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2019 조경비평상 심사평 조경비평 봄 심사
    생각을 말이나 글로 잘 표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머릿속 생각은 도서관의 서가처럼 항상 잘 정리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성급한 말로 튀어나오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글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의 문제이며 통제가 가능하지만 말이나 글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순간, 듣고 읽는 이와의 ‘관계’가 성립된다. 사람의 말과 글은 소통을 전제로 하기에 태생적으로 고도의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 때때로 말이나 글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갖는 고민이다. 요즘같이 IT 기술을 바탕으로 한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삶 속 깊이 침투한 상황에서는, 말과 글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져 당황하기도 한다. 글이 말보다 앞서는 시대, 말이 문장으로 정제되지 않고 즉흥적으로 문자화되는 시대를 살면서, 좋은 글과 좋은 문장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느끼게 된다. 올해의 조경비평상 공모에는 세 명이 응모했고, 예년과 마찬가지로 조경비평 봄의 회원들이 심사를 맡았다. ‘비평’은 일상의 글쓰기와 다르고, 더욱이 ‘조경’이라는 복잡하고 모호한 대상을 비평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라서, ‘조경비평’은 어려운 글쓰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나의 대상을 보더라도 설계 작업과 설계자, 그것이 구현되는 장소, 장소와 관련된 사회적 맥락,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생각,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행정 행위 등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로 인해 어떤 측면을 겨냥해 가치 판단을 논해야 할지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난감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글의 완성도나 공모의 수상 여부를 논하기 전에,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조경비평상에 응모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80호(2019년 12월호) 수록본 일부
  • [이달의 질문]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
    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한 독서 모임에서 ‘번역’의 문제를 다룬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 질문 역시 어쩌면 번역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경(造景)’이라는 한자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번역되어 쓰였을까. 요즘 ‘정원’, ‘가드닝’이 뜨면서 조경이라는 말과 뒤섞여 사용되다보니 그 뜻이 더욱 모호해진 것이 사실이다. 덩달아 ‘조경가’, ‘조경 설계’ 같은 말들로도 의미 전달이 잘 안된다.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하다. 명함이나 프로필에 ‘조경건축가’라고 쓴 적이 있다. 딱히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은 좀 뜸해졌다. 번역의 문제인지 용례의 문제인지, 아무튼 이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영국의 사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조경협회와 상응하는 영국의 단체 이름은 ‘Landscape Institute’다. 영국에서 학과 단위로 독립된 조경학과는 유일하게 셰필드 대학(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학과 이름은 ‘Department of Landscape’다. 이 같은 전문가 단체와 대표 교육 기관 모두 우리의 조경협회, 조경학과와 동일한 의미와범위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우리 업역을 명확하게”, “학과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이 쉽게 인지하도록” 등의 이유로 ‘Architecture’를 더한 ‘Landscape Architecture Institute’,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결과는 협회 회원과 학과 교우회의 압도적 반대로 무산. 왜일까? “결국 우리 업역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학제 간 교육이 필요한 우리 학생들에게 ‘조경’만을 가르치라는 말인가?” 등이 다수 의견이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는 적어도 그들 생각에는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 정해준 계명대학교 교수 조경의 이름이 부끄럽다면 그것은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비루했기 때문일 것이며, 조경의 이름이 자랑스럽다면 그것 역시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찬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의 이름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고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조경이 스스로의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그 이름은 내가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부끄러운 일들과 자랑스러운 일들을 담기에는 충분했다. 김영민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 조용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조경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누군가 그런 것도 박사가 있냐고 되묻길래 당황한 기억이 있다. 1970년대 ‘Landscape Architecture’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조경’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고, 이 용어가 더 넓은 범위의 토지, 도시, 경관 디자인을 포함하지는 않으니 완벽한 번역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고 푸념하기엔 한국 조경이 태동한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 우리 분야의 전문성을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건 아닐까. 