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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림픽 경기장
지난 20세기가 “거장 (Master)”의 시대였다면 새로운 밀레니엄을 여는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조정자(Coordinator)”일 것이다. 20세기는 거장들의 독창성과 혁신적인 기술개발 등을 통해 발전해 왔다. 설계분야에서 이들의 대다수는 건축가들이었으며 조정자로서의 조경가의 역할은 유감스럽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세기말에 이르러 세계가 고도로 복합화되고 다원화됨에 따라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례없이 복잡하고 혼돈된 오늘날의 사회는 더 이상 어느 한 사람의 천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용납하지 않게 되었고, 개인 중심적이고 소모적인 과거의 개발모델은 환경문제 등과 같은 예견치 못했던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과거의 단일 전문가 선도 모델은 무기력해졌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서만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환경설계 분야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으며 새로운 밀레니엄 앞에서 오늘의 사회가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창의적인 조정자로서의 조경가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하그레이브스가 계획, 설계한 시드니 2000 올림픽 경기장은 이와 같은 시대의 요구에 따른 조경가의 새로운 역할을 훌륭하게 증명해 주었다.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의 부지는 원래 대규모의 방목·도살장 및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던 장소로 육가공산업이 1960년대에 문을 닫은 이후로 도살장은 폐쇄된 채 버려져 있었고 쓰레기 매립지는 1990년대 초에 최종 매립을 막 마친 상태였다. ※ 키워드 :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 플라자 파크, Ecological Design ※ 페이지 : 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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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금강아트휀스
(주)금강아트휀스는 1984년 금강휀스라는 철망울타리 회사로 시작, 1988년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국민들의 생활문화가 향상됨을 인식하여 1990년대에는 디자인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국내의 소재나 디자인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도 뒤떨어져 있어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직접 디자인하거나 국내 디자인 전문회사에 의뢰하기도 하면서 차츰 극복해나가기 시작했다. 초창기 실험적으로 개발한 KAF1101은 아직도 안내책자 1순위에 실리는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자인이 구매자의 요구에 따라 변경될 때마다 다시 제작해야하는 금형비가 만만치 않았고, 그런 회사에 걱정스런 시선을 보낸 이들도 많았지만 전종열 대표이사의 고집스런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결과 기존의 휀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각 기업체나 관공서의 로고 또는 도시의 이미지를 형상화한‘아트휀스’와 아이들에게 친근한 코끼리·튜울립·팬더·격자문양 등을 활용한 낮은‘화단용휀스’, 간결한 이미지의‘가드휀스’, 구름문양·지역로고를 이용한‘교량난간’등 알미늄 합금의 다양한 금형을 5백여 가지나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금형디자인에 대해서만 상표등록 4건, 실용신안 특허 1건, 의장등록 80여건을 필하였으며 90여건의 의장등록을 출원중에 있다. 1999년에는 휀스업계 최초로 디자인 공모전을 시행하여 조경계의 관심을 끌었고, 회사내 디자인팀을 설립해 철도청 시설물 공모전에 응모하여 6개의 작품이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특히 최근에는 조경시설물 설치공사업면허와 더불어 KSA 9002와 ISO 9002 인증도 취득하여 휀스업계의 선두주자로 명실공히 자리잡고 있다.
※ 키워드:금강아트휀스, KAF1101
※ 페이지: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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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조명 ; 야간경관 개선을 위한 조경분야의 역할과 과제
경관조명이 조경설계의 주요 설계요소임을 자각해야 조경분야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은 경관조명을 그 동안의 조경설계와는 다른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설계 기법인가 하는 식의 피상적 접근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정원이나 공원이나 쇼핑몰이나 또는 분수 등 수경시설의 설계에서 조명을 설계요소에 포함하여 배웠으면서도 실무에 나와서는 경관조명이 조경가의 몫이라는 사실을 왜 슬며시 잊고 싶어하는가?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우리나라 건설관련 법령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조경가들은 정원이나 보행로 그리고 공원, 나아가 도시의 경관을 설계하면서 낮뿐만 아니라 밤의 이용도 충분히 고려하여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보행로·공원의 경우는 경관조명이라는 설계요소가 부분적으로나마 정착되는 단계로 보여지나, 공동주택단지의 경우는 이제 걸음마단계라고 볼 수 있다. 주택단지설계의 경우 휴게소·놀이터·운동장 등의 법적 시설공간과 보행로·마을마당·광장 등 옥외공간의 경관조명에 대하여 좀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단순한 밝기 위주의 보안등 차원에서 나아가 각 공간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키고 독특한 밤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조경설계를 해야 한다. 대한주택공사의 경우 단지와 공원의 경관조명설계를 조경가가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하고 있다. 아직 보안등 같은 부분은 전기전문가가 설계하고 있으나 보안조명과 경관조명이 하나의 그림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어, 앞으로 공원이나 주택단지 옥외공간의 설계에서 경관조명의 역할이 계속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따라서, 우리는 조경설계의 주된 요소인 경관조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우리가 설계하는 공간의 기본계획에서부터 경관조명설계를 충분히 반영하여야 한다.
