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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DA] 이사
    단독 주택에 산 지 만 5년이 되어간다. 주변엔 논과 도라지 밭, 조경수 농장,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던 공터와 나지막한 산, 그리고 고만고만한 주택 몇십 채만이 자리하고 있다. 매달 관리비 고지서를 보내주는 관리사무소도 없고, 놀이터도 어린이집도 없다. 슈퍼, 세탁소, 부동산, 학원 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상가 건물도 없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반경 내에 무엇인가를 살 수 있는 곳이래야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시는 구멍가게뿐이다. 앵글로 만들어진 진열대 안쪽에 있던 물건을 꺼낼라치면,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주신다. 물건을 들여 놓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마트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곳이다. 그렇다고 그 먼지의 두께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정도는 아니다. 가볍게 후후 불면 날아갈 정도이니, 아주 시골은 아니란 이야기다. 아,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는 치킨 집이 하나 오픈했다. 장사가 될까 싶었는데, 여전히 늦은 귀가 시간에도 불을 밝히고 있다. 왠지 모르게 다행이다 싶다. 주말 아침이면 동네 이장님의 방송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주로 경로당에서 무슨 모임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멘트다. 아파트 거실 벽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만 듣다가, 단독 주택으로 이사한 후 처음으로 허공을 가르며 들려오는 “아~ 아~ ○○○ 4리에서 알려드립니다”란 메아리를 들었을 때의 생경함은 지금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역시 ‘읍’은 뭔가 달라!”라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다. 그렇다. 행정구역상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읍’이다. 하지만 아주 시골은 아니다.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아내와 내가 농담 삼아 ‘읍내’라고 부르는 곳에 제법 규모 있는 마트를 비롯해서 웬만한 것들은 모두 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있으니, 구체적으로 그곳에 있는 것들을 묘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걸어서 가기에는 약간 망설여지는 거리다. 한 15분 정도 걸리려나? 그보다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가용으로는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그 풍경은 사뭇 다르다. 5분을 경계로,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없는 것투성이다. 하지만, 이곳에만 있는 것들도 있다. 겨울이면 20분 가까이 눈을 치워야 하는 마당과 집 앞 도로(이걸 도로라고 표현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교행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다)가 있고,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잔디밭(사실 잔디‘밭’이라고 하기에는 옹색한 면적이다)도 있다. 이 잔디란 녀석은 제 때 깎아주지 않아 늘 아내의 핀잔을달고 살게 만드는 원흉이다. 정원 책을 만들며 부르짖던(?) ‘정원 일의 즐거움’을 직접 만끽할 때가 되었다며, 아내는 내 손에 기어이 제초가위를 들려 등을 떼민다. 물론 나의 극렬한 저항이 성공할 때가 많아, 그 횟수는 일 년에 채 몇 번 되지 않는다. “정글을 가꾸는 게 취미인가 봐요” 지나가는 말로 그녀가 툭 내뱉으면, 나는 “굉장히 생태적이지 않아요”라고 딴청을 핀다. 그래도 여름과 늦가을 사이, 두세 번 혹은 서너 번 잔디와 사투를 벌이고 나면 기분은 썩 괜찮다. 다음에 다시 단독 주택에 살게 되면 잔디밭이 아니라 클로버 밭을 꼭 만들겠다고 농담 아닌 진담처럼 말하곤 하지만 말이다. 참, 잔디밭은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집과 세트로 딸려 있던 녀석이다. 제대로 정원을 가꾸게 되면 반드시 배제시키리라 다짐했던 3종 세트(잔디밭, 철쭉, 회양목) 중에 무려 두 가지가, 이사 왔을 당시에 (정원이 아닌) 마당의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었다. 엄살을 피웠지만, 단독 주택에서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층간 소음에서 해방된 점도 그렇고, 2층 집이어서 구조가 입체적인 것도 마음에 든다. 여전히 불편한 점은 존재하지만…. 원래는 회사의 사무실 이전 소식을 다루려고 했는데, 딴소리만 잔뜩 늘어놓았다. 방배동으로 이사와 며칠을 다녀보니, 문득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온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치우던 눈을 파주 사옥에서도 치워야 했고, 잔디밭은 없었지만 해마다 가을이 되면 적지 않은 양의 낙엽을 치워야 했다. 게다가 낙엽이란 녀석은 해마다 그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파주 사옥이 막 지어졌을 때, ‘이게 언제 자라서 벽면을 가득 채울까’하며 안쓰럽게 쳐다봤던 담쟁이덩굴은 이제 두려울 정도로 낙엽을 생산해내는 낙엽자판기가 되었다. 한 마디로 파주 사옥은 직장 판 단독 주택인 셈이었다. 창문만 열면 8차선 대로가 펼쳐지는 ‘따뜻한’ 방배동 사무실에서, 파주 시대를 개인적으로 정리해보다가 ‘지금 살고 있는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과는 그만큼 차원이 다른 이사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사과 말씀을 드려야겠다. 단순하지만 시선을 끄는 절제된 구도와 여백이 적절히 어우러진 담백함이 제 맛이었던 ‘유청오의 이 한 컷’이 이번 호에는 전혀 다른 성격과 소재의 사진으로 채워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2006년 2월부터 시작된 짧지 않았던 ‘파주 시대’를 마감하는 소회로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독자 여러분께는 송구스러울 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진 촬영에 공들인 유청오 작가에 대한 고마움은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와의 촬영은 유쾌했다. 앵글 속에 포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근육 경련을 일으키는 초보 모델들의 긴장감을 무장 해제시키는 그의 능수능란한 조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추억할만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왔건만 지나치게 우측으로 몸을 튼탓에 전혀 빨간색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사실을 일러주지 않은 점은 무척 서운하지만 말이다. 참, 김정은 편집팀장도 붉디붉은 치마를 차려 입고 왔는데, 외투에 가려 사진에서는 전혀 레드 컬러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왜 시뻘건 넥타이를, 김정은 팀장은 왜 곱디고운 붉은 치마를 입고 왔던 걸까?
  • [편집자의 서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기대보다는 후회가,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특히 이제는 20대 중반이라고 우길 수 없는 명백한 20대 후반이 되는 나는 할 수만 있다면 2015년 1월이 다가오는 것을 온 몸으로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창 일거리에 파묻혀 있던 1월호 마감 기간의 주말 저녁, 친한 친구들과 모여 송년회를 가졌다. 우리는 대학교 교내 방송부 활동을 같이 하며 친해졌는데 동기들 중에 유난히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가 많아 자칭 ‘낭만 20기’라 부르곤 했다. 이날도 우리의 공식 건배사인 ‘낭만을 위하여’를 외치고 공식 주제가 ‘낭만에 대하여’를 틀었는데, 이날은 장난같이 외치곤 하던 우리의 건배사가 특별한 느낌이었다. 친구 한 명이 “야, 우리도 나이 드는 것 같어”라고 했다. 남자 이야기, 연애 이야기로 대화의 반을 채웠던 20대 초반과는 달리 이제는 회사 생활이 우리의 주 관심사가 되었고, 온갖 술게임을 섭렵하며 떠들썩하게 밤을 새웠던 옛날처럼은 못하겠다며 우리는 맥주 몇 잔에 순순히 잠자리를 찾아 방구석을 파고들었다. 지금도 좋아하는 작가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은 20대 초반에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줄곧 모범생(?)으로 말썽 없이 자라온 나는 이 시기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나 한강의 『채식주의자』 같은 유난히 과격한 소설을 좋아했다. 대학에 갓 입학했던 시절, 나는 사실 잔뜩 주눅들어 있었다. 시골에서 나름 ‘글 좀 쓴다’고 생각하며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우리 과에는 주옥같은 문장을 쓰는 글쟁이들이 수두룩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개성 강한 친구도 많았다. 이 시절 나는 ‘평범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과격하고 강렬한 내용의 소설을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사강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녀가 묘사하는 주인공의 냉소적이면서도 변덕스러운 성격이나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한 청춘에 대한 예찬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또 사강의 실제 삶이 소설처럼 극적이었기에 인생과 사랑에 대한 그녀의 과장된 묘사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시몽이 폴에게 고독 형을 선고하는 부분과 폴이 시몽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자신의 삶에 대해 환기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 합니다.” 다소 연극조의, 손발이 구운 오징어마냥 오그라들게 하는 시몽의 이 대사를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 적어 놓기도 했다.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에 대해 ‘고독 형’을 내리는 “무시무시한 선고”는 폴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내리는 선고 같아 지금도 가슴이 뜨끔하다. 폴이 시몽의 질문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로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지만 점점 자아를 잃어버리는 폴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시몽의 편지에 문득 자신의 삶에 눈을 뜬다. 하지만 프랑스 문단에서 ‘매력적인 작은 괴물’로 불릴 만큼 변덕스러운 악동이었던 사강은 폴에게 또다시 영원한 고독형을 선고한다. 작가는 결국 폴이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고 고백하며 이전 삶에 굴복하게 만든다. 작가는 폴을 비롯해 그의 소설에서 매번 등장하는 성숙하고 진지한 여성 캐릭터에 대해 유독 매정하고 차가운 태도를 취한다. 그녀의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에서 주인공 세실의 의붓어머니 안느는 총명하고 세련된 취향을 가진 성숙한 여자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세실에게 어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알코올, 코카인, 도박 중독자이자 스피드광이었던 사강은 평생을 청춘과 젊음의 아이콘으로 살았다. 그녀는 나이 드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젊음이 소진되고 재기발랄함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대학교 1학년, 교양 국어 시간에 담당 교수님은 우리에게 이태준의 수필 ‘조숙早熟’을 필사하고 요약하는 숙제를 내주셨다. 한창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에 하필 이태준의 ‘조숙’을 과제로 낸 교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그 고담古談의 노경老境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젊음과 재기발랄함이 재능의 전부인 줄 알았던 21살의 나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던 구절이다. 이제 나와 친구들은 억지로 취하지 않아도 즐겁기 시작했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로도 울고 웃게 되었다. 인생으로 흠뻑 익어갈 나를 기대하며 두렵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2015년을 맞이한다. (P.S. 