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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도시와 바다가 다시 만나는 곳, 시애틀 워터프런트
4월호 지면에 편집한 해외 작품을 인쇄가 끝나기도 전인 3월 말에 실물로 확인하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포틀랜드에서 열린 조경교육자협의회CELA 학술대회가 끝나자마자 시애틀행 기차에 올랐다. 오랜 세월 시애틀 도심과 엘리엇 베이를 가로막았던 고가 고속도로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잇는 혁신 프로젝트의 심장, 시애틀 워터프런트 오버룩 워크(Overlook Walk)를 마음껏 걸었다. 도시와 바다가 다시 만났다.
도시와 바다는 오랜 시간,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단절된 채 공존해왔다. 시애틀 엘리엇 베이의 워터프런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에 면하고 숲이 풍부한 조건 덕분에 형성된 도시 시애틀은 목재 산업과 생선 통조림 가공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공장, 창고, 부두가 수변을 빼곡히 채웠다. 19세기 후반에는 워터프런트를 따라 철로가 놓였고, 20세기 중반에는 그 자리에 복층 고속도로가 건설됐다. 그 해안 풍경은 도시 번영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시애틀은 바다를 등진 도시가 되었다. 하루 9만 대 이상의 차량이 오가며 소음과 매연을 쏟아낸 알래스칸 웨이 고가도로는 시민과 바다 사이에 물리적 장벽을, 심리적 단절을 남겼다.
그러나 도시는 기억한다. 바다를 품었던 본래의 모습을. 기능과 효율 중심의 공간을 넘어, 기억과 일상, 자연과 커뮤니티를 품은 공간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모두를 위한 워터프런트’라는 따뜻한 비전을 내걸고, 시애틀은 다시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길이 1.5마일에 이르는 워터프런트 공원을 만들어 도심과 연결하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필드 오퍼레이션스 설계)를 추진한 것이다. 단지 고가도로를 삭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화 시대의 상처 위에 도시와 바다가 다시 만나는 다리를 놓는 일. 그것은 기술을 넘어 도시의 철학과 삶에 대한 신념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바로 오버룩 워크다.
오버룩 워크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과 엘리엇 베이 사이의 약 30m 단차를 완만한 경사로 이어주는 공중 공원이다. 단순한 보행로가 아니다. 넓은 산책길을 따라 펼쳐진 정원과 광장, 놀이터와 카페, 전망대는 자유를 만끽하며 걷는 이들에게 잠시 머무를 이유를 선물한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시애틀 항구의 분주한 일상, 바다 건너 올림픽 산맥의 힘찬 숨결, 멀리 레이니어산의 만년설이 눈에 들어온다. 등 뒤로 고개를 돌리면 다운타운의 역동적 스카이라인이 시선을 붙잡는다. 걷는다는 행위가 도시를 다시 읽는 여정이 된다.
도시는 이렇게 바다를 되찾았다. 오버룩 워크는 도시의 단절을 치유하고, 도시의 기억을 복원하며, 산업화에 빼앗긴 공공의 장소를 시민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인류세 도시의 공공 공간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접근성과 일상성, 사회적 포용성, 생태적 회복력, 비인간 생명체와의 공존이 교차하는 복합적 풍경. 그것은 곧 도시와 시민 사이에 끊겼던 감정의 회로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많은 워터프런트 재생 프로젝트가 상업화나 관광지화에 치우치는 것과 달리, 시애틀의 사례는 시민의 일상을 최우선에 두었다. 오버룩 워크는 관광객을 위한 길이 아니라, 매일 이 길을 걸을 시민을 위해 설계되었다. 조경가, 예술가, 엔지니어,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가 참여해 긴 호흡으로 함께 만든 이 공간은 도시 재생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직하게 보여준다. 회색 인프라를 걷어낸 자리에 초록의 사람 길을 놓고 산업과 개발의 기억 위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는 것. 이 길은 이제 시작이다. 시민들의 삶을 서서히 바꿔나갈 것이다. 매일 아침 산책을 즐기고, 저녁이면 노을을 바라보며 친구와 맥주를 나누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바다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하늘과 구름을 만나는 벤치에서, 공연과 축제가 열리는 광장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퍼지는 놀이터에서, 이곳은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될 것이다.
브랜드가 도시의 경관과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며 새로운 장소성을 빚어내고 있다. 이번 5월호 특집은 이러한 흐름을 ‘브랜드 어바니즘’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이원제(상명대학교 교수)는 브랜드가 일상과 자연, 업무와 여가를 유연하게 연결하는 도시 전략이 되고 있는 양상을 도쿄 사례를 통해 짚는다. 김희원(롯데건설 디자인연구소 대리)은 공간 브랜딩의 관점에서 조경이 브랜드의 가치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논의한다. 권정삼(롯데백화점 디자인센터 책임)은 쇼핑몰과 같은 공간에서 발생하는 ‘유사공원’ 현상에 주목하며, 몰링하는 도시생활자의 감각을 추적한다. 유승종(라이브스케이프 소장)은 살아 있는 것들의 현상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곧 조경의 힘이라고 말하며, 조경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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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각주 1)
식물을 사람처럼 부르는 건 좀 유난스럽네요. 언젠가 라디오 청취자에게 받은 메시지다. 식물을 ‘아이’라 하고, 구입해오는 것을 ‘데려온다’고 말하는 습관이 방송에서 새어 나왔나 보다. 혹시 내 마음이 다칠까봐 제작진들이 염려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실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우리와 다르다. 두뇌가 없으니 생각과 감정을 갖지 않고, 근육과 신경계가 없으니 움직이지 않으며 고통을 모른다. 배가 고파도 엽록체로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니 밥과 빵을 찾지 않는다. 고플 배 자체가 없기도 하고. 적당한 토양과 수분, 햇빛, 공기가 있으면 자라나는 생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식물의 낯익은 표정과 몸짓을 발견하게 된다. 보도블록 틈새의 새싹은 씩씩하고, 꾀죄죄한 스티로폼 박스에서도 꽃은 말간 얼굴로 핀다. 기다리던 단비를 맞는 잎사귀들은 춤을 추는 듯하고, 오랜 바람에도 줄기 끝에서 대롱거리기만 하는 민들레 씨앗은 주저하는 발걸음 같다. 그래서 식물을 그저 식물로 여길 수가 없다.
길고양이를 위해 골목 구석구석 숨겨놓은 물 그릇, 할머니가 끄는 유모차에 앉아 졸고 있는 강아지, 학생들이 운동장 구석에 쌓아놓은 가방에 매달린 아이돌 인형. 이들의 주인을 생각해 본다. 이들에게는 고양이가 종종 말썽을 일으키는 짐승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웃, 강아지는 집 지키는 동물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가, 아이돌이 만나볼 가능성조차 희박한 남이 아니라 액정 너머로도 힘을 전해주는 소중한 사람이겠구나. 나에게 식물이 그런 것처럼. 좋아하는 마음은 당연할 뿐 유난스러울 수 없다.
