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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이란 무엇인가, 기계생명체가 던지는 질문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 거대한 기계는 투박하고 귀가 떨어져나갈 굉음을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위협을 가할 것 같은 면모는 기계를 자연과 대척점에 놓인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반면 1990년대 초부터 최우람이 만들어온 ‘기계생명체(anima-machine)’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조용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지난 9월 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최우람의 고유한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MMCA 현대차 시리즈1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가 열리고 있다. 최우람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세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살아 숨 쉬는 듯한 기계를 만들고, 독특한 이야기를 더하는 작업을 해왔다. 자동차 엔지니어인 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최우람의 어린 시절 꿈은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였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 공과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전공으로 미술을 택한 그는 과제를 하다 우연히 접한 키네틱 아트에서 접어 두었던 꿈을 실현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최우람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 움직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구축한 치밀한 메커니즘은 기계 역시 생명체처럼 완결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객들은 기계생명체들을 보며 생명의 의미와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전시 첫 공간인 서울박스에 발을 내딛으면 기괴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소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면 18개의 지푸라기 인형이 기이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원탁’을 볼 수 있다. 인형들이 무릎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할 때마다 등에 진 검은 원탁의 기울기가 변하고, 그 위를 지푸라기 공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닌다. 저 공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절실히 지키는 것일까. 호기심을 품고 다가가면 지푸라기 인형 모두 머리가 없는 상태이며, 공인 줄 알았던 구체가 사실 머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몸체가 등으로 원탁을 밀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원탁 위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 같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머리를 더 멀리 밀어내 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라는 해설이 제공되고 있지만, 의미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지푸라기 인형을 보고 있으면 과연 그들이 자의로 저 원탁 아래에 머물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모양을 천장 가까이에서 느릿하게 날며 내려다보는 ‘검은 새’를 발견하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끓어오르고 인형들의 몸짓이 꼭 나의 발버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2014년부터 시작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연례 프로젝트다. 매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한국 중진작가 1인을 선정해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지원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와 역동성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자 기획되었다.
