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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웃거리는 편집자] 별 볼 일 있는 사람
    잊을 수 없는 밤이 있다. 고향의 동네는 하루에 버스가 다섯 대밖에 오지 않는 시골이다.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나름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5분이면 정상을 찍을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이 병풍처럼 서 있고, 실개천이 집 앞에 졸졸 흐른다. 명당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민망하지만, 탁 트인 시야 덕분에 밤하늘을 감상하기엔 아주 좋다. 우리 가족은 여름날 은하수가 뜨는 밤이면 평상에 오순도순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했다. 산 바로 아래 집이라서 여름밤이라도 공기가 차가웠던 탓에 우리는 크고 얇은 여름 이불을 다 같이 덮은 채로 누워서 밤하늘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엔 다 같이 손을 모아 소원을 빌기도 했다. 별이 유난히 빛났던 그 밤들은 한 이불을 덮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줬다. 먼 우주를 매일 올려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천체물리학자를 꿈꿨다.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 자체가 어려워 보여서 뭔가 특별해 보였던 것 같다. 어릴 때 경찰, 소방관, 드라마 PD, 흉부외과 의사 등 장래희망 칸에 썼다 지운 직업이 수두룩했는데, 천체물리학자의 꿈은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스티븐 호킹처럼 우주 분야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천체물리학자가 되겠다는 야심도 있었고,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연구하고 있을 미래의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뼛속부터 문과생이었던 탓에 수학의 벽을 넘지 못했고, 꿈은 블랙홀에 빠져버린 인공위성처럼 사라졌다. 함수에게 꿈을 도둑맞았다.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지난 3월호에 소개했던 단 로세하르더(Daan Roosegaarde)의 시잉스타(Seeing Star) 덕분이었다. 시잉스타는 도시의 모든 조명을 소등함으로써 도시에서 보지 못했던 별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프로젝트다. 로세하르더와 협업했던 네덜란드 유네스코 의장 카틀레인 페리르(Kathleen Ferrier)는 “모든 사람은 오염되지 않은 밤하늘을 통해 별을 볼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차가 있었다면 그 권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당장 고향집으로 달려가거나 근사한 천문대를 찾아갔겠지만, 무면허의 뚜벅이었고 코로나19는 조금 무서웠다. 멀리 갈 용기 대신, 약간의 오기를 발휘해 도시에서 별을 볼 수 있는 궁리를 하다가 우연히 과학 동아 천문대를 알게 됐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천문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일일 관측 프로그램은 어른도 참여가 가능했다. 서울에 천문대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위치가 용산 전자상가 부근으로 나와서 더 흥미로웠다. 전자상가 인근의 천문대는 국회의사당 지붕에 산다는 태권V 전설처럼 낯설고 신기했다. 가족 단위로 온 이들이 많았는데, 프로그램 가이드 앞에서 각자의 별자리 지식을 뽐내는 혈기왕성한 꼬맹이 틈바구니에서 같이 별을 구경했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으리으리한 천문대는 아니지만 건물 옥상에서 소박하게 별을 구경할 수 있는 천체 망원경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야광별이 달린 돌림판을 보면서 별자리를 손으로 그려보고, 한쪽 눈을 찔끔 감고 천체 망원경을 통해 별을 구경했다. 아득하게 멀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이 좋지만, 망원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별도 좋았다. 오랜만에 목이 뻐근할 정도로 올려다보면서 별자리를 찾아보고, 아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느끼며 소소한 밤하늘의 추억을 하나 쌓고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시잉스타의 서울 버전을 한번 꿈꿔봤다. 불 꺼진 거리에서 뭇별을 오롯이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항의로 인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서버가 폭발할까? 둘 중 어느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가끔은 별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이 별 볼 일 없을 만큼 시시하더라도 종종 땅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을 세고, 별자리를 이어 보는 것이다. 카틀레인 의장의 말처럼 별을 보는 건 우주라는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른다. 별 볼 일이 있는 사람. 잃어버렸던 꿈을 새롭게 다시 써본다. [email protected]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과천에 사는 K는 평생 그 동네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걷기 좋은 천변과 길고양이도 넉넉하게 품는 공원이 가까이 있어 좋다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전시와 공연을 사랑하는 K를 단번에 과천국립현대미술관과 예술의전당으로 데려다주는 버스가 오간다. 중학생 시절 성악을 배운 K는 여전히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 먼 훗날 그의 오빠(?)인 슈베르트 묘가 있는 젠트랄프리드호프(Zentralfriedhof)를 방문하고, 겸사겸사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것이 꿈.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의 동반인으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슈베르트와 나란히 베토벤이 묻혀 있고(베토벤의 팬인 슈베르트는 그와 가까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멀지 않은 곳에 K의 또 다른 오빠인 모차르트의 가묘가 있어 꽤 오랜 시간 둘러볼 계획인 것 같았다. 아는 것도 많고 그 지식을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K 덕분에 알아두면 좋을 이야기들을 공짜로 얻어듣곤 한다. 가끔은 꼬드김에 넘어가 공연을 본다. 봄을 앞두고 느닷없이 눈이 내리던 날에 함께 예술의전당에 갔다. 1부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Op.43, 2부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e 단조 Op.95 ‘신세계로부터’. 입문자를 위한 공연이라 연주에 앞서 지휘자가 간단히 곡 설명을 해주었는데, 2부 전에 들려준 드보르자크의 말이 너무 괘씸했다. “기관차를 내가 발명할 수 있었다면 내가 쓴 교향곡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텐데.” 그런데 지휘자의 설명에 따르면 드보르자크는 엄청난 기차 마니아였다고 한다. 아홉 살이 되었던 해, 그가 살던 프라하 교외의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 기차역이 들어섰다.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거대한 기관차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는 매일 아침 기차역에 찾아가 열차 번호와 특징을 수첩에 기록했다. 새로 개발된 기차를 관찰할 시간이 부족하자 제자인 요세프 수크(Josef Suk)를 보내 기관차 제조 번호를 적어 오게 한 일화를 듣고 나니, 그에게는 기차 마니아보다는 기차광이라는 수식어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향한 애정은 그의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화 ‘죠스’에서 긴장감을 돋웠던 신세계로부터 4악장의 도입부를 다시 떠올려보자. 점층적으로 커지는 오케스트라는 명백히 점점 속력이 붙는 육중한 기차의 바퀴 소리와 웅장한 경적을 연상시킨다.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피아노 소품 7번 ‘유모레스크’ 역시 레일 위를 구르는 기차 바퀴의 리듬에서 힌트를 얻은 곡이다. 연주를 듣는 내내 그가 처음 마주친 기차의 모습이 궁금했다. 한적한 강가의 작은 마을, 푸줏간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드보르자크에게 철도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기차는 넓은 세계의 상징 같았을 것이다. “다양한 부품이 수많은 부분을 구성하는데 그 모두가 제각기 중요하잖아. 부품 모두가 각기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작은 레버를 움직이면 큰 지렛대가 움직이기 시작해. 크고 육중한데도 토끼처럼 재빠르게 움직이잖아.”1 그가 기차를 사랑하는 까닭은 꼭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여러 악기를 떠오르게 한다.