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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스케이프] 동물원의 탄생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 덕분에 난데없이 고래가 세간에소환됐다. 센 강에 흘러들어왔다가 고향과 영원히 이별한 벨루가 소식과 인간에게 끝까지 길들지 않고 고향인 제주 앞바다로 방류된 남방큰돌고래 태산이가 최근 죽음을맞이했다는 얘기까지, 이러저러한 고래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이기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개나 고양이처럼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면서 가축으로 진화한 동물도 있지만, 대부분 동물은 야생에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인간은 애완이든 식용이든 동물을 끊임없이 곁에 두려 했는데, 이런 욕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정원’이고‘동물원(zoological garden)’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유囿라고 하여 금수를 키우는 곳을 아예 구별했다. 앵무새와 원앙등 진귀한 새를 기르는 것은 물론이고 거위나 사슴, 학 등을 곁에 두기도 했다. 학은고고한 생김새와 긴 수명 때문에 예부터 신선과 함께 사는 동물이라 여겼고 속세를떠난 은자隱者들이 특별히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옛 기록에서도 선비들이 학을 애완용으로 정원에서 길렀다는 사실이 종종 확인된다. 유럽으로 가면 그 양상이 좀 더 야만적이고 노골적이다. 우선 동물 수집은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이른 시기부터 확인되는데, 이집트의 아시리아제국을 시작으로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등 고대 사회에서부터 있었다고 알려진다. 로마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나 네로 황제는 물론 귀족들까지도 진귀한 동물을 모았으며, 트라야누스 황제는약 1만 1천여 마리의 동물을 수집했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도 거대한 동물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13세기 영국의 헨리 1세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2세로부터 받은 표범 한 마리를 사자와 낙타 등과 함께 우드스톡에 있는 자신의 궁에 동물원을 만들어 관상했다. 우드스톡의 동물원은 이후에 런던탑을 거쳐 19세기 리젠트 공원에 조성된 런던 동물원으로 이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동물을 수집하는 일은 정치와 권력의 힘이 작동되는 인류의 도시 문명사와 궤를 같이할 만큼 오래된 일이다. 과거에는 동물원이 왕권과 부를상징하며 조공이나 전리품으로 획득한 동물을 정원에 모아 두고 보고 즐기는 데 쓰였다면, 제국주의가 팽배해진 19세기에 이르면 아프리카는 물론 남미 등 식민 국가의동물을 무작위로 포획해 동물원을 채우게 됨에 따라 동물원에는 식민지 정복에 대한상징이 두텁게 드리우기 시작한다. 근대적 시각으로 보면, 동물원은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우월감이 드러나는 공간이며미개한 동물과는 다른 문명화된 인간의 존재를 찬양하는 공간이었다. 또 세상에 대한인간의 호기심과 탐구심이 빛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한편, 동물원은 동물 분류와 서술방식의 발전을 견인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해부학적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동물 보존 박물관을 만드는 계기 또한 마련했다. 세계의 유명한 자연사박물관들도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원은 방문객에게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진화했고 대중을 위한 공공의 오락 장소로 발전했다. 과거의 계획 공원에는 대부분 동물원이 설계됐고, 동물원은 점차 도시 근대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시설로 자리매김했다. *환경과조경413호(2022년 9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김정은, “일제강점기 창경원의 이미지와 유원지 문화”, 『한국조경학회지』 43(6), 2015, pp.1~15. 김해경 외, “전통조경요소로써 도입된 학(鶴)과 원림문화”,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0(3), 2012,pp.57~67. 니겔 로스펠스, 『동물원의 탄생』, 이한중 역, 지호, 2003. 서태정, “대한제국기 일제의 동물원 설립과 그 성격”, 『한국근대사연구』 68, 2015, pp.7~42. 오창영, 『韓國動物園八十年史(昌慶苑編)』, 서울특별시, 1993. 우동선,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 그리고 메이지의 공간 지배”,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 효형출판,2009, pp.202~237. 한국전통조경학회 편, 『동양조경문화사』, 문운당, 2011.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조경사 자격제 신설을 위한 첫걸음을 떼며
    ‘한국조경헌장’(한국조경학회 제정, 2013년)은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 설계, 조성, 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라고 조경을 정의한다. 하지만 전문 직능(profession)으로서 조경가의 직무와 역할을 적확하게 규정하는 법적 장치와 자격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조경의 태동기인 1970년대부터 이미 기술사법에 따른 조경‘기술사’와 조경‘기사’ 자격이 시행되어왔지만, 조경(가)을 기술(자)의 틀에 가두는 기술사-기사 자격제는 조경설계의 업역을 제한하고 조경가의 위상을 불안정하게 방치했다. 건축의 ‘건축사’에 해당하는 적절한 자격 (또는 면허) 제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어쩌면 한국 조경계는 지난 50년을 허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전문 직능으로서의 조경과 학문 분과로서의 조경학이 이 땅에 도입된 지 50년, 비로소 조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고 일상의 조경 문화가 풍요로워지고 있지만 정작 조경계는 위기를 호소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했다. 새로운 자격 제도를 통해 한국 조경의 난맥을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줄여 말하자면, 건축의 건축사처럼 조경에도 조경사가 필요하다는 것. 물론 ‘조경사’가 자격과 면허를 갖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견해가 있겠지만, 그건 다른 논제다. 새로운 조경사 자격제는 조경의 전문성과 위상 재정립, 조경설계 업역의 보장과 확장, 합리적 설계 대가 실현, 조경설계 인력 양성, 대학 조경 교육의 정상화 등에 촉매로 작용하면서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지난 5월 13일 국토교통부가 고시한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에 자격제 관련 내용이 들어가 ‘조경사’ 신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번 계획의 추진 전략 중 하나인 ‘조경의 질 제고를 위한 조경 산업 기반 강화’ 항목에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 제도’가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자격 제도를 모색하는 토론의 첫걸음을 떼고자 이번 호 특집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을 꾸렸다. 이상수(스튜디오201 소장)는 조경설계 스타트업의 장벽, 엔지니어링사업자 면허의 현황과 실태, 조경기술사사무소 자격 취득의 난맥 등에 초점을 두고 현행 자격 제도의 한계와 문제를 짚는다. 