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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회사들이 사는 법 ; 시장다각화, 세계를 무대로
    좁아지는 국내시장 DDA협정의 타결에 따라 건축설계 시장개방이 불가피한 실정이니 미디어에서나 보던 ‘개방’에 대한 압박은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셈이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이러한 국내 건축설계시장의 침체나 긴장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시장개방도 되기 전에 이미 외국 스타건축가 모셔오기 열풍이 불고 있는 우스운 양상이다. 미술관, 대학캠퍼스를 비롯해 백화점, 명품관 등을 건설하거나 리모델링하는 클라이언트들은 차별화를 운운하며 외국 건축가들을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쉴새없이 불러들이고 있고 마치 그들의 건축물은 국내 건축가들의 그것과는 격이 다른 듯 홍보매체와 손잡고 대선전을 하고 있다. 시행초기부터 주목받았던 삼성미술관 리움은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쿨하스 등 세 유명 건축가의 참여만으로 이미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했고, 그 외에도 강남 교보센터, 아이파크타워 등 서울 곳곳에 외국 건축가의 이름을 건 건축물이 들어섰다. 이곳저곳에서 외국 유명 건축가들의 계획이 진행중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국제 설계공모전도 쉽게 눈에 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생각하며 벌어지는 작금의 행태인지는 시행주체만이 알겠지만 ‘대한민국이 세계건축가들의 'mock up site'로 전락하는 느낌’이라는 한 건축가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싶다. 어쨌든 시장개방이 되기 전임에도 외국의 기술자들이 국내로 쉽게 유입되고 있는 실정이니 시장개방과 함께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실정이 우리와는 거리가 먼 건축계의 이야기로만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P설계사무소 소장은 “해외의 유명건축가들과 함께 외국의 조경설계사무소들도 이미 국내에 발을 들여 놓았고, 아시아권 시장에 물밑작업을 하고 자리잡기 위해 준비중인 외국조경회사들도 이미 다수”라는 얘기와 함께 이제 시장개방이 다른 분야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마치 부와 명예의 인증인 것 마냥 외국 기술자들의 이름을 높게 사고 있는, 뭔가 특별하게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기를 바라는 클라이언트들의 경우 비슷한 금액을 조건으로 한 외국 설계가들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혹 새로운 건축문화를 선도해 보겠다든가 혹은 새로운 시도로 무언가 사회에 공헌한 듯한 업적을 남기겠다해도 역시나 나쁘지 않은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적극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는 외국 설계사가 있다면 당연히 귀 기울일 수 있고, 유명 건축가가 추천하는 조경디자이너가 있다 해도 솔깃하긴 마찬가지다. 국내 조경시장은 어떠한가. 이미 굵직굵직한 대형 프로젝트들은 대형 설계사무소 몇 개가 섭렵하고 있고 나머지 소규모 프로젝트들에 수많은 설계사무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막연한 추측일지는 몰라도 외국 설계사가 밀려들어오며, 국내 대형 설계사로, 그리고…. 이러한 도미노식의 움직임이 생기게 된다면 국내시장은 자국이라는 이유만으로 결코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이 못할 것이며, 절대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부는 무분별한 외국 기술자들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몇가지 방책을 내놓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떠한 방책도 점차 좁아지는 국내 시장에서 직접적인 자구력을 갖는 것보다 힘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이 회사들이 사는 법 ; 기술력이 경쟁력이다
    기술력, 경쟁력의 기본이자 때론 전부인 것 조경시공이나 시설물, 자재 생산업체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크게 세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생산공정의 효율화 등을 통해서 품질은 동일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둘째는 가격은 고가이더라도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세번째는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존 제품에 비해 월등한 고품질의 제품이나 새로운 성능을 가진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인데, 디자인과 기술력은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기 어렵다. 때문에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적지 않은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에 초첨을 맞추거나,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방법 이외에 인맥을 활용한 제품 판매 루트를 개척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1995년,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은 구미 공장에서 15만대의 휴대폰을 불태웠다. 통화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가 500억원이 넘는 휴대폰을 태우고,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삼성전자의 애니콜은 `세계 1류'라는 명성을 얻었다. 기술력이 최우선이라는 이 사장의 지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올 상반기 세계 휴대폰시장에서 최고의 히트작은 삼성전자의 블루블랙폰이다. 국내에서는 `문근영폰'으로 더 잘 알려진 블루블랙폰은 출시 8개월만인 이달 중순 누적판매 500만대를 돌파했다. …중략… 블루블랙폰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삼성전자가 구축해온 뛰어난 기술력이다. 디자인과 이미지가 소비자와 시장에 따라 개인차가 있는 반면, 기술력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한국 휴대폰의 경쟁력은, 상-기술력의 승리”, 디지털타임스, 박건형 기자, 2005. 7. 21 그렇지만, 인용한 기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기술력은 변하지 않는 경쟁력의 원천이다. 