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days4tripper/twitter) 드 보르자크가 음악을 선택한 이유와 결국 만들고자 했던 것 모두가 기차는 아니었을까. 자꾸 그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에게 한때의 기억은 유년시절 가족을 따라 여행했던 뉴잉글랜드와 뉴욕 북부 등지의 풍경일 테다. 특집을 매만지는 내내, 드보르자크의 기차를 상상하듯 어린 옴스테드의 눈 앞에 펼쳐졌을 전원 풍경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도시 한복판에 구현한 “옴스테드식 공원은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확대 및 재생산됐다. 어쩌면 아직도 전 세계의 공원은 옴스테드의 우산 아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조경진, 46쪽) 유진 하그로브(Eugen C. Hargrove)는 이러한 도시공원을 저급한 자연의 모조품이고 상상을 통해 인간의 결함을 감추는 설계된 자연이라고 비판했지만, 신세계로부터를 떠올리면 자연을 모사한 공원들을 잠시 변호해주고 싶어진다. 물론 새로운 형식과 가능성을 가진 도시공원이 필요하지만, 옴스테드를 답습하고 있는 도시공원의 풍경은 공원 설계가가 어딘가에서 맞닥뜨린 ‘한때의 기억’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조경의 재료 대부분은 자연이다. 본래 같은 재료로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어려운 법이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유윤종, 드보르작 “내가 쓴 교향곡 모두 포기하겠다” 말한 이유는?, 동아일보 2020년 9월 7일.
  • [PRODUCT] 나노 탄소 면상발열 온열의자 맞춤 디자인에 따뜻함을 더한 쉼터
    추운 겨울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따뜻하게 보낼 수는 없을까. 겨울철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는 승객을 위해 넥스트원은 나노 탄소 면상발열 온열의자를 만들었다. 탄소 나노 튜브Carbon Nano Tube(이하 CNT)는 탄소 원자로 구성된 매우 작고 얇은 물질로 벌집 모양이 특징이며, 다양한 복합 소재 분야에서 활용된다. 넥스트원의 온열의자는 CNT 신소재와 강화 유리를 접목했으며, 전통의 구들장을 재해석하여 전통 발열 방식으로 재연한 제품이다. 최소 전력으로 열을 내는 방식으로 기존 발열 제품의 20~30% 정도 전력만 소비해도 벤치가 따뜻해진다. 보일러 방식을 사용한 제품은 데우는 데 보통 1시간 이상이 소요되지만, 이 벤치는 30분 이내에 넓은 면 전체에 열이 쉽게 전달된다. 영하 30도 환경에서도 40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대리석의 8배 강도를 가진 강화 유리를 이중으로 사용해서 내구성이 좋다. 와이파이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 원격 제어를 통해 전원이나 시간 및 온도 설정을 할 수 있다. 현재는 서울 서초구, 노원구 등 전국 20여 개 이상 지자체에서 활용 중이다. 로고, 패턴을 입혀 앉음부를 디자인할 수 있어 광고면으로 쓸 수 있다. 세라믹 인쇄 공정을 택해 디자인이 탈색되거나 변색되는 현상을 예방했다. TEL. 055-293-8411~2 WEB. www.nextview.co.kr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집요와 집착 사이
    1. 며칠 전, 두어 달 가량 설계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 다녀왔다. 상하이는 비행기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비교적 가까운 도시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을 자주 방문하기가 쉽지는 않다. 도면으로 구조를 파악하고 사진으로 현장을 살펴보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따른다. 준비해 간 도면을 펼쳐보는 순간 ‘아,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면에서는 그럴듯했는데, 현실 공간을 마주하다 보니 뭔가 설계안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디자인(혹은 설계 작업)은 항상 어렵고 두렵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시작된 그 작업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궁리는 긴 밤까지 이어졌고, 골똘한 생각에 결국 그날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2. 설계 작업은 실재하는 어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창작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창작 행위는 때때로 얼토당토않은 어떤 궁리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태동된 궁리(窮理)는 작업하는 내내 집요(執拗)와 집착(執着) 사이를 무한 반복하다가 결국은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지쳐 멈춰 서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차츰 정리된 설계 도면으로 진화한다. 그러면 모든 설계 작업(적어도 나의 경우에 있어서)의 시발점인 ‘궁리’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내가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은 우선 그 어감이 가지는 소박함에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어떤 발칙한 생각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그저 궁리일 뿐이니까). 정리되지 않은, 아직 불확정적인 생각들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는 것이므로, 아니다 싶으면 누가 눈치 채기 전에 간단히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아무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궁리에는 장소의 제약이 거의 없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의장에서도, 하염없이 막히는 도로 위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궁리는 가만히 한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집요와 집착이라는 두 지점을 부지런히 오간다. 이게 문제다. ‘집요함’은 때때로 좋은 에너지를 유발한다. 반면에 ‘대충’ 혹은 ‘대강’이라는 말은 생활 현장에 있어서 지혜로운 단어로 이해될 수 있지만, 디자인에서는 독이 되는 단어들이다. 좋은 디자인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집착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이 너무 세게 작동한 경우다. 집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너무 멀리가면, 혹은 너무 오래 머물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완전히 그 아우라에 장악되어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관계에서나 디자인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중에는 비상(砒霜)처럼 경우에 따라 약이 되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성(慣性)이다. 이것은 제어할 수 없는 힘이다. 집착에 갇힌 궁리는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 얼핏 보면 그냥 낙서 같은 드로잉이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설계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발전된 생각으로 진화한다. 3.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 보자. 설계 작업에 있어서 궁리는 아주 유용한 행위이며 그 주체는 전적으로 디자이너 자신이다. 이것은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를 가지지만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얻어야 하고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이리 저리 오갈지라도 최종 종착지에서 집착까지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들이 기록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므로. 4. 나는 ‛design’, ‛incubator’라고 새겨진 두 개의 스탬프를 가지고 있다.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다. 작업 과정을 메모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 그러니까 ‘궁리’들을 모아놓은 노트에 부여하는 작은 별칭인 셈이다. 몇몇 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진행하면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도 이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design incubator’에는 덜 익은, 날 것 같은 생각에서부터 설계 치수가 제법 구체적으로 명시된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미지들이 두서없는 텍스트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어차피 인큐베이터의 속성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적으로 출산된 아기에게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듯이, 이 노트는 잘 정리된 책자와는 완전히 격(格)이 다른 물건이다. 