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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림은 거들 뿐
변방의 설계가
서울이 아닌 경기도 부천에 사무실이 있다. 공동 주택 조경보다 도시공원 및 녹지를 주로 설계한다. 신규 대형 공원 설계보다 중소형 공원을 리모델링하는 일이 많다. 녹지 정비에 관한 설계도 한다. 공원 설계공모에 참여하고 싶은데 참여 조건도 못 맞추고 기회도 별로 없다. 종종 건축 설계공모에 포함되는 조경 공간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다. 조경에 대한 심사나 배점도 없으니 적당히 하려 한다. 정원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원이 유행하면서 공공 정원 일이 많아졌다. 민간 정원은 가급적이면 클라이언트 본인의 취향대로 직접 가꾸기를 권한다. 정원 설계부터 시공까지 책임지는 디자인 빌드(design-build)를 추구한다. 설계만으론 먹고살기 힘들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운영이나 전시 기획에도 이따금씩 관여한다.
그들이 설계해 준다, 우리가 설계하는 법
어떤 발주처 담당자가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멋진 이미지를 들이민다. 순발력을 발휘해 이 그림 같은 설계를 실현할 수 없는 이유를 풀어 놓지만, 결국 되는 이유나 당위성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몫이다. 어떤 자문위원 혹은 심의위원이 당연한 말을 시작으로 이상한 결론을 내준다. 정면 반박은 일을 복잡하게 만드니 당연한 말을 시작으로 최소한으로 수정하며 ‘부분 반영’이라는 결론을 낼 방안이 있는지 머리를 굴린다. 어떤 건축가가 조경 공간에 대한 계획을 그려온다.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워도 선부터 다듬어줘야 한다. 처음엔 식재 수종에 관한 전문성만 요구하지만 건물 밖에 해당하는 부대 토목, 설비, 조명 일체를 다 우리가 해결하길 바라는 눈치다. 외주 설계비가 머릿속에서 맴돌고 “그런 건 우리도 잘 몰라요” 해도 잘 안 믿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아”라는 듯한 대화가 오간다.
그래도 대부분 일의 시작엔 설렘이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빨리 끝내고 싶다며 내려놓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디자이너에서 무욕의 엔지니어로 전환하는 기분이다. 우리의 디자인이나 아이디어가 ‘까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네 글자로 압축하면 ‘실력 부족’이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자책하는 절대적 기준에서다.
그럼에도 좋은 발주처, 좋은 파트너, 좋은 설계비, 가슴 뛰는 대상지는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마주할 때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을 나열하고자 한다. 정해진 법칙 같은 것은 없다. 그때그때 다르다. 정리하려니 뭔가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아 자신감이 하락하고 있다. 내가 가진 디자인 철학은 ‘쉽고 명쾌하게’. 일단 쉽게 가보기로 한다.
오래, 자주, 샅샅이 보기
어떤 대상을 마주하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계는 현황
분석과 문제점 도출이다. 대상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
나 유행도 분석 요소가 된다. 의뢰인의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설계가로서 마주한 상황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간의 정원박람회나 공공 정원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전략은 후자에 가깝다.
정원 만들기에 관한 고민은 예산에서 시작되고 예산 때문에
끝난다. 부족한 예산에 대처할 해결책을 현장에서 찾기도
한다. 나름대로 호평을 받은 서울숲 ‘엄마의 정원’(『환경과조경』
2017년 8월호 참조)은 서울숲에 방치된 자재들을 새롭게 활용한 정원이다. 2015 대한민국 한평정원 디자인전에서는 체재비와 경비로 사용하기에도 빠듯한 조성비가 업사이클링 가든이라는 콘셉트를 도출시켰다.
일련의 디자인빌드 경험을 통해 얻은 쓸모에 관한 관심은 설
계 화두로 이어졌다. 현장에서 존재감 없는 무언가가 새로운
공간에서 어떻게 가치를 드러내게 할지 고민한다. 물론 프로젝트의 경제성은 기술 심의나 계약 심사 단계에서 알아서
끌어올려지지만 설계자의 입장에서는 자재 변경, 물량 축소,
감액보다는 기존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장소 고유의 가치 발견이라는 덤까지 취할 수 있는 설계를 지향한다.
2018 경기정원문화박람회에 조성한 ‘길 위의 상상 그리고
작은 발견’ 역시 오래, 자주, 샅샅이 보고 얻은 아이디어의
총합이다. 우리가 흔히 지나다니는 골목길, 정원의 오브제,
대상지의 장점에 주목했다.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낡은 포장재와 버내큘러(vernacular) 디자인이 엿보이는, 투박한 시설이 즐비한 정원을 떠올렸다. 주변 지인들에게 각종 건설 현
장에서 나온 여분 자재를 받아 사용했고, 길을 다양한 재료로 구성해 구간마다 다른 느낌을 주었다. 정원 이름에서 표
현했듯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상상과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곳곳에 숨긴 작은 금속 조형물은 당시 여덟 살이던 아들이 그린 낙서 같은 그림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다.
정원의 오브제가 꼭 거대하거나 값비싸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감 가는 그림과 형상이 정원의 맛을 살
렸다. 대상지는 내가 살던 집에서 가까웠는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거의 모든 시간대의 대상지를 경험한 것이
식재 방향성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상지는 바닥에 이
끼가 무성하며 햇볕이 언뜻언뜻 내리쬐는 반음지였다. 해가
넘어감에 따라 음지에서 양지로, 양지에서 음지로 바뀌는 모습이 변화무쌍했다. 기존의 느티나무들은 그대로 두고, 해의
움직임에 따라 정원에 드리우는 나무 그늘과 빛의 변화를
빠르게 느끼도록 유도했다.
쓸모에 대한 고민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도시공원은 서울숲이다. 구성과
계획이 훌륭하고 설계 디테일은 아직도 실무에서 참고하고
있다. 민간 위탁 운영(서울숲컨서번시)을 통한 남다른 활성화 방식은 공간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는 요인이다. 하지만 조성된
지 약 1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숲에도 훼손되거나
잘 활용되지 못하는 공간이 생겨났다. 이러한 공간을 기업
사회 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재활성화하는 공공 정원 프로젝트에 몇 년 전부터 참여했다.
