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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지의 기억을 읽고 장소의 서사를 담는 디자인
    조경이 하는 일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먼저 찾게 되는 것은 그 지역만이 가진 이야기들이다. 문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땅이 생겨남으로써 발생한 자연과 사람의 현상적 이야기들. 그것은 역사, 지리, 기후, 생태, 인문 등 대지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 디자인에 앞서 그 장소가 지닌 이야기를 탐색하고, 그 공간이 요구하는 적합한(올바른) 이용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서 풀기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가장 먼저 그곳의 내력을 살핀다. 오랫동안 배어 있던 본 모습, 원래의 쓰임, 여기에 왜 이렇게 큰 나무가 남아있는지 등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품는다. 사실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설계 수순이다. 그런데 의외로 프로젝트를 의뢰한 사람도 그런 내력을 모르고 오히려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계안에 지역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하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제공해주어, 그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성 찾기와 공간 디자인 공간을 다룰 때 시각적 디자인의 완결성은 공감각적 측면에서 신선함, 안정감, 흥미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각적 디자인보다 먼저 하는 일은 장소성 찾기다. 장소의 가치와 쓰임을 정립하고 그것을 가장 적합한 형태로 공간에 녹여내는 것이 좋은 공간 디자인이다. 최근 진행한 부산 사상구 감전당산공원이 그랬다. 구청장 보고회 때 발표의 절반 이상을 장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데 썼다. 오래된 나무가 있고 주택가가 밀집한 지리적 연유를 고지도와 함께 설명하고,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담당 국장은 이런 방식의 설계 보고회는 처음 본다고 놀라며 사업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은 이후에 선보인 계획안의 디자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전당산공원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풍경을 추측할 수 있는 옛 지도는 오래된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특정 장소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리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은 공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장소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알리는 일련의 과정이 공간을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디테일 설계를 하면 할수록 디테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디테일은 직접 시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다루기 까다로운 영역이다. 감리나 시공을 병행하지 않는 설계자가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작은 요소에 공간의 정체성과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설계하고 싶어도 현장의 성격과 여건에 따라 공식적이고 효율적인 설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공에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디테일과는 다른) 디테일한 설계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다. 김해시의 작은 프로젝트에서 복잡하고 민감한 설계안을 내자, 담당 부서가 비공식 감리를 요청하는 상황이 생겼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공사의 외주 업체인 시설물 팀은 대충 빨리 마무리하고 현장을 떠나고 싶어 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꼼꼼하게 위치, 각도, 높이 등 하나하나를 조정하고 싶었다. 시청 담당자는 우리에게 감독의 권한을 넘겨주며 원하는 품질이 나오도록 시공사와 협의하도록 했고, 우리는 도면과 다르게 만들어온 시설물을 설계 의도대로 조정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작지만 완성도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을 본 다른 발주처도 비공식 감리를 자연스럽게 요청했다. 중요한 공정의 경우 자재의 종류, 색상, 시설물의 위치 등을 시공자가 설계자에게 허락을 받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비공식 감리를 진행했던 부산 금정구의 어느 쌈지공원 공사. 약 300평 공간에 경사지를 활용해 모던한 계단 공간과 상징 공간, 휴게 공간을 계획했다. 우리는 시공사와의 첫 미팅에서 도면과 공사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연락 달라, 공사의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며 서로 신뢰와 유대를 형성했다. 경사지에 계획한 UHPC 계단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복잡한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구조 도면을 본 철골 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벨을 못 맞춘다고 현장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복잡하긴 했다. 너무 복잡해서 레벨을 이해하고 철골 도면을 작성해 줄 수 있는 구조 팀을 구하지 못해 직접 작업했던 도면이다. 다행히 빠른 시간에 다른 철골 시공팀을 찾았고, 시공 팀은 복잡한 도면을 잘 소화해 상판만 얹으면 되는 깔끔한 계단 구조를 만들어냈다. 공간 계획의 실마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며 풀어나간다. 오래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설화의 짧은 문구에서 시작하기도 하며, 그 장소에서 필요한 이미지를 찾거나 그곳에 있었을 법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김해 경전철 하부의 작은 공간 시설물은 김수로왕의 탄생 장면을 묘사하며 가야 왕도 김해의 오랜 역사를 한번에 보여주었다. 해운대수목원의 생명의 숲은 수목원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작했다. 종류별로 모아놓은 묘목장 같은 수목 전시장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양한 식물과 자연 소재, 공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다. 