지면에 기록하는 이미지들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 즉 연필 혹은 펜으로 생성된다. 무엇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용도가 단순한 물건일수록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로잉들이 무슨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거나 그래픽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필요가 없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갔던 생각들을 그저 형상화해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오래된 노트들을 다시 열어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이미 시공 단계를 거쳐 준공된 작업들도 여럿 있지만, 열정적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한 이유들로 인해 사산(死産)된 작업들, 어정쩡한 집착과 치기어린 객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되지 못한 채 지면에 감금된 작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민낯을 공개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5. 작업의 초기 드로잉은 대체로 간단한 메모로부터 시작된다. 상상 속에서 사이트를 대략 가늠해보고 중요한 키워드 혹은 기호 비슷한 것들을 끼적여본다. 작업의 순서는 전혀 의미가 없고 생각나는 순서대로 기록한다. 몇 십만 평의 대지를 다루는 작업에서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철제 펜스의 기둥 두께를 가장 먼저 메모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평면도 비슷한 드로잉이라도 생산해 낼 수 있었다면 그날의 궁리는 성과가 좋은 셈이다. 6. 평면과 단면은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드로잉이다. 조경 설계는 기본적으로 공간을 구축(構築)하기보다는 공간을 직조(織造)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러 조형 요소들이 수직적으로 적층되어 있기보다는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이룬다. 그것들은 빈틈없이 하나의 평면을 긴밀하게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구성이 가지는 기능을 잠시 삭제해 보면 남는 것은 패턴뿐이다. 평면도라는 것은 결국 패턴으로 시각화된다. 물론 도상의 모든 패턴들은 단순한 그래픽이 아니라 기능을 가진 형태로서 기능하지만, 어떤 요소들은 동일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다양한 패턴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그러니까 기능보다 형태가 좀 더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 경우 어떤 형태(혹은 패턴)를 만들지는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우선권이 있다. ‘우선권’이라기보다는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다. 아무튼 디자이너가 생산해내는 드로잉의 대부분은 바로 이 작업에 집중되어 있다. 7. 공간을 직조하는 행위, 즉 최종적으로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 방식에는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드로잉을 우선하는 부류다. 이들은 대부분 설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인데, 손이 빠른 사람들이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안들을 생산해 낸다. 편차가 많기는 해도 그 속에 썩 괜찮은 대안이 존재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두 번째 부류는 궁리를 우선하는 부류다. 나도 이 부류에 속한다.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가급적 드로잉을 시작하지 않는다. 많이 망설이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생산되는 대안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궁리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시행착오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런데 이 부류가 가지는 치명적 단점은 궁리가 길어질수록 집착이 강해지고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8. 편의상 ‘W프로젝트’라고 부르겠다. 작은 지방 도시에 있는 오래된 온천장을 제법 규모가 큰 온천형 리조트로 조성하는 작업이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드로잉과 설계 도면만 존재할 뿐이다. 온천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조경 설계의 중요한 작업은 야외 스파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나라의 노천 온천이나 스파 리조트 같은 곳들을 다녀보긴 했지만, 설계 작업을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초기안의 디자인 제안은 스파(spa)와 식물원(botanic garden)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이른바 ‘보태니컬 스파(Botanical Spa)’. 여느 워터파크나 스파 리조트에서 보듯이, 식물 요소들은 대체로 수 공간 주변을 치장하거나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반면에 우리가 제안한 W프로젝트는 마치 식물원 안에 야외 스파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떤 새로운 개념을 잘 설명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 특히 건축주가 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드로잉은 디자이너의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의사소통을 위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좀 더 친절하고 읽기 쉬운 그래픽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된 드로잉’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W프로젝트를 위한 진화된 드로잉은 좀 더 구체화된 평면 이미지(패턴 이미지)와 그것을 입체화한 개념 모형이었다.이 개념 모형은 우리가 설계 작업 과정에서 생산해내는 ‘스터디 모형(study model)’과는 좀 달랐고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드로잉들이 건축주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은 이미지, 패턴 혹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식물원과 스파를 결합해야 하는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건축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이 개념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두 번째 대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직선은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강하다. 아무리 가는 선이라도 시점과 종점을 단번에 거침없이 연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진다. 직선은 곡선과 반대되는 말이지만 ‘자연’과도 대척점에서 있는 말이기도 하다. 두 번째 대안은 주변의 자연과는 사뭇 구분되는, 직선이 강조된 형태였다. 다양한 높이에서 야외 스파 영역을 부감할 수 있는 조건에서는 공간이 가지는 조형적 질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면도는 공간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기는 하나 주관적인 시점을 상실하기 때문에 공간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형을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형은 설계자의 생각을 검증하는 유용한 도구이면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카메라 작업을 통해 그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 아무튼 두 번째 대안은 건축주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설계안으로 발전할 동력을 얻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첫 번째 안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집착도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본 설계가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 우리는 또다시 세 번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축주도 참 집요하다. 