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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멀티미디어 플라자
· 위치 : 남원시 어현동 남원관광지 내 춘향문화회관 앞 광장· 면적 : 약 3,000㎡· 발주 : 남원시청· 설계 : 기술사사무소 동인조경마당· 시공 : (주)청산조경건설, (주)금강산업, (유)우주전력· 공사기간 : 2001. 11. 1∼2002. 6. 25
<계획의 목적>1. Multimedia를 이용한 기존단지의 활성화 요구2. 향후 조성예정인 춘향테마공원과 연계된 종합적인 남원관광단지의 면모를 구축3. 진정한 관광도시 남원의 위상정립<기본원칙>1. 향토관광자원(춘향, 흥부 등)의 개발필요- 관광도시 남원의 이미지가 광한루원만으로 한계지어지는 문제점이 있어 토속적이며 남원을 상징할 수 있는 관광자원 발굴 및 개발 필요2. 관광활성화를 위한 재도약의 전기마련- 관광단지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로 광한루원과 관광단지의 연계방안 필요3. 관광을 통한 지역 소득 창출과 고용확대- 다양한 관광상품 개발을 통한 지역소득 창출과 주민 고용증대 필요4. 체류형 관광요소 개발- 스쳐지나가는 관광지가 아닌 머물러 자고가는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독특한 관광요소 개발 필요
<차별화 전략(Multimedia Show의 효과>·기본전제1. 단순히 기존 단지내의 활성화만을 위한 시설이 아닌 남원시 전체를 관광도시로 부각시키기 위한 기능2. 춘향문화회관에서 도심으로 향한 레이저 쇼를 통해 도심과의 시공간적 연계도모3. 레이저의 다양한 연출을 통한 흥미와 재미로 관광객 및 관람객들을 유인·Multimedia Plaza의 성공을 위한 조치1. 남원 관광의 출발인 광한루원에서의 접근성을 개선 : 단순차량이나 보행에 의한 접근체계보다는 춘향열차 또는 단지상가번영회에 의한 셔틀버스 운행2. Multimedia Show를 보기위해 많은 관광객이 몰릴 경우 주변 차량 주차환경이 열악함은 물론 공연도중 발생되는 차량불빛 및 소음으로부터 공연에 막대한 차질이 초래되므로, 궁극적으로 차량통행은 제한되어야 함3. 야간에 활성화되는 공간이므로 이와 연계된 광한루원, 승월교 무지개분수, 동편제 거리 그리고 사랑의 광장 등의 야간활성화를 위한 개방 및 연출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4. Multimedia Show가 연출되는 시간에는 주변 상가의 간판 및 공연에 방해되는 불빛은 제거되어야 함
황 용 득 Hwang Yong Deuk기술사사무소 동인조경마당 대표(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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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공간, 건축에 나타나는 영화적 공간
영화는 이차원적 매체지만, 어느 매체보다 다양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 벽면에 영사되는 영화의 한계는 수치적으로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담아내는 공간적 풍부함은 분명하다. 이는 마치 화가가 한정된 캔버스 안에서 다양한 깊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공간을 다루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화가들은 실제감을 표현하기 위한 공간에 대한 연구를 동반하게되는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과 동선을 함께 다루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과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는 회화를 능가한다. 인간의 착시효과를 이용한 영화의 공간 왜곡은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공간은 매우 다양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공간은 절대적인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확히 한정된 물리적 요소로 둘러싸인 공간도 있지만, 심정적이고 상징적인 무형의 공간도 있다. 한계가 없는 광역의 공간도 있지만, 정확하고 사실적인 벽면들로 둘러싸인 공간도 있다. 또한 공간은 각각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 의미 및 시각적 드러남이 매우 달라진다. 그러한 사례를 들어보자.