조경이란 말이 현재 근사하게 통용되고 있다면, 과연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명준 기술사사무소 이수 연구소장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꾸밀 수 있다면 충분해지지 않을까. 조경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남수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팀장 유물의 형태를 가리키는 말 중에 ‘완(盌)’이란 단어가 있다. 그릇이나 대접, 주발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가장 많이 통용된다. ‘조경(造景)’은 그 의미를 담기에 모자란 느낌이지만 너무 많이 사용되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김충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우리가 아는 ‘조경’은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이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이름을 쓰지 않는 조경 분야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정원 디자이너’,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 ‘랜드스케이프 건축가’, ‘경관 건축가’, ‘경관 계획가’, ‘농촌 계획가’, ‘가로 시설 디자이너’, ‘어린이 놀이 전문가’ 등이다. ‘공원 전문가’와 ‘공원 디자이너’는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 ‘조경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름은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이름 ‘조경’이, 그가 하는일을 한정하고 제한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경’과 우리가 아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아는 ‘조경’이 같아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 우리가 ‘공책’을 ‘연필’로 부르자고 설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최정민 순천대학교 교수 조경이란 단어가 쓰인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의미는 건설의 조경, 훼손된 경관을 꾸미는 분야로 특정 지어졌다. 조경이란 이름으로 생태 복원에 참여하려 하면 생물, 생태, 환경 공학 분야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조경은 생태계 기본 원리에 따르기보다 공간을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에, 환경 복원 분야에 조경이란 이름으로 참여하면 전문성을 내세우기 곤란하다. 근래 조경이라는 이름에서는 과잉성도 엿보인다. 아파트 조경을 비롯한 대규모 조경 공사에서 시공 초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과도한 식재를 한다는 비판이 들린다. 과잉 섭취로 인한 병으로도 사람이 죽는 시대다. 지나치게 높은 밀도로 오히려 경관을 해치고 식물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홍태식 한국생태복원협회 회장 명명이란 행위는 단순하지 않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저 있기만 할 뿐 인지되지 않았던 대상을 수많은 대상으로부터 선택하고 분리하여 특정한 존재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상에 이름을 붙일 때는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파악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적확한 개념어를 찾는 일이 이어져야만 한다. ‘조경’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이 용어가 지칭하는 행위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인식은 본래부터 ‘조경’이란 용어가 실재하는 행위를 온전히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난 40여 년간 조경이란 분야가 다루는 영역이 확장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건 ‘조경’이란 이름이 적확한 명칭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이름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적절한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경’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몇 년 후면 한국 조경도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진환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과장 유튜브를 실행한다. ‘조경’을 검색하고, 조회순 정렬을 클릭한다. 가장 위에 위치한 영상의 제목은 “최상의 조경! 강원도 횡성군 별장 전원주택 연수원 매매”. 조회수는 무려 33만이다. 영상은 약 6분 정도 진행되며, 말없이 5,000평 고급 별장의 외부 공간을 살핀다. 뒤로 돌아가 스크롤을 내린다. “래미안의 클래스를 경험하라”는 제목으로 아파트 조경을 홍보하는 여섯 번째 영상과 미국의 건축 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Sarah Williams Goldhagen)의 책『공간 혁명』을 소개하는 여덟 번째 영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상 제목에 ‘주택’과 ‘조경’이 함께 놓인다. 전공자가 기대하는 영상은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찾기 어려운 걸 보니, 유튜브 세계와 전공자의 머릿속 간극은 꽤 넓어 보인다. 이제 질문에 대답해보자. ‘조경’은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하지 않은 이름이다. 유튜브 안에서도. 이형관 서울시 동대문구
  • [편집자의 서재] 82년생 김지영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대에 때아닌 금서라도 나타난 것일까? 걸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 소녀시대의 수영, 배우 서지혜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개인 SNS 계정이 악성 댓글로 도배되며 갖은 모욕적 언사에 시달렸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 정유미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들의 ‘죄목’은 공인으로서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낸 것이지만, 같은 책에 대한 감상을 공식적으로 밝힌 남자 국회의원과 대통령, 보이그룹 멤버를향해서는 이 같은 비난적 여론이 가시화되지 않았다. 책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공감’과 ‘혐오’ 양극단을 달리며 갈수록 합의점에서 멀어졌다. ‘내 이야기다’, ‘엄마 생각이 난다’는 의견이 속속들이 나오는 가운데 ‘여친이 ‘82년생 김지영’ 보자는데 헤어져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웹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청와대 게시판에는 소설의 영화화를 반대하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만 명이 넘게 봤다고 해도 좀처럼 책을 읽을 의욕은 나지 않았다. 