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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
    사람, man 사람에게는 누구나 경험하는 공간이 있다. 어떤 사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장소 자체가 감명을 준다. 뇌리에 남은 공간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그 공간을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로 만들어준다. 다양한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 설계를 거쳐 하나의 장소로 만들어지고, 우리가 의도한 대로 어떤 사람에게 소중한 장소로 기억에 남는 경험과 즐거움을 주는 설계를 하는 사람. 우리가 꿈꾸는 디자이너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아닌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것을 적정하게 제시하는 설계가(디자이너)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조경사무소는 나를 위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엄연히 클라이언트가 있고,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해결책을 최적의 비용으로 도출해 요구한 것 이상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설계로 평가받아야 하는 프로페셔널 집단이다. 나무, tree 무성한 잎은 한낮 뙤약볕 아래에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고, 형형색색의 단풍은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게 해주며, 한 줄로 늘어선 가로수는 나그네의 길을 인도하고, 한데 모인 숲은 대자연이 되어 청정한 공기를 제공하고, 아픈 땅을 치유해준다. 누구나 다 아는 나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무실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기본적인 도구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여러 장점이 많은 나무도 물, 햇빛, 토양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생명을 잃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나무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밥벌이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사무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잘 만든 설계로 장소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며, 그 결과로 얻은 과실을 우리 사무실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사무실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물, 햇빛, 토양이 되어 함께 사람과 나무를 잘 키워야 한다. 그렇게 튼튼하게 자란 나무가 다시 우리 사람들에게 좋은 양분을 돌려주는 그런 오피스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나무’다. 전지적 참견 시점 우리는 공동주택, 리조트 단지, 공원 등 규모가 큰 대상지를 설계한다. 업무 특성상 이용자나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는 소규모의 프로젝트가 아니므로 설계 결과물이 이용자들에게 닿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러한 시차 안에서 하는 일련의 노력이 우리의 설계 과정이며, 어느 예능 프로그램 제목처럼 전지적으로 참견해 시‧공간을 뛰어 넘고자 노력한다. 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용자가 공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상호 간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한 디자인을 고민하고, 분석하고, 예측한다. 최적의 설계안을 도출하기 위해 거치는 모든 연속적인 과정이 우리의 설계 과정이다. 다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참견자일 뿐 직접적인 이용자가 아니기에 우리의 설계와 완성작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이 부분이 항상 아쉬우므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시공 모니터링(이용자의 행태와 환경 변화에 따른 공간의 변화 과정), 선진 답사, 현장 조사와 설문 과정 등 최소한의 간접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파트너십 업무 방식은 크게 계획설계과 실시설계로 분류하여 진행하고 있다. 공모, 현상 등 경쟁 프로젝트 및 계획이 필요한 디자인 파트와 실시설계 및 일반 프로세스 업무를 담당하는 실시 파트로 구분했으며 직원들의 성향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 이 방식은 완성도 높은 설계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운영 방안이며,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형할 수 있도록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역량 있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운영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조직(팀)이 공동 업무를 통해 만드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팀워크와 관계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개인의 사적인 삶은 지향하지만,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행동은 지양한다. 이러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진 스타 설계가가 없어도 내실 있는 성과와 경쟁력으로 클라이언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재까지는 전통적인 직급 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질서와 에티켓을 위한 것이지 디자인 과정에서의 직책은 무의미하다. 더 합리적인 디자인에 따라 설계 방향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다 함께 맞춰가고 있다. 물론 경험과 노하우는 경력이 많을수록 더 있겠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는 지위 고하가 없으므로 디자인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수평적인 대화와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다. 기나긴 과정 2016년 봄, LH의 설계공모로 시작한 세종2차 e편한세상(DL) 프로젝트는 공동주택치고는 그나마 빠르게 2021년 준공되어 주민들이 입주했다. 공동주택 프로젝트는 계획, 설계를 거쳐 공사하고 입주하는 그 기간까지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공동주택의 특성상 건축을 필두로 다양한 협력 공종의 협업을 통해 땅을 나누고, 때로는 분산된 토지를 다시 합치고 그 안에 머무를 사람들의 특성(분양, 임대) 및 세대수를 정하고, 무엇보다도 그 생김새가 도시와 어울리는지를 전문가 집단이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기간에 조경가는 법적으로 필요한 녹지 면적과 교목, 관목의 수를 추산하고, 세대수에 따른 부대시설(놀이터)을 어떤 디자인으로 할지 고민하고, 그 도시가 정한 법률에 부합된 설계인지를 평가(사업 승인)받고 나서야 실제 공사를 위한 실시설계를 한다. 이러다 발주처의 상황이 바뀌거나 감독관이 변심(?)하면 원래대로 할지, 옆집보다 더 좋게 해줄지 말지(특화설계)를 고민한다. 시간과 비용에 대한 검증이 끝나면 드디어 공사를 시작한다. 건설 공사의 마지막 작업인 조경 공사가 완료되면 도면대로 시공됐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주한다. 오늘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단지는 몇 년 전에 설계해 납품한 것일까. 준공된 곳을 가서 보면 우리가 설계한 곳이 맞는지 머뭇거리거나 촌스러운 디자인에 손발이 오그라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의도대로 시공되어 반가울 때가 많다. 무엇보다도 그곳을 이용하는 아이와 부모의 밝은 미소를 보면 따뜻한 마음이 들며 조경가로서 뿌듯하다. 아쉬워서 기대되는 2019년 가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건축사무소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쁘냐? 재미 있는 프로젝트 하나 있는데 시간되면 네가 꼭 해줬으면 좋겠다.” 늘 그렇듯 해외 프로젝트의 실행 확률은 반반. 제주 프로젝트 이후 대규모 리조트 단지 설계에 목마르던 때라, ‘콜’을 외치고 시작한 베트남 호치민 프로젝트. 