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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대의 유산, 물
    #57 로마 시민을 위한 물 - 기원전 4세기, 아콰에둑투스 에어컨은 물론 없고 선풍기도 잘 모르는 베를린에서 35도를 오가는 폭염이 2주일 이상 계속되고 있다. 더위에 멍해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물’이다. 조경사에서 물이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서구의 정원은 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식물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물 없이 자랄 수 있는 식물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껏 보아 온 드넓은 풍경 호수의 잔잔함이 아니라솟구치고 쏟아져 내리며 물보라를 뿌리는 시원함에 대한 이야기가 좋을 것이다. 오백 개 넘는 분수가 마구 솟구치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가 떠오른다. 그러나 정원에 물을 정성스럽게 담아낸 것은 이미 고대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잠시 고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득한 옛날, 정원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하필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물론이고 그리스와 로마 역시 더운 곳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자연적인 오아시스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산의 원천에서 물을 끌어다 마른 땅을 적셔 평야를 만들었고, 도시가 형성된 후부터는 고도의 관수 시스템을 완성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파라다이스 정원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관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 정원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에 있고 메소포타미아 정원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 관수 시스템이었으므로 서구 정원의 기하학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해석도 있다.1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면적을 고루 적시려면 수로를 격자형으로 정연히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원에 가장 먼저 수로가 등장했다. 더불어 수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샘 혹은 분수가 있었고 수로의 물이 모이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물은 다시 지하나 지상의 수로로 빠져나가 정원 밖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천 시스템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려면 정원 밖에도 수로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베를린처럼 땅만 조금 파면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정원에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퍼 올렸을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곳이라면 뒷산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계류를 끌어다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 도시를 세웠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참 많은 수고를 하여 물을 끌어다 대었으므로 그 덕에 엔지니어링이 남다르게 발달할 수 있었다. 기왕 수고하는 김에 돌을 반듯하게 깎아 수로를 만들어 보기 좋게 했으며 물이 흘러나오는 샘도 동물 모양이나 꽃 모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수압을 이용해 물을 역류시키는 기술도 터득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분수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상하수도 시스템이 농경 문화와 함께 발달했고 도시를 존재하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의 물 공급 시스템이 현재의 상하수도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기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로 전해지고 그리스에서 다시 로마로 전해지면서 극치를 이루었다. 아콰에둑투스aquaeductus2라고 불리는 로마의 물 공급 시스템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로마 엔지니어링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지금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를 다니다 보면 계곡에 교량처럼 생긴 석조 구조물이 더러 남아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 교량을 아콰에둑투스라고 이해하고 있다(가르교 사진 참조). 그러나 아콰에둑투스는 본래 샘, 수로, 저수지 등을 포함한 물 공급 시스템 전체를 말한다. 펌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해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다. 속도를 조절해야했으므로 근소한 경사(0.035~0.37%)를 주면서 수로를 연결했는데, 물을 보호하고 증발을 막기 위해 전 연장의 85%는 지하에 터널을 만들어 흐르게 했다. 다만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곳에는 교량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펌프를 써서 끌어올렸겠지만 당시의 역류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치형으로 운치 있게 만든 것은 미학적 이유보다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2층이나 3층으로 지은 것 역시 골짜기의 깊이, 즉 교량의 높이에 따라 기둥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3 그 결과로 숨을 죽이게 하는 건축 미학이 탄생했다. 수로의 폭은 대개 1m 남짓, 깊이는 평균 1.5m 정도였으니 상당한 양의 물이 흘렀다. 산 위의 샘물을 우선 저수지에 모았다가 이를 수로로 흘려보냈으며 물이 도시에 도착하면 다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탱크에 모았다. 말이 지하 탱크이지 그 규모나 축조 양식은 대형 성당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이를 카스텔 룸, 즉 ‘성’이라고 불렀다. 이 카스텔 룸에서 다시 세 개의 용수로가 각각 갈라져 나갔다. 