유행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심보도 한몫 했지만, 극성 페미니스트라고 낙인찍히는 것도 골치 아프고, 피해주의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혼의 1992년생에게 경력 단절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뻔한 불행을 예고하는 점괘나 다름없었다. 출간부터 계속된 논란이 영화 개봉으로 정점을 찍으며 누그러질 즈음, 안 봐도 본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뒤늦게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며 곳곳에 놓인 차별의 지점에 멈춰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고 때론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복잡해진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논란이 이해되면서도 책에 대한 공감 자체가 공격당하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설 도입부의 시점은 2015년 가을, 두 살짜리 아이를 둔 서른 네 살의 김지영이 다른 영혼이 빙의된 듯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할 때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 원인을 찾으려는 듯 지영이 태어난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지영의 문제는 비가시적이고 과소평가되기 쉬운 마음의 질병이다. 작가는 한 사람의 고통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기엔 효용성이 떨어지는 노선을 택한다. 중간중간 남아 선호 사상,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 등이 등장하나 지영에게 ‘결정적으로 위협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물 설정도 극적이지 않다. 주인공은 크게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 원하는 대학에 가고 (회사의 장기 프로젝트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기 전까지는) 직장에서도 인정받는다. 막장 드라마에 나올 법한 못된 시어머니도 없고, 남편은 자상하다. 여성이라 더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치명적인 사건’을 배제한 채 일상의 흐릿한 위기를 다룬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 소설이 더 많은 이에게 공감 혹은 외면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조남주 작가는 10년 동안 방송 작가로 일하다 육아로 일을 그만둔 시기에 이 소설을 썼다. 그가 그린 미세한 차별과 폭력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인데,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라 여겨온 것들이다. 어린 지영을 괴롭히는 남자애를 두고 “널 좋아해서 그렇다”며 다독이는 선생님,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며 지영의 언니에게 교대 진학을 권하는 부모님, 집안일이든 육아든 “열심히 도와주겠다”며 지영의 퇴사를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 예다. 특정 성별에 대한 비난이 담겼다는 지적은 소설의 본질을 흐릴 뿐이다.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지영이 임신이 잘 되도록 약 한 재 지어주라는 고모, 지하철에서 임신한 지영을 보고 불쾌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젊은 여자처럼 지영의 고충에 가담하는 인물은 남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책 속 인물과 상황은 고착화된 관습이나 혐오적 시선, 근본적인 구조 문제를 인격화한 문학적 장치에 가깝다. 공공연히 알려졌다시피 소설의 결말은 무력하다. 마지막 장에 서는 앞선 이야기가 지영과 그의 남편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한 내용임이 드러난다. 의사는 지영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안과 전문의였지만 일을 그만둔 채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고, 지영을 이해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다. 곧바로 그는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라며,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자포자기한 심정일까? 그보다는 우회적 화법을 통해 ‘(무엇이 차별인지) 알지만 실은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읽힌다. 작가는 어쩌면 이것을 말하기 위해 김지영의 삶을 지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 [CODA] 쉽게 미워하지 않기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올 때면 많은 이들을 미워하며 산다.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스치는 사람들이 애꿎은 표적이다. 내 어깨를 핸드폰 거치대처럼 쓰는 사람,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는 사람. 평소라면 이해할 법한 일에도 화가 치민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미워할 이유를 찾다 보면 금세 밤이다. 잠들기 직전에야 내 모습이 부끄러워 귓가가 홧홧해진다. 지친 몸은 자꾸 마음을 쪼그라트린다. 보기 싫게 찌그러진 마음의 날은 엉뚱하게도 지하철이나 길거리의 사람들을 향하곤 한다. 갖가지 까닭을 붙여 내가 쉽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린 딸을 둔 친구가 내게 건넨 고백이 떠올랐다. 작은 동물이 면 사족을 못 쓰던 친구는 한동한 강아지를 미워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와 공원에서 쉬다 마주친 행인이 마음을 온통 들쑤셔 놓은 탓이었다. 낯선 행인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친구의 딸을 가리키며 신발을 신고 벤치에 오른 몰상식함을 지적했다. 대꾸할 틈도 없이 저만치 멀어진 그를 공원 입구 부근에서 다시 만났다. 함께 산책하던 강아지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웃고 있었다. 땅 한 번 디딘 적 없어 깨끗한 딸의 신발과 벤치와 흙바닥을 신나게 오가는 강아지의 발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강아지가 그렇게 미워졌다고 했다. 작은 동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미움이 커졌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힘없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어린이나 강아지처럼 제 의견을 낼 수 없고 대항할 능력도 없는 경우, 미움은 빠른 속도로 몸집을 키운다. 