디자인은 주관적인데 반해, 기술력은 객관적이라는 말은 기술력이 시장에서 얼마만큼 경쟁 우위를 담보해주는 요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앞에서 가격 경쟁력 있는 제품을 통해 판로를 모색한다는 말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공정의 효율화를 통해 제품의 단가를 낮추기 보다는 저가 출혈 경쟁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나 신생 업체들은 밑지고라도 일단 수주믈량을 확보해야 회사가 운영되는 실정이다보니, 업체의 난립에 따른 저가경쟁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품질 보다 저렴한 가격을 선호하는 일부 발주처의 판단 역시 은연중에 저가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인데, 저가 경쟁이 계속되다보면 회사의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표나지 않게 품질을 낮추는 회사도 발생할 수 있어, 조경시설물 및 자재 시장이 저가 경쟁에만 놓여 있어서는 답보상태를 면할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나 퍼골라나 벤치와 같은 조경시설물은 국내 제품에 비해 품질은 손색이 없는데 가격은 현격하게 저렴한 중국 완제품이 속속 밀려들어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더군다나 저가 경쟁은 대안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중략)업역의 다각화와 브랜드 파워 지난 2005년 11월 8일 열린 제7회 환경기술상 시상식에서 (주)아썸의 권오병 대표이사는 ‘생태계 복원과 수질개선을 위한 인공식물섬 조성기술’로 환경기반기술부문 환경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 기술은 아썸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10억 여원의 개발비용을 투자하여 개발한 것으로, 조경을 기반으로 한 회사가 수질 분야에 도전해 결실을 맺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아썸은 본사와 별도로 분리된 전담 인력이 상주하는 부설 호소생태연구소를 운영, 지금까지 연구에 투입된 비용만 28억원에 이르며,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자문위원들(16명)을 기반으로 강원대 환경연구소와 건국대 호소생태연구실, 경원대 산업환경연구실, 서울대 농업토목연구실 등과 공동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이곳에서 실행하고 있는 연구의 성과는 신기술 외에도 발명특허 10건, 실용신안 8건 등 특허신청 진행 중인 것까지 포함하면 총 30여개에 다다른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다른 부설 연구소들 중에 아썸의 연구소보다 더 많은 실적을 낸 경우도 있겠지만, 굳이 아썸을 예로 든 것은 간략히 전술한 바와 같이, 조경을 기반으로 수질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한림에코텍의 환경토목연구소 역시 애초에는 하천환경연구소로 출발했는데, 2004년 9월 친환경하천제품에 대한 연구개발과 함께 ‘환경친화적 토목’분야를 포함시키기 위해 명칭을 환경토목연구소로 변경, 현재는 자연형 하천과 친환경 조경 소재 이외에 환경친화적 토목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개발의 시대에서 환경의 시대로 변화하는 와중에서 토목분야는 변화의 압력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가 되고 있다. …중략… 지금까지 구조적 안정만이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토목 재료들에 ‘환경성’, 생물의 생육이 가능한 기능을 부여하면서 새롭게 부가가치 창출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 「조경 ‘업’의 부가 가치」, 김용규, 『우리 시대의 조경 속으로』, (주)서울포럼, p.233 이처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단순히 기존에 있던 공법과 제품의 기술력 증진에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복합화” 혹은 새로운 기능 적용을 꾀해본다면,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장 개척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조경의 블루오션 전략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청계천 복원 ; 나는 청계고가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만들어낸 하나의 시詩가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짙은 어둠의 그늘이 사라지고 시원하게 열린 서울의 하늘과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그리고 어느 정도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이루어진 사업의 추진력, 청계천 사업을 통해 주변 재개발계획의 당위성 확보와 이를 통한 부의 확대 재생산과 수직적 거대도시를 향한 욕망의 실현 따위가 우선 거칠게 보이는 청계천 개발의 가시적인 성과일 것이다. 거기다 정치적인 입지의 확보까지 얘기하지 하지 않더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서울시민들에게 행복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개인적으로 2002년 5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일년 조금 넘게 웹에서 청계천을 주제로 열린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우리에게 청계천은 과연 무엇인지, 청계천을 개발한다고 했을 때 접근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궁극으로 청계천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무슨 꿈을 꿀 수 있는지를 놓고 온라인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때 작업 중에 썼던 몇 편의 글 속에 청계천 개발에 대한 준거의 단초를 놓아 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한 확신은 유보적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 준거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하려 한다.지금 청계천사업 전반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 되었던 상충된 의견들이 있었지만 의견은 수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철저하게 일방적인 절차로 진행되었다. 시민참여를 위한 행사나 공청회가 요식행위였음은 결과가 말해주지 않나. 