김성완(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표)의 논문에서 시작된 영도 근대 역사 흔적 지도는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흔치 않은 종류의 일이다. 강영조 교수(동아대학교)가 100년 전 영도 지도를 입수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김성완 대표는 오래된 길에서 보아온 풍경을 ‘경관 유산’이라는 새로운 유산의 개념으로 제시하며 강영조 교수와 함께 2018년 한국조경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100년 묵은 영도의 도시 풍경 연구를 계기로 근대 영도의 흔적을 따라 걷는 탐방 지도와 안내 책자를 제작하고 전시 공간까지 조성했다. 100년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20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2022 아시아 도시경관상 본상에도 올라 현재 심사 중이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벽면 녹화 프로젝트인 율리 강변 풍경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며 시작했다. 대상지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볼 수 없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서쪽의 낙동강 변이 보이는 지역이었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보았을 강변의 풍경을 상상하며 대상지 벽면에 잔물결의 이미지를 담았다. 작은 공간의 설계 건축가와 함께하는 개인 주택, 카페 등의 조경 설계는 작은 공간이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개인 공간의 설계는 감리를 병행하고 시공사 선정에도 깊게 관여하며 진행한다. 작은 공간일수록 도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작은 바위, 야생화, 소관목, 이끼류 등을 배치할 때는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위치의 수목 한 그루, 바위 하나를 찾기 위해 공사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 공간 설계의 경우 거의 모든 공정을 다루다 보니 별도의 시공사가 있는 공공 공간 설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에 대한 애착이 더 가게 된다. 양산의 개인 주택 정원의 경우 더 좋은 공간으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약에도 없는 작은 정원 수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땅의 기억 아직 많은 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마다 깊은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발주부서의 의욕적인 업무 수행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과 타협하고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경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한 뼘이라도 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의 생각을 옮긴다. 조경이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이나 범위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러 분야와 협업하는 일들, 특히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많은 고민을 통해 공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가용 범위 내에서 분위기를 바꿀 방법과 재료를 찾아보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누군가의 일상 속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담백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언제든 편하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공간(모현호). 입사 초기에는 땅의 형태에 집중하며 디자인했다. 그 결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땅의 기억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소가 가진 이야기, 장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같은 것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만든 공간을 다수의 사람과 공유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앞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질 공간들을 기대한다(김경언). [email protected]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CAT Landscape Design Group)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생각하는 젊은 조경설계인들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의적인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쾌적한 삶과 사람의 가치가 보장되는 맑고 밝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는 다양한 영역의 공간과 시간을 우리만의 신선하고 새로운 역량으로 디자인해나간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CAT를 회사명으로 정했다.
  • [모던스케이프] 종묘의 공원화
    지난여름, 의미 있는 사업 하나가 오랜 시간 끝에 완공됐다. 식민지기에 분리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작업으로, 90년간 두 장소를 갈라놓은 율곡로 일부에 지붕을 덮고 지형을 복원한 것이다. 사업은 2007년 녹지문화축 사업 계획의 일환에서 시작되었다. 북악산 자락의 응봉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종묘–세운상가(철거 계획)–남산을 잇는 사업의 첫 단계인 셈이었는데, 이 구간은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회복해야 마땅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종묘(宗廟)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수도 한양을 건설할 당시 사직(社稷)과 함께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종묘 북측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각각 1405년(태종 5년)과 1483년(성종 14년)에 건설되었으니, 창덕국·창경궁 일대인 동궐(東闕)과 종묘가 하나의 큰 권역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인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시간 빈터로 있었던 경복궁과 달리, 조선왕조 대부분 기간에 동궐을 왕과 왕후의 주궁으로 이용했기에, 위치적으로도 종묘와의 긴밀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번 사업에서 복원된 북신문(北神門)은 왕이 궁궐과 종묘를 오갈 때 사용한 문이라고 하니, 두 장소의 연속성은 이용 측면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두 공간을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은 풍수지리다. 