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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보르 워터프런트 2단계 Aalborg Waterfront Phase II - House of Music Areas
    올보르 워터프런트의 2단계 마스터플랜은 1단계에서 도출된 여러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피오르fjord 경관의 특별한 특징인 사구와 평평한 해변 사이의 만남에서도 영감을 이끌어냈다. 기존의 항구가 비교적 낮은 높이이기 때문에 콘서트홀, 캠퍼스, 학생용 기숙사 등 새로운 건물은 효율적인 홍수 방지를 설계의 핵심 요소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2단계 과정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대상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프롬나드를 일종의 ‘습지’로 활용하고 완만한 곡선의 플린스plinth를 이용해 그 위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독특한 건물들이 마치 솟아오른 사구와도 같은 경관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조화 속에서 콘서트 홀 주변에 들어선 광장은 직사각형 형태의 독립적 플린스에 의해 부각되게 된다. 도시의 플린스는 홍수에 대한 방비책이 되는 동시에 다양한 활용이 가능한 일련의 공간을 제공하게 된다. 플린스의 측면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되며,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계단식 좌석이 마련된다. 널찍한 광장들이 프롬나드의 한 부분으로 통합되며, 노스 유틀란트North Jutland 피오르 경관의 토착 식물로 구성된 빽빽한 수목을 바탕으로 풍성한 녹지 공간을 제공한다. Landscape ArchitectC.F. Møller Landscape EngineerCOWI CollaboratorÅF Hansen & Henneberg(lighting design) ClientAalborg Municipality LocationAalborg, Denmark Size170,000m2(total) Year of Competition2012 Construction Period2013~2015 PhotographsJoergen True
    • C.F. Møller / C.F. Møller
  • 올보르 워터프런트 1단계 Aalborg Waterfront Phase I - Linking Port & City
    현재 12만5천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올보르는 인구 규모로 치면 덴마크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또한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도시이기도 한 올보르는 1970년대부터 산업의 침체에 따라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90년대부터 연구 및 지식의 중심지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현재 올보르의 문화적 활동은 피오르fjord를 따라 들어선 과거의 공장 건물로 확대되었다. 산업 사회가 종말을 거둔 바로 그 지점에서 항만 활용의 대안적 방안들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올보르 시정부는 항만 지역을 새로운 여가 공간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공모전을 개최했다. 공모전의 기본 골격은 시민과 여러 기업들이 참여한 토론회 등을 통해확보한 아이디어를 기초로 했지만, 설계를 통해 추가적인 구상을 하도록 요구했다. 과거 대상지에는 터미널과 창고 건물, 도심과 피오르 지역을 단절시키는 혼잡한 4차선 접근로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구로의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의 방향을 재설정했고 3동의 창고 및 터미널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 지역의 소중한 역사 유적인 창고, 로열 커스텀 하우스Royal Custom House, 올보르 성Aalborg Castle은 그대로 보존해 새롭게 건립한 4동의 건물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했다. 학문과 지식의 도시로서 올보르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항구 지역에서 최적의입지를 지닌 장소에 청년 및 학생들을 위한 레지던스와 기숙사가 들어섰다. 공모전은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생태 친화적 공공 공간을 설계하고 피오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낼 수 있는 시설물을 계획하도록 했다. 또한 제한된 예산 안에서 합리적으로 건설 가능해야 한다는 점도 지침에 포함되었다. 당선작에서 가장 쟁점이 된 아이디어는 4차선 도로를 2차선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이 도로에는 매일 2만5천 대 가량의 차량이 통행했는데, 재조성 과정에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 초래되어 4년의 공사 기간 내내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후 새롭게 마련된 대로를 통해 도시에서 항구까지 방해받지 않고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차량 통행 역시 하루 약 1만8천 대 수준으로 감소했다. 올보르 워터프런트의 마스터플랜은 도시의 중세 시대 중심지와 주변의 피오르 지역을 하나로 연결한다. 산업용 항만과 이로 인한 과중한 교통량으로 인해 피오르지역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민들의 접근이 그리 용이하지 않은 편이었다. 도시의 전반적인 구조와 결합하면서 도시와 피오르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전에는 배후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새롭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모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다섯 가지 핵심 구역 마스터플랜은 다섯 가지 핵심 구역을 강조했다. 먼저 ‘블러바드Boulevard’는 폭이 넓은 간선 도로를 중심부에 여백을 둔 2차선 도로로 탈바꿈시켰다. 도로의 경로가 남쪽으로 변경되었는데, 워터프런트를 확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시내에서 피오르로 접근하는것이 가능해졌다. 부두를 따라 약 1km 이어지는 블러바드의 양변에는 나무를 식재했으며 자전거 이용자와 보행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 썼다.‘프롬나드Promenade’는 워터프런트를 따라 배치된 일련의 광장으로서 계단, 테라스, 전망 플랫폼 등을 통해 사람들이 물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다채로운 경험과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욤프루 앤 파크Jomfru Ane Park’는 다양한 테마와 특성을 지닌 일련의 도시 정원들로서 프롬나드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주변의 상업 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공놀이, 일광욕 등의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다양하고 많은 이용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견고하고 매력적인 공간을목표로 했다. ‘캐슬 스퀘어Castle Square’는 도시와 항구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휴식 공간들의 가장자리에 해당된다.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제방을 둘러싼 넓은 녹지 공간을 마련해 중세에 건립된 올보르 캐슬Aalborg Castle이 다시 한 번 항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했다. 끝으로 무성하게 숲이 우거진 ‘우촌 파크Utzon Park’는 구불구불한 산책로와 벚나무가 학생 및 청년들을 위한 주거지와 우촌 센터Utzon Centre를 둘러싸고 있다. 올보르 태생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외른 우촌Jørn Utzon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과 건물이 조성되었다. Landscape ArchitectC.F. Møller Architects,Vibeke Rønnow Landscape Architects EngineerCOWI CollaboratorÅF Hansen & Henneberg(lighting design) ClientAalborg Municipality LocationAalborg, Denmark Size170,000m2 Year of Competition2004 Construction Period2005~2012 PhotographsAalborg Kommune, Helene Høyer Mikkelsen,Julian Weyer, Martin Kristiansen, Vibeke Rønnow C.F. 묄러(C.F. Møller)는 1924년에 설립된 건축설계사무소로 북유럽과전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선도적인 회사다.현재 C.F. 묄러 본사는 덴마크 오르후스에 있으며 코펜하겐, 올보르, 오슬로, 스톡홀름, 런던 등지에 5개의 지사를 운영하고 있다. C.F. 묄러는장소 특정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창조적인 설계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C.F. Møller / C.F. Møller
  • [칼럼]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Column: Running a Practice Is Just Like Walking on the Mud Beach