  • 2022 서울정원박람회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 북서울꿈의숲에서,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가을 정원과 예술적 정취를 함께 즐길 수 있는 2022 서울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가 9월 30일부터 7일간 북서울꿈의숲에서 개최됐다. 2015년부터 열린 서울정원박람회는 올해 7회를 맞았다. 이번 정원박람회는 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팬데믹과 바쁜 일상 등으로 지쳐있던 시민들에게 정원 문화를 통해 건강한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고자 했다. 서울시와 2022 서울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환경과조경이 주관한 올해 정원박람회의 주제는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다. 과거 드림랜드가 있던 곳에 만들어진 북서울꿈의숲은 강북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칠폭지, 월영지, 청운답원(잔디광장), 창포원, 문화광장 등 풍부한 녹지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꿈의숲아트센터, 어린이 미술관인 상상톡톡미술관이 있어 다른 공원과 차별화된다. 대상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공 정원 조성을 위해 북서울꿈의숲의 이러한 특징을 주제에 반영했다. 북서울꿈의숲과 어우러진 각양각색의 정원 9월 3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북서울꿈의숲에서 다양한 정원 전시가 펼쳐졌다. 상상톡톡미술관 전면에 작가정원(4개소), 창포원 좌우에 학생정원(6개소)과 시민정원(8개소), 청운답원 주변에 팝업가든(9개소)이 조성됐다. 작가정원의 주제는 정원박람회 주제와 동일한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었다. 작가정원 공모에 47팀이 참여했으며, 1차 심사를 통해 4개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 정원 조성 후 현장 심사를 통해 구영미·박지연의 ‘내 마음의 산책길’이 금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정원은 청운답원 한 곳에 모여 있는 다른 작가정원들과는 달리 홀로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햇살, 바람,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공간에 놓인 내 작은 방은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은상에는 최윤정·김동민의 ‘꿈을 저울질하는 시소’, 동상에는 장찬희의 ‘직관적 발아’와 김지학·설윤환의 ‘하얀바람’이 선정됐다(88~105쪽 참고). 조경, 원예, 정원, 건축, 도시계획, 산업 디자인 등 조경 관련 학과 학생 누구나 참여 가능한 학생정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올해 금상에는 할리갈리(상명대학교)의 ‘물감: 퍼지는 꿈의 조각’이 선정됐다. 순백의 도화지 위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자신이 상상하는 꿈을 그리는 모습을 정원으로 형상화했다. 시련을 벽으로 나타내고, 붓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식물이 번지면서 벽(시련)이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해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은상은 블루밍(서울시립대학교)의 ‘블루밍 드림(Blooming Dream)’과 드리머즈(강원대학교)의 ‘별담; 꿈을 담다’가, 동상은 5스틴5stin(가천대학교)의 ‘예지몽; 藝至夢’, 해님달님(가천대학교)의 ‘항해, 꿈을 향해’, SEO(건국대학교)의 ‘숨기다&찾다Hide&Seek: 정원에서 숨겨진 감각을 찾다’가 수상했다. 시민정원은 정원 조성에 관심이 있는 서울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정원 문화의 대중화와 정원을 통한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도모하는 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금상은 에이블 가든(Able Garden)의 ‘정원, 잊어버린 꿈을 다시 채색하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무채색이 되어 버린 꿈의 본래 모습을 정원에 투영된 빛을 통해 마주하게 했다. 이를 위해 빛을 투영할 수 있는 아크릴판을 활용하고 다양한 색채를 정원에 더했다. 은상은 해방촌 마을정원사의 ‘정원 우체부; 꽃, 안부를 나누다’, 마미 가드너스의 ‘꿈에 그린(green) 정원’이, 동상은 꿈꾸는 무지개의 ‘땅위에 무지개’, 그린수프의 ‘팔레트; 꽃+팔레트(Falette;Flower+Palette)’, 오동근린공원봉사모임의 ‘벽오산(오패산)벌리사의 꿈’, 가든러버의 ‘내마음을 물들인 정원아 사랑해’가 수상했다. 팝업가든은 정원박람회 기간에만 선보이는 정원이다. 금상에는 릴리목공소의 ‘꿈꾸는 정원사의 작업실’이 선정됐다. 이들은 ‘릴리’란 이름을 가진 가상의 정원사라는 인물을 설정해, 릴리가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자 꿈을 키워나가는 작업실의 흔적을 정원으로 조성했다. 반짝 정원하자의 ‘너도나도 정원하자’가 은상을, LA 걸스(서울시립대학교)의 ‘꿈빛잡화점’, ART2ST(건국대학교)의 ‘화원(畫園): 정원을 그리다’, 별빛(고려대학교)의 ‘별의 물감_에스터 페인트(ASTER paint)’가 동상을 수상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 함께가든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 가을 정원, 서울시립대학교 팀 설계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 2022년 봄 학기, 서울시립대학교 2학년 전공 수업으로 ‘정원 및 외부공간 설계 스튜디오’가 진행됐다. 