안세헌(가원조경 대표)은 조경설계업 시장의 난제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자격제 도입의 필요성과 추진 방향을 살핀다. 이윤주(엘피스케이프 소장)는 영국과 독일의 조경사 제도에 대한 정보를 소개하는데, 특히 현지의 조경사 인터뷰를 바탕으로 조경사 취득 절차를 상세하게 다룬다. 이해인(HLD 소장)은 미국의 조경사 제도를 명칭, 자격, 평가, 권한, 관리 등 다각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의 제도를 비교함으로써 현행 한국 조경설계 자격 제도의 문제점을 도출하고 개선점을 제시한다. 이남진(바이런 소장)은 조경사 자격 신설을 위한 관련 법규를 살피고 ‘건축사법’과 같은 위상을 갖는 별도의 법령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특히 건축사법의 구조를 참고하여 총칙, 조경사의 자격, 조경사 자격시험, 조경사의 업무, 조경사무소, 조경사협회로 구성된 (가칭)‘조경사법’의 체계와 내용을 제안한다. 본지 발행인 박명권이 사회를 맡고 김선미(건화엔지니어링 부사장), 김태경(강릉원주대 교수), 서영애(기술사사무소 이수 대표), 이영주(국토교통부 사무관), 이정섭(국토교통부 주무관)이 참여한 좌담회에서는 조경사 제도의 필요성, 명칭과 위상, 조경설계사무소의 지속가능한 운영, 설계비와 계약서, 정책적 지원, 사회적 공감대 형성 등 조경사 신설과 관련된 다양한 의견이 펼쳐졌다. 새로운 자격 제도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곤 했지만 단발성 논의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경사 자격제에 대한 조경계 내부의 공감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환경이 형성되고 있는 최근 상황을 어영부영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조경계 내부의 공감과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제도의 체계와 내용을 뒷받침할 데이터 축적과 기초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조경협회와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는 물론 한국조경학회가 함께 참여하는 기획‧연구팀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이번 특집에 포함하지 못했지만, 조경사 자격제와 하나로 연동될 (가칭)‘조경교육인증제’에 대한 연구와 공론화도 필수적이다. 전문 교육은 전문 자격의 필요조건이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창밖 풍경이 환해지고 있다
    말하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말투가 ‘여자 같다’며 놀림받은 어린 시절 기억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씩씩하게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면 ‘여자 같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게 놀릴 만한 이유인지를 따졌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습게도 이런 일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해서, 발표를 최대한 피했고 꼭 해야 할 경우엔 훌륭하게 발표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않는 데 큰 노력을 들였다. 남들 앞에서 목소리 내기를 꺼려 왔음에도 라디오 출연 섭외를 승낙한 건 오래 전 친구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 친구와 택시를 탄 적이 있다. 내가 행선지를 이야기했더니 택시 기사가 대뜸 사내자식 목소리가 계집애 같다며 웃었다. 인사보다도 먼저 훅 들어온 말에 제대로 항변도 못했는데 친구가 두둔해주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거라고. 그래서 좋은 거라고. (이 글에 쓰기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쏟아내자 택시 기사는 당황했고, 난 조금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격주 목요일 새벽마다 라디오 방송을 하러 간다. 스튜디오에 앉은 뒤 PD가 이제 시작한다는 사인을 보내면 ‘목소리를 한 톤 낮춰 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평소처럼 DJ에게 인사를 건넨다. “2주 만에 뵈어요. 잘 지내셨죠?” 그 친구가 떠오르는 사연을 방송작가가 프롬프터에 띄워 줄 때도 있다. ‘조곤조곤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좋아요.’ 문득 거리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그 택시에도 이 목소리가 가닿고 있을지 궁금하다. 창밖 풍경이 환해지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얼라이브어스 얼라이브어스, 어셈블!
    디자인 ‘그룹’으로서의 지향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사무실명은 구성원 그 누구의 이름도 지칭하지 않는다. 회사라는 것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닐 것, 같은 이름 아래의 디자인 작업이 다음 세대까지 연속될 것, 내부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수평적 관계를 유지할 것을 바라는 의도다. 설계 지향점과 취향을 공유한 집단으로서의 의미가 지속되길 바라며, 동시에 개개인의 삶을 마모시키지 않으면서 성취감과 만족도, 성장력을 높이려 한다. 완성도 있는 옴니버스가 탄탄한 개별 플롯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처럼, 결국 좋은 집단은 좋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원 몇몇이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으로 글을 채워보려 한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공간 강한솔(이하 강)서플러스글로벌 용인클러스터는 사옥과 공장이 결합된 단지다. 직선적 조형을 통해 단지의 입체적 인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클라이언트의 지지를 등에 업고 평소 해보고 싶었던 요소를 적극 시도했다. 플랜터와 다단형 구조물에 많은 공을 들였다. 반면 시공사와의 관계에서는 난점을 경험했다. 공간 배치와 자재 선정, 지정 소재의 반입 여부 등 여러 지점에서 감리권이 부재한 상황이 어려움을 만들었다. 많은 조경가가 디자인 빌드를 지향하는 데는 이유가 있나 보다. 알투마마 스타디움(Al Thumama Stadium)이 드디어 완공됐다. 3년여의 시간, 다양한 주체 사이에서의 균형 유지 등 난이도가 상당했던 프로젝트지만 월드컵이라는 전 세계적 이벤트에 설계가로 참여한 묘한 감정이 배어 있다. 의미 있는 여행 목적지가 하나 추가됐다. 권예린(이하 권) 카페 겸 레스토랑 모쿠슈라(MOCHUISLE) 2호점 시공을 준비하는 중이다. 파주에 위치한 4층 규모의 대형 카페로, 외부 공간을 설계하면서 공간 경험의 시퀀스와 건축의 조화를 오래 고민했다. 주로 차량으로 방문하는 위치임을 고려해 도로와 맞닿은 전면부는 화려한 식재가 반기도록 구성했고, 테라스와 실내에서는 식재 영역이 배경이 되어 아늑하고 풍성한 공간이 되도록 설계했다. 실제 공간으로 잘 구현되도록 세세한 부분들을 다듬어가는 중이고, 건축 및 인테리어와 소통하며 더 많은 고민을 녹여내고 있다. 머릿속의 설계가 실재하는 공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순간 느끼고, 완성될 공간에 대한 더 큰 책임감과 기대를 갖게 된다. 김연정(이하 연) 입사한 지 반년 남짓 시간을 보낸 신입이 바라본 얼라이브어스가 만들어 온, 만들어 갈 공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각 공간이 가진 이슈에 어떤 대안을 내놓아야 할까, 클라이언트의 의견은 어떻게 반영해야 할까, 사람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할까, 어떤 시점에서 바라볼까 등 수없이 고민하고 질문한다. 결정된 디자인에 공간을 향해 던졌던 질문의 답들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뿌듯함을 느낀다. 