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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안마당더랩
상생의 가치 아래 사람과 자연의 균형을 고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질 수 있는 것을 원한다. 대상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가치에 집중한다. 인간과 자연의 균형, 구성 요소 간의 관계성, 규칙 안의 변주를 찾고자 한다. 형태보다는 분위기를 살리고, 따뜻하지만 선명하게 표현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질감, 시간의 흔적, 그림자처럼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은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아가 우리의 스타일을 규정하고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존재 이유를 묻다
2016년 안마당더랩을 설립하고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달려왔다. 4년쯤 됐을 때 회의감이 생겼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안마당더랩이 만드는 공간이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고 싶었다. 조경, 정원설계사무소는 많고, 우리보다 설계 능력이 뛰어난 곳도 많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안마당더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안마당더랩을 유지해야 하나.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배운 것이 조경이고 그 기술로 돈을 벌고 있지만, 반드시 조경, 정원설계로 생계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 그때 답을 얻고자 우리만의 고유한 핵심 가치를 설정했다.
“현재 우리는 매우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정보와 가치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쉽게 잊힌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미적인 정원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의 작업을 통해 공간을, 일상의 질을, 넓게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상생의 가치
상생(相生)은 공생의 의미도 있지만 공생과 다르다. 상생은 순환을 의미한다. 자연이 스스로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도 지속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 상생을 핵심 가치로 정했다. 상생은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이라는 이원론적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다원론적 이야기이다. 어떤 행동 하나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는 것, 상생이라는 용어 속에는 그러한 뜻이 담겼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 지구 환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지속가능성이 필요한 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가치의 지속가능성에 공통으로 필요한 요소는 균형이다. 무엇이든 지나치거나 부족하면 균형이 깨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마당더랩이 가장 우선하는 디자인 철학은 균형이다. 정원 설계 의뢰를 받으면, 설계 공간에 공존하는 많은 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들이 서로 상생하며 균형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예를 들어 상업 공간의 경우 심미성을 비롯해 고려해야 하는 다양한 가치가 있지만, 수익성과 회전율을 염두에 둔 테이블 개수를 반영한 계획이 균형 잡힌 설계안이 될 수 있다.
방향성을 바탕으로 한 완성도
디자인할 때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맥락 속에서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표현한다. 설계에서 단순하게 호오(好惡)를 따지면, 그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서 바른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판단이 어렵다. 가령 이도커피 사유점의 경우 브랜딩 단계에서부터 이름 그대로 ‘사유하다’라는 콘셉트가 정해져 있었다. 정원도 ‘사유’의 개념 안에서 설계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도커피 사유점의 정원은 중정이었고, 모든 좌석이 정원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었다.
중정을 바라보며 사유하게 만들 방법을 찾고자 했다. 방문객이 알게 모르게 자연을 느끼다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숲(자연)은 하나의 객체가 중요한 공간이 아니다. 전체의 장면을 하나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 이곳의 중요한 방향성이었다. 숲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의 선정이 매우 중요했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수관 폭이 좁고 위로 웃자라는 형태를 띤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나무가 필요했다. 중정의 크기에 적당하고 이식하기 좋으며 생장 속도가 빠르지 않은 나무여야했다. 발품을 팔아 나무를 직접 찾아다녔다. 우연히 소사나무를 발견했는데, 나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찾았다!’라고 외쳤다. 12주의 소사나무를 수형의 특성을 살려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해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숲의 장면을 만들어 갔다. 건축의 제안으로 미스트 장치를 설치해 이른 아침 안개 낀 숲의 모습을 연출했다. 미스트 장치가 작동하는 빈도는 식물의 생육에 지장이 없도록 계절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된다.
이 장면을 더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오래전에 봤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났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나비가 나온다. 이 나비는 영화를 시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더 나아가 나비에 관련된 이야기 ‘장주지몽’을 떠올렸다. 장주지몽은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됐는지, 원래 나비였던 본인이 꿈속에서 장주가 됐는지 알 수 없게 됐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주제로 하는 얘기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도록 나비를 불러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소사나무 하부 식재 수종은 나비를 불러오는 흡밀 식물을 식재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어프로치 커피(Approach Coffee) 프로젝트는 영국식 브런치 카페를 론칭하는 작업이었다. 자연스럽게 영국식 정원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 사항으로 시작됐다. 초기 조사 분석 과정에서 첼시 플라워쇼, 코티지가든 등 영국 정원의 방향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했다. 어느 순간 그 사례들이 영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을 다시 꺼내 봤다. 흔히 생각하는 영국 정원의 이미지는 오래된 전통 정원 혹은 대부분 지방에 위치한 시골 정원의 모습이었다. 도심인 런던의 모습과는 달랐다. 서울과 용산이라는 도심의 한복판에 세워지는 영국 브런치 카페라면 런던 도심의 모습을 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런던 도심 속 풍경의 공통점을 찾기 시작했다.
공통점은 검은색이었다. 특히 오래된 양식의 건물과 석재 포장이 주를 이루는 구도심에서도 간판, 표지판, 각종 시설물 대부분 검은색을 사용한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건축 양식과 대비되는 검은색,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초록 식물들의 조화가 런던의 이미지라는 생각으로 공간의 컬러 가이드를 만들어 설계를 진행했다.
손으로 만드는 과정
설계를 진행하면 3D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을 많이 한다. 빠르게 공간감을 검토할 수 있고 클라이언트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를 다른 방법보다 손쉽게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는 과정을 거치려 한다. 그 이유는 모델을 만들거나 일대일 목업을 만드는 과정에서 깨닫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경험담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새로 지어지는 현대식 한옥의 난간과 전통 공간에서 쓰인 취병을 재해석해서 풀어본 프로젝트다. 창덕궁 후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취병의 본래의 쓰임은 관목류 덩굴성 식물 등을 심어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 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다. 밖에서 내부가 보이는 것을 방지하고 공간을 분할하는 역할을 하면서 경관을 조성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취병을 설계에 반영했는데, 전에 만든 경험이 없었기에 공사 전 대나무 살의 간격과 매듭 방법을 목업을 통해 검증하고 도면에 적용해 공사를 진행했다. 이 아이디어로 건축이 설계했던 유리 난간을 대신하게 됐다.