영화 에서는 공유의 공간과 동시에 창녀가 등장한다. 사실 이 영화는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 원작 를 1980년대 버전으로 만든 영화로 자본주의적 코드와 쇼핑의 행위가 중요한 요소이며, 상업공간에서 위력을 발휘한 고전적 장식 인용의 포스트 모던이 드러나기도 한다. 원작이 매우 지적인 상황을 유도한 반면,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다소 속물적인 상황이 나타난다. 리처드 기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서있건 공간은 거리였다. 즉 공적인 공간으로 주인이 없으며,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 줄리아 로버츠와 그녀를 사용하기 위한 리처드 기어가 있다. 장소는 거리의 여자를 설명하는 중요하면서도 당연한 요소가 된다. 반면에 리처드 기어가 머무는 공간은 도로 만큼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하지만 선택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텔(그중에서도 펜트 하우스)이다. 이 두개의 공간은 이미 주인공의 직업적 배경만큼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그녀가 쇼핑을 하는 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배타적 공간이
된다. 복장 - 즉 외모로 판단해보면 유니폼 같은 고급 브랜드들로 치장한 사람들의 영역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질적 복장을 갖춘 주인공이 들어섰을 때 무언의 압력과 구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들은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 어떠한 대사보다 더 정확하게 상황설명을 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공간(장소)에 대한 심리적 적응이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 있어서 공간에 대한 심리적 접근은 매우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드러난다. 좀더 확장해서 말해보자. 이 상징적인 부분과 은유로서 공간을 간접 표현하고 있다면 공포물의 경우는 좀더 직설적인 면들이 있다.
동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의 경우도 자세히 보면 끊임없는 직선형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직선형 공간의 특징은 방향이 다양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막힌 공간과 다름없다. 여기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 에서 충분히 보여지고 있다. 선형공간과 퍼즐식의 공간 개폐를 혼용한 영화인 는 미로 같기도 하고, 무한한 것 같은 수학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관객들은 배우들과 함께 퍼즐 같은 수학적 공간을 따라 가면서 심장 박동을 빨리하고 있다. 실제 한밤중 학교나 사무실 같은 곳의 복도 같이 단순한 공간에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공간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단순해지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오히려 움직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이것이 두려움 일수도 있지만, 거꾸로 조금 느려지고 일상화 될 때는 한없이 지루하고 나태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폐쇄적인 선형 공간에 비해 넓게 펼쳐진 개방 공간의 경우는 조금 달라진다. 이 경우는 완전히 사람들 속에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숨길 수 없는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속의 공간들은 또한 수시로 변화를 이루면서 관객에게 다가서기도 한다. 마치 초 현실 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몽환적이면서도 작위적인 장치들을 구성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미지의 고정적 관념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의 경우가 그렇고, 등에서는 매우 팝 적인 요소들을 배치하기도 한다. 언 듯 보기엔 그냥 일상적인 배경들이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 장치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떠올리는 첫 번째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요되는 의미가 강하다.
이밖에도 영화에서 공간은 다양하게 펼쳐지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건축에서는? 라즐로 모홀리 나기는 ‘공간’과 ‘건축’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브루노 제비는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으며, 공간은 건축의 주역이라고 하였다. 즉, 건축에서 사람들에게 제공하거나, 체험하게 하는 것은 시각적인 그림도 있지만, 육감을 동원한 시공간적 체험이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건축에 있어서 이러한 ‘건축’에서의 ‘공간체험’은 ‘실제 공간체험’을 하는 경우와 ‘공간 예 체험’의 경우로 이해할 수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간체험인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인 ‘공간 예 체험’은 건축 작업 시에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전에 예시되거나 인지되어 지는, 또는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려내는 가상의 상황인 것이다. 이로써 고대부터 건축을 진행해온 많은 사람들은 온갖 상황을 빗대어 실제화 하였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공간의 표현, 공간의 인식은 간접적인 공간 체험임과 동시에 ‘공간 예 체험’에 해당되는 것이다. 임의의 상황으로 ‘공간’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성격’이 부여되는 것은 우리가 ‘공간’을 창조해 내는 과정에서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실례는 무수히 많다. 실제 건축이나 실내 공간을 디자인하는 필자의 경우도 이런 ‘공간 예 체험’을 상상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면서, 부여된 공간의 특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 건축 작업에 있어서 3D 또는 투시도동영상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상상하는 임의의 상황과 스토리를 적용하여 ‘공간’을 창조하는 경우가 많다. 건축가가 주인공이 되어서 공간을 떠도는 것이다.