‘설렘정원’(2019)의 대상지는 방문자 센터에서 진입할 때 바로
만나게 되는 공간이었다. 마사토 포장의 원형 마당은 푸르
른 녹음과 꽃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듯 했다. 서울숲에서는 야외 웨딩 촬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
는데, 서울숲컨서번시와 함께 이 공간의 활성화를 고민하던
중 스몰웨딩이라는 트렌드에 착안해 웨딩가든을 콘셉트로
잡았다(임대 공간으로 오해할 수 있어 시민 공모를 통해 설렘정원이라는 이
름을 새로 붙였다). 빈 곳이라도 공간을 작동시키는 테마가 개입
하는 상상을 할 때 그곳이 장소가 되는 기대감이 생긴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되려면 테마에 따른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공간이 조성되는 중에도 서울숲컨서번시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고민했고, 매년 리마인드 웨딩이나 기념 명판 설치 등의 이벤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벤
트 참여를 위해 사람들이 보내 온 사연도 인상적이지만 정
원에서의 결혼식은 그들의 기억 속에 깊게 남을 것이라 믿는
다. 풍경적 요소에 더해 장면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 작업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숲 속 쉼터인 ‘겨울정원’(2020~2021) 역시
다른 공간에 비해 이용률이 낮은 곳이었다. 왕성한 관목들로
둘러싸여 하절기엔 어두울 정도였고 동절기엔 마른 가지들이 무성했다. 관목을 이식하고 간벌을 통해 공간을 밝혔으며
서울숲컨서번시와의 워크숍을 통해 겨울에도 즐길 수 있는
풍경을 만들기로 했다. 이 정원에서 봄부터 가을은 겨울을
상상하게 하는 시간이다. 겨울에 보는 정원의 모습을 열 가지로 추리고 올해 두 가지를 더해 완성했다. 숲 속 쉼터라는
기본적 기능에 겨울 정원이라는 아이템이 더해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제목 혹은 이름 짓기
대상지에서 파악한 여러 요소엔 장소를 구상하는 힌트가 들어 있다. 프로젝트의 화두일 수 있고,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일 수도 있으며 정제되지 않은 콘셉트나 희
망하는 장소성을 내포한 명칭일 수 있다. 머릿속을 떠다니
는 단어를 조합하거나 하나를 선택해 공간의 이름을 짓는다. 설계 초반부터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고심 끝에 탄생한 제목 혹은 이름은 디자인의 일관성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이름만으로 공간이 풍기는 이미지가 생겨 설계 의
도를 더 쉽게 전달할 수도 있다. 아이에게 태명을 지어주고
이후 정식 이름을 짓듯 이름엔 스토리나 정체성, 바람이 담긴다. 여담이지만 이런 괴상한(?) 집착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성명학과 이름 짓기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림은 거들 뿐
제목다음은 줄거리다. 대개 일의 초반에 제안서를 작업하는
데 딱딱하게 구성하기보다는 서사를 풀어내려 한다. 시놉시스는 설계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본 매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공간의 형태를 글로 설명한다. 그래픽이 아니라도 이 정원에서 일어날 ‘장면’을 설명하면, 작업 과정에서
즉흥적 아이디어가 더해져 더 풍부한 장면을 가진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클라이언트나 협업자에게 제안할 땐 스케일이 반영된 계획도보다 사진과 글이 오히려 효과적일 때가 많다. 도면이나 그림만으로
첫 논의를 하면 중요 콘셉트나 맥락을 건너뛰고 이미지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견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설계가라면 노란 트레이싱지와 한몸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기름종이를 써본 지 오래됐다. 손에 땀과 기름이 많아서 그런
지 나랑 잘 안 맞는다. 매번 마스킹 테이프로 귀퉁이를 붙이기 귀찮기도 하다. 초안을 스케치할 때면 베이스 맵을 A3
사이즈로 여러 장 출력해 그 위에 사인펜과 볼펜으로 몇 번
그려본다(그다지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가 없는 것도 이유다). 개인적으로 손 스케치가 뛰어나지 않고 오래 앉아 있는 성격도 아니라 시놉시스를 구상하는 시간이 더 많은 듯하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보다 이동 중에 생각의 스위치를 켜놓는다. 뭔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에 수시로 적고 고친다. 그림이 편할 때도 있는데 그마저도 글로
저장한다. 이렇다 보니 부끄럽게도 이 지면에 첨부할 멋스러운 손 스케치가 없다. 이 글도 메모장 앱으로 쓰고 있다.
엔지니어링, ‘장그래’처럼
종종 실무와 관련한 강의를 요청받으면 늘 제목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다. 창의적이고 멋진 디자인이 끝이 아니고 엔지니어적 소양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실시
설계보다는 기본계획에 더 흥미를 느끼고 그런 일만 열망하
던 초년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읽게 된 『마징가Z 지하기지를
건설하라』(2005)는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의미 있고 중
요하는 걸 알게 했다. 디자인적 관점 못지않게 엔지니어링적
관점이 설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경 프로젝트는 시공을 전제로 하기에 구조, 공법, 자재 선정, 내역 등을 면밀히 살핀다. 모든 분야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기에 도입하고자 하는 새로운 것에 대
해서는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배운다. ‘버티컬 가드닝
Vertical Gardening’(돈의문박물관마을 수직정원 설계공모 당선작, 2019)
에서도 이러한 견지는 유지되었다. 일단 구상이나 계획안을
그려놓고 당선되면 실시설계를 고민하는 대신, 공모 준비 초기부터 수직정원 관련 업체, 구상하는 구조물 제작이 가능
한 시설물 업체를 만나 제출안을 마련했다. 새로운 디테일은
드라마 ‘미생’의 신입사원 장그래처럼 뭐가 뭔지 몰라도 일
단 배우며 감을 잡는다.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실패의 두려
움이 공존하지만 협업하는 엔지니어들을 믿고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시설물 업체에 읍소하고 구슬리고 닦달하며 수직
정원 구조물의 도면과 견적을 뽑았던 기억이 있다.