아직 어린 녀석이 청승 떤다고 분노하신 편집장님께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 [시네마 스케이프] 보이후드 시간의 이중주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2004),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2013)은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 감독이 같은 배우들과 9년에 한 번씩 만든 세 편의 영화다. 주인공 제시와 셀린느는 기차에서 처음 만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루를 보내고 9년 만에 프랑스 파리에서 재회하며, 다시 9년후엔 부부가 되어 그리스 카르다밀리(Kardamili)의 해변마을을 여행한다. 20대의 풋풋한 주인공들은 빈의 프라터(Prater) 공원의 대회전차에서 첫 키스와 함께 사랑을 확인한다. 정해진 여정을 깨고 그들이 찾는 놀이 공원은 어른도 아이가 되는 판타지의 장소다. 30대가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파리의 오래된 골목과, 철로를 공원으로 조성한 프롬나드 플랑테를 걷는다. 그들이 걷는 긴 선형의 동선만큼 지나온 삶과 미래의 여정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다시 9년 후, 그들은 두 딸과 함께 그리스 해변 마을을 여행하며 폐허가 된 유적지인 메소니(Methoni) 성을 걷는다. 한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빛나던 장소는 이제 수많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시간의 흔적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 그들은 20대처럼 풋풋한 사랑을 속삭이지 않고 30대처럼 꿈과 야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들의 긴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서 젊음보다 더 빛나는 40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비포 시리즈의 시간은 관객이 실제 체험하는 시간과 같다. 영화를 세 편 보는 동안 관객도 열여덟 살의 나이를 먹는다. 2014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시간을 모티브로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선보였다. 그의 신작 ‘보이후드Boyhood’는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과 매해 늦여름에 일주일씩 만나서 완성한 영화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세 시간 동안 영화에서는 12년의 세월이 흐른다. 주인공 메이슨은 잔디밭에 드러누운 앳된 여섯 살 꼬마에서(첫 장면이자 포스터에 담긴 장면) 영화가 끝날 때는 열여덟살 청년이 되어 있다. 다음 해로 넘어갈 때는 특별한 메시지 없이 바로 그 다음 날처럼 부드럽게 연결된다. 2014년에서 하루 잤을 뿐인데 일어나보니 2015년이되는 것처럼 말이다. 배우들이 분장하지 않아도 되니 1년 후라는 메시지가 어쩌면 필요 없을지 모른다. 어느 해에는 여드름이 늘어난, 또 어느 해에는 중저음의 변성기가 온 메이슨이 등장한다. 감독의 실제 딸인 깍쟁이 누나는 통통한 귀염둥이에서 치아 교정기를 낀 사춘기 소녀로, 시니컬한 대학생으로 성장한다. 영화는 주인공 메이슨의 일상과 시선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일주일에 한 번 들리는 아버지와 엄마가 다투는 모습을 메이슨은 누나와 함께 2층 방에서 내려다본다. 두 아이를 맡아 키우는 엄마는 생계를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두 번 더 결혼하지만 결국 혼자 남는다. 철없어 보이는 아버지는 매주 아이들과 캠핑을 가거나 볼링을 치러 간다. 아이들은 엄마의 생계형 돌봄과 아버지와의 위락 활동과 조언으로 성장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어릴 때 동생과 토닥거리며 지내던 영화 속 누나이기도 했다가 아이들 걱정에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과 함께 12년을 산 것처럼 느껴진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이탈리안 잡An Italian Job
    #33 알렉산더 포프 - 고대 시에서 영감을 얻다 영국에서 마침내 ‘사라와지’를 찾았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중국의 조원 양식을 본뜨는 데 성공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와지는 본래 중국풍의 정원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지만 중국의 양식을 본뜨겠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은 ‘무질서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흥미를 느끼고 일종의 암호처럼 사라와지라는 개념을 차용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지난 9월호에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등 고대 문학에서 해법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1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사실이 입증된다. 포프의 행적을 따라가 봐야 하는 이유는 그가 1718년경부터 자신의 트위큰햄(Twickenham) 저택에 조성한 정원이 영국 풍경화식 정원의 출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포프야말로 사라와지를 발견한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그의 행적을 추적해야 우리도 사라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포프는 18세기 영국 최고의 고전주의 시인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아 고대 문화에 깊이 심취해서 살았다. 비단 포프뿐 아니라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모두 고대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문학도 고전주의, 건축도 고전주의 양식, 음악의 주제 역시 고대 신화나 역사에서 빌려 왔다. 당시는 헨델이 런던의 음악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메시아’는 후기 작품이다. 초기에 그는 오페라만 작곡했는데 모두 고대 이야기였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다. 포프는 수많은 창작시를 남겼지만 그 외에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영어로 번역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보면 포프는 고전 작품들을 분석하며 그 안에서 정원에 대한 묘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의 ‘아르카디아’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정원을 만들려고 보니 너무 막연했다.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외에도 올림포스에 사는 한 노인의 정원을 노래한 적이 있다.3 호메로스 역시 오디세이아에서 알키노오스(Alchinoos) 왕의 정원을 묘사했다. 포프는 1713년 『가디언』에 정원 칼럼을 쓰면서 정원이란 모름지기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것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4 올림포스 어느 노인의 정원이나 알키노오스 왕의 정원은 분위기가 비슷하다. 온갖 과실수가 자라고 허브원에는 화초가 흐드러지며 나무는 자유롭게 자라고그 사이로 계류가 자유롭게 흐른다. 분명 사람이 만든 정원이지만 자연과 같은 곳. 그런 정원이 알렉산더 포프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이 정원들도 역시 막연했다. 과실나무, 계류, 꽃, 이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베르길리우스도 호메로스도 말해주지 않았다. 방황 끝에 찾은 것이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BC 65~8)의 별장 정원이었다. 베르길리우스와 쌍벽을 이루었던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글 속에서 자신의 정원을 여러 번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별장은 사비나의 산 속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별장에 사비눔(Sabinum)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기원전 30년 경에 지어진 별장이었다. 16세기에 호라티우스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 많은 독자들이 사비눔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천오백 년 전에 지은 빌라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마치 오늘날 연개소문의 저택을 찾겠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1761년, 사비눔이 있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고 건물의 기초도 발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초 위에 중세의 수도원이 떡하니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발굴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현재는 집터 관람이 가능하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대에는 아직 사비눔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호라티우스의 글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에 따르면 사비눔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지어졌으며 소작인과 노예의 숫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순수한 주거형의 별장이 아니라 농장을 겸하고 있던 곳이었다. 대략 81헥타르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로마의 농장 중에서는 중상급에 해당했다.5 집 뒤에는 숲이 있어 그늘지고 집 앞으로는 샘이 솟아 여름이면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했다. 집 근처에는 바쿠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나 호메로스의 묘사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포프의 시대에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연극과 오페라였다. TV도 영화도 없던 세상이었으니 사람들은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1705년 런던 헤이마켓 거리에 ‘여왕 폐하의 극장(Her Majesty’s Theatre)’이 세워졌고,6 1732년에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개장했다. 모두 포프 시대의 일이었다. 더욱이 헨델이 런던에 나타난 이후로 오페라 계에 활기가 넘쳤고 헨델은 포프가 속했던 엘리트 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은 극장에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오페라에서는 물론 음악이 중요하지만 포프의 경우 무대 장치를 유심히 관찰하며 자신의 풀리지 않는 숙제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정원 전체를 저렇게 연극 무대처럼 꾸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 같다. 포프의 저택은 템스 강가에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햄프턴 궁전으로 가는 길이 집 바로 뒤로 지나갔다. 그 길을 건너 포프의 땅이 계속되었다. 그곳에 그는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것처럼 포도밭을 가꾸고 정원을 조성하고자했다. 그러자면 정원과 집 사이를 연결해야 했으므로 터널을 뚫었다. 집 앞마당 정원에서 지하로 내려가 한참을 걷다보면 지상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세를의 도면 3번). 이때 터널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문틀에 의해 템스 강변의 정경이 마치 액자 속의 그림처럼 담겨져 보였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무대 장치였다. 도로 우측에 있는 긴 형상의 정원은 제대로 된 풍경화식 정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무질서해 보인다. 우선 기존 정원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중앙축이 사라졌다. 여기저기 언덕을 쌓았다거나 길의 흐름이 제멋대로라는 점등에서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후 풍경화식 정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수목 배치를 통한 장면 연출과 공간 조성 기법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원형의 ‘조개껍질신전(Shell Temple)’일 것이다(세를의 도면 5번). 현재 포프의 정원은 그로토의 일부를 제외하곤 남아있는 것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조개껍질을 붙여 만든신전 모양의 소건축이었을 것이다. 비록 신전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특별한 용도가 없는 건축물로서 종교적인 용도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연극 무대 위의 장치처럼 배경을 연출하기 위해 세워졌을 뿐이다. 기존 바로크식 정원에도 물론 건축물과 조형물이 있지만 그들은 막중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뜻과 상징성이 강했다. 반면 포프의 정원에 세워진 신전은 뜻이 아니라 느낌을 담았다. 이런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스타파주(staffage)’라고 한다. 본래 스타파주는 미술에서 쓰는 용어였다. 클로드 로랭이나 카날레토 등의 풍경화가들이 쓰던 기법으로서 그림에 인물이나 동물, 건축물 등을 자그맣게 그려 넣어 장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림에 깊이를 더했다. 그야말로 첨가물일 뿐 그 자체로 의미는 없다. 이로서 포프는 풍경화 기법과 무대 장치의 원칙을 정원에 적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큰 차이가 있다. 정원에 무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원 그 자체가 무대가 된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5년01월 / 321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시작하며: 현대 도시설계의 규범 이론과 실천의 조각