홍성용 Hong, Sung Yong · 모이 도시건축디자인 소장, 계원조형예술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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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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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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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경사회 2003중국 곤명지역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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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진도대교 경관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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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lsea flower show 2002
Introduction-Garden fever 일반적으로 영국엔 계절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영국의 기후를 대변해 줄지도 모른다. 그 이유인 즉 8월의 청명함 빼고 항상 회색조의 하늘과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날씨이기 때문이다. 이곳 런던에서 한국의 뚜렷한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영국인들에게 이런 날씨 속에서 그 우울함을 달래는 최고의 취미 생활이 ‘가든에 대한 열정’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가든에 대한 열정’이라 함은 단지 육체적 노동을 말하는 가드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의 내부 주거 공간과 연결된 떼어 놀 수 없는 하나의 외부(exterior)공간으로써 가든을 두고 집주인에 취향에 맞게 컨셉을 만들고 디자인을 하고 장식품을 갖다 놓고 식물을 가꾸는 등과 함께 삶의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지 조경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런 이들이 열정을 표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Royal Horticulture Society 주관 하에 런던 Chelsea에서 열리는 첼시플라워쇼이다. 물론 영국엔 일년 중에 수많은 Flower & Garden Show 가 국가적 지역적으로 열린다. 그 중에 첼시플라워쇼는 그 중에 highlight 이며 가장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쇼는 일년에 한번 개최되고, 5월 중순에 열려서 4일간 지속되는 동안에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모습은 웬만한 세계적인 무역 박람회하고 비교할 수 없다. Royal Horticulture Society 은 1804년에 설립된 영국의 gardening charity 이면서 세계적인 원예 본부와 같은 곳으로 세계 원예 산업을 리드하고 있다. 그리고 2004년이면 200년 생일을 맞게 된다. RHS의 head patron은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이다. 이런 확실한 Patron과 일반인의 membership으로 운영되는 이 조직은 30만명 이상의 후원 멤버를 갖고 있다. 런던 시장 Ken Livingston은 이 멤버수가 어떤 정치 당의 당원 수 보다 훨씬 더 많으며 진정한 membership이 될 것이라 한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 리전트 파크 같은 수많은 공공 공원, 공동주택 정원, 그리고 20% 이상의 런던 시민이 소유하는 정원의 크기가 120 평방 마일을 넘는 걸 보면 RHS의 역할과 사회적, 문화적으로 원예 산업에 얼마나 영향이 큰지 예측 할 수 있을 것이다. RHS는 설립된 이후 Gardner들과 원예 산업을 촉진, 발전시키고 원예에 관한 정보 및 그 밖의 가든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과 함께 자선단체로써 1862년 RHS’s Great Spring Show가 런던 Kensington에서 처음 시작한 이래로 1913년 까지 Embankment의 Temple Garden에서 쇼를 열었다. 그 이후 지금의 Chelsea로 그 전시장이 고정되어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RHS의 flower show로 자리 잡게 된다(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장소가 폭격기를 쏘는 대포 설치 장소로 쓰기 위해 중단된 경우를 제외하고). 1988년 이래로 쇼는 붐이 일어 21세기 현재 이 쇼는 열리는 4일 동안 그 인원을 150만 명으로 제한하기 까지 하게 되었다. Contents 전시되는 가든의 카테고리 1. Show garden : 쇼가든은 첼시의 가장 하이라이트로 최고의 디자인과 plantsmanship을 선보여 준다. 런던 중상층이 사는 타운 가든 크기로 8 x 18m 정도 된다. 이 가든의 카테고리에 지원하는 디자이너들은 대부분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주가 된다. 쇼에서 금상을 타는 가든은 영광을 얻을 뿐더러 그 해 영국이 가든의 새로운 유행과 역사를 만들게 된다. 2. Small Garden : Small Garden은 대부분의 영국의 어느 집 앞이나 아주 작은 가든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다. 2000년도까지는 대학의 College나 RHS와 관련된 단체에게만 지원 가능하였는데 2002년부터 Small Garden 부분을 다양하게 세분화함으로써 더 다양하고 폭넓은 참여자의 지원을 가능케 했다. 작년부터 전문가뿐만 아니라 아마츄어에게도 참여할 기회가 제공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서 첼시 플라워쇼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게 되었다. 