한편 짧은 기간이나 일방적 시각 때문에 더 좋은 시공 아이디어를 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시설계가 끝나고 시설물 업체에 회전형 플랜터에 대한 샘플 제작을 종용했다. 철
물을 담당하는 업체에서 더 좋은 구조물의 회전 방식을 제
안해 왔다. 수동식 개별 회전 방식이 아닌 체인을 이용한 동
시 회전 방식이기에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었다(시제품을 보고 탄
성을 내뱉었을 정도로 놀라웠다). 설계 변경을 하더라도 이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계약상 우리의 역할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 개선 사항은 반영되지 못했다. ‘그들이 감독하는 법’
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설계자, ‘정마담’ 혹은 ‘마카오박’
요즘 진행하는 프로젝트 상황을 지켜보니 내가 하는 일이
조경설계보다 다른 의미의 설계에 가까운 듯하다. 한동안 잠
잠하다가 마치 짠 것처럼 한 순간에 여러 프로젝트가 중구
난방으로 들어온다. 스트레스는 건강의 적이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영화 ‘타짜’의 정마담이나 ‘도둑들’의 마카오박처럼 작전을 짠다. 여기에 이걸 의뢰하고, 저기에서 견적을 받고, 넌
이걸 맡고, 넌 저걸 맡고 끝나면 저기 붙어서 도와주고…….
시공 현장에서도 스케줄을 짠다. 일 단위뿐만 아니라 시간
단위로 치밀하게 짜려고 한다. 왜 전장의 사령관이 아닌 정
마담이나 마카오박에 비유했냐면, 영화처럼 계획은 다 틀어지니까. 그럼에도 계획은 짠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순발력과 우연성
실시설계 도면은 ‘최대한 자세하고 친절하게’를 표방하지만
직접 시공을 전제로 하는 도면에는 핵심만 표기한다. 반드시
정확하게 구현해야 할 요소나 예산과 직결되는 물량은 예외지만 그 외는 현장에서 설계하기 때문이다. 경험상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변덕이나 변수는 늘 있기에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예상한대로 진행되는 편안함
보다 즉각적으로 변수에 대응하는 설계가 짜릿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공장에서 제작된 제품을 단순 배치하는게 아니라면 설계안대로 될 거란 100%의 확신이 없다. 언제나 조마조마하다. 자연물은 늘 우연성을 내포한다.현장에서 배치하니 예상한 느낌과 다른 경우도 있고 의외로 기대하지 않은
형태가 딱 들어맞을 때도 있다. 식물의 변화 역시 예상하기
어렵다. 생각보다 생육이 불량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잘 번식
하는 경우도 생긴다(식물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공부가 한참 더 필요하다). 이러한 우연성이 일을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좌절에 빠지게도 만든다. ‘도깨비와 요정들의 숲정원’(광릉숲길 어린이정원, 2021)에서 기존의 고사목 통나무와 거대한 사각 방부
목을 배치한 도면은 어디까지나 물량 산출을 위한 계획에 불과했다. 시공 작업자들이 하차 후 잠시 쉬는 동안 이리저리
좋은 각도를 봐가며 즉석에서 배치도를 다시 그렸다. 덕분에
태풍 피해로 부러진 대형 고사목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리저리 놓다 가장 좋은 각도를 찾은 고사목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경설계가로 임하는 것
사실 몇 해 전 진지하게 조경설계를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설계 용역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나름의 소명 의식을 잠식하는 상황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가 해결해주었지만) 설계 규모가 크건 작건, 작업에서 본인의 기여도가 크든 작든, 좋은 공간을 만드는 시작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조경가들이 설계할 때 갖는 마음일 것이다. 그림은 거들 뿐이라는 말
은 드로잉이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뭔가를 그리는
행위는 설계 과정에서 극히 짧게 느껴진다. 오히려 다른 과정의 총합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어떤 시간대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묵묵하게 나아가는 모든
조경가를 응원한다.
최윤석은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하고 선진엔지니어링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혀 2008년 그람디자인(gramdesign)을 설립했다. 정원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장소 만들기를 추구하는 집단 정원사친구들에서 2011년부터 활동해 오고 있다. 조경설계도 하고 정원 시공도 하며 어떠한 장소나 소재의 가치를 발견해 돋보이게 만드는 데 관심이 많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명쾌한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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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경계에서의 작업
자문과 자답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라는 주제를 내던지고 구성원들과 함께 우리는 어떻게 설계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공간을 만드는지 자문했다. 어느새 다양해진 구성원들과 주고받은 대화는 글의 탄탄한 단초가 되었다. 얼라이브어스(ALIVEUS)의 어스(US)와 우리의 작업 과정이 그러하듯, 이 글 역시 몇몇 개인의 입장이 아닌 디자인 그룹으로서의 기록이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설계를 대하는 자세와 철학, 진행상의 특이 사항, 다수의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궁극의 지향점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직 완전하게 영글지 않았고, 점차 성숙해질 여정에 놓여 있다. 큰 방향성을 풀어놓기보다는 지금까지의 과정 중에 있던 개별적 장면을 조명하고자 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되돌아본 장면들은 몇 가지의 경계선상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때론 무언의 경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방향으로, 혹은 경계선을 극단적으로 신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경계 하나, 조경과 건축 사이
얼라이브어스는 조경과 건축이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틀리에 규모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형의 설계 집단으로, 그만큼 선언적이고 실험적인 동력이 우리를 지금까지 이끌었다. 설계라는 큰 업역 내에서 ‘조경과 건축’ 혹은 ‘건축과 조경’은 항상 논의되는 화제이며, 둘 사이에 상보적 관계를 정립하는 일은 프로젝트의 완결성에 있어서 막중하다. 우리의 협업 구조는 이 관계를 본질적으로 경험하며 작업 일상에 녹아들게 한다. 창을 어디로 내고 구체를 어느 방향으로 놓을지 등의 아주 간단하지만 너무나 중요한 문제부터, 주거 단지에서 어느 부분을 입구로 상정하고 주요 건축물을 어디에 배치할지, 단지 전체에 대한 통합 계획 등 중요 골격을 논하는 일까지, 수많은 단계에서 건축과 조경이 협력한다. 전화기를 들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서로가 있어 효과적 협업이 가능하다.