    프롤로그 칠흑같이 새까만 밤, 물과 뭍의 경계를 따라 펼쳐지는 빛의 향연을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마다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은 아마도 도시 중심에 해당할 것이다. 빛은 부챗살 모양의 궤적을 따라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희미해진다. 한참 후 날이 밝고 비행기가 착륙할 무렵, 어느 틈에 놀라울 만큼 다채로운 도시 풍경이 눈높이 아래에 펼쳐진다. 두근두근. 반짝이는 고층 빌딩이 우뚝 서 있는 업무 지구, 매끄러운 표면의 콘크리트와 거친 조적조 벽면의 질감이 섞여 있는 주거 단지, 쭉쭉 뻗은 고속도로를 따라 놓인 쇼핑몰과 구불거리는 가로를 바라보며 나의 궁금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누가 이런 모습의 도시를 만들었을까? 발을 내디딜 이곳은 나에게, 혹은 더 큰 사회 구성원들에게 과연 좋은 도시일까? 누구나 던질 수 있는 이러한 질문이 실은 도시설계라는분야가 성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느덧 도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2007년을 기점으로 전 인류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은 인구 10명 중 9명이 도시에 사는 도시 토박이의 천국이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좋은 도시 환경에서 거주하고 일하고 교육받고 삶을 즐길 수 있기를 원한다.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여 합리적으로 도시를 기획하고,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개발된 지역을 관리하는 전문 분야가 도시계획(urban planning)이다. 그렇다면 도시 설계는 무엇일까? 도시계획의 여러 단계 중 도시의 물리적 형태를 다루는 창조적이고 행위 지향적이고 가치 판단이 포함되는 단계가 도시설계(urban design)라 정의할 수 있다.1 설계는 물리적 환경을 다루지만, 형태를 직접 다루지 않는 분야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시설계는 도시계획, 건축, 조경, 교통, 토목 계획 분야와, 조경 설계는 도시설계, 사회학, 생태학, 수문학, 토질공학 같은 분야와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분야 간 경계와 업역의 차이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혹은 파악할 필요가 별로 없는—경우도 많다. 더욱이 도시의 물리적 환경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는 도시 정책이나 개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다루는 일도 도시설계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이러한 포괄성에도 불구하고 좋은 도시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서의 도시설계는 아직 현대 사회에서 흡족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설계가는 늘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기 바쁘고 자본과 정치 논리 앞에서 종종 무기력하다. 때로는 추상적인 공공성이나 이상적인 미학을 궤변처럼 늘어놓는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한다. 마이클 소킨(Michael Sorkin)과 같은 비평가는 “(현재의 도시설계는) 형태적, 기능적, 사회적 요구에 대해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채 … 막다른 길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2 최근 국내에서 진행 중인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 부지 개발 사례를 통해 이러한 무기력함과 함께 도시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재조명해 보자. 2014년 9월 삼성동 한전 부지에 대한 입찰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 기업은 10조 원이 넘는 입찰액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기업의 100년 비전을 담은 뚝심이라는 평가와 함께, 토지 감정가의 세 배가 넘는 과도하고 실패한 배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관심의 대부분은 과연 10조라는 입찰가가 적절했는지, 경쟁사는 얼마를 써냈는 지, 그리고 이 기업 총수는 왜 이런 천문학적 비용 지출을 감행했는지에 머물렀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훨씬 더 큰 질문이 남아 있다. 왜, 언제부터 우리는 좋은 도시 환경을 고민하기에 앞서 남의 땅값을 걱정하기 시작했을까? 왜 한전 부지 빅딜에 대한 관심 이전에 ‘코엑스-한전-탄천-잠실운동장’을 망라하는 강남 지역 도시설계 청사진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까? 대규모 도심지에 잘못된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을 때의 뼈아픈 부작용을 이미 수차례 학습했음에도, 오늘날 한전 부지 주변의 이해 당사자도, 매일 삼성동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주말에 잠실운동장과 탄천 산책로를 즐기는 시민도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배팅 논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거꾸로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한전 부지라는 땅의 중요성과 예상되는 설계안에 비추어 볼 때 이 기업이 과연 개발권을 가질 자격과 역량이 있는가(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3 이러한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기존 도시 문제를 찾아내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를 해결하는, 혹은 복수의 해결안을 조정하는 것이 도시설계의 사회적 책무다. 이때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어떤 도시가 더 좋은 도시인가? 이는 어떤 물리적 형태의 도시 환경이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더 가치 있게 이용될 것인가라는 판단과 선택의 문제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신념이나 소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미학, 때로는 대중의 공감대와 사회적 감수성도 포함된다. 좀 더 크게 보면 도시 개발의 크고 작은 시행착오와 다양한 사회과학적 연구도 좋은 도시를 판단할 수 있는 잠재적 기준이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 기준이 집단적 슬로건이나 개인적 취향과 뒤범벅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 연재의 기획 의도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와 함께 뉴어바니즘과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나아가 지속가능한 도시론과 스마트한 성장론에 이르기까지 범람하는 도시론(urbanism)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 도시는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도시론에 아찔하게 기대어 서 있다. 좋은 도시를 정의할 때 비교적 널리 알려진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이러한 기준은 어디까지 보편적일까?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협동과정 도시설계학전공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2015년01월 / 321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딴짓하기
    딴짓하지마 상담 어땠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딴짓하지 말라고 하시네. 처음에는 훈훈한 분위기로 시작했지. 그러다 복수 전공 이야기를 꺼내니까 안색이 변하시면서 3학년이 되면 전공에 집중을 하는 것이 좋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일수록 전문적인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때라서 내가 복수 전공을 고민하는 것 아니냐? 요즈음 어디서나 융·복합에 크로스오버를 외치는 시대인데 전공에만 집중하라니. 물론 처음부터 이 전공이 좋아서 학교에 왔고, 설계가 특히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 전공에 들어맞는 회사에 들어가서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하는 게 맞을까? 난 잘 모르겠다. 간추린 조경의 역사 1858년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는 센트럴 파크 공모전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다.1 그리고 5년 뒤 센트럴 파크의 책임자 지위에서 물러나면서 공식적으로 본인을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로 지칭한다.2 옴스테드가 스스로를 최초의 조경가로 선언한 이 날은 조경이 독립된 전문 분야로출발하게 되는 상징적인 날이기도 했다.3 물론 옴스테드 이전에도 정원, 공원, 광장, 가로 등 조경의 대상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조경의 개념이 제시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은 하나의 종합된 방법으로 다룰 수 있는 동일한 영역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세기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옴스테드는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조경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냈다. 옴스테드는 조경을 개념적으로만 정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의 정원술이나 건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실천을 보여주었다. 옴스테드는 단일한 공원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 도시와 지역의 녹지 체계를 제시한다. 그는 수많은 계획안들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미국 도시의 광역적 녹지 체계를 완성한다.4 1865년 요세미티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옴스테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공원, 국립공원을 제안한다.5 그때까지만 해도 자연은 인간이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이었지 그 어느 누구도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옴스테드가 최초로 인공적 자연으로서의 공원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공원을 만든 것이다.옴스테드가 조경이라는 분야를 만든 지 100년 후 조경은 환경 계획(environmental planning)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조해낸다. 20세기 초 생태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등장한 이후로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나날이 증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도 생태학의 성과를 현실에 적용할 구체적인 대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경학과 교수였던 맥하그(Ian L. McHarg)는 생태학을 접목한 과학적 조경 계획의 방법론을 제시한다.6 그가 제시한 이론을 바탕으로 GIS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이는 이후 인간이 다루는 모든 공간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가 된다. 