김태경(이하 태) 제주 롯데호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는 오래전부터 기회만 주어진다면 꼭 해보리라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많은 디자인을 풀어낸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제주도 곶자왈에서 느껴지는 야생성, 깊이, 밀도, 색채, 경험의 흐름 등 추상적 공간감을 재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다량의 곡간형 대교목 나뭇가지들이 겹쳐져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 내고, 관목과 지피의 수종 변화로 점점 깊어지는 숲을 표현했으며, 공간을 거닐다 보면 작은 정자들을 만나도록 구성했다. 부산 롯데호텔 수영장은 조경가로서 매우 도전적인 콘셉트로 출발했다. 호텔의 야외 수영장을 산책하는 정원 공간으로 해석했다. 수영장 자체는 물 속 산책로가 되었고, 수영장 주변 공간은 정원 산책로로 연출했다. 생소하고 시도해보지 않은 콘셉트의 수영장이었지만, 발주처와 운영사, 시공사 모두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두 프로젝트 모두 올해 완공과 개장을 앞두고 있어 기대감과 두려움 속에서 한 해를 보내는 중이다. 이향지(이하 향)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판교에 N기업의 신사옥 설계를 진행 중이다. 사옥 디자인은 기업이 지향하는 철학과 가치를 드러내는 매개체이며, 기업과 지역 사회가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수단이다. 기업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현재 진행형의 변모를 드러내야 하고 기업의 미래를 나타내는 요소로 무장해야 한다. 애플, 구글, 아마존 등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도 스타 디자이너들을 앞세워 그 지역의 랜드마크 건축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이번 프로젝트도 판교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기대하며 국내외 대형 설계 사무소들과 함께 협업하는 중이다. 실험적이나 기능적이고, 아름답지만 친환경적이며, 추상적이면서도 견고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 있다. 장기간 긴 호흡으로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이기에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끝낼 시점에는 수없이 던진 심도 있는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까워진 조경가가 되어있길.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강 내가 가진 모든 관계 중 어쩌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즐겁다. 얼라이브어스가 내게 주는 매우 큰 행운이다. 업무 관계에서의 전문성은 당연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과 신뢰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그어놓은 암묵적인 선을 민감하게 파악해야 하며, 놓인 그 선의 위치가 인원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인원수가 늘어감에 따라 전원이 만족하는 상황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조심한다. 모든 것이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모든 개인이 중요하다. 현재를 대처하고 미리 걱정은 말자. 권 파티션 없는 공간에서 매일 책상을 넘어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실없는 농담으로 그칠 때가 대부분이지만 이런 가벼움이 디자인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이자 설계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디자인 미팅에 모두가 참여하고 편안하게 짧은 아이디어와 단편적인 생각을 던지는 과정에서 설계의 중요한 지점을 찾아 나간다. 혼자 고심하는 것만이 집요한 디자인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옆 사람이 툭툭 내뱉는 한마디로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하게 되고 가려진 것들을 보게 되면서 새로운 방식을 믿게 되었다. 독립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지만 얼라이브어스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일과 생활 전반에 걸친 ‘어스(us)’의 힘을 배워가고 있다. 연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공간부터 잘 만들어야 한다. 물리적인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내 주변 환경에 가치를 잘 부여하는 일들을 포함한다. 서울의 한 작은 사무실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가 생활하는 이 공간은 좋은 시너지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곳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프로젝트에 나비효과를 일으켜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한다. 태 재미가 없었으면 디자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재미가 없었으면 창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재미가 없었으면 지금의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회사 생활에 재미가 없어진다면 언제든 조경 디자인 분야를 떠나 제2의 꿈을 찾아 떠날 생각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동네 친구를 만나서 노는 것보다도, 그 어떠한 취미 활동보다도 디자인하는 과정이 제일 재미있다. 회사 사람들과 농담하고 노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기 회사에 있다. 나의 재미를 위해 고단한 사회생활을 해주는 모든 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난 너무 재미있는 걸. 아, 이 막연한 글 다 썼으니 이제 놀아보자. 향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하고 싶다는 것, 그 바람은 그저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허상일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소년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너, 내 동료가 돼라”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나 가능할 것 같던 그 이상이 우리가 함께하는 이 공간에서 ‘살아있다(alive)’고 느낀다. 의식적으로 선택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도, 균형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배운다. 이는 구성원 모두가 소통과 관계를 우선시하고 성취와 상실, 성공과 실패, 이기주의와 희생, 질투와 존중, 다름과 인정과 같은 끊임없는 경험의 축적 속에서, 거듭되는 좌절이 있겠지만 겸손함과 우정을 쌓으며 우리가 함께하는 이 공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그룹의 이름처럼. 건강한 ‘그룹’으로의 지향 글을 쓰는 것은 소중한 기회다. 우리를 보여줄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일상에 무뎌져 흘려보내는 생각과 감정을 잡아두고 살펴볼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번 글은 개별 인원들의 사고들로 엮은 그룹으로서의 판단을 공유할 수 있었기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 모두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담아낸 것은 아니지만 과정에서 나눴던 대화들 역시 같은 비중으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결국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글을 통해 조금은 더 명료하게 보게 된 각 입장 사이의 균형감이 관건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늘어날 수 있는 내부적 시선과 새로운 외부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더욱 더 그럴 수도 있다. 그룹으로서의 고유한 분위기와 디자이너로서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 할것이다. 여러모로 총괄적 시나리오와 각 장면의 미학적 미장센 모두 필수적이다[email protected]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 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학제간 디자인을 추구하며, 이러한 방식이 도시의 다양한 문맥에 더 좋은 디자인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모던스케이프] 방사형 가로, 근대 도시의 아이콘