‘C사 플래그십 스토어’는 조경과 건축이 사업 극초반부터 병행되었을 때 함의할 수 있는 설계적 가치를 확인한 프로젝트다. 부천의 공장 단지에 입지하기에 외부의 거친 도시로부터 공간을 닫고자 하는 조경과 건축 두 주체 간 합의로부터 출발했고, 이후 건폐율과 용적률의 문제로 접어들었다. 몇 해 전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귀국전, 2017)이라는 전시가 있었듯, 건축의 용적률은 설계 전체를 좌우하는 가능성이자 제한이다. 주어진 땅에서 건축을 덜어내야 하는 부분을 조경과 함께 고민했고, 비워둬야 하는 만큼의 대지를 건물 내부로 끌어안아 공간의 인상을 좌우하는 이색적인 조경으로 해석했다. 마치 퍼즐을 맞추듯, 반듯한 건축 매스에서 조경으로 변환할 부분을 빼내는 과정을 통해 내부와 외부가 교차하도록 했다. 건축 공간과 조경 공간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제안을 통해 조경과 건축의 업역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변수로 프로젝트를 실현하지 못해 그해 가장 아쉬운 손가락으로 남았지만 우리 팀의 작동 방식만큼은 가장 적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던 프로젝트였다.
모든 프로젝트를 얼라이브어스의 조경과 건축이 함께 수행하진 않는다. 각기 별도의 프로젝트가 있다. 조경 작업은 외
부 건축가와 함께 하는 빈도가 높아졌고, 때론 건축으로부터
자유롭기도 하다. 다른 건축 주체와 함께할 때도 건축 설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전체 프로젝트에 통합적으로 접근하
는데, 이는 조경 작업을 구체화하는 중요한 기점 중 하나다.
카타르 ‘알 투마마 스타디움(Al Thumama Stadium)’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작업 중 가장 복잡한 경계에서 움직여
야 한 프로젝트였기에 간결성을 확보하고자 건축과의 접점에 초점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카타르 전통 복식 중 하나인
가피야(Ghafiya)에서 파생된 건물 파사드는 전체 공간을 지배하는 설계 요소가 되었고, 조경 역시 그에 기인해 외부 공간
을 조직했다. 같은 형태를 차용하되 다양한 요소로 변주해
월드컵 스타디움이 담보해야 할 위상과 공간적 다채로움을
구현했다. 조경과 건축을 접붙이는 방식을 통해 제한된 시간
내에 다양한 이슈를 해결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 반대
편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실재의 장면을 기대하는 중이다.
경계 둘,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사이
협력을 통한 상승 작용을 높이고 간극에 의한 비효율성을
낮추는 방식은 파트너십이 기민하게 작동하기 위한 토대다.
발전적 근간을 구축하기 위해 개인의 성향과 능력을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얼라이브어스 조경의 두 파트너는
설계 작업에서 여러 대척점(논리와 직관, 계획과 즉흥, 내러티브와 이
미지, 공공성과 사적 소유, 구조와 심미 등)을 갖는다. 각자의 특질을
인지하고 창의적 균형점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넓은 스펙트럼과 범용적 설계 사고에 기반한 제너럴리스트, 고유의 접근 방식과 예민한 미감으로 공간의 심도를 탐
색하는 스페셜리스트.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계를 직시해 각 영역의 독자성을 신뢰하되, 경계선 위를 종횡무진 오
가는 과정에서 촉발하는 가능성과 발전적 융합을 모색한다.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에서부터 함께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고려해 주도권을 판단한다.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이 두 개의 축은 광범위한 설계 경향과 기술적 재능을 아우르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다룰 수 있게 한다. 주택 정원부터 실내 공간, 중소규모의 상업 시설, 기업 공간과 문화 공간, 대형 공원, 마스터플랜부터
시작하는 도시적 차원의 프로젝트까지 여러 작업을 해왔다.
프로젝트 유형 간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려 한다. 들어오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신생 설계사무소로서의 생존과 성장의 이력이기도 하지만, 다각화된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유형에도 치우지지 않고 변수에 대처하기 위한 운용 전략이기도 하다. 그래서 특정 설계 방법론이 생기기 쉽지 않다. 일정
한 자세를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다양한 상황과 취
향에 대응하려 한다. 그 와중에도 디자인에 대한 선호도와
일관성을 공유하고, 암묵적으로 합의한 우리의 근간을 잃지
않기 위한 틈새를 지속적으로 찾는다.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작업은 설계의 타당성에 발을 딛는 데서 출발한다. 실마리는 프로젝트의 지향점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명분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
일 수 있도록, 전달하는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반박 당할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이러한 설득 방식은 공공 프로젝트나
기업 공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대상지 등 다수의 의견
주체가 엮여 있는 작업에 용이하다. 최대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이치에 근거를 두고,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설계
작업을 일정 정도 객관화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합치된 시각을 만든다. ‘보타닉 스카이워크Botanic Skywalk’(백년다리 조성 설계공모)가 그러했다. 기울기가 도드라진 선을 통해 한강을
향한 다양한 시점을 마련하는 대안도, 하나의 선을 이원화
해 두 배의 보행 경험을 제공하는 안도 있었다. 수많은 아이디어 중 사업의 당위성에 적합한 안을 택하기로 했다. 서울
시 도시계획의 청사진 속엔 언제나 동서와 남북을 잇는 광역적 녹지축과 걷는 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한 보행축이 중
요한 기치로 자리하고 있다. 백년다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사업이기에 풍성한 식재가 어우러진 보행교로 자연과 함께 걷는 경험을 제공하고 도시가 그리는 미래의 궤도
에 부합하는 장소를 마련하려 했다.
포스코 복합 문화 공간 ‘파크1538’에서는 식재를 통해 서로
다른 공간 사이의 시퀀스를 조직했다. 500m 길이 공원의
주요 기점들이 각기 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저마다의 분위기
를 갖도록 식재 계획을 차별화하면서도, 지점들 사이 부드러운 연속성이 생기는 전이의 경관을 고민했다. 각 공간마다
상이한 지형적 특징과 공간적 성격이 단서로 작용했으며, 마주한 공간의 상황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설계를 풀어나갔다.