두 명이 한 팀을 꾸려 캠퍼스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대상지를 찾고 공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설계안을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조금 독특한 점은 두 분반에서 각각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 팀을 선발해, 총 두 팀에게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의 가을 정원을 설계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었다. 16주에 걸친 스튜디오 결과, 1분반에서는 권솔지·박효빈의 ‘크라운;어스(Clown;Us)’가, 2분반에서는 김다민·지서연의 ‘걸어서 시대 속으로’가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크라운;어스’는 가면을 쓴 어릿광대처럼 사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원이다. 점점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는 서울시립대 자작마루 주변에 펑키한 분위기의 다채로운 색상의 식물과 차분한 분위기의 색조가 단순한 식물을 심어 사람들의 다면성을 표현하고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걸어서 시대 속으로’는 이정표 정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회기역에서 서울시립대학교 후문까지 도보로 이동하려면 최소 12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길 찾는 사람을 돕기 위해 서울시립대로고와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21개의 기둥에 쪼개 담아 배치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지만, 갈림길에 들어서면 쪼개진 이미지가 하나로 이어지며 길을 안내한다. 기둥 사이로 이미지를 가리지 않도록 동선과 식물, 휴식 공간을 배치했다. 함께가든, 왕관을 쓴 어릿광대 김다민·권솔지·박효빈·지서연 팀(이하 서울시립대 팀)은 6월 22일, 에버랜드 내 조경팀 사무실에서 첫 미팅을 진행했다. 에버랜드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인 포시즌스 가든을 선보이는데, 이번 가을 정원의 콘셉트는 ‘해피 핼러윈’이었다. 정원은 네 개 구역으로 구분되며,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테마로 구성된다. A구역 ‘컬러풀 펌프킨 가든’은 다양한 색감의 호박 조형물이 주를 이루는 정원이고, B구역 ‘트릭 오어 트릿 가든’은 집 조형물과 키치한 패턴의 식재가 특징인 공간이다. C구역은 서울시립대 팀의 함께가든이 조성되는 곳으로, 정해진 콘셉트는 없었다. D구역 ‘핼러윈 인피니티 가든’에는 대형 스크린에서 이어지는 메리골드 길이 조성된다. 권소희 프로(에버랜드 조경팀)는 대상지 답사를 이끌며 식재되어 있는 식물, 정원에서 유지해야 할 것과 바꿔도 되는 것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가 시설물보다 식재를 중심으로 한 정원을 추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에버랜드는 “정원을 잘 조성하면 한 계절 내내 칭찬을 듣지만, 잘 조성하지 못하면 한 계절 내내 질타를 받는다.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한껏 즐길 수 있는 정원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원 콘셉트를 고민하던 서울시립대 팀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봤다. 좋은 평을 들었던 반전 효과를 지닌 광대라는 콘셉트, 기둥을 통해 방향을 유도하는 개념, 조형물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고려해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의 장점을 합친 새로운 정원을 만드는 데 돌입했다. 두 번째 미팅은 6월 29일, 설계 스튜디오를 지도한 이윤주 소장의 LP스케이프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정원의 콘셉트와 방향성, 레퍼런스 이미지를 발표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가든의 콘셉트는 ‘크라운 오어 크라운(crown or clown)’으로, 서울시립대 팀은 왕관을 쓴 어릿광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정원을 설계했다. 대상지를 세로로 분할하고 각 구역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식물을 심음으로써 광대의 양면성을 표현했다. 곳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는 핼러윈 느낌을 내면서도 사람들의 걸음을 유도하는 젠탱글(zentangle) 이미지를 삽입했다. 그림자놀이를 할 수 있는 조형물을 배치해 재미를 더했다. 발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세부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부분과 에버랜드의 요구 조건에 맞춘 설계안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후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 정원에 사각 기둥 모양의 거울 기둥이 있다는 정보를 접했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기둥 디자인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종은 에버랜드 식재 리스트를 고려해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지서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학부생이다. 기후변화청년단체(GEYK)의 일원으로 도시 농업, 산불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 [기웃거리는 편집자] 이름을 부르는 지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의 주인공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각자가 꼽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천국으로 가는 이들에게 선물로 준다. 