**각주 정리
1. 인터넷 밈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스케히로 토미타와 나오 야자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웨딩 피치’ 마지막 화 대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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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카페, 쇼핑몰 등 핫플레이스 거리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이른바 제3의 장소들이 공원과 광장 같은 공공 공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민의 휴식을 수용하는 공공 공간의 부재로 생긴 틈을 도시와 시민의 관계를 촘촘하게 연결하며 ‘장소 만들기’를 시도하는 기업 브랜드가 나타나면서 더욱 다변화되고 있다. 이처럼 어떤 브랜드가 공간 브랜딩을 통해 도시의 경관에 깊숙이 개입하고 나아가 도시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현상을 ‘브랜드 어바니즘’이라 부르기도 한다.
브랜드 어바니즘을 기반으로 한 공간은 도시생활자의 일상에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변화를 이끄는 공간 브랜딩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조경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조경의 근본적 가치를 잃지 않는 공간 브랜딩은 무엇이고, 브랜드를 위한 조경은 공공 공간을 대체할 유사공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번 특집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을 바탕으로 브랜드 어바니즘에 대한 여러 가지 시선을 담았다. 브랜드 어바니즘의 현주소를 살피고 새로운 도시 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이번 기획이 브랜드 어바니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다양한 해석과 논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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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재구성하는 도시의 장소성 이원제
공간 브랜딩을 위한 조경의 가능성 김희원
메타로깅하는 도시생활자 권정삼
브랜드로서의 조경 그리고 바이오필릭 디자인 유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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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브랜드가 재구성하는 도시의 장소성
우리는 도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예를 들어 도쿄는 거대한 회색 미로처럼 느껴진다. 3,800만 인구가 밀집한 메트로폴리스, 세계 최대 규모의 대중교통망, 고밀도로 솟은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 풍경은 도쿄를 일컫는 ‘콘크리트 정글’이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게 한다. 물론 도시 중앙 황거 주변의 정원과 같은 상징적 녹지가 존재하지만, 전체 도시의 색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도쿄의 일상은 여전히 회색 건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도시의 물리적 풍경은 도시생활자의 심리에도 깊이 스며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그리워하고, 녹지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회복과 치유의 신호가 된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는 용어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과의 연결은 단지 휴식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서적 생존 전략이다. 현대의 도시생활자는 단순히 공원을 원하기보다 일상의 여정 속에서 자연과 접속할 수 있는 장소를 원한다. 가로수가 내어주는 그늘,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녹음 속 테이블, 퇴근 후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야외 테라스에 조성된 작은 녹지 공간이 더 절실해지는 이유다.
문제는 도시가 이를 허용하지 않는 데 있다. 도심의 밀도는 계속 높아지고, 부동산 개발은 이윤 중심으로 작동하며, 전통적인 의미의 공공 공간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틈에서 도시생활자의 ‘자연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을 받아들이고 있는 주체는 공공이 아닌 브랜드다. 카페, 호텔, 복합 문화 공간, 라이프스타일 숍 같은 상업 공간에 점차 더 많은 녹지를 담고 있으며, 상업 공간을 설계할 때 더 많은 사회적 상호 작용과 복합적 경험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제 브랜드는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을 넘어, 도시생활자의 일상과 감정을 조율하는 디자이너이자 프로듀서로서 공간을 기획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브랜드 어바니즘(Brand Urbanism)’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는 브랜드가 도시 공간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상업성과 공공성, 기능성과 감성, 자연성과 인공성을 통합한 새로운 유형의 도시 장소를 설계하는 전략이다. 브랜드 어바니즘은 도시의 밀도와 속도, 도시생활자의 욕망과 피로, 그리고 그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공간적 가능성을 직시하며 작동한다.
특히 도쿄와 같은 초고밀도 도시에서 브랜드 어바니즘은 더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도쿄에서는 지금도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이는 도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시 노후화 현상, 특히 쇼와 시대에 형성된 업무 지구의 기능적 한계와 공간적 경직성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생활자의 삶과 일의 방식도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도시계획, 부동산, 브랜드 전략이 동시에 작동하는 이 시점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로 직결된다.
최근 도쿄의 공간 전략은 이를 좀 더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도시생활자는 더 이상 주거와 일로부터 여가가 물리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지 않는다. 도심 곳곳에서는 일, 여가,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 전략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오피스를 벗어나 일시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업무 공간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높지만, 전통적인 사무실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 이에 따라 도심의 호텔이나 오피스 건물 내에는 맞춤형 미팅룸, 라운지, 비즈니스 환대 서비스가 통합된 공간이 분산 배치되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최적의 성과를 낼 수 있게 지원하는 도시형 업무 거점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하이브리드 업무 확산과 맞물려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단일 오피스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제3의 장소가 유연하고 민첩한 공간 전략의 핵심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작업자의 선택권뿐 아니라, 공간 자체의 유동성과도 연결된다. 출퇴근 시간에 대한 피로가 커진 지금, 집과 사무실의 중간적 형태로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주는 작업 공간은 하이브리드 업무를 지원하는 실질적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흐름은 퇴근 후 잠시 들러 재충전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된다. 도심의 터미널이나 유동 인구가 밀집한 상업 거점에 조성되는 ‘몰입형 여가 허브’는 최신 콘텐츠와 소비 경험을 통합해, 바쁜 도시생활자가 짧은 시간 안에 즐거움과 영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다. 한편 주거지 인근에는 장보기, 세탁, 택배 등 일상적 활동을 하면서 이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상 밀착형 생활 거점’이 제안된다. 이들은 단순한 편의 시설이 아니라, 커뮤니티 중심의 일상 거점으로 기능하며, 통근과 집안일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이고 가족이나 친구,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되찾도록 돕는다.
이렇게 세 가지 전략은 각기 다른 장소와 사용자, 목적에 따라 삶과 일, 여가의 균형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도시민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공공성과 상업성, 일과 여가,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시생활자의 삶과 일, 그리고 놀이 리듬을 설계하는 공간들이다.
바로 이 접점에서 조경 설계는 브랜드 어바니즘과 전략적 동맹을 맺 는다. 조경은 도시생활자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방식이자, 브랜드 경험 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다. 조경은 이제 단순히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도시생활자의 감정을 수용하고, 머무르게 하며, 연결하게 하는 촉진 장치가 된다. 조경이 담긴 테라스, 반쯤 열린 정원, 나무로 둘러싸인 공용 공간은 브랜드가 제공하는 이야기와 정체성을 일상 속에서 끊 임없이 체화하게 만든다.
지금부터 이러한 흐름 속에서 브랜드 어바니즘이 실제 공간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시모키타 선로 거리(Shimokita Railroad Street), 하마초 호텔(Hamacho Hotel), 도라노몬 힐스(Toranomon Hills) 의 티마켓(T-Market) 세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조경 공간이 공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성과 공공성을 매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각 사례는 규모와 맥락, 이용자에 따라 상이하지만, 도시생활자의 감각과 리듬에 깊이 공감하며 설계됐다는 점에서 하나의 흐름을 공유한다.