하나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공용 수도에 공급되었고, 그 다음 테르메라고 불리는 공중목욕탕에 공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각 주택에 보내졌다. 이런 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기원전 312년, 아직 공화정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인구가 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물의 수요도 증가했으므로여러 개의 아콰에둑투스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약 700년이 지난 서기 400년경에는 로마 시에만 11개의 시스템에 총 연장 504km의 수로가 연결되었다. 공중목욕탕이 11개소, 사설 스파가 856개소, 그리고 도시 전역에 1,352개의 공공 분수가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분수는 본래 장식용이 아니라 공공 수도 시설이었다. 여기서 종일 물이 졸졸 흘러 누구나 마시고 쓸 수 있었다. 주택 대부분에 별도의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서민 연립 주택의 경우 1층에만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이렇게 하여 고대 로마인들은 매일 목욕을 하며 물을 펑펑 썼고 물 소비량으로 문화적 수준을 가늠했다. 당시 1인당 하루 물 소비량이 현재 유럽인들 소비량의 두 배 이상이었다.4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게르만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게르만족에 속하는 고트족이었다. 서기 537년 로마를 포위하고 공략했던 고트족은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수로를 메우거나 파괴해 버렸다. 이후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들의 화려한 물 문화 역시 말라버렸다. 로마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멀리 비잔틴 제국으로 이사 갔고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서서히 퇴색해 갔다. 이후 바티칸에 교황청이 세워지면서 교황들이 아콰에둑투스를 일부 복원하긴 했지만 그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아콰에둑투스는 로마 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곳곳은 물론 점령지에도 수로를 놓고 스파를 만들어 로마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동으로는 터키, 서로는 영국, 북으로는 독일까지 아콰에둑투스와 로마의 분수, 테르메의 흔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 조경이나 건축을 하는 사람치고 아콰에둑투스의 높은 교량을 보고 가슴 뛰지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파리 시트로앵 공원의 디자이너들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콰에둑투스에서 영감을 받아 수로 시스템을 만들고 공원의 동쪽 경계로 삼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취약한 도시, 회복탄력적인 도시
    취약한 도시 화재, 화산 활동, 산사태, 질병, 오염, 지진, 쓰나미, 홍수, 태풍, 폭염. 현대 사회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대표적인 열 가지 환경 재해다. 최근 발생한 국내의 메르스 사태부터 2012년 가을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Sandy로 인한 미국동부의 초토화,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사회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도호쿠東北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붕괴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그림1). 특히 제한된 공간 안에 많은 사람과 자산이 밀집해 있는 도시에서는 한 번 재해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증폭되기 쉽고 이에 따른 트라우마도 깊다. 더욱이 개발이 완료된 도시를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덜 취약한 지역으로 도시의 일부를 옮기기 위해서는 보상과 이주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 도시의 취약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그림2). 여기서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특정 재해 위협에 대해 한 사회가 대처하거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위험성의 정도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취약성은 재해 자체의 규모나 지속 시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지역 사회의 민감도, 피해 후 정상 상태로 회복하는 속도와 역량, 과거의피해 경험을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학습 능력, 그리고 재해와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관용과 사회적 시선까지도 총체적인 취약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잠재적 위험, 확률, 리스크 2013년 3월, 포항시 용흥동 주택가에서 작은 산불이 일어났다. 한 초등학교 뒷산에서 점화된 불씨는 강한 바람을 타고 주변 산림에 옮겨 붙었고 이후 많은 수의 학교와 주택이 밀집한 지역까지 4km 이상 이동하며 대형 산불로 번졌다. 진화를 위해 소방 인력 약 2,500명이 동원되었으나 그 피해는 엄청났다. 주택 50동 이상이 폐허로 변했고 주민1,500여 명이 대피해야 했다.1 용흥동 산불의 발생 과정을 재구성해봄으로써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재해의 여러 개념을 정리해 보자. 우선 도심지에서 산불은 왜 발생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또는 부주의한 발화다. 물론 자연 현상에 의해 불씨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용흥동에서는 한 중학생의 불장난이 대형 화재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발화가 도시 공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주 불을 사용하는 외부 공간, 이를테면 주택지 인근에서 논밭두렁을 태우는 곳,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 빈번한 흡연이 이루어지는 공터가 잠재적으로 도심 산불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태와 장소 특성을 포괄하여 잠재적 위험hazard이라 부른다. 