아무것도 없는 대상지의 면적이 몇 헥타르라는 기초 데이터만 가지고 건축과 함께 진행하며 경계 내에서 이쪽으로 풀빌라, 여기엔 워터파크, 저쪽에는 도시와 조경, 때로는 건축 배치 및 입면까지 간섭(?)하며 즐겁게 프로젝트에 임했다. 아쉽게도 기본계획 마스터플랜과 동영상 편집까지 마무리하고, 최종 기본계획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위한 현지 출국을 일주일 남기고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에 발목이 잡혔다. 하늘길이 막히고 두세 달의 기다림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금세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직원들과 해외 답사 겸 나들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더더욱 아쉽다. 이제 코로나19가 슬슬 풀리고 있으니 다시 추진되길 기대해본다. K-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비전 2030 한국의 공동주택 브랜드와 완성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베트남 등 동남아에 진출하여 최고급 주거 단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장점인 주거 설계 능력과 노하우를 살려서 조경 설계를 하나의 브랜드처럼 만들어 진출해보고 싶다. 더 나아가 건설사나 건축이 아닌 조경가가 주도해 계획, 설계부터 시공까지 토털 디자인을 한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케이팝(K-Pop)이나 케이푸드(K-Food)처럼 조경 산업도 하나의 글로벌한 콘텐츠가 되도록 도전해보고 싶다. 현재 조경 외에 디자인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여 더욱 심도 있는 설계와 더불어 영역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조경 분야도 점점 더 다원화되고 영역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설계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성장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힘든 시대다. 동시에 그린 비즈니스 시장은 더욱 수요가 팽창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태생은 조경 설계이므로 그 뿌리는 유지하되, 영역의 확장을 통해 조경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는 토털 디자인 회사로 진일보하여 앞으로의 10년을 맞이하고자 한다. [email protected]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는 자연 공간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디자인을 모토로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다가오는 시대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보다 앞서 나갈 수 있도록 열정적인 자세로 일하고 있다. www.mnt5.com
  • [모던스케이프] 창경궁 대온실 건립과 진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芙蓉地) 권역을 지나 불로문(不老門)을 향해 가다 보면 우측 담장 너머 창경궁 북측에 자리한 대온실이 보인다. 조선의 궁궐에서 하얗고 투명한 대형 유리 온실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선 일이라,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대온실의 등장에 각양각색으로 반응한다. 조선의 궁궐에 근대 건축물이 있으니 신선하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지 유산이니 철거가 마땅하다, 궁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궁궐은 오직 조선다운 전근대 풍경이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개항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곳은 다름 아닌 궁궐이다. 잘 알려진 경운궁(덕수궁)의 석조전이나 정관헌, 경복궁 집옥재, 창덕궁 희정당 등 전각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채로운 재료와 문양, 조명, 가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창경궁의 대온실과 프랑스식 자수화단, 분수의 앙상블과 대칭적 마감은 경운궁 석조전 일대의 경관만큼이나 근대적이다. 1909년에 조성된 대온실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 계획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만든 시설이다. 대온실의 설계자는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 1856~1921)인데, 대온실 정면의 자수화단과 분수는 누가 설계하고 조성했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건축가가 아닌 원예학자가 대온실 설계를 했으니 주변 조경도 함께 다뤘을 수 있고, 아니면 온실 시공을 한 미상의 프랑스 회사가 조경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쿠바 하야토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학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신주쿠교엔(新宿御苑)의 식물원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1896년 식물원에 최초로 서양식 온실을 건립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창경궁 대온실 설계는 신주쿠교엔의 대온실 건설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신주쿠교엔의 서양식 온실은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옛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데, 창경궁 대온실은 이 온실의 1/4 규모로 작지만 외관은 매우 닮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일본 궁내청 소장 창덕궁 사진첩』, 2006. 문화재청, 『창경궁 대온실 기록화 조사 보고서』, 2007. 김정은, “일제강점기 창경원의 이미지와 유원지 문화”, 『한국조경학회지』 43(6), 2015, pp.1~15. 김정화, 『우리나라 식물원의 기원과 진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昌慶苑植物園 培養室開放 西洋化를 公開”, 「중앙일보」 1932년 3월 6일.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museum.seoul.go.kr) 문화재청 홈페이지(www.heritage.go.kr) *환경과조경416호(2022년 12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광장의 공원화
    벌써 6년이 지났다. 그해 가을은 광장의 계절이었다. 가을을 넘겨 이듬해 봄이 움틀 때까지,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타오르게 한 집회에 연인원 1,500만 명이 참가했다. 차디찬 계절의 뜨거운 광장을 통과하며 『환경과조경』은 특집 ‘광장의 재발견’을 기획했다(2017년 3월호). 특집 서문 일부를 다시 옮긴다. “……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래 최대의 인파, 광장의 역사를 새로 쓴 날 …… 우리는 광장을 뒤덮은 인파를 보며 주체적 시민의 힘에 압도되기도 하고, 그 축제적 가능성에 전율하기도 한다. 한국의 도시민에게 광장은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긴 침묵 후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를 통해 시민이 주체가 된 광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광장을 매개로 집단적 정치 참여를 축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폭발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광장이 형성되고 있는 지금의 광화문광장 현상은 광장과 광장 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 여러 공공 공간 가운데 광장만큼 일상적 이용과 비일상적 이용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공간이 있을까. 광장만큼 도시와 장소의 맥락, 정치와 역사적 상징과 관련된 공간이 있을까.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광장이 녹음을 드리운 공원과 유사한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김정은, 당시 편집팀장). 4년 전 여름, 만든 지 10년도 안 된 광화문광장을 천억의 예산을 들여 뜯어고치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잃어버린 역사성 회복’과 ‘시민의 일상과 조화된 보행 중심 공간화’라는 석연치 않은 명분을 앞세운 서울시는 많은 전문가와 시민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강행했다.