    시대가 변했고 가치도 변했다 내가 조경학과에 다니던 시절은 피터 워커와 그의 후학 조지 하그리브스로 대표되는 ‘개인’의 선구적 프랙티스에 매료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소위 ‘조금 한다’는 학부생들은 설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 사무실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부터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설계사무소를 연다는 것을 ‘창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이유는, 이 일을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며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워커나 하그리브스가 비즈니스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그 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한국에서 적용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많지 않았다. 시장의 크기, 수주 구조, 계약과 지불 등 모든 면에서 한국과 미국은 달랐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취직할 곳이 없어 경계 없는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는 인턴들로 넘쳐나는 네덜란드도 아니었다. 2006년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열기는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일을 수주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우연한 계기로 일이 생겼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클라이언트를 소개 받았다. 이런 불확실성을 관통하여 지금까지 10년을 버티어 냈으니, 한편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하다. 오피스박김의 지난 10년을 뒤돌아보면, 당시에는 힘겨운 시도 혹은 실패로 보이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적 역량이 축적되었고 우리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안내하였다. 그간 남겨 놓은 텍스트를 묶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자는 의견에 공감하게 되어 올 가을에 그 축적물이 책으로 나올 예정이고, 오피스박김 후학들을 중심으로 랜드스케이프의 미래Landscape for Tomorrow를 조망할 작은 컨퍼런스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10년의 미래 역시 불분명하겠지만, 계속 도전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는데, 나부터가 일을 제대로 해서 제대로 지어야 우리의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의 후학들이 지금의 오피스박김 보다 조금이라도 더 수월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다. ‘돈 주고 조경 설계 처음 맡겨 본다’는 분들이 여전히 있고, 이런 클라이언트의 ‘계몽’ 역시 우리의 일이다. 사실 사명감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반사 작용이기도 하다. 스스로 우리의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과연 누가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인가? 어느 주말, 우리 집 강아지 마리와 함께 양화한강공원에서 왕복 4km를 뛰었다. 뛰면서 돌아본 주변에는, 나만큼이나 고된 한 주를 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느 가장이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잔디 사면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휠체어를 탄 어느 중년은 한강물이 찰랑대는 강가까지 내려가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다리는 당시 공원 설계와 시공을 회상하며, 갈대지형과 사석호안그리고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볐다. ‘세상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는 생각은 또 그 후 한동안 진격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아직 일천하여 의견 개진이 매우 조심스러우나, ‘창업’에 관한 기획 의도를 존중하며 소견을 밝히자면, 한국에서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을 굳이 장려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있다. 먼저, 너무 빨리 열려고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설계를 하다가 자기 사무실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때 열면 된다. 르네상스 이후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설계라는 직능은 가장 고전적인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개업 초기의 열정도 좋지만 대형 회사에 소모되지 않고 직원들 월급 안 밀리려면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는 명확한 대차 대조표가 있어야 한다. 원한다면 때는 언젠가 올 수 있다. 그러나 오지 않더라도, 사무소에서 일하되 소장처럼 일하면 된다. 그렇게 주인처럼 설계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위치에 있던 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훈수에도 심장박동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주변부’를 주목하기 바란다. 설계라는 중심 영역 대신 이와 관련된 새로운 외연을 탐험하는 것도 개척자의 특권이다. 우리가 여전히 조경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도입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개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부귀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고 말을 모는 사람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만약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라고 하니, 나의 발걸음이 양화의 뻘 비치를 사뿐하게 누빌 수 있나 보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 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당선을 계기로 박윤진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했다(2004).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했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했다. ‘양화한강공원’, ‘광교신도시 공원시스템’, ‘SBS 프리즘 타워’, ‘현대캐피탈 배구단 캠프’, ‘CJ 광교통합연구소’ 등 공공과 민간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 [에디토리얼] 그들의 참신함을 응원한다 Editorial: For Their New Start
    강의실이나 작업실이 아닌 내 연구실에서 학생 설계안 크리틱하는 일, 대학원생 논문 지도하는 일, 가끔 찾아오는 졸업한 제자와 대화하는 일을 나는 ‘외래 본다’라고 총칭한다. 물론 그들을 환자 취급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유 있게 호흡하며 이야기 나누지 못하고 종합병원 의사처럼 분초를 다투며 대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모든게 새로 시작되는 계절인 탓일까. 이번 봄에는 정말 많은 외래를 봤다. 학업 상담, 진로 상담, 인생 상담이 줄을 이었다. 그중 몇 가지 이야기를 간추려 옮긴다. #1. 고3 티가 여전한 한 신입생. 놀랍게도 중학생 때부터 조경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한다. 어느 ‘미드’의 배경으로 나온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매료됐고, 몇 번의 클릭으로 그곳의 설계자가 캐서린 구스타프슨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마사 슈왈츠에게도 강한 팬심을 느끼고 있다 한다. 놀란 내 표정에 고무되어 어떻게 하면 그들 같은 스타 조경가가 될 수 있는지 돌직구 질문을 날린다. 말문이 막힌다. 글쎄, 많이 보고 읽고 그리며 안목을 기르라는, 하나마나한 답을 우물거린다. #2. 3학년 미학 시간에 눈에 띈 한 낯선 남학생. 언제 제대했는지 묻자 이번에 복학한 건 맞는데 군대를 다녀온 게 아니라 2년간 휴학하며 창업 동아리활동에 전력을 쏟아 부었다 답한다. 내성적인 인상이지만 말문이 트이자 미래의 사업 계획이 줄줄 쏟아진다. ‘생태적 디자인으로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기업을 고등학교 때부터 구상해 왔다고 한다. 포어스ForEarth.ForUs라는 사명도 미리 지어놓았다고. 뭐라 내가 말을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관심과 응원의 미소면 충분. 생태학과 상상력을 함께 다룬 책 몇 권을 소개. #3. 수시 입시 면접 때부터 대학원생급 전공 지식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한 4학년 여학생. 학년이 올라가며 설계 스튜디오는 물론 이론 과목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고 공모전 수상도 다수. 졸업 후의 계획을 묻자 명문 디자인 스쿨로 유학 가서 도시설계를 전공해 사회적 기여를 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다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엉성하고 허약한 조경판이 못마땅하거나 불안한가 보다. 