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덤바턴 오크스의 정원 연구 지원 활동과 성과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워싱턴 D.C.에 소재하는 덤바턴 오크스 리서치 라이브러리 앤드 컬렉션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은 하버드 대학교 이사회에서 운영·관리하는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비잔틴, 정원 및 경관,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전 시대 등 세 분야에 관한 연구와 학술 활동을 국제적으로 지원한다. 조경 분야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최고·최대의 연구소인 셈이다.
덤바턴 오크스는 밀드레드 블리스Mildred Barnes Bliss(1879~1969)와 로버트 우즈 블리스Robert Woods Bliss(1875~1962)에 의해 세워졌다. 남편인 로버트 블리스는 미국 외무성 대사를 지냈으며 남아프리카와 유럽등지에서 근무했다. 이들 부부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품을 수집하고 인문학을 지원하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오랜 시간 동안 터전을 물색한끝에 1920년 6월, 현재의 저택과 넓은 토지를 구입하고 예술 작품과 서적을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음악과 미술 활동을 지원하는 데 헌신했다.
땅과 저택을 구입한 후 부부는 이곳을 새롭게 정비했다. 밀드레드는 저명한 조경가 베아트릭스 파란드Beatrix Farrand와 함께 1801년에 지어진 저택의 주변 토지를 테라스식 정원과 비스타로 바꾸었다. 1929년, 기존 저택을 확장해 음악실을 새롭게 지었고, 1940년에는 비잔틴 컬렉션을 위해 부속 건물을 증축했다. 블리스 부부는 1940년 연구소를 하버드대학교에 기증하고 1960년대 사망할 때까지 연구소와 컬렉션을 발전시키고 정원을 만들어나가는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앞서 언급했듯 덤바턴 오크스는 비잔틴, 콜럼버스 이전 시대, 정원 및 경관 등 세 분야에 집중한 연구를 전개하고 지원한다. 1940년부터 시작된 비잔틴 연구는 후기 로마 시대, 초기 기독교, 서양 중세, 슬라브 문화, 근동 지역 연구 등을 포함한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연구는 1963년에 시작되었으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의 연구가 포함된다. 정원 및 경관 연구에는 정원사와 조경 및 관련 분야 연구가 포함된다. 1951년 블리스 부부에 의해 설립된 덤바턴오크스 기부 재단Dumbarton Oaks Garden Endowment Fund이 1956년 펠로우십fellowship을 처음으로 지원한 이래 1969년 정원 및 경관 연구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으며 1972년부터 정원 및 조경사 연구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설립자인 블리스 부부는 덤바턴 오크스가 단순히 책과 예술품을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라 인문학의 고향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저택과 정원은 그 자체로 교육적 중요성을 지니며 모든 공간이 인문학적 가치를 가지는 곳이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열망은 오늘날에이르기까지 덤바턴 오크스를 견인해 왔으며 지속적인 환기를 통해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다.유명 조경가가 디자인한 정원을 갖춘 저택은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열려 있다. 박물관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이 전시되고 음악실에서는 강연과 콘서트가 이어진다. 펠로우십, 인턴십, 학술회의, 전시회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학문적인 교류를 이어나간다. 아울러 연구소는 여러연구 결과물을 덤바턴 오크스 중세 도서관Dumbarton Oaks Medieval Library에서 논문과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또한 학자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많은 내용을 온라인을 통해 자유롭게 접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덤바턴 오크스의 정원 연구 지원 프로그램
1969년에 설립된 정원 및 경관 연구 프로그램은 정원사, 조경,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걸쳐 문화적·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경관 등을 연구하고 지원하는데, 현재는 존 비어즐리John Beardsley가 디렉터로 있다. 이 프로그램은 경관을 지식과 연구의 장이자 조경가, 경관 예술가, 그리고 정원가에 의해 수행되는 실천의 터전으로서 그 이해를 깊게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지원 프로그램으로는 거주식 펠로우십, 단기 박사 준비 레지던시, 1개월짜리 박사후 과정 연구비 지원, 현장 조사를 위한 프로젝트 지원, 특강 및 심포지엄, 조경학 전공 학생을 위한 서머 인턴십, 새롭게 시작되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설치예술 작업 지원 등이 있다.