한북정맥인 북한산 기운이 백악을 타고 동굴 권역을 지나 종묘로 흐른다는 해석은 정서적 측면에서의 위상과 상징을 공고히 하였는데, 일제의 율곡로 건설로 이 논리는 극심한 타격을 입는다. 이른바 지맥을 끊어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는 통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학자 염복규는 율곡로 건설의 근거가 어디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에 의구심을 갖고 도로 개설의 과정과 여론을 전방위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동궐 권역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율곡로의 처음 이름은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제6호선이다. 조선의 길은 전통적으로 잎맥 형태를 하며 길 끝에 가옥이 있는 막다른 길이 많은데, 이는 도성 길도 마찬가지였다. 丁자 형태의 대로를 갖췄을 뿐 순환형 도로 체계는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격자형 도시계획을 체화한 일제는 병합 초기인 1910년부터 순환형 도로망 구축에 공을 들였는데, 그중에 제6호선, 즉 율곡로 계획은 처음부터 궁궐과 종묘를 관통해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었다. 총독부 청사였던 경복궁 이전·신설 계획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제6호선 건설을 관철시켜야만 했기 때문에, 순종은 물론 이왕가(李王家), 전주 이씨 종중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이완용계와 내통하며 도로 부설 계획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놀라운 점은 종묘의 공원화를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경성부,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 1926. “犬牙錯雜한 今日의 京城이 卅年後에는 一大理想園 (14) : 公園遊步地增設과 火災豫防大計劃 火災를 防禦하기 爲하야 新築家屋은 全部 防火材 旣築家屋도 改造”, 「매일신보」 1926년 4월 29일. “社說: 宗廟地帶를 開放함이 如何 – 安息處 없이 헤매는 北部民을 보고”, 「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생명이란 무엇인가, 기계생명체가 던지는 질문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 거대한 기계는 투박하고 귀가 떨어져나갈 굉음을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위협을 가할 것 같은 면모는 기계를 자연과 대척점에 놓인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반면 1990년대 초부터 최우람이 만들어온 ‘기계생명체(anima-machine)’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조용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지난 9월 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최우람의 고유한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MMCA 현대차 시리즈1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가 열리고 있다. 최우람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세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살아 숨 쉬는 듯한 기계를 만들고, 독특한 이야기를 더하는 작업을 해왔다. 자동차 엔지니어인 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최우람의 어린 시절 꿈은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였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 공과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전공으로 미술을 택한 그는 과제를 하다 우연히 접한 키네틱 아트에서 접어 두었던 꿈을 실현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최우람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 움직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구축한 치밀한 메커니즘은 기계 역시 생명체처럼 완결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객들은 기계생명체들을 보며 생명의 의미와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전시 첫 공간인 서울박스에 발을 내딛으면 기괴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소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면 18개의 지푸라기 인형이 기이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원탁’을 볼 수 있다. 인형들이 무릎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할 때마다 등에 진 검은 원탁의 기울기가 변하고, 그 위를 지푸라기 공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닌다. 저 공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절실히 지키는 것일까. 호기심을 품고 다가가면 지푸라기 인형 모두 머리가 없는 상태이며, 공인 줄 알았던 구체가 사실 머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몸체가 등으로 원탁을 밀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원탁 위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 같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머리를 더 멀리 밀어내 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라는 해설이 제공되고 있지만, 의미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지푸라기 인형을 보고 있으면 과연 그들이 자의로 저 원탁 아래에 머물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모양을 천장 가까이에서 느릿하게 날며 내려다보는 ‘검은 새’를 발견하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끓어오르고 인형들의 몸짓이 꼭 나의 발버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2014년부터 시작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연례 프로젝트다. 매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한국 중진작가 1인을 선정해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지원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와 역동성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자 기획되었다.