상담의 제1원칙은 잘 들어주는 것임을 알지만, 아까운 인재 하나 놓칠 판이니 적당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다 안하려고 할 때 하면 100미터 달리기 혼자 하는 것처럼 쉽지 않을까. 늘 고상한 척 하는 교수가 평소와 달리 현실적으로 접근하자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한다. 갑자기 책임감 비슷한 게 생긴다. #4. 비교적 늦은 나이에 유학해 조경학 석사를 마치고 유명 설계사무소에서 2년여 일하다 돌아온 삼십대 중반의 제자. CG 숙련공 역할만 반복하다 보니 세계 최고의 오피스라는 간판에서도, 뉴요커 생활의 그럴싸한 허세에서도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한다. 비슷한 처지로 십 년씩 버텨온 선배들 그림자를 밟느니 열악하더라도 한국 조경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게 낫겠다 싶어 미련 없이 짐을 쌌다고 한다. 돌아오니 광야에 던져진 것처럼 막막하다는 그에게는 오백 몇 잔이 답이다. 책임질 수 없어 주저했지만 취기를 빌어 독립을 권했다. 자, 건배사, 내가 ‘독’하면 넌 ‘립’하는 거다. #5. 대학원 졸업 후 신생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근십 년을 묵묵히 버텨 온 제자. 세상 잘 읽는 영민한 친구들이 줄줄이 설계 일을 접는 중에도 말없이 설계실을 지키며 집중해 온 그, 제자지만 존경한다. 그런 그가 요즘 조금 흔들리나 보다. 보수나 근무환경 탓이 아니라 한다. 십 년 하면 뭔가 통찰력 있는 디자인 감각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앞으로 십 년 더 한다고, 그러다 오십대가 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음을 절감한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어 따뜻한 공간, 좋은 환경설계하는 걸 꿈꾸지만 그럴 수 있을지 의심된다며의기소침. 괜찮아, 조금 더 가면 길이 나올 거야. 내말이 형식적으로 들렸을 테지만, 분명히 진심이다. 테이블에 빈 맥주잔이 가득 찬다. 얼핏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키워드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하는 일’과 소통하고 또 ‘잘 하는 일’과의 교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앞에 마주친 두꺼운 벽을 유연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이 선생들처럼, 선배들처럼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기 때문이다. 막 자신의 작업 공간을 꾸려 독립한 삼십대 조경가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다룬 이번 달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기획하며 여러 젊은 조경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맥주 살이 더 늘었음은 물론이다. 경험해 보지 못해서인지 나는 ‘창업’이라는 두 글자에 심한 중압감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았다. 설계 배우고 설계해오면서 늘 가졌던 꿈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을 뿐이라고 한다. 누구는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누군가는 몇 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작한 차이가 있을 뿐. 그들에게서 발견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태도와 작업 방식의 참신함이다. 그 참신의 바탕에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잘 하는 일의 행복한 동거가 있었다. 그들과 만나고 돌아와 참신斬新의 뜻을 사전에서 확인해 봤다. 새롭고 산뜻하다. 그런데 ‘참斬’자의 유래가 예사롭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죄인을 죽이던 극형 틀인 수레와 도끼로 이루어진 글자다. 참신이란 과거를 도끼로 치는, 완벽한 단절을 뜻하는 말이다. 참신함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참신은 진부가 된다. 진부陳腐. 사상, 표현, 행동 따위가 낡아서 새롭지 못함. 썩은 고기腐를 남들 보라고 전시陳한다는 뜻이다. 어렵게 구한 고기를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꺼내 보여주다 보면 고기는 썩고 악취가 난다. 고기주인은 썩은 고기에 익숙해져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다. 교훈과 계몽으로 흘러버린 글, 한 번 더 막 나가며 맺는다. 한국 조경 40년,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다. 미숙하다. 새로운 시작, 당신들의 영토가 무한히 펼쳐져 있다. 진부함을 경계하고 참신함을 이어가길 당부한다.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누구에게나 시작은 있다
    한참을 망설였다. 분홍빛이 살짝 도는 여린 꽃잎이 마치 겹겹이 두른 여인의 농염한 치맛자락처럼 화려한 작약과, 한 달쯤 물을 안 주어도 끄떡없이 늘 푸르름을 선사할 스투키 사이에서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었다. 결국 스투키 화분을 옆구리에 끼고서 아쉬운 발걸음을 L의 사무실로 향했다. 실용주의자인 L은 “꽃은 금방 시들 잖아”하며 스투키를 반겨주었다. L은 공동으로 쓰던 사무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의도치 않게 개인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한동안 집 서재를 사무실로 꾸밀 것인지 고민하다가 얼마 전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계획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닥치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며 고객 유치를 위한 궁리로 부산한 눈치였다. 특히 새로 마련한 공간이 비좁다며 엄살을 떨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가구 배치계획을 들려주곤 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자기 자리를 찾아간 화분을 보니 지난달 창업 특집(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위해 찾았던 강연주 소장과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사실 번듯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원을 뽑은 것은 회사를 만들고 1년쯤 지났을 때다. 당시 자리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되면서 신혼집 거실에 책상을 놓고 직원들 한두 명을 불렀다.” 강 소장의 마지막 말은 나를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데려갔다. 지금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이사 후 갓 생긴 내 방이 다시 없어지고 동생과 한 방을 쓰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얼굴이 하얀 아저씨가 “오늘부터 매일 올 거야”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그리고 집에서 넘쳐나는 청사진 뒷면에 그림을 그리던 기억, 버스 타는 법을 교육시킨다며 청사진 굽는 가게에 혼자 보냈던 아버지의 심부름을 완수하지 못해 울면서 돌아왔던 장면들이 끊어진 필름을 이어붙인 듯 재생되었다. 아버지가 창업했을 때가 당신 나이 40일 때였다. 당시 어렸던 나는 집에서 설계사무소를 시작했던 아버지가 이상하게 느껴졌고 그런 인상은 그대로 내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번듯한 사무실을 열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크고 작은 부침을 겪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그러한 부침 가운데서도 ‘설계’를 고집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그것을 대물림하려는 바람은 끝까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사업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차분한 목소리로 창업 당시를 설명하는 강 소장을 바라보며 기억의 빗장이 풀리고 지금 내 나이가 30년 전의 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나에게 창업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제 주변의 가까운 선후배들이 사무실을 열거나 창업 계획을 세우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소심한 월급쟁이인 나는 지인들이 새로 오픈하는 사무실을 보면, ‘저 임대료를 감당하려면 일을 얼마나 해야 할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혹은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당당하게 뛰어드는 (혹은 떠밀려가든) 그들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심리 상담을 업으로 하는 L은 이런 나의 넋두리를 듣더니 엷은 미소를 지었다. “용기의 임계점은 변화의 시작이야. 용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기 싫다는 거고. 대신 남이 변하길 바라지.” “망설인다는 것은 회피인 거로군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또 피하다보면 고여서 썩게 마련이지.” “흔히 ‘창업한다’를 ‘독립한다’고 표현하잖아요.” “그래, 독립은 새로운 시작이지.” “지난 달 칼럼에서 김정윤 소장이 ‘사무소에서 일하되 소장처럼 일하면 된다. 그렇게 주인처럼 설계하다 보면 자연히 어떤 위치에 있던 소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도 창업만큼 주도적인 삶을 말하는 듯해서 인상적이었어요.” “그 집단에서 자아가 독립했다는 의미지.” “이제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요(웃음)” “음. 