맥하그를 통해서 이제 조경가의 역할은 공간과 관련된 인문적·자연적 시스템 전체를 다루는 범위로 넓어진다. 1980년대 조경은 예술이 되고자 한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부 예술가의 정원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조경작품은 제대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맥하그가 조경의 과제를 과학적 계획으로 제시하면서 더더욱 조경은 예술과 멀어져가는 듯 보였다. 이러한 경향에 반기를 든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한다. 피터 워커(Peter Walker)는 다양한 작품을 통해 조경이 공간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사 슈왈츠(Martha Schwaltz)는 아방가르드적인 팝아트의 미학을 그대로 조경 작품으로 구현했으며,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와 조지 하그리브스(George Hargreaves)는 자연과 야외 공간을 예술적 매체로 보고 조경과 환경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이러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조경의 범위는 예술과 문화의 영역으로 다시 한 번 넓어진다. 1990년대 말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은 건축이 아닌 조경이 도시를 주도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조경이 탄생했을 무렵부터 조경은 도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그러나 조경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연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언제나 주연은 건축이나 토목, 행정이었지 조경은 한 번도 도시 만들기의 주체가 되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는 지금까지의 건축과 도시의 이론과 실천을 비판하면서 경관이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중심적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담한 선언은 10년 뒤 조경은 물론, 건축, 도시설계의 전 분야를 포섭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발전한다.7 지금 이 순간에도 조경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고 만들어나가며 끊임없이 내연과 외연을 확장해나가고 있다(그림1). 기반시설 vs 공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관통하는 B20 고속도로와 C58 고속도로는 도시의 북동부에서 교차한다. 바로셀로나의 가장 중요한 관문 중 하나인 인터체인지는 반경 200m의 거대한 원형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인터체인지의 특별한 점은 형태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인터체인지 내부에는 각종 스포츠 시설을 갖춘 공원이 있다. 트리니타트 파크(TrinitatPark)는 기존의 도시 계획의 상식을 모두 깨트린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는 엄연히 교통 기반시설이다. 지금까지 교통기반시설과 공원의 영역은 엄격히 분리되어 왔고 이 두 가지 토지 이용은 양립할 수 없었다. 물론 도시계획 상에서 교통 기반시설과 공원을 분리시켜 구분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방이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인터체인지는 사람들의 접근이 매우 불편하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소이니만큼 안전의 문제도 있다. 또한 자동차 소음과 매연으로 인해 교통 기반시설 주변은 공원의 부지로 부적격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만약 설계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그림2)? 설계가는 공원으로의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터체인지의 서쪽 경계를 가로수가 늘어선 거대한 발코니 형태의 구조물로 덮는다. 덕분에 동쪽 주거지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면 이 공원의 경계가 인터체인지인지조차 알기 힘들다. 그런데 이 구조물의 역할은 단순히 고속도로를 가리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구조물 내에는 지하철역이 있어 인근 주민들뿐 아니라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공원을 찾아올 수 있다(그림3, 4). 접근성의 문제를 해결한 뒤 설계가는 구조물의 위압감, 각종 소음, 매연 등 인터체인지의 성격상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도 설계의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우선 고속도로 구조물로 생기는 단 차이보다 더 높은 지형을 공원 내부에 만든다. 이로써 공원에서 동쪽의 고속도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른 공원의 경계에는 물과 나무,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진 켜를 만든다. 이러한 설계 때문인지 일단 공원으로 들어오면 주변이 고속도로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오히려 다른 공원에서는 볼 수 없는 물과 숲으로 위요된 아늑함까지 느껴진다. 거대한 벽이 될 수밖에 없는 고속도로의 구조물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원이 만들어진다. 설계를 통해 고속도로는 디자이너가 손댈 수 없는 까다로운 토목과 공학의 영역이라는 편견을 유쾌하게 무너뜨린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김영민[email protected]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2015년01월 / 321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조경건축도 괜찮아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에 관한 몇 가지 소고
    필자의 실무 경험이 아직 깊지 않아, ‘설계하는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제목이 갖는 어감도, 설계 방식을 한정하는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꺼려진다. 오피스박김은 그간 프로젝트에서 논할만한 것을 선정하여, 이를 박윤진, 김정윤 두 대표가 대화체로 반추하는, 즉 현재의 설계적 사유를 ‘드러내는’ 형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_ 글쓴이 주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설계경기 김정윤(이하 김)2006년 가을에 서울 들어와서 몇 년 동안 설계공모 참 많이 했었는데, 한동안 뜸하다가 201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다시 전력투구했었죠. 서소문밖 설계공모에 참여하기로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죠? 박윤진(이하 박)첫째 이유는 ‘메모리얼’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무실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메모리얼 프로젝트(타이완 치치 지진 메모리얼)였고, 그 후 계속 메모리얼에 관심을 갖고 있었잖아요. 메모리얼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공간이 극화되고 타이폴로지상 새로운 언어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혹적인 대상입니다. 김오히려 보통 메모리얼이라는 유형은 잘 변하지 않는, 즉 티피컬(typical, 전형적인)한 언어를 가지고 지속되는 속성이 있는데(예를 들어 수직적인 기념탑 혹은 베트남전쟁 메모리얼 후 유행처럼 사용되는 검은색 석벽 등), 그에 반해서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상대로 새로운 지적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이었죠? 박그렇습니다. 언어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기념하는 대상과 주변 맥락에 따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볼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대상지 역시, 현재 주목받지 못하는 철길 옆의 땅이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죠. 둘째는, 건물과 외부 공간, 도시와 건축, 자연과 조경, 상부와 하부, 공원과 성당 등 많은 상대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계된, 혹은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테스트해보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즉 이 모든 것들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이죠. 김건축과 조경간의 경계를 허문다. ‘이젠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기회가 참 드물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는 것인가요? 박 그렇죠. ‘마포석유비축기지 국제설계경기’라든지 ‘서울역 고가 공원화 사업’, 모두 좋은 기회죠. 물론 누가 그 기회에 ‘초대받을 수 있느냐’는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지만.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비록 국내 건축사사무소가 등록해야 했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한계는 설계가의 의욕과 실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우린 언제나 믿어왔습니다. 당선 여부를 떠나서 이 설계공모의 성과물이 그 의욕과 실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피스박김을 건축사사무소로 등록하면 쉬운 문제가 됩니다만. 마치 히데오 사사키(Hideo Sasaki)처럼 말입니다. (하하) 김 여기서 파생된 질문인데, 한국 도시에서 메모리얼은 무엇인가요? 박 우리나라에는 메모리얼이 너무 없습니다. 어떠한 사건을 ‘공간’으로 기억하는 데에 익숙지 않죠. 서울은, 그 상흔으로 본다면 ‘메모리얼의 도시’입니다. 아주 작은 공간 형식으로도 수많은 집합적 기억과 장소적 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곳이죠. 과장하자면, 동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할까요? 김 우리는 이 성지를 천주교만을 위한 메모리얼로 생각치 않았잖아요? 오히려 천주교의 도입과 박해의 모든 과정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편적 추모를 불러일으키고 싶었죠. 지나고 보면 또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너무 중립적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박 그러나 지나치게 종교적이라면 도시 프로그램으로서의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공장소에 종교 시설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언제나 있죠. 그래서 우리는 성당을 비롯한 모든 종교 시설을 다 지하 공간 속에 제안했던 거죠. 사이트에 대한 인상 김 처음 사이트에 가보고 받은 인상은? 박 글쎄 … 난 별로 사이트에 대한 특별한 인상이 없었어요. 김 그래요? 난 너무 사이트가 복잡하고, 땅으로서의 존재감도 전혀 없었고 주변의 큰 건물과 도시 프로그램에 단지 스스로 흡수되어 있는 상태에서 양현탑과 같은 시설물이 산발적으로 존재했고, 그래서 ‘이곳의 바닥을 드러냄으로써 존재감을 만들자’, 이런 생각을 했죠. 박오히려 나는 사이트를 보기 전에 도면을 보면서 기존의 헤비(heavy)한 지하 주차장 구조가 흥미로웠죠. 이 기존 구조와 설계공모에서 요구된 프로그램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것을 통해 굉장히 독특한 기념 공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로를 지나가는 기차소리의 안락함, 그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를 끌어들여서 사이트의 주요 요소로 삼고 싶었어요. 사이트에 가봤을 때 이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죠. 김 어차피 완벽 차폐도 불가능한 것이었죠. 공개발표 때도 언급했지만, 난 약현성당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설계 과정 내내 뇌리에 남아있었어요. “쓰레기 냄새 올라오고, 기차 계속 지나다니고, 차 소리도 시끄럽고. 이런 와중에 드리는 서소문밖 성지에서의 금요일 오전10시 야외 미사가 난 제일 좋다. 왜냐면 현대인의 종교생활이란 바로 이런 혼잡 와중에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 그리고 사이트와 관련해서 또 중요한 것은 약현성당과의 관계죠. 새로운 건축 유형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약현성당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고전적 성당이 지어지는 방식이나 구법을 이용하면 우리가 짓는 기념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바티칸을 시작으로 한 달여 동안 성당의 타이폴로지 리서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계의 전제 김 약현성당도 사이트의 일부로 봤었죠? 