적게 잡아 이번이 세 번째 대안일 뿐 그동안 소소한 조정안까지 포함하면 열 번 이상의 조정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설계 작업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 대안은 직선 요소를 대폭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자연과 분리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대안이 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디자이너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다.작업은 여기까지만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리된 설계안은 결국 현실 공간에 등장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들었다. 9. 설계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집착이라는 수위를 넘나들면서 집요하게 ‘궁리’를 지속시키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흥분과 걱정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금전적 대가는 바로 그 과정을 견디고 지나는 수고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이 시간에도 수많은 조경가들이 이 지난한 통로를 지나고 있다. 드로잉을 생산하고, 설득하고, 목청을 한껏 높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 이것뿐이랴. 재미가 있지 않은가. 고요한 작업실에 앉아 백지를 잠자코 바라보는 순간이 행복하다. 이 궁리의 끝이 어디인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즐겁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 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1965년 서울 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의 설계 실무를 거쳐,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 [에디토리얼] 성큼 다가온 광주 IFLA 2022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이번 행사의 주제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다. ‘다시, 조경의 공공성’을 소환해 기후 위기 시대의 조경을 논의할 IFLA 2022는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통과한 국내외 조경가들의 열띤 토론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3월호에는 IFLA 2022의 주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미리 만나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더 상세한 내용은 대회 공식 홈페이지(ifla2022korea.com)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획 의도를 밝힌 조경진 조직위원장(한국조경학회 회장)의 글에서 볼 수 있듯, IFLA 2022는 전 세계 조경가들이 모여 조경의 미래 좌표를 구상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국내 조경계의 활로를 여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가 말하듯 이번 행사는 세계 조경의 최신 흐름과 글로벌 의제를 공유하는 기회이자 한국 조경의 성과를 알리는 기회이며 조경 문화의 과거와 미래를 잇고 엮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배정한(조직위 학술위원장)의 글은 대회 주제의 의미를 짚어본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동시대 도시가 마주한 기후변화, 인구 감소, 도시 쇠퇴와 재생,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다양성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사회‧문화적 좌표라고 할 수 있다. 김아연(조직위 기획위원장)은 IFLA 2022의 일정과 장소, 강연, 답사 등 다양한 사전 행사와 본 행사, 사후 행사의 주요 내용을 꼼꼼히 소개한다. 2월 말로 마감한 논문 초록 접수는 추후 연장될 예정이므로 마감 날짜를 놓친 독자들은 홈페이지의 공고문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오화식(조직위 산업‧재정위원장)은 대회 기간 중 한국조경협회 주관으로 개최될 조경산업전(K-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엑스포)의 방향, 프로그램, 조직을 안내한다. 이번 산업전은 한국 조경 업계가 내일을 향해 ‘리:스타트’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다. 김영민(조직위 학생위원장)의 글은 IFLA 학생설계공모전과 학생 샤레트의 주제, 진행 방식, 의의를 소개한다. 그의 말처럼 IFLA 2022의 학생 프로그램은 다음 세대 조경의 새로운 향방을 미리 그려보고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비전과 안목을 공유할 기회가 될 것이다. 서영애(조직위 홍보위원장)는 IFLA를 비롯한 여러 국제 행사 참가 경험을 되돌아보며 초록 접수와 등록, 개회 행사와 기조 강연, 발표와 포스터 전시, 폐막식 등의 이모저모를 살핀다. 김태경(한국조경학회 수석부회장)의 글은 30년 전 가을, 서울, 경주, 무주에서 열렸던 IFLA 1992의 추억과 에피소드를 재생한다.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듯, 1992년은 세계조경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 조경이 도약한 해였다. 편집부 이수민 기자가 옛 잡지를 다시 펼쳐 IFLA 1992의 다양한 장면과 기억을 재구성한다. 아울러 이달 지면에는 IFLA 2022의 기조강연자 중 한 명인 단 로세하르더(Daan Roosegaarde)의 최근 연작, 드림스케이프를 싣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아티스트이자 글로벌 혁신가인 단 로세하르더는 사람, 기술,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상상력 넘치는 작업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그의 작업 태도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스혼헤이트(schoonheid)’다.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이 네덜란드어 단어는 “창조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공기와 에너지에서 비롯된 깨끗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품고 있다. “내게 디자인은 의자나 램프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개선하는 일이다. 상품이든 도시든 경관이든 디자인을 할 때 스혼헤이트를 기준으로 삼아 아름답고 사용하기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야 한다.” 그로우, 어반 선, 시잉 스타, 스파크로 이어지는 연작 드림스케이프는 로세하르더의 작업에서 우리가 풍부한 상상력의 예술가, 머릿속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건축가, 디자인과 기술을 융합하는 엔지니어,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환경운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이유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종이 잡지에 온전히 옮기기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면에 첨부한 QR코드에 접속해 드림스케이프에 담긴 로세하르더의 상상과 실험을 마음껏 감상하시길 권한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님도 즐!
    2000년, 온라인 게임이 유행이었다. 집에서 ‘라이온 킹’이나 ‘고인돌’ 같은 걸하던 나와 친구들은 같은 게임, 같은 서버에서 캐릭터를 만들어 함께 모니터 속을 여행했다. 그런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초등학생이 아닌 척 해야 했다. 고급자용 사냥터에서는 ‘그룹사냥’이 필수였지만 어린이를 잘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딩’은 ‘노매너’라서 같이 사냥할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때론 불만족스러운 역할을 맡더라도 공격수는 공격하고 보조자는 보조하면서 던전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파트너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욕을 하면 안 된다. 욕심이 나도 다른 사람의 아이템에 손대지 않는다. 다른 던전을 찾아가기 귀찮더라도 다른 유저가 게임 중인 사냥터에 난입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룰을 어기면 다른 유저들은 게임 룰을 알려주는 대신 “님 초딩이셈? 즐!”을 외쳤다. 요새는 ‘노 키즈 존’ 팻말이 걸린 공간을 자주 마주친다. 대개 ‘죄송하지만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하여…’로 시작하는 안내문은 곱게 윤색한 버전의 “님 초딩이셈? 즐!”로 보인다. 시간과 돈을 들여 방문한 곳에서 ‘즐겜’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가 어린이에게 줄 것은 “즐!”이 아니라, ‘그룹사냥’에 끼워주고 ‘룰’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철이 없고 규칙을 모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랬고, 또 우리의 조카나 아들딸이 그렇듯이. 이 사실을 잊은 안내판을 보며 혼자 말해본다. “님도 즐!”