하지만 잠재적 위험이 늘 대규모 피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의 산림과 달리 도심지에서는 발화 지점에 낙엽이나 건조한 잡초가 집중적으로 축적되어 있거나 그 주변에 목조 주택과 슬레이트 구조물처럼 불에 타기 쉬운 시설이 분포할 때, 그리고 건조한 날 발생한 불이 큰 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요소가 모여 발생 확률probability을 결정한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위험이 높은 발생 확률을 만나 대형 인명·재산 피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즉 원인이 결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아쇠가 필요하다. 용흥동에서는 산불이 확산되는 경로를 따라 가연성 물질이 연속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주택과 학교 시설이 경로를 따라 위치해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야산을 따라 무허가 주택이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와 노인 계층이 거주하기 시작했다.3 산불발생지 주변에는 불법 노상 주차가 협소한 골목을 막고 있어 소방차의 신속한 접근과 진화 작업이 어려웠다. 이렇게 당겨진 방아쇠가 일으킨 결과인 대형 산불과 관련 피해를 리스크risk라고 부른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같이 하기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여성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던 내가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꾼 후 그 초기부터 현재까지 디자인 프로젝트는 물론 연구와 강의까지 모든 활동을 함께 해 온 건축가 파트너이자 남편인 매튜 줄Matthew Jull과의 대화를 담고자 한다. 설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 작업의 과정과 팀의 시너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회사의 특성상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팀 자체가 바뀔 때가 많고 학교에서 직접 가르치는 학생들도 많이 참여시키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팀원간의 궁합까지 매번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같이 하기’는 쿠토노톡KUTONOTUK과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ADG)의 공동 대표로서 나와 매튜 줄이 디자인과 연구를 병행하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영어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되도록 평소 대화할 때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조리나(이하 조): 우리 둘만의 돋보이는 공통점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던 게 아닐까? 지금은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대학원생들과 비교하면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자인 비전공자들이었잖아. 결국 대학원에서 각각 건축과 조경 학위를 수여받긴 했지만 디자인은 우리에게 두번째 길이었어. 너는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연구원 생활까지 하다가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고, 나 역시 정치학과 여성학을 공부하고 NGO에서 일하다가 조경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 학부 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점이 현재 우리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 매튜 줄(이하 줄): 글쎄.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학부 전공으로 건축이나 조경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 않도록 말리겠다는 거야. 우리의 배경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특히 지금 시대의 건축가나 조경가는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알아야 하는 제너럴리스트임이 분명한데다 서로 다른 가치와 사고 방법을 연결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잖아. 물론 도시의 물 순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거나 공공 건축을 위주로 설계를 진행했다거나 구체적인 전문 분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조: 하지만 우리의 그런 배경이 디자인에 매번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것은 아니잖아. 줄: 그게 아이러니한데,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아. 하지만 공간 또는 디자인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향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우리가 북극 디자인 그룹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도 디자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과 디자인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서잖아? 조: 뭐.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개념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이 문화적 구성체cultural construct라는 점이었던 것 같아. ‘태생적 운명’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면서 무엇이 되었든 인간 사회에서는 역시 각자 생각하고 말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진리도 언젠가는 변할 문화적 사상이라는 얘기잖아. 조경을 하면서 특히 ‘자연’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런 여성학의 배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자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색다르게 제조manufacture될 수 있는 문화적인 매체라는 거지. 또 한 시대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지 NGO에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바꾸겠어!’ 같은 슬로건을 보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져. 안 믿겨지더라고. (웃음)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대학교(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Michael Van Valkenburgh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설계, 조경,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Virginia) 조경건축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인 매튜 줄(Matthew 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헬싱키 구겐하임(HelsinkiGuggenheim)과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MoMA PS1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MoMA PS1 Young ArchitectsProgram), 유로판(Europan) 등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바 있다. 