약현성당이 본래 서소문밖 성지의 기념 성당으로 만들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지를 기념하는, 땅 위로 올라와 있는 종교적 공간은 약현성당이면 충분하다고 본거죠. 그 건물을 이기려 하거나 전혀 다른 무언가가 또 생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그래서 우리는 약현을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존중하고 기념하는)하면서 거기에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성당과 메모리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약현성당이 우리 사이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김 크게 보면, 지하 주차장 구조와 함께 기존 사이트에 있는 공간 언어로 약현성당을 봤다고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미 서소문밖 성지의 기념 성당으로 지어져 있었던 약현성당을 이 기념 공간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존재로 존중하겠다는 의미였죠. 그리고 지하 스트럭처는, 현재의 프로그램으로만 보면 상당히 오버스트럭처였지만, 새로 들어올 프로그램의 규모와 성격을 보면 오히려 그 규모가 적당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박 좀 더 면밀히 보자면, 우리는 설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컨텍스트(context)를 의식하기는 하지만, 모든 설계어휘가 컨텍스트로부터 파생되는(context-driven)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컨텍스트는 형태적으로 주어진 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그것은 동시대의 개인상, 세대적 의식, 기술적 여건, 혹은 이데올로기까지 광범위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약현성당이 보여주는 건축적 구법, 이것의 근대적 합일, 뭐 이런 이론적인 컨텍스트였죠. 예를 들어 ‘과거 지형이 이러했으니까 이를 되살리는 설계를 하자’, 이런 형태적 문맥주의는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형태(혹은 경험)의 다양한 발현을 위축시키고, 지나치게 단순한 설계 논리를 만들죠. 물론 대중을 현혹시키기에는 ‘그럴싸’하겠지만요. 우리는 본질적인 문맥 그리고 보다 확장된 문맥적 가능성을 찾고자 합니다. 리서치 김 성당의 ‘원형’에서부터 리서치를 시작했었어요. 우리가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간에 다루게 되는 프로그램의 ‘원형’에 항상 신경을 쓰지 않았나요? 박원형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김여기서 말하는 원형이란, 형상이나 형태라기보다는 그 프로그램의 본래적 기능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박난 항상 그렇진 않다고 보는데요. 이번엔 오히려 여건이나 상황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더 중요했다고 봐요. 김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이번엔 천주교 신자도 아니고 성급히 설계에 뛰어들 수가 없었고, 성당의 원형에 대한 리서치부터 신중하게 시작했었던 것이 맞죠? 박그렇습니다. 한 한 달 정도 했죠? 먼저 바티칸에 대해 했습니다. 놀랍게도 바티칸은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 지고 없어지는 과정이 쌓이면서 이뤄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형식과 구법들이 계속 등장했고, 이것들이 중첩되어 표현된, 이칭(itching)된 아름다운 도면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바티칸의 역사적 레이어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두 번째는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 교회들을 들여다봤었는데, 특히 약현성당이 흥미로웠어요. 설계는 프랑스 신부가 했고, 당시 우리한테 조적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 기술자를 데려왔고 목조는 일본 기술자가 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스위스 목수가 목구조를 세우고, 남미의 기술자가 노동요를 부르며 콘크리트 포장을 마감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약현의 아치(arch)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리서치를 통해 약현성당의 아치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는데 아치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상징성을 가짐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전근대 사회가 근대로 넘어 오는 과정도 건축적으로 의미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아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항상 그랬듯이, 먼저 빈 종이를 펴놓고 손끝에서부터 바로 시작하는 것을 매우 경계합니다. 충분한 리서치와 생각을 통해 대상지와 프로그램에 익숙해 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김난 돌아보면 이번에 리서치 할 때 정말 좋았어요. 왜냐면 전혀 몰랐거나 관심 없던 것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어떤 긴장감까지 더해져서, 바티칸 대성당의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도 재보면서 과연 어떤 공간이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현대의 성당들에서는 과연 이런 원형의 공간을 어떻게 발전시키거나 차용했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정말 흥미로웠어요. 박맞아요. 예배할 땐 최소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동네 성당도 가보고 경동교회도 가보고. 새로운 공간을 학습하며 설계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김 어찌 보면 우리가 천주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상과의 거리를 일정히 유지하며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리서치 중 가장 좋았던 건, 초기 순교자의 순교 과정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엮은 책을 읽었을 때에요. 과연 종교의 힘은 이렇게 양반 아녀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순교하는 날만 기다리며 살 정도로 대단했구나, 특히 그 시대의 서학(가톨릭)이라는 것의 존재가. 손에서 책을 놓기가 힘들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성지가 천주교에서 의미하는 바를 (특히 우리나라 천주교에 있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비단 천주교 신자들만이 감동을 느끼는 공간이 아니라, 180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겪었던 혼란스러운 근대화 과정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어 보편적인 기념 및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공고해졌죠.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볼 때, 우리가 당선은 안됐지만 이러한 과정 자체에서 얻은 것이 정말 많아요. 박 여담이지만 난 당선되면 천주교 신자가 되려고 했었으니까. (하하) 그만큼 천주교 자체에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어요. 종교적 공간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형식이 있고, 그것들이 또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고, 우리가 설계를 하면서 차용과 변형을 시도하게 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좋았죠. 설계를 하는 동안 주변의 성당과 천주교 신자 등 평소엔 신경 잘 안 쓰였던 사항들을 예민하게 보게 되었어요. 김그런 의미에서 다른 설계 과정과 달랐던 것은, 마감 전에 설계를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설계를 굉장히 많이 보여준 거죠. 부모님, 우리 재인이 친구 엄마들, 내 친구들, 천주교 집안 며느리인 동생 등,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혹시 우리가 설계한 공간이나 사용한 언어 등이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어색한 부분이 있을까 상당히 조심했었어요. 성당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공간의 양식은 갖되, 보편적인 역사·기념 공간 또한 만들려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보는 사람마다 완전 극찬하여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하하) 설계 콘셉트 박콘셉트를 위해 제일 중요했던 건 리서치였고, 그 후엔 성당을 어떤 레벨에 위치시킬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결국 요구된 건축 프로그램은 모두 지하로 넣기로 했는데,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빛을 어떻게 불러들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연구했죠. 더 넓은 스케일에서는, 공간 배치에 있어서 기념 성당과 소성당만을 약현성당과 같은 축에 위치시켜서 동질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프로그램은 기존 지하 주자창이 지배하는 기존 그리드 위에 위치시켜서 공간의 위계를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했고요. 김나중에 다른 엔트리와 비교했을 때 모든 건축 프로그램을 지하로 넣은 건 결국 우리 팀 밖에 없었죠? 근데 이걸 우리가 ‘조경’ 오피스라서 그렇다고 말하는 걸 몇 번 들었는데, 난 그 말을 그다지 부인하고 싶진 않은 것이, 꼭 뭔가 건축적 정면성이나 상징성을 만들어 넣고 싶은 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할까요? 박글쎄요. 저는 다른 생각입니다만. 만약 이 프로젝트가 건물 입면이 정말 중요한 경우였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입면 설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 땅이 가지는 가치와 힘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건축 프로그램은 다 지하로 넣기로 한 거죠, 도시에서 건축의 정면성(frontality)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도시 공간에서 지나치게 대형화되고 상업화되는 종교 시설에 대 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특히 이 장소에 지나치게 종교적 상징이 땅 위에 만들어질 때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힘들 것이고 결국 우리가 원했던 보편적 역사 기념 공간으로 만들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였죠. 무엇보다 교회의 원형을 보면, 처음에 동굴에서 시작했잖아요. 박해받던 시대의 성당과 교회들은 말 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마침 지하에 있던 구조물을 이용하면 공사비 절감과 함께 빛의 극적인 관입을 통해 정말 흥미롭고 아름다운 상하 관계를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는 지난하게도 라이노를 통해 무수히 많은 입체적 모델을 만들어가며 건축 프로그램 배치 대안을 만들었죠. 그렇게 많은 아이디어 테스트를 통해 19세기 도시 구조와의 관계, 현재 도시와의 비례, 약현성당과의 균형 등 모든 것을 고려했었죠.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도면은 우리의 첫 번째 도판이었어요. 약현성당과의 관계, 주변 맥락과의 관계, 비워야 하는 당위성 등이 다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조경’ 오피스라서 건물을 지하로 넣었다고 말한다면, 이 모든 노력에 대해 한 번에 눈감고 등 돌려 버리는 형국이에요. 조경건축도 괜찮아 박그런 의미에서 조경건축이란 표현도 괜찮다고 봅니다. 기존의 학제적 구분으로는 동시대의 새로운 설계 수요를 충족시키거나 창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의 최근 소견이기도 합니다. 물론 각 분야의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요. 또한 서울에서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는 당연히 다분야적이어야 하고 멀티 포지셔닝 해야 한다고 봐요. 왜냐면 우리가 다룰수 있는 땅이나 지리학적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수평적이기보다 수직적이어야 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구축적이어야 해요. 또한 ‘잘 짓기’까지의 과정 중 돌출되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구상적이기보다 시스템적이어야 합니다. 