시모키타 선로 거리
시모키타 선로 거리는 단순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넘어, 도쿄의 라이 프스타일 변화에 맞춘 새로운 도시 공간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오다큐(Odakyu) 전철 노선의 지하화로 생긴 유휴 철도 부지를 따라 조성된 선형 공간으로, 공공 공간과 상업, 문화, 주거 공간이 느슨하게 얽히며 살고, 일하고, 놀 수 있는 일상 복합 지대를 구성한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도시 구조에 끌어들인 공간 조직이다. 기존 도심 재개발이 보여주는 밀도 위주의 개발과 달리, 시모키타 선로 거리는 전체 부지의 26% 이상을 녹지로 확보하며 사람과 자연, 커뮤니티 간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수목과 초화류, 수변 요소를 도시의 골격처럼 배치하고, 이 자연 요소를 따라 건축물을 들쭉날쭉하 게 배치해 시각적 틈과 바람길, 채광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이곳의 녹지 공간은 도심 속 생태 흐름의 일부가 형성되었고, 실제로 이 지역에서만 관찰되는 조류와 곤충 145종이 기록됐다. 주민들은 이 녹지를 단순한 조망이 아닌 직접 가꾸고 사용하는 커뮤니티 기 반의 공유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컨대 시모키타 원예부 같은 단체는 주민들과 함께 식물을 가꾸고, 아이들과 조경 체험을 진행하며, 녹지 위에서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시모키타 선로 거리의 외형은 뉴욕의 하이라인이나 서울의 경의선숲 길처럼 선형 공공 공간의 범주에 해당할 수 있지만, 그 공간 구성과 지 역성과의 관계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하이라인이나 경의선숲길이 주로 산책로(road)로 기능하며 경관 감상과 보행 경험에 집중한 반면, 시모키타 선로거리는 선형 공간을 따라 점점이 배치된 소규모 상업과 문 화, 커뮤니티 시설이 거점으로 작동하며 일상의 접점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이곳은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라, 다양한 만남과 활동이 일어나는 거리(street)다.
시모키타 선로 거리에서 거리라는 표현은,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부 동산 수익 개발이 아닌, 지역 주민과의 상생을 전제로 한 마을 만들기 실험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도시 한복판에 조성된 이 선형 복합 공간은 주민들의 생활이 실제로 펼쳐지는 커뮤니티의 장이며, 자연과 사람, 상업과 일상이 맞닿는 느슨한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특히 이러한 공간들이 단순히 구경하고 소비하는 곳이 아닌, 생활자 중심의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을 수용하는 인프라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업무와 휴식, 지역 커뮤니티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어지는 구조는 다양한 도시생활자들의 필요에 대응하며 지역 중심의 맞춤형 업무 및 환대 공간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안한다. 카페에서는 일하는 사람과 육아 중인 주민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이웃들이 함께 자전거를 세워두고 장을 보는 풍경은 소비와 교류 가 중첩되는 일상적 장면을 만든다.
하마초 호텔
하마초 호텔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닌, 도심 속에서 지역성과 자연성 을 동시에 회복하려는 실험적인 시도로 등장했다. 이 프로젝트는 도쿄 니혼바시(Nihonbashi) 하마초 일대의 커뮤니티 개발을 위한 핵심 거점으로 기획됐으며, 그린과 크래프트맨십(Green and Craftsmanship)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전개됐다. 호텔을 기획한 일본 건축사무소 UDS 디자인은 단순한 부동산 개발이 아닌 지역 재생의 전략적 거점으로서 호텔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곳을 단기 숙박객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 장기 체류자, 일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는 복합 공간으로 구성 했다.
하마초 호텔이 들어선 니혼바시 하마초 지역은 스미다강(Sumida River)에 인접한 비교적 조용한 주거지이며, 인근에는 하마초 공원이 위치해 있다. 하마초 호텔은 이러한 입지적 조건을 적극 수용하며, 인근 공원의 녹지와 연결된 도심 속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주제를 전반적인 설계에 반영했다. 호텔의 대상지는 대규모 개발지나 중심 업무 지구의 중심이 아닌, 일상적인 도시 조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이로 인해 호텔은 ‘목적지’가 아니라 ‘일상과 연결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건축적으로는 다양한 스케일의 녹지를 통해 자연이 스며드는 공간을 지향한다. 도쿄 중심부의 콘크리트 밀집 지역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바이오필릭 건축적 접근이 적용됐고, 호텔의 정면과 저층부, 테라스, 로비, 레스토랑 공간에서 객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식재가 적극적으로 활용 되었다. 단순히 녹색 장식의 차원을 넘어, 이 식재는 호텔 이용자의 시선과 동선을 부드럽게 이끌고, 각 층위 공간 사이의 심리적 경계를 완충하는 조경 장치로 작동한다. 이러한 설계는 자연과 공예,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얽힌 미묘한 균형감을 구현하며,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마치 도시 속 정글에 들어온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이 호텔은 숙박 공간에 그치지 않고 지역성을 드러내는 쇼윈도이자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획 일적인 도심 호텔과 차별화된 경험을 제안한다.
도라노몬 힐스의 티마켓
도라노몬 힐스 스테이션 타워 지하 2층에 조성된 티마켓은 대규모 복합 개발의 일환으로 조성된 오피스 중심지 내에서 도시 일상에 새로운 감 각적 리듬과 생활 밀도를 제안하기 위해 기획됐다. 과거 이 일대는 밀도 높은 고층 업무 시설이 밀집된 곳으로, 정형화된 동선과 단조로운 공간 감각이 지배적이었으며, 일만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해 왔다.
이러한 도시 맥락을 전환하기 위해 티마켓은 ‘지하철역 입구에 펼쳐 진 실내 정원’이라는 콘셉트로 내부 공간을 실외처럼 느껴지도록 설계 했다. 진입부를 터널형 구조로 연출해 방문자의 심리적 속도와 감각을 조정한다. 특히 조명 설계는 이 공간의 시간성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로, 낮에는 자연광을 닮은 밝은 조명으로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저녁에는 점차 어두워지는 조도로 전환 되어 실내임에도 시간대에 따라 분위기가 변하는 ‘도시의 하루’를 체험 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도심에서 자연의 흐름을 공간 감각으로 재해석한 사례로 실내 환경을 공공 공간처럼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공간 구성은 정형화된 푸드코트가 아니라, 고유한 개성을 가진 상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장과 정원이 결합된 공공 공간으로 기획됐다. 제과점, 브루어리, 식자재 상점, 라이프스타일 숍 등이 분절되지 않 고 하나의 도시 단면처럼 연결되어 있고, 음악, 조명, 일러스트 등 다양 한 감각 요소들이 사용자 경험을 층위별로 감싼다. 특히 도라노몬 힐스 오피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이곳을 단순한 식음 공간으로만이 아니 라, 회의나 원격 업무, 짧은 휴식을 병행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 용하고 있다.