  • 2022 서울정원박람회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 북서울꿈의숲에서,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가을 정원과 예술적 정취를 함께 즐길 수 있는 2022 서울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가 9월 30일부터 7일간 북서울꿈의숲에서 개최됐다. 2015년부터 열린 서울정원박람회는 올해 7회를 맞았다. 이번 정원박람회는 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팬데믹과 바쁜 일상 등으로 지쳐있던 시민들에게 정원 문화를 통해 건강한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고자 했다. 서울시와 2022 서울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환경과조경이 주관한 올해 정원박람회의 주제는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다. 과거 드림랜드가 있던 곳에 만들어진 북서울꿈의숲은 강북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칠폭지, 월영지, 청운답원(잔디광장), 창포원, 문화광장 등 풍부한 녹지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꿈의숲아트센터, 어린이 미술관인 상상톡톡미술관이 있어 다른 공원과 차별화된다. 대상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공 정원 조성을 위해 북서울꿈의숲의 이러한 특징을 주제에 반영했다. 북서울꿈의숲과 어우러진 각양각색의 정원 9월 3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북서울꿈의숲에서 다양한 정원 전시가 펼쳐졌다. 상상톡톡미술관 전면에 작가정원(4개소), 창포원 좌우에 학생정원(6개소)과 시민정원(8개소), 청운답원 주변에 팝업가든(9개소)이 조성됐다. 작가정원의 주제는 정원박람회 주제와 동일한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었다. 작가정원 공모에 47팀이 참여했으며, 1차 심사를 통해 4개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 정원 조성 후 현장 심사를 통해 구영미·박지연의 ‘내 마음의 산책길’이 금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정원은 청운답원 한 곳에 모여 있는 다른 작가정원들과는 달리 홀로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햇살, 바람,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공간에 놓인 내 작은 방은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은상에는 최윤정·김동민의 ‘꿈을 저울질하는 시소’, 동상에는 장찬희의 ‘직관적 발아’와 김지학·설윤환의 ‘하얀바람’이 선정됐다(88~105쪽 참고). 조경, 원예, 정원, 건축, 도시계획, 산업 디자인 등 조경 관련 학과 학생 누구나 참여 가능한 학생정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올해 금상에는 할리갈리(상명대학교)의 ‘물감: 퍼지는 꿈의 조각’이 선정됐다. 순백의 도화지 위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자신이 상상하는 꿈을 그리는 모습을 정원으로 형상화했다. 시련을 벽으로 나타내고, 붓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식물이 번지면서 벽(시련)이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해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은상은 블루밍(서울시립대학교)의 ‘블루밍 드림(Blooming Dream)’과 드리머즈(강원대학교)의 ‘별담; 꿈을 담다’가, 동상은 5스틴5stin(가천대학교)의 ‘예지몽; 藝至夢’, 해님달님(가천대학교)의 ‘항해, 꿈을 향해’, SEO(건국대학교)의 ‘숨기다&찾다Hide&Seek: 정원에서 숨겨진 감각을 찾다’가 수상했다. 시민정원은 정원 조성에 관심이 있는 서울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정원 문화의 대중화와 정원을 통한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도모하는 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금상은 에이블 가든(Able Garden)의 ‘정원, 잊어버린 꿈을 다시 채색하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무채색이 되어 버린 꿈의 본래 모습을 정원에 투영된 빛을 통해 마주하게 했다. 이를 위해 빛을 투영할 수 있는 아크릴판을 활용하고 다양한 색채를 정원에 더했다. 은상은 해방촌 마을정원사의 ‘정원 우체부; 꽃, 안부를 나누다’, 마미 가드너스의 ‘꿈에 그린(green) 정원’이, 동상은 꿈꾸는 무지개의 ‘땅위에 무지개’, 그린수프의 ‘팔레트; 꽃+팔레트(Falette;Flower+Palette)’, 오동근린공원봉사모임의 ‘벽오산(오패산)벌리사의 꿈’, 가든러버의 ‘내마음을 물들인 정원아 사랑해’가 수상했다. 팝업가든은 정원박람회 기간에만 선보이는 정원이다. 금상에는 릴리목공소의 ‘꿈꾸는 정원사의 작업실’이 선정됐다. 이들은 ‘릴리’란 이름을 가진 가상의 정원사라는 인물을 설정해, 릴리가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자 꿈을 키워나가는 작업실의 흔적을 정원으로 조성했다. 반짝 정원하자의 ‘너도나도 정원하자’가 은상을, LA 걸스(서울시립대학교)의 ‘꿈빛잡화점’, ART2ST(건국대학교)의 ‘화원(畫園): 정원을 그리다’, 별빛(고려대학교)의 ‘별의 물감_에스터 페인트(ASTER paint)’가 동상을 수상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 함께가든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 가을 정원, 서울시립대학교 팀 설계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 2022년 봄 학기, 서울시립대학교 2학년 전공 수업으로 ‘정원 및 외부공간 설계 스튜디오’가 진행됐다. 두 명이 한 팀을 꾸려 캠퍼스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대상지를 찾고 공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설계안을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조금 독특한 점은 두 분반에서 각각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 팀을 선발해, 총 두 팀에게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의 가을 정원을 설계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었다. 16주에 걸친 스튜디오 결과, 1분반에서는 권솔지·박효빈의 ‘크라운;어스(Clown;Us)’가, 2분반에서는 김다민·지서연의 ‘걸어서 시대 속으로’가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크라운;어스’는 가면을 쓴 어릿광대처럼 사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원이다. 