최근 SNS를 소란스럽게 만든 ‘노키즈관’ 논란 역시 이러한 미움의 연장선으로 느껴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를 본 관객 중 일부가 아이들의 함성이나 떠드는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싶다며 노키즈관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어린이를 주요 타깃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서 어린이를 쫓아내려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이상하다. 우리는 꽤나 자주 영화 상영 중 전화를 받거나, 옆 사람과 떠들거나, 의자를 발로 차며 스크린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난다. 불쾌하지만 참고 넘어가 거나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게 일반적이다. 핸드폰을 끄지 않은 사람을 상영관에 들이지 않거나, 특정 행동으로 세 번 이상 경고를 받을 시 퇴장시키는 방법 등 극단적인 타개책이 쉽게 대세로 떠오르지는 않는다.카페나 음식점 역시 ‘진상 고객 입장 불가’ 안내문보다는 ‘노키즈존’ 표식을 더 쉽게 내건다. 노키즈존은 흡연 금지, 주차 금지처럼 구체적 행위를 제재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라는 특정 집단을 배제한다. 키즈카페, 키즈관 등 어린이 전용 공간이 생겼지만, 이는 아이와 양육자가 더욱더 따가운 눈총을 받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왜 키즈카페나 키즈관에 가지 않고 이곳에 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느냐고 눈치 주기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다. 이렇듯 공간의 분리는 어렵지 않게 단절로 이어진다. 단절은 무언가를 체험하고 느끼고 배울 기회를 손 쉽게 앗아간다. 아이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배울 기회를 몰수당한다. 수많은 조경 프로젝트가 섬처럼 놓인 공간을 주변과 연결하려 애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고립된 공간은 오래지 않아 낙후한다. 공간도 그러한데 사람은 당연하다. 아이는 혼자 다닐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노키즈존은 자연스럽게 아이와 양육자를 함께 사회 밖으로 격리한다. 물론 미성숙한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고 뛰어다니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무조건 공간 밖으로 밀어내는 건 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한때 논쟁거리였던 벤치의 모양으로 이어졌다. 노숙자가 누워 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좌판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팔걸이를 설치한 벤치 말이다. 자연스럽게 아이가 앉을 수 없는 높이의 의자가 공원에 줄지어 선 모습을 상상했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라 생각했다가 왠지 실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닌 것 같아 무서워졌다. 쉽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 대신 진짜 미워해야 할 대상을 찾다보니 눈에 거슬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기저귀 갈 곳 없는 화장실, 외진 곳에 숨겨 놓은 것처럼 배치한 수유실, 유모차를 끌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보행로. 미워해야 할 대상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도 쉽게 미워하기보다 불편하게 미워하는 일에 지치지 않고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 [COMPANY] 디자인파크개발 가치 있는 공간과 생활을 디자인하는 라이프 파트너
    디자인파크개발은 2001년 창립된 조경 시설 전문 기업으로, 국내에 야외 운동 기구를 처음 선보인 곳이다. 웰빙이 트렌드로 떠오르던 시기 전국 공원에 야외 운동 기구를 보급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새로운 길을 모색해 온 디자인파크개발이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약을 꿈꾸며 코스닥 상장을 추진한다. 2022년을 목표로 한화투자금융과 대표 주관사 계약을 체결하고, 예비 실사를 진행해 상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예비 실사 권고 사항에 따라 기업을 개선하면 2~3년 내 충분히 상장 요건을 갖출 것으로 판단됐다. 김요섭 회장(디자인파크개발)은 “일반적 중소기업은 창업자에 의해 좌우된다. 하지만 상장을 하게 되면 개인이 아닌 주주들이 회사의 주인이 된다. 기업 공개는 도덕적으로 투명한 회사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어주고, 유능한 인재들이 유입되어 회사의 성장 가능성을 보다 높일 수 있다”며 상장 추진의 배경을 설명했다. 호황과 불황을 모두 겪으며 성장한 디자인파크개발은 어려운 시기를 새로운 아이템 발굴의 기회로 삼아왔다. 꾸준한 기술 개발과 신성장 동력 찾기에 매진해 조경 시설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서 입지를 공고히 다졌고, 디자인파크개발만의 브랜드를 선보이며 공간과 생활을 디자인하는 라이프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물놀이 시설과 놀이터를 결합한 놀이 공간 ‘원더풀(1thePool)’, 어린이용 놀이 공간 ‘유플레이(Uplay)’, 건강 증진 운동 기구 ‘웰핏(WellFit)', 여가·레저 시설 ‘캠포레스트(Camp4rest)’, 테마 놀이 시설 ‘판타키즈(Fantakids)’ 등 5개 브랜드의 다채로운 제품을 통해 사람들의 건강, 즐거움, 행복을 추구하는 기업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디자인파크개발의 시설은 기구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신체 활동을 극대화하고, 특별한 체험의 기회를 확장한다. 감각의 변화를 통해 일상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다. 또한 GPS 기반의 모바일 웹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어느 지역에 기구 몇 개소가 설치되어 있는지 시시때때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빠른 현황 조사와 유지·관리를 가능케 하는 기틀이 되어 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수상의 영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 회장은 지난 10월 국민 여가 생활 확산에 기여하고, 65개 특허권을 바탕으로 수출 시장을 개척하는 등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해 ‘2019 중소기업융합대전’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10년 ‘제6회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이후 두 번째 수상이다. 