두 번째는 지형 조작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공간의 크기가 작아 실제로 미리 지형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프로젝트는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지형을 검토했는데, 지형의 공간감을 실제 스케일로 느껴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직접 흙을 파내면서 지형을 먼저 미리 만들고 공간감을 느낀 다음 그 지형의 높이를 레벨기로 측정해 도면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물론 주변 환경까지 모형으로 만들 수는 없기에 현장에서의 공간감은 또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설계의 방향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신했다.
디자인 빌드를 하는 이유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효율성과 생산성이 중요하다. 현대인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업무를 분업화했다. 이로 인해 보람은 잃었다. 그렇다면 보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내가 했다’ 또는 ‘우리가 했다’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철저하게 분업화한 과정(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데 기획, 설계, 시공이 분리 발주되는 과정)을 통한 결과에서는 보람을 느끼기 어려웠다. 정말 가치가 큰 프로젝트에 참여해도 수많은 전문가와 실무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안에 우리 것은 없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실무자들의 이름도 남길 수 없었다. 오로지 발주처의 것이었다.
분업화의 효율성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들기의 중요성에 관해 묻는다면 공간을 만드는 전 과정에 참여했을 때 조금 더 보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직접 식물을 심고 돌봄을 통해 식물의 생활사를 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email protected]
안마당더랩(Anmadang the Lab)은 상생의 가치 아래 균형, 단순, 조화, 대비, 스토리, 실용성, 합리성 등 다양한 디자인 철학을 담아 외부 공간을 기획, 설계, 시공하는 디자인 작업실이다.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지속가능한 것에 관심이 많다. 좋은 공간이 우리의 삶을 개선시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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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혼란과 잡거의 도시
한국의 인천과 부산, 중국의 상하이와 칭다오, 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도시 여행자에게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항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인데, 서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외국인이 국가 경계를 넘나들고 거주하려면 국가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의 경우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시작으로 11개국의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아홉 국가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서울 정동 일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 양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정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 정부는 공사관은 물론 일본인이 도성 안에 주거하는 것조차 불허했기 때문에 일본 공사관은 돈의문 밖에 자리해야 했다. 그러다 임오군란 때 공사관이 화재로 소실되고 일본 측 피해 보상 문제를 다룬 제물포 조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도성 안으로 입성하게 된다. 1896년 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고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와 주동注洞(남산 예장자락 일대)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거주가 허가됐다. 남산 북사면에서 시작된 일본인 거류지는 훗날 용산과 이촌까지 확장된다.
반면 중국인이 서울에 정착한 배경은 또 다르다. 그들은 수백 년간 지속한 양국의 관계를 명분으로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부류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우리나라와 교섭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청국은 자신들과의 오랜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 사대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대와 상인을 이용해 조선에 대한 새로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청국 군대가 임오군란 등의 폭동 진압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 초권력 행세를 했다면, 화상華商은 자국 군대와 결탁해 조선의 국가 재정에 개입하고 상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화상들은 뒷배에 군대를 두고 있어서 조선인 중심의 기존 상권을 파고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종로 등 기존 상권을 점거하면서 조선인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켰지만, 결국 중국 공관인 총판조선상무위원공서(總辦朝鮮商務委員公署, 이하 상무공서)를 중심으로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게 된다. 1883년 9월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건립된 상무 공서는 원래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이었으나, 상무공서의 초대 상무위원인 진수당(陳樹棠)이 매입하여 지은 것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숙소로 이용했던 남별궁(이후 환구단 자리)에서 영사 업무를 처리했었다.
*환경과조경406호(2022년 2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박희성, “1910~1920년대 경성부 華僑 토지 소유 분포와 변화 양상”, 미발표 논문.
강진아 외, 『개항기 서울에 온 외국인들』, 서울역사편찬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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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새해를 걸으며
해피 뉴 이어. 이미 두 달 전에 정해 둔 새해 첫 호 이 지면의 제목은 ‘한국 조경 50주년, 『환경과조경』 40주년을 맞으며’였다. “한국 조경이 쉰 살을 맞는다. 2022년, 한국조경학회 설립 50주년과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이 겹치는 해다. 8월 말에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주제로 내걸고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일, 다음 50년을 예비하며 설계하는 일 모두가 중요한 2022년이다.” 이렇게 잔뜩 힘들여 한 문단 쓰고 나니 글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연말 강추위에 얼어붙은 거리를 걷다 돌아왔다. 걸으며 새해를 맞는다.
계속 붕 떠 있는 느낌, 토대가 무너진 허공에 서 있는 기분. 어디가 끝인지 모를 답답하고 막막한 코로나 시대의 긴 터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유도, 계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감염된 도시의 어수선한 풍경 속을 목적 없이 걷는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게 됐다. 몸을 일으키면 저절로 걷게 되고 그냥 걷다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한 희망이 생긴다. 노을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으면 복잡하게 뒤엉킨 습한 생각들이 바람에 바싹 마른다. 두 발과 땅이 대화하는 느낌, 나 자신을 세상으로 여는 느낌. 이동이나 답사처럼 특별한 의도를 갖는 걷기와 달리 그냥 느릿느릿 걷다 어슬렁거리며 떠돌다 옆길로 새는, 우연에 내맡긴 걷기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신체에 자유를 준다.