말하자면 천국의 프로덕션 회사에서 진행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라고 할까? 문득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러 장면이 있겠지만, 클라이언트로서 한 가지 요청이 있다면 장면을 구성할 때 미장센으로 ‘비 온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본 안개 낀 앞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써달라고 하고 싶다. 시골집 마당에 서면 산세가 훤히 보이는 맞은편 산에는 왜가리 군락지가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수묵화였지만 비 온 다음 날 젖은 아스팔트 도로가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안개가 산을 자욱하게 두른 풍경은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소설가 김승옥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사이 진주한 안개라는 적군이 가하는 기습에 무장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러한 날에 맡을 수 있는 젖은 흙냄새와 깨끗해진 아침 공기의 맛은 날씨를 보관하는 서랍이 있다면 그 안에 넣고 싶을 만큼 좋았다. 만약 겸재 정선 선생님이 이곳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인왕제색도에 버금가는그림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풍경의 순간을 담지 못했던 나와 달리 영국에서는 귀여운 조직적 움직임을 2005년부터 선보이고 있다. 레딩대학교 기상학과 방문연구원 출신 개빈 프레터피니(이하 개빈)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추종자에 맞서 구름을 감상하는 모임인 ‘구름감상협회’를 창립했다. 이른바 구름 추적자라 불리는 회원들이 120개국에 5만여 명이나 있다. 사이비 종교 혹은 모종의 음모를 꾸리는 이상한 단체는 아니고, 순수하게 구름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각자가 발견한 구름 사진, 그림, 시 등을 홈페이지에 공유하는 일종의 구름 커뮤니티다. 최근 창립자 개빈은 회원들이 보내온 사진과 명화를 엮어 책 『날마다 구름 한 점』(2021)을 출간했다. 이 책은 구름의 생성 원리나 광학 현상, 이름의 유래, 구름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의 문장 등을 소개한다. 책을 통해서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 주위로 퍼지는 빛의 이름이 부챗살빛(Crepuscular Rays)이란 것과 비행운처럼 선박의 배기가스가 선박 자국(Ship Tracks)이라는 구름을 만든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또한 SF영화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장면에 등장할 것 같은 ‘거친물결 구름(Asperitas)’은 협회 회원이 발견한 구름인데, 세계기상기구가 발행하는 『국제구름도감(International Cloud Atlas)』에 정식으로 수록됐다. 구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학계에서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인터뷰이로 만난 박승진 소장으로부터 구름감상협회와 결이 비슷한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개빈이 구름감상협회를 통해서 생소한 구름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던 것처럼, 박 소장은 일반인에게 다소 낯선 식물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우연히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가 가림막을 배경 삼아 아름답게 나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잡초마다 갤러리 작품명처럼 스티커로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잡초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있도록 일종의 오픈 갤러리를 만든 것이라고 할까. 일회성에 그친 프로젝트였지만, 이러한 취지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이 모인다면 우리도 식물 사진을 찍고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는 초록감상협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맨 먼저 가입서를 쓰고 싶다. 구름의 평균 수명은 10분밖에 되지 않고, 잡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배우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름, 잡초라는 단어로 그들의 존재를 뭉뚱그리는 대신 권운, 적운, 개망초 등 정확한 이름을 호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지혜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름에 집착하느라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mail protected]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눈물 나게 하는 것보다는 웃게 만드는 게 더 힘들더라. 그래서 영화도 드라마도 좋지만 시트콤 작가가 신기하고 위대해보였다. 