이처럼 티마켓은 단순한 소비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도시인의 일상 리듬을 다시 조율할 수 있는 도심 속 여유의 장으로 기능하며, 이동 중 머무름과 몰입, 업무와 여가가 느슨하게 연결되는 감각적 접점을 제안 한다. 정원 같은 시장, 도심 속 중정, 음식과 시간의 플랫폼이라는 복합 적 속성이 중첩되며 도시 일상에 새로운 공간적 밀도를 부여하고 있다.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사례는 도시생활자의 새로운 리듬, 즉 삶과 일, 여 가가 교차하는 일상 속에서 장소성이 어떻게 새롭게 짜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도시에 대한 기억은 단지 시각적인 풍경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고 걷고 머무르며 겪는 감각의 총합으로 남는다.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골목을 걸으며, 발코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숨을 고르고, 지하 중정의 초록 이 감싸는 공간에서 누리는 풍요로운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도심 속 자연을 경험한다. 이제 도쿄는 더 이상 회색의 콘크리트 정글로 기억되지 않는다. 도시생활자의 일상 속에 직조된 초록의 간들은, 도쿄라는 도시를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게 만든다. 그 기억은 점 점, 회색에서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이원제는 상명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전공 교수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일하며 즐기는지가 라이프스타일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아래 국내외 다양한 공간과 도시생활자 간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SPC 그룹, UDS 코리아, SEL 인테리어 디자인, 폴인, 롱블랙의 자문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최근 맘스터치 브랜드 리뉴얼 및 혁신 매장의 공간 디자인을 진행했다. 저서 및 번역서로 『도시를 바꾸는 공간기획』, 『인간을 위한 도시 만들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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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공간 브랜딩을 위한 조경의 가능성
온 공간이 브랜딩으로 시끌벅적하다. 온갖 산업, 기업, 개인이 각자의 탁월함과 고유함을 뽐내기 위해 세상에 없던 정체성과 경험을 만들고 있다. 디자인 산업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이 생겨났다.(각주 1) 세상이 세상에 없던 브랜드만의 경험을 원하니, 특정 디자인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기획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경험과 독특한 공간을 기획하기 위해 그래픽, 가구, 건축,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새로운 수요로 인해 건축 시장의 지형도 바뀌고 있다. 최근 몇년간 건축가들은 카페, 스테이, 리조트를 중심으로 공간적 실험을 거듭해 건축적 경험 자체가 방문의 목적이 되는 새로운 공간 수요를 만들어 냈다.(각주 2) 이 모든 변화에 ‘공간 브랜딩’이 있다. 이는 매번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야 했던 브랜드가 공간적 체험에서 발견한 묘수다. 디자이너에게는 분야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그림을 그려볼 기회가 됐고, 전문 분야에서는 대중적 공감을 바탕으로 시장의 지형도를 바꿔볼 전환점이 됐다. 공간 브랜딩 현상에 조경을 대입한다면 어떨까. 브랜드의 요청으로 조성된 조경 공간이 많아지고 있는지, 세상에 없던 경험을 위해 새로운 조경적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지, 이로써 대중의 공감을 얻고 조경에 대한 시장의 수요를 바꿔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각주 3)
『환경과조경』이 소개하는 프로젝트만 보아도 기업 브랜드와 조경가의 협업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각주 4) 실내 조경에 조형, 미디어, 시각 디자인을 연결하는 새로운 작업도 눈에 띈다. 이렇게 만들어진 브랜드 팝업 및 플래그십 공간, 기획 전시를 디자인 업계에서 오히려 더 주목한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는 패션, F&B, 모빌리티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가 자연을 비즈니스 모델로, 사회적 기여로, 예술적 영감으로, 공학적 아이디어로, 새로운 체험의 무대로 주목하고 이를 그들의 정체성이자 새로운 경험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이 세상에 없던 자연의 경험을 브랜딩하고 싶을 때 총괄기획자로 조경가를 떠올리는 건 어렵다. 주거 브랜드 안에서 다양한 조경적 실험이 이루어진 공동주택 시장만 해도 실내외 조경이라는 물리적 범위가 주어지지 않는 한 총괄 기획을 하는 분야가 조경이 아니다. 조경가에게는 넓은 잔디밭, 숲, 화려한 광장만을 기대할 뿐이다. 발주처에게 조경적 경험이란 자연에 둘러싸여 있거나 공원, 정원 등 경관을 연출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질 때 이뤄지는 물리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발주처의 평범한 기대는 ‘고객의 시선에서 볼 때’라는 말과 함께 조경의 새롭고 비범한 제안을 거부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공간 브랜딩 시대에 건축과 조경 모두 새로운 요청을 받고 있다. 건축은 비교적 자유도가 높은 여건을 쟁취했으나, 조경은 스스로 만들어온 이미지의 굴레에 갇혀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 대중적 공감을 얻어 새로운 조경적 경험을 원하는 시장을 만드는 것도 틀림없이 조경의 일이다.
필자는 건설사 브랜드와 상품을 관리하는 부서에 근무하며 조경으로 쌓아 올린 시야를 브랜딩으로 넓혀야 했다. 롯데건설 조경 브랜드 ‘그린바이그루브(Green×Groove)’의 탄생을 함께하고 롯데캐슬과 르엘의 전략을 고민하면서 브랜드 성장이 직업적 과제가 됐다. 브랜드 디렉터와 함께 고민하고 전문 에이전시와 구상하고 조경가와 협업하며 공간 브랜딩이 조경 디자인과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비슷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형태 만들기보다 본질적인 경험을 설계하기 위해 태도와 원칙을 수립하는 디자인. 마감재 선정보다 정체성을 극대화할 매체를 경험의 요소로 구성하는 디자인. 한 장면의 이미지에 집중하기보다 차곡차곡 중첩되는 경험의 잔상을 일관된 여정과 감성으로 구상하는 디자인. 눈에 띄는 이름을 찾기보다 고객과 공간을 연결할 서사를 구축하는 디자인. 벌써 여러 조경 공간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는 조경도 이용자 경험을 디자인 해 온 분야로서 탄탄한 역량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경과 브랜드 분야 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한 핵심은 조경 공간 또는 경관을 디자인하는 행위와 브랜드의 고객 경험을 디자인하는 행위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브랜드를 익혀가는 과정 속에서 썼던 업무 일지에서 시작됐다.(각주 5) 실무자로서 아직 날카로운 의견보다 두리뭉실한 질문이 많지만, 공간 브랜딩을 함께 고민하는 조경가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는다. 지금까지 브랜드 산업에서 조경 분야의 현주소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공간 브랜딩을 상위 개념인 브랜드 경험과 함께 정의하고, 실무적 고민을 녹여 앞으로 조경 분야에서 함께 시도해 볼만한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월간 디자인 편집부, “크레이티브 디렉터가 뭐길래”, 『월간 디자인』 2024년 6월호.
2. 김정은, “여가 문화의 변화와 한국 건축 시장의 다양화 과정”, 『SPACE』 2024년 8월호.
3. 다음의 문장이 질문의 시작점이 됐다. “최근 여가 수요와 결합한 카페와 스테이, 리조트 등은 높은 건축적 완성도를 필요로 하지 않던 사각지대에 건축가들을 끌어들이고, 건축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이러한 영역에서 실험을 거듭하며 다시 공간의 수요와 시장의 지형도를 바꾼다.” 김정은, 위의 글.