김‘조경가’라는 표현 대신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박물론 김대표께서는 ‘조경가’라는 표현을 거부하시지 않지만, 저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왠지 조경가라는 표현은 ‘아키텍트’가 아닌 것처럼 들리니까요. 또한 너무 이데올로기적 입니다. 지금의 건축은 모든 아키텍처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는다면, 조경건축이라는 경계적인 표현은 오피스박김의 작업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제가 여기에 반론을 위한 반론을 하자면, 물론 경계에 서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왔던 것이 사실이죠. 그렇지만 반대로 한쪽 ‘편’에 확실히 속해 있음으로서 부여되는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런 힘을 받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박어떤 집단이나 그룹에 귀속되는 건 설계가 혹은 아키텍트의 정치적인 선택인데, 우리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인 태도는 좋은 프로젝트를 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잘 짓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봐요. 과연 정치적으로 특정 집단에 스스로 귀속되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 앞으로 점점 이런 그룹핑은 느슨해질 것이고 새로운 시대에 전반적으로 어울리지 않을 거에요. 개개인과 각자의 선택이 훨씬 중요한 세상이 되어 가니까요. 김우리가 스스로 경계에 서 있다고 말함으로써 양쪽에서 받게 되는 견제라든지 편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그건 그야말로 편견이죠. 우리가 ‘난 꼭 건축을 할꺼야’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서소문밖 설계경기에 참여한 것이 아니잖아요. 대상지를 하나의 집합체로 인식하고 그 안에 흔히들 건축적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대상지와 프로그램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기둥과 지붕을 설계한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분야보다 중요한 건 ‘어떤 문화권과 관계하고 있는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인테리어 건축가 중에서 ‘조경’을 굉장히 잘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들의 정원은 도시의 입면과 가로를 바꿉니다. 인테리어 어바니즘이라고 할까요? (하하) 일단 재료와 식물 소재에 대해 박식하고 내·외부 공간의 연결에 대해 유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마치 패션처럼, 인테리어라는 트렌디한 문화가 조경과 건축 그리고 도시를 넘나들게 만들어요. 물론 가볍지만 가벼운 것도 괜찮은 세상 아닌가요? 대안들 김무거운 이야기를 많이 해서, 각주가 본론이 된 것 같네요. (하하) 다시 서소문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서소문에서 워낙 대안을 많이 만들었지요? 약현성당 축과의 관계, 대성당과 소성당의 관계, 상부 메모리얼들의 관계 등을 다양한 변수로 삼아서 말이에요. 나왔던 대안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박약현성당의 축과 지하 구조물 그리드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가 중요했었는데, 여러 부분이 선큰되며 뚫려있는 공간을 만드는 안을 담은 콜라주형 플랜이 참 좋았어요. 수많은 홀들이 지상과 지하를 만들고 그것이 곧 빛의 통로가 되며 지형을 이끌었고요. 거기서부터 최종 안이 정리되어 나왔죠. 수십 개의 대안과 도시 맥락에서 오는 데이터, 이런 것들이 층층이 쌓이며 나온 것이 바로 우리의 파이널 안이었죠. 결코 손끝에서 나온 선들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설계 과정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그동안 우리가 해온 모든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구요. 결국 우리가 설계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설계 시작 시점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물을 얻었을 때의 그 흥분. 그거죠. 건축 프로그램간의 위계 김우리가 전제한 것은 건축 프로그램을 모두 지하로 넣고, 기존의 주차장 스트럭처는 모두 유지하는 대신 기념 성당과 소성당이 관입되는 부분만 약현성당의 축에 따라 달라지도록 한다는 것이었죠. 박기존 스트럭처가 갖는 그리드와 약현성당으로부터 오는 그리드를 중첩시킴으로써 구조적으로도 안정을 꾀하고 또한 두 개의 그리드가 틀어지면서 생기는 공간적 효과를 노렸죠. 제일 중요한 건 그런 관계를 만들되 지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동선을 설계함에 있어, 최대한 밀도 있게 공간을 이용하도록 한 거에요. 그리고 지하 공간에서는 전시 공간을 성당을 한 바퀴 돌며 배치함으로써 성당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죠. 김평면적으로는 그렇고, 사실 단면에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의 등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박그렇죠. 평면적으로는 구조 그리드와 약현 그리드를 본 것이지만, 단면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공간인 기념 성당이 가장 깊은 공간(3층 깊이, 약 14m)이고 소성당이 그 다음의 깊이(2층 깊이), 그리고 나머지 전시 등의 모든 공간은 1층 높이로 놓아서 층고에 따라 공간의 위계를 두었죠. 이러한 깊이와 층고는 빛과도 큰 연관이 있는데, 상부의 빛을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끌어내릴 수 있느냐가 달려있었죠. 김빛으로 인해 위와 아래의 관계가 설정되기 시작하는 거였잖아요. 박그런 의미에서 보면, 건물을 밑으로 짓는 형식이 되는 거였죠. 김위아래의 관계라는 게, 사실은 굉장히 티피컬한 경우가 많잖아요? 땅과 건물의 관계, 건축과 조경의 관계라고도 보는데, 우리는 건물을 밑으로 지으며 위아래의 관계가 생겼다고 볼 수 있는데, 소성당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건축 프로그램은 지하에 있었고 윗공간은 메모리얼에 할애했죠. 여기에 덧붙여 ‘홍예’에 주목하게 되었던 과정을 좀 얘기해보죠. 홍예 박약현성당의 아치가 당시 서구의 것이었고 중국과 일본의 기술에 의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홍예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옛부터 성문이나 교량을 만들 때 썼던 형식이거든요. 위아래의 관계를 설정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아치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건축 양식이라 생각한 거예요. 우리의 근대가 꼭 서구나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재된 씨앗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합일점’을 찾아낸 것이었다고 할까. 천주교 역시 선교사들로부터 먼저 소개된 것 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학문으로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김우리가 아치나 홍예에 주목하게 된 것이 기존의 지하 주차장 기둥을 그대로 지키되 성지의 기념 공간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으려다 보니 자연히 ‘얹혀 지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거죠. 그렇게 찾아낸 것이 기둥에 아치를 얹는 거였고요. 박그렇죠, 지붕만 디자인 한 거였고, 그 지붕이 곧 메모리얼의 바닥이기도 했어요. 또 이 사이트와 연계해 보면 성인들이 처형장으로 향하며 지나갔을 때 서소문의 홍예를 분명히 쳐다보았을 거고요. 김자평한다면, 그 홍예 구조를 새로운 공간 언어로 불러와서 위아래 프로그램의 중추 역할이 되도록 했던 것이 상당히 적절하지 않았나 싶어요. 홍예가 랜드스케이프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이렇게 드러나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여러 유형의 홍예를 3D로 실험해보고 프로그램과의 관계를 살펴보던 중 마치 매트리스처럼 올록볼록한 형태가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아 이게 그대로 지형으로 드러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박일반적으로 경관 설계는 그 속성상, 이미지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는 구축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 질서를 가지는 것 혹은 구조적인 것이라는 시스템에서 시작해서 랜드스케이프로 발현되도록 하는 방식을 매우 존중하는 편입니다. 즉, 자연의 현상을 모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입체적이고 다변화된 랜드스케이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를 찾는 것 자체가 매우 도전적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설계 자세가 비단 서소문밖 설계공모 사이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 라, 우리나라처럼 매우 밀도가 높아서 뭔가 새로운 자연 혹은 대체 자연을 만들어 내야하는 경우 의미 있는 랜드스케이프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믿죠. 리프리젠테이션 김결국 우리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엘리먼트는 ‘홍예’와 ‘빛’이었고 제목과 부제목에도 그게 드러나게 되는데,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에서도 이를 가장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었죠? 박우리 사무실이 늘 해왔던 방식이지만, 우리가 임프레션(impression)을 만들 때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잡아 내려 하고, 공간을 잘 설명할 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행위를 지시하려 하죠. 또한 임프레션 자체가 최종 성과물이 아니라, 그걸 만드는 과정이 설계를 계속 진행하는 매개이기 때문에, 실제 공간감을 봤을 때 어떤 일상적 혹은 찰나적인 경험을 하게 될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약현과 메모리얼의 관계를 보여주는 두 개의 단면과 평면이 가장 중요한 전달 방식이었다고 봐요. 도시 전체와 메모리얼의 관계를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아치가 동서양의 합일적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결국 우리가 말해온 ‘산수전략(山水戰略)’을 통해서 추구하고 전달하려는 것은, 동양의 특이성이 아니에요. 그보다 서울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동서구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쉽게 얘기하면 코스모폴리탄적 접근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좀 더 구축적이고 구조적이고 통합적인 면이 필요하다는 거죠. 잘 아시겠지만, 자연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만 봐도 로맨티사이즈(romanticized)되는 것이지요. 김얘기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설계 과정에서 너무 천주교적 어휘라든지 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런 것도 보편적 정서에의 호소나 도시 맥락에서의 메모리얼의 장소성 등을, 성인에 대한 추모 공간 못지않게 중요시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것이, 우리 임프레션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들은 기념 성당의 임프레션을 두고 ‘모스크(mosque, 이슬람교의 예배당)같다’는 의견을 낸 분들이 있단 말이었어요. 박(하하) 재미있습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모스크가 성당으로 전용된 경우도 있었고, 돔과 서구 성당의 아치는 혼용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코멘트로 해석하자면, 우리 설계를 우호적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나올 수 있는 반응인 것 같은데요. 아이러니 하게도 일반 대중이나 신자들이 봤을 때는 아주 훌륭한 성당으로 보이는데, 건축 전문가가 ‘모스크 같다’고 해버린다면… 마치 “저게 산이냐 신사냐”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사실 ‘○○처럼 보인다’는 코멘트는 비평에 있어서 가장 일차원적인 비평입니다. 일반 대중이 모르는 새로운 것을 봤을 때, 설명하기는 어렵고, 결국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무엇과 일치시키려는 손쉬운 표현, ‘미메시스(mimesis)’의 수준이죠. 김그런 코멘트는 참, 설계자의 그동안의 수많은 리서치와 노력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거죠.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공간 경험 김 우리가 이 설계를 통해 정말 전달하고 싶었던 공간적 경험은 뭐였나요? 