    19세기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파리 대개조 사업이 지금까지 거론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구 폭증으로 생긴 여러 사회 문제를 도시 설계로 풀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당시 파리에는 전염병의 위협, 불량한 주거 환경, 도시 폭동 등 각종 도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오스만은 상하수도망 설치와 녹지 공간 계획, 공공 건물 건설과 확충 등 도시 기반 시설을 체계화해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그가 시도한 가장 인상적인 방법은 도시 인프라로서 가로망 구축이다. 대로를 신설해 구도심과 파리의 인접 도시를 연결했고, 센 강을 따라 동서와 남북에 축을 만들어 주요 교차점마다 방사형 가로를 연결했다. 확산과 집중, 연결이 반복되는 파리의 도시 가로 체계는 바로크 양식의 전형을 계승한 것으로, 베르사유 궁에서 태양의 빛처럼 무한히 뻗어나가는 알레(allée)를 연상시킨다. 파리 대개조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논의된 미국 워싱턴 D.C. 도시계획에서도 방사형 가로가 도시 경관의 중요한 요소였다. 워싱턴 도시계획을 주도한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Enfant, 1754~1825)은 프랑스 바로크 양식에 영향을 받아 가로망을 설계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파리와 다른 점은 북미의 위대한 국가 수도 이미지를 표현하고 대통령의 권위와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가로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방사형 도로의 15개 교차점은 미국 15개 연방주를 상징하며 국회의사당의 정서쪽에 내셔널몰을 두고 북서쪽 사선으로 뻗은 펜실베이니아 대로 끝에 백악관을 위치시켜 강렬한 시각 축을 만들어냈다. 당시 워싱턴은 신생 독립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수도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파리와 워싱턴이 방사형 가로를 취했다고 해서 근대 도시의 필수 요건에 방사형 가로가 포함되는 건 아니겠지만, 근대 초기에 논의된 서울 도시계획안들을 들여다보면 방사형 가로가 확실히 근대 도시의 표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서울에 방사형 가로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몇 가지 다른 의견이 있다. 가장 쟁점이 되는 장소는 지금의 서울광장 일대로, 경운궁과 환구단 사이의 태평로와 서소문로, 을지로, 정동길과 소공로 등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역사학자 이태진을 비롯해 한국 근대 도시사를 전공한 몇몇 학자는 서울광장 일대의 공간 가로 형태가 워싱턴 D.C.의 도시 형태를 모방한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아관파천 전후로 활약한 내부대신 박정양과 한성부 판윤 이채연은 한성부 도로의 확장과 신설 등 정비 사업을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워싱턴에 체류한 경험이 있는 친미파로 워싱턴의 방사형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 개수 사업을 하면서 자연히 방사형 도로 구조를 의식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도시, 건축, 조경 분야 연구자들은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 일대 도로 체계가 T자형의 전통적 가로 형식을 따르고 있지 않음은 확실하지만 방사형이라고 하기에는 그 형태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가로가 교차하는 결절점의 처리도 어색할 뿐 아니라 환구단과 경운궁 등 주요 국가 시설이 있지만 가로 체계와 맞물려 있는 것도 아니다. 스케일 면에서도 도로와 교차점의 균형이 맞지 않아 도시의 핵으로 간주하기도 애매하다. 무엇보다 이 일대를 다니면서 방사형 도로 구조를 인식하는 게 쉽지 않다. *환경과조경412호(2022년 8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徐東帝 외, “京城都市構想図」に関する研究”,『 日本建築學會設計系論文集』 687, 2013, pp.1179~1186. 민유기, “파리, 혁명과 예술의 도시”, 『도시는 역사다』, 서해문집, 2011, pp.170~196. 유치선·이수기, “대한제국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재평가: 근대도시계획의 보편적 특성을 중심으로”, 『국토계획』 50(3), 2015, pp.5~22. 이예림, “워싱턴 D.C. 도시계획과 시각 이미지 연구”, 『한국예술연구』 28, 2020, pp.93~112.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82년생 환경과조경, 마흔 살이 되다
    『환경과조경』이 만 나이 마흔 살을 맞았다. 1982년 7월, 국내 최초의 조경 전문지 계간 『조경』이 창간되었다. 1985년 6월(통권 9호), 『환경 그리고 조경』으로 제호를 잠시 바꿨고, 10호부터는 『환경&조경』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며, 1992년 1월(통권 45호)부터 월간지 『환경과조경』으로 전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 번의 결호도 없이 40년간 간행된 『환경과조경』은 한국 현대 조경사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한국 조경의 성장 신화를 기록해왔을 뿐 아니라 조경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며 그 경계를 확장해왔다. 2013년 10월호(통권 306호)부터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옷을 갈아입은 『환경과조경』은, 조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고 일상의 조경 문화는 풍요로워졌는데도 정작 제도권 조경은 위기에 빠진 역설적 환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지향과 좌표를 재설정했다.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꾸는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글로벌 정신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 기지, 이 세 가지 좌표를 매달 지면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원칙으로 삼았다. 2021년 8월, 400호를 펴내며 쓴 에디토리얼에 500호 시대를 향하는 『환경과조경』이 묻고 답해야 할 과제를 이렇게 적었다. 첫째, 한국 조경의 전문성과 수월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둘째, 조경 저널리즘의 역할을 기록과 비평을 넘어 이슈 생산과 소통으로 확장한다. 셋째, 다음 세대 조경가와 미래 세대 비평가를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한국 조경의 2030년대를 기획한다. 