4. 현대자동차 영남권 연수원(오피스박김), 아모레퍼시픽 뷰티파크(조경설계 서안, 디자인 스튜디오loci), 어퍼하우스 남산 전시관(디자인 스튜디오 loci), 2024 노들섬 초청전시 물의정원(수무), 기아비트360 가든(HLD) 등이 있다.
5. 이 글은 김아연 교수가 운영하는 웹진 「월간 테라」 2024년 10월호에 기고했던 “브랜드 탐구일지 1부”에서 시작된 원고다. 브랜드에 대한 개괄적인 이론적 고찰은 「월간 테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희원은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 조경설계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조경을 둘러싼 세계에 관심이 많은 탐구자로, 현재 롯데건설 디자인연구소에서 조경 설계 및 브랜드 전략을 담당하며 조경과 브랜딩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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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메타로깅하는 도시생활자
오프닝 노트
“서울의 대량 교통수단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잠실역에 내리면 우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보이는 롯데월드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잠실역에서 내려 본 사람이라면 다 알다시피 역에서 롯데월드로 들어가는 입구가 가장 넓고 화려하기 때문에 현대 소비 생활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욕망 구조에 매여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흡입되어 버린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지만 여기서는 모든 길이 롯데월드로 통하게 되어 있다.”(각주 1)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브랜드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도 하나의 객체로서 브랜드가 되는 시대. 도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생활자가 경험하는 공간의 감각과 감흥까지도 이제는 브랜딩과 마케팅 전략의 언어로 조직되고 유통되며 포장되고 소비된다. 물론 이 현상은 긍정성뿐만 아니라 부정성 역시 내포하고 있다. 브랜드는 도시에 스며들어 부산스럽고도 은밀하게 “도시생활자의 고객화”를 추동하기 때문에 도시 공간은 자칫 BX(Brand Experience)와 UX(User Experience)가 무의식적으로, 수시로, 파편적으로, 수동적으로 경험되는 브랜드 범벅의 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믹스의 공간을 대하는 포용과 경계의 유연한 자세가 동시에 요구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글은 특정 기업과 브랜드를 통해 도시재생과 활성화를 도모하는 ‘브랜드 어바니즘(Brand Urbanism)’ 또는 대형 쇼핑 공간과 도시 구조의 관계를 모색하는 ‘몰 어바니즘(Mall Urbanism)’, ‘리테일 어바니즘(Retail Urbanism)’ 등을 논하기에 앞서, 브랜드의 집대성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오프라인 리테일의 조경 변천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유사공원의 가치를 탐색하고자 한다.
유사공원 선언
“도시 생활은 점점 더 전통적인 도시 지도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진다. 주차장, 패스트푸드점, 쇼핑몰 ― 이 공간들은 공공 공간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공적 삶을 위한 장소로서 자주 점유된다.”(각주 2)
나는 꿈을 꿨다. 그 꿈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공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히는 공원이 아닌데 공원처럼 느껴지는 장소들에 대해. 대형 쇼핑몰의 중정, 백화점 옥상, 상업 가로 등은 제도적으로는 ‘공원’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모이고 쉬고 멈추고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삼촌, 여긴 공원이 아니잖아.” 조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그곳들이 충분히 공원 같았다. 나는 그 공간들을 ‘유사공원(parklike space)’이라 부르기로 했다.(각주 3) 이런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런 공간의 원형은 17세기 코번트 가든(Covent Garden Piazza)(1630)이나 블룸즈버리 광장(Bloomsbury Square)(1661)과 같은 플라자 가든에서부터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 한가운데서 자연과 사람, 사회적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조경적 장치들. 그것은 이미 그 시절부터 공원이라는 제도 이전에 그 바깥에서 피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사공원의 성립 조건은 “몰링하는 도시생활자”(각주 4)에서 언급한 것처럼 물리적, 구조적, 구성적, 제도적, 미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감각(감흥)적 공공성을 매개로 한 커머닝(communing), 즉 공적 교류와 사회적 관계 형성 가능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유사공원 담론은 명백한 대상지의 디자인 재생과 그에 파생하는 미적 함의를 다루는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화 담론이나 기타 레거시 어바니즘 담론과는 달리, 명백하지 않은 장소를 도시생활자의 관계 형성 관점과 미적 감흥(감각)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도시미학적 정체성과 위상을 갖는다. 그것은 “서둘러 정의내리기”보다는 “천천히 질문하기”에 가깝고, 온전히 도시생활자의 입장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미완의 사유 구조이자 개방형 담론의 틀이다.(각주 5)
나는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공원이 아닌 공원들, 제도 바깥의 조경적 실천과 조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 우리는 공원이라는 제도와 관계없이 공원의 감각을 일상에서 마주하고 재구성하고 있을까? 쇼핑 공간의 조경은 분명 오프라인 리테일의 대형화와 체류 시간 증대 전략의 흐름 속에서, 장식적 조경으로부터 관계 중심의 조경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형 쇼핑몰, 백화점, 아울렛 등의 공간이 어떻게 공원의 감각적 공공성을 대체하거나 확장해왔는지 살피는 과정은 “공원이 아닌 곳에서의 공원성”과 “공원에서의 공원성” 모두를 주목하게 한다. 그것은 쇼핑 공간에서의 유사공원성을 비평적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조경이 할 수 있는 질문과 실천의 틈을 찾으려는 시도다. 도시생활자의 감각이 앞으로 조경, 쇼핑 공간, 어바니즘 사이의 유연한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 꿈에서 보 고픈 사람들을 만나다니, 오늘은 분명 운수 좋은 날이다. 허나 현실을 자각할수록 꿈의 장면들은 희미해진다. 내일이 오기 전에 소멸되는 조각들을 메타로그(metalogue)로 맞춰본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정정호·강내희, 『포스트모더니즘론』, 도서출판 터, 1989, pp.13~14.
2. Margaret Crawford, Everyday Urbanism ,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John Kaliski and Michael Speaks, eds., Monacelli Press, 2008, pp.22~23.
3. 대형화된 쇼핑 공간에서의 몰링 감흥과 도시공원적 면모를 포착하며 유사공원 재해석을 통해 쇼핑-도시-조경 간 유연한 관계 맺음 가능성에 주목한 비평은 다음을 참조할 것. 권정삼, “몰링하는 도시생활자: 공동공간 쇼핑안내서”, 『환경과조경』, 2025년 2월호, pp.116~124.