이유직은 부산대학교에서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군 기지 캠프 하야리아를 공원화하는 작업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활동했으며,경남 거창군 창조 도시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 만들기와 농촌 조경에 관심을 두고 현장에서 지역재생과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조경학적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
광기의 시대, 지혜의 정원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서양 정원에 대한 이야기는 으레 이상 경관, 혹은 낙원에 대한 관념을 표출하는 장소로서의 정원으로 시작한다. 에덴동산Garden of Eden, 혹은 ‘아가’서에서 등장한 상징적 정원 등을 언급하며 이러한 정원을 구현하기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정원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원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할 때마다 일종의 도피처가 되었고, 동경과 상상, 적극적 실천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의 정원’이라고 하면 수도원 정원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를 테지만 16세기 후반 프랑스에 살던한 프로테스탄트가 꿈꾼 ‘피난처로서의 정원’도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 갈등과 국내외 전쟁, 경제 위기로 전 유럽이 어려움을 겪어 ‘철의 세기Iron Century’라고 평가되는 이 시기, 수십 년간 종교전쟁(1562~98)이 벌어진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극에 달했다(‘여왕 마고La Reine Margot’에서 수만 명의 개신교도가 학살당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장면의 예를 보자). 제1차 종교전쟁이 끝난 직후 한시적 평화의 시대 어느 날,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라는 위그노(프랑스의 칼뱅파 교도)도공이자, 저술가, 측량가, 유리 화공, 그로토 제작인이 보르도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자유의 몸이 되어 가족과 교우들이 있는 생트Saintes로 돌아온 그는 강변을 거닐다가 소녀들이 ‘시편’ 104장에 곡을 붙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조물주의 신성한 힘을 발견하고 이를 찬미하는 성경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종교 박해를 피할 수 있는 도피처로서의 정원을 구상했고 이를 저서에 상세히 남겼다.
『르세트 베리타블』
팔리시는 1563년 출판한 『르세트 베리타블Recepte véritable(진정한 처방)』1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정원 설계와 배치를 이야기했다. 그는 헌정문에서 “모든 프랑스인의 재산과 덕행을 늘리고자 이 책에 포함된 여러 비밀을 드러내어” 그를 석방시키는데 힘을 써준 모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2에게 보은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혔는데, “하느님이 나에게 기꺼이 나누어준 달란트를 땅속에 숨겨두고 싶지 않다”고 하는 대목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관이 나타난다. 즉 자연에 나타난 신의 신비를 해석하고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본 것이다. 제도화된 교회를 지배하던 엄격한 위계질서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칼뱅파에 속한 위그노의 독실한 교인이던 그는 자신의 작업 방식과 사고방식이 신의 창조적인 성격과 교감할 진정한 통로를 재현한다고 보았다. 팔리시는 자신을 “그리스인도, 히브리인도, 시인도, 수사학자도 아닌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장인”이라고 지칭하고 지식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책을 썼다. 이론적 학문보다 실천적 지식을 중시하는 그의 근대적 태도가 드러난다.