『환경과조경』의 지난 40년 여정에 변함없이 동승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이 세 가지 과제를 풀어갈 도전적 노정에도 늘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린다. 한층 더 풍성한 지면으로 꾸릴 40주년 기념호는 오는 12월로 잠시 미루지만, 우선 이번 호에는 한국 조경의 기반을 질문하는 기획 특집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올린다. 1970년대 초, 한국 조경의 태동과 함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과 대상, 그 영역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며 조경의 사회적‧문화적 역할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의 범주를 제한하는 장애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것은 번역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트)에 적확한 번역어로 조경(가)이 아닌 다른 말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 조경(학)의 실천 영역과 학문 범주를 포괄할 수 있는 개명이 필요한가? 올해 2월 22일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의 발표 원고들을 다듬어 수록하는 이번 특집이 조경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의 명칭을 둘러싼 신중한 토론의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다음 달에는 40주년 특집의 두 번째 순서로 가칭 ‘조경사’ 자격제 신설의 배경과 필요성을 논의하는 특집이 예정되어 있다. 창간 40년 기념 ‘2022 조경비평상’에는 예년보다 글쓰기의 수준과 글의 완성도가 높은 네 편의 평문이 제출되었으며, 정평진의 응모작 “거리에 대한 권리: 철거된 ‘르네상스 호텔’과 공개공지, 그리고 이우환의 ‘관계항’”을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글은 도시 공공성의 매개 수단인 공개공지의 한국적 현실과 과제를 선명한 문제의식과 단단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추적하고 발견한 수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수상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한국 조경의 최전선을 이끄는 비평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이번 달에 특히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는 ‘파리공원 리노베이션’이다. 1987년에 문을 연 파리공원은 한국 조경 설계를 변화시킨 기점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교목과 넓은 잔디밭, 판에 박힌 정자와 퍼걸러, 몇 가지 운동 시설과 놀이 시설을 적절히 섞으면 곧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파리공원은 공원도 ‘디자인’해야 하는 대상임을 일깨워 주었다. 틀에 박힌 공원 패러다임을 ‘설계’라는 도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파리공원의 실험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최근 들어 20세기 후반에 만든 도시공원을 고쳐 쓰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복원과 변경, 보존과 재생, 기념과 이용의 충돌이라는 난제를 풀어낸 방식에 대해 다양한 토론과 비평이 이어지길 기다린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너의 목소리가 들려
    길을 걷다 보면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건넨다. 내달리는 차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건만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세요”라고. 그저 지나는 길인데도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며 기계들이, 나를 나무란다. 평소엔 신경조차 쓰이지 않던 기계의 목소리를 피곤하고 지친 날에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나곤 한다. 한 독립서점이 일상에서 쓰일 만한 따뜻한 문장 몇 개를 스티커로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다. 고마워, 사랑해, 응원해, 괜찮아, 힘내 같은 너무 뻔한 말들이라 제작하면서도 재고로 쌓이겠다고 생각했다는데, 예상과 달리 금방 동났다고 한다. 때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마디가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 아닐까. 우리가 서로에게 들려줘야 할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뻔하고 보잘것없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말 아닐까? 물론 길가에 고마워, 사랑해, 힘내 같은 말을 읊조리는 기계가 있다고 상상하면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긴 하지만……. 대신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얕은 말을 전해볼까 한다. 괜찮아요. 모두 다 잘될 거예요.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설계 디원 시간의 감각으로 빚는 감동의 디자인
    설계 철학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꽃 사이를 벌이 드나들고. 아기들 공원에서 뛰놀 때. 가슴 두근거린다. 모든 것 공경스러워 눈 가늘어진다”. 얼마 전 작고한 김지하 시인의 연작시 중 ‘새봄’의 여섯 번째 시다. ‘꽃’과 ‘벌’ 그리고 ‘아기들’을 시적 언어로 삼아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소망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의 궁극적인 설계 지향점과 많이 닮았다. 자연의 생태계가 작동되게 하고 그곳에서 사람이 어우러지고 또 그저 바라보며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이 생기는 장소를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치를 두고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에 안도해도 될 것 같다. 우리 설계의 이상향은 마지막 시구처럼 공경스러워 눈이 가늘어질 정도의 감동이 장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그 추억을 만날 기대 또는 경험하고 싶은 분위기,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다시 발걸음하고 싶은 곳을 남기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욕심이 큰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소박한 꿈이다. 그렇다면 그런 장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첫째, 땅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눈에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잠재된 물리적 특징과 무형의 흔적들까지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세심하게 설계로 풀어가는 단초로써 그 땅의 기억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한다. 둘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대상지를 이용할 다수의 객관성 확보가 전제되어야 하며, 소수 또는 개인의 니즈와 취향,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어떤 공간이든 사람에 근거한 프로그램, 기능, 심미적인 부분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셋째, 시간의 감각을 읽어야 한다. 이 감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점으로서의 시간이다. 