  • LH 시그니처 가든 LH Signature Garden
    아파트 조경 아파트 조경은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별로 없는 시장이다. 입지, 브랜드, 평수 등이 세트로 묶인 상품인 데다 보통 공용 공간이기에, 인테리어처럼 따로 구매하기 어렵다. 요즘 시장에 나오는 상품은 서로 비슷하다. 우리는 왜 아파트 외부 공간을 계속 이렇게만 만들고 있는가. 단지 내 조경 공간에 대한 높아진 관심과 만족도에도 불구하고, 짓는 공간과 테마는 브랜드 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획일화되었다. 쏟아지는 특화 속에 차별성이 점점 없어지는 역설적 현상은 아파트가 주거 공간보다는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고민 없이, ‘특권층’, ‘상위 0.1%’, ‘노블리스’ 등의 노골적인 광고 문구를 쓰면서 사회적, 경제적 구별 짓기를 전략으로 삼는다. 선망받는 삶을 원하는 소비자의 허영심에 기댄 상업적 마케팅도 한몫하는 듯하다. 일반인이 전문 지식 없이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근 단지와의 비교’만이 주요 평가 수단이 되면 우리 단지에도 석가산이 있어야 하고, 좀 더 크고 멋있는 소나무가 옆 단지보다 많아야 하고, 유명한 ‘작가’가 설계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이런 시장에서는 이미 좋은 평가를 받은 답안을 그대로 또는 조금만 바꿔 쓰는 것이 소비자에게나 공급자에게나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경 특화의 트렌드는 브랜드별 특성보다는 시대별 유행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하면 몇 년 안에 다른 브랜드들이 그대로 이를 모방함으로써 유행을 만드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과연 ‘입주민들은 이런 것을 원한다’고 흔히 알려진 것 중 어느 만큼이 사실인가. 이미 평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국내 아파트 시장의 특성을 고려할 때, 가장 자주 제기되는 민원이거나 조합의 집단적 목소리가 거세다고 해서 이를 바로 소비자의 요구로 보기는 어렵다. 스스로 판단한 가치와 선호보다는 그게 비싼 거라더라, 그런 것이 좋은 거라더라, 어째서 안 좋다더라 등 여러 ‘카더라’가 덧대어져 형성된 대중적 취향에 과연 실체가 있는가. 우리는 근본도 알 수 없는 석가산이 아파트마다 솟아 있는 것을 보면서, 사실 공급자가 해결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쉽게 규정된 가짜 트렌드로 의심해왔다. 시그니처 가든 LH 분양주택 시그니처 가든 개발 프로젝트는 분양주택에 적용될 LH만의 특성을 갖는 정원 유형을 개발하기 위해 중앙정원, 동 앞 정원, 운동정원 세 가지 공간에 대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확립하고, 이를 안성 아양지구 B-1블록에 적용하기 위해 시작됐다. 새로운 주거 가치와 변화하는 이용자의 수요를 반영한 정원 공간을 개발하는 과업 목표는 지극히 상투적인 것 같지만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보자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이 시장에서 가장 큰 공공의 공급자로서 LH다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특화 정원으로 무장한 요즘 아파트와는 상반된, 오래된 자연 속에 조화를 이룬 주공 아파트에 대한 ‘아파트 키즈’의 관심에 주목했다. 영화 ‘집의 시간들’에 등장하는 입주민 인터뷰나 아카이브 잡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담담한 기록들은 시장 주도적으로 생성된 상품적 가치에 가려져 있던 일상 속 주거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성하게 숲을 이룬 나무들이나 소박하게 비워진 들판과 같은 평화로운 공간은 최근의 부동산 시장에서 만들어진 특화 아이템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입주민에게 오래된 아파트의 단점을 보완하는 큰 장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지하 주차장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큰 나무 그늘에 주차하면 열에 아홉은 차에 새똥을 맞는다. 지하 주차장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공 지반 위에 있어서 처음부터 큰 나무를 옮겨와도 더 자라지 않는 아파트 정원을 보면, 그보다는 자연 지반에 뿌리 내려 10층 높이까지 자라나는 숲이 더 좋다.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최근의 특화 정원과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 잡은 소박한 아파트 외부 공간을 비교해볼 때, 상업적으로 편향된 변화 속에서 자연의 미적 가치나 조경의 다양한 경관적 설계 해법은 과소평가되고 장식적 조형물이나 시설물 개발이 남용된 것은 아닌가. 단순히 취향의 문제를 떠나, 다른 곳의 큰 나무를 옮겨와 심는 것 자체에도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 진짜 자연이 될 수 없는 편평한 슬래브 위에 헛헛함을 채우려는 장식적인 요소들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경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센트럴 힐 중앙정원의 유형으로 개발한 공간은 ‘센트럴 힐’이다. 세 곳의 시그니처 가든 중 아파트 외부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가장 잘 함축된 곳이다. 센트럴 힐은 관람형 경관 시설로 채워져 행위의 다양성이 부족한 석가산과 달리, 완만한 경사면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정자목과 열린 공간이 커뮤니티의 공동체적 가치를 담도록 하는 ‘마을 언덕’이다. 언덕은 정상부의 정자목 쉼터, 물이 따라 흐르는 동선, 열린 풀밭 구릉으로 구성된다. 바닥에 다다른 수로는 작은 폰드와 바닥 분수가 있는 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에는 언덕을 향해 열리는 티하우스가 있어 공간의 활용을 돕는다. 언덕의 높이는 약 2.5m인데, 이는 약 30×40m인 안성 아양지구 센트럴 힐 부지의 크기에 따른 것이다. 이용이 가능한 완경사를 유지하고 정상부까지 경사도 1:18 이하의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선형의 동선을 따라 전면부와 후면부 경사가 다른 콩 모양의 지형을 설계했다. 식재와 시설물 모두 지형의 설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정상부에는 마을의 정자목 역할을 하는 대형 그늘목을 심고 아래 너럭바위형 앉음 시설을 배치했다. 수경 시설은 동선을 따라 같은 경사로 흐르며, 점점 넓어지다가 발을 담글 수 있는 작은 폰드와 그 옆 바닥분수로 이어진다. 급경사면에는 두 겹의 플랜터 월을 설치하여 계절을 표현할 수 있는 관목을 식재하고, 급경사에서 완경사로 변곡되는 구간은 안전을 고려해 낮은 관목을 밀식했다. 지형과 수로 유토 모형과 라이노 모델링 수정을 거쳐 경사도 5.5% 이하의 보행 동선, 1:12 이하의 편안하게 걸터앉을 구릉, 좁은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계단식 화단, 하중에 따른 높이 제약과 대형목을 위한 유효 토심 등 각기 다른 조건을 만족하는 하나의 지형을 완성했다. 2.5m의 언덕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1.5m 이하의 토심을 상정한 지하 주차장 구조에 변경이 필요하다. 대상지의 건축 설계가 완료된 후였기 때문에, 기존 설계 하중을 넘지 않도록 언덕 하부에 EPS 블럭을 활용했고, 시공의 용이성과 공사비 등을 고려해 EPS 부피와 형상, 경량토와 일반토의 비율을 3D 설계를 통해 최적화했다. 한 대상지의 설계가 아닌 디자인 가이드라인 수립을 목표로 하는 설계이기 때문에 지형을 형성하는 원리와 설계 주안점, 다른 크기나 형상의 부지에 적용할 경우 주의해야 할 점 등 설계 원칙을 고민해 매뉴얼로 정리했다. 가산(假山)을 진짜 언덕으로 바꾼다더니 EPS 블럭이 채우고 있는 이 언덕도 가산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관람용이 아니라 점유가 가능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환한다는 점과, 완만한 곳과 경사진 곳, 낮은 곳과 높은 곳, 길과 물가, 한적한 너럭바위와 왁자지껄한 바닥 분수존 등 하나의 언덕이 제공하는 다양한 행위의 유도라는 측면에서 ‘우리 마을 언덕’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수로의 설계와 시공에서 일정한 경사는 매우 중요하다.수로 경계의 경사는 산책로의 경사와 동일한데, 산책로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요건을 충족하는 5.5%의 완만한 경사로로 조성되어야 한다. 시범단지인 안성 아양지구 B-1블록의 경우 산책로는 최고점 높이인 2m까지 4.4%의 일정한 경사로 설계했다. 수로 내부에는 일정 거리마다 물넘이를 설치하여 계단식으로 물이 담기도록 하고, 바닥면의 경사는 3% 이하가 되도록 조정한다. 계단식 물넘이를 두어 수로 바닥을 산책로 경사보다 더 완만하게 설계해야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사가 급하면 물이 너무 빠른 속도로 내려가게 된다. 