지상 낙원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없을 매우 아름다운 정원
팔리시는 “지상 낙원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없을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다”며 정원의 최고의 특징이 아름다움임을 언명한다. 이는 식재보다는 대상지와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카비네cabinets’라고 부르는 구조물을 통해 나타난다. 그가 이상적이라고 본 ‘즐거움의 정원’에서는 실용성보다는 미적 요소가 강조되며 이는 신의 피조물에 대한 찬미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즐거움은 세속적인 즐거움이 아니고 성경 말씀에 따라 다시 만들어진 근원적 순수함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르세트 베리타블』은 그의 이상적 정원에 대해 같은 구절을 반복하며 장황할 만큼 설명하고 있지만 삽화가 전혀 없어 이해에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그가 묘사한 정원은 산이나 높은 은둔지 아래의 평야에 위치한다. 북쪽과 서쪽은 바람을 막아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으로 위요되어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정원을 가로지르며 정원 곳곳에 있는 분수에 물을 댄다. 그는 이런 안락한 곳을 발견하면 “이제껏 사람들이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는 아주 창의적인 정원을 설계하여 구성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시편’ 104장을 토대로 정원을 조성해 사람들이 정원에서 그 말씀을 겸손히 묵상하며 신이 만든 모든 경이로움을 예찬하기를 꿈꿨다.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을 보는 일에 관심이 많고, 관련된 책몇 권을 함께 쓰고 옮겼다.
-
고산 윤선도의 『금쇄동기』와 걷기의 정원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금쇄동기』 이해
『금쇄동기金鎖洞記』는 고산 윤선도가 55세 때 지은 산문이다. 그가 조영한 여러 정원1 가운데 하나인 해남의 금쇄동을 발견하여 정원으로 만들어 즐긴 지 1년 만에 그곳의 풍광과 의미, 그리고 주요 경물에 대해 기술한 수필 형식의 기록이다. 정원에 관한 기록, 특히 작정자가 서술한 정원 관련 기록이 많지 않은 한국 조경사에서 『금쇄동기』는 의미 있는 사료라 할 만하다. 한국 최고의 정원가라 할 수 있는2 고산 자신이 만들어 즐긴 정원에 대해 직접 기술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3에서 조경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평생을 정치적 역경 속에 살았던 윤선도가 인간적 슬픔과 정치적 쓰라림을 잇달아 겪은 후 마침내 집안일과 제사를 큰 아들에게 맡기고 산속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 것은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보길도에 원림을 조영한 지 불과 2년 만에 수정동을 새롭게 찾아내어 본격적으로 산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보길도 부용동이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오가기가 수월치 않았던 터라 해남 종가에서 가까운 곳에 원림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법하다.4 처음 그가 찾아 들어간 곳은 호남의 명산이라 불리던 병풍산 자락의 작은 계곡 수정동이었다. 그 직후 병풍산 너머 계곡에 문소동을 찾아 자신의 원림 영역을 확장했다가 우연히 맞은편 산 정상부에 있는 금쇄동을 발견하게 된다. 금쇄동金鎖洞(자물쇠가 잠긴 아름다운 궤짝처럼 생긴 곳)이라는 이름은 정상부가 오목하면서 찾아 오르기 힘든 지형적 특성에 무관한 바는 아니지만, 그 곳을 발견하기 며칠 전에 금궤를 발견하는 꿈을 꾼 사실에 직접적으로 연유되었다. 처음 수정동으로 들어간 지 1년 만에 우연히 금쇄동을 발견하여 정원을 만들었고, 다시 1년 후에 그간의 감회를 적은 것이 『금쇄동기』이다. 발견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감회가 여전했을 만큼 금쇄동은 고산에게 각별한 곳이었던 것이다. 수정동이나 문소동에 비해 경치가 빼어나고 규모도 커서 금쇄동을 찾아 낸 이후로고산은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5 『금쇄동기』는 하늘이 준 비처秘處에서 발견한 자연 경물과 몇동의 건물,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길로 정원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고서 쓴 금쇄동 원림 준공기라 할 수 있다. 6
걷기를 전제로 한 정원:
수정동, 문소동, 금쇄동
걷기란 경관 속에서 몸을 이동시키는 일이다. 걷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나고 풍경을 감상한다. 단어로 글을 써나가듯 우리는 걸음을 통해 공간을 읽는다.7 걷기를 건축의 한 형태로8 간주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간이 삶을 경험하고 주위 환경과의 관계를 규정하는것도 걷기를 통해서이며,9 정원에서도 걷기는 감상을 위한 기본 요건이다.10 걷지 않고 탐방할 수 있는 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존 딕슨 헌트John Dixon Hunt의 말은11 정원에서 걷기의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특별히 걷기가 중시된 정원은 자연형 정원이다. 자연식 정원은 그 안에 “숨겨진 경이를 발로 찾아가 발견해 내기를 기다리는”12 정원이다. 비록 길들여진 곳이기는 하나 경이롭고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정원에 대한 정의는13 이를 잘 설명해준다. 걷기를 통해 주위 자연 경물이나 부단히 변화하는 무언가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자칫 시각에 의존하기 쉬운 정원에서의 감상을 한층 심화시킬 수 있게 된다.