시류에 맞는 삶의 패턴과 사람들의 욕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양, 기간이 만드는 변화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해 설계하고, 시간의 변화에도 설계의 본질이 유지되도록 고민해야 한다. 물론 다년간의 설계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시간의 예술로 의외의 효과를 얻거나 반대의 경우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특히 살아있는 식물을 비중 있게 다루는 분야이기에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항상 부족하단 생각에 늘 진지하게 인식하고 담아내려 하고 있다. 흥미롭게 진행한 프로젝트, 공동 주택과 수목원 최근 가장 흥미롭게 진행한 프로젝트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잘 해오고 보람 있게 느끼는 점,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 작업의 대부분은 주거 프로젝트다. 도시의 일상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집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매일의 일상을 마주하는 곳이기에 그 가치와 무게를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특히 도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이용자의 욕구 충족을 위한 프로그램, 삶의 질을 높이고 커뮤니티 활성화를 유도하는 환경을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한다. 빠른 발전으로 생활 환경이 첨단화됐더라도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갈망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 도심 외곽의 정원 있는 집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공동 주택의 조경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좀 더 비중 있고 규모 있게 다뤄져야 한다. 서초그랑자이: 강남의 하이엔드 단지지만 이웃에게 열려 있는 따뜻한 단지를 추구했다. 서초그랑자이는 서초 무지개 아파트를 재건축한 현장으로 2015년 건설사의 수주 경쟁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조경 디자인을 맡았고, 수주 성공 후 특화설계까지 진행하면서 완공까지 6년여 동안 함께했다. 수주를 위해 공격적인 전략이 필요했고, 건설사가 과감하게 동 1개를 비우는 결정을 한 덕분에 도심에서 보기 힘든 넓은 오픈스페이스를 확보할 수 있었다. 조경, 건축, 외관, 인테리어 모든 공종이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시도하고 다수의 공간을 모델링으로 완성해가며 짧은 시간 내에 프로그램뿐 아니라 시각적인 디자인을 밀도 높게 스터디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다. 프로젝트 성격상 시간적 압박감은 있었지만 공종 간 경계를 넘나들며 유연하게 함께 고민했다. 덕분에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고 심미적인 디자인 능력을 키우는 기회가 됐다. 실시설계를 진행하면서 오픈스페이스의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커뮤니티 반대편에 외곽을 둘러싸는 구조의 스카이 워크를 계획했다. 이로써 단조로울 수 있는 평지의 대상지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이용자에게 보다 풍부한 경험을 선사했다. 비 오는 날은 회랑을 거닐고, 맑고 쾌적한 날에는 자연스럽게 지상 3m 높이의 스카이 워크에 걸어 올라가 푸른 오픈스페이스를 산책하며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으로 2021 서울 유니버설디자인 대상에서 광장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사적 공간의 공적 사용을 위한 디자인 해결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외부인 누구나 공공 보행 통로를 통해 중앙 오픈스페이스를 즐길 수 있도록 했고, 또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시선의 산책과 전망을 유모차를 탄 아이와 보호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 노인들도 부담 없이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다 함께 누릴 수 있는 결과물이라서 만족감이 컸던 프로젝트였다. 안산그랑시티자이: 안산그랑시티자이는 1, 2단지를 이어서 현상설계를 통해 특화설계로 진행한 프로젝트다. 6,600세대의 대규모 단지이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산업 중심의 구도심에서 벗어나 보다 쾌적한 생활을 위해 이주할 주민들의 욕구를 단지 자체에서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한 설계 방향이었다. 마침 사회 이슈였던 소확행과 삶의 질에 대한 욕구를 북유럽의 휘게(hygge)라이프의 지향점으로 녹여내 여유로운 삶이 일상이 되는 리조트 같은 단지를 조성하고자 했다. 거점 커뮤니티 개별 동들과 정원들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 소단위 커뮤니티를 만들고, 단위 공간을 확장해 단지 전체에 소속감과 연대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했다. 이웃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삶을 녹여내기 위해 조성한 생활 가로, 캠핑장, 텃밭 등이 형식적 구색 맞춤이 아니라 입주민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고 활발히 즐기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입주 몇 개월 뒤 현장을 답사했는데, 숲 속 휴게 공간에서 차를 나눠 마시던 몇몇의 주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 물으며 차를 나눠줄 테니 마치고 들르라며 말을 건넸다. 잠깐 스치는 여유로움이 우리에게도 전이됐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여유와 담소가 있는 숲 속 작은 공간들이 참 아늑해 보였다. 청계 센트럴포레: 현장 일정과 발맞춰 완성도를 높인 단지다. 청계 센트럴포레는 DL이앤씨의 특화설계로 진행했으며, 프로젝트 시작 5개월 만에 조경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프로젝트라 첫 미팅을 현장에서 하며 숨 가쁘게 진행했다. 대규모 단지는 아니었지만, 단지 순환 동선을 따라 만나는 각각의 정원을 다양한 시설물과 식재 패턴으로 디자인해 매번 새로운 정원을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촉박한 일정 중 현장 상황의 이해, 미술 장식품을 공간 디자인으로 연계시키기 위한 협의 및 위치 조정, 입주 예정자 및 현장 의견을 조율하며 작업해 나갔다. 공간을 모델링하며 눈높이에서 보이는 공간감과 조형감을 고려해 수경 시설의 높이와 단의 조형, 티하우스의 방향과 위치, 가벽의 높이 등을 결정했다. 현장에 방문해서 문제의 소지는 없는지 확인하고 결정해 바로 도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의 공사 시점과 맞물려 설계를 진행하다 보니 시설 및 구조물 등 하드웨어 부분을 현장에 적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듯이 식재는 수급 상황과 현장 여건의 영향을 받는 부분이라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고, 대목들만 어느 정도 위치 시킨 상태에서 현장 검수 요청을 받아 현장에서 협의하며 대체와 보완 수종을 검토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좀 더 자세한 식재 보완 자료를 작성하기도 했다. 