박 빛이 만들어내는 공간감,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 아치가 주는 위아래 공간의 다양성 등등이라고 볼 수 있죠. 김 저 같은 경우는, 기념 성당의 상부가 지상에서는 다시 장방형으로 규정된 메모리얼 공간이에요. 같은 레벨의 도로와 철로, 인도로 여전히 분주하게 도시의 일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 야외 미사를 올리게 되면, 바로 드러나 있는 메모리얼 공간 자체가 우리 도시에 없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봤어요. 넓게 보면, 성지 순례의 루트상에서 북동쪽의 철로 변을 지나 공원으로 들어와 숲을 지나고 갑자기 확 열리며 홍예의 구조가 지형으로 드러나 있는 메모리얼을 만나게 되는데,이러한 시퀀스가 단순히 슬픔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밝음, 기쁨, 존경 등을 느끼도록 할 것이라고 봤어요. 그리고 지상에서 시작해서 기념 성당의 윤곽을 돌아 지하 3층의 성당 입구까지 연결된 램프인 ‘십자가의 길’도 일반 신도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길일 것이라고 믿었고요. 박 저도 역시, 성당의 지붕을 야외 미사나 행사시 개방해서 미사집전 제대로 쓰이게 하는 것이었어요. 마치 사직단처럼, 성당의 지붕이 곧 단이 되는 거죠. 보통 서구의 성당들에서 볼 수 있는 오브제로서의 성당과 열린 광장의 관계가 아닌, 성당의 지붕이 곧 광장의 역할을 하는, 새로운 수직적 관계를 만들었죠. 꼭 우리가 ‘서구와 달라야 해’라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기보다는, 이 사이트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최대한 존중하다 보니 나오게 된 원형의 재해석이었어요. 끝내는 심정 김 이 설계공모 마감일이 6월 23일이었는데, 마침 그 새벽에 월드컵 2차전 경기가 있었죠. 그래서 사무실에서 다 같이 밤을 샜는데. 어떠셨어요. 끝냈을 때의 느낌은? 박 느낌은 딱 치치 메모리얼(Chichi Earthquake Memorial International Competition, Taiwan)을 끝냈을 때의 느낌? 김 우리가 된다? (하하) 박 뭐. 된다… 라기 보단 (하하) 되고 안 되고야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깐. 그땐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이미 굉장히 흐뭇했었죠. 이번에도 역시 ‘당선과 상관없이 꽤 훌륭한 프로젝트가 나왔다’라고 자평할 수 있을만큼 과정도 정말 좋았고요. 그 안에서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선입견 없이 봐주기만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안되더라도 뭐 우리 자체의 의미 체계를 세운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죠. 치치-홀로코스트메모리얼-그리고 서소문밖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메모리얼 계보라고 생각하는데…. 김 그 셋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박 쉽지는 않지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역시 하나의 큰 할로우 스페이스(hollow space)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공간을 넘나드는 빛과의 관계. 거기서 오는 소피스티케이션(sophistication, 섬세하면서 정교하고 우아한). 우리가 그 계보를 의식하며 설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세 프로젝트는 서로 비슷하지만 매번 다른 진전이 있지 않았나. 김 항상 우리는 그런 기념 공간을 만들 때 현상학적인(phenomenological)공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나 싶어요. 박맞아요. 김 규정하거나, 쉽게 연상하거나 연결시킬 수 있는 형상의 사용을 지양하면서, 시스템으로부터 도출된 최소한의 프레임 내에서 이용자가 빛, 소리, 새 등 찰나의 여러 현상을 통해 경험을 증폭시키기를 원했어요. 기회 되면 이걸 주제로 한 글을 써도 재밌겠네요. 김우리가 89개 팀 중 7팀의 파이널리스트 안에 포함되었잖아요. 그래서 공개 발표 전날 오후 늦게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해서 다음날 발표를 했죠. 제가 했었는데 어떠셨어요? 박아 뭐, 발표는 잘 했고요. 다만 질의응답을 통해 우리 안의 또 다른 면들이 좀 더 노출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해요. 발표에서 지붕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데도 심사위원들로부터 지붕이 과연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만 계속 받았죠. 우리가 구조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충분히 설계를 했고, 충분히 지을 자신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 지붕이 새로운 형태의 구조도 아니었잖아요. 개인적인 판단보다는 차라리 지붕에 대한 토론이 있었 다면 우리의 당선 여부를 떠나 뭔가 얘기거리가 남는 건강한 방식이 아니었겠나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설계공모에 있어서 당선의 의미(서소문밖의 경우) 김 우리에게 설계공모 당선의 의미는? 박 당선은 ‘또 다른 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설계공모란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고 클라이언트와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설계 조건을 해석하고 공간 어휘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기회인 거죠. 만약 금전적인 어려움만 없다면 난 당선이 되든, 되지 않든 상관은 정말 없어요. 다만 당선까지 된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잘 반영해서 또 잘 만들어야죠. 갈수록 드는 생각은, 당선은 우리가 힘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당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모의 성격과심사위원, 진행 방식 등을 잘 살펴서 참여할 게임과 안 할 것을 잘 선택하는 일이지 않나 생각해요. 이것이 잘 준비된 공모인가. 클라이언트는 잘 지을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심사위원과 진행 주체들은 비교적 공정한가. 혹은 우리한테 유리한지 등을 이제 고려하게 되었죠. 우리가 서울에 처음 들어와서 무작정 모든 공모에 달려들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적어도 이러한 ‘판단’의 단계를 거쳐 참여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지난 8년 동안의 성장이라고 할까요(하하). 박윤진은 하버드 대학교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김정윤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 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 대학교(2008, 2010), 오하이오 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 대학교(2012)등에서 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강의하였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길 페날로사 8-80 도시 사무총장
    최근 FTA로 가까워지긴 했지만 콜롬비아는 여전히 우리에게 꽤나 생소한 나라다. 그러나 도시적 이노베이션에 있어 콜롬비아는 결코 변방의 소국이 아니다. 브라질의 꾸리찌바에 못지않은 21세기 도시형을 보여준 콜롬비아 보고타(Bogotá)의 리더십은 놀랍다. 그리고 그것을 이끈 주역은 탁월한 도시 행정이었다. 형은 시장으로, 동생은 공원 국장으로 재직하며 형제 콤비가 이끌어낸 혁명적 성취는 소득이 열 배, 스무 배인 선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수많은 서구 도시가 한때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보고타를 견학하며 그들의 도시 철학과, 노하우, 스토리를 배워 갔다. 부유한 도시만이 훌륭한 도시 공간을 만든다는 공식이 틀렸음을 증명한 계기였다. 뉴욕 시의 블룸버그 시장이 추진한 브로드웨이 보행몰 또한 보고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엔리케 페날로사(Enrique Peñalosa)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으로서 내가 보고타의 경제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미국인만큼 부유해진다는 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를 다시 설계함으로써 비록 가난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품위 있는 삶을 살 수있다. 사람들이 부유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도시는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1 엔리케 페날로사가 취임했을 때 콜롬비아는 언제나 그랬듯 미국식 풍요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부에 대한 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채워질 수 없는 욕구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조건일 뿐이다. 페날로사 형제는 GDP라는 잣대가 아니라 도시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엔리케가 시장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보고타의 혁신은 사실 공원국의 방향타를 맡은 동생 길 페날로사(Gil Peñalosa)에 의해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시클로비아(ciclovía)(보고타에서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에 시행하는 자동차 없는 거리)’와 같이 차량 통행을 일시적으로 제한하고자전거와 보행자에게 도로를 개방하는 발상은 페날로사 형제가 고안해 낸 발명품은 아니다. 1960년대에도 광범위하게 유행하던 전략이었다. 뉴욕의 진보적 시장이었던 린지(John Vliet Lindsay) 또한 5번가에서 보행자 전용 도로를 실험한 적이 있다. 보고타에서도 이미 몇몇 선구적 시민들에 의해 시클로비아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길 페날로사 이후, 시클로비아는 그저 상징적인 움직임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시 혁신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만큼 그 규모가 과감히 확대되었고 각종 페스티벌, 단체 춤 교실(Recrovia) 및 야간 자전거 도로(ciclovía nocturna)와 같은 창의적인 요소들을 추가해 보고타 시민의 생활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현재 시클로비아의 길이는 121km에 이른다. 한편, 새 자전거 도로는 가장 소득이 낮고 천대받는 지역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자전거 외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야말로 이러한 인프라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는 관점에 바탕을 둔 정책이 었다. 포장조차 되어 있지 않던 진흙탕 길에 가로수를심은 널찍한 길이 놓여졌다. 비록 값비싼 재료나 훌륭한 소재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나 덴마크 등 유럽 선진국 못지않게 세심하게 설계된 자전거 도로는 빈민층 밀집 지역을 관통하며 곧 훌륭한 공원으로 변모했다. 보고타는 원래 높은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로 악명 높은 곳인데, 여기에서만큼은 아이들이 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놀 수 있었다. 어른에게는 출퇴근길, 아이들에게는 통학로와 놀이터가 되면서, 주민들 사이에 생필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서는가 하면 자전거 수리점, 인력거 등 새로운 경제 활동이 창출되었다. 또한 식료품 노점상이 늘어나 멀리 가지 않고도 먹거리를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생활비를 절약하고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그저 보기에 좋은 공원이 아니라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된 것이다. 교통 체증으로 유명한 보고타에서 자전거가 오히려 차보다 빠른 경우도 많았다. 과외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해 부모가 돌아올 때까지 노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봐주는 방과 후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변에서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자전거 도로는 보고타의 혁신적인 급행 버스 체계와 연결되어 효율성이 극대화되었다. 페날로사 형제는 총 300km가 넘는 자전거 도로를 구축했다. 길 페날로사가 이끄는 공원국의 과감한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페날로사 형제는 단기간에 200여 개가 넘는 근린 공원을 조성해 도시 어느 구역에 살든지 걸어서 이용할 수 있도록 공원 체계를 구축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휴식이나 여가를 위해 투자할 여건이 되는 반면, 저소득층 노동자의 경우 이에 투자할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간단하고 명확한 철학에서였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하층 계급일수록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빈민가를 통과하는 24km의 선형 공원인 엘 포르베니르(El Porvenir), 빈민가와 부유층 지역을 잇는 후안 아마리요 그린웨이(Juan Amarillo greenway) 등이 건설되었다. 그는 도시 한가운데 버티고 있던 특권층의 전유물인 골프장을 지금은 보고타에서 가장 유명한 대형 공원인 시몬 볼리바르(Parque Simón Bolívar)로 바꾸기도 했다. 길 페날로사는 대한민국의 수원시를 비롯해, 세계 180여 개국의 정부와 민간 단체를 상대로 자문을 수행해왔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5년01월 / 321