온 몸을 동원한 걷기를 통해 우리는 시각적 감각 세계 이상과 조우14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수간에 조성된 조선 선비들의 원림에서는 대개 자연 산지 속에 있던 경물이나 자연계의 현상이 감상의 주요소이다. 원래 있던 자연 경물과 현상을 걸어 다니며 발견해내어 정원의 주요소로 편입시키고 걷기를 통해 심미적 만남을 즐기고자 한 것이다.
하루 동안 여덟 개의 산책로를 찾아낸 니체처럼15 고산도 수정동을 중심으로 주변 산길을 두루 찾아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고산이 수정동을 찾아 들어간 그 해에 문소동을, 그리고 그 다음 해에 금쇄동을 찾아내고 정원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 개연성을 잘 드러내 준다. 정원 내의 주요 지점과 경물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지까지 두루 찾아 즐긴 것이다. 그가 수정동-문소동-금쇄동으로 자신의 정원을 확장시켜나간 것도 알고 보면 걷기를 통해 새로운 적지를 발견해낸 결과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의 매일 이 정원들을 오가며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쇄동에서 각각 1리(400m)와 5리(2km) 밖에 안 되는 거리인 문소동과 수정동은 반나절 사이에도 오갈 수 있어 거의 매일 오가며 즐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점에서 수정동, 문소동, 그리고 금쇄동은 걷기에 의한, 걷기를 위한 정원이라 할 만하다. 산지라는 지형 조건은 걷기를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 정원의 주요 시설을 산꼭대기에 배치한 금쇄동은 산을 오르지 않고는 볼 수조차 없다. 구태여 산꼭대기에 자신의 거처와 정원을 마련한 것은 그곳의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매일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으니 풍광의 대가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다. 어쩌면 위태롭고 험난한 산길을 올라야만 비로소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쇄동은 더욱 각별한 곳일 수도 있다.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공부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조경설계 실무를 하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및 생태디자인, 환경설계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대전세계박람회장, 인사동길,국립중앙박물관, 신라호텔 전정, 선유도공원, 용산공원, 순천국제정원박람회장 등의 작품과, 『한국의 전통생태학』(2004, 공저), 『LAnD: 조경·미학·디자인』(2006, 공저),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2007, 공저), 『고산 윤선도 원림을 읽다』(2010), 『Historical Studies of Geomancy inKorea』(Cambridge University Press, 근간, 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
동아시아 정원 문화와 『작정기』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작정기作庭記』는 일본어 발음대로 표기한 ‘사쿠테이키sakuteiki’로 서양의 정원 관련 서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영어와 불어 같은 서양의 주류 언어로 이미 많이 번역되어 보급되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통틀어 정원 만들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책이고 일본의 정원 문화가 서구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작정기』는 저작 연도와 저자 이름, 그리고 책 제목도 없는 두루마리 형태의 비전서로 전해진 책이다. 에도 시대에 고전 총서群書類從를 편찬할 때 포함되어 목판으로 출판되면서 『작정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저작 연도는 헤이안 시대(794~1192) 후기인 11세기, 저자는 궁궐의 건축과 수리를 담당하는 수리대부를 역임했던 다치바나노 도시쓰나橘俊綱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정기』는 헤이안 시대 건축 양식인 신덴즈쿠리(침전조寢殿造: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귀족 주택 양식) 건물에 조성한 정원 양식을 다루고 있으나, 이후 일본 정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전통 정원 작정가들에게는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에는 『작정기』 외에도 『산수병야형도山水竝野形圖』, 『축산정조전築山庭造傳』 등 작정서가 많은데,1 중국의 경우 『작정기』보다 500년 이상 뒤인 명대에 『원야園冶』가 저술된 외에 별다른 전문 작정서가 없는 것에 비하면 매우 특별한 현상이다. 『원야』조차도 중국에서는 사본이 사라지고 일본에서 『탈천공奪天工』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되다가 300여년 뒤 중국에 역수입되어 복간되었다.2