김 회장은 경영자는 항상 “변신에 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맞는 전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닐 수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업이 우선 추구해야 하는 일은 잘 생존하는 것이다. 그다음 생존을 넘어 고객과 같이 호흡하고 업계에 대한 고민을 풀어가야 한다”며 생존, 고객, 변화라는 세 키워드를 강조했다. 최근에는 변화와 혁신의 일환으로 필라테스에 최적화된 복합 기구와 휴게 시설 브랜드를 론칭했다. 기존 소재의 틀을 뛰어넘는 차세대 휴게 시설을 실험해보려는 의도다. 철재, 석재, 목재, 스테인리스뿐 아니라 새로운 소재를 과감하게 도입해 현대적 감각의 시설을 선보이고자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도시와 더불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휴게 시설의 소재와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 착안한 역발상이다. 디자인파크개발이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는 여가·레저 시설이다. 2015년 출시한 ‘모던이글루’가 꾸준히 판매되며 자연스럽게 관심이 집중됐다. 피크닉테이블, 매시벤치, 스윙벤치 등을 꾸준히 론칭하기도 했다. 김요섭 회장은 “국민 여가 생활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여가·레저 시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웰빙 라이프를 추구하는 디자인파크개발의 기업 가치와 워라밸을 중시하는 시대 흐름이 맞아떨어져 차별화된 기술과전략으로 다양한 여가·레저 시설을 선보이고자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품 생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간 운영에도 나섰다. 디자인파크개발은 2020년 상반기 강화도에 글램핑장 조성 인허가를 받아 2021년 봄 개장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카라반, 글램핑하우스, 수영장, 스파 시설을 갖추고 디자인파크개발이 생산한 모든 제품을 체험할 수 있는 타운을 만들 계획이다. 디자인파크개발 직영 글램핑장의 차별점은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직접 운영에 참여한다는 데 있다. 시설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곧바로 대처할 수 있고, 파손이나 노후화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용객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체험이 구매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김 회장은 마지막으로 산업계는 시대 흐름과 고객의 요구사항을 읽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스스로 생존 모델을 창출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언제나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업역을넘나드는 공간 창출 능력도 필요하다. 조경은 유연성을 갖춘 학문이자 산업이다. 마음가짐에 따라 길은 어디로든 열린다.” WEB. designpark.or.kr TEL. 02-2665-6006
  • [COMPANY] 리비오에코디자인연구소 기능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디자인 기업
    녹화율은 잔디블록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다. 도시개발 및 정비사업에서 생태면적률 가중치가 녹화율 50%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체가 녹화율 50%의 잔디블록을 생산하고 있다. 리비오에코디자인연구소(이하 리비오연구소)는 작년 12월 녹화율 67%의 잔디블록 ‘리비오그린Liviogreen’을 출시했다. 녹화율 50% 규격에 집중했던 블록 업계가 술렁였다. 일각에서는 ‘어떻게 67%가 가능한지’에 관심을 가졌고, 블록 강도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한성필 소장(리비오연구소)은 “잔디블록 기술을 연구해본 사람에게도 녹화율 67%은 놀라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블록의 강도는 국내 품질 기준을 상회한다”고 말했다. 리비오그린에 대한 시장 반응은 고무적이었으며, 특히 단독 주택의 주차장과 정원에 대한 설치 문의가 많았다. 시공 사례가 늘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자 건축물 주변, 캠퍼스 광장, 공동 주택, 보행로 등 다양한 오픈스페이스에 리비오그린을 설치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리비오연구소는 34년간 조경 시공 현장을 누벼온 김창회 대표와 보도블록 업체를 운영하며 다양한 블록 아이템을 개발해온 한성필 소장이 설립한 기업이다. 김 대표는 제조와 운영을, 한 소장은 제품 개발과 홍보를 담당한다. 김 대표의 풍부한 시공 경험과 한 소장의 기술 개발 노하우가 합쳐져 설립 1년 만에 잔디블록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생태 시스템에 적합한 친환경 제품의 국내 보급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잔디블록 기능이 ‘블록’에 방점을 찍었다면, 리비오그린은 ‘잔디 생육’까지 아우른다”는 김 대표의 설명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당수의 잔디블록은 ‘인증’에 품질 기준을 맞춘다. 사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잔디 없이 형체만 남은, 무늬만 잔디블록인 제품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 블록 구멍에 잔디를 심는 포트형 방식으로는 지속적인 잔디 생육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김 대표의 분석이다. 반면 리비오그린은 일자형 띠녹지 구조로 뿌리가 깊고 안정적으로 뻗을 수 있다. 한 소장은 “넓은 식재 면적을 확보하면서도 블록의 강도와 내구성을 유지하는 것이 리비오그린의 핵심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많은 설계사무소가 선호하는 모던한 선형 디자인도 리비오그린의 장점으로 꼽힌다. 토양과 잔디 대신에 자갈, 데크, 판석 등을 설치할 수 있어 공간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자갈의 경우 빗물을 정화해 비점오염원을 저감하는 효과를 낸다. 리비오연구소는 현재 많은 개인과 민간 공사를 상대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이 연결되는 B2C 시장에서 다각화된 마케팅 전략을 통해 활로를 열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사업 초기부터 SNS와 블로그, 배너 및 지면 광고에 집중했다. 특히 SNS는 제품을 알리고 소비자의 반응을 즉시 확인할 수 있어 효과가 좋았다. 또한 대리점 등의 중간 단계를 거치는 판매 방식을 지양하고, 일반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소비자의 세부적인 요구 사항에 일일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지만 품질과 서비스 향상을 위해 직영 체계를 택했다. 김 대표는 “소비자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은 제품 개발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품질과 서비스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홍보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블록이 설치될 공간도 특별히 신경쓰고 있다. 