작년 2002년에 디자인이 어떻건 간에 40개의 small garden이 전시되었는데, 이 가든들은 Show 가든이 낭비적인 비용과는 다르게 예산들이 극히 작다는 걸 고려해 볼 때 가장 실질적이고 적용 가능한 디자인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할 수 있다.Chic garden : 전시장 외부와 파빌리온 안에 군데군데 세워지는데 그 크기는 5 x 4.5 m 이다. 이 디자인의 분류는 도시환경에 맞는 새로운 소재, 아이디어, 식물들과 창조적이고 첨단적인 기안을 허용함으로써 혁신적이고 대담한 가든 디자인을 볼 수 있다. Brown 의 ‘A forgotten future’는 소비과잉으로 넘치는 외부의 미래 환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버려져 썩어가는 철재의 Frame과 가장 원초적인 planting을 택하여 방문객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City garden : 도시가든 역시 쉭 가든 처럼 도시의 생활을 반영하는 도시 가든이나 지붕위의 Roof Garden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바쁘고 모던한 삶에서 가든 안에서 휴식을 하고 즐길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공하는 장르이다. Courtyard garden : 전시장 사이드 숲에 자리잡아 전시되는데, 도시보다 도시외곽과 시골의 작은 크기의 가든 디자인의 한 장르로 그 크기는 4.5 x 3.5 m 이다. 이 장르에서는 다른 가든과 달리 실용성이 강조 되는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또 실질적으로 가든 디자인하는데 영감을 주게 된다. 3. Floral pavilions : 전시장 중앙에 크게 두 군데 세워지는 대형 임시 전시장으로 영국 RHS 등록된 nursery에서 각 식물원에서 특화된 식물들을 가지고 전시를 하는데, 여기서 뽑혀 수상되는 식물 역시 그 해 가장 잘 팔리는 식물이 될 것이다. 4. Floral Arrangement : Chelsea 쇼에서 선보이는 꽃꽃이 부분의 전시는 가든과 Floral Pavilion부분에 비해 극히 작다고 볼 수 있다. 20평정도 규모의 작은 천막에서 쇼가 전시가 된다. 5. Market Place : sundries 각종 가든에 관련된 제품들이 선보이는 부분으로 잔디깎는 기계에서부터 연못 설비 등 각종 다양한 신종 설비, 식물을 위한 pot들, 조각, 가구, 라이트(등), 온실등의 시장이 선다. 6. Junior Displays : 학교 관련 부스가 전시장에 섬으로써 가든 관련 학교 소개며 디자인이 전시된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전 연 선 Jeon, Youn Sun ·WALSE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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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조경생태학의 새로운 연구동향과 전망 (3) :대학교육에서의 생태학 그리고
들어가며
지난 호 말미에 잠깐 언급 되었듯이, 본 호에서는 미국대학 내에서 생태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와 2003년 신임교수 채용에 나타난 경향을 조경생태학의 전망차원에서 다룰 예정이다. 글의 주된 골간은 최근에 발간된 Ecology and Design (Johnson & Hill, 2002)에서 북서부 대학의 조경학과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조경생태학의 교육현황(Tamminga et al., 2002)과 학문간 경계를 넘어선 접근방법 (Ahern et al., 2002)을 다룬 내용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책은 지리적으로 미국의 북서부 대학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남동부대학들 소개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위에서 소개한 책을 중심으로 하되,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북서부 몇몇 대학들과 남동부 대학들을 추가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조심스러운 것은, 소개될 대학들의 프로그램이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정된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코 여기서 소개될 프로그램들이 소개되지 않은 프로그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우수하다는 식의 판단은 없기를 바란다. 또 하나 본 글은 각 대학내 조경생태학의 교육의 질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다루지 않을 예정이다. 특히 조경학과의 소속단과대학에 때라 생태학의 비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조경)생태학이 단독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는지, 생물학과 등과의 통합과정 개설여부, 박사과정 제공여부, 스튜디오과목과의 연계여부 등에 주된 관찰의 관점을 두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맥하그(2001년 작고)가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1954년 조경학과를 재설립하고 생태적 접근방법의 조경계획을 주창한 이후, 생태학은 조경계획, 디자인분야에 중요한 패러다임이 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그 역할은 조경계획이나 디자인에 있어서 유효하다. 비록 현대의 조경학문내에서 생태학이 맥하그가 "Man and Nature (1963)", "Design with Nature (1969)" 같은 저서들 혹은 "The House We Live In"이란 텔레비전 시리즈 등에서 논했던 생태적 접근방법, 아니면 옴스테디안 방법 (Fabos, 1995)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생태학이 조경계획, 디자인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작아지지 않았다. 초기의 조경계획내 생태학은 오직 보존(Conservation)으로 이해되었지만 (Leit o and Ahern, 2002), 생태학 자체도 학문적으로 분화, 발전하였으며, 조경이라는 학문적 영역안에서 생태학의 역할 또한 분화 발전하였다.