공원의 시작점인 수변 공간에는 물의 물성과 상응하면서도
존재감 있는 환영의 제스처를, 홍보관으로 진입하는 경사지
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넓은 초지 경관을, 하늘로 열린 옥상
테라스에는 다채로운 혼합 식재의 아름다움을, 마지막 명예의 전당에는 차분함과 무게감, 웅장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작업은 공간을 헤아리는 직관적 시야에서 시작한다. 공간의 특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즉각
적으로 적합한 분위기와 이미지를 구상한다. 장소의 물리적
형태에서 유의미한 단서를 잡아내고 추상성과 구체성을 함
께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명료하고 즉물적인 이 전략은
클라이언트의 요청과 설계가의 고유한 지향점을 접합한다.
아름다워야 하는 디자인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공감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이기에 주택 정원이나 상업 시설, 리조트, 문화 공간 등 특정 대상과 마주하는 프로젝트에서 사용한다.
‘운중동 단독주택 정원’은 주어진 공간에서 기하 형태를 추출하고 형상의 순수한 미학이 돋보이도록 구성했다. 삼각형
식재 공간을 혼합 식재로 강조하고, 맞붙은 원형 구간에 교
목을 식재해 정원의 입체감을 살리고 초점으로 삼았다. 이
두 공간이 주목 받도록 다른 요소는 최소화했다. 바닥 역시
배경으로 작용하도록 간결한 소재를 택했다. 한쪽 경계에는
바닥과 같은 소재의 앉음벽을 두어 장면을 만끽할 시간을
제공했으며, 다른 한쪽은 식재 공간으로 구성해 주변 자연에 녹아들게 했다.
‘태안 R 리조트’는 리조트 단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프
로젝트 시작부터 계획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다. 바다로의 조
망을 고려할 때 건물을 연립형과 단독형 두 가지로 구성하
는 것이 옳다고 설득하고, 이 제안에 힘을 싣고자 두 가지
유형의 리조트 외부 공간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설명했다.
연립형 두 동 사이는 광장으로 규정해 열린 경관과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일어나는 장으로 계획했다. 건축 매스의 무게
감을 덜기 위한 테라스 구간을 도입했고, 개방감을 유지하고
자 수종을 간소화했다. 캐노피가 있는 주 동선을 기준으로
좌우에 평활한 잔디와 공공의 정원을 두어 열린 공간 속에
서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다. 단독형 구간은 빌리지
형식을 빌려 정제된 스케일의 경관 속에서 개별 그룹의 사적 경험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곳곳에 식재 구간을 마련해 공간을 세분화하고 건물로 돌아 들어가는
동선을 계획해 마치 집으로 향할 때 드는 안정감과 위요감
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다. 각 유닛에 개별 정원을 마련해
개인의 공간이 지닌 의미와 요즘 시대 숙박 시설이 갖추어야
할 가치를 더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업역뿐만 아니라 설계하는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경계는 필연적이다. 발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들과 그러한 관계를 규
정하는 선 위에서의 작업은 많은 설계가가 직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다만 얼라이브어스는 이 경계를 의도적으로 품어 안
은 체계를 통해 설계적으로 가치 있는 작업을 만들고자 한
다. 선을 내포한 고유의 구조는, 특정 접근법으로부터 구애
받지 않은 다수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그룹 나름의 관점과
색을 발현시키는 기저가 되고 있다.
외연 역시 확장되고 있다. 설계라는 광의의 영역에서 언급되
는 학제 간 연계나 세대 간 콜라보레이션 등의 고차원적 개
념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거쳐 온 선상
에서의 경험들이 여러 기회가 되고 있다. 관용구로 쓰일 만
큼 너무도 유명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집 제목처럼 우리가 가진, 앞으로 가지게 될 수많은 경계에도 의미 있
는 장면들이 만발하기를 바란다.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조경, 건축에 기반한 디자이너 그룹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공간적 문맥에 대한 디자인 해법을 제시한다. 강한솔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조경을 전공했고 사사키 어소시에이츠, 토마스 바슬리 어소시에이츠, 오피스박김에서 실무를 수행했다.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환경생태와 조경을 전공했고 사사키 어소시에이츠, 파멜라 버튼 앤드 컴퍼니, 비오이엔씨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오승환은 고려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며, 한미파슨스, 현대건설, 이재하 건축사사무소 등에서 폭넓은 건축 업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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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래스호퍼로 하는 조경설계
언어의 설계
뻔한 이야기지만 알고리즘은 언어의 설계다. 양 끝단이 매듭을 맺지 못한 채 다시 만난다는 얘기다. 공학이 싫어 조경을 시작한 내가 알고리즘을 말하다니. 집단이 싫어 도망치던 내가 소속을 원하다니. 불확실함을 참을 수 없어 디지털 소년이 된 내가 언어를 말하다니. 늙은 세상은 반대로 돌아간다.
그래스호퍼를 새로운 솜사탕 만드는 도구쯤으로 생각하던 어른들도, 모든 설계 모델을 스크립트로 만드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면 꼭 막걸리에 파전만이 장날의 정석은 아니라고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맞닿아 있다.
모든 디지털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구이GUI(Graphical User Interface)’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쉽게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입출력 등의 기능을 알기 쉬운 그래픽으로 나타낸 것이다. 언어를 기호화한 것이지. 사람들은 편리를 얻는 대신 이해를 빼앗긴 거다. 등가교환의 법칙이지. 물론 모두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돌아가나. 스케치업 같은 달콤한 프로그램에 손을 대는 순간 복잡하게 살아야 할 필요는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깟 살 좀 찌고 말지 뭐.
하지만 여전히 ‘다름’을 위해 기꺼이 ‘워라밸’을 포기하는 건축계의 전사들은 창작과 이해의 자유를 위해 다시 언어로 돌아왔다. 프로그램에 종속되는 삶을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 그리고 그 적절한 능선을 바로 그래스호퍼 같은 그래픽 기반의 프로그래밍 언어(Visual Programming Language and Environment)에서 찾았을 뿐이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의 디자인엘, 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West 8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그룹을 시작했고, 이후 파라메트릭 기반의 설계를 위해 서브디비전(SUBDIVISION)을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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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곡선으로 하는 조경설계
대지 위에 물결치는 곡선 지형을 생태적 경관으로 재해석한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Hargreaves Associates)의 ‘사우스 포인트 파크(South Point Park)’, 산타모니카 시청과 해안 부두 사이를 여러 갈래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같은 동선으로 연결한 JCFO의 ‘통바 파크(Tongva Park)’, 날카로운 예각과 둥근 곡선이 이어져 마치 꽃잎을 연상시키는 West 8의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 Island)’, 곡선과 직선의 절묘한 조합으로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낸 EMBT의 ‘다이애거널 마르 파크(Diagonal Mar Park)’. 이러한 독특한 곡선들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 동선에서 시작된 곡선이 지형으로, 또 수경 시설로 바뀌는 통바 파크의 매끄러운 경관은 어떻게 생성되었을까?