4. 위의 글
5. 유사공원 담론의 핵심 주제인 “비-공원 공간의 감각(감흥)적 공간 경험과 공공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적 공간을 사회적 기술이 훈련되는 장소로 바라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TheFall of Public Man , Vintage, 1978), 걷기를 통한 도시생활자의 감각적 실천을 강조한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 UC Press, 1984), 제도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에 대항하는 주체적 공간에 주목한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 Blackwell, 1974), 일상적 장소와 상업 공간에서 발생하는 공공성에 주목하며 비계획된 도시 공간의 공공성 회복을 주장한 마거릿 크로퍼드(Margaret Crawford, Everyday Urbanism , Monacelli Press, 1999), 도시의 잉여 공간과 폐허에서 나타나는 심미적 가능성을 조명한 매튜 갠디(Matthew Gandy, “Marginalia: Aesthetics, Ecology, and Urban Wastelands”, Annals of the AAG 103, 2013) 등의 도시·조경 논의를 부분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
권정삼은 롯데백화점 디자인센터에서 조경 프로젝트의 기획과 디렉팅을 맡고 있다. 특정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대중적 감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 요소, 그로 인해 형성되는 사회적 혜택에 주목하며, 조경 디자인의 언어를 보편적 디자인과 일상의 언어로 확장하는 실무, 글쓰기, 영상, 사진을 추구한다. 오늘도 기획서-설계 도서-시공 현장 사이에서 감각과 개념 사이의 언어들을 찾고 짓고 보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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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어바니즘의 가능성을 말하다] 브랜드로서의 조경 그리고 바이오필릭 디자인
당신이 좋은 사람인 줄은 알겠어요
“이제는 좋은 친구로 남길 바래요.” 민망한 말이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이만하면, 뭐 빠지는 거 없잖아. 두루두루 원만하고 딱히 흠 잡을 것도 없는데 말이지. 그런데 이 양반, 모르긴 몰라도 뚜렷한 특징이 없을 수는 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떠나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남다른 매력, 그것이 브랜드라 생각한다. 나음보다 다름의 시대다. 나아지려는 노력은 그동안 충분히 했다. 파리바게트에서 케이크를 사지 않고 다른 데는 없나 하고 생각하는 이유는 케이크 맛이 어떤지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카페며 리조트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가본 바다. 이제는 다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시대, 브랜드의 떠오름은 당연하다.(각주 1)
경험의 합, 공간일 때의 브랜드
어떤 사람과 지내면 그 사람의 성품, 성격, 스타일, 버릇들을 통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게 된다. 그것의 그것됨, 그것을 브랜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간에서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미국 유학을 위해 비자를 받으러 광화문의 미국대사관에 간 기억이 난다. 창살, 펜스, 무뚝뚝한 영어 폰트, 한국 표준보다 약간 높은 문고리의 위치, 화장실의 변기, 천장의 등 모두 미국 조달 품목들만 사용했다. 그때는 ‘여기 참 미국스럽다’ 생각했다. 돈을 뽑으려고 현금 인출기를 찾았는데, 모니터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라고 적혀 있었다. 요즘 말로 UX의 정점이다. ‘이곳은 한국 한복판에 있지만 그냥 그대로 미국 영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미국 느낌이 들었다. 그 시간 그곳에서의 경험의 합이 미국이란 브랜드의 한 단면을 충실하게 나타냈다. ‘공간에서 경험한 것의 총합=브랜드’라는 관점에서 미국 대사관은 성공한 공간 브랜드다.
요즘 공간 디자인들은 ‘그곳에서의 시간을 어떤 경험으로 채울까’를 생각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소위 말하는 ‘몰입의 공간 경험’이라는 말도 결국은 그것을 압축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법이다. 미장센(mise-en-scene)보다는 미장아빔(mise-en-abyme)을 내세운다. 공간은 마치 게임처럼 어떤 세계관을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맥락 안에서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는 이런 곳이구나’라는 맥락은 애트모스피어(atmosphere)의 완성이다. 내가 아는 공간 브랜딩에 대한 관점이다.
브랜딩과 조경에 대한 원고를 의뢰 받고 막상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슬프다’였다. 연약한 사회적 토대에서 요즘 중요하다고 하는 브랜딩에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에 동감하는 동시에 여전히 아쉬웠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기획하는 어떤 브랜딩에 이번에도 조경은 그 부분을 돕는 것에 그칠 것 같기에, 브랜드의 시대에도 결국 여전히 종속 변수일 것 같아서.
분명히 브랜딩의 시대는 기회의 시대다. 개성이 확실할수록 누구나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조경은 무엇일까. 조경은 조경이다. 타 분야와 다투거나 비교하지 말고 나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발 딛고 서면 된다.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된다.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그것에서 군더더기를 덜어 내어 날카롭고 선명하게 만들면 된다. 날카로운 칼로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브랜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조경은 무엇이 다르냐
오랫동안 수없이 말하지만 조경은 살아 있는 재료들로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애정하던 건축을 놓고 조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료된 점이다. 이만큼 다른 게 어디 있나, 이 세상 어디에 이런 직업이 있나. 세상 유일무이라는 점에서 조경은 이미 브랜드다―네이밍 관점에선 아쉽다―. 하면 할수록 이것을 넘고 싶은 마음이 든 이유는 언어가 품은 범위가 좁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식되고 있는 조경造景은 풍경이나 경치(景)(볕 경)를 조작하고 조형한다(造)(지을 조)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가 만든 좁은 프레임에서 나와서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내보자. 무엇이 남는가. 살아 있는 것이다. 조경가는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디자인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내린 조경의 정의다. 그렇기에 그 대상은 식물뿐 아니라 사람, 온도, 습도, 대기, 소리, 냄새 등이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것을 디자인합니다. 라이브스케이프.” 이것이 우리의 일을 다르게 정의할 만한 문장이라 생각해 회사의 캐치프레이즈와 이름에 담았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조수용·홍성태의 『나음보다 다름』(북스톤, 2015)을 간단하게 재구성했다. 관련한 인사이트를 구한다면 이 도서를 읽어보길 적극 추천한다.
유승종은 국민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희림건축에서 5년간 일하고 조경에 대한 애정을 품고 유펜(UPenn)으로 유학을 갔다. 한국말로도 쉽지 않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머리에 넣었지만, 사실은 피터 워커의 테너 파운틴을 좋아하고 월터 드 마리아의 라이트닝 필드를 숭배한다. 모두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생태 디자인을 ‘살아 있는 것들이 티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정의한다. 자연의 형상뿐 아니라 현상이 여러 감각을 통해 인지되게 하는 작업으로 프로젝트를 만들어간다.관련 특허 기술과 UX 기법들을 공간에 적용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IF 디자인 어워드, 대한민국 조경대상 우수상, 공공디자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건축과 조경을 넘나들며’라는 흔하고 뻔한 말을 구체적인 결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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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스퀘어 가든
POSCO Square Garden
현재 조경가들은 절호의 시기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 기후 변화 위기 속 만년 유망주 조경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주역이 될 것 같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극심한 도시 문제에 대처하며 일어났던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은 현대 조경의 양상과 닮았다. 200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많아졌다. 조경이 개입하는 모든 유형의 공간에서 이러한 기류가 체감된다. 조경의 가장 큰 무기인 녹색의 자연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이자 기능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지시해야 하는 공공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민간의 영역에서도 조경의 중요도는 나날이 더해지고 있다. ESG를 필두로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은 자연을 향하고 있고, 조경가들은 이를 가장 잘 다루는 전문가다.