가능한 여건 내에서 설계 의도를 최대한 완성도 있게 구현한다는 시공사와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촉박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디테일까지 완성도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립세종수목원 수목원은 유전 자원 보존과 자원화를 촉진하며 학술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관람하고 휴식하는 위락지의 기능도 큰데, 국립세종수목원은 도심의 공원형 수목원을 지향할뿐 아니라 도시의 그린 인프라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기본설계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각 테마에 맞는 정원별 특화설계를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각 테마 정원에 대한 주제, 이용성 및 도입할 전시 수종의 분류 의도 등을 고려해 공간 디자인뿐 아니라 시설, 구조물 디자인까지 발주처와 매주 협의해 상세 도면을 작성해 나갔다. 특히 어린이 정원은 일반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차별화된 체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지형을 이용한 모험 공간을 만들고,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춰 하천의 흐름을 모사하여 물의 변화를 놀이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수목 울타리로 만든 미로 놀이 등 다양한 놀이 요소를 접목한 정원을 조성하고자 했다. 웰컴 공간인 방문자 센터는 수목원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인 만큼 경관뿐 아니라 가치 있는 수목 선정이 중요했다. 적절한 수량 확보가 가능한 이색 수종 선정을 위해 식물 재배원에서 직접 수목을 조사하며 고민한 과정은 값진 경험이 되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무렵 입구 상징 조형물 작업이 완료됐는데, 금속 선재의 작품이다 보니 존재감을 부각할 보완 작업이 필요했다. 조형 마운딩을 제안하여 작품의 콘셉트와 규모가 더 잘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거의 2년 동안 많은 피드백과 촉박한 일정에 지치고 힘들기도 했지만, 노력한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중요시 여기는 것 설계사무소의 실체가 무엇일까? 디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 그 결과물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디원이라는 설계사무소의 실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설계사무소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디원이라는 실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생물과 같이 시간과 함께 진화하며 만들어온 우리만의 개체 특성으로 설계의 대상지와 시류에 유연하게 반응하며, 구성원들도 개인적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설계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구성원들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가치를 지속적으로 찾는 것이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디원의 설계사무소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은 현장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때로는 페이퍼 워크에서 멈추기도 하고, 다양한 이유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 다른 색이 가미되고 명도와 채도가 조절되기도 하지만, 설계 의도가 반영된 색상의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열정을 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설계 과정에서 의견을 나누고 다시 객관화하는 과정을 통해 최선의 디자인을 구현하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조율하며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까지도 설계이기에, 그 과정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즐기는 문화가 존재하는 설계사무소가 되고자 한다. 앞으로 한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 IT, 예술, 공연 등 다양한 전문 분야와 협업하여 새로운 조경 트렌드를 제시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요즘 이슈인 메타버스 개념을 공간에 접목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확장 및 가상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공간 창출 및 기능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다수의 특화 프로젝트를 하면서 시설물의 조형적 효과와 공간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식재의 역할에 관심이 많았는데. 국립세종수목원 프로젝트에서 생소하고 다양한 식재 수종을 접하면서 어렴풋이 식물, 그 자체를 주 프로그램으로 한 다양한 정원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다년간 디자인 경험이 농축된 감각적인 공공 치유 정원도 만들고 싶다. 도시의 건조한 일상 중 마치 카페에 들러 차 한잔하듯이 자연의 생명력을 밀도 높게 음미하며 일상의 치유를 감당하는 미니 정원을 거리의 중간에 배치하는 시리즈물로 생각해봤다. 확장되는 도시가 자연의 생명력으로 채워지고 사람에게 그 에너지가 전이되는 선순환을 희망해본다. [email protected] 조경설계 디원(D.ONE)은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삶을 디자인한다. 단순한 설계를 뛰어넘어 재미있는 상상과 독창성이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며, 보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용하기에 편리한 실용적인 외부 공간을 설계한다. 화려함이나 세련된 기교, 상징적 가치만으로 치장하지 않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하며, 일상의 모든 환경을 이루는 요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한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5년 1월 17일에 시작하여 17년이 지난 현재 17명이 함께 하고 있다.
    • 최철호
  • [모던스케이프] 혼다 세이로쿠의 도시공원 계획
    일찍이 근대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서구 사회에 대한 흠모와 동경이 유별났다. 많은 지식인이 유럽으로 건너가 선진 서구 사회를 경험하고 운영 노하우를 습득했으며 귀국해서는 각자의 분야와 위치에서 근대화를 견인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 도시는 ‘진보한’ 근대 도시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는 도시부흥계획을 구상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의 재건 사업을 이끈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오사카 시장을 역임하며 오사카를 오늘날의 상업 도시로 키운 세키 하지메(關一), 유럽 각지를 돌며 근대 도시계획의 법제와 정책을 공부해 자국의 도시계획 제도를 수립한 이케다 히로시(池田宏) 등은 근대 도시를 실천한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 1세대 주역이다. 도쿄 역사 설계로 잘 알려진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와 오사카에서 주로 활동한 가타오카 야스시片岡安 등은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을 결합한 영국풍 건축물을 일본에 소개했다. 조경 분야의 주역으로는 혼다 세이로쿠本多靜六(1866~1952)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경제학과 임학을 기반으로 국토 전반의 녹지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 공원 전문가다. 