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하는지 소통과 토론을 생략한 채 정치 일정에 맞춰 완공 시점을 못박고 과속으로 질주한 사업. 누가 봐도 전시성 포퓰리즘의 산물이었다. 급기야 2019년 초,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환경과조경』 2019년 3월호는 당시 에디토리얼의 제목처럼 “새 광화문광장, 토론은 이제 시작”이기를 바라며 당선작 ‘깊은 표면’과 수상작들을 무려 다섯 편의 비평문과 함께 게재했다. 2020년 여름, 토건 시대에 버금가는 속도로 사업을 주도하던 서울시장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공사는 이미 시작됐지만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새 시장은 10년 전 자신이 만든 광장에 새 옷을 입혔다. 숙의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직진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는 결국 올해 8월 초, 공원의 옷을 입고 일단락된다. 서울시 보도자료의 머리글은 “녹지 면적 3.3배로 늘어난 ‘공원 품은 광장’”이다. 광장의 1/4을 녹지로 채웠고, 녹음이 풍부한 편안한 쉼터에서 일상의 멋과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5천 그루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역사성 회복과 접근성 향상을 명분 삼아 시작된 공간 정치 프로젝트가 자연 브랜드와 휴식 아이템이 한가득 연출된 공원으로 귀결된 셈이다. 8월의 광장은 나무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 바닥분수에서 첨벙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10월의 광장 위에선 다시 누군가를 퇴진시켜야 하고 또 누군가를 구속해야 한다는 외침이 맞붙어 충돌하고 있다. 봉건 왕조의 흔적과 근현대사의 파편이 흩어져 쌓인 혼돈의 장소를 낭만의 광화문‘공원’으로 교정할 수 있을까. 선한 공간의 대명사인 공원으로 모순의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지난한 굴절과 수정 과정을 겪으며 마무리된 새 광화문광장 당선작 ‘깊은 표면’의 최종안을 싣는다. 설계자 조용준의 디자인 노트와 이명준, 정평진 두 비평가의 글을 함께 싣는 것은 광화문광장이 여전히 우리의 토론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광장의 필요충분조건이 좋은 설계인 것은 아니다. 광장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만들어진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틈
    평소보다 짙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학교 화장실에는 그리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얀 전등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평범한 회색 가벽이 화장실 두 칸을 나누고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가벽과, 가벽에 붙은 화장지,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보였다. 그날 밤 가벽과 바닥 사이의 한 뼘 채 되지 않는 틈에는 여러 개의 그림자가 모여 만든 검고 선명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휴대폰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와 찰칵 셔터 소리를 냈다. 설계 스튜디오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다음날까지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고, 늦은 시간이지만 환하게 불이 켜진 설계실에는 과제를 하는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가벽 아래로 손을 뻗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모른다. 혹시라도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 따지기는커녕 누구인지 확인조차 못했고, 옆 칸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간 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낯선 화장실에 갈 때면 바닥과 가벽 사이의 틈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길게 늘어져 흐늘거리는 휴지 그림자 위로,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쥔 낯선 손이 불쑥 솟아오를 것 같아서다. 10cm도 되지 않을 그 틈을 막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손이 닿을 듯한 높이의 낮은 가벽도, 벽면의 크고 작은 구멍도 전부 신경 쓰인다. 오래 전 짙은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야 할 화살을 작은 틈에 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막아주는 매끈하고도 완전한 벽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글·그림 조현진 | 연필 드로잉에 디지털 채색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지의 기억을 읽고 장소의 서사를 담는 디자인
    조경이 하는 일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먼저 찾게 되는 것은 그 지역만이 가진 이야기들이다. 문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땅이 생겨남으로써 발생한 자연과 사람의 현상적 이야기들. 그것은 역사, 지리, 기후, 생태, 인문 등 대지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 디자인에 앞서 그 장소가 지닌 이야기를 탐색하고, 그 공간이 요구하는 적합한(올바른) 이용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서 풀기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가장 먼저 그곳의 내력을 살핀다. 오랫동안 배어 있던 본 모습, 원래의 쓰임, 여기에 왜 이렇게 큰 나무가 남아있는지 등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품는다. 사실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설계 수순이다. 그런데 의외로 프로젝트를 의뢰한 사람도 그런 내력을 모르고 오히려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계안에 지역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하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제공해주어, 그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성 찾기와 공간 디자인 공간을 다룰 때 시각적 디자인의 완결성은 공감각적 측면에서 신선함, 안정감, 흥미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각적 디자인보다 먼저 하는 일은 장소성 찾기다. 장소의 가치와 쓰임을 정립하고 그것을 가장 적합한 형태로 공간에 녹여내는 것이 좋은 공간 디자인이다. 최근 진행한 부산 사상구 감전당산공원이 그랬다. 구청장 보고회 때 발표의 절반 이상을 장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데 썼다. 오래된 나무가 있고 주택가가 밀집한 지리적 연유를 고지도와 함께 설명하고,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담당 국장은 이런 방식의 설계 보고회는 처음 본다고 놀라며 사업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은 이후에 선보인 계획안의 디자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전당산공원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풍경을 추측할 수 있는 옛 지도는 오래된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특정 장소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리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은 공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장소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알리는 일련의 과정이 공간을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디테일 설계를 하면 할수록 디테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디테일은 직접 시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다루기 까다로운 영역이다. 