여기서 과정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청계천 개발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성과 잠재된 가능성,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 청계천변이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과 합의는 이 프로젝트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한 새로운 전범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꼴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배려와 땅에 대한 신중함,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되는 사업이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원형에 대한 합의, 개발에 따른 명확한 준거들이 먼저 정립되어야 했다. 여기서 문제는 대략 세 가지로 드러나고 이것이 청계천개발사업을 바라보는 하나의 준거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스스로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세 개의 준거準據시간 - 역사적 층위가 공존하다서울의 사대문 안이 그러하지만 특히 청계천은 다층의 시간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다. 그 시간은 단지 고고학적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이 현재 시간의 한 유형으로 공존하며, 새로운 시간을 꿈꾸는 서로 다른 시간의 주기가 얽혀 있는 곳이다. 무형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시간이 그렇고, 존재하는 도시 기반시설의 물리적 구성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청계천 개발에서 무엇보다 고려되어야 할 것은 획일적인 어느 시간의 적용이 아니라 다층의 시간 구조를 존중하면서 그리고 또 그 각각의 시간이 가진 서로 다른 시간 주기의 섞임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되어야 했다. 삶 - 그들이 아니라 이들이 문제다청계천 복개와 함께 오늘날의 상권으로 자리를 잡는데 꼬박 삼십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이전에 무허가 난민촌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지만 청계천을 따라 일정한 수요와 공급 그리고 판매가 순차로 일어나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기까지 청계천의 사람들은 개발론자들이 공란으로 남겨두었던 내용을 채워나가면서 스스로 삶의 모형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삶이 각각의 공간에서 톱니처럼 이루어져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무슨 근거에선지 여전히 낡고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삶의 모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 계획가와 설계가, 개발론자들에게 있었다. 청계천의 삶을 흐트러트릴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상 - 꿈 또는 전망을 놓다지상에서 가장 긴 공중가로정원을 생각했었다. 느릿느릿 흐르다보면 사대문 안 동쪽 끝과 서쪽 끝을 나지막한 건물과 산이 둘러싸고 그 길 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보는 꿈을 꿨다. 거대 도시 안에 지구 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공간을 관조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계단을 내려가면 나도 거기 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억지로 역류해서 다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끊어졌던 주변의 천을 하나, 둘, 다시 살려내서 그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다. 백운동천, 삼청동천, 계생동천, 북영천 ... 하면서. 어항 속의 수초가 아니라 살아있는 개천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다시 물길을 만들어 순환하는 자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청계천은 기존의 서울을 증폭시키는 거대한 꿈의 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특정인의 팍팍한 꿈이 아니라 만인의 넉넉한 미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더디고 더디지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봤다. 이 시대에서 조경을 하는게 부끄럽다. 이 수 학 Yi, Soo Hag 아뜰리에나무 소장
  • 청계천 복원 ; 청계천 속으로_1공구
    태평로 입구 청계천 복원 시점부 청계마당에서 모전교, 광통교, 광교, 장통교, 삼일교, 수표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가 있는 예지동까지의 2.0km 구간으로 도시형 하천, 역사와 문화가 있는 하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 1.5km의 복개구조물과 2.2km의 고가구조물을 철거하였다.총 9개의 교량(차도교 6, 보도교 3)과 7개의 진입계단과 2개의 진입경사로가 설치되었고, 1개의 세월교와 9개소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주요시설청계광장 : 청계천 시점부인 태평로 입구에서 첫 교량인 모전교 부근까지 길이 160m, 너비 50m, 2,100여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700여평 규모의 청계마당은 검은색, 붉은색의 화강석을 이용해 한국 전통보자기 형태로 조성하고 한 켠에는 실제 물이 흐르는 청계미니어처를 제작했다. 시작점에는 2단 프로그램분수를 설치하였고, 분수의 수반에서 4m 아래의 청계천으로 떨어지게 된다. 폭포 앞부분부터 모전교까지 이어지는 물가에는 만남과 화합,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전국 8도의 돌이 깔렸다. 경기도를 상징하는 일돌선, 충청도의 천안석, 전라도의 고흥석, 제주의 제주석과 독도석 등이 반입 설치되었으며, 각 석재들은 호안 좌우측에 국토의 서측과 동측을 형상화하며 장식되었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청계천 복원 ; 청계천 복원 후 교통문제, 우려할 바 아니다