한 소장은 “작은 공간에 블록을 설치할 때도 신중히 검토하는 소비자를 보면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구매자의 특성을 주의 깊게 살폈기에 민간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리비오연구소는 민간에서 받은 검증을 토대로 공공 부문까지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비오그린의 성능을 높이고, 옥상 녹화 제품과 벽면 및 담장 블록 출시도 준비 중이다. 김 대표는 “새로운 제품을 도입하고 이를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발주처가 시공 단계에서 품질 관리에 앞장서야” 함을 강조하며 “녹화율 67%의 잔디블록이 50%의 제품과 동등한 기준으로 경쟁하는 구조적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라고 전했다. WEB. www.livioblock.co.kr TEL. 02-6928-5588
  • [PRODUCT] 복층형 퍼걸러 '플로팅 스테이션' 전통 누각의 재해석
    공동 주택에서 외부 환경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 요소로 떠오르면서 휴게 시설물의 디자인과 기능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오늘날 퍼걸러는 단순히 비를 피하거나 그늘을 제공하는 시설물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형태와 기능으로 이용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플로팅 스테이션Floating Station’은 토인디자인이 설계한 복층형 퍼걸러로, 안락한 휴게 공간이자 주변 공간을 조망하는 전망대로 기능한다. 플로팅 스테이션의 디자인은 전통 누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선조들이 자연과 소통하고 좋은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만든 누각을 재해석해, 공동 주택 단지와 어우러지는 현대적 느낌의 퍼걸러로 재탄생시켰다. 1층 테이블에서 이웃, 가족과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고, 2층에 올라 너른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이외에도 수납장과 콘센트, 안내 게시판 등의 편의 시설물도 마련했다. TEL. 02-533-3720 WEB. www.toinpld.com
    • 토인디자인
  • [이달의 질문] 당신의 아이가 조경학과에 가고 싶어 한다면?
    전공이 평생의 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아이는 잘 맞는 전공을 선택해 즐거운 일을 하며 살게 하고 싶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3년마다 (조경 일을 하다 보면 3년마다 관두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찾아오는 힘겨운 방황의 시기를 버틸 인내심이 있는지? 발주처의 박해와 자존심을 짓누르는 말에도 웃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졌는지? 삼 일 밤을 새우고 나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키보드와 마우스를 현란하게 놀려 캐드 일을 할 체력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조경이라는 학문을 통해 실현하고 싶은 나만의 목표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여기며 살아갈 신념이 있는지. 학문적 자질은 중요하지 않다. 천천히 배우면 된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네 가지 질문 중 하나라도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면 다시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윤영주 디자인필드 대표 막연한 기대를 하고 조경 현장직에 지원한 학생이 취업 후 진로를 바꾸는 경우를 많이 봤다. 설계, 식재, 관리 중 어떤 분야가 맞는지 고민하게 하고, 적합한 대학의 조경학과를 추천해줄 것이다. 김건유 강릉원주대학교 농장조경팀 조경 미학 수업 과제로 제출했던 에세이를 다시 꺼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회에서 조경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는지, 조경을 하면 얼마나 버는지, 조경가가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갖는지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한다. 나는 조경을 하면 행복하다.” 부모로서 어찌 자신의 말을 뒤집겠는가.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전공 서적 몇 권 사는 돈은 굳었으니 딸한테 치맥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엄호정 현대엔지니어링 건축조경팀 지지한다. 하지만 조경이라는 분야가 생각보다 많이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설계, 시공, 연구, 소재 개발, 생태, 환경, 기후 변화 대응 등 파생 분야가 생각보다 다양하다. 내 아이가 대학에 가기까지 10여 년이 남았으니,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세분화되지 않을까. 따라서 조경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라면 꼭 조경학과를 선택하진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강한민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 꽃과 나무를 아이에게 선물하고, 푸른 언덕에 함께 심고 물을 줄 것이다. 노민욱 충북대학교 시설과 토목조경팀 다양한 자연 환경을 만나게 해줄 것이다. 산, 들, 강으로 데려가 같은 식물이라도 생육 환경에 따라 형태가 달라짐을 가르쳐줄 것이다. 또 조경의 어떤 면을 보고 조경학과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는지 물어볼 것이다. 건축에 가까운 조경인지, 생태에 가까운 조경인지를 묻고 조언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겠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름을 알게 된다.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싶다. 김연희 천리포수목원 1년 배워보고 아니다 싶으면 전과를 추천한다. 복수 전공이라는 든든한 보험도 있다. 졸업하고 나서야 조경이 내 길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정말 늦었다는 말의 의미를 몸소 깨닫게 될 것이다. 더불어 설계사무소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면 설계에 목숨 걸지 말자. 설계 과제하느라 다른 수업 (특히 교양 수업) 성적 포기하지 말고, 패널에 손톱만 하게 들어갈 다이어그램을 만들면서 밤을 새우는 짓은 되도록 하지 말자. 강민정 부산시 영도구 조경학과를 졸업한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경을 배우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졌다. 