포스코는 일을 맡게 된 설계사무소로서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도 여러모로 감사한 기업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소유한 공간을 개방해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회적, 환경적 기여를 기업의 의무로 요구하지 않았던 시대 때부터 그랬다. 그들은 공공을 위한 다수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기업이 공공을 위한 기회를 마련한다면 어떠한 가치로든 기업에게도 환원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업 공간을 계획할 때 공공과 기업 모두에게 이로운 순환 고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포스코라는 브랜드
우리는 포스코와 함께 일을 종종 해왔다. 포스코 스퀘어 가든(이하 스퀘어 가든)은 설계 시점 기준으로는 네 번째, 준공 기준으로는 두 번째 맡는 작업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매번 차별화된 콘셉트와 전략을 계획해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할 때 고민이 깊어진다. 포스코와 함께 한 첫 프로젝트인 파크1538 포항(『환경과조경』 2022년 9월호)은 코르텐이라는 철강 소재를 사용해 기업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구현했다. 포스코 인재창조원 역시 철이라는 기업의 대표 소재를 앞세워 표현했고, 파크1538 광양은 건축과 함께 굽이치는 땅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역동성을 전달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지주사 분리 등 기업의 내부 구조가 바뀌었고, 포스코는 더 이상 철강만이 아닌 AI, 이차전지, 수소 등 한층 더 미래를 꿈꾸는 산업으로 변모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여전히 철은 중요했지만, 꼭 철이란 재료를 부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못 상충되는 의견을 전달받았다.
철의 유연함과 안온한 산책로
그래서 시선의 초점을 달리하며 철의 강함보다 유연함 에 초점을 맞췄다. 철은 그 무엇보다 단단한 강성의 소재이지만, 무엇으로도 주조될 수 있는 유연한 재료이기도 하다. 테헤란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곳에 미려한 굴곡을 가진 선형의 덩어리를 흘려보내 용융된 상태를 은유하고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냈다. 최대한 순백에 가깝게 조색해 청정함을 표방하며 친환경적 신사업들을 추구하는 그들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토심을 확보하는 플랜터인 동시에 걷다가 잠시 앉을 수 있는 벤치이지만 구체성과 지시성 을 덜어냈다. 가능한 추상적인 볼륨으로 이색적인 심상 만을 전달하고자 했고, 독특한 조형물 하나가 도심 사이를 꿰뚫고 나아가길 바랐다. 한국의 상징적 가로 중 하나인 테헤란로에 인상적인 장면을 남기고자 했다. 전체적으로 이용자들이 산책을 즐기며 거니는 공간으로 계획했다. 프로젝트에서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지만, 사실 번잡한 도심 한복판에서 분명히 필요한 경험 이기도 하다. 온종일 앉아서 일하는 수많은 직장인, 실제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빈약한 인근 지역 주민을 고려한다면 답은 꽤 쉬웠다. 산책은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발걸음이기에 공간에서 그 걸음과 심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했다. 길의 선형을 아주 선명하고 명료하게 구성하고, 산책로 주변에 두터운 식재를 더해 서정적이고 안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건물의 세 면을 감싸고 도는 산책로는 각 면마다 서로 다르게 연출된 식재 구간을 통과하며 서울 한가운데에서 잠시나마의 여유로운 일상을 선사한다.
스퀘어 가든은 크게 네 개 공간으로 이루어지며 문화 예술 산책로, 버스킹 가든, 갤러리 가든, 선큰 가든이 있다. 선큰 가든은 조경의 작업이 거의 더해지지 않았 다. 서로 동시에 바라보이지 않는 공간들이기에 각 면 마다 다르게 기획하더라도 이질적 산만함보다는 차별적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특 정한 공간에 힘을 주는 대신 공간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산책로를 통해 여러 공간을 엮어 완성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화예술 산책로
테헤란로에 인접한 전면부의 문화예술 산책로는 모든 공간과 기업의 인상을 보여주는 정면이기에 단단하고 정연한 모습으로 연출했다. 일부 관목과 초화류를 제외하면 소나무와 줄사철이라는 상록의 교목과 지피류, 단 두 켜의 식재로만 구성해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표현했다. 기존에 조성된 공간의 무게감이 인상적이었기에 본래의 식재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되 계절감만 조금 더하는 약간의 변주만 시도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본질이지만, 전면부 공간만은 겨울 동안에도 스러짐 없이 오롯할 수 있도록 상록 수종 중심으로 계획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소나무 위치를 옮기지 않고 그 사이 사이를 돌아나가는 산책로를 새로 구성해 대상지가 품 고 있었던 땅의 시간이 계속 유지되게 했다. 백색의 비정형 구조물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지향점을, 소나무와 짙은 녹색의 식재는 지금까지 쌓여온 역사적 과정을 보여줄 수 있게 함께 배치했다.
버스킹 가든
건물 서측 버스킹 가든은 이름의 의미처럼 연중 야외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객석이 필요했다. 카페와 인접해 산책로 모든 구간에 앉아 쉬며 식음료를 즐기 기에 좋은 외부 공간이 되도록 조성했다. 전면부 문화 예술 산책로 구조물이 상징적인 조형에 가깝다면 버스킹 가든 구조물은 매우 기능적인 앉음벽이다. 산책로 양측의 식재 설계를 달리해 이용자들의 흥미를 유도하고자 했다. 건물에 인접한 부분의 식재 설계는 천리포 수목원과 협업해 드라이 가든으로 조성했다.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관목 및 초화류에 조형석을 같이 배치 해 이색적인 정원의 장면들이 이어지게 했다. 다른 한 측면은 길을 따라 배롱나무를 열식해 건물 정면의 흐름이 따라 들어오게 했다. 전면부의 소나무를 유지한 것과 같이 그 소나무 뒤에 있던 배롱나무도 그대로 존치했다. 이 배롱나무를 따라 이용자의 시선과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버스킹 가든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했다. 공연 시 관람 시야를 방해하지 않게 하부 식재는 최소화했다.
갤러리 가든
동측부 갤러리 가든은 곳곳에 산개됐던 조형물을 재배 치한 조각정원으로 계획했다. 개별적으로는 주목할 만 한 조형물들이었지만 체계 없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한 장소에 모아서 각 조형물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낸 공간도 함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산책로와 식재,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며 연계될 수 있게 고민했고, 한번에 모든 작품이 보이지 않게 했다. 한 가지 요소를 감상한 뒤 언뜻 보이는 다음의 요소가 호기심을 자극하되, 전체가 한꺼번에 노출되 어 걸음의 흥미가 떨어지지는 않도록 시퀀스를 조율했다. 조형물 배면에는 벽을 두어 다른 요소들로 흩어질 수 있는 시선을 붙잡아 작품 자체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다. 분비나무, 귀룽나무, 노각나무 등 한국 자생종 중 심으로 식재를 구성해 또 다른 매력의 장면을 선사하면서 우리 본연의 숲 경관을 보여주는 정원으로 표현 했다. 다간형 교목과 대관목을 활용해 조형물로 시선을 조정하는 동시에 주어진 규모보다 더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고자 했다. 수수하고 청초하다는 누군가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리듬감을 만드는 콘크리트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의 선정이 중요했다. 현재까지 이어온 가장 굳건한 정체성이 더 소중한가. 새로운 출발을 알리며 생신한 야심이 더 앞서야 하는가. 양단의 가치에 대해 기업 내부의 의견이 분분했고 그 어느 하나 틀린 것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모두를 담아야 했다. 틀에 담아 형태를 만드는 제작 방식은 철의 주조와 유사하지만, 질감과 색 상은 전혀 다르기에 철을 연상시키지 않는 콘크리트를 활용했다. 이 재료와 맞붙을 상록수 식재 구간의 짙은 초록색을 고려해 색채적인 대비도 의도했다. 앉음벽 역 할을 해야 했기에 앉는 구간과 기대어 설 수 있는 구간의 단면을 작성한 뒤 평면의 선형과 연동시켜 3차원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면과 평면, 구간의 관계를 조작해 조형의 움직임과 형상을 조정했다. 시공사와 협의 후 현장에서 타설하며 디자인적 의도뿐 아니라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며 기다란 리듬감을 다듬어 나갔다.