단일곡선
단일곡선Simple Curve은 같은 지점을 두 번 이상 지나지 않으며, 시작점과 끝점이 다른 단순 곡선이다. 서울숲 또는 율현공원과 같은 대형 공원에서 통합적 경관의 연출을 의도하거나 분절된 필지 간 동선의 연결을 강조할 때, 공원의 골격선으로 자주 사용된다. 단일곡선은 일정한 방향으로 동선과 시선을 유도하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양측에 서로 다른 경관을 계획하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곡선 끝의 두 지점은 공원의 출입구로 쓰거나 주요한 공간과 연결되어 작동하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3년째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를 이끌고 있으며,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조제라는 필명으로 아이디어 공모전 참여, 즉흥적인 기획, 조경 야화(夜話), 전시하지 않는 그래픽 작업 등 실무와 동떨어진 취미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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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설계 스튜디오 안팎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질문들
김아연, 정욱주 대담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릴레이식 글은 『환경과조경』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연재다. 글쓴이가 여럿이니 쓰는 일의 부담이 줄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혼자서 긴 호흡으로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연재를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고 글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 두어도 쓰다 보면 예정된 길을 벗어나기 일쑤다.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던 중 불쑥 떠오른 의문에 길을 잃기도 한다. 혼자만의 판단으로는 궤도를 수정할 수 없다. 함께 달리는 파트너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 1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연재된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는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와 정욱주 교수(서울대학교)가 번갈아 쓴 릴레이 연재다. 14회에 걸쳐 설계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 스스로 묻고 답했다. 연재는 끝났지만 그들이 던져 놓은 열두 개의 화두와 그 키워드에서 비롯된 질문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김아연은 이런 바람을 밝혔다. “101은 과목의 위계상 가장 처음 배우는 ‘입문 과정’을 의미한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 201, 202. 3학년이 되면 301, 302……. 이러한 순차적 교과과목 숫자를 채택한 이유가 후속편에 대한 암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안하게도 201, 301, 401의 속편들은 설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해야 하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김아연, “에필로그: 연재를 마무리하며”,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 『환경과조경』 2010년 3월호)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가 2014년 1월부터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를 연재하며 그 논의를 이어나갔지만, 301, 401을 비롯한 속편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끊긴 이야기에 새로운 불을 붙이고자 김아연과 정욱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스튜디오 101’에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설계에 대한 질문들은 지금도 가치를 갖는가? 그에 대한 답변 역시 유효한가. 가락동의 한 식당, 테이블에 오붓하게 앉아 나눈 이야기를 이곳에 옮긴다.
연재의 시작, 조경설계 교과서의 부재
김모아(이하 모) 두 분의 인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요. 김아연(이하 아) 대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정욱주 교수는 당시 복학생이었죠.
정욱주(이하 욱) 졸업 동기는 아닌데 졸업 여행을 같이 갔어요.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다시 만났죠. 북미한인조경가회에서 창단 멤버로 모임을 자주 했어요. 아 정욱주 교수 집에서 당시 미국 유학 중인 조경학도가 다모였어요. 나는 남부에 있는 학교를 다녔는데 불러줘서 갔죠. 그렇게 가랑비 옷 젖듯 친해졌어요.
모 아무리 친하고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해도 함께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 연재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아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박사학위 없이 조경학과 설계 담당 교수가 됐어요. 상황이 비슷해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동료 의식이 생겼죠.
욱 처음에는 설계 수업에 대한 고민이 생기면 전화할 사람이 김아연 교수 딱 하나였죠. 그래서인지 후배인데도 꼭 동기처럼 느껴져요. 살짝 무서울 때도 있고(웃음). 당시 서울대와 서울시립대에 설계를 하겠다는 학생이 정말 많았어요.
당시 학생들의 실력과 열정이 뛰어났어요. 설계를 잘 해보겠다는 분위기가 평생 이어질 줄 알았죠. 그런데 건설 경기가 침체되고 조경설계업의 전망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학생들이 설계를 꺼리기 시작했죠. 정욱주 교수와 이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눴고요. 그 과정에서 설계를 교과서로 가르치고 싶지 않지만, 조경설계에 대해 정리한 텍스트가 없는 것도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마침 같은 자리에 있던 남기준 편집장이 그러면 둘이 함께 『환경과조경』에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모 그렇다면 이 연재를 조경설계 교과서는 아니지만 설계 스튜디오를 수강하는 학생들을 위한 글로 보아도 될까요?
아 정확히 말하자면, 설계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설계를 이렇게 하라는 ‘노하우’를 쓰고 싶진 않았어요. 가르치다 보면 설계 과정에서 학생들이 헤매고 힘들어 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돼요. 그런데 그 패턴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있는지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죠. 우리가 꼽은 열두 개의 키워드는 설계 과정을 해체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들이 부딪히는 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추려본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프로그램을 만들어오라고 했을 때 “프로그램이 뭔데요?”하는 식의 질문이 돌아오면 그때마다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힘들기도 했고요.
욱 김아연 교수 말처럼 설계 교육을 하다보면 매년 똑같은 걸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돼요. 가끔은 학생이 질문했을 때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깐만 생각하고 이야기해줄게”하는 경우도 생겨요. 정리된 텍스트가 있다면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모 지금은 교재로 사용하는 책이 있나요?
욱 여전히 설계 교과서는 없어요. 내가 받은 설계 교육의 수업계획서를 토대로 각색하고 매년 보완하는 게 전부에요. 우리 연재의 결과물을 정리해서 책으로 엮자는 말을 남 편집장과 했었는데…….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는 부분도 생기더라고요.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아닌 이야기도 있고요. 대대적인 수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0년이 지났네요.
