이지만, 막상 일을 맡게 되면 약간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다. 솔직히 “아, 하던 일이나 잘 할껄, 괜히 또 이 일을 맡는다고 했네” 싶을 때도 많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을 만진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우든, 있던 것을 없애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땅과의 운명적 만남 같을 것을 믿는 편인데, 서울숲은 정말 과분한 만남이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능력 있는 분들이 했다면 이 땅이 더 좋아졌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서, 무조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 그나마 내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대표적으로 주변 부지여건의 정리를 꼽을 수 있다. 설계에 들어가 보니, 이 땅은 용도가 다른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도로와 관련된 도시계획사업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또 부지 중 일부를 떼어내서 2만여평의 상업용지를 분할해야 했고, 정수장 개방 문제도 처리해야 했다. 조경가로서 주어진 땅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큰 요지의 땅을, 주변을 포함해서 모두 정리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주변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기존에 계획되어있던 40미터 도로를 25미터로 축소할 것을 제안했고, 그 도로 중에서 200미터 정도는 복개해서 터널화를 유도했다. 조각난 땅을 조금이나마 밀접하고 원활하게 접속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외곽 강변북로의 연결도로 선형을 조정하여 정했고, 떨어져 있던 유수지와 서울숲을 연결하기 위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수중학교의 일부 토지를 공원부지와 교환하여 30미터 폭의 연결녹지를 확보했다. 원래 설계공모 때의 제안사항이기도 했지만, 막상 실시설계 단계에서 추진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몇 차례 서울시 교육청과의 협의를 통해 중학교 건물의 두 칸을 잘라내고 직사각형이던 학교 부지를 정사각형으로 모양으로 바꾸어냈다. 또 정수장도 남북을 가로 막고 있어서, 분할을 해서 중앙부를 개방해야 공원이 제대로 기능하리란 판단이 들었다. 그런데 정수장은 1급 보안시설이라 학교보다 설득하기가 더 어려웠다. 결국 부시장님을 직접 현장에 모셔서 정수장 분할의 필요성을 설명 드린 후에 추진할 수 있었다. 대신 전자동 리모컨 시스템을 설치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양쪽 정수장을 오갈 수 있도록 해주어, 정수장 직원들의 불편함을 최소화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땅을 다루는 조경가로서, 수동적으로 제한된 부지 내부만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큰 시야에서 땅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주어진 시간의 반 정도는 각종 관련 협의, 공청회, 자문회의, 보고, 시민행사 지원 등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더 밤을 새워서라도 지금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인 공간을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 우연한 풍경은 없다(7): 신내동의 한평공원, 의식과 절차가 있었던 풍경
    첫 번째 사례의 사진 두 장은 2008년 만들어진 영구임대아파트단지 신내 10단지에 있는 한평공원의 조성 전과 후의 모습이다. 이곳은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작은 쉼터임에도 세력다툼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술 마시는 남자들이 자리를 점령하기도 하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차지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밝은 공간도 아니어서, 술 마시는 곳, 그러다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었다.공사가 시작되자 주민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술 먹기 더 좋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먹는 통에 다른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곳을 예쁘게 만들어놓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아이들과 주민들이 참여해서 퍼골라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했고 나무도 함께 심었다. 밝은 활동을 쌓아가기 위함이었다. 이곳은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하는 밝은 공간이라는 인식. 작은 개장식에는 돼지머리 대신 돼지저금통을 놓고 잔칫상을 벌였다. 동네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장비와 관우, 조자룡도 모두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평공원에서 술은 사라졌다. 밝은 공간이 되었다. 두번째 사례. 고양시 시청의 한 회의실, 고양시 경관계획 서포터즈(supporters)와 연구자들이 함께한 워크숍의 시작 직후와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의 장면이다.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연구소는 고양시 경관계획 연구를 수행하면서 서포터즈를 모집했다. 일반적인 설문조사에서 벗어나 다른 조사활동을 해보자는 의도였다. 인터넷 한 사이트에 공고문을 내었고,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해 할 말이 있는 몇몇 주민들이 신청을 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평일 오후에 열린 워크숍에도 기꺼이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처음 시작 할 때의 어색함이란. 이미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라, 서로 떨어져 앉아서는 자신의 손톱에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표한다던가, 핸드폰을 점검했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에서 어떤 이가 ‘오늘 모인 이들이 모두 내 애인 같다’라고 표현할 만큼 몇 시간 만에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조를 짜고, 조의 이름을 만들고, 조장을 정하고, 좀 남세스럽지만 조마다 구호도 만들고 외치면서 이들은 잠시나마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마다 고양시 지도를 앞에 두고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신이 속한 조를 위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의견을 내놓고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의식과 절차가 있었다 위의 두 사례의 풍경과 풍경 사이에는 공동의 리듬을 찾기 위한 의식이, 절차가 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주변에 사는 이들을 불러, 지나는 이들을 붙들어 그림을 그리는 의식, 나무를 심는 의식, 돼지저금통이라도 앞에 두고 막걸리를 따르는 의식을 치렀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쑥스럽지만 서로 인사를 하고 조의 이름을 짓고 구호를 외치는 의식을 거쳤다. 전시용이나 관료적 과정이 아니라 이곳이 밝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로간의 어색함을 떨치고 허심탄회하게 의사소통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의식. 그러한 의식은 그 공간에 대해, 그러한 시간에 대해 공동체적 의미를, 의도치 않은 애정을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