용기를 낼 때 말이야. 접어야 할 것과 접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게 아닐까?” “어렵네. 그런데 용기인줄 알았는데 객기일 수도 있잖아요.” “용기는 미래를 예측하는 거고, 객기는 예측을 하지 않는 거지. 용기가 낙천이라면 객기는 낙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전체로 볼 때와 하나의 점으로 볼 때의 차이가 있어. 전체로 받아들이면 용기가 없어지지만 멀리서 점으로 보면 용기가 생겨. 지금의 실수도 멀리 보면 과정이거든. 점들이 모여 삶이 되는 거니까, 멀리서 보면 용기를 못 낼 이유가 없어. 근데 말이야, 저 화분은 창가에 놓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아” 그날 우리는 옥상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수다를 떨었다. L은 주변 아파트 단지의 불빛을 가리키며, 주민들을 모두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들려주었다. 30년 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래를 낙관했을까, 혹은 변화가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두렵지만 용기를 냈던 걸까? 이번 달 칼럼이나 오피니언 란에 도착한 독자편지를 보면 지난 창업 특집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창업을 앞둔 이들 뿐만 아니라 학생과 직장인들, 그리고 오래 전 창업했던 선배들까지.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변화를 도모해야 할 순간이 언제인지 고민하고 시작을 망설인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나를 포함해 용기 있는 독립을 꿈꾸는 많은 이들을 응원한다.
  • [편집자의 서재]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Editor’s Library: Hallo?-er det noen her?
    때 이른 더위가 서울을 덮쳤다. 지난주에는 32도를 웃도는 날씨에 올해 첫 폭염 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굳이 최고 기온을 확인하지 않아도, 출퇴근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가벼워진 옷차림과 태양의 열기에 익어 말랑말랑해진 아스팔트 도로가 여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낮도 길어졌다. 퇴근 후,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해 역사를 빠져나갈 때면 어두웠던 하늘이 전보다 밝아졌다.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기 전의 초여름 밤은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점점 마음이 급해진다. 낮이 길어져 밤이 짧아진 데다가 열대야가 찾아오면 사라져 버릴 이맘때의 여름밤이 문득 아까워지는 것이다. 요즘엔 땀이 나도 집으로향하는 계단을 뛰어서 오를 때가 많다. 서양에서는 예로부터 한여름 밤—일 년 중 가장 낮이 긴 하지의 전날밤—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고 셰익스피어는 이에 착안해 『한여름 밤의 꿈』1을 썼다. “깊은 밤 아름다운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물들이고 영원한 여름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아침이 와도 잊히지 않도록”2이라고 여름밤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김현식의 노래가 수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름밤에 진행되는 각종 행사의 홍보 문구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곧 잘 쓰이는 걸 보면, 꽤 많은 사람이 여름밤에 신비로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의 주인공인 요아킴도 여름밤의 기이함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요아킴의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가 출산이 임박해 아버지와 함께 집을 비운 사이 믿을 수 없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곧 태어날 동생에 대해 생각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요아킴은 어둠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별똥별하나를 발견한다. 뒤이어 정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정원의 사과나무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외계인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삽화에 표현된 외계인 ‘미카’의 외양은 영화 ‘이티E.T.’의 외계인과는 조금 다르다. 머리카락이 없고 머리가 몸보다 상대적으로 크지만, 팔다리의 길이나 눈, 코, 입의 형태와 위치 등이 사람과 상당히 비슷하다. 무엇보다 미카에게는 손가락 끝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다. 대신 미카는 유창하게 지구의 말(정확히는 노르웨이어)을 구사할 줄 안다. 미카는 자신을 보고 혼란에 빠진 요아킴에게 태연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니?”3 책의 저자인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는 철학 입문 소설로 불리는 『소피의 세계』의 작가다. 『소피의 세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냈던 그의 능력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그는 주인공 요아킴과 외계인 미카의 대화를 통해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역사, 삶의 가치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심오한 물음의 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 초반의 미카와 요아킴의 대화는 독자에게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어줄 것을 은근히 요구한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미카는 요아킴에게 왜 물구나무를 서있냐고 묻는다. 요아킴은 황당해하며 미카를 땅 위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미카는 자신이 거꾸로 요아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어 미카는 달에 갈 때 위쪽으로 여행하는지, 아래쪽으로 여행하는지 묻고 요아킴은 자신 있게 위쪽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넌 달에 내릴때 달 표면으로 날아와 앉잖아”, “그리고 네가 그 곳에 가 있을 때는 이 지구를 올려다보잖니”, “그럼 이 별과 달의 중간 어딘가에는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되는 데가 있겠네”4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미카의 질문에 요아킴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게 맞다고 답한다. 단순히 보자면 ‘중력’이라는 과학적 개념을 깨닫게 하는 대화지만, 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법과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사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져 ‘진화론’에 다다른다. “그렇지만 우린 다른 별에서 왔는데 이처럼 닮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니”5라는 대목에서 미카의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게 설정된 이유를 깨닫게 된다. 둘은 눈과 코, 입, 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더 나아가 온 우주의 생명체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비록 산 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많을지 모르지만 산은 하나야. 우리가 많이 닮은 이유는 우리 각자가 산을 오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야. 우린 그 곳에서, 그 산 꼭대기에서 함께 커다란 기념비를 세울지도 몰라”6 요아킴의 부모님이 요아킴의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미카는 한여름 밤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자는 동안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단다”7는 요아킴의 말처럼 그날 밤의 일이 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책을 통해 요아킴과 미카를 만났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생명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벌써 6월이다. 1년의 반이 흘렀고 자연스레 지난 반년을 뒤돌아보게 된다. 알찬 시간을 보낸 이에게는 즐거운 일일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평범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존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에게 힘이 될 만한 미카의 말을 전한다. “그냥 돌멩이라고? 이 세상에 있는 건 아무것도 평범하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모두 그 커다란 수수께끼의 일부분이니까. 너와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수수께끼야.