첫 문장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게 글의 마무리였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제일 쉬운 건 당연한 말로 끝맺는 것이었다.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내용들 말이다. 답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의문문으로 끝내는 방법도 유용했다. 그런데 수십 차례 같은 전략으로 지면을 채우다보니 지겨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친구가 “너 그만 반성해도 될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 늘 재치 있는 문장들이 탐났다. 쉽게 공감하고 피식피식 웃으며 볼 수 있지만, 이런 걸 왜 여기다 쓰지 일기장이 없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 문장들. 하지만 글은 쓰는 이를 닮기 마련이다. 그다지 유쾌한 편은 아닌 내가 쓰는 글은 늘 고만고만한 결을 유지했고, 가끔 벗어나보려고 바둥대봤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해야 할 일들. 무엇이 적혀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비슷한 제목을 발견하면 매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많이 읽기, 솔직하게 쓰기, 쓸데없는 수사를 빼기 등 익숙한 전략을 훑어보고 있으면 꼭 그 가운데에서 ‘필사하기’가 등장했다. 베껴 쓴다는 의미의 필사(筆寫)는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유명한 훈련 방법 중 하나다. 정호승 시인은 서정주와 김현승의 시를 필사했고, 신경숙은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세밀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고 말했다. 난 오래전 이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생 첫 만년필을 마련하고 그에 어울리는 노트를 샀다. 필사는 책을 손으로 읽는 작업이다. 이 훈련법의 핵심은 글을 단어 단위가 아닌, 문장 단위로 옮기는 데 있다. 눈을 바삐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며 글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잠깐이라도 외워 머릿속에 박아 넣는 것이다. 글자들이 휘발되기 전에 종이에 적는 일은 문장의 구조와 말맛, 문체를 만드는 법, 더 풍부한 어휘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만든다. 쉼표의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게 되고, 접속사의 의미를 더욱 크게 느끼고, 문장을 매듭짓는 수많은 방법을 깨닫는다. 잘못 쓴 글자는 화이트로 지우는 대신 가운데 줄을 긋고 고쳐 쓰면 안 좋은 습관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을 배우는 데만 깊이 몰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깃털 같은 집중력은 그리 오랜 시간 발휘되지 못한다. 쓰다보면 삐죽빼죽 삐침이 못나게 빠져나오고 어딘가 못생긴 글자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글씨의 형태에 공을 들이다보면 문장은 휘발되고 손 마디마디에 아픔만 고인다. 어딘가 비효율적인 필사 작업이지만, 그래도 완성된 글씨체가 마음에 든다. 길쭉길쭉한 모음(성공한 사람의 필적을 분석한 결과 가로획이 길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길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과 조금은 작은 ㅁ과 ㅇ, 세로로 가늘어 조금 해체된 듯 보이는 ㅅ과 ㅈ. 디지털 기기의 자판에 더 익숙한 시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글씨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매년 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는 대회가 있다. 올해 8회를 맞은 ‘교보문고 손글씨대회’는 심사위원 평가와 대중 투표를 통해 매년 아름다운 필체를 선정한다. 겉옷의 두께를 고민하게 되는 계절이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수상작들을 볼 수 있다. 개성이 묻어나는 글씨체는 아는 글을 새롭게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올해는 으뜸상 수상자의 글씨를 오래 들여다봤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 82세 김혜남은 필체와 잘 어울린다며 며느리가 추천해준 나카가와 히데코의 『음식과 문장』의 한 구절을 적었다. “곡선에 싱싱한 탄력이 있고, 간결하게 새침”(유지원 심사위원)한 글자 모양 덕분일까, 글에서 새콤한 복숭아와 달큰한 밤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이 거기 담기는 것 같아요.”2 김혜남의 소감을 읽으며, 묘한 떨림을 가진 그의 글씨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가늠했다. 글도 사람을 닮고, 글씨체도 사람을 닮으니, 공간 역시 그 공간을 만든 사람을 닮을까. 역으로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하다 보면 사람이 글을 닮아가기도 할까. 오늘도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인 의문문으로 글을 맺는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2004, pp.155~156. 각주 2. 윤상진, “‘손글씨엔 마음이 담겨 있어요’… 82세 할머니의 글씨, 폰트로 제작된다”, 조선일보 2022년 9월 20일.