유속을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2.5%를 넘는 경사면을 흐르는 물은 어린아이가 종이배를 띄우고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둘째, 미끄럽지 않도록 표면을 마감하더라도 사람이 밟고 섰을 때 경사가 급하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센트럴 힐의 수로는 폭이 그리 넓지 않고 바닥면에 텍스처 마감이 있어, 들어가서 뛰어노는 행위를 유도하지는 않지만 발을 담그는 등의 소극적 친수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므로 완만한 바닥 경사가 더 안전하다. 셋째, 발을 담글 수 있는 담수 구간을 일정한 거리마다 형성하여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다. 물이 담기는 구간이 없으면 흐르는 경사면에서 일정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유량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유속이 더 빨라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수경 시설 연출 효과상의 하자를 줄일 수 있다. 담기는 구간 없이 흐르는 물의 두께가 일정한 경우, 수로의 내측과 외측의 높이가 매우 정확하게 시공되지 않으면 물이 닿지 않는 곳이 생길 수 있어 훨씬 정확한 시공이 필요하다. 리틀 포레스트와 가든 피트니스 동 앞 정원은 ‘느슨한 공존’을 추구한다. 나만의 정원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싶은 선호를 반영하되, 이웃과 공간을 나누어 쓰는 것이 가능한 정원 공간이 되도록 했다. 외부로부터의 완벽한 차단이나 분리가 아니라 적당한 가시성이 있는 공간에서 동석이 강요되지 않는 이용을 고려했다. 원래 공간명은 ‘오손도손’에서 일부를 따와 도손정원이라 했으나, 추후 영문명으로 일괄 변경하면서 ‘리틀 포레스트’로 변경되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30~50cm의 단차를 활용해 주요 공간 두 곳의 시선을 분리했다. 강요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임을 유도하기 위한 요소로 물이나 불과 같이 움직이는 자연 요소를 도입하도록 했다. 안성 아양지구에는 위로 솟는 샘물을 표현한 종형 수경 시설을 적용했고, 관리와 안전 문제로 불꽃을 감상할 수 있는 화로는 대안으로만 제시되었다. 이 휴게 공간은 마운딩 위 관목으로 더 위요감을 갖도록 했는데, 실제 지형의 높이나 관목의 밀도가 생각보다 이를 달성하지 못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단지 주변부 잉여 공간에 운동 기구만 모아 놓아서는 가고 싶은 운동 공간 또는 SNS에 공유하고 싶은 일상 공간이 되지 못한다. 운동 시설은 이용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지만 이용층이 특정 연령대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스트레칭과 유산소, 근력 운동으로 이어지는 운동의 기본 시퀀스를 따라 각 구역별로 독립적인 공간을 배분했다. 각 공간을 정원으로 둘러싸 ‘가든 피트니스’로 명명한 공간의 성격을 그대로 표현했다. 공간별 레벨을 달리하고 언덕으로 감싸는 등 기본적인 공간 형성의 틀은 리틀 포레스트와 공통분모가 많지만, 쓰임과 공간 분위기를 고려하여 포장(철평석 부정형 포장 vs. 고무칩 포장), 식재(섬세한 계절 연출 vs. 잎의 텍스처와 무늬를 강조), 시설물(자연석 놓기 vs. 조약돌 콘크리트 조형스툴)에서 전략을 달리했다. 차별화 말고 진짜 조경 양재희, 이호영·이해인 소장 인터뷰 시그니처 가든 프로젝트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양재희(이하 양)이번 프로젝트는 설계와 더불어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확립하는 프로젝트였다. 단순히 설계 경쟁이나 화려한 디자인으로 귀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LH의 정원 설계가 추구하는 일관성 있는 방향 설정, 체계적 설계 관리를 목표로 했고, 장기적으로는 가든 브랜드 수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맡은 업무는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용역설계의 발주, 기본설계와 실시설계의 감독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용역사가 설계를 잘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확립된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양일회성으로 넘기기 아까운 정원 설계와 시설물 디자인 등이 LH 주택 설계에 존재했다. 이러한 좋은 설계를 디테일 도면 공유, 준공단지 설계 피드백 등을 통해 다른 단지에 적용하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또한 단지별로 정원 특화를 진행하기 때문에 정원의 주제와 설계 아이템이 일관성을 갖기 어려웠다. 통일성 있는 가든 설계 전략과 구체적인 가든 프로그램과 설계 요소를 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설계 모델 개발과 더불어 시범 단지에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세 공간(중앙정원, 동 앞 정원, 운동정원)을 시그니처 가든으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양 어느 단지에나 적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입주민의 체감도와 접점이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었다. 기존 정원 사례 답사, 설계자와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이용성과 체감도가 높은 프로그램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선정했다. 중앙정원인 커뮤니티 가든은 주민 간의 활발한 소통의 중심으로 삼고 싶었고, 동 앞 정원은 최근 관심이 높아진 세컨드 하우스 공간으로 자리 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용도와 만족도가 높은 운동 시설에도 작은 정원을 만들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번 프로젝트 설계의 첫 단추는 무엇이었나? 이해인(이하 해)엇비슷한 아파트 조경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단순히 주차장 위 평평한 중앙 공간에 수직적 요소를 만들다보니 석가산처럼 가짜 요소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러면 추억이 깃들 틈이 없다. 입주민들을 수동적 소비자로 만든다. 화려하고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언덕에서 뛰어놀고 자연스럽게 동산에 앉아서 휴식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보통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서 이러한 아파트 공간이 생겨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중앙정원에 활용한 정자목과 마을 언덕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었나? 이호영(이하 호)과거에는 마을 언덕이 흔한 풍경 중 하나였다. 마을 어귀에는 큰 정자목이 있고, 평상에 어르신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대화를 나눴다.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을 형성한 것이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가면 마을회관에 다다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면 집의 앞마당에 도착한다. 정자목부터 시작해 집의 앞마당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이를 아파트에 옮겨 왔다. 정자목 아래로 어르신들이 모이고 언덕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설계를 풀어냈다.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범용성도 중요하지만, 대상지 고유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해 세 공간의 개발 목적이 LH 브랜드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 상황에 적용이 가능한 원형(prototype)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했다. 단지 규모나 주동의 생긴 모양, 조경에서 쓸 수 있는 땅 모양이 다르다 보니 축소형, 표준형, 확장형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한 배치와 기준을 설정했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 시뮬레이션을 많이 했다. 또한 단지만의 특성을 고려해서 교목 및 관목 종류, 돌 등은 해당 지역의 맥락적 특성이 보태질 수 있도록 했다. 완성된 공간 중 마음이 드는 곳은 어디인가? 반대로 아쉬운 부분은? 호 자연형 수로는 경사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다 바뀐다. 일일이 다 계산하고, 수작업으로 열심히 만들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단순해 보인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것이 엄청난 노력과 시스템의 결과라는 걸 안다. 복잡한 시스템을 간결한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데는 많은 공이 든다. 