  • 버려진 목욕탕에서 예술로 목욕하기 5월 15일, ‘행화탕프로젝트’ 개관식 개최
    버려진 목욕탕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지난 5월 15일,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행화탕에서 ‘행화탕프로젝트’ 개관식이 열렸다. 축제행성이 주최하고 61311 기획단이 주관한 이 행사는 아현동 일대와 더불어 행화탕이 재개발될 때까지, 2년간 진행될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다. 기획단의 명칭인 ‘61311’은 행화탕의 지번 주소에서 따왔으며 ‘행화탕’이라는 건물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지역의 기억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61311 기획단은 문화, 예술, 공간, 건축, 대중음악, 커뮤니티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젊은 예술 기획가인 권효진(문화·공연 기획가), 김반야(대중음악 평론가, 방송 작가), 김보경(독립 문화 기획가), 박경린(독립 큐레이터), 서상혁(축제 기획가), 양은혜(마실와이드 문화부 에디터), 이아림(매거진 및 사보 에디터), 이원형(건축가, 워니스튜디오(wonystudio) 대표), 임경민(전시 기획·운영가), 주왕택(테크니컬 슈퍼바이저, 제이투커뮤니케이션 대표)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들은 공연, 시각 예술 분야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예술 기금에 의존해 신작을 발표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며 대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또한 ‘행화탕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행화탕을 지역 커뮤니티 활동과 예술프로그램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예정이다. 낡은 목욕탕의 재발견 1976년에 지어진 행화탕은 아현동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목욕탕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찜질방과 고급 스파 시설이 증가해 행화탕을 찾던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1년 아현동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됐다. 5년여간 비어 있던 공간에 올해 초부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축제·공연 기획사인 축제행성이 행화탕을 임차해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것이다. 축제행성은 다양한 예술 작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일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낡고 어둑한 분위기의 행화탕은 예술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기에 적합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2월부터 본격적인 공간 보수 작업이 기획 단원인 이원형 건축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61311의 다른 단원들도 틈틈이 행화탕에 방문해 공사와 청소에 참여했다. 폐관될 때, 욕조와 목욕 시설이 모두 정리되어서 행화탕이 과거에 목욕탕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았다. 벽과 바닥에 남은 공간 분할의 흔적을 이용해 기존 목욕탕의 구조를 최대한 되살리고 천장을 제거하여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이어 물청소, 전기 배선 설치, 지붕 방수, 화장실 보수, 화단 정리 등 대대적인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탈의실, 목욕탕, 사우나실 등 10개의 다채로운 공간이 조성되었다. 행화탕은 문이 많아 전시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입구를 변경할 수 있으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새로 태어난 행화탕은 다양한 전시와 공연, 워크숍, 교육 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관료가 저렴해 창작자들에게 열린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목욕탕을 가득 채운 문화·예술 프로그램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약 200여 명이 행화탕의 개관식에 참여했다. 특히 과거 행화탕을 이용했던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찾아와 그 의미가 컸다. 개관식에는 행화탕프로젝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공연프로그램인 상상 발전소의 ‘수중인간’, 보이스씨어터 몸MOM소리의 ‘도시소리동굴프로젝트’, 모다트의 ‘전봉준’, 서울괴담의 ‘마술극장’이 진행됐다. 또한, 개관 초청 전시 작품으로 이원형의 ‘몸의 정원’, 구수현의 ‘The Ferris Wheel페리스 휠’, 신용구의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가 설치되었다.상상발전소의 공연 ‘수중인간’은 뱃사람을 유혹하던 사이렌의 모습을 현대 융복합 콘텐츠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탈의실에 길쭉한 원통형 수조를 설치하여 수중 퍼포먼스를 펼쳤다. 목욕탕에 설치된 전시 작품 이원형의 ‘몸의 정원’은 공간의 용도와 동선의 재구성을 통해 버려진 행화탕을 ‘예술로 목욕하는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바닥을 채운 검은 물과 한쪽 벽면에서 잔잔히 쏟아져 내리는 물, 하얀 징검다리,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통해 공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작품을 감상하기위해서는 행화탕의 뒷문인 보일러실의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둡고 좁은 보일러실은 넓고 밝은 목욕탕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목욕탕 바닥의 물과 물이 빚어내는 소리는 잠들어 있던 몸의 감각을 깨우고, 하얀 징검다리 위를 건너는 관객들의 움직임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가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겨 주었던 물이 이제 마음을 씻어 주고, 물소리와 말이 뒤섞여 울리는 소리는 음악이 되어 관객이 행화탕을 ‘몸의 정원’으로 느끼기를 바랐다. 창고에 설치된 신용구의 전시 작품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는 한지로 만든 꽃을 통해 밝음과 어둠, 삶의 순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늘색 계단, 슬레이트 지붕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꽃이 가진 상징성을 이용해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중 ‘몸의 정원’, ‘The Ferris Wheel’과 공간투어, 기획단 소개 및 행화탕 옛모습 소개 상영 프로그램은 5월 28일까지 전시 및 진행되었다. 이후 ‘몸의 정원’은 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인 ‘수중인간’, 수중 사진작가의 사진 전시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물의 풍경(가제)’이라는 융복합 작품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다. ‘물의 풍경’ 전시는 6월 1일부터 12일까지로 계획되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 행화탕 페이스북(www.facebook.com/haenghwatang)에서 확인할 수 있다.