인간과 뗄 수 없는 식물이라는 존재에 대해 배우고, 자연을 도시로 가져오는 일의 가치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조경의 현실이 마냥 밝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럴수록 조경의 필요성과 중요함을 더욱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경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다양한 행복과 웃음을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 내 아이에게는 조경학과를 적극적으로 추천해볼 생각이다. 강혜빈 소양고등학교 교사 조경은 진로 선택의 폭이 넓은 특별한 분야다. 직접 공간을 디자인하고 시공, 관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조경수를 육종하는 원예 산업에도 종사할 수도 있다. 정원 일은 힘들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생활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조경은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기에 미래에 더 각광받을 분야라 생각된다. 전문직이라 정년 후에도 충분히 계속할 수 있다. 이미 첫째 아들이 조경학과에 다니고 있다. 김봉찬 더가든 대표
  • [편집자의 서재]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언어학을 연구하는 백승주 교수는 문맹이 되기로 결심한다. 1년간 상하이 푸단 대학교의 한국어 교환교수로 파견되자 중국에 가기 전까지 어떤 중국어도 익히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껏 그가 가르친 학생들은 한국어를 말할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백지 상태에서 낯선 땅에 발을 내디딘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무無의 상태에서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탐구하고자 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외국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는 것뿐인데 몸은 잔뜩 움츠러든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장님”을 외치면 그만이지만 낯선 나라에서는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이다. “워 야오…이베…워 야오…어…아이씨.” 상하이 도착 이틀째, 백 교수는 방에서 “워 야오 이베이 빙더 메이스카페이”(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를 연신 연습한다. 다음 날 찾은 스타벅스에서 연습한 문장을 말하는 데 성공하지만 돌아오는 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점원은 계산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컵들을 가리킨다. 톨, 그란데, 벤티, 컵 사이즈를 묻는 거였다. 더 준비된 말이 없던 백 교수는 ‘가리키기’를 시전해 그란데사이즈를 주문한다. 그는 음료를 기다리며 가리키는 행위에 담긴 복잡한(?) 소통의 과정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가리키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일, 곧 “‘나와 상대방이 모두 공동으로 한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관점에서 그 사물을 보는’ 과정”이므로, 일종의 ‘초능력’을 발휘한 셈이다(과장된 표현 같지만, 인간과 DNA가 98퍼센트 일치하는 침팬지는 가리키기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속 이야기들의 흐름은 이런 식이다.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마주한 낯선 문화와 도시 풍경은 산만하면서도 복합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재편된다. 현지인에게 당연한 음식 문화나 거리 풍경은 이방인의 온갖 잡다한 지식,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유년 시절의 희미한 경험 등을 소환한다. 명나라의 반윤단이 자신이 죽인 정적이 강시로 나타날까 두려워 만든 구곡교를 거닐며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중국 식당에서는 냉수를 주지 않는 게 기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물 좀 주소’를 부른 가수 한대수를 호출한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나름의 알고리즘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는 공공장소에서 본의 아니게 듣는 남 얘기 같다. 하필 그게 엄청 흥미진진하거나 솔깃한 정보여서, 나도 모르게 귀를 더 쫑긋하게 되는 것이다. 북쪽으로 공산주의 (혹은 그러한 체제에 속했던) 국가를 세 개나 둔 자본주의 국가(하지만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하며, 일제 식민지기와 제국주의, 독재 체제를 경험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덕분일까, 백 교수는 현대 중국 이면에 놓인 모순을 도시 곳곳에서 면밀히 포착해낸다. 자본주의의 결정체인 상하이 세계금융센터의 외벽에 중국의 오성기가 떡하니 붙어 있고, 사람들을 검열하는 경비원들이 즐비한 상하이의 거리에는 집마다 적나라하게 널어놓은 빨래가 휘날리며, 난닝구와 사각 팬티만을 걸친 자유분방한 차림의 아저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고급 백화점에 난 큰 창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마오쩌둥의 생가다. “과거의 마오가 고급 백화점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옛집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마오가 받는 충격은 원숭이 혹성에서 겨우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지구가 유인원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을 발견하는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이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하지 않을까.”2 상하이의 풍경은 낯선 이방인의 몸을 통과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예상치 못하게 깊은 방식으로 그려져,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토록 사적이고 편향된 기행문이라니. 웬만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보다 상하이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킨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들려준 모로코의 밤, 그가 거닐던 사막이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사막보다 더 깊게 남았던 건 같은 이유 때문일까? 각주 정리 1. 백승주,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은행나무, 2019 2. 같은 책, p.203.