어쩌면 걷기보다 걷기에 관한 책에 더 재미를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이론형 인간인지라 닥치는 대로 걷기 책을 모으고 빌리고 읽었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같은 책에서는 여러 철학자와 문인의 산책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고통의 순간에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누빈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소요한 베냐민. 그들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다 보면 움츠린 몸을 일으키고 운동화 끈을 묶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사유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책들을 읽다 보면 도시를 느리게 걸으며 섬세한 풍경을 누리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생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이나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걷기의 철학』이 경쾌한 산책이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길 잃기 안내서』는 긴 도보 여행이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온 전위적 발걸음을,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제 것으로 장악한 자신감을 만날 수 있다.
급기야 지난 가을학기 대학원 ‘환경미학’ 시간에는 교실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강의계획서 첫 줄에 허세 가득한 문장을 적었다. 익숙한 도시를 낯선 시선으로 걸으면 일상의 환경에 대한 미학적 문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수강생들을 설득했다. 시흥갯골생태공원과 배곧생명공원, 하늘공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경의선숲길, 청계천, 후암동과 해방촌 골목길, 그리고 지도 바깥의 이름 없는 길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두 발로 지도를 그렸다. 학기말쯤 우리는 하늘과 날씨에 대한 글을 적고 잡초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에 끌려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당신의 것은 아닌』을 집어 들었다. “산책은 거창한 의미 이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련된 숍과 산책로가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다. 돈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걷는 것이다. 막차가 끊긴 서울 시내를 걷고, 가끔은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퇴근 후에 집에 가기 싫어 정처 없이 쏘다니기도 한다.……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걷기의 가장 큰 매력은 막막하고 답답할 때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걸을 수는 있다는 점 아닐까. 걸으며 새해를 연다.
2022년을 여는 이번 호는 ‘제4회 젊은 조경가’의 수상자인 조용준(CA조경 소장) 특집호다. 에세이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에 담은 그의 설계 철학, ‘여섯 가지 이야기’로 편집한 그의 작업, 남기준 편집장의 인터뷰, 진양교와 제임스 코너의 추천 에세이로 구성한 특집 지면에서 조용준의 도전과 실험을 만날 수 있다.
이번 호부터 두 편의 흥미로운 시리즈를 새로 올린다. 박희성(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이 집필을 이어갈 ‘모던스케이프’는 근대기의 그림, 엽서, 지도, 책 등 다양한 매체에서 근대 도시의 풍경을 엿보는 기획물이다. ‘어떤 디자인 오피스’는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는 지면인데, 첫 순서는 ‘조경하다 열음’ 편이다.
본지 창간 40주년(2022년 7월호)을 맞아 올해 ‘조경비평상’의 상금이 대폭 풍성해졌음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조경을 주어로 고민 중인 예비 조경비평가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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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그린란드 상어의 바다
그린란드 상어가 보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수명이 수백 년이나 되는 그린란드 상어는 대부분 어렸을 때 시력을 잃는다. 기생충이 눈을 파먹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뛰어난 청각과 후각이 있어 먹잇감을 문제없이 사냥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바다를 유영하는 그린란드 상어에게 풍경은 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어렸을 적 보았던 바닷속을 몇 백 년 동안 곱씹으며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고 있을까.
길 한복판에서 끊어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점자 블록을 본다. 밝은 색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올록볼록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안내견이나 동행인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머나먼 북극해 깊은 곳의 그린란드 상어를 떠올린다.
경험해보지 않아 상상하지 못하는 풍경,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을 생각한다. 검고 차가운 밤하늘이 북극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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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 소니 파크
여백의 공원, 도시공원을 재정의하다
1966년 긴자에 지은 지상 8층과 지하 5층의 소니 빌딩은 소니 제품을 전시하는 곳이자 판매하는 쇼룸이었다. 2013년 소니는 기존 건물을 허물고 새 빌딩을 세우기로 했다. ‘긴자 소니 파크(Ginza Sony Park, 이하 소니 파크)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헌건물을 해체하고 바로 새 건물을 세우지만, 소니는 건물을 허물고 빈 공간에 잠시 공원을 짓기로 한다. 2016년 건물을 해체하고 2018년 공원을 열었다. 건물이 사라진 긴자 스키야하시 교차로에는 면적 707m2의 지상 공원과 지하 4층 규모의 로우어 파크(Lower Park)가 생겼다. 지상에는 세계 각지의 특별한 식물이 모여 있다. 지하 1층에는 음식점이 들어섰고, 카페가 있는 지하 3층은 인근의 니시 긴자 주차장 지하 2층과 직접 연결된다. 지하 4층에는 크래프트 맥주 가게가 있고, 지하 2층은 이벤트나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쓰인다.
2018년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소니 파크,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도심 속 사적 공간인 소니 빌딩을 올림픽 개최 시기에 맞추어 도쿄 시민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임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사례였다. 처음 소니 파크를 방문한 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니 빌딩 일부를 소재로 한 한정판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도 꾸준히 찾아가 소니 워크맨 40주년 기념행사 ‘워크맨 인 더 파크(Walkman In The Park)’를 소니 워크맨을 10년 넘게 애용한 세대로서 추억에 잠겨 둘러보고, 크리스마스에는 아이와 함께 ‘에르메스 징글 게임’을 관람하기도 했다. 소니 파크는 나와 가족에게 도심 속 놀이터 같은 공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이후에는 직접 찾아가지 못했지만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니 파크에서 벌어지는 인터랙티브 전시와 이벤트를 확인했고 그 속에서 ‘소니다움’, 즉 예측 불가능한 혁신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긴자라는 보수적이면서도 럭셔리한 콘텍스트 안에서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혁신적 허브로 발돋움해 다양한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소니 파크의 활기찬 모습이 큰 감명을 남겼다.