감리나 시공을 병행하지 않는 설계자가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작은 요소에 공간의 정체성과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설계하고 싶어도 현장의 성격과 여건에 따라 공식적이고 효율적인 설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공에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디테일과는 다른) 디테일한 설계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다. 김해시의 작은 프로젝트에서 복잡하고 민감한 설계안을 내자, 담당 부서가 비공식 감리를 요청하는 상황이 생겼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공사의 외주 업체인 시설물 팀은 대충 빨리 마무리하고 현장을 떠나고 싶어 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꼼꼼하게 위치, 각도, 높이 등 하나하나를 조정하고 싶었다. 시청 담당자는 우리에게 감독의 권한을 넘겨주며 원하는 품질이 나오도록 시공사와 협의하도록 했고, 우리는 도면과 다르게 만들어온 시설물을 설계 의도대로 조정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작지만 완성도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을 본 다른 발주처도 비공식 감리를 자연스럽게 요청했다. 중요한 공정의 경우 자재의 종류, 색상, 시설물의 위치 등을 시공자가 설계자에게 허락을 받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비공식 감리를 진행했던 부산 금정구의 어느 쌈지공원 공사. 약 300평 공간에 경사지를 활용해 모던한 계단 공간과 상징 공간, 휴게 공간을 계획했다. 우리는 시공사와의 첫 미팅에서 도면과 공사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연락 달라, 공사의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며 서로 신뢰와 유대를 형성했다. 경사지에 계획한 UHPC 계단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복잡한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구조 도면을 본 철골 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벨을 못 맞춘다고 현장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복잡하긴 했다. 너무 복잡해서 레벨을 이해하고 철골 도면을 작성해 줄 수 있는 구조 팀을 구하지 못해 직접 작업했던 도면이다. 다행히 빠른 시간에 다른 철골 시공팀을 찾았고, 시공 팀은 복잡한 도면을 잘 소화해 상판만 얹으면 되는 깔끔한 계단 구조를 만들어냈다. 공간 계획의 실마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며 풀어나간다. 오래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설화의 짧은 문구에서 시작하기도 하며, 그 장소에서 필요한 이미지를 찾거나 그곳에 있었을 법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김해 경전철 하부의 작은 공간 시설물은 김수로왕의 탄생 장면을 묘사하며 가야 왕도 김해의 오랜 역사를 한번에 보여주었다. 해운대수목원의 생명의 숲은 수목원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작했다. 종류별로 모아놓은 묘목장 같은 수목 전시장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양한 식물과 자연 소재, 공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다. 김성완(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표)의 논문에서 시작된 영도 근대 역사 흔적 지도는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흔치 않은 종류의 일이다. 강영조 교수(동아대학교)가 100년 전 영도 지도를 입수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김성완 대표는 오래된 길에서 보아온 풍경을 ‘경관 유산’이라는 새로운 유산의 개념으로 제시하며 강영조 교수와 함께 2018년 한국조경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100년 묵은 영도의 도시 풍경 연구를 계기로 근대 영도의 흔적을 따라 걷는 탐방 지도와 안내 책자를 제작하고 전시 공간까지 조성했다. 100년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20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2022 아시아 도시경관상 본상에도 올라 현재 심사 중이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벽면 녹화 프로젝트인 율리 강변 풍경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며 시작했다. 대상지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볼 수 없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서쪽의 낙동강 변이 보이는 지역이었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보았을 강변의 풍경을 상상하며 대상지 벽면에 잔물결의 이미지를 담았다. 작은 공간의 설계 건축가와 함께하는 개인 주택, 카페 등의 조경 설계는 작은 공간이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개인 공간의 설계는 감리를 병행하고 시공사 선정에도 깊게 관여하며 진행한다. 작은 공간일수록 도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작은 바위, 야생화, 소관목, 이끼류 등을 배치할 때는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위치의 수목 한 그루, 바위 하나를 찾기 위해 공사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 공간 설계의 경우 거의 모든 공정을 다루다 보니 별도의 시공사가 있는 공공 공간 설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에 대한 애착이 더 가게 된다. 양산의 개인 주택 정원의 경우 더 좋은 공간으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약에도 없는 작은 정원 수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땅의 기억 아직 많은 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마다 깊은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발주부서의 의욕적인 업무 수행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과 타협하고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경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한 뼘이라도 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의 생각을 옮긴다. 조경이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이나 범위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러 분야와 협업하는 일들, 특히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많은 고민을 통해 공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가용 범위 내에서 분위기를 바꿀 방법과 재료를 찾아보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누군가의 일상 속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담백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언제든 편하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공간(모현호). 입사 초기에는 땅의 형태에 집중하며 디자인했다. 그 결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땅의 기억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소가 가진 이야기, 장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같은 것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만든 공간을 다수의 사람과 공유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앞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질 공간들을 기대한다(김경언). [email protected]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CAT Landscape Design Group)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생각하는 젊은 조경설계인들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의적인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쾌적한 삶과 사람의 가치가 보장되는 맑고 밝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는 다양한 영역의 공간과 시간을 우리만의 신선하고 새로운 역량으로 디자인해나간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CAT를 회사명으로 정했다.