점점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는 서울시립대 자작마루 주변에 펑키한 분위기의 다채로운 색상의 식물과 차분한 분위기의 색조가 단순한 식물을 심어 사람들의 다면성을 표현하고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걸어서 시대 속으로’는 이정표 정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회기역에서 서울시립대학교 후문까지 도보로 이동하려면 최소 12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길 찾는 사람을 돕기 위해 서울시립대로고와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21개의 기둥에 쪼개 담아 배치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지만, 갈림길에 들어서면 쪼개진 이미지가 하나로 이어지며 길을 안내한다. 기둥 사이로 이미지를 가리지 않도록 동선과 식물, 휴식 공간을 배치했다. 함께가든, 왕관을 쓴 어릿광대 김다민·권솔지·박효빈·지서연 팀(이하 서울시립대 팀)은 6월 22일, 에버랜드 내 조경팀 사무실에서 첫 미팅을 진행했다. 에버랜드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인 포시즌스 가든을 선보이는데, 이번 가을 정원의 콘셉트는 ‘해피 핼러윈’이었다. 정원은 네 개 구역으로 구분되며,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테마로 구성된다. A구역 ‘컬러풀 펌프킨 가든’은 다양한 색감의 호박 조형물이 주를 이루는 정원이고, B구역 ‘트릭 오어 트릿 가든’은 집 조형물과 키치한 패턴의 식재가 특징인 공간이다. C구역은 서울시립대 팀의 함께가든이 조성되는 곳으로, 정해진 콘셉트는 없었다. D구역 ‘핼러윈 인피니티 가든’에는 대형 스크린에서 이어지는 메리골드 길이 조성된다. 권소희 프로(에버랜드 조경팀)는 대상지 답사를 이끌며 식재되어 있는 식물, 정원에서 유지해야 할 것과 바꿔도 되는 것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가 시설물보다 식재를 중심으로 한 정원을 추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에버랜드는 “정원을 잘 조성하면 한 계절 내내 칭찬을 듣지만, 잘 조성하지 못하면 한 계절 내내 질타를 받는다.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한껏 즐길 수 있는 정원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원 콘셉트를 고민하던 서울시립대 팀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봤다. 좋은 평을 들었던 반전 효과를 지닌 광대라는 콘셉트, 기둥을 통해 방향을 유도하는 개념, 조형물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고려해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의 장점을 합친 새로운 정원을 만드는 데 돌입했다. 두 번째 미팅은 6월 29일, 설계 스튜디오를 지도한 이윤주 소장의 LP스케이프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정원의 콘셉트와 방향성, 레퍼런스 이미지를 발표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가든의 콘셉트는 ‘크라운 오어 크라운(crown or clown)’으로, 서울시립대 팀은 왕관을 쓴 어릿광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정원을 설계했다. 대상지를 세로로 분할하고 각 구역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식물을 심음으로써 광대의 양면성을 표현했다. 곳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는 핼러윈 느낌을 내면서도 사람들의 걸음을 유도하는 젠탱글(zentangle) 이미지를 삽입했다. 그림자놀이를 할 수 있는 조형물을 배치해 재미를 더했다. 발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세부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부분과 에버랜드의 요구 조건에 맞춘 설계안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후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 정원에 사각 기둥 모양의 거울 기둥이 있다는 정보를 접했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기둥 디자인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종은 에버랜드 식재 리스트를 고려해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지서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학부생이다. 기후변화청년단체(GEYK)의 일원으로 도시 농업, 산불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 [기웃거리는 편집자] 이름을 부르는 지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의 주인공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각자가 꼽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천국으로 가는 이들에게 선물로 준다. 말하자면 천국의 프로덕션 회사에서 진행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라고 할까? 문득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러 장면이 있겠지만, 클라이언트로서 한 가지 요청이 있다면 장면을 구성할 때 미장센으로 ‘비 온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본 안개 낀 앞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써달라고 하고 싶다. 시골집 마당에 서면 산세가 훤히 보이는 맞은편 산에는 왜가리 군락지가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수묵화였지만 비 온 다음 날 젖은 아스팔트 도로가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안개가 산을 자욱하게 두른 풍경은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소설가 김승옥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사이 진주한 안개라는 적군이 가하는 기습에 무장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러한 날에 맡을 수 있는 젖은 흙냄새와 깨끗해진 아침 공기의 맛은 날씨를 보관하는 서랍이 있다면 그 안에 넣고 싶을 만큼 좋았다. 