아 연재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을 많이 했어요. 책을 엮으려면 최근 사례로 업데이트를 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죠. 생업이 두 개나 돼서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실무를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어요.
욱 이번 대담을 기회로 다시 연재를 읽어봤는데 낯설더라고요. 이걸 진짜 내가 썼다고?(웃음) 물론 지금도 동의하는 내용도 있는데 어떤 글은 읽으면서 이건 좀 아니지, 무슨 확신으로 이렇게 썼을까 생각하기도 했고요. 연재는 당시의 치열한 고민의 기록물이에요. 여담이지만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해요. “내 생각도 매주 변할 수 있어. 컨디션에 따라 갑자기 더 좋은 크리틱이 떠오를 수도 있고.” 사실 설계 스튜디오는 절대적 학문을 배우는 게 아니라 흐름을 익히는 시간이죠.
아 맞아요. 설계 스튜디오를 가르치는 교수는 할 말을 미리 정해두고 수업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발언에 대응하는 대화적 교수법을 쓰거든요. 매주 학생들의 설계 결과물이 달라지고 이야기가 달라지면 교수들이 그에 반응해 크리틱을 하는 거죠.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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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향하기
2014년부터 연재한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는 이제 설계의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 학생들, 1년에서 3년차 정도의 설계사무소의 초보 조경가를 독자로 상정하고 썼던 글이다. 7년이 지났다. 아마도 독자들이 조경가로 설계를 계속하고 있다면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팀장이나 실장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독립해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막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7년 전에는 선생 혹은 선배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면, 지금은 같은 동료로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글은 연재를 다시 돌아보는 글이 아니라, 그때 미처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두었던 연재의 마지막 원고일지도 모르겠다.
슬럼프인가
이 소장은 전에 없던 고민이 생겼다. 이제 설계사무소를 차린 지 이제 2년이 지났다. 우려와는 달리 젊은 감각의 신생 회사를 찾아주는 클라이언트는 많았고, 일은 금세 혼자 처리하기 벅찰 정도로 늘어났다. 좋은 파트너들을 영입했고 새로운 감각을 갖춘 신입도 들어왔다. 예상한 것보다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최근 내가 잘하고 있냐는 의구심이 자꾸 생긴다. 아마도 가장 아끼던 직원이 갑자기 사직서를 내고 퇴사를 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실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최근 야근이 많기는 했지만, 만성적으로 늘 야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돈을 많이 벌어야 할까? 아니면 직원들의 복지와 만족을 더 우선해야 할까? 고생할 것이 뻔한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면 도전해야 할까? 도대체 좋은 조경설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나는 조경을 왜 하는가?
조경학과 학생
한 대학의 조경학과에서 세 학생이 동기로 만난다. 나이도, 고향도, 생각도 달랐지만 함께 공유한 것이 있었다. 바로 지향점이었다. 처음에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의 내용과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보수적인 교수들은 새로운 변화에는 눈을 감은 채 과거의 원칙만 강조했다. 하지만 옆의 건축과에서는 혁신적인 건축가들을 교수진으로 초빙해 구시대와 결별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었다. 세 학생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새로운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들을 모여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조경은 어때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여러 차례의 실망과 좌절 끝에 그들은 깨달았다. 이 학교에서 아무도 새로운 조경에 관해 관심조차 두지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그 새로운 조경을 만들면 된다고.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조경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건축 전문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편집자들은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신선하게 받아들였고, 그 글들은 당시 저명한 건축 전문지에 실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미국 모더니즘 조경의 시작이었다. 이 삼인방은 하버드 대학교 조경학과에 같이 입학한 26살의 에크보Garrett Eckbo, 24살의 카일리Dan Kiley, 23살의 로즈James Rose였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 2014년부터 2015년까지 『환경과조경』에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를 연재했다. 연재 내용을 바탕으로 설계 방법론을 정리해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한숲, 2016)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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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겉바속촉’의 도시를 향하여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연재를 통해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를 묻고 독자들과 함께 답하고자 했다. 이 질문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좋은 도시를 꿈꾸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위험천만하다. 관행의 벽은 높고 이해관계자를 설득하기는 힘들다. 예산은 항상 부족하다. 배정한 편집주간의 말처럼 “도시의 설계와 경영은 난제”(『도시에서 도시를 찾다』 추천사)임에 틀림없다.
연재가 끝난 후 도시의 속살을 조금 더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성남시 민선 7기의 핵심 정책 사업인 ‘아시아실리콘밸리 성남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의 미래를 기획하는 데 참여했고, 총괄 코디네이터라는 낯선 옷을 입고 도시재생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동탄2신도시 문화디자인밸리’를 통해 공간 설계와 사업 실행의 간극도 느꼈다. 나아가 집값 폭등의 우려 속에서 3기 신도시 조성을 포함한 정부의 주택공급 대책 발표와 이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았고,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도시 행태 변화를 바라보며 과연 좋은 도시는 무엇인지 다시 고민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연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좀 더 꺼내고자 한다.