    불행하게도 아름다웠던 청계천은 이미 천이 아니었다. 도대체 사람의 천은 찾을 수 없었다. 청계천이 6.25이후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고, 쓰레기와 오물이 마구 버려지는 오염된 천으로 변하게 되었다. 도시의 얼굴인 도심하천과 그 주변 환경이 불량해지자 서울시에서는 빈민촌도 정비하고 도시의 교통문제도 해결한다는 의도에서 청계천 복개공사를 계획하였다. 청계천복개공사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공사로 청계천은 하천에서 하수로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근사했던 천변이 가장 흉한 길로 변했다. 이 천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가려진 채 오랫동안 썩은 물만 내려가고 있었다.청계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도로를 건설했지만, 늘어나는 교통량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안이 검토된 후에 청계천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이 고가도로 공사는 1967년에 시작이 되어 무려 13년이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고가도로건설로 인해 도심의 교통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지상도로와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주상복합건물, 종합상가, 공구상 등이 들어서면서 인근 지역은 빈민촌에서 거대상권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청계천복원으로 이제 서울의 600년 역사성이 회복되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지난 40년 동안 강북의 경제를 이끌어 왔던 청계천지역이기에 교통량도 하루 17만대 이상의 차량이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다. 이는 시간당으로 따질 때 약 1만5천대의 차량으로 엄청난 교통량이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복원공사 중 이 많은 차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서울시와 시민들의 관심과 걱정거리였었다. 서울시는 수시로 청계천복원공사 중에 시민들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시가 내 놓았던 청계천 복원공사 중 교통종합대책은 크게 4가지였었다. 그 내용은 첫째, 도심 및 진입도로의 소통능력향상, 둘째, 도심유입 교통량의 분산, 셋째, 대중교통 이용편의 개선을 통한 승용차 통행수요 전환, 넷째, 승용차 이용 수요관리 및 시민참여이었다. 도심 및 진입도로의 소통능력향상대책에는 하청로에 중앙버스차로를 도입하고, 마장로에 가변차선제를 운영하고, 청계천로 시점부, 종점부와 대학로, 창경궁로, 사근동길 일부구간에 일방통행제를 도입하는 안이 포함되었었다. 그러나 가변차로제와 일부구간의 일방통행제는 시간제약으로 인해 사전준비가 미흡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청계천 복원공사 시작 후 초기에 청계천 일대에는 하루 종일 교통 혼잡이 발생했었다.두 번째 대책인 도심유입 교통량의 분산, 우회처리 대책은 일부 실효성이 있었다. 이 대책의 핵심은 동북부지역과 동남부지역의 주요 간선도로들에 대한 우회노선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예로서 두무개길 및 성동교 남단 우회도로 개설은 부분적으로 도심 진입차량을 우회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도심 진입 전 주요 분기점에서 도로전광표지를 이용하여 우회안내 정보를 실시간으로 운전자에게 제공하는 정책도 차량우회에 기여하였다.세 번째 대책인 대중교통 이용편의 개선을 통한 승용차 통행수요전환은 버스노선체계를 개편하고, 청계천주변 운행버스노선을 임시 조정하는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버스정책은 서울시가 ‘버스혁명’이라는 기치 속에서 버스노선개편과 서비스개선을 획기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도심체증완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아울러 도심 진입 지하철의 러시아워 혼잡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동차를 추가 편성하고, 심야 지하철 운행시간을 연장하는 등의 정책 역시 큰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패키지의 결과로 종전에 승용차를 이용하던 일부 통행자들이 버스와 지하철로 바꿔 타고 도심으로 들어오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네 번째의 승용차 이용 수요 관리 및 시민참여는 도심주차관리와 교통대책 홍보가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 대책 중에 도심주차관리의 효과는 미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도심 진입 시 승용차이용을 억제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는 시민운동전개는 실효성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 중에 교통대란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심에 자동차를 몰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계고가 6차로 청계천로 8차로 등 모두 14개차로가 없어진 청계천주변에 차를 몰고 도심에 들어가면 극심한 교통체증을 감수해야 한다는 우려에서 승용차를 포기한 시민들이 예상외로 많았다는 점이다. 시민의 자발적인 승용차 이용억제와 대중교통으로의 전환이 도심교통정체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시민정신이 청계천복원 공사 중의 도심혼잡을 사전에 방지하는 초석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경험으로 볼 때 청계천 복원 후에도 도심에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나 정체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이를 통해서 볼 때 청계천 복원 자체가 시민들이 새로운 삶과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는 배움과 실천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 모두가 삶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생명의 공간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원 제 무 Won, Jaimu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