하지만 소니 파크는 기간 한정 공간이다. 2022년, 이곳은 새 빌딩을 들이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본래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맞춰서 2020년까지 소니 파크를 개방할 계획이었지만 1년 연장해 2021년 9월까지 공원을 운영했다. 2024년 완성될 뉴 소니 빌딩은 어퍼 파크(Upper Park), 파크(지상 공원), 로우어 파크로 구성된다. 새로운 빌딩 역시 거리에 공공 공간을 제공하는 공원이라는 소니 파크의 콘셉트를 계승한다. 소니답고 독특하고 장난기 있는 공간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 1단계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그간 소니 파크가 도시건축적 관점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뉴 소니 빌딩은 어떤 모습으로 고객과 시민에게 다가갈지 궁금해졌다. 소니의 대표이사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를 이끈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나가노 다이스케(Nagano Daisuke)는 소니 기업의 대표이자 치프 브랜딩 오피서(CBO)다. HQ 브랜드전략부 브랜드인큐베이션그룹에서는 제네럴매니저를 담당하고 있다. 긴자 소니 파크 프로젝트 인솔자로서 2013년부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2018년 8월부터 2021년 9월까지 긴자 소니 파크 시즌 1을 이끌었다. 2024년에 공개 예정인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소니 그룹의 새로운 브랜딩 실험을 주도하고 있다.
이원제는 도심 속 다양한 공간과 상호 작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공간을 구성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휴먼웨어를 라이프스타일 관점에서 읽고 해석해 ‘도심에서 풍요로운 삶의 질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상명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교수이며, SPC그룹과 UDS 코리아 자문교수를 역임했다. 중앙일보 폴인에서 ‘밀레니얼의 도시’(2018) 콘퍼런스를 총괄·기획했고, 저서 및 번역서로는 『인간을 위한 도시 만들기』(2014), 『도시를 바꾸는 공간기획』(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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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하다 열음
삶의 그릇을 빚는 젊은 조경가의 매니지먼트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대학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었다. 비슷한 시기에 조경 공부를 시작한 이들 중 조경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경을 떠난 사람도 적지 않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전공자로서 그동안 해온 고민의 공통분모는 조경일 것이다. 그 속에서 길을 찾은 사람 혹은 찾고 있는 사람은 아직 조경 제도권에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나 또한 수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아직 조경이라는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인연과 기회를 통해 떠올리게 된 새로운 화두가 동력이 되어주고 있을 따름이다. 조경 설계 도면만 그리는 사람이 조경가일까, 이 질문은 내게 기연(機緣)과도 같다. 답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헤맨다 해도 좋을만큼.
‘조경하다 열음’(이하 열음)을 꾸린 지 5년째다. 대학에서는 설계 중심 커리큘럼으로 조경을 배웠다. 졸업 후엔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며 10년간 경력을 쌓았지만, 교육 과정이 조경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무를 하다 보니 사회에는 조경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제도와 구조적 문제로 손을 뻗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의견을 제시하거나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건 아니다. 어느 분야나 회사에 속하지 않은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접근한다면 말이다.
지역의 자원이나 문제를 발굴하더라도 조경업의 측면 그리고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는 공모에 참여하거나 설계 도면을 납품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설계를 위해 대상지를 조사하면 할수록 갑갑했다. 도면을 완성하는 일 외에도 조경학과에서 배운 역량으로 솔루션을 내놓을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눈을 감아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판을 만들기로.
조경가의 역할은 주어진 대상지에 대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장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디자인을 넘어 여기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는 전문가, 열음이 지향하는 조경가의 모습이다.
생활밀착형 조경
코로나19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공원 녹지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생활 공간 속으로 자연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시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꾸준히 나온다. 도시를 쾌적하게 하는 대형 공원과 녹지와 더불어 일상 속 생활밀착형 공간의 쾌적성을 높여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공간에는 선과 숫자 중심의 기존 엔지니어 방식을 넘어 커뮤니티 디자인을 통한 솔루션 제시가 요구된다. 석수골 마을정원 조성(2018),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동네정원 코디네이터(2019, 2021)는 시민의 욕구를 듣고 때로는 디자이너, 때로는 전략가가 되어 현장을 바탕으로 해법을 찾아본 경험이다. 열음은 주민들을 만나 소통하고 공간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현장 중심의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국가 정책의 변화와 시대적 수요를 조경가가 주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다양한 정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국가 과제의 핵심은 지역 주민과 함께 공간을 개선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조경가는 관계를 만들고 대응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강하다. 이해관계가 복잡한 주민 참여 공간 조성 사업에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소셜 디자이너로서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가지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북촌 도시 재생, 여수 농촌 재생, 강화도 어촌 재생이 그 사례다.
북촌은 개발이 아닌 보존을 선택한 주민들 덕분에 600년 역사적 자산을 지키며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적 명소가 된 곳이다. 하지만 최근 무분별한 상업화로 인한 정체성 훼손, 과도한 관광객 방문으로 인한 생활 환경 침해 등의 문제가 대두됐다. 살고 싶은 마을과 머물고 싶은 동네를 위한 공존·상생의 길을 현장에 상주하며 찾고자 했다. 먼저 한옥 보존에 대한 규제로 인한 경직된 지역민의 마음을 달래고자 ‘북촌정원산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부담 없이 접근하고 식물을 통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 도시재생의 포문을 열었고,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수 새뜰마을에서는 개발제한구역과 여수 국가산업단지로 인해 열악해진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 잠재된 마을 자원을 발굴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 봉계동 일원의 ‘주삼지구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지역 내 빈집 및 노후 주택을 정비하고,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및 복지 지원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강화도에서 진행한 ‘어촌뉴딜사업’은 주민이 주도해 해양 경관 개선 및 경제 활성화 기반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다. 곳곳에 산재된 유휴 공간과 해양 경관을 개선하며 지역 사회 구성원과 방문객을 위한 공간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우리의 역할을 찾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조경가의 활동 무대를 바다로 확장하는 중이다.