‘겉바속촉’의 도시
좋은 도시란 다양한 변화에 활짝 열려 있는 도시다. 비록 과거에 개발이 완료되어 구조와 외관, 즉 겉면은 바삭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말랑말랑해 지금보다 좋아질 여지가 큰 ‘겉바속촉’의 도시랄까. 이런 도시에서는 크고 작은 도시 공간에 개선과 소규모 정비사업, 외부 공간 활성화와 관련한 노력도 자주 일어난다. 성공적일 경우 큰 사회적 호응을 받고, 실패할 경우 불만의 목소리도 크다. 하지만 애정이 있기에 호응도 불만도 큰 법이다. 도시 변화를 통해 끊어진 도시 조직을 잇고 다양한 주거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기회를 적극적으로 움켜쥐어야 한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세훈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미국 하버드 GS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로서 도시설계연구실(Urban Studies and Design Lab)을 이제승 교수와 함께 운영 중이고, 2018년 다섯 명의 동료와 어반랩 도시기획협동조합을 공동 창업했다. 『도시에서 도시를 찾다』(한숲, 2017)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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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포스트 팬데믹 시대, 문화예술의 변화와 회복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로 『환경과조경』에 일 년간 글을 기고한 때가 2016년이다. 당시 글은 건축 및 미술 전시에서 사회적 이슈, 수행적 신체, 문화 액티비즘, 도시재생, 큐레토리얼 실천 등 동시대적 화두를 도시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낸 것이다. 일 년간 전시와 리서치 프로젝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도시를 오가며 예술이 도시 공간과 맺는 관계망과 변화의 움직임을 추적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 연재는 동시대인에게 주어진 이동의 자유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예술이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는 2020년 초부터 전 지구를 마비시킨 팬데믹이 있다. 감염의 공포로부터 각 도시 및 국가가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이동의 통제’다. 국경이 닫히고 도시가 봉쇄되고, 각종 문화 시설이 폐쇄된 시간이었다. 일 년 반 동안 지구 곳곳에서 열린 무수한 전시들은 무관객 상태로 폐쇄된 미술관에 남겨졌으며, 일부 문화 공간의 경우에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비대면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프랑스에 있는 지금, 이곳에서 봉쇄령이 해제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전시는 작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일 년 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문화 활동이 중단되고, 취소되고, 연기되고, 지연되는 시간을 겪었다. 5년 전의 연재 원고를 돌아보며 쓰는 이 글에서, 나는 최근 예술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킨 팬데믹 이후의 도시 공간과 문화예술을 다루고자 한다. 더불어 도시 공간의 위기에 맞서는 문화적 대응 방식과 실천에 대해서도 접근해보고자 한다.
문화 경험의 불가능성과 온라인으로의 전회
“파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은 아페리티프와 함께 시작한다. 즉, 5-6시경부터….”(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이 도시를 표류하며 구상한 “산책자(flaneur)” 개념은 20세기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나와 저녁 식사 전까지 그는 매일같이 도시를 정처 없이 걸으며, 토지 대장으로 구축할 수 없는 도시의 심리 지리학적 지형도를 그려내고자 했다. 근대 도시의 “산책자”가 탄생한 자유로운 도시 파리에서 이동의 통제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방랑의 여정이 금지되는 일이 얼마 전 인류에게 일어났다. 바로 2020년 초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도시 공간을 방역 규범하에 엄격한 통제의 장소로 변모시켰다. 생활에 필수적인 활동만을 허용했기에 전시, 공연, 영화 등 여러 문화 공간은 ‘필수적이지 않은 활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규제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6월 초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 공간은 열려 있으나, 불과 몇 달 전처럼 사회적 위기로부터 문화 공간이 언제 또 폐쇄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로, 서울과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도시 문화에 대한 비판적 개입으로서 전시, 공공 프로젝트 및 리서치를 해왔다. 제11회 이동석 전시기획상(2018)을 받았으며, 디자인 큐레이터 어워드인 현대블루 프라이즈 디자인 2021을 수상했다. 올해 12월 초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기획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더불어 문화연구지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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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
2020년 여름, 서빙고역 앞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가 열렸다. 미군 장교숙소 5단지로도 불리는 이곳은 1980년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미국 교외식 타운하우스 숙소를 건설해 미군에게 임대 운영해온 곳이다. 이후 건물 18개동 중 일부를 리모델링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221).
공간에 공감하기_임한솔
지난 ‘공간 공감’을 찾아 읽다가 주목한 부분이 있었다. “공간의 질이 중요하다기보다 이야깃거리를 얼마나 품고 있느냐, 공간에 대한 다양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당신이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공간 공감, 『환경과조경』 2015년 12월호) 공간에 대한 선호가 질보다 이야깃거리와 판단의 단초에서 비롯된다면 그 이야깃거리와 단초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지역 주민이라면 일상 기억, 식물 애호가라면 식물의 생육 상태와 아름다움, 설계가라면 공간의 디테일에서 찾아낼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깃거리는 공간이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곳을 매번 일 때문에 방문했는데 마음가짐을 달리하니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한가로웠다. 무엇보다 사람과 차가 없다는 ‘부재’가 눈에 띄었다. 쓰이지 않는 곳은 쉽게 스러지기 마련이지만 5단지는 상당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임대 주택 단지라는 태생 때문일까. 임시 개방을 위한 관리 때문일까. ‘유보’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적극적으로 쓰이고 있지 않지만 방치된 상황도 아니기에 이곳이 마치 영화 세트장이나 모델 하우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유엘씨프레스(ULC Press)는 도시 경관 연구 청년 집단이다. 도시 경관에 관한 이론과 사례, 현상과 비평의 글감을 모으고, 일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인식과 경험에 관한 콘텐츠를 기획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출판하고 있다. ulc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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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저는 오즈 야스지로우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심심하잖아요”라고 남자가 이야기하자 찬실은 버럭 화를 낸다. “심심한 게 뭐가 어때서요? 별거 아닌 게 제일 소중하잖아요. 보석 같은 게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 영이 씨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찬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왜 찬실은 복이 많은 사람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대화의 발단은 이렇다. 찬실은 평소 마음에 품은 연하의 남자 영과 술을 마시게 된다. 일본식 술집에 나란히 앉아 찬실은 제일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우 감독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즐거워한다. 하지만 눈치 없는 영이 그 감독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분위기를 깨 버린 것이다.
사실 상황만 보자면 찬실은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소위 예술 영화를 찍는 감독의 프로듀서로 오랜 시간 동안 일했지만, 감독이 돌연사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되는 동안 일만 열심히 했지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서울에 저런 동네가 아직도 있나 싶을 정도의 산꼭대기 단칸방으로 이사하는 날, 찬실은 “완전히 망했다”고 탄식한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친한 배우 소피가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찬실은 거절하고 소피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런 찬실에게 어느 날 희한한 일이 생긴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기술사사무소 이수에서 일하고,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가르치며, 도시경관연구회 보라(BoLA)에서 공부하고 있다.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역사도시경관으로 보는 서울 남산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환경과조경』에 ‘시네마 스케이프’를 연재했다. 특집호 의뢰를 받고 작년에 본 이 영화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현재 넷플릭스로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은 일상의 보석을 캐는 일과 같다. 최근 오픈한 BoLA 홈페이지(www.bola.kr)에서 다시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