혼다 세이로쿠(이하 혼다 박사)는 일본 최초의 근대 도시공원인 도쿄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1903년 개장)을 설계하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등 조경학과 임학에 큰 기틀을 마련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절, 일본 전역에 수많은 도시공원을 조성해 ‘공원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꾸준한 연구와 글쓰기를 통한 자기 계발, 안정된 자산 관리와 퇴직 후 사회 환원 등 인생을 성실하고 계획적으로 운영해서, 일반인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한 자산가이자 처세에 모범이 되는 인물로 더 유명하다.1 혼다 박사를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의 이력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서울 남산의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경성부가 서울 남산을 대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고, 혼다 박사에게 구체적인 안을 요청했다. 그는 19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제자 다무라 쓰요시(田村剛)와 함께 남산을 현장 조사하고 1917년 3월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2을 발표했다. 혼다 박사의 남산공원 설계안에는 남산이 공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요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산림 황폐로 훼손된 남산을 사방공사 등으로 안정화한 후 식재 등의 조경 설비를 적절히 진행할 것, 둘째, 공원 도로와 시설을 남산의 환경 조건에 맞게 배치해 고유한 남산의 풍경을 십분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 셋째, 남산공원에 도입할 시설에 맞는 운영 방법을 취해 공원 관리에 힘쓸 것 등이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京城府, 『京城府南山公園設計案』, 1917. 서울역사편찬원, 『국역 경성부사 제3권』, 2014. 渋谷克美, “国ソウル「南山公園」と本多静六-公園設計にみる本多静六の国際感覚”, 『本多静六 通信』 17, 2008, pp.5~9. 손용훈·서영애, “1917년 경성부 남산공원설계안의 삼림공원 개념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0(4), 2012, pp.23~31. 그림 출처 그림 1. newscast.jp/ 그림 2~3. 京城府, 1917, 京城府南山公園設計案.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공원의 보존과 재생, 로렌스 핼프린을 추억하며
    도시공원의 보존과 재생 이슈를 다룬 이번 특집 원고의 교정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추억의 모더니스트 조경가 로렌스 핼프린(Lawrence Halprin)을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길지혜의 글 “도시공원의 보존, 변화와 연속성 사이”와 심지수의 글 “공원을 공원답게”에 등장하는 시애틀 ‘프리웨이 공원’의 설계자 핼프린을 처음 만난 건 대학원생 시절이었다.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무심코 뽑아 든 그의 작품집 속 흑백 사진 한 장에 가슴이 뛰었다. 포틀랜드 도심 ‘러브조이 플라자(Lovejoy Plaza)’ 개장일(1970년 6월 23일)의 한 장면. 시에라 산맥의 풍경을 거친 콘크리트 물성으로 재해석해 빚어낸 폭포와 계단 그리고 얕은 연못, 그곳을 가득 메운 청년 세대의 힘찬 기운과 활력. 러브조이 플라자는 1960년대의 저항 문화와 신사회 운동을 도시 한복판으로 불러낸 공감각의 무대였다. 노트 한구석에 이렇게 적었다. “로렌스 핼프린, 공감각적 공간 안무가.” 핼프린에 깊이 빠진 나는 그의 작품들을 여러 편의 글에 인용했다. 어느 논문을 다시 들춰보니, 무려, 이런 말까지 쏟아냈다. “환경과 신체의 대화를 시도한 핼프린의 실험은 자연의 역동적 경험과 도시의 일상 문화를 결합시킨 러브조이 플라자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멀리서 눈으로 관조하는 장식적 폭포가 아니다. 사람들은 폭포에 기어오르거나 폭포 아래 연못에 들어가 자연과 삶의 생동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한다. 그의 작업은 우리를 경관의 구경꾼에서 환경의 참여자로 되돌려 놓는다.” 문제는 나의 신체로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점. 책으로 연애를 배우면 늘 자신 없는 법이다. 핼프린의 작업에 뭔가 빚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몇 해 전 연구년을 보낼 도시로 시애틀을 택한 데에는 핼프린에 대한 부채 의식을 떨치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도심 고속도로 상부에 공원을 덮어 단절의 문제를 해소한 시애틀의 프리웨이 공원, 그리고 그 형태 디자인의 원형을 실험하며 도시재생의 해법을 제시한 포틀랜드의 러브조이 플라자를 눈과 귀, 손과 발로 체험하며 핼프린이 꾀한 공감각적 장소감의 현재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핼프린은 러브조이 플라자, 켈러 공원(Keller Fountain Park), 페티그로브 공원(Pettygrove Park) 등으로 구성된 ‘포틀랜드 오픈스페이스 시퀀스’를 1963년부터 1971년에 걸쳐 설계했다. 도심 쇠퇴와 경제 불황을 겪던 포틀랜드의 도시 문제를 선형 공간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구도심 한가운데 여덟 블록을 보행로, 공원, 광장, 숲으로 신경망처럼 잇고 엮은 선형 오픈스페이스는 도시 공공 공간의 미학적 혁신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도시재생과 지역 경제 활성화의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평가는 포틀랜드 오픈스페이스 시퀀스를 재해석한 책 『혁명이 시작된 곳(Where the Revolution Began)』(2009)의 제목에 단적으로 담겨 있다. 건축 비평가 아다 루이스 허스터블은 켈러 공원을 “르네상스 이후 가장 중요한 도시 공간 중 하나”라고 평했다. 미국 북서부 특유의 겨울비가 내리던 날,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포틀랜드 오픈스페이스 시퀀스를 걸었다. 음습한 날씨와 원형 복원 공사 탓에 인적이 드물었지만, 시에라 산맥의 절벽과 계곡 풍경을 입체 그리드로 추상화한 콘크리트 조형 경관의 힘은 오래전 기억 속 사진 그대로였다. 산의 형세와 산맥의 형태, 물의 흐름과 퇴적을 재해석한 러브조이 플라자와 켈러 공원의 경관 위로 흑백 사진 속 청년들의 역동적 몸짓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2001년, 핼프린이 남긴 공원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로렌스 핼프린 경관 컨서번시’가 구성됐다. 이 단체의 노력으로 포틀랜드 오픈스페이스 시퀀스는 2013년 3월, 도시공원으로서는 드물게 ‘국가사적지’에 등재됐다. 50년 넘는 풍화의 상흔을 치유하고 원형대로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돼 2019년에 마무리됐다. 복원과 보존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이번 호에 소개하는 시애틀 프리웨이 공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속도로 덮개 공원의 새 장을 연 프리웨이 공원은 도시의 변화와 함께 위험의 상징으로 퇴락해갔다. 콘크리트 폭포와 분수 일부를 철거하는 리모델링 계획이 세워졌으나 핼프린 컨서번시와 문화경관재단이 맞서 원형 유지와 개선 사이의 접점을 찾았다. 프리웨이 공원도 2019년 말, 국가사적지로 등록되기에 이른다. 최근 국내에서도 파리공원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도시공원들을 고쳐 쓰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복원과 변경, 보존과 재생의 충돌이라는 난제를 마주한 지금, 로렌스 핼프린의 유산을 둘러싼 그간의 쟁점을 꼼꼼히 살펴볼 만할 것이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