조경은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품질의 차별화된 조경 공간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고급 주택의 정원 등 사적인 공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오피스 빌딩이나 호텔, 상업 공간, 아파트 조경이 주로 완성도가 높은 조경 공간으로 꼽힌다. 따라서 디자인적 조형미, 고가의 자재와 식물 활용, 시공성, 식물 간의 균형과 조화로움 등은 차치하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동네에서 더 나은 조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주민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조경은 워낙 다양한 역할을 하기에 그 의미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근간에는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연하는 편집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의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와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도시의 누군가는 이러한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실정이다.
정원에 공공성이 더해지면서 조경이 태동했다. 그런데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조경 공간의 품질은 더 떨어진다. 좋은 소재와 기술을 쓰고 인력을 많이 투입하면 품질이 좋아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본력을 가진 클라이언트만 좋은 조경 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과거 귀족에게만 허락된 정원(loyal garden)과 다를 게 없다. 다수의 공공을 위한 공간일수록 좋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적으로 경제 자본과 멀어지면 쾌적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권리도 제한되는 것인가.
예산 분배는 정책가의 역할이니 접어두고 조경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조경가의 손길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일단 뛰어들어 솔루션을 제시하고 자격을 갖추어 판을 만들자는 전략을 세웠다. 많은 비용이 요구되는 디자인이나 재료를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화의 체감률을 높이는 방법을 찾는 데 주력했다. 지금까지 조경가는 주민들이 원하는 걸 듣고 설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자체 진단과 직관에 의한 설계 결과물을 공청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통보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조경가는 일을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서 공간을 누리는 사람들은 주민이란 점을 종종 잊어버린다. 꾸준하게 마을과 연을 맺고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구나 집 앞에서 고급 정원을 향유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나은 공간에서 쾌적함을 누리는 일에는 공평하면서 보편적인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돈이 되는 고급형 조경이 아닌 누구나 누릴 있는 녹색 복지로서 보급형 조경에도 관심을 갖고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게 조경의 공공성이 아닐까. 자연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도시에 영양 결핍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결핍은 결국 사회 문제로 이어지니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열음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아이들의 일상에 자연을 놓아주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소외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학교는 창의적인 인재 육성보다 효율적인 통제를 목적으로 설계됐다. 주인인 학생을 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는 모순적인 구조다. 교육부도 이를 인지하고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라는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 공간에 대한 접근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특히 운동장은 일상에서 자연을 접하고 숲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인데도 대부분 방치되어 있다. ‘생태 숲 미래학교’는 경기미래교육 핵심 과제 5가지 중 하나다. 우리는 2개 학교(김포 고창초등학교, 부천 송내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생태적 가치와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기후 변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 공간 조성이 목표였다. 그 과정을 통해 조경가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 공간 혁신을 위한 공간 전문가를 촉진자로 위촉하고 건축·도시·조경 전문가가 참여할 길을 열어놨으나 조경 분야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업적 측면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점과 기존과 접근 방식이 다른 생소한 프로젝트인 점이 이유인 것 같다. 촉진자 선정에 참여한 40여 명의 전문가 그룹 중 조경가 그룹은 열음이 유일했다. 학교는 미래 세대가 자라는 공간이고 전국의 학교 개수를 고려하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잠재적 탄소 흡수원이자 환경 교육 거점으로서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참여 계기였다. 이후 조경 분야가 참여할 길을 열어두기 위한 교두보 역할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학생들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학교에선 교실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쉬는 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산과 바다와 같이 먼 곳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완벽한 스트레스 해소는 어려울지라도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자연을 마주하며 힐링하는 경험은 스트레스 총량을 줄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소생물 서식처 기능까지 고려한다면 사람과 야생 동물이 공존하는 지역의 생태적인 거점으로 거듭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3년의 시간, 12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생활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특히 부천 송내고등학교에서는 교내 환경 교과목 교사와 합을 맞추면서 소프트웨어와 어우러진 공간 조성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기존 환경 교육은 학교 바깥의 녹지를 간헐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정도였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학교 구성원들과 심도 있는 상의를 통해 교육 과정과 연계한 AI 교육 등의 학습 공간을 계획했다. 음악회나 독서와 같은 공간 경험을 넘어 진로 탐색과 연계할 수 있는 모델로 서 숲을 제안했다. 교직원과 학생들 모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진행 과정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처음에는 일부 위요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과업이었으나 또 하나의 위요 공간부터 필로티, 건물 틈새 중층, 옥상 등 내외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녹지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하여 추가로 예산을 받아 과업을 수행하게 됐다. 학생들과 함께 도출한 생각을 설계로 구현했지만 공사는 가격 입찰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의 손을 벗어나 의도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정식 공사 감리는 아니지만 디자인 감리 제도를 통해 시공사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소재 선택부터 디자인 디테일 조정 등 여러 부분에 관여했다. 프로젝트 성과에 100%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빗물, 숲, 옥상, 실내 등 여러 가지 유형의 정원을 일상의 일부인 학교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된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조경하다 열음’의 구성원
현재 열음은 경영 관리, 설계와 엔지니어링, 공동체 등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조민영 소장이 경영 관리 총괄로 회사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고, 윤호준 소장은 설계 및 엔지니어링, 김도훈 소장이 공동체 파트 총괄이다.
엔지니어링 파트 행동대장 이병우는 온갖 실무를 담당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식재다. 설계부터 시공, 활착 후 모니터링까지 본인 머리에서 현장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걸 좋아한다. 식재와 관련된 부분에선 회사 내 ‘원 톱’이다. 이외에도 각종 설계가 실제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게끔 관리한다.
신혜지는 기획과 구상을 실시설계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장하니는 내역을 담당하면서 다른 직원들이 의욕으로 채운 도면을 현실과 연결시키는 데 주력한다. 김윤은 사회초년생이지만 기복이 없고 뚝심이 강해 선배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래픽 기술을 특화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
공동체 파트는 현재 북촌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임은경은 현장에서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정리하는 소통 창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용진은 다양한 의견을 북촌에 맞게 체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떤 문제가 들어와도 북촌화하여 주민과 협의해 적절한 프로그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김범진은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오랜 시간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시대적 흐름이나 상황 속에서 북촌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해준다. 박지영은 센터 내 유일하게 도시 공학을 전공한 도시재생 전문가로 하드웨어 중심의 계획 수립과 사업 실행을 전담해서 진행하고 있다.