만약 겸재 정선 선생님이 이곳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인왕제색도에 버금가는그림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풍경의 순간을 담지 못했던 나와 달리 영국에서는 귀여운 조직적 움직임을 2005년부터 선보이고 있다. 레딩대학교 기상학과 방문연구원 출신 개빈 프레터피니(이하 개빈)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추종자에 맞서 구름을 감상하는 모임인 ‘구름감상협회’를 창립했다. 이른바 구름 추적자라 불리는 회원들이 120개국에 5만여 명이나 있다. 사이비 종교 혹은 모종의 음모를 꾸리는 이상한 단체는 아니고, 순수하게 구름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각자가 발견한 구름 사진, 그림, 시 등을 홈페이지에 공유하는 일종의 구름 커뮤니티다. 최근 창립자 개빈은 회원들이 보내온 사진과 명화를 엮어 책 『날마다 구름 한 점』(2021)을 출간했다. 이 책은 구름의 생성 원리나 광학 현상, 이름의 유래, 구름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의 문장 등을 소개한다. 책을 통해서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 주위로 퍼지는 빛의 이름이 부챗살빛(Crepuscular Rays)이란 것과 비행운처럼 선박의 배기가스가 선박 자국(Ship Tracks)이라는 구름을 만든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또한 SF영화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장면에 등장할 것 같은 ‘거친물결 구름(Asperitas)’은 협회 회원이 발견한 구름인데, 세계기상기구가 발행하는 『국제구름도감(International Cloud Atlas)』에 정식으로 수록됐다. 구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학계에서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인터뷰이로 만난 박승진 소장으로부터 구름감상협회와 결이 비슷한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개빈이 구름감상협회를 통해서 생소한 구름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던 것처럼, 박 소장은 일반인에게 다소 낯선 식물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우연히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가 가림막을 배경 삼아 아름답게 나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잡초마다 갤러리 작품명처럼 스티커로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잡초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있도록 일종의 오픈 갤러리를 만든 것이라고 할까. 일회성에 그친 프로젝트였지만, 이러한 취지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이 모인다면 우리도 식물 사진을 찍고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는 초록감상협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맨 먼저 가입서를 쓰고 싶다. 구름의 평균 수명은 10분밖에 되지 않고, 잡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배우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름, 잡초라는 단어로 그들의 존재를 뭉뚱그리는 대신 권운, 적운, 개망초 등 정확한 이름을 호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지혜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름에 집착하느라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mail protected]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눈물 나게 하는 것보다는 웃게 만드는 게 더 힘들더라. 그래서 영화도 드라마도 좋지만 시트콤 작가가 신기하고 위대해보였다. 첫 문장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게 글의 마무리였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제일 쉬운 건 당연한 말로 끝맺는 것이었다.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내용들 말이다. 답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의문문으로 끝내는 방법도 유용했다. 그런데 수십 차례 같은 전략으로 지면을 채우다보니 지겨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친구가 “너 그만 반성해도 될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 늘 재치 있는 문장들이 탐났다. 쉽게 공감하고 피식피식 웃으며 볼 수 있지만, 이런 걸 왜 여기다 쓰지 일기장이 없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 문장들. 하지만 글은 쓰는 이를 닮기 마련이다. 그다지 유쾌한 편은 아닌 내가 쓰는 글은 늘 고만고만한 결을 유지했고, 가끔 벗어나보려고 바둥대봤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해야 할 일들. 무엇이 적혀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비슷한 제목을 발견하면 매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많이 읽기, 솔직하게 쓰기, 쓸데없는 수사를 빼기 등 익숙한 전략을 훑어보고 있으면 꼭 그 가운데에서 ‘필사하기’가 등장했다. 베껴 쓴다는 의미의 필사(筆寫)는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유명한 훈련 방법 중 하나다. 정호승 시인은 서정주와 김현승의 시를 필사했고, 신경숙은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세밀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고 말했다. 난 오래전 이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생 첫 만년필을 마련하고 그에 어울리는 노트를 샀다. 필사는 책을 손으로 읽는 작업이다. 이 훈련법의 핵심은 글을 단어 단위가 아닌, 문장 단위로 옮기는 데 있다. 