그래서 가장 보람이 있었다. 덧붙여 잔디밭 대신 풀밭을 만들지 못한 점은 아쉽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정자목이 더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잔디가 초지가 되면서 더 풍성해질 공간을 그려본다. 오로지 시간만이 불어넣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매력이다. 실제 입주민과 LH 내부의 반응은 어떤가? 양 안성 아양지구는 입주자들이 조성된 조경 공간을 보고 분양 계약을 체결한 지구다. 입주자들이 단지를 둘러보고 조경 공간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들었다. 조경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 한 분이 ‘분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는 후문도 들었다. 우리가 의도한 대로 실제로 살고 싶은 공간이 조성된 것 같다. 새로운 시공 방법으로 인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시공 담당자, 감리자, LH 감독 등 모든 관계자가 적극적으로 임해주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좋은 아파트 조경이란 무엇인가? 호 쓰임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차별화된 조경을 경계하고 싶다. 차별화란 명분을 앞세워 호텔이나 리조트처럼 으리으리한 조형물을 넣어서 화려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놀러가는 공간이라면 화려할수록 좋겠지만, 우리는 집에 쉬러 간다. 가령 호텔이나 리조트는 일상을 벗어나는 공간이지만, 주거 공간은 편안함이 1순위인 곳이다.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자연의 소리를 더 들을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다. 진정한 차별화는 주거 공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조경설계 HLD(시그니처 가든), 조경그룹 이작(시그니처 가든 외 단지 내 조경), 데오스웍스(티하우스 및 퍼걸러) 발주 한국토지주택공사 위치 경기도 안성시 아양4로 46 일대 면적 1,790m2(단지 대지면적: 38,590m2) 완공 2021. 7. HLD는 이호영과 이해인이 설립한 창의적 디자인 회사다. 디자인을 통한 주창과 혁신이라는 철학 아래, HLD의 디자인은 공간적 문제와 도전 과제에 대한 ‘핵심적 개입’ 제공을 목표로 한다. 양재희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하고 LH에서 아파트 설계, 공원 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담당하였고, 시공, 유지 관리, 하자 보수 등 건설 사업의 생애주기를 두루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LH 시그니처 가든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했다.
    • 이해인
  • 미리 보는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
    2022 광주 세계조경가대회 기획 의도 _ 조경진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조경의 공공성을 다시 소환한다 _ 배정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 주요 프로그램 _ 김아연 리:스타트, 조경산업전 _ 오화식 미래의 조경가들을 위하여 _ 김영민 세계조경가대회 참가기 _ 서영애 응답하라 1992 IFLA _ 김태경 다시 읽는 제29차 세계조경가대회 _ 이수민 2022년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에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를 주제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가 개최됩니다. 30년 만에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조경가대회를 독자들에게 미리 소개하여 관심을 고취시키고자,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의 주요 내용을 다루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IFLA 2022의 주제와 개요, 여러 프로그램 등을 소개하고, 지난 IFLA 총회를 돌아보는 원고를 함께 수록함으로써 국내 조경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개최 의의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진행 배정한, 남기준,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편집부
  • [미리 보는 IFLA 2022] 2022 광주 세계조경가대회 기획 의도
    2022년은 한국 조경의 뜻깊은 해다. 한국 조경이 태동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1972년 12월 29일 한국조경학회가 출범했고 학회 창립과 함께 실무 조경도 시작됐으니 ‘한국 조경 50년’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조경학회는 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비전플랜 선언, 『한국조경50』 서적 및 조경학 사전 발간 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벤트는 광주에서 열릴 제58차 세계조경가협회 세계총회(이하 세계조경가대회)다. 세계조경가협회IFLA(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는 77개 국가의 7만여 명 조경가가 참여하는 세계적 조직이다. 1948년 영국에서 조직된 이후 현재 유럽, 아시아‧태평양,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5개 지회로 활동하고 있다. 협회의 목표는 인류의 번영을 위해 전 지구적으로 지속가능하고 조화로운 생명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UN,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면서 전문 지식과 기술, 직업 윤리와 교육 노하우를 공유하고 전파하는 일을 한다. 시의적절한 글로벌 의제를 설정하고 전 세계 조경계의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21년 발표한 ‘기후행동공약(Climate Action Commitment)’이 그 예다. 2005년부터는 조경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젤리코 어워드를 제정하여 독보적 기여를 한 조경가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13명의 조경가가 수상했고, 중국인 두 명이 이에 포함되어 있다. 조만간 한국 조경가가 수상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1992년 세계조경가대회를 서울, 경주, 무주에서 개최한 바 있다. 당시 조경계가 힘을 합쳐 행사를 치르면서 한국 조경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조경가대회 외에도 IFLA 아시아태평양 지역총회를 1999년 양양과 2009년 인천 송도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아시아태평양 지부는 IFLA APR 어워드(Asia Pacific Region Award)를 운영하고 있는데, 국내 많은 조경 작품이 이 상을 받은 바 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을 포함하는 IFLA AAPME 어워드로 운영되고 있는데 광주 세계조경가대회에서 이 시상식 행사를 유치해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 조경계는 세계조경가대회에 그동안 크게 기여해왔다. 그룹한은 2008년부터 학생 공모전 상금과 경비를 부담해왔다. ‘그룹한상’이라고만 명시해 어느 나라가 후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데, 재정적인 면에서 세계조경가대회 운영에 한국 기업이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2022년 세계조경가대회 한국 유치는 2016년부터 추진되어온 일이다. 광주컨벤션뷰로(현 광주관광재단)가 적극적 유치에 나섰고, 고 김성균 회장(한국조경학회)이 2022년 한국 유치를 위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2017년 몬트리올 세계조경가대회 각국 대표자 회의에서 필자가 유치 설명회를 진행했다. 광주는 특별한 역사가 있는 도시이고 2022년이 한국 조경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각국 대표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치가 확정됐고, 당시 광주시와 광주컨벤션뷰로 관계자가 기쁨을 함께했다. 이후 2021년 조직위원회를 결성했고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행사 준비를 위해 스폰서를 모집하고 있다. 