특수한 한일 관계 탓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의 정원문화, 그리고 고전인 『작정기』에 대해서도 연구가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도래한 작정가 노자공路子工이 일본에 수미산과 오교吳橋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는 기록을 보거나3 헤이죠쿄(평성경平城京, 나라) 동원東院 정원의 연못이 경주의 안압지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본의 정원 문화가 결코 한국의 그것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작정기』에 나타난 작정법에서 일본적 특수성을 찾기보다는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보편성을 찾고자 하였다. 고대 중국으로부터 형성되어 한국과 일본으로 퍼진 동아시아 정원 문화의 DNA를 『작정기』라는 고대 문헌을 통해서 찾아보고자하는 것이다. 즉, 『작정기』라는 옛 문헌은 동아시아의 고대 정원 문화를 엿보는 창인 것이다. 중국학자짱스칭张十庆도 『작정기』가 “일본 내지 동아시아 조원사에서 초기 조원의 가장 중요하고도 진귀한 문헌”이라고 하고, “일본 초기 조원 기술 전문 서적인 『작정기』는 …
중국 원림사에 중요한 보충을 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4 그는 중국에서 잃어버린 옛 정원 문화를 『작정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고대 중국에서 예禮를 잃어버리면 주변의 변방국에서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와 관련시킨다.
동아시아 정원사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갖는 『작정기』에 대해 이 글에서는 먼저 『작정기』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본 후, 『작정기』의 내용을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작정 원리와 연관시켜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한다. 동아시아 정원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산수론(산수미학)과 풍수론이 그러한 해석의 중심이 될것이다.
『작정기』의 이해
『작정기』 원본으로 여겨지는 다니무라谷村본은 두 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고 장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문자는 한문이 아니라 한자가 섞여 있는 옛 일본어 가나로 쓰여 있다. 원문에 나와 있는 소제목과 내용을 기준으로 학자에 따라 8장에서 14장까지 장을 구분하고 있지만 내용 자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나누어도 제목과 관련 없는 내용이 조금씩 포함될 수밖에 없다. 11장으로 나누는 경우가 가장 많은데, 폭포와 관련된 부분(폭포를 만드는 법, 떨어지는 모양)을 둘로 나누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하나로 합쳐서 10개의 장으로 나누는 방식이 간명하고 알기 쉽다고 생각한다.
『작정기』는 전체가 793행으로 되어 있고 글자 수는 14,000자 정도다. 장별로 할애된 분량을 보면 7장 금기와 5장 계류에 대한 기술이 가장 많은 편인데, 이 부분은 특히 풍수와 관련이 많다. 동양 정원의 요소는 대개 산, 물, 돌, 나무, 건축물 등으로 볼 수 있는데, 『작정기』는 주로 돌과 물을 다루고 있으며 나무나 식재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다.
1장 작정의 요지 『작정기』 1장에는 정원을 만들 때 심득해야 할 요지가 세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첫째는 장소의 특성에 따르면서 자연 풍경을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 둘째는 과거 명인들의 뛰어난 작품을 본받으며 의뢰자(집주인)의 뜻과 아울러 작정자 자신의 취향을 따르라는 것, 셋째는 실제 자연의 명소를 참고하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현장에 맞게 잘 해석하여 정원을 조성하라는 것이다. 이 작정의 요지는 『작정기』의 정신을 대표하며 오늘날의 조경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김승윤은 1957년 전남 장흥군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했고, 198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입사하여 30년째 근무 중이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청년원 지도 교수, 문화과장, 과학커뮤니케이션팀장, 기획홍보실장, 정책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브릿지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2002년 명동 유네스코회관 옥상생태공원 ‘작은누리’ 조성을 주관하면서 정원과 조경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늦깎이로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 과정에 진학, 10년 만에 정원학의 고전인 작정기(사쿠테이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지속가능발전의 전략과 실행』, 역서로 『예술과 과학』, 『사쿠테이키: 일본 정원의 미학』 등이 있다.