  • [공간 공감] 환경과조경 파주 사옥
    첫 만남이 이별이었다. 지난 호에 기고한 파주출판단지의 웅진씽크빅 옥상 정원을 둘러보고 나서 근방에 있는 『환경과조경』의 사옥에 들렸었다. 원래는 이번 호에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하 미메시스)에 대한 원고를 쓰기로 하고 답사까지 잘 마쳤고, 알바로 시자의 기 센건축과 대치 중인 나이브한 조경에 대해서 끼적이고 있던 참에 환경과조경이 서울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주 시대’를 마감하는 사건이라서 특별히 환경과조경의 파주 사옥으로 주제를 선회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미메시스를 답사하고 나서 오픈스페이스의 공간감에 대해 들었던 아쉬움의 이유를 환경과조경 사옥(이하 환경과조경)을 돌아보며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미메시스를 조연으로 돌리고 환경과조경을 이 글의 주인공으로 전격 발탁했다. 이 두 장소의 유사점이나 연계점은 그리 많지 않다. 한곳은 업무 공간이고 다른 곳은 문화 공간이다. 건축의 형태나 재질감도 전혀 다르고, 미메시스가 대지를 훨씬 넉넉하게 쓰고 있다는 점도 쉽게 드러나는 차이점이다. 미메시스는 초정밀 모던 건축과 대비되는 판에 박힌 외부 공간이 일차적으로 인지되는 장소다. 세련된 물체가 거친 배경을 만나 서로 보완되는 이미지를 구축할 때도 많지만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경 잡지에서 건축 칭찬, 조경 핀잔을 한다고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길. 객관적으로 체급에서부터 밀리는 게임이라는 결론이다. 결과는 그렇다 치더라도 의도 역시 형편없었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추측이지만, 이 극도의 기하적인 미술관은 잔디를 사이에 두고 숲과 대치를 이루는 형국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나무의 접근을 막았을 수도 있겠지만, 숲과 건축이 긴장감 있게 마주 대하는 외부 공간 콘셉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과 마주한 숲이 매우 선명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했다. 간결하고도 강한 군집의 이미지를 갖는 숲이나 야생미 흠씬 풍기는 거친 이미지의 숲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결론은 이도저도 아닌, 판에 박힌 매너리즘 식재였다. 어쨌든 미메시스가 의도했거나 어쩌다 보니 도달한 공간의 콘셉트는 ‘얼짱각’ 스타일이다. 외부 공간은 건축을 여러 각도에서 감상하는 포토 존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미메시스의 외부 공간을 유영하고 있으면 공간의 경험이나 시퀀스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건축이 멋지게 보이는 자리, 나무를 액자삼아 건축을 돋보이게 하는 촬영 지점이 방문객들에게는 보다 의미 있는 곳이 된다. 따라서 건축과 외부 공간이 쉽게 분리되어 인지될 수 있다. 반드시 외부 공간이 건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 공간이 포용할 수 있는 가치를 극대화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정욱주[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5년01월 / 321
  • [칼럼] 포스트모던 경관론과 내외이원론
    포스트모던 경관론 프랑스가 경관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조경에 접근하며 개념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물론 조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토대는 그 이전에 마련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17세기의 조경가 브와소(Jacqures Boyceau)의 『정원기법서(Traite de jardinage)』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적인 조경 서적이 출간되고 조경 작업의 텍스트로 활용되는 전통은 이미 수세기에 걸쳐 프랑스 조경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러 세기 동안 항상 기본적인 텍스트가 존재했고 조경에 대해 체계적이고 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은연중에 정원사나 조경가 사이에서 당연시되고 있었다. 조경은 원예와 달리 녹색 공간에 시스템을 구축하고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작업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조경 이론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잘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르네상스 양식이 프랑스에 전파되며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이 시대의 조경이 단순한 원예 작업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사적인 기록들에 비추어보더라도 정원이란 용어에 항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조경 작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고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장기간 축적되며 정원의 협소한 의미는 희박해지고 좀 더 광범위한 경관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던 것이고, 마침내 20세기에 들어 정원을 생각할 때 경관에서부터 생각하는 폭넓은 사고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20세기에 일어난 ‘정원에서 경관으로의’ 개념 전이를 보면 모더니즘에서 포스터모더니즘으로 진행한 시류를 읽을 수 있다. 정원에서 경관으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포레스티에(J. C. N. Forestier)는 1908년 『대도시와 공원의 시스템』이란 책을 발표했고, 몇 년 후인 1913년 앙드레아 베라(André Vera)는 『새로운 정원』을 출간했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의 개념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개혁 정부가 들어선 후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이상적 도시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고 공원의 개념에도 아테네 학당과 같은 철학자들의 사유 공간 또는 학문과 문화의 전당으로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18세기 말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영국 풍경화식 정원양식에 따라 고전주의 조경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낭만주의 조경이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공원은 19세기에 일반화된 문화 현상이자 20세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대중문화의 장으로서 중요한 사회 변화의 한 획이되었다. 이 시기의 공원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모델로 신전이나 폐허, 그리스 신화등을 소재로 가져왔고 그런 점에서 유럽의 고대문명에서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19세기 모더니즘과 맥락을 같이 하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풍경화식 정원과 19세기 프랑스공원의 큰 차이점은 포레스티에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공원을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과학적 태도, 즉 고대 정원과 고전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과는 조금 다른 태도였다. 이런 신학문적 태도는 20세기 이후 포스트모던 경관론을 전개하게 되는 프랑스 조경의 특징이 되기도 하는데, 동시에 또한 19세기의 전체적인 유럽 사회 분위기에 기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19세기는 무엇보다도 과학이 예술을 앞서나가며 예술을 선도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예술의 신경향들, 즉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오르피즘, 표현주의, 기하하적 추상주의 등의 전개가 과학에 의해 새롭게 눈을 뜬 예술의 경향들이다. 포레스티에는 그 동안 발전되어 온 공원과 도시를 시스템으로 정의하고 시스템의 체계를 정리하며 조경학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조경학은 따라서 정원을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에서 시스템과 경관을 기반으로 하는 포스터모더니즘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서 경관은 새로 등장하는 공원문화를 과학적으로 정의하면서 발전한 추상적 관념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원과는 다른 것이었다. 대안적 경관론: 포스트모던 경관과 한국식 내외이원론內外二元論 이처럼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 조경학은 그 동안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조경에 대한 욕구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고, 앙드레아 베라의 ‘새로운 정원’을 비롯해 1925년 가브리엘 게브레키앙(Gabriel Guevrekian)의 유명한 ‘물과 빛의 정원’과 ‘빌라 노아이유 정원’ 등이 결과적으로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문화적 맥락이었다. 새로운 시도는 계속 나타났다. 포레스티에는 설계 노트를 책으로 묶어 내며 새로운 정원에 대한 구상을 발표했고, 아쉴 뒤센느(Achille Duchêne)는 『미래의 정원』을 출간하였다. 도시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변화는 이 시대에 이미 환경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통과된 경관 지구 보존법이 그 예이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옛 유산이 훼손되고 특히 과거로부터 보존되어 오던 경관이 파괴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근저에는 당시 풍경화가들의 역할이 컸고 또한 문화가 사회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관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경관에 대해 토론하고 경관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발을 저지하고 경관을 보존한다는 사고는 경관에 대한 이런 인문학적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던 경관론이란 이러한 모든 새로운 인식의 체계를 포함한다. 정원은 모던의 갑갑한, 어쩌면 구시대의 먼지가 가득한 개념이지만, 경관은 포스트모던의 시원하게 열린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닫힌 공간에 기반을 둔 중국의 원림이나 일본의 정원보다는 외원과 내원의 소통을 통해 계속 변화해가는 경관 개념, 즉 내외이원론內外二元論으로 접근했던 한국 정원이 훨씬 더 유럽의 포스트모던적 경관 인식 체계와 가깝다. 한국정원은 21세기 이후 등장하는 경관의 신개념들을 이미 포함했던 매우 추상적인 정원이다. 전통적인 시경이나 관축론에서부터 포스트모던 경관론의 추상성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안적 경관이 될 수 있다. 박정욱은 파리 소르본느 4대학에서 고고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미술평론으로 고암논문대상을 받은 후 이응노 미술관 소장으로 일하며 ‘세브르도자기’전, ‘이응노 롤랑 바르트’전 등을 기획했다. 프랑스 국립사회고등과학원(EHESS, Paris)의 자크 레나르 교수, 장 폴 아고스티, 지아니 부라토니, 장 샤를 피조 등과 함께 Ars & Locus 연구원을 창설하여 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세트 출판그룹, 쿠베르탱 재단, 파리한국문화원, 뉴욕 모마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 파리 루브르 미술관, 파리 시 시테 데 쟈르 등과 함께 전시 기획과 도시설계, 아트 프로젝트 등을 유럽 및 미국, 한국 등지에서 수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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