조경가 매니지먼트를 꿈꾸며
회사와 대표는 동일체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법인은 또 하나의 인격체다. 회사와 대표가 등가 관계로 매칭되는 순간 동료들이 빛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열음에는 직급이 없다. 창립 때부터 직급 체계를 두지 않았다(물론 나이 차에 따른 구분과 예를 갖춘다). 모든 동료의 명함에는 ‘조경가’란 타이틀만 있을 뿐이다. 각 파트장들만 소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을 뿐, 다른 동료들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열음의 조경가들은 대외 업무 시 회사를 대표하며 자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책임질 권한을 갖는다. 그렇다고 경력자나 소장이 자기 업무만 하면서 방치하는 건 아니다.
권한을 주되 책임을 선배들이 분담하며 업무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한다. 직원들이 연봉만으로 설계업을 영위하는 건 회사나 개인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다. 설계는 계량이 어려운 지식 서비스 산업이므로 야근, 주말 출근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다 나은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을 정해놓고 일을 마무리하는 게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직원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있더라도 최소한 일정 수준의 품질을 맞추기 위해 함께 스터디 하면서 해법을 마련하는 구조를 취하고 이를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열음을 배경으로 한 조경가 개인의 커리어 축적, 수익 배분, 방학 제도 운영이다.
열음은 정원박람회 작가나 공모전 등 개인 커리어를 쌓는 것도 장려하고 있다. 연봉 외에 노력하는 만큼 수익을 배분하는 경영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회사 매출의 일정 수익금은 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나가고 있다. 방학은 주로 연말에 주어지며 2~3주 동안 회사와 어떤 연락도 하지 않는 휴식기를 갖게 한다. 자기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할 정도로 성장한 조경가는 각자 독자적 조직을 구축하도록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연예인의 방송 활동 외 경영 전반을 관리해주는 매니지먼트 회사 개념을 모티브로 한다. 회사가 소화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역량은 다양한 전문가와 의 협업 관계를 통해 보완하며, 이를 연결하는 것 또한 열음의 역할이다. 조경을 잘 하고 싶은 사람이 조경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는 회사가 되려 한다.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조경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온전하게 자기 일에 시간을 쏟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는 회사로 성장하는 것이 열음의 꿈이다. 조경 설계에 국한해 우수한 사람들을 모아놓는 게 아니라 도시, 공동체, 스마트 시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업무를 수행하는 조경 전문 소속사, 그게 바로 ‘열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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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하다 열음의 대표 조경가 윤호준은 조경 설계를 기반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학부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설계사무소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뒤 제도권을 넘어 새로운 판을 만들자는 포부로 2017년 조민영과 함께 사무실을 열었다. 주민과 소통하고 공간의 조사,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생활밀착형 조경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연의 모습을 도시에 재현하는 편집자로서 사무실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직관보다 경험, 발주처보다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인다. 예비 조경가를 발굴·육성하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조경설계사무소를 키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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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도시 균열의 시작, 전차 노선이 만든 미완의 풍경
교통에 의한 도시 경관의 균열은 19세기 말 서울에 부설된 전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전차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도시 경관에 전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느낀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 전환을 시도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도성 한양에 궁궐과 단묘(壇廟), 성곽을 축성하여 새로운 국가의 출발을 알렸던 것처럼,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의 표상을 도시 경관에 실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혁명에 의한 체제 전복으로 탄생한 국가가 아니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려 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전승 받은 제도를 따르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한제국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근대 도시로의 변혁을 이루어야 했기에, 전통적인 지배 구조로서의 황도(皇都)와 무역 등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근대 도시의 이중적 구조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기준으로 재편된다.
경운궁 동쪽에 건설된 환구단과 황궁우가 황제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전차는 근대 도시로의 실천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서대문정거장(지금의 서대문역 일대)에서 시작해 황토현(지금의 광화문사거리)~종로~흥인지문을 지나 홍릉(천장 전 명성황후의 묫자리,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근)까지 가는 홍릉선이 먼저 개통되었다. 선로를 부설하여 전선을 놓고 발전기를 돌려 전차가 다니도록 개통한 것이 1899년 5월 4일이다. 우리보다 근대화를 먼저 시작한 일본에 견주어도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1 홍릉선 외에 종로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용산선(1899년 12월 20일), 서대문정거장과 남대문정거장을 연결한 의주로선(1900년 7월 6일), 그리고 마포까지 연결된 마포선(1907년)까지 네 개의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각주 1.교토에서는 1895년 1월 31일, 도쿄에서는 1903년 8월 22일에 개통했다.
참고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p.28~35.
신경진,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4> 황제의 도시 베이징 (하)”, 「중앙일보」 2011년 2월 9일.
그림 출처
그림 1. American Street Railway, “The Electric Railway in Corea”, Street Railway Review vol.
IX, 1899, p.534.
그림 2. commons.wikimedia.org/wiki/File:Travelogues;_(1908)_(17).jpg
그림 3.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서울책방, 2019, p.16.
그림 4. 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9921
*환경과조경405호(2022년 1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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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2021년을 되돌아보며
옆 방 동료와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온라인으로 설계 스튜디오 리뷰를 하고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채 공원을 산책하는 초현실적 상황이 이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편하고 익숙하기까지 하다. 감염 도시의 역설적 풍경이 어느새 친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번 겨울이 코로나 시대의 마지막 계절이기를 소망하면서 2021년 한 해의 『환경과조경』을 다시 펼쳐본다.