  • 청계천 복원 ; 청계천 복원사업에는 문화유산 복원사업이 없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사업명을 보면 개천을 복원하여 고도(古都)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敬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의 다리유적이나 개천의 호안석축을 모두 파괴하고 홍수에 대비한 통수로 설치 사업 같은 것이었다.청계천은 태종 11년(1411) 구거(溝渠)를 개착하기 위해 개거도감(開渠都監)이란 관청을 만들어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역부 52,800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개울 정비 사업을 하였다. 그 뒤 영조36년(1760)에는 준천소를 설치하고 한성부와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인력을 동원, 관원 157명, 역군 215,380명(준천소좌목)이 57일간 개천 정비 사업을 하였다. 영조 49년(1773)에는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보수하였는데 금위영, 어영청, 훈련원의 군사들이 2개월간 작업하였다.영조는 친히 왕세손(후에 정조)을 데리고 광통교에 나와서 석축완성을 살피고 이 일을 주관한 당상관과 금위영, 어영청의 대장에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책임자에게 말을 하사 하였다. 영조가 친히 준천현장에 나온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준천친림관역도(濬川親臨觀役圖)도 있다.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은 준천가(濬川歌)를 짓기도 했다. 준천가 구절 속에 “땅에 있는 맑은 위수(渭水) 장안을 관통하여 쉬지 않고 흐르네, 열두 무지개다리 맑은 하늘에 솟아있고 삼영(三營)에서 쌓은 석축 흐트러짐이 없네, 맑은 물결 찰랑거리고 수양버들 그늘지네.” 이 준천가는 영조시대 청계천의 경관을 말해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준천사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에는 모두 개천(開天)으로 표기되어 있다. 청계천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16년(매일신문)부터 보인다. 청계천은 이와 같이 서울의 상징적 도시 유적인데 복원사업은 하천법의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수표석이 보물 제838호이고 수표교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므로 수표석의 기단과 수표교의 기초석이 청계천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를 받아야 했다. 청계천 복원설계는 발굴조사를 선행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복원설계를 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청계천은 조선왕도의 도시하천이면서 유물이 많이 매장 되어있을 습지이므로 조선시대 동전이나 자기편, 목기편 등 생활용기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도시계획의 토목기술사를 조사 연구하여야 할 중요한 유적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포기하고 통수로 공사를 먼저 발주하여 진행시켰다.청계천복원공사의 과정을 보자.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 철거시작, 2003년 9월 30일부터 12월 10일 까지 유적의 시굴조사, 2003년 12월 11일부터 2004년 7월 1일 까지 180일간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광통교지, 수표교지, 하랑교지, 효경교지, 오간수문지, 호안석축을 대상으로 하였다. 발굴조사는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담당하여 퇴적층조사와 지정말목의 수종조사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광통교는 해체공사에 입회하여 조사한 것이었다. 발굴결과 통수로 설계는 발굴된 유적을 완전히 무시한 설계이므로 유적을 보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시민단체는 2004년 3월 5일 유적보존을 위해 시장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3월 6일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지역 10m 이내는 통수로 공사를 중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9일 문화재청은 광통교와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중요문화재로 가지정하였다.1월 12일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 및 교지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의 문화재 현상변경에 대하여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심의를 받아 시행하게 하였다. 2004년 4월 16일 문화재사적분과위원회는 수표교와 오간수문은 원위치에 복원하고 광통교는 상류로 이전하여 복원하게 의결하였다. 2005년 1월 21일 시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와 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을 사적으로 지정키로 의결 하였다. 호안석축 1단을 저수로 바닥 원위치에 복원하게 하였다. 저수로 변의 조잡한 파석의 산석 쌓기는 전통양식이 아니므로 발굴된 호안 유적의 양식대로 안전감과 접근성이 좋은 평축 축대로 쌓도록 요청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004년 3월 18일 서울 시장님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왜식조경을 고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필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왕도의 역사적 다리들과 하천의 경관을 옛 대로 보존하면서 홍수대비 설계를 왜 할 수 없을까? 저수로는 회돌이 치는 소(沼)와 담(潭)도 있고 달빛 부서지는 월하탄도 있는 생태하천으로 여름밤에 반딧불이가 펄펄 날아다니는 개울이 보고 싶다.파리나 런던, 경도(京都)에 가면 역사가 축적된 도시유적이 존경스럽다. 서울은 역사 없애기 경쟁을 하는 천박한 일회용 도시 같다. 고궁(古宮)이 없었으면 삭막할 뻔 했다.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이다. 전통문화의 역사적 파괴가 새로운 발전인양 정당화 하는 의식이 문제이다. 문화는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나를 부정한 곳에 민족문화의 창조는 없다. 일제가 조선 문화는 후진적인 것이기에 버리라고 교육한 기능주의가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수표교와 오간수문이 제자리에 복원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정 재 훈 Jeong, Jae Hoon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 청계천 복원 ; 청계천복원에 있어서 조경분야의 시행착오와 개선방향