한국에서 학부제 실시이후 조경학과의 학문적 지향점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조경전공이 삼림자원, 건축 혹은 도시, 디자인 전공 등과 통합되어 학부로 운영되는 것과 유사하게, 대부분의 미국내 조경학과들이 생태학을 중요한 패러다임의 하나로 인식을 하고 있더라도, 학과의 설립취지나 발전목표, 학풍 등에 따라 생태학적 접근방법은 조경학과 편제상 각각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접근방법의 조경학과내 역할과 비중을 고려한 측면에서, 각 대학 조경학과의 커리큘럼을 크게 두개의 그룹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조경학과에서 생태학적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조되는 구조로 생태학(혹은 관련학과들)과 조경학과가 단과대 차원에서 통합적 운영되는 형태이다, 두 번째 형태는, 대부분의 대학들이 운영하는 형태로, 조경학과 커리큘럼내 스튜디오 과목이나 세미나 등을 통하여 조경(생태학)이 계획이나 디자인에 반영되는 형태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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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칠성 주거환경개선지구 설계경기 당선작
⊙ 위치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2가 149-1번지 일원 ⊙ 지역지구 : 주거환경개선지구, 최저고도지구 ⊙ 대지면적 : 57,494㎡(17,392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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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비평의 역할과 과제
다시, 조경비평의 이름을 부르다
조경비평이라는 네 글자의 가능성에 무작정 기대어 쓴 어설프고 무리한 구조의 석사논문에, 관대하신 심사 교수님들은 도장을 찍어주시고 말았다. 꼭 10년 전의 일이다. "작가도 없고 작품도 없고 사회적 인정도 없는데 도대체 비평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라는 주변의 의혹을 듬뿍 받은 이 논문에서 나는 조경비평을 이렇게 정의했다: 조경비평이란 "조경가들이 창조한 비평의 소재, 즉 조경 작품이나 조경가의 경향, 조경계, 조경과 사회의 관계 등을 대상으로 하여 비평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경비평가나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조경사가, 조경미학자 등이 그 대상에 대해 비판과 찬사, 혹은 비교와 감상 등을 하기 위해 분석, 기술, 해석, 평가하는 행위"이며, "환경의 형성 혹은 개선에 영향을 주려는 행동으로서 그 시대의 삶과 조경을 반영하는 문화 행위의 궤적이다."
이 엉성한 정의를 포함하여 논문에서는 조경비평의 필요성, 대상, 주체, 방법(론) 등과 같은 조경비평의 전체적인 틀이 논의되었는데,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은 아쉬운 대로 미학, 문학, 건축 등 관련 분야의 비평 이론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논문의 행간을 통해 말하고자 애썼던 점은 "조경비평을 하자!"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선언적인 주장이었다. 결국 나의 논문은 "있지도 않은" 조경비평이라는 것을 하자는 주장을 펴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조경의 세계에서 비평은 대중과 전문가의 가교, 조경 작품의 내적 의미 해석, 상상력과 실험정신을 담은 디자인 교육, 조경사의 궤적을 잇는 매듭 등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전략적 행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 있지도 않던" 조경비평은 어떤 지형을 그리며 조경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가? 조경비평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은 미력하나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필자와 김영대(영남대 교수), 조경진(서울시립대 교수, 당시 펜실바니아대학교 박사과정), 차태욱(Hargreaves Associates 근무, 당시 Oikos 근무), 민성훈(증권 컨설턴트, 당시 조경설계 서안 근무)이 "조경비평 동인 69"라는 그룹을 함께 꾸리며 조경비평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공공영역(public sphere)을 마련하기 위한 대안적 매체의 발간을 기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1998년, 조경의 대안적 담론 공간을 모색하며 조경진, 박승진(조경설계 서안), 그리고 필자가 공동편집장으로 참여하고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이 발행을 맡아 {Locus}를 창간했다. 