브랜딩 스케이프
각 기업은 고유한 유무형의 가치와 자산들을 지니고 있다. 이미 겉으로 드러난 것들도 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듣는 이야기에서 채집하는 것도 있다. 이는 머리와 마음에 담겨있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고, 시간이 쌓여 축적된 철학적 태도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다 루는 공간과 무관한 산업적 생산물일 수도 있다. 이를 잘 듣고 읽어내며 해석하여 실재하는 땅에 공간으로 내려놓는 게 조경가의 역할이다. 누군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비전과 내러티브를 공간으로 구현해 인상을 만들 어내고 이용자들이 다가올 수 있게 계획한다. 새로운 장소의 경험은 방문자에게 다시금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그 너머에 있는 브랜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브랜딩 랜드스케이프’를 추구하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에 있다.
글 얼라이브어스
조경 설계 얼라이브어스
건축 설계 포스코A&C
시공 포스코E&C
발주 포스코
위치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440
면적 17,454.80㎡
완공 2023. 8.
사진 김종오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건축, 조경, 도시재생 및 문화 계획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이너 그룹이다. 단단한 기준, 관철하는 감각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서로의 특성을 인식하고 평등한 소통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융합을 통해 지속적인 시너지를 만들어 가며 균형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학제간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하이엔드 디자인을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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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가산
Publik Gasan
대상지는 가산동의 산업 단지로 서울에서 손꼽히게 북적이는 지역 중 하나다. 가산동과 G밸리 사이에 위치한 복잡한 대상지에 자연을 통해 사람들의 숨통을 틔어줄 공간을 제공해주고자 했다. 삶의 터전이자 문화, 예술, 자연이 공존하는 모두의 공원과 나만의 정원을 함께 계획함으로써 퍼블릭 가산이 도심 속 모두를 위한 숲의 섬이 되기를 기대했다.
도심에서 찾기 어려운 대규모 녹지, 높고 자연스러운 수형의 나무들이 형성하는 깊은 숲을 먼저 떠올렸다. 숲은 도심에서도 여유롭고 편안한 휴식을 가능하게 한다. 좁은 숲길을 걸으며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며 안락함을 느끼는 시간, 사색과 치유의 시간 등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조경 공간을 구성했다.
두 개의 공개공지
퍼블릭 가산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공개공지는 방문객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공간이다. 일종의 진입 광장의 역할을 하는 두 공개공지를 세 가지 기능에 주목해 설계했다. 첫 번째 기능은 오픈스페이스다. 가로변과 접한 전면 공간을 활용해 도심 내 열린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활기 넘치는 공간이다. 각진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곡선형 산책로를 통해 공간에 활기를 부여하고, 주변으로 계절마다 변화하는 다양한 식생을 배치해 생동감 넘치는 경관을 연출하고자 했다. 세 번째는 숲과 그늘이다.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울창한 숲이 드리우는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고자 했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이승주 팩토리 엘 실장
크리에이티브 디렉팅/브랜딩 제이어드바이저리(JAD)
조경 설계 팩토리 엘(factory L)
건축 설계 제이어드바이저리,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조명 설계 이온SLD
위탁 가산웰스홀딩스
시공 현대건설
위치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60-26
면적
연면적: 258,868.69㎡
대지 면적: 30,180㎡
사진 최용준, JAD, 팩토리 엘
팩토리 엘(factory L)은 2006년 이홍선이 창립한 설계사무소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건축과 조경이 결합된 공간 창출을 시도하고, 디자인과 시공을 연계한 조경을 실현해왔다. 대표작으로는 시몬스 팩토리움, 시몬스 테라스, 현대지식산업센터 퍼블릭 가산, 씨엔씨티에너지, 플레이스 캠프 제주, 산운 SK아펠바움, 논현 아펠바움, 유엔빌리지 루시드하우스, 유엔빌리지 빌라드그리움, 루시드에비뉴, 경희대학교 걷고 싶은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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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재
Youonejae
유원재는 잊힌 한국식 온천 문화 부활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유원재 조경은 전통과 지역에 기반을 둔 경관이 어떻게 21세기 한국식 온천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적 대답이다. 유원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의 핵심은 온천에서 어떻게 전통과 지역 감각을 녹여내고 우리 삶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하는지다. 의미를 넓히면, 근대가 순수를 찾기 위해 삭제한 시공간을 되찾는 방법에 대한 실체적 연구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접근이 좋겠다. 그런데 왜 은유인가.
인간은 전체 감각 세포의 60%가 시각에 할애된 시각화에 특유된 포유류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들은 뇌에 이미지로 저장되는데, 인간의 사고력은 유사성을 가진 몇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떠올릴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행을 동물에서 식물로의 변신이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이 능력을 은유라 부른다. 은유는 문자를 만나면 시가 되고, 선율이 더해지면 노래가 된다. 그리고 땅을 만나면 조경가 정영선이 말하는 땅에 쓰는 시, 조경이 될 것이다.
온천이라는 무대 위에 은유라는 장르로 전통과 현대, 자연과 사람을 주제로 한 음악을 합주할 기회를 얻었다. 공연의 악기는 변치 않았고 변치 않을 것들인 이 땅의 물, 돌, 풀이다. 고리타분한가. 음악은 피타고라스 음률 12개로 무한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 않나. 물, 돌, 풀이 만들어낼 은유의 경관은 끝이 없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장혁준 비오이엔씨 실장
조경 설계·시공 비오이엔씨(BEOH)
건축 설계 와이그룹(Y GROUP)
인테리어 C.C.P, 와이그룹
조명 설계 비츠로앤파트너스(Bitzro&Partners)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주정산로 6
면적 12,000㎡
완공 2023. 9.
사진 장혁준, 박영채
비오이엔씨(BEOH)는 감각의 명료한 구축을 추구하는 조경설계사무소다. 작은 정원에서부터 도시 규모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을 다루고 있다. 설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구현을 가치 있게 생각해 시공, 감리, 관리까지 공간 만들기의 모든 업역을 가로지르며 이상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