  • [모던스케이프] 종묘의 공원화
    지난여름, 의미 있는 사업 하나가 오랜 시간 끝에 완공됐다. 식민지기에 분리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작업으로, 90년간 두 장소를 갈라놓은 율곡로 일부에 지붕을 덮고 지형을 복원한 것이다. 사업은 2007년 녹지문화축 사업 계획의 일환에서 시작되었다. 북악산 자락의 응봉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종묘–세운상가(철거 계획)–남산을 잇는 사업의 첫 단계인 셈이었는데, 이 구간은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회복해야 마땅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종묘(宗廟)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수도 한양을 건설할 당시 사직(社稷)과 함께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종묘 북측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각각 1405년(태종 5년)과 1483년(성종 14년)에 건설되었으니, 창덕국·창경궁 일대인 동궐(東闕)과 종묘가 하나의 큰 권역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인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시간 빈터로 있었던 경복궁과 달리, 조선왕조 대부분 기간에 동궐을 왕과 왕후의 주궁으로 이용했기에, 위치적으로도 종묘와의 긴밀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번 사업에서 복원된 북신문(北神門)은 왕이 궁궐과 종묘를 오갈 때 사용한 문이라고 하니, 두 장소의 연속성은 이용 측면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두 공간을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은 풍수지리다. 한북정맥인 북한산 기운이 백악을 타고 동굴 권역을 지나 종묘로 흐른다는 해석은 정서적 측면에서의 위상과 상징을 공고히 하였는데, 일제의 율곡로 건설로 이 논리는 극심한 타격을 입는다. 이른바 지맥을 끊어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는 통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학자 염복규는 율곡로 건설의 근거가 어디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에 의구심을 갖고 도로 개설의 과정과 여론을 전방위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동궐 권역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율곡로의 처음 이름은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제6호선이다. 조선의 길은 전통적으로 잎맥 형태를 하며 길 끝에 가옥이 있는 막다른 길이 많은데, 이는 도성 길도 마찬가지였다. 丁자 형태의 대로를 갖췄을 뿐 순환형 도로 체계는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격자형 도시계획을 체화한 일제는 병합 초기인 1910년부터 순환형 도로망 구축에 공을 들였는데, 그중에 제6호선, 즉 율곡로 계획은 처음부터 궁궐과 종묘를 관통해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었다. 총독부 청사였던 경복궁 이전·신설 계획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제6호선 건설을 관철시켜야만 했기 때문에, 순종은 물론 이왕가(李王家), 전주 이씨 종중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이완용계와 내통하며 도로 부설 계획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놀라운 점은 종묘의 공원화를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경성부,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 1926. “犬牙錯雜한 今日의 京城이 卅年後에는 一大理想園 (14) : 公園遊步地增設과 火災豫防大計劃 火災를 防禦하기 爲하야 新築家屋은 全部 防火材 旣築家屋도 改造”, 「매일신보」 1926년 4월 29일. “社說: 宗廟地帶를 開放함이 如何 – 安息處 없이 헤매는 北部民을 보고”, 「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IFLA 2022가 남긴 것
    이번 달 특집 지면에서는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예술과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열린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를 기록한다. 40개국 1,500여 명의 조경가가 참여한 IFLA 2022는 기후변화와 도시 위기에 대응하는 조경가의 비전과 전략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대회는 2019년 9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개최에 발맞춰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발표한 ‘기후행동공약’의 실천적 토론장이기도 했다. IFLA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전 세계 조경가의 전환적 협력과 행동을 촉구하며 “1.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의 실천, 2. 204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 3. 살기 좋은 도시와 커뮤니티의 수용력과 회복력 강화, 4. 기후 정의와 사회 복지 지원, 5. 문화 지식 체계의 학습, 6. 기후 리더십 발휘” 등 여섯 가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광주 세계조경가대회는 한국 조경계에도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경학계와 업계가 협력해 성공적으로 치러낸 이번 대회는 한국 조경계의 난맥을 교정하고 조경 직능과 학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조 강연, 논문 발표회, 라운드 테이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펼쳐진 여성 조경가와 미래 세대의 활약은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 IFLA 2022의 무엇보다 큰 성과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라는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한국은 물론 세계 조경계에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리:퍼블릭’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리:퍼블릭의 ‘리’를 ‘어떤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이라는 뜻의 접두사 리(re)로 생각한다면, 리:퍼블릭은 ‘공공(성)에 다시 주목하는’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시 공공성의 경관과 조경을 지향하는’ 의제라 볼 수 있다. 