    청계천복원공사는 잘 알다시피 턴키공사로 발주되어 설계,시공되고 있다. 입찰공고에서 제시된 기본계획의 방향을 기초로 작성한 기본설계의 심사결과에 따라 실시설계 적격자로 선정된 시공업체가 주관이 되어 설계를 수행, 시공까지 전담하는 시스템이다. 일괄책임, 최적대안선정, 신기술개발 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복원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느끼는 턴키시스템은 책임설계시공과는 거리가 다소 먼 느낌이다. 설계의 중간보고과정에 수없이 반복?지적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최종 제출된 설계도서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시공업체 또한 사전준비소홀로 적기시공이 안되는 것은 물론 재시공이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그 결과 준공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시공품질에 대한 개선여지가 많아 아쉬움으로 남는다.일반적으로 공사의 품질을 좌우하는 요인으로는 경영요인(경영자의 관심, 시공업체의 경영상태, 본사의 현장지원 등), 공급요인(자재공급, 노무인력공급, 자재품질 등), 공사일반요인(공사기간, 공사금액, 낙찰율, 하도급선정 등), 공사인력요인(감독관, 감리원, 도급자 및 하도급자의 현장직원, 시공인부 등), 현장요인(시공조건, 선행공정과의 협조, 기상조건 등), 품질관리규정요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시공품질이라 함은 결국 이들 요인의 종합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청계천복원현장에서 경험한 조경분야의 설계, 시공, 감리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가감없이 정리하여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설계분야조경공사의 시공품질도 여타 건설공사와 마찬가지로 설계, 시공, 관리 등의 질적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시공 이전단계에 이루어지는 시공방법이나 시공재료를 결정짓는 설계도면과 이의 세부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공사시방서가 시공품질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시공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환경공간에 대한 1)장소적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2)기초공학과 자연 및 환경인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3)경험과 기술력을 겸비하지 못한 설계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물론 시공품질이 설계도면이나 공사시방서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적 현장 대처능력에 의존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친화적 공간연출을 위한 과학적이고 전문화된 치밀한 계획 및 설계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시공과정에 있어서 실시설계의 부분적 보완(설계변경)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공종의 주요부분에 오류가 발생해서는 곤란하다. 가로수 수형과 식재지반조성청계천복원구간에는 상가측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650여주, 천변에 이팝나무 1,500여주가 설계되어 있다. 가로수는 청계천의 가로경관을 좌우하는 핵심요소이므로 청계천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인식했더라면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해서 좀더 고민했어야 했다. 먼저, 수형기준의 제시가 미흡하다. 물론 수형의 규격화, 계량화가 곤란한 점은 인정하나, 판단에 있어 주관성을 배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공사시방서에 제시되어야 한다. 이팝나무의 경우 가로수로서의 기본적인 수형확보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일반적 기준인 수고와 근원직경만 제시하였다. 이들 기준만으로는 실질적인 수목품질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주관성의 개입여지가 많고, 같은 규격이라도 품질차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발주처가 원하는 수준의 상품으로 현장에 반입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설계자가 공사시방서를 작성할 때에 시공품질의 수준을 고려한 정확한 기준제시를 해야 한다.그리고, 도심구간에는 각종 지장물들이 지하에 매설되어 있기 때문에 식재지반조성을 위하여 외곽지역보다 더 철저하게 지하매설물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몇 그루 정도의 부분적인 변경정도야 이해할 수 있지만 각종 지장물 등으로 인해 20~30%가 식재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가로경관계획의 전반적인 설계개념이 왜곡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식재를 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생육이 곤란하다.한편, 현장여건을 충분히 고려한 공법적용이 미흡하다. 그 적용에 있어서는 사전 충분한 기술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단순하게 기능이나 디자인의 우수성만을 고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변의 이팝나무가로수는 대부분이 인공지반인 복개슬래브 밑의 컨테이너박스에 식재하도록 설계하였는데, 요즘 장애인단체 등으로부터 원성이 높은 것처럼 보도폭이 좁기 때문에(사실 이팝나무 식재지는 보도가 아닌 유지관리 또는 유사시 안전을 위한 임시공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주변지역의 재개발이 추진되면 현재의 차도측으로 폭이 확장될 계획이다) 보행과 도심구간의 가로경관을 고려하여 지주목을 지중의 당김줄 형식으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식재박스의 지반이 인공토양의 성토지역이기 때문에 충분한 지반침하를 고려해야 하고, 차량통행이 빈번한 인공구조물의 차도변은 진동 또한 고려대상이다. 시공과정에 이러한 문제점이 도출되어 설계를 변경하여 일반적인 지상노출 지주목으로 시공하였다.또한, 설계재료에 대한 수급관계를 충분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팝나무는 식생에 있어서 청계천복원의 대표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다. 선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설계에 반영하고자 했을 때는 전국의 이팝나무 재배현황과 수형실태에 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지고, 수급이 가능하다면 목표로 하는 수형의 기준을 도면과 공사시방서에 제시해야 한다. 