-
계성의 『원야』로 본 중국 정원의 가치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들어가며
오늘날 우리가 중국 현지에서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사가 원림은 대체로 근세 후기, 즉 명·청조에 조성된 것이고 1960~1970년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80년대부터 대거 복원한 결과들이다. 시대의 한정, 가치의 변질, 원형 복원의 문제 등 여러 논란거리가 있는 강남 사가 원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상에 중국 전근대 원림으로 새겨져 있는 이유는 여럿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유적이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원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기록물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기록 가운데 특히 원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이론서는 원림의 가치를 재현하고 계승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성計成의 『원야園冶』는 중국 정원의 가치를 존재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로, 앞으로도 중국 원림의 정형적 형태를 끊임없이 복제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는 자산이다.
『원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김성우·안대회가 번역본을 소개하면서부터다. 건축과 한학을 전공한 두 학자는 『원야』에 조원의 기술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이념적이거나 미학적인 내용도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1 이후 『원야』는 황기원, 이유직 등에 의해 조경학계에서 연구되었다. 이들은 조경계획과 설계의 입장에서 『원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피상적으로 이해되어 온 중국 원림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다.2 『원야』의 주요 조원 기술인 차경 이론을 바탕으로 우리 전통 조경을 연구한 성과도 있다.3 그밖에 미학계와 미술학계도 『원야』를 종종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었다.4 조경학계 외의 다양한 분야가 『원야』를 주목하는 것은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폭넓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중국 원림이 다양한 분야와 함께 발전해 온 융합적 대상임을 말해준다.
이론과 실천의 상호 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원야』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중국 원림의 쟁점은 두 가지다. 첫째, 자연 재현의 문제다. 계성은 원림 설계의 궁극적 목표를 자연에 두었다. 다음에서는 자연을 원림에 재현함에 있어 중요하게 생각한 바를 알아본다. 둘째, 차경借景으로 본 시정화의詩情畵意의 문제다. 다음에서는 계성이 경관을 다루는 이면에 있는 문학과 회화의 유사성을 살핀다.
자연의 근본을 이해하고
그 요소를 원림에 적절하게 구성하라
『원야』는 크게 ‘원림 조성의 시작 말[興造論]’과 ‘원림에 대한 견해[園說]’로 구성되어 있다. ‘원설’은 다시 ‘터 살피기’부터 ‘터 조성’, ‘옥우’, ‘장절’, ‘난간’, ‘문창’, ‘담장’, ‘포장’, ‘가산 쌓기’, ‘돌 고르기’, ‘차경’까지 모두 11항목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모든 지침을 따르는 자는 주자主者, 즉 원림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자이다.
계성은 글의 서론격인 ‘흥조론’에서, 원림을 조성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因과 차借에 뛰어나야 하고 체體와 의宜가 정교해야 한다”고 했다.5 이는 곧 대지의 환경 조건에 원림을 부합할 수 있는 기술[因]과 경관을 빌리는 기술[借]에 뛰어나고 대상의 본질을 다루는 것[體]과 이들을 구성하는 바의 적절함[宜]이 정교해야 한다는 말이다. 원림에서 인, 차, 체, 의 네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경관을 빌리는 것은 환경 조건에 의지하여 이루어지고 외경의 본질은 경관을 빌리는 차경을 통해 얻어진다.6 그리고 외경의 본질들이 원림 안에서 적절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계성은 인의 궁극적 상태를 ‘정교하게 어울려 딱 들어맞는 것[精而合宜]’이라 하고 차의 궁극적인 상태를 ‘교묘하게 체를 얻는 것[巧而得體]’이라 하였으니, 결국 원림 조성의 정수는 ‘체’와 ‘의’로 얘기할 수 있다.