  • [PRODUCT]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디딤판 ‘필’ 직선과 곡선이 조화된 디자인 디딤판
    디딤석이 기능성뿐만 아니라 감성적 디자인을 갖춘다면 어떨까. 스튜디오미콘의 ‘필(Pill)’은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로 제작한 알약 모양의 디딤판으로, 직선과 곡선이 부드럽게 조화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석재를 자연스러운 형태로 잘라서 제작하는 일반 디딤석과는 달리 조형성을 강조해 제작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로 만들기 때문에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다. 세 가지 규격을 제공하며, 각기 다른 규격의 디딤판을 조합해 세련된 분위기의 공간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내구성도 튼튼하다. 디딤판은 밟았을 때 쉽게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한정적이다. 특히 일반 콘크리트는 사람이 밟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어 디딤판의 소재로 한계가 있다. 필의 소재인 초고성능 콘크리트는 일반 콘크리트보다 약 6배 이상 큰 압축강도를 가진다. 덕분에 쉽게 파손되지 않으며 자외선, 동해, 염해 등에도 강하다. 정동근 스튜디오미콘 대표는 “기존의 디딤석은 자연스러우며 안정적인 매력이 있었지만 디자이너의 영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제품은 아니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는 디자이너의 생각과 현장의 콘셉트를 반영하여 디딤석을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미콘은 직접 디자인한 디딤판뿐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디딤판 맞춤 제작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스퀘어, 써클, 페블 등 다양한 모양의 디자인 디딤판도 선보이고 있다. TEL. 031-831-3620WEB.www.miicon.com
  • 자연 그대로의 자연, 네이처 갤러리 래미안 갤러리 리뉴얼
    지난 9월 16일,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래미안 하우스파티’를 열어 새롭게 리뉴얼한 래미안의 외부 공간 ‘네이처 갤러리’를 공개했다. 서울 송파구에 마련한 모델정원을 배경으로 공연을 열고,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해 예술·문화 활동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래미안 갤러리 리뉴얼 프로젝트는 2021년 시작됐다. 김아연(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스튜디오 테라 대표)이 이끄는 시대조경 팀(서울시립대학교 조경설계연구실+MDL+스튜디오 테라)이 컨설팅, 실시설계, 현장 감리를 맡았다. 모델정원 시공은 삼성물산 건설부문 조경그룹, 주원조경, 연수당이 진행했다. 리뉴얼 프로젝트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경쟁 속에서 점점 관행적으로 변해가는 아파트 조경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좀 더 본질적인 차별화 전략을 찾기 위해 래미안 조경의 변화 과정과 현황, 국내외 트렌드, 소비자 성향을 분석해 래미안만의 조경 철학과 비전, 추진 전략을 제안하는 ‘조경 전문가 컨설팅’을 진행했다. 김아연은 주거와 일상의 근본적 가치를 다시 묻고 이론적 근거에 기반을 둔 전문적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래미안 단지 20곳을 답사하고, 주거 문화의 지향점을 고민했다. 분석 결과, 네 가지 내부적 성찰점과 외부적 대응의 필요성을 도출할 수 있었다. 내부적 성찰점을 먼저 살펴보면, 첫째, 아파트 조경은 브랜드 간 경쟁 심화로 인해 시각적 효과의 특화에 치중하고 있다. 둘째, 살면서 더 좋아지는 경관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유행에 민감한 조경은 쉽게 질리는 조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근본적 주거 가치 구현의 노력보다 주거 상품 아이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넷째, 큰 맥락보다는 소규모 공간과 시설물 특화 전략에 치중하고 있다. 외부적 대응의 필요성을 살펴보면, 첫째, 기후변화, 팬데믹 등 지구환경적 이슈와 주거 공간의 관계성이 대두되고 있다. 둘째, 문화와 여가 방식의 변화, 기술 변화에 따른 조경 공간의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셋째, 자연의 작동성과 진정성을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넷째,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전략 개발이 필요하다. 도출한 결과를 바탕으로 래미안 조경의 방향성을 자연의 고유한 생태적, 경관적, 기능적 특성에 기반을 둔 ‘자연 그대로의 자연’으로 설정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아파트 단지에 도입함으로써 원서식처의 고유성과 래미안 자연의 독창성으로 자연 본연의 진정성(original nature)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전략으로, 원경관의 회복, 사람 중심의 공간과 경관, 불필요한 장식과 시각적 복잡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간결한 디자인을 제시했다. 이로써 입주민들은 아파트 조경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일상 속 자연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관성적이고 관행적인 아파트 조경 설계 방법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 대상
    지난 6월 1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공모전은 국민들이 직접 일상 속 불편 요소를 찾아 해결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공공디자인의가치와 중요성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는 좀 더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해 ‘무한 상상, ○○디자인’이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공공캠페인 분야를 신설했다. 참가 자격도 일반부와 학생부로 확대했다. 일반부 대상에는 박성민·조재민의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가 선정됐다. 지하철 환풍구의 불쾌한 공기를 시원한 바람으로 바꿔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환풍구 주변 공간을 시민 쉼터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공공시설을 공공디자인을 통해 개선하고, 도시 생활 환경 개선과 사용자 편의를 함께 꾀한 복합형 공공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략)...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건축물 벽면녹화 네이처 제16회 경기도 공공디자인 공모전 대상