수경시설청계천복원구간에는 하천의 유지용수를 이용한 벽천, 분수 등 다양한 수경관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기계와 역학을 기초로 하는 분수의 경우에는 조경설계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분수전문회사에 설계를 전담시키고 있는 것이 업계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분수설계도 엄연히 조경설계의 구성요소이므로 도면이나 공사시방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설령 분수설계자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설계에 관한 최종책임은 조경설계자에게 있는 것이므로 전문이 아닐수록 더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먼저 배관설계에 있어 바이패스관의 누락이다. 기계수리나 청소 등을 위한 일시적인 가동중단의 경우에도 청계천의 특성상 저수로의 유지용수는 계속해서 공급해야 하는데 이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그리고 저수로상의 고사분수나 벽천의 워터스크린의 경우에는 시공을 할 수 있는 상세도면이 미비했다. 펌프실의 위치표시도 없고 시공깊이 등 구체적인 제원표시도 누락되어 있다. 또한 조감도와 도면의 상이처리, 하천분수의 노즐 보호벽체 누락, 수조 상세시공도 누락 등전반적인 보완이 필요하였다.설계가 미비한 원인은 전기,기계시설이 혼합된 수경시설설계의 경우 분수설계자에게 전담시킨 결과, 처음부터 설계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내용을 검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책임기술자가 설계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경력이 짧은 조경기사에게 설계검토를 맡기고 책임기술자는 형식적인 검토만 했기 때문이다. 이 용 태 Lee, Yong Tae 서울특별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 공사3담당관(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청계천 복원 ; 청계천 속으로_3공구
    청계8가 황학교부터 마장동 신답철교까지의 1.74km 구간이며 자연형 하천의 모습을 담아낸 청계천의 하류부이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하천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생태계를 복원하고 환경친화적으로 조성했다. 특히 보존된 삼일고가의 옛 기둥이 포함된 경관으로 과거 청계고가의 흔적을 남겨 특징적인 경관을 만들어냈다. 황학교, 비우당교, 무학교, 두물다리, 고산자교 등 총 5개의 교량(차도교4, 보도교1)을 포함하며, 진입계단 5개소, 진입경사로 4개소(유지관리용 2개소)와 3곳의 세월교, 징검다리 3개소가 놓여있다. 복개구조물1.7km와 고가구조물 1.6km를 철거했다.주요시설소망의 벽 : 황학동 근처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는 소망의 벽이 설치되었다. 계천 복원사업에 국민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기획된 소망의 벽은 2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가로, 세로 10cm의 도자기질 타일에 청계천의 추억이나 각자의 소망을 담아낸 것으로 50m 길이로 양안에 설치되어 있다.황학리듬벽천과 수변무대 : 황학리듬벽천은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의 고수벽면에 높이 5m, 폭 20m의 대리석 벽천으로 리듬폭포처럼 유지용수를 흐르도록 한 수경시설이다. 하부에는 폭 1m, 길이20m의 수조가 설치되어 있으며 벽에는 검은 돌로 물고기가 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저수변에는 목재데크를 설치하여 친수공간으로 조성했다.존치교각 및 비우당 터널분수 : 청계고가도고의 교각 중 교각 3개를 철거하지 않고 남겨둔 것으로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으며 청계천 복원공사가 하나의 역사가 되듯 청계고가 역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그 흔적은 역사의 산물이 된다. 비우당 터널분수는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의 성북천 합류지점 우안에 있으며, 벽에 있는 42개의 노즐에서 물을 뿜어 포물선으로 산책로 위를 넘어 하천에 떨어뜨리는 시설로, 높이 5m, 폭 50m(16m정도 거리로 분사됨)이다. 비우당 터널분수에서 바라보이는 존치교각은 색다른 경관을 제공하고 있으며 야간에는 다양한 색상의 LED조명이 터널분수와 존치교각, 산책로를 장식한다. .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청계천 복원 ; 청계천개발사업과 시민사회의 대응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복원사업을 핵심정책으로 내걸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을 펼쳤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은 복원을 빙자한 청계천개발사업이었다. 그것은 문화와 환경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하는 신개발주의의 전형적 예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문화재 보존론의 대변자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명박 시장의 신개발주의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말았다.2002년 봄에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복원 공약을 들고 나왔을 때,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그것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명박은 대표적인 개발업자로서 그의 청계천복원 공약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대의 요청을 시민사회가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후자 쪽이 중심이 되어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에 대응하게 되었다.이명박 시장도 시민사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시민의 광범한 동의를 얻고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시민사회의 참여는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각체제’로 청계천복원사업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를 구성해서 복원의 내용에 관한 심의를 받고, 그에 따라 청계천복원추진본부가 사업을 진행하도록 하며, 이를 위해 청계천복원연구지원단이 연구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시민단체의 대표, 학계 전문가, 서울시의원, 서울시 공무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까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말 그대로 ‘시민위원회’는 아니었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의 논의와 결정은 애초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서울시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를 다분히 형식적으로 운영했다. 