※ 키워드: 경관조명, 투광조명, 안상욱※ 페이지 : 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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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수도
강렬한 태양과 뜨거운 정열의 나라 스페인(Spain). 스페인은 유럽대륙의 서쪽 이베리아(Iberia) 반도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로, 북동쪽에는 피레네(Pyrenees)산맥이 남쪽으로는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산맥이 중앙에는 해발 600m이상의 황량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고원지대(高原地帶)가 자리잡고 있다. 나라가 큰 만큼 지역에 따라 기후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중부는 기온의 차가 극심하고 매우 건조한 대륙성기후를 북부는 비가 많은 해양성기후를 남부는 연중 온난다습한 지중 해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국가를 이루는 민족들도 매우 다양한데, 바르셀로나(Barcelona)를 중심으로 한 동부의 ‘카탈루냐(Catalonia)지방’과 북부의 ‘바스크(Basque)지방’그리고 남부의 ‘안달루시아(Andalucia)지방’등의 일부 지방은 지금도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지방색이 대단히 강한 나라이다. 중부지방의 중심도시이자 현 수도인 마드리드(Madrid)는 인구가 4백만명에 이르는 스페인 최대의 도시로, 유럽국가의 수도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해발 65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동안 이슬람(Islam)이 지배했던 스페인의 역사에서 마드리드는 톨레도(Toledo)·그라나다(Granada)·코르도바(Cordoba)·세비야(Sevilla)와 같은 유서깊은 도시들에 비하면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데, 1561년 펠리페(Felipe) 2세에 의해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한갓 초라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마드리드의 탄생은 이슬람이 지배했던 대략 9세기경에 시작된다. 회교도인 무어인(Moor)들이 당시의 중심도시였던 톨레도 인근의 만사나레스(Manzanares)강 유역에 성벽을 쌓았는데, 톨레도의 변방으로 만사나레스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된 지역이 현재 마드리드가 입지한 곳이다. ‘마드리드(Madrid)’라는 지명은 ‘성채(城砦)’ 를 뜻하는 아랍(Arab)어의 ‘마헤리트(Magerit)’에서 유래된 것이다. 회교도에 저항했던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國土回復運動)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로 1085년 카스티야(Castilla)왕국의 알폰소(Alfonso) 6세에 의해 마드리드가 탈환되었는데, 카스티야왕국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마드리드도 점차 확장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수도였던 톨레도의 위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492년 통일국가 스페인이 성립된 이후 마드리드는 오스트리아(Austria)의 합스부르크(Hapsburg)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561년 펠리페 2세에 의해 “이베리아반도의 한가운데이자 당시 계획중이었던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왕궁에 근접해 있다”는 지리적 장점에 힘 입어 통일국가의 수도가 됨으로써 비로소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프랑스(France)의 부르봉(Bourbon)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어 마드리드는 합스부르크시대의 양식과 부르봉시대의 양식이 혼재하는 2가지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데, 특히 카를로스(Carlos) 3세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수많은 건축물들의 축조와 함께 시가지가 대규모로 정비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Napoleon)의 침공과 1936년에 발발한 스페인내란 등으로 스페인 전역에는 혼란의 시대가 계속되었지만, 수도로서의 마드리드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그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증대되었고, 교외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들어서는 등 급격한 인구유입으로 도시의 영역은 대규모로 팽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키워드: 마요르광장, 아르메리광장, 스페인광장, 마드리드 ※ 페이지 : 128~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