둘째, 리:퍼블릭의 ‘리’를 ‘~에 대한, ~를 주제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리(re)로 여긴다면,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공공적 조경 행위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리퍼블릭(republic)은 군주제 반대편의 정치 체제인 공화제에 해당한다. 본래의 경관(landscape) 개념에 배태된 수평성을 떠올린다면, 군주제의 수직적 위계와 권위에 대항하는 공화제가 경관 개념과 조응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리퍼블릭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일, 사건, 상황, 문제’를 뜻하는 명사 ‘레스’에 ‘공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여성형 형용사 ‘푸블리카’가 결합된 말로, 공적인 일(또는 문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곧 ‘공적인, 공공의 경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회의 주제문을 다시 옮긴다. “전 세계는 팬데믹 확산, 기술 혁명, 정치적 갈등과 같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건강, 행복, 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조경 전문가에게 주어졌다. 국지적 지역부터 전 지구적 스케일까지 포괄하는 조경의 다양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조경가들이 모인다. 조경의 공공 리더십을 강조하는 2022년 세계조경가대회의 주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음과 같은 세부 주제를 포괄한다. 조경의 전문적 성취와 학문적 성과를 되짚어보고(re:visit),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통해 지구 경관의 재구성을 실험하고(re:shape), 일상의 생활과 환경을 건강하고 활력 있게 되살리며(re:vive),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한다(re:connect).”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봉건 시대의 장식적 조원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 도시의 공공 환경을 구축하는 전문 직능으로 탄생했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이념을 다시 소환하고 회복한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인류세의 지구가 마주한 기후위기, 도시의 파국,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변동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좌표다. IFLA 2022를 통해 제시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천할 과제가 한국 조경에 주어졌다. [email protected]
  • [풍경감각]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냥 풀을 그린 그림,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거죠? 북 페어에서 받은 질문이다. 식물 세밀화는 풀을 그린 그림이 맞고, 그림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각자의 감상법이 있기 마련이므로 “보이는 그대로니 천천히 감상해보시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다른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풀, 그 잎사귀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은 세계가 펼쳐진다.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 사이를 물길 같은 잎맥이 가로지른다. 울퉁불퉁한 산맥 사이로 하얀 협곡이 구불거리거나, 평행한 녹색 이랑이 끝없이 이어진다. 식물 세밀화는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한다. 식물을 매개체로 어떤 의미나 심상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작은 식물의 세계가 작아만 보이지 않도록 캔버스의 크기를 키우고 확대 비율을 높인다. 털, 턱잎, 수술과 암술, 꽃받침, 줄기의 단면처럼 전체 모습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작은 디테일도 따로 담는다. 이 작은 풍경들이 누군가의 발걸음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그룹 이작 장소와 시간의 힘을 믿는 창작 공동체
    이번 작업(this work)을 줄여서 말하면 이작이다. 말 그대로 이번 작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스튜디오 이름을 지었다. 생생한 설계실 현장의 치열함과 진지함, 즐거움과 고단함. 이 모든 단어가 성남시 분당에 있는 우리의 구성원 이자커스(eejaacers)에게서 들리는 숨소리의 표정들이다. 늘 현재진행형이다. 2008년 탄천이 흐르는 작은 오피스에 둥지를 틀었다. 지치지 않고 열다섯 해를 천천히 산책하며 산에 올라가듯 지나왔다. 동네도 떠나지 않고 잘 지키고 있다. 함께하는 동행들도 서서히 늘어나서 그런지, 요즘은 산책 같은 작업이 더 재미있고 즐겁다. ‘이작’이라는 한자어의 말장난을 통해 우리를 설명해 본다. 아마도 보편적인 얘기로 끝날지 모르겠지만, 조경그룹 이작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異作, 다를 이 모든 디자인 오피스가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 다름에 대한 강박감이 있다. 