이미 여러 뜻있는 분들과 기업들이 참여해주어 어느 정도 후원금이 모였는데, 행사 준비를 위해 더 많은 후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세계조경가대회를 준비하는 일이 녹록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 상황을 상정하면서 상세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코로나19가 언제 잦아들지 몇 명이 참석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실행 계획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그래도 8월에는 코로나19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여건이기에 좋은 콘텐츠를 준비하면 많은 참가자가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세계조경가대회를 치르며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국내 조경가에게는 세계 조경의 최신 흐름과 글로벌 의제를 접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기후 위기 대응 전략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지, 뉴노멀 시대의 조경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다양한 생각과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계적인 흐름을 이끄는 조경가들과 예술가들의 기조 발제를 통해 미래를 여는 통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한국 조경의 성취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주제 발표와 전시, 서적 출간으로 한국 현대 조경의 성과가 공유될 예정이다. 한국 조경이 지난 50년 동안 어디까지 왔고 어디쯤 서 있는지 진단하고 매듭을 짓는 일이기도 하다. 대내적으로도 조경의 사회적 기여와 전문성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러 중앙 부처와 협력해 생산될 콘텐츠들은 일반 대중에게 조경을 알리는 소재로 활용될 것이다. 산림청과 협력해 국립세종수목원에 조성할 IFLA 기념정원을 공모전을 통해 확정했고 내년 초 완공될 예정이다. 건축공간연구원과 ‘미래의 공원과 공공 공간’이라는 주제의 기획 세션을 공동 준비하고 있고, 다른 정부 부처와도 기획 세션과 전시 등 협력을 준비하고 있다. 셋째, 다양한 투어와 행사를 통해 조경 문화의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조경가대회를 다니면서 경험한 바로는 다양한 행사 장소 자체가 서사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일정 중 오프닝 리셉션과 갈라 디너는 각 도시가 자랑할 만한 유산이 있는 곳에서 진행된다. 2005년 영국 에든버러는 오프닝 리셉션을 식물원에서 진행했는데, 패트릭 게데스와 이안 맥하그 등을 거명하며 스코틀랜드 조경의 전통을 알리는 환영 인사를 했다. 2008년 네덜란드 아펠도른 때는 헤트 루(Het Loo)궁전에서 오프닝 리셉션을 열어 왕실 정원 문화의 유산을 소개했다.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 개최 도시 광주는 1992년 개최지인 경주와 대비된다. 경주가 고도로서 신라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장소라면,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다양한 예술, 고유한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무등산, 호수생태원, 광주푸른길, 광주천, 양림동, 아시아문화전당 등 답사지에서 도시의 다양한 풍경과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인근 담양은 정원 문화의 보고로서 명옥헌, 식영정, 소쇄원, 관방제림, 죽녹원 등이 답사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광주의 또 다른 장점은 전라도의 다양한 투어 코스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풍부한 답사지가 호남 조경 문화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수 있다. 보길도, 다산초당, 백운동 원림 등 조선의 대표 정원과 대흥사, 선암사, 송광사, 운주사 등 사찰도 포함되어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신안 섬들, 해남 솔라시도, 전주시 등 활발한 조경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조경가로서 윤선도를 재발견하고, 전주시 총괄조경가가 이루어낸 성과를 함께 조망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조경의 축제에 많은 조경인이 함께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조경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축적되어 한국 조경이 한 번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조경인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 [미리 보는 IFLA 2022]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조경의 공공성을 다시 소환한다
    맑은 공기,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녹지로 풍성한 유럽의 녹색 수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2019년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56차 세계조경가대회에 조경진 교수(당시 한국조경학회 수석부회장)와 함께 참석했다. ‘모두의 땅(Common Ground)’을 주제로 내건 오슬로 세계조경가협회(이하 IFLA) 총회(이하 세계조경가대회)에는 세계 전역의 조경가 1,300여 명이 참여해 기후변화와 도시 위기에 대응하는 조경의 비전과 실천 전략을 제시하고 토론했다. 조경진 교수가 한국 대표로 참석한 IFLA 이사회에서는 이틀에 걸친 토론 끝에 동시대 조경계가 대처해야 할 다섯 가지 글로벌 의제로 기후변화, 식량 안보와 농업, 커뮤니티 참여 설계, 건강과 웰빙, 문화 고유성이 채택됐다. 77개국 대표가 참여한 이사회에서 조 교수는 2022년 한국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될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를 홍보하는 한편, 대회 주제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를 제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리:퍼블릭’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리:퍼블릭의 ‘리’를 ‘어떤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이라는 뜻의 접두사 리re로 생각한다면, 리:퍼블릭은 ‘공공(성)에 다시 주목하는’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시 공공성의 경관과 조경을 지향하는’ 의제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리:퍼블릭의 ‘리’를 ‘~에 대한, ~를 주제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리re로 여긴다면,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공공적 조경 행위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리퍼블릭(republic)은 군주제에 반하는 정치 체제인 공화제 또는 공화국에 해당한다. 본래의 경관(landscape) 개념에 배태된 수평성(horizontality)을 떠올린다면, 군주제의 수직적 위계와 권위에 대항하는 공화제가 경관 개념과 조응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리퍼블릭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일, 사건, 상황, 문제’를 뜻하는 명사 ‘레스’에 ‘공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 푸블리쿠스(publicus)의 여성형 ‘푸블리카’가 결합된 말로, 공적인 일(또는 문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곧 ‘공적인, 공공의 경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전 세계는 팬데믹 확산, 기술 혁명, 정치적 갈등과 같은 급격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건강, 행복, 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 조경 전문가에게 주어졌다. 국지적 지역부터 전 지구적 스케일까지 포괄하는 조경의 다양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조경가들이 모인다. 조경의 공공 리더십을 강조하는 2022년 세계조경가대회의 주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조경의 전문적 성취와 학문적 성과를 되짚어보고(re:visit),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통해 지구 경관의 재구성을 실험하고(re:shape), 일상의 생활과 환경을 건강하고 활력 있게 되살리며(re:vive),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한다(re:connect).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아이디어와 비전을 나눌 대한민국 광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환경과조경407호(2022년 3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