작품의 빈곤, 이론과 비평의 부재 속에서 허덕여 온 조경의 상황을 비평의 장을 통해 해소하며 현실과 대화하는 조경비평의 실천 환경을 구축한다는 선언으로 시작된 {Locus}는 2000년에는 "조경과 비평"이라는 부제를 단 2호를 선보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다층의 독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유일의 조경 잡지 {환경과 조경}까지도 한국 조경과 비평 사이의 함수를 종래와는 다른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2002년부터 거의 매달 실리고 있는 "조경비평"이라는 타이틀의 꼭지와 같은 해에 시도된 "조경비평 공모전"이 그 단적인 예이다. 또 이번 호에서 현 단계의 조경비평을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조경비평이 그 필요성만큼은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만하다. 그렇다면, 있지도 않던 조경비평은 이제 있는 것인가? 긍정의 답으로 대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난맥은 우선 그간 발표되었던 비평들이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감상문 내지 답사기, 찬사 일변도의 주례 비평, 서구의 유행 이론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글, 특정 이론의 적용에 매몰된 원론 비평 등이 조경비평이라는 같은 문패를 쓰며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조경비평에 기대되는 역할의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폭 넓거나 아니면 조경비평 자체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 비평들에 대한 피드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조경비평의 아이덴터티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난점이다.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비평은 "창작→작품→향수→감상→비평→창작"이 반복되는 순환적 구조 속에서 기능할 때 그 의미를 보장받는다. 즉 비평은 이 순환적 구조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칠 때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나 작품과 상호 관련을 맺지 못하는 외마디 외침으로서의 조경비평은 공허한 일에 다름 아니다. 조경비평 자체에 대한 원론적 논의보다는 활발한 실제 비평(practical criticism)이 요청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지면을 소비해가며 조경비평의 현 단계를 다시 짚어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왜 조경비평인가?" 이것은 조경비평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이자 그 "역할"에 대한 물음이다. 비평의 역할은 비평이 작품과 맺고 있는 함수 관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경비평은 ○○이다"라는 정태적 정의를 뛰어넘는, "조경비평은 ○○을 한다/할 수 있다/해야 한다"는 역동적 정의, 곧 조경비평의 역할이다.
왜 조경비평인가?
역할 1 :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의 실천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만드는 거창한 이름, 이론(theory). 곁가지를 치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계와 사물에 대한 생각―개념―들을 체계화한 것이 이론이다. 이론은 개념의 전체집합인 것이다. 우리는 삶의 조건, 즉 세계와 사물과 환경과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산다. 즉 개념의 생산은 무의식적인 행위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개념이 모여 만들어진 이론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의 매개체를 통과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소통을 위해 대게 말이나 글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데, 말이나 글의 형태로 번역된 이론은 사실을 기술(description)하는 형식, 의미를 해석(interpretation)하는 형식, 그리고 가치를 평가(evaluation)하는 형식, 이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조경이론은 조경이라는 문화 행위와 그 결과물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생각이며, 그것은 기술, 해석, 평가라는 형식을 통해 구체화된다. 조경의 문화적 궤적을 기술하는 것이 조경사의 역할이라면, 조경비평은 동시대의 조경 작품, 작가, 쟁점 등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조경비평의 주제가 현재이고 조경사의 주제가 과거라면, 조경비평은 훗날 역사가의 사료가 된다. 현재를 조명할 수 있는 역사의식과 비평정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론의 구체적 형태로서의 역사와 비평은 동반자의 관계에 위치한다.