    지난 9월 21일 ‘2022 경기도 공공디자인 공모전’의 대상작이 발표됐다. 올해 16회를 맞이한 공모전은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공공디자인 관점으로 접근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의 주제는 ‘사람과 환경을 위한 업사이클링 공공디자인’이었다. 총 103점의 작품이 접수됐으며 온라인 심사로 20점을 입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중 상위 9점을 대상으로 본선 진출자와 디자인 전문가가 함께하는 워크숍을 실시했고, 최종 심사를 통해 이관영·김강현·유진(서울예술대학교)의 ‘건축물 벽면녹화 네이처(nature)’를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스포트라이트와 서포트
    학교를 다녀오면 야구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매일같이 TV에 삼성라이온즈 경기가 틀어져있었다.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하게 됐고 종종 부모님을 따라 야구장을 찾았다. 첫 야구 직관은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삼성라이온즈와 해태타이거즈 경기였다. 어느 팀이 이겼고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세세한 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회색빛 출입 통로를 지나 만났던 광활한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느낀 감정을 책의 한 구절로 표현해본다. “3루 쪽 특별 내야로 가는 계단을 다 올라간 순간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확 트이면서 그 끝에 부드럽고 거뭇거뭇한 그라운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베이스, 똑바로 그어진 하얀 선, 정성스럽게 손질된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마침 우리의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명이 켜졌다. 칵테일 광선을 받은 구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우주선 같았다.”1 잊을 수 없는 풍경 때문인지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야구팬이 됐다. 시간이 된다면 직접 경기장에 가 야구를 관람하는 편이다.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은 선수와 코치, 감독이다. 승패를 가르고 팬들의 일희일비를 결정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수많은 관중의 시선이 모이고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반면 스포트라이트는커녕 이런 사람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림자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이벤트에 참여하고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운영자, 티켓 발권과 확인을 하는 매표소 직원, 관중들이 다치지 않게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사람 등, 하나의 경기에는 스포트라이트와 서포트가 공존한다. 이 두 가지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경기가 만들어진다. 몇 년 전 방영한 TV 드라마 ‘스토브리그’(SBS)는 서포터들의 애환을 잘 담았다.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계약 갱신과 트레이드 등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이 드라마는 만년 리그 꼴등 팀 ‘드림즈’에 새로 부임한 단장과 구단 사람들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보통의 스포츠 장르 드라마나 영화라면 꼴찌 팀이 대회에서 극적으로 승리를 하는 내용으로 흘러가겠지만, 스토브리그는 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보다는 구단을 운영하는 프런트들의 사연과 스토브리그에 펼쳐지는 사건을 다룬다. 뒤에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사흘간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가 개최됐다. 나는 사전 행사인 학생샤레트 진행을 위해 대회 일정보다 일찍 광주로 향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학생들의 숙소 체크인을 돕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갔는데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자꾸 불시에 터져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언어의 장벽으로 소통까지 잘 되지 않으니 프로그램을 잘 마칠 수 있을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더니 시간은 흘렀고 마지막 일정인 최종 프레젠테이션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스토브리그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드림즈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기 위해 그라운드로 향하고, 그 뒤편에 선 구단 사람들이 응원의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사흘간 진행된 학생샤레트가 끝난 후 열린 시상식에서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상장 수여를 위해 무대 위로 수상자들을 인솔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기념 촬영을 위해 무대에서 내려와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그때 친 박수는 학생샤레트를 큰 탈 없이 끝낸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상이자 격려였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주인공인 노수학자와 그의 가사도우미 나, 나의 아들 루트가 함께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타이거즈 경기를 보러간 야구장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다. 오가와 요코, 김난주 역, 『박사가 사랑한 수식』, 현대문학, 2014, p.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