눈을 바삐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며 글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잠깐이라도 외워 머릿속에 박아 넣는 것이다. 글자들이 휘발되기 전에 종이에 적는 일은 문장의 구조와 말맛, 문체를 만드는 법, 더 풍부한 어휘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만든다. 쉼표의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게 되고, 접속사의 의미를 더욱 크게 느끼고, 문장을 매듭짓는 수많은 방법을 깨닫는다. 잘못 쓴 글자는 화이트로 지우는 대신 가운데 줄을 긋고 고쳐 쓰면 안 좋은 습관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을 배우는 데만 깊이 몰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깃털 같은 집중력은 그리 오랜 시간 발휘되지 못한다. 쓰다보면 삐죽빼죽 삐침이 못나게 빠져나오고 어딘가 못생긴 글자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글씨의 형태에 공을 들이다보면 문장은 휘발되고 손 마디마디에 아픔만 고인다. 어딘가 비효율적인 필사 작업이지만, 그래도 완성된 글씨체가 마음에 든다. 길쭉길쭉한 모음(성공한 사람의 필적을 분석한 결과 가로획이 길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길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과 조금은 작은 ㅁ과 ㅇ, 세로로 가늘어 조금 해체된 듯 보이는 ㅅ과 ㅈ. 디지털 기기의 자판에 더 익숙한 시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글씨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매년 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는 대회가 있다. 올해 8회를 맞은 ‘교보문고 손글씨대회’는 심사위원 평가와 대중 투표를 통해 매년 아름다운 필체를 선정한다. 겉옷의 두께를 고민하게 되는 계절이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수상작들을 볼 수 있다. 개성이 묻어나는 글씨체는 아는 글을 새롭게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올해는 으뜸상 수상자의 글씨를 오래 들여다봤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 82세 김혜남은 필체와 잘 어울린다며 며느리가 추천해준 나카가와 히데코의 『음식과 문장』의 한 구절을 적었다. “곡선에 싱싱한 탄력이 있고, 간결하게 새침”(유지원 심사위원)한 글자 모양 덕분일까, 글에서 새콤한 복숭아와 달큰한 밤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이 거기 담기는 것 같아요.”2 김혜남의 소감을 읽으며, 묘한 떨림을 가진 그의 글씨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가늠했다. 글도 사람을 닮고, 글씨체도 사람을 닮으니, 공간 역시 그 공간을 만든 사람을 닮을까. 역으로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하다 보면 사람이 글을 닮아가기도 할까. 오늘도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인 의문문으로 글을 맺는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2004, pp.155~156. 각주 2. 윤상진, “‘손글씨엔 마음이 담겨 있어요’… 82세 할머니의 글씨, 폰트로 제작된다”, 조선일보 2022년 9월 20일.
  • [PRODUCT]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디딤판 ‘필’ 직선과 곡선이 조화된 디자인 디딤판
    디딤석이 기능성뿐만 아니라 감성적 디자인을 갖춘다면 어떨까. 스튜디오미콘의 ‘필(Pill)’은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로 제작한 알약 모양의 디딤판으로, 직선과 곡선이 부드럽게 조화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석재를 자연스러운 형태로 잘라서 제작하는 일반 디딤석과는 달리 조형성을 강조해 제작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로 만들기 때문에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다. 세 가지 규격을 제공하며, 각기 다른 규격의 디딤판을 조합해 세련된 분위기의 공간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내구성도 튼튼하다. 디딤판은 밟았을 때 쉽게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한정적이다. 특히 일반 콘크리트는 사람이 밟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어 디딤판의 소재로 한계가 있다. 필의 소재인 초고성능 콘크리트는 일반 콘크리트보다 약 6배 이상 큰 압축강도를 가진다. 덕분에 쉽게 파손되지 않으며 자외선, 동해, 염해 등에도 강하다. 정동근 스튜디오미콘 대표는 “기존의 디딤석은 자연스러우며 안정적인 매력이 있었지만 디자이너의 영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제품은 아니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는 디자이너의 생각과 현장의 콘셉트를 반영하여 디딤석을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미콘은 직접 디자인한 디딤판뿐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디딤판 맞춤 제작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스퀘어, 써클, 페블 등 다양한 모양의 디자인 디딤판도 선보이고 있다. TEL. 031-831-3620WEB.www.miicon.com
  • [에디토리얼]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IFLA 2022가 남긴 것