  • DDP에 누워 백두대간을 노닐다 ‘백두대간 와유’ 전, 2016. 4. 2. ~ 2016. 5. 29.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문을 연 지 만 2년이 지났다. 개관 이후 매번 흥미로운 전시를 올리고 있지만, DDP 특유의 비정형 공간을 ‘활용’하여 작품의 의미를 더하는 전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건축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말이 무색하게도 전시를 통해 DDP의 흥미로운 공간성과 소통하며 의미를 끌어내는 노력이 열매 맺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DDP 공간과 소통하는 전시’가 비로소 무대에 올랐다. 바로 지난 4월 2일부터 5월 29일까지 진행된 ‘백두대간 와유臥遊’ 전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는 작품, 내러티브, 그리고 건축의 힘이 한데 맞물려 시각, 촉각, 체험, 그리고 공간성이 시너지 효과를 자아내며 관람객을 백두대간 안으로 이끌고 있다. 와유, 누워 노닐다 ‘백두대간 와유’ 전은 문봉선 작가의 수묵 산수화 ‘강산여화’(2014),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의 ‘자리’(2014), 산악사진가 10명의 백두대간 실경 사진, 그리고 동선의 곳곳을 꾸미고 있는 백두대간 자생 동식물 일러스트와 문학, 역사, 철학 자료 30점 등이 상호 작용을 통해 풍부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의 메인 작품인 문봉선의 ‘강산여화’는 산과 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우리 강산의 담담한 모습에장대한 서사시와 같은 격格을 부여한다. 하지훈의 작품‘자리’에 누워 이 강산여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가 꾸며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와유臥遊(누워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다. 와유란 중국 송나라 화가인 종병이 산천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 나이가 들어 나가지 못하자 집 안에 그림을 걸어놓은 채로 누워 감상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감상법이다. 사실 이 감상법의 진면목은 직접 체험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자리’에 기대 누워 ‘강산여화’를 올려보면 고고한 높은 산봉우리를 마주하는 듯하고, 귓가에 시원한 계곡 바람이 느껴지는 듯하다. 디자인 둘레길을 따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백두대간은 발걸음을 멈추고 편안하게 누워 감상할 때 그 속내를 조금씩 풀어낸다. 수묵 수풀 사이로 점차 사람이 보이고, 그늘을 내어주는 짙은 녹음이 보이고, 드문드문 자동차와 비닐하우스, 철도 길처럼 화폭에 현재성을 부여하는 작은 요소들도 시야에 들어온다. ‘강산여화’와 ‘자리’가 표현하는 공간은 오래된 과거가 아닌, 느긋한 완행열차를 타고 갈 때 창밖으로 보일 법한 실제의 공간이다. 푸른 녹음에 둘러싸인 폭포수 앞에 술잔을 놓고 바위언덕에 걸터앉아 강산을 사유하는 신선의 모습은 우리가 잘 아는 동양 산수화의 한 모습이다. 신선을 바라보는 이는 그 모습에 자신을 대입시키며 화폭의 산수를 ‘체험’한다. 이처럼 화폭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강산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다. 따라서 동양 산수화의 산수는 화폭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차원에 실재한다. 어릴 적 읽던 무협지에 나오는, 산수화를 통해 이 산 저 산으로 노니는 고승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비록 높은 도력이 없더라도 시원한 ‘자리’에 의지해 ‘강산여화’ 속 두타산 너머 해돋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환유 공간과 수묵화의 만남 ‘강산여화’의 백미는 무엇보다 작품의 스케일 그 자체다. 폭 1m, 길이 150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수묵 산수화가 한눈에 관람객의 시선을 앗아간다. 둥그렇게 꺾어지는 벽을 따라 전시된 작품은 나선형 비탈을 걸어 올라갈수록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마치 산길을 걸어 오를수록 지평선으로부터 새로운 경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비록 실내라도 꾸준히 비탈을 오르며 산수를 감상하니 그 기분만은 덕유산, 지리산을 오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강산여화’의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데는 공간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로 주고받으며 동선을 따라 오가는 DDP 안팎의 공간을 거닐고 있으면 거대한 클라인의 병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 열린공간들이 상생하는 것을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환유의풍경metonymic landscape이라 표현한 바 있다. DDP내부 전시 공간도 외부의 비정형 곡선에서 생겨난 경관 요소를 그대로 이어받아 둥근 원기둥, 경사면, 타원형 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전시 공간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비정형 공간이 미술 작품의 전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근대 미술에 있어 하얀색 직사각형 공간, 또는 화이트 큐브white cube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기 때문이다. 20세기 뉴욕에서 ‘발명’된 근대 공간의 일환으로서 현재까지도 ‘갤러리’ 공간은 보편적으로 하얀 벽, 높은 천장, 그리고 무채색의 바닥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행처럼 전 세계로 번졌던 이 양식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와서 많은 비판을 받는다. 공간의 단조로운 형태가 미술 작품의 한계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거슬러 올라가자면,미국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설계로 건축되어 1959년 문을 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역시 이 화이트 큐브 현상의 문제에 부딪혔다. 작은 추상 작품을 걸 목적으로 원기둥 형태의 곡면을 가지게 된 이 미술관은 이후 여러 근대 작품―크고, 무겁고, 입체적이며, 벽에 거는 형태의―의 전시에 어려움을 겪었다. 화이트 큐브를 전시 공간으로 상정하여 제작된 작품이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에 전시될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술계에서 화이트 큐브의 영향은 아직도 가시지 않아 비정형 공간 내 회화 전시는 아직도 여러 문제를 동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DDP와 같이 현대적, 또는 미래적 공간에 흔히 ‘오랜 전통’과 함께 연상되는 수묵 산수화를 전시하며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점은 선입견을 깨부수는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낮은 비탈을 오를수록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의 추상 지형역시 공간 내러티브의 깊이를 더해준다. 흑백의 강조가 공간을 순간적으로 단순하게 보이게 할지 몰라도, 그안에서 벌어지는 내러티브는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산수 안 공간 초월transcendence “산과 산, 골과 골의 연결은 높고, 낮고, 깊고, 얇고, 가깝고, 멀고, 비우고, 채우고, 모이고, 흩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시점이나 원근은 ‘삼원법’을 버무려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안되면 처음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수없이 떠올리며 이 시대의 참된 ‘전통회화의 가치는 무엇’이고 그 방법은 없는가? 나는 수없이 되새기며 풀 한 포기, 소나무 한 그루, 계곡 그대로 그 답을 찾고자 이 산 저 산을 헤매었다.” _ 문봉선, ‘백두대간에 부는 바람’ 중 ‘강산여화’의 산수는 여러 방향, 위치, 시각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은 화폭 안에서 여러 켜가 겹쳐 있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들을 따라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장소로 빨려 들어가 있는 듯하다. 예로부터 동양의 산수화는 서양의 소실점과 다른 삼원법三遠法을 사용한다. 중국 북송 시대 화가이자 동양 산수화론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화론가인 곽희는 화폭을 통해 산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고원高遠, 산 앞에서 산의 뒷면을 넘겨보는 심원深遠,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는 평원平遠이 있다고 했다. 