태생적으로 디자인은 ‘다르게 하기’와 같은 뜻이라고 본다. 접근 방식이거나 태도이거나, 혹은 도구이거나 결과물이거나, 그중 하나라도 다르면 그때부터 안테나가 쫑긋 선다. 소위 안달이 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다름의 오리지널리티는 결과일 수도 있지만 과정이기도 함을 늘 명심하려고 노력한다. 理作, 다스릴 이 질서에 대한 이야기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아가 감각과 무감각의 영역에서 세상의 순리를 따르고 현상에 귀 기울인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작업이 자연과 문화의 순환 고리 안에서 잘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거스름이 없다. 시간과 진화에 열려 있다. 지속가능하다. 이런 문장들이 떠오른다. 창의적 발상이 자연의 이치와 손잡을 때 비로소 우리의 작업은 순전한 날개를 달게 된다. 利作, 이로울 이 윤리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이로움을 지향한다. 대부분의 작업을 공공의 영역에서 진행하는 우리에겐 특히 중요한 문제다. 공간을 통해 공공에 전달될 ‘경험의 기회’는 곧 혜택과 복지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롭고 이롭지 않은가에 대한 판단의 문제는 삶의 질과 연결된다. 그 최전선에서 일하는 공급자 그룹의 어딘가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두렵다. 以作, 써 이 이렇든 저렇든 결론은 결국 작업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작업물로 세상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좋다. ‘만든다’라는 범주는 도면에서부터 완성작까지 모두를 아우르며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 영역 안에 있다. 페이퍼워크는 전문가 집단과, 완성작은 일반인들과 나눌 수 있으니 좋다. 작업물로써(以作) 전달하는 조경가의 언어가 비로소 세상에 낯을 내밀기까지, 너무도 고단한 프로세스가 있다. 그래서 설계는 과정의 마술이다. 육체적, 사회적으로 힘들다. 우리는 오늘도 짓고, 만들고, 작업한다. 지난 몇 년간 완공된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면서 고민했던 흔적과 남겨진 것들, 혹은 사라진 것들을 정리해본다. 군포송정 중앙공원 도시공원 설계공모 첫 당선작이다. 아파트 단지와 공원의 공적 관계를 사적 관계 영역으로 재해석한 작업이다. 뒤뜰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기억을 공공의 공간에서 구현하고 탐색해보려 했다. 가끔 슬리퍼를 신고 뒷마당에 나온 것 같은 이웃들을 공원에서 만나게 된다.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고 자평한다. 한국적 정서의 마당을 대표적인 도시 공간인 아파트로 옮겨 보려 했다. 공간의 서정성을 투박한 물성, 단정한 구획, 친근한 단차, 그리고 계절과 자연 현상을 감지하는 식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용산 고가 하부도로 정원 서울시 공공 프로젝트로 진행한 도시 인프라 개선 작업이었다. 고가 하부의 죽은 공간 살리기를 주제로 빗물과 수 순환, 습도와 식물의 기법과 적용, 공공 공간의 미적 기준 제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등을 고민했다. 치장과 단장의 디자인 방향을 완전히 배제하고, 도시 구조물과 식물로만 밀도 있게 조직한 정원 구조체를 제안했다. 엔지니어링 기술과 조경의 협업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던 프로젝트로 기억한다. 아쉽게도 정원 구조체는 몇 년 후 철거되고 보도블록 포장과 오토바이 주차 금지 펜스만 있는 다리 밑 공지가 되어버렸다. 진도 쏠비치 리조트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다녀온 뒤 한참 동안 우리 마음속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던 차 잔잔한 바닷가, 전라남도 진도에 있는 리조트 설계를 맡게 됐다. ‘마음과 영혼에 접속하는 정원’을 주제로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정원을 배치하는 작업을 했다. 개개인의 작업물을 독려하고 비평하고 수정하고 도와가며 조성했다. 조형적 탐구, 관점과 차원의 전환, 낯설게 전달하기, 내적 움직임의 실체 등 깊숙이 들어가서 작업한 짧지 않은 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상업적 리조트와 충돌하는 상황이었지만 곳곳에 고민의 흔적들로서 소울 가든(Soul Garden)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개입한다는 것의 의미와 어떻게, 얼마나,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배웠다. 성남 은행동 소공원 옹기종기 모인 다가구 주택이 즐비한 산동네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경사가 가파른 지형을 생활 언덕으로 바꾸려고 했다. 가장 친근하고 알차게 사용할 수 있도록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대조를 이루는 도시 언덕을 화강암으로 테트리스 쌓듯이 조성했다. 테트리스 언덕의 활용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치맥(치킨+맥주) 하기, 나물 말리기, 태양초 널기, 생활 품앗이, 낮잠 자기 등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채우는 생활 언덕의 일상은 다채로웠다. 화강암 언덕은 도시의 산자락을 은유하는 동시에 경사지 구조체로도 요긴한 장치였다. 동탄 신리천 교각 하부 공공 디자인 동탄 신도시 신리천을 따라 다섯 개 다리 밑 공간을 공공 디자인하는 작업이었다. 하천을 따라 북측은 갤러리와 같은 공공 미술 벤치로, 남측은 친근한 마을 카페로 변신시켰다. 색깔과 틈, 빛과 장소 브랜딩을 탐구하며 황폐한 교각 하부를 ‘얌전한 화려함’이 살아나도록 하는 갤러리 벤치 공원으로 조성했다. 따뜻한 감성의 브리지 카페는 주민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수변을 따라 매일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의정부 고산지구 공원 지역성으로 시작해서 지역성으로 마무리한 작업이다. 신도시의 4개 공원과 녹지를 설계했다. 기억과 유산이 풍부한 산야의 공간을 도시 속에서 새롭게 정리해갔다. 산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들판과 물줄기를 핵심 장치로 가장 지역성이 잘 드러나는 공원이 되기를 기대하며 작업했다. 