이처럼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의 가장 실천적인 양상으로 기능하면서 조경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물리학 없이 자연을 알 수 없듯이,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미술비평을 지나칠 수 없듯이, 조경비평은 조경을 알기 위한 조경 고유의 사고 체계이자 지식 체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비평가로 인정받고 있는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는 "비평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예술은 벙어리"라는 이유로 비평의 존재 이유를 명료하게 제시한다. 조경설계나 계획의 산물로 구현된 작품과 그 과정 중의 일련의 행위는 조경이론의 가장 직접적인 실천 양상이다. 그러나 조경비평은 그러한 과정과 산물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실천이다. 프라이의 말처럼, 하나의 작품은 새로운 비평가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입을 연다. 조경비평은 조경이론을 실천하는 행위이자, 이원론적 긴장 관계 속에서 대치해 온 조경이론과 조경실천을 매개하고 중개하는 조정의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조경비평이 상실되거나 부재함으로써 발생하는 난맥은 한국 조경의 풍경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지난 2월 중순에 발표된 "서울시청 앞 광장 조성 설계 공모"의 결과와 이에 대한 반응은 이론과 실천과 비평이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일어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 준다. 당선작과 우수작, 그리고 세 편의 가작 작품은 겉으로 내세운 개념이나 그것을 구현한 형태 언어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광장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즉 이론―에서는 넓은 면적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현대 도시의 문제와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인지 아니면 렘 콜하스(Rem Koolhaas)나 West8 등이 주도하고 있는 최근의 패션에 무비판적으로 동승한 결과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이 작품들이 설계를 통해 실천하고자 한 것은 도시 공간의 일시성, 불확정성, 가변성을 설계를 통해 수용해야 한다는 이론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서로 엇비슷한 것이다. 사건이 지배하는 리좀(rhizome)과도 같은 도시 공간에 가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디자인 코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했다고 판단되는 "빛의 광장"이 당선작으로 발표되고, 유사한 전략에 기초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조경 설계의 형태적 요소들을 사족처럼 덧붙인 다른 네 팀의 작품들이 우수작과 가작에 머물렀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경비평이 조경이론을 비판적으로 실천하는 역할을 하며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이 경우에 조경비평의 역할은 우선 이들 작품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기대고 있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류의 철학 이론이 서울시청 앞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과 그 주변 맥락에 적합한 것인 지 엄밀히 따져보는 데 있다. 조경비평에 맡겨진 또 다른 역할은 당선작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염두에 둔 이론이 어떠한 설계 전략을 통해 실천되어 조경―또는 건축일 수도 있고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일 수도 있다―의 경계 밖에서, 즉 일상의 세계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지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있다. 이는 해당 작품의 질적 우열을 점검하는 평가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삶으로부터 고립된 작품과 그것에 대한 담론을 전문가들의 폐쇄적인 영토에서 일상의 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조경 행위를 사회화하는, 조경비평의 실천적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언론과 대중―심지어 조경 전문가도―이 동시대 조경의 사회적 발언으로부터 유리된 채 LCD 모니터의 설치 비용이나 유지 관리 문제만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엉뚱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역할 2: 조경비평은 조경실천을 이론화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땅이 세계를 살아가며 맺는 관계의 문화 행위를 조경이라고 한다면, 조경의 목적은 그러한 관계의 지혜로운 실천(practice)이다. 계획, 설계, 시공은 그러한 실천의 단계나 과정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다. 조경실천은 이러한 과정을 일컫는 동시에 조경가의 머리와 손을 통해 생산되는 조경 작품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조경실천의 결과물, 즉 조경 작품은 일상 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상과 소통하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조경가가 생산하는 조경 작품은 그것만으로는 물체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물적 존재에서, 예를 들자면,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그것에 불평을 쏟아내기도 하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우리는 조경실천에 대해 끊임없이 일종의 잠재적 비평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산발적 반응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생각, 즉 이론을 요청한다. 이러한 지점이 바로 조경실천이 이론과 만나는 곳이며, 조경실천과 조경이론의 접점에서 매개와 중개의 역할을 하는 조경비평의 활동 공간이다. 조경비평은 물체로 던져진 조경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지역적 조건이나 역사적 맥락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 위치시킴으로써―즉 이론화함으로써― 현실로부터 고립된―즉 물적 존재에 불과한― 조경작품을 사회적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조경가나 조경 작품의 독백과도 같은 발언을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일상의 삶과 연결시킨다는 말이다. 이처럼 조경실천은 조경비평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론화될 수 있는 것이다.