문봉선은 이 세 시점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관람객을 숲 안에 데려다 놓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로 옮겨 놓기도 하고, 또는 넓은 평원에서 날아가는 새와 구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화폭을 통해 모든 공간이 열리며 겹침과 확장을 반복한다. ‘강산여화’에 화답하듯 소설가 김훈이 쓴 글‘강산여율’은 삼원법을 통해 나타나는 산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본다는 것은 활로 표적을 겨누는 자의 시선이 아니다. 대상이 위치한 환경 전체를 자신의 시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전체 속에서 가파른 봉우리들이 나무와 바위의 개별성을 포용하고, 아무 발길도 닿지 않는 산비탈에서 구부러진 생애를 보내고 있는 나무 한 그루도고유한 존재감으로 당당하다. 이 겹눈의 시선이 산과 산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구도를 연결해가면서 화폭을 강물로 흐르게 한다.” 필자가 전시장에 방문한 날은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하지훈 작가의 ‘자리’에 누워 ‘강산여화’에 펼쳐진 산수를 지켜보니 짙은 안개를 지나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지리산의 산기슭, 법적 ‘어른’이 되어 처음 가본 겨울의 속리산 자락, 말로만 듣던거창의 고송 모습이 떠올랐다. 문봉선의 거친 초묵법이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윤곽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와유하던 중에는 내가 산수의 장소로 옮겨졌고, 또 일어나 걷다 보면 산수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고요한 새벽 숲 속의 명상과 같은 행위에서 내 신체는 정신과 산수가 오고 가는 매개가 되어 굳은 땅 위에 자릴 지키는 고목과도 같다 느껴졌다. 시공간 여행이 이런 기분일까? ‘백두대간 와유’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겹침은 전시를 풍부하게 만들고 경험과 체험을 압축하며 우리의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백두대간은 부분적으로나, 전체로나 우리나라 정서와 가장 맞닿아 있는 기억의 공간이자 살아가는 장소다. 백두대간의 실경 사진과 글, ‘강산여화’의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산자락과 높이 뻗은 산봉우리, 이 모든 것을 감상하기 위한 ‘자리’, 그리고 미소를 자아내는 동식물 일러스트레이션. 전시장과 산수를 오가다 보면 어느새 북한에 위치한 두류산 산맥의 빈자리에 닿는다. 텅 빈화폭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 땅의 경관이 너무나도 많음을 한탄하게 한다. 푸른 천지의 모습과 문봉선 작가의 마지막 글귀가 진하게 울리며, 대지의 경관이 정치,사회적 경계와 별개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백두대간의 감성이 깃든 다양한 작품들과 건축물의 독특함이 만들어낸 ‘백두대간 와유’는 공간과 예술의 독특한 만남을 통해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들었다.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 기분 좋은 궁금증을 남겨주고 있다. 앞으로도 DDP의 독특한 공간성이 전시의 내용에 유의미하게 활용되는 신선한 전시 기획이 계속해서 나올 수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를 통해 체감한 전시 공간으로서의 DDP의 가능성과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있는 예술계에 기대를 걸어본다. 신명진은 뉴욕 대학교(NYU)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을 쓰던 중 공간과 경관에 마음을 빼앗겨 조경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현재는 석사 졸업 후 몸담았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학업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생태조경학과 통합설계·미학연구실에서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바쁜 학기 중에도 좋은 전시 소식이 들릴 때면 종종학교 캠퍼스를 탈출하고 있다.
    • 신명진[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 석사 과정
  • 아시아 도시로부터 배우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 국제 심포지엄
    지난 5월 6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은 ‘라이브러리 스터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이라는 타이틀을 단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또한, ACC ‘라이브러리파크 프 로그램’으로 아시아의 주요도시 및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 성과물과 수집 자료를 ‘아시아의 근현대 건축’ 주제관에서 전시하고 있다.이는 국제 심포지엄과 더불어 아시아 특유의 도시 공간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창조적 생산: 아시아의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사이의 생산적 가능성’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서울, 뭄바이, 싱가포르, 상하이, 하노이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다섯 개 도시를 사례로 삼아 아시아 근현대 도시 건축의 형태와 각 도시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가 펼쳐졌다.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사이의 창조적 생산 가능성 심포지엄을 총괄한 서예례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는 “이번 심포지엄은 아시아 근현대 건축 담론에 대한 결론이라기보다는 실험적 질문을 생산하는 시간”이라며 서막을 열었다. 심포지엄의 큰 주제인 ‘형식적-비형식적’이라는 개념은 반反 도시 대 도시 찬양, 계획 대 무계획, 일시적 개발 대 단계적 개발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서 교수는 “도시의 형식과 비형식에 대한 담론들이 서구에서는 계속 존재했지만, 아시아 도시에서는 이런 담론들에 대한 교류가 충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형식과 비형식에 대한 담론의 부재 속에서 아시아 도시들은 거대하고 획일적인 ‘형식적’ 도시계획을 빠르게 경험했고, 그 이면에는 ‘비형식적 공간’이 계속 존재했다. 그는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급속하게 개발된 ‘형식적 도시’ 공간 속에서 ‘비형식적 삶’을 살아가는 아시아 도시민들의 삶을 “잡종 메커니즘”이라 칭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 교수는 “형식-비형식의 문맥에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이제는 유연한 방식의 도시계획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도시들은 서구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활동력, 자생성, 생산성을 보여주는 독특한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고층 주거와 새로운 버내큘러의 영역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1000개의 싱가포르’의 기획과 디자인을 맡았던 플로리안 셰츠Florian Schätz 교수(국립 싱가포르 대학교 건축학과)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작지만 영향력 있는 도시 국가 싱가포르만의 독특한 압축도시 모델을 돌아보고 이에 관한 통찰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인구수에 비해 국가 면적이 좁기 때문에 건물이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압축 도시모델’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이 싱가포르 모델은 효과적인 어반 테크닉urban technique과 적절한 테스트를 마친 전략의 혼합체로 타 도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 주도의 도시계획을 통해 고층 빌딩이 지속적으로 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도시만의 버내큘러vernacular 공간을 유지한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수직적 녹지 시스템vertical greening system은 “싱가포르의 기후 및 자연 환경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싱가포르의 버내큘러를 재해석한 건축 방식이다.” 끝으로 셰츠 교수는 “인구는 점점 증가한다.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가 필요하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많은 도시들에게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뭄바이, 교환적 공간과 삶의 도시 교류 용적transactional capacity은 몸, 상품, 생각, 금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의 용적을 의미한다. 이 흐름이 강할수록 용적도 커진다. 루팔리 굽테Rupali Gupte 교수(뭄바이 환경·건축대학교)는 교류 공간transactional space과 교류 사물transactional object은 “살아있는 도시의 본질을 만드는 데 중요한 몫을 한다”고 주장했다.뭄바이의 주거 유형 중 하나인 차울chawl은 그가 제시한 전형적인 뭄바이의 교류 공간이다. 