본지가 주최한 ‘제3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최영준 특집으로 1월호를 꾸렸다. 중국과 미국, 한국을 넘나들며 다국적 조경설계사무소 랩디에이치Lab D+H를 이끌고 있는 최영준. “디자인을 통해 희망과 사회적 책무를 구현”하는 그의 젊은 조경 정신을 특집 지면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같은 호에 올린 ‘춘천 시민공원 마스터플랜 설계공모’ 수상작들은 동시대 한국 조경의 생생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2월호에는 『LA+』의 실험적 기획인 ‘생물체 설계공모’, 한국전쟁의 민간인 희생자를 기억하는 ‘진실과 화해의 숲 설계공모’, 신도시의 조경 네트워크를 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5-1생활권 조경 설계공모’를 동시에 실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세 가지 공모전은 조경의 넓은 스펙트럼을 새삼 확인하게 해주었다.
어린이놀이터 프로젝트 13개를 3월호에 모았다. 서울의 초등학교에 놓인 신상 놀이터부터 저 멀리 터키 이스탄불과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린이공원에 이르기까지, 틀에 박힌 놀이터 디자인의 전형을 깨는 갖가지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었다. 6월호에 실은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도시재생형 정원들은 일회성 전시와 장식을 넘어 코로나에 지친 시민들에게 안온한 위로의 공간을 제공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8월호는 1982년 7월 창간한 『환경과조경』의 통권 400호였다. 1월호부터 7월호까지 편집부는 한국 현대 조경의 성장사를 기록하고 저장하며 조경 설계와 이론의 쟁점을 발굴하고 그 지평을 확장해온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다각도로 되짚는 특집 지면들을 기획했다. 1월(393호)부터 7월호(399호)에 걸쳐 실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에서는 편집자 김모아, 남기준, 배정한, 윤정훈과 편집위원 박승진, 박희성, 최영준, 최혜영이 옛 『환경과조경』을 50권씩 나눠 맡아 재독하고 재조명했다.
4월호에는 그동안의 표지와 책등을 한데 모은 특집 ‘표지 탐구, 책등 탐방’을 구성했다. 5월호 특집 ‘편집자들’에는 본지를 거쳐 간 추억 속의 편집자들을 초대해 그들이 엮었던 옛 기사와 꼭지를 당시의 시각으로 다시 살폈다. 6월호에 올린 ‘읽는 행위를 설계하는 법’에서는 『환경과조경』의 편집 디자인 변천사를 다뤘다. 7월호 지면에는 독자 대상 설문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의 결과에 편집부의 기획을 보태 옛 연재 여덟 꼭지를 재구성한 ‘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꾸렸다. 통권 400호(2021년 8월호)에는 『환경과조경』 400권의 목차를 모두 모았다. 39년 역사를 세로지르는 총목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현대 조경의 궤적을 담은 아카이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9월호에서 많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은 건 ‘416 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 수상작들일 것이다. 세월호 7년, 함께 실은 평문이 질문하듯, 모두의 기억은 모두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10월호에는 서울공예박물관(오피스박김), 블랙메도우, 메도우카펫, 가든카펫(이상 김아연), 일분일초(안마당더랩), 어반 포레스트 가든(김봉찬+신준호), 나의 정원(정영선), EV6 언플러그드 그라운드 성수(HLD) 등 모처럼 국내 조경가들의 다양한 근작과 전시를 담을 수 있었다. 11월호에는 제18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수상작들과 ‘오목공원 리모델링 지명 설계공모’ 초청작들을 실었고, 최근의 주목할 만한 완공작인 마포새빛문화숲(이화원)과 남산예장공원(호원)의 면모를 꼼꼼히 짚었다.
이번 12월호에는 본지가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와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 ‘한국 조경 50’의 결과를 담았다. 303명의 전문가가 뽑은 한국 현대 조경의 대표작, 지난 50년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50년을 설계하는 기획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 호에는 매년 본지가 주최하는 ‘올해의 조경인’과 ‘젊은 조경가’ 선정 결과를 싣는다. 제24회 올해의 조경인으로는 한국경관학회 회장을 맡아 조경계획의 확장에 힘써온 주신하 교수(서울여대), 제4회 젊은 조경가로는 다양한 조경설계 프로젝트와 실험적 기획을 가로지르며 활동해온 조용준 소장(CA조경)이 선정됐다.
다가오는 2022년은 한국 조경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한국조경학회가 설립 50주년을맞는다. 7월에는 『환경과조경』이 창간 40주년을 맞는다. 8월 말에는 광주에서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가 열린다. 창간 40주년을 준비하며 『환경과조경』은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더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조경 저널리즘의 새 좌표를 찾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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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0년, 반세기 조경
2022년 새해에는 한국조경학회가 탄생 50주년을 맞는다. 1972년 봄꽃이 기지개를 필 무렵, 대대적인 국토 개발을 이끌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조경에 관한 첫 세미나가 개최됐고 7월에는 건설부에 공원녹지과가 신설됐다. 그해 겨울에 서울대와 영남대에서 조경학과가 설치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29일, 한국조경학회 창립총회가 개최되면서 한국에 ‘조경’의 탄생을 알렸다. 그로부터 어언 50년 세월이 흘러 내년에는 사람의 나이로 치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나이에 이르렀다.
반세기 동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과 함께 조경 산업 또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고, 그 중심에는 늘 조경학회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 학회는 본연의 임무인 학술 관련 사업으로 학회지 및 학술지를 발간하고, 한‧중‧일 국제 조경전문가 회의, 세계조경가대회IFLA 참여 등 국제 교류를 통한 학문적 정보 교환에도 앞장서 왔다. 학생들을 위한 조경디자인캠프와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을 매년 개최하고 조경 업계의 발전을 위해 대한민국 조경문화대상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산림조합법 개정 반대 투쟁’(1988년)과 ‘건설산업기본법 개정 반대 투쟁’(1997년)처럼 조경 분야가 위기에 직면할 때면 업계와 함께 분야의 권익을 위해 선두에 나섰다.