    이번 달 특집 지면에서는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예술과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열린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를 기록한다. 40개국 1,500여 명의 조경가가 참여한 IFLA 2022는 기후변화와 도시 위기에 대응하는 조경가의 비전과 전략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대회는 2019년 9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개최에 발맞춰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발표한 ‘기후행동공약’의 실천적 토론장이기도 했다. IFLA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전 세계 조경가의 전환적 협력과 행동을 촉구하며 “1.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의 실천, 2. 204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 3. 살기 좋은 도시와 커뮤니티의 수용력과 회복력 강화, 4. 기후 정의와 사회 복지 지원, 5. 문화 지식 체계의 학습, 6. 기후 리더십 발휘” 등 여섯 가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광주 세계조경가대회는 한국 조경계에도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경학계와 업계가 협력해 성공적으로 치러낸 이번 대회는 한국 조경계의 난맥을 교정하고 조경 직능과 학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조 강연, 논문 발표회, 라운드 테이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펼쳐진 여성 조경가와 미래 세대의 활약은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 IFLA 2022의 무엇보다 큰 성과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라는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한국은 물론 세계 조경계에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리:퍼블릭’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리:퍼블릭의 ‘리’를 ‘어떤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이라는 뜻의 접두사 리(re)로 생각한다면, 리:퍼블릭은 ‘공공(성)에 다시 주목하는’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시 공공성의 경관과 조경을 지향하는’ 의제라 볼 수 있다. 둘째, 리:퍼블릭의 ‘리’를 ‘~에 대한, ~를 주제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리(re)로 여긴다면,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공공적 조경 행위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리퍼블릭(republic)은 군주제 반대편의 정치 체제인 공화제에 해당한다. 본래의 경관(landscape) 개념에 배태된 수평성을 떠올린다면, 군주제의 수직적 위계와 권위에 대항하는 공화제가 경관 개념과 조응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리퍼블릭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일, 사건, 상황, 문제’를 뜻하는 명사 ‘레스’에 ‘공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여성형 형용사 ‘푸블리카’가 결합된 말로, 공적인 일(또는 문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곧 ‘공적인, 공공의 경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회의 주제문을 다시 옮긴다. “전 세계는 팬데믹 확산, 기술 혁명, 정치적 갈등과 같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건강, 행복, 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조경 전문가에게 주어졌다. 국지적 지역부터 전 지구적 스케일까지 포괄하는 조경의 다양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조경가들이 모인다. 조경의 공공 리더십을 강조하는 2022년 세계조경가대회의 주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음과 같은 세부 주제를 포괄한다. 조경의 전문적 성취와 학문적 성과를 되짚어보고(re:visit),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통해 지구 경관의 재구성을 실험하고(re:shape), 일상의 생활과 환경을 건강하고 활력 있게 되살리며(re:vive),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한다(re:connect).”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봉건 시대의 장식적 조원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 도시의 공공 환경을 구축하는 전문 직능으로 탄생했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이념을 다시 소환하고 회복한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인류세의 지구가 마주한 기후위기, 도시의 파국,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변동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좌표다. IFLA 2022를 통해 제시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천할 과제가 한국 조경에 주어졌다. [email protected]
  • [풍경감각]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냥 풀을 그린 그림,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거죠? 북 페어에서 받은 질문이다. 식물 세밀화는 풀을 그린 그림이 맞고, 그림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각자의 감상법이 있기 마련이므로 “보이는 그대로니 천천히 감상해보시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다른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풀, 그 잎사귀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은 세계가 펼쳐진다.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 사이를 물길 같은 잎맥이 가로지른다. 울퉁불퉁한 산맥 사이로 하얀 협곡이 구불거리거나, 평행한 녹색 이랑이 끝없이 이어진다. 식물 세밀화는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한다. 식물을 매개체로 어떤 의미나 심상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작은 식물의 세계가 작아만 보이지 않도록 캔버스의 크기를 키우고 확대 비율을 높인다. 털, 턱잎, 수술과 암술, 꽃받침, 줄기의 단면처럼 전체 모습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작은 디테일도 따로 담는다. 이 작은 풍경들이 누군가의 발걸음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