긴 복도를 따라 방 하나 또는 두 개짜리의 작은 집들이 늘어선 아파트형태의 공간으로 지상층과 그 위의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주택에는 약 70~100세대가 거주할 수 있다. 차울의 형태는 개개인의 경계를 흐리고, 주택이나 상점으로 사용되는 밀집된 포켓으로 이루어져 있어 연속적인 도시 공간을 창출한다. 이를 통해 주민들의 교류가 확장되고 독특한 도시성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뭄바이의 부동산 공급 가격 상승과 함께 개발 회사들은 새로운 부동산 개발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당시 대다수의 차울은 낡은 상태였고 이는 공격적인 개발 회사가 새로운 부동산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정부는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슬럼 없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개혁 정책이 마련되었다. 뭄바이의 차울과 슬럼가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민들의 삶도 변하기 시작했다. 굽테교수는 “아파트 단지 경계 지역의 보안이 강화되었고 경계 흐리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으며,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던 공동 복도의 부재는 공동체의 소멸을 야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아시아 도시들에서실행될 도시재생의 방식들이 뭄바이의 경우를 교훈으로 삼기를 바란다.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개발 방식을 택하기를 권한다”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서울, 전통 도시 조직과 귀금속 산업의 공간적 적응 유형 1970년대의 도시 재건으로 인해 남아 있던 도시의 조직들은 삭제되거나 파괴됐고 근대적인 대형 사무용 건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대지의 용도가 주거에서 산업으로 변경되면서 기존의 도시 조직이 유지되는 지역도 있는데, 종로3가가 그러하다. 양승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는 종로3가의 귀금속 세공 작업장을 사례로 기존의 도시 조직에 구축된 주거 지역이 어떻게 그 조직에 적응하는지 설명했다. 귀금속 세공 작업장은 기존의 조직에 적응하면서 순환적 유형, 손가락 유형, 집합 유형으로 유형화됐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형태는 대지 사용, 건물, 구획, 거리 등 도시의 형태 요소가 지니는 견고함의 차이로 구분되는데, 이전 시대에 자리 잡은 대다수의 지역에서는기존의 도시망을 대체하는 것보다 기존 토대에 새롭게 적응하는 방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종로3가 귀금속 세공 작업장의 적응 방식을 통해 “서울중심업무지구 도시계획의 혁신적 프로세스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고, 이를 통해 도시설계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하노이, 프엉坊 조직의 지속과 변동-식민지적 경험과 근대의 도시 건축 우동선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학과)는 식민지 시대에 하노이의 건축과 도시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살폈다. 이 발표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식민성’과 ‘근대성’으로 서구 근대 문명의 이식과 식민지 경험이 하노이의 건축과 도시 변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핵심이다.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또한 서구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 건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식민지 지배층은 ‘치환’과 ‘매립’을 통해 하노이에 자신들의 시설을 확보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하노이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지속하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중요한 터라는 상징성만큼은 계속해서 유지했다. 상하이, 창조 산업의 새로운 도시 모듈로서 로프트 상하이는 현재 중국에서 창조도시 담론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도시 중 하나다. 한지은 교수(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창조도시 상하이’ 건설의 핵심은 “상하이 창의산업구의 3분의 2 이상이 옛 공장이나 창고 등 유휴 산업 시설을 개조해 형성됐다”는 점이다. 즉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로프트loft의 활용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로프트는 뉴욕의 소호SoHo와 같은 패션과 유행의 상징이며, 자원을 절약하고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는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 개념으로 환영받는다. 상하이의 창의산업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임대료 상승, 높은 공실률, 불필요한 개발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도시의 창조적 환경 조성과 유휴 산업 시설의 활용, 산업 구조의 고도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상하이의 창조도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다섯 개의 아시아 도시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여러 도시들의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 내부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시적이고 창조적인 생산의 가능성이 논의됐다.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은 ‘아시아의 도시로부터 배우기’일 것 이다. 아시아의 도시들에서는 도시 개발에 대한 담론이 전무한 상태에서 급속도로 근현대화가 일어났고, 우리는 잡종 메커니즘이라는 도시 체계 속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오래된 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낭만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다. 형식적, 비형식적 도시 조직의 공간 유형을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는 아시아의 도시를 위한 새로운 이해와 시각이 필요하다.서예례 교수의 말처럼, 그 단계를 넘어설 때 “기존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의 배움은 혁명적”일 것이다.
    • 권영란[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 석사 과정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시대에 반응하는 몸 Wandering Eyes, Curator's View: Bodily Reactions to an Era
    붕괴로부터 저항의 몸으로 몸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세기말적 불안과전환 속에서 몸은 여러 화두로 전개되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몸과 욕망, 몸의 풍경,몸의 정치학, 몸의 변형과 확장 등을 소재로 한 전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2010년이 넘어가며 몸은 예술의 주된 화두에서 사라져 가는 듯 했다. 사회적 침체,경제난, 재난, 파국 등 연일 반복되는 충격의 상황에서 몸이 더 이상 도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반응하는 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최근 몸의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몸짓은 미미하나 거센 진동으로 감지된다. 수동적 몸의 저항: 히지카타 다쓰미-방언 얼마 전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에서 ‘히지카타 다쓰미-방언’(5월 6일~8일) 프로그램을 보았다. ‘히지카타 다쓰미-방언’은 1960년대 일본의 전후 사회적 암흑기에 탄생한 ‘부토舞踏’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조명한다. 당시 일본의 암울한 정치ㆍ사회적 상황에 가역적으로 반응한 히지카타 다쓰미HijikataTatsumi(1928~1986)는 쇠약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쓰러져 다시 서지 못하는 수동적인 몸을 격하게 보여주었다. 마치 나병 환자와 같이 허물어지는 그의 몸은 주저앉은 채로그 움직임을 이어나간다.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걸어지고 있는 인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는 인간,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지고 있는 인간… 이런 완전한 수동성에는,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적 자연의 바이탈리티가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분명하다.” _ 히지카타 다쓰미, 형무소로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