도시를 뚝딱뚝딱 순식간에 만드는 한국의 조급한 방식 때문에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남겨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알아야 할 것들은 지역 박물관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원을 통해 온몸으로 공간을 느끼고 도시의 기억을 경험하고 읽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해당 지역 곳곳을 누비며 멍 때리기와 파헤치기를 한 덕분에 술술 풀어나갈 수 있었다. 지역성은 옛 풍경의 내적 질서를 발견하고 새롭게 정리해 만드는 공원의 중요한 주제어다. 대구 복현자이 공동주택 아파트 놀이터 공간의 주인공을 바꾸고 싶은 생각에서 시작했다. 공터에 이것저것 매달 조합 놀이대를 포기하고 중앙에 놀이마루를 제안했다. 원형 놀이마루에서는 자유로운 놀이가 생겨난다. 마을 사랑방으로 활용되고, 때로는 아이들이 뒹굴뒹굴 나뒹구는 툇마루로 변신한다. 벤치의 높이가 주는 심리적 친근함과 만만함을 동그란 잔디마루 위에 재구성했다. 놀이터의 주인공은 놀이 기구가 아니라 마루다. 놀이터의 핵심은 놀이가 아니라 모임이다. 원형마루에서 아이와 부모가 함께한다. 둘러앉고 마주앉고 드러눕고 나뒹군다. 별다른 놀이가 필요할까. 우리는 장소와 시간의 힘을 믿고 탐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공간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는 도시의 화자(storyteller)들이 모여 즐겁게 작업한다. 주거 단지 정원부터 도시의 공공 공간까지 예민하고 깐깐한 조경가들이 참여한다. 트렌드에 얽매이기보다는 상상력이 이끄는 객관화된 낯선 공간의 실체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조경 공간으로 말하고 소통하면서 외롭지 않은 조경가가 되기 위해, 오늘도 의도적으로 외로워진다. 장소성과 브랜딩, 공공 디자인과 지역성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바우하우스 포스터를 수집해볼까 생각 중이다. [email protected] 조경그룹 이작(eejaac landscape architects)은 행복한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의 창작 공동체다. 장소의 힘에 대한 믿음은 작업의 시작점이자 동력이다. 문제의식은 잠재력을 찾고, 잠재력은 상상을 이끌고, 상상은 사람을 생각한다. 넘치는 상상력과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람을 위한 공간을 찾는 생각의 무한궤도, 그 어느 지점에서 오늘도 팽팽하게 산다.
  • [모던스케이프] 관광의 목적
    바야흐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피서와 달리 여행에는 방문과 경험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가 따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도전이 수반되는 여행, 벅차오르는 감동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고통스러움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에 해당하는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 고난) 아니던가. 그에 반해 눈으로 보고 안다는 뜻으로 새겨진 관광(觀光)은 주체의 시선이 더 강조되는 단어다. 눈으로 확인하고 참관하며 견학하는 의미가 담긴 관광을 이야기할 때 17~18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빼놓을 수 없다. 외딴 섬 영국에서는 사회가 안정되자 상류층 자제들을 대륙으로 보내 세련된 취향과 외국어를 학습하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확장하는 목적을 가진 그랜드 투어는 근대적 의미의 관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영국인 토머스 쿡(Thomas Cook, 1808~1892)은 57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여 영국 레스터(Leicester)에서 러프버러(Loughborough)까지 이동하는 기차 여행을 시도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관광은 서서히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매김했고, 관광의 목적 또한 교양을 학습하는 것을 넘어 위락과 휴식, 기분 전환 등 즐거운 경험을 누리는 데까지 확장됐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선진 취향을 학습하고자 했던 그랜드 투어가 계몽주의적 측면에서 근대적이라면, 토머스 쿡의 기차 여행은 자본주의 시대에 급부상한 시민 계층을 여행객으로 흡수하고 산업혁명의 상징인 기차를 여행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다. 그런데 관광의 대중화에는 각종 매체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 쿡이 그 시절에 수백 명의 여행객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광고라는 방식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급성장한 사진술과 인쇄술, 출판 기술 등 새로운 기술이 관광이라는 아이템과 엮이면서 엽서와 지도, 브로슈어 등 다양한 관광 안내물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인쇄물은 다시금 관광의 대중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 근대 관광이 정착하게 된 양상은 표면적으로 서구와 닮았다. 개항 이후 왕족과 외교관 등의 관료들이 가장 먼저 해외 여행의 특권을 누렸고, 점차 선진 문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여행이 확산되었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두산동아 한국문화사 시리즈 22, 2008. 김선정, “관광 안내도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33, 2017, pp.33~62. 한경수, “한국의 근대 전환기 관광(1880~1940)”, 『관광학연구』 29(2), 2005, pp.443~464. 阪野祐介·김윤환, “식민지도시 부산을 그린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의 조감도(鳥瞰圖)와 타소표상(他所表象)”, 『문화역사지리』 33(2), 2021, pp.4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