  • [CODA] 이름
    고작 석 자, 길지도 않은 내 이름은 사람들의 머리를 곧잘 어지럽힌다. 이름을 말하면 되묻는 사람도 여럿이고, 때때로 사물함이나 명단에 김무아, 김보아 등 낯선 글자가 적히기도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성 하나만 바꾸면 온갖 별명이 완성됐다. 그래도 이름은 나를 구성하는 것 중 단연 마음에 드는 요소다. 지극히 평범한 나를 흔하지 않은, 오롯이 유일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 엄마에게 이름에 얽힌 일화 하나를 듣고 난 후에는 그 애정이 더 각별해졌다. 하마터면 내가 김일심, 김진심으로 살아갈 뻔했다는 것. 당시에도 촌스럽게 느껴졌다는 그 석 자는 무려 작명소에서 비싸게 모셔 온 글자들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불같은 호통(제정신이냐는)에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의미는 같지만, 그 어감은 확연히 다른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아쉬움은 없지만 가끔 김일심, 김진심이 된 나를 상상해본다. 분명 그 또한 똑같은 알맹이를 가진 나일 텐데,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 자신하게 된다. 말과 글이 그렇듯 이름에도 분명한 힘이 있다. 이름을 부르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누군가가 꽃이 되기도 하고(김춘수, ‘꽃’),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던 캐릭터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해 시나리오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를 소망하게 만든다(MBC, ‘어쩌다 발견한 하루’). 세상의 온갖 사물에 이름이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이름으로 불러 확인하는 사람에게는 그 의미가 유독 크다. 시인 오은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2018)에 수록된 서른두 편의 연작시를 통해 ‘불리는 이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무인 공장에 내가 있었다. 무인 공장인데 내가 있었다. 무인 공장인데 내가 있는 것이 유일하게 습득한 기술이었다. 어느 날에는 스위치를 켜는 심정으로 불쑥 내 이름을 발음해보았다. 무인 공장과는 달리, 나는 이름이 있었다. 무인 공장과는 달리, 나는 사람이었다.”1 그만큼 제대로 부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이번 특집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름에 작별을 고한다. 오랜 시간 영어권 표기를 따라 불려온 콩지안 유(Kongjian Yu), 투렌스케이프(Turenscape)를 유쿵졘(Yu Kongjian)과 투런스케이프로 바로잡는다. 당장은 낯설겠지만 영영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던 비니 마스(Winy Maas)(오랜 기간 위니 마스라 불렸다)에 친숙해졌듯, 유쿵졘과 투런스케이프가 금세 당연해질 것이라 기대한다. 중국어를 배운 이는 투런이 땅土(tu)과 사람人(ren)의 합성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들의 설계 철학을 남들보다 빨리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에 대해 생각하며 특집을 살피다보면 발을 거는 문단이 하나 있다. “젊은 세대는 조경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성 조경가와 일반 대중 대부분은 조경학을 간단한 원예, 즉 정원을 꾸미는 일로 여긴다. … 이는 학과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조경, 세상을 움직이는 힘”, p.100) 유쿵졘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 조경학과는 흔히 환경예술 또는 원림설계학과로 일컬어진다. 그는 “원예가 개인이 만든 정원이라면, 원림은 사람과 땅 사이의 갈등, 사람들의 이용 행태를 고려해 자연 네트워크를 추구하는 일”이라며 교육에 앞서 원예와 원림 설계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내리고, 이에 따라 낡은 학과 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몇 차례 한국 조경계에 제기된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적당한지에 대한 논의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경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 넓어졌다지만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은 식물과 나무를 다루고 정원을 꾸미는 일 정도로 생각한다. 현재의 명칭은 조경이 다루는 범주를 직관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조경은 과연 그알맹이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이름인가. 사실 이 물음은 다음달 ‘이달의 질문’에 관한 예고이기도 하다. 2019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면에 많은 독자의 생각이 담기기 바라며 놓는 덫이다. 회색 코끼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면 회색 코끼리가 더 생각나듯, 당신은 이제 싫어도 이 질문을 계속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올가미에 걸린 이들이 다채롭고 새로운 의견으로『 환경과조경』의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린다. 각주 1.오은, ‘무인공장’, 『나는 이름이 있었다』, 아침달, 2018,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