‘체’에는 여러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 부합하는 뜻은 감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본성, 혹은 본질이다. 계성의 말을 다시 정리하면, 원림의 주자는 사물의 본성을 정교하게 다뤄야 하고 차경으로부터 체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원야』에서는 ‘체’ 자체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그렇다면 체는 무엇인가? 계성의 체는 당말 오대 화가였던 형호가 말하는 회화의 ‘참됨[眞]’으로부터 비롯된다.
박희성은 서울대학교에서 ‘당·송대 산수원림’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원림, 경계 없는 자연』이 있으며, 전근대 동아시아 도성과 원림, 근대기 동아시아 각국 조경의 영향 관계를 관심 있게 살피고 있다. 현재는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아시아의 수도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 한양도성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 작업에도 참여 중이다.
-
우리 시대의 정원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우리 시대의 정원
요즘 ‘정원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말들을 한다. 시대가 다시 정원을 원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최근에 읽은 어느 정원 책에서 그런 취지로 쓴 듯이 보이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언제부터인가 다시 정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정원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공공의 장소에 정원의 성장과정을 적용한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이 가득했던 정원의 시대에서 공공성이 강조된 조경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직접 가꾸는 즐거움, 즉 정원의 정체성을 잊고 살았다. 18세기 이후 역사의 주인공이 지배층에서 시민계급으로 점차 바뀌게 되면서 사적인 정원에 대한 관심은 공적인 공간을 다루는 공원으로 옮겨갔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제도와 공공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었던 정원이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도, 조경을 태동시켰던 정원이 점차 주변부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도 그 즈음부터였을 것이다.”1
정원이 화두가 되고 있는 이즈음 너도나도 ‘정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 정원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정원의 논의에서 제일 먼저 챙겨봐야 할 것은 그간의 정원 관련 연구와 실무를 종합적으로 점검해 보는 일이다. 시각에 따라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혹은 성과가 미미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정원의 시대를 맞으면 되겠지만, 후자의 경우로 지난 세월 동안 정원의 성과가 별반 없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간 정원 관련 업적을 손에 꼽히는 대로 요약해보면 해외에 조성된 한국 정원들, 간간이 잡지에 소개된 정원들, 그리고 학회지에 실린 정원 관련 연구 논문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학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해외 단체 답사에서 이루어졌던 정원 답사까지 포함하더라도 정원 관련 일 거의 모두가 전통 정원의 범주에 들고 현대 정원에 관한 실적은 거의 전무하다 싶을 만큼 미미했다.
따라서 정원학의 새로운 지평을 논의하는 일이 전통정원 연구를 보다 지속적으로 전개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정원학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일 수 있다. 혹은 그간 못해온 현대정원을 시작하자는 취지의 암중모색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어느 경우든 정원학의 가능성 논의에는 현재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정원에 관한 관심사가 그 중심에 놓여있다. 만일 그 의견에 공감한다면 우리에게는 현재 사회적으로 널리 일기시작한 ‘정원’에 관한 담론이 필요하다. 과연 그 정원은 어떤 정원일까?
전통 정원과 현대 정원
세계의 정원, 역사적 개관
고대부터 전개되어 온 정원의 역사를 짚어보면 세계의 정원이 언제 어떻게 꽃피웠고 어떤 사회적 인식과 함께 전개되어갔는지 그 내력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앞서 잠시 인용했던 글은 정원의 역사를 일괄하며 사회적으로 정원이 가지고 있던 가치와 기능의 부침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동시에 조경학의 태동 배경을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즉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보자면 정원과 공원(조경)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에 관한 사회적 경향에 따라 서로 상반된 관계에서 전개되었다.