기후 위기와 포스트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 앞에서 조경학회도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있다.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조경학회의 힘찬 발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이제 미래의 50년을 목표로 반세기에 접어든 한국 조경의 과거를 차분히 뒤돌아보고 새로운 변화에 선도적으로 대응할 전략을 세우고 발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해야 할 때다.
먼저, 조경계에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단일의 대표 단체인 조경학회에서 파생되어 나간 여러 관련 학회와 협회 등 많은 단체 사이의 협력과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과거 권위적 형태의 중앙집권적 단일 조직은 지양해야 한다. 분야의 다양한 요구를 하나의 목소리로 대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중앙 조직의 결정을 모든 단체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상명하달 방식의 운영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여러 단체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조경 분야 전체의 단결된 목소리가 필요할 때는 함께 연합해 힘을 모으는, 공감 능력을 극대화한 ‘느슨한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지난 2017년 3월 3일, 조경의 날 기념식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가 총재 사퇴 후 결국 해체 수순을 밟은 ‘대한환경조경단체총연합’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 조경 분야에도 이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해 미래 성장을 위한 혁신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젊은 조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조경 분야의 여러 단체와 조직은 대개 학연, 지연에 얽매여 나이나 학번 순으로 수장을 결정해왔다. 몇몇 단체는 여전히 원로나 고문의 입김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경 원로 1세대를 존경하고 그 공로에 감사하지만, 보수적인 한국의 정치판에서도 30대 정당 대표가 나오는 현실을 볼 때 조경계는 세대교체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연공서열보단 능력과 성과주의에 바탕을 둔 세대교체 바람이 변화에 대한 열망과 미래 세대의 역동성을 담아내는 용광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내년 8월 광주에서 열리는 세계조경가협회(IFLA) 한국총회를 계기로 모든 조경인이 힘을 모아 분야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는 IFLA가 주관하는 글로벌 조경인들의 대표 행사다. 2022년에는 개최국 한국으로 전 세계 조경가들이 모이게 된다. 세계조경가협회는 전 세계 77개국 2만5천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글로벌 조직으로, 1948년 영국에서 설립된 이후 현재는 유럽, 아시아‧태평양,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5개 지회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1981년 협회에 가입해 1992년 IFLA 총회를 서울, 경주, 무주에서 개최한 바 있다. 당시 국내 조경계가 일치단결하여 대회를 잘 준비한 결과 34개국 305명의 외국 정회원 참석자를 포함해 총 1천 3백여 명의 참가자에게 한국의 조경을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한국 조경의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학회, 협회 등으로 구성된 IFLA 조직위원회가 얼마 남지 않은 대회 준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손길이 부족하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범조경계 차원의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협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경 분야도 여러 대선 캠프에 조경 정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최근 여러 난관에 봉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경 단체는 여전히 적절한 대응을 위한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분야 전체 생태계가 침체에 빠질 위기에 처해있다. 유일한 희망인 ‘조경진흥법’조차 실효적 사업을 거의 담지 못한 상태다. 타성에 젖은 조경계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 이제라도 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개발하고 조경 분야의 목소리를 제도에 담아내려면 내년 대선이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국토교통부, 환경부, 문화체육관광부, 산림청 등으로 분산된 조경 관련 사업을 아우르고, 나아가 통일 한국의 전 국토를 우리 손으로 푸르게 가꿀 수 있는 강력한 녹색 정부 부처를 만들어보자.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함께 큰 그림을 그려보자. 이번이 기회다.
열 살 터울인 국내 유일의 조경 전문지 『환경과조경』은 2022년 새해에 창간 40돌을 맞는다. 그동안 한국 현대 조경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조경 분야 대표 언론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자부하는 본지는, 2014년 1월 대대적 리뉴얼과 함께 조경 언론으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기반으로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꿔 왔다. 급변하는 인터넷 정보화 시대의 물결에 발맞추어 ‘e-환경과조경’을 오픈했고, 전국 조경학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을 주관했다. 조경 분야 발전에 공헌한 분의 업적을 기리고 미래의 조경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올해의 조경인상’과 ‘젊은 조경가상’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서울정원박람회’와 ‘LH가든쇼’를 진행해 정원 문화 확산과 정원 산업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제 창간 40년을 맞이하여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또 다른 50년을 준비하며 미래를 향한 좌표를 설정하고,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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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흐르지 않는 물길
교실 한구석에서 내가 선물했던 그림을 주운 적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친구들이 자기도 그려달라고 졸랐기에, 스프링 연습장 한 장을 북 뜯어 건네곤 했다. 그렇게 준 그림 하나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겨져 있었다. 누구에게 준 것인지, 무엇을 주제로 한 것인지 잊었을 정도로 특별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의 주름과 여기저기 검게 번진 얼룩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작업실 근처 백화점의 아케이드를 걸을 때마다 그 주름과 얼룩이 떠오른다. 아케이드가 완공되었을 때, 그곳엔 LED 화면으로 만든 시냇물이 흘렀다. 픽셀로 이루어진 네모난 물결이 반짝였고 사람들은 픽셀 수련 잎 아래로 헤엄치는 픽셀 금붕어를 따라 픽셀 물길 위를 걸었다. 예쁜 풍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픽셀 물길 표면은 작은 흠집이 생겨 뿌예졌고 전원이 꺼져 있는 날이 많아지는가 싶더니, 결국 검은 시트지에 뒤덮이고 말았다. 이제 아케이드에는 특별 기획 행사 부스들이 계절마다 번갈아 들어선다. 주름 혹은 얼룩 같기도 한 그 검은 시트지 위로.
픽셀 시냇물을 설계한 사람의 발걸음이 이곳을 향하지 않길 바란다. 그가 그려낸 시냇물을 폭 덮어버린 시트지가 그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을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 늦은 밤, 이제는 그 어떤 픽셀도 흐르지 않는 물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본다. 연습장 북 뜯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