조경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설계 잘 하고 시공 제대로 해서 좋은 작품 만들면 됐지, 어려운 말장난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는 식의 틀에 박힌 도식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도식은 조경에 이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론무용론"과 이론은 실천에 유용한 수단으로서나 필요하다는 "도구주의적 이론론"으로 양분된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가 지난 30년 간의 한국 조경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분야 내적으로도 성숙시키지 못한 원인의 하나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 조경에 대해 퍼붓는, "작품도 없고, 작가도 없다"는 불만이나 "조경은 건축에 치이기 일쑤고, 보통 사람들은 아직도 조경을 그저 나무 심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불평은 실천과 이론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소급되는 문제인 것이다. 한국 현대 조경이 법이나 제도의 개정과 같은 문제 외에 작품이나 그것의 철학을 쟁점화한 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작품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이른바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태라는 것에 대해서도, 형태와 의미의 관계라는 원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된 토론조차 벌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는 곧 이론을 통해 실천을 교정하고 정련하고 확장시키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러한 양상의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개입해야 할 역할이 비평에 있지만, 우리는 채 비평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해 왔다.
소위 조경 선진국이라는 이방 국가들의 사정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론에 대한 실천의 오해는 거슬러 올라가면 서구 모더니티 정신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까지 소급되는 골 깊은 문제임을 새삼 거론하기에는 지면의 넓이가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론의 공백이 실천의 부재를 낳기까지 한 실례를 현대 조경의 역사 속에서 잠시 들춰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 조경 이야기이다.
1980년대 말 이후 조경이론의 르네상스를 기도하는 흐름이 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경의 담론 속에서 모더니즘이 거론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를 단순히 해석하면 조경에서 모더니즘 이론이 공백 상태였다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더니즘 조경 자체가 없었다는 것, 실천이 부재했음을 뜻한다.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탄생한 때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이지만 바로 그 때―미술과 건축이 모더니즘을 실험하고 주장하던 바로 그 때―부터 조경이 건축이나 미술의 주변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모더니즘 조경은 존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근의 이론 연구들은 모더니즘 조경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20세기의 개막을 기점으로 고개를 감추었던 조경에 대한 이론을 발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의 성과로 크리스토퍼 터나드, 댄 카일리, 제임스 로즈, 가렛 엑보, 플레춰 스틸 등의 알려지지 않은 글과 작품들이 모더니즘의 틀로 재조명되었고, 거의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던 1920년대의 프랑스 모더니즘 조경이 재발견되기도 했다. 모더니즘 조경이 존재했음은 이처럼 최근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고쳐 말하자면, 모더니즘 조경은 그 실천이 부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론의 공백이 마치 실천이 없었던 것처럼 역사를 구성하게 한, 이론과 실천의 잘못된 함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이는 비단 과거의,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조경실천을 이론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소통시켜야 할 조경비평의 역할이 존재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조경의 서른 살을 기념하던 2002년, 우리는 선유도공원이라는 소중한 실천을 만났다. 선유도공원을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로는, 우선 그것이 폐허가 된 부지를 재활용하여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공원이라는 점이 있을 것이다. 피터 라츠(Peter Latz)의 되스부르그 노드 파크(Duisburg Nord Park)를 거의 베끼다시피 한 모방작이라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한강이라는 환경과 선유도 자체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지 조경가의 설계 자체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고 드라마나 CF의 단골 배경이 되고 있는 걸 보면 성공한 공원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선유도공원이라는 조경실천은 더 많은 이론적 쟁점을 지닌 채 비평의 역할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대착오적 녹색 신화를 극복하고 화장술적 미학을 초월하고 있는 선유도공원에서 우리는 동시대 한국 조경 실천을 이론화할 수 있는 다양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도시의 진화에 따라 발생한 포스트-인더스트리얼(post-industrial) 사이트의 문제, 대지의 역사적 층위를 살린 입체적 공간의 구축, 형태와 의미와 기능에 도전하는 물성의 미학 등과 같은 쟁점은 한국 조경에 새로운 이론의 손길을 요청한다. 조경실천이 생산한 선유도공원이라는 물적 존재를 조경 내부의 차원은 물론 사회적 차원으로도 소통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는 이론화의 과업이 조경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조경은 아직 선유도공원에 다각도의 비평을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 실천과 이론의 경계에 마련된 비평의 공간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 후략 …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배정한 Pae, Jeong Hann·단국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