고대 정원 이래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정원은 사회적 요인에 따라 전개되었다. 1970년대, 우리 사회에 조경학이 태동한 것도 어떤 필연적인 사회적 요인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원학을 사회적 요인과의 관계에서 논의해봐야 할지 모른다.
세계 정원의 역사는 몇 단계의 전개 과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원초적으로 보자면 정원은 외부의 거친환경에 대응해 내부(생활 공간)에 순치된 환경을 만들어 온 결과물이었다. 특히 고대 사회의 정원이 그랬을 것이다. 이 단계를 나쁜 자연 가운데 좋은 자연을 만들어 간 단계, 간략히 줄여서 ‘좋은 자연’의 단계라고 해보자. 이후 중세 사회로 접어들면서 문화적 특징에 의해 종교적 색채가 더해진 이슬람, 기독교, 동아시아의 각 문화권별 정원이 형성되었던 때는 ‘상징 공간화’의 단계라고 명명해 볼 수 있다. 이슬람 정원, 동아시아 정원들은 최근까지 그들의 특성을 그대로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그들과는 달리 기독교 문화권의 유럽에서는 근대 이래로 다변화된 사회 구조의 부침에 따라 정원이 여러 양식으로 변화무쌍하게 전개되어 왔다. 상징적 공간화에 더해진 다른 결정 요인이 결부된 양상일 텐데, 르네상스-절대왕권 시대-시민사회 시대등 정치 체제나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특징에 주목하여 이를 ‘사회적 요인’의 단계라고 명명해 보면 어떨까 싶다.
정기호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교육학과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독일 하노버 대학교에서 건축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정원 답사수첩』(공저, 2008), 『유럽, 정원을 거닐다』(공저, 2013), 『경관, 공간에 남은 삶의 흔적』(2014) 등이 있고, 최근에는 유럽의 유명 문인과 예술가들의 개인정원을 다루는 글을 구상하고 있다.
-
정원학의 오래된 미래
작년 4월, 본지는 ‘다시, 정원을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집을 내보냈다. 가히 정원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정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던 때였다. 당시 특집은 그러한 사회 각 분야의 정원을 향한 애정에 대해 “이러한 들썩임은 정원 문화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에게 서양에서 태동한 ‘정원’ 문화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버전의 ‘자연’ 상품화일까?” 그리고 “트렌드라는 미명 하에 별다른 반성 없이 소비되기 시작하고 있는 동시대의 정원과 그 문화를 다시 독해할 필요가 있다. 정원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가 정원을 요청하고 있는 현상의 이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정원의 귀환’을 몇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고, 정원의 정체성을 다시 새겨보고, 인접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정원에 관한 단상을 묻고, 그간 출간되었던 정원 관련 서적들을 순례했다.
이번 특집 역시 이러한 화두의 연장선상에서 준비되었다. 2014년 12월 5일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산하 정원학연구센터(센터장 조경진)는 ‘정원학의 새로운 지평’이란 제목으로 제2회 정원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정원을 단순히 ‘현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학술적 관점에서 국내 정원 이론 연구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는 여러 발제가 있었다. 이번 호 특집은 심포지엄의 여러 원고 중 특히 ‘이론’에 초점을 맞춘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해 보고자 마련했다. 동서양의 고전적 정원 이론의 비교를 통해 우리 정원학 연구의 좌표를 가늠해보고 그 폭과 깊이를 넓히고 두텁게 하는 데 기여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1. 우리 시대의 정원 _ 정기호
2. 계성의 『원야』로 본 중국 정원의 가치 _ 박희성
3. 동아시아 정원 문화와 『작정기』 _ 김승윤
4. 고산 윤선도의 『금쇄동기』와 걷기의 정원 _ 성종상
5. 광기의 시대, 지혜의 정원: 베르나르 팔리시의 『르세트 베리타블』 _ 황주영
6. 미국 덤바턴 오크스의 정원 연구 지원 활동과 성과 _ 이유직
- 김정은, 조한결 / 2015년01월 / 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