이에 항의해서 최열 당시 환경운동연합 대표는 ‘청계천복원사업은 결코 올바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시민단체의 대표들과 사명감을 갖고 참여한 일부 학계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2003년 2월에 기본계획에 대한 심의가 끝나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대해 서울시는 거의 ‘능멸’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 2003년 9월의 서울시의회에서 일어났다. 양윤재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이 심재옥 민주노동당 시의원의 질문에 대한 공식답변에서 멀리 속초까지 기본설계를 심의하러 간 시민위원들을 가리켜 ‘온천에 목욕이나 하러 간 사람들’이라고 망언을 했던 것이다.2004년 2월에 서울시는 실시설계의 심의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심의를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3월에는 역사문화분과장이었던 김영주 선생과 간사위원이었던 홍성태를 비롯해서 시민단체의 대표들이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 본부장을 문화재파괴 및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지검에 형사고발했다. 이 사건은 아직도 계류된 상태이다. 이어서 5월에는 권숙표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위원장이 항의사퇴했으며, 이와 함께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의 실시설계에 대한 심의거부와 여러 지적을 무시하고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개발사업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결국 2004년 9월 16일에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한 시민단체의 대표들과 사명감을 지니고 참여한 일부 학계 전문가들은 9월 18일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두 항의사퇴했다. 이로써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명박 시장은 ‘삼각체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시민사회는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올바른 청계천복원을 위한 시민연대’(청계천연대)라는 연대체를 만들어서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개발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청계천연대는 시청앞에서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어 청계천개발사업의 문제를 지적했고,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을 중심으로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의 방향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서울시의 잘못된 행정에 대처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서울시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울을 지역으로 여기는 시민운동과 여러 시민운동들 사이의 굳건한 연대가 대단히 중요하다.시민사회는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 청계천복원사업은 결국 청계천개발사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바로잡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이명박 시장의 잘못을 기록하고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시민사회의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고 양윤재 본부장을 부시장에 임명해서 엄청난 청계천지역재개발 부패사건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홍 성 태 Hong Seong Tae 상지대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 청계천 복원 ; 하천 복원 해외 사례
    「물의 도시 오사카」 도톤보리천(道頓堀川)의 수변정비 사업일본 오사카는 예부터 수운문화가 발달하였다. 도심지 운송수단의 일환으로 1615년 인공적으로 조성한 하천이 도톤보리천이다, 도톱보리천은 오사카를 대표하는 하천으로 미나미 남쪽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 2.7km, 폭 28~50m의 운하형 하천이다.동쪽지역에는 신사이바시를 대표하는 상업지역의 중심쇼핑몰에 아케이트 거리가 위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 있으며 주변에는 상가, 술집 등이 즐비한 번화가로서 서울의 청계천과 남대문·명동을 연상하게 한다.수변정비 이전에는 하천제방이 콘크리트 옹벽으로 이것은 홍수방지턱과 하천접근을 할 수 없도록 만든 시설이 되었고 남북횡단의 16개의 교량에서만 하천을 바라볼 수 있다.이러한 하천을 친수성 하천으로 복원한다는 목표로 1990년 오사카시청 하천위 원회가 수변정비를 제안하여, 물의 도시 오사카를 재창조하는 야심찬 20년 장기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하고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동안 총 240억엔(2400억원)을 예산을 균등하게 연차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개발의 방향도 운하형 하천인 관계로 친수적 수변공원 이용에 목표를 두고 있으며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프랑스 세느강 유람선을 모델 삼아 작은 유람선도 운행할 계획이다.최근 부분적으로 준공된 데라스형 수변데크조성 소재는 대부분 목재를 이용하였으며 다자인과 시공면에서 매우 섬세한 보습을 보여주고 있다.청계천복원과 비교한다면 청계천은 사람과 자연이 공존, 보전과 이용의 조화에 배경을 둔 환경생태적 복원이였다면 도톱보리는 수변공원화, 친수접근성, 하천이용의 활성화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조 오 영 Jo, Oh Young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조경팀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