또한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 D.C.의 정책 연구 기관과 협력하여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매튜 줄(Matthew Jull)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Theoretical Geophysics)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의 지구물리학 연구소(Institut de Physique du Globe)와 미국의 우즈 홀 해양 연구소(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GSD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SOM(Skidmore, Owings & Merrill LLP), 스티븐 홀 아키텍트(Steven Holl Architects), MIT 센서블 시티 랩(SENSEable CityLab)에서 건축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08~2012년에는 네덜란드 OMA/Rem Koolhaas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학과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이자 조리나와 쿠토노톡 및 북극 디자인 그룹의 공동 대표로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리 올린 Beyond the Limits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into the Heart of Landscape Architecture: Laurie Olin
    조경가 로리 올린은 최근 조지 루카스 등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National Medal of Arts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미국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다. 역대에 국가예술훈장을 받은 조경가는 단 세 명, 댄 카일리, 로렌스 핼프린, 그리고 이안 맥하그가 있다. 조지 루카스는 누구나 알지만 일반인 중에 로리 올린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조경가의 사회적 기여와 개인적 성취가 현대 문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영화감독과 나란히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조경계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만큼 올린은 단지 훌륭한 조경 디자인을 넘어, 대중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대 자체를 구축해 온 인물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콜럼버스 서클, 배터리 파크 시티, 게티 센터, 워싱턴 모뉴먼트 등 기념비적인 작업을 해 왔으며, 50여 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하버드 대학교와 칭화 대학교 조경학과의 학과장을 역임하는 등 실무와 교육의 병행을 통해 현재 세계 조경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중요한 디자이너를 길러냈다. 어떤 평론가들은 올린을 옴스테드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조경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관심과 주제는 대부분 미국 도시의 이야기지만, 반세기에 걸친 통찰과 지혜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과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기에 우리 도시에도 큰 교훈을 준다. 개발과 산업, 성장의 시대를 쉼 없이 달려 온 한국 사회도 이제 저성장과 청년 실업, 다양성과 복지를 화두로 국면을 전환하고 있고 조경 및 관련 산업 또한 여기에 발맞추어 변하고 혁신해야 함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로리 올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국사회가 이미 1970~1980년대를 거치며 혹독히 겪은 사회적 혼란과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관찰할 수 있다. Q. 알래스카 출신이라는 개인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A. 대학에서는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나의 눈으로 봤을 때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은 토목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한두 해 다녀보니 토목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예술적이지 않았다. 이미 학기가 지나고 있었고 장학금도 받고 있었지만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을 해보자는 결심이었다. 본토에 와서 고향과 가장 가깝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 택한 학교가 워싱턴 주립대학교였다. 당시 알래스카가 주로 승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워싱턴 주, 오레곤 주, 아이다호 주는 알래스카 학생에게 주민 수준의 등록금 혜택을 주고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매년 여름마다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알래스카 도로건설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에서 4년을 보낸 것은 참으로행운이었다. 당시 건축학부에서 도시계획과 조경학과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명문 학교인 하버드, 버클리, 미시간 등을 모델로 삼으려 했다. 또 하나의 행운은 보자르의 전통 속에서 훈련 받은 노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워싱턴 주립 대학교는 역사적인 안목을 갖춘디자인을 교육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혹독하게 드로잉 연습을 시켰다. 4년 내내 거의 매일같이 그리고 또 그렸다. 2학년 때 워싱턴대학교는 리차드 하그Richard Haag를 영입해 조경학과를 신설했다. 그가 커리큘럼을 짜고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조경학과에 속한 학생들이 없었기때문에 우리 학년의 스튜디오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일 년 동안 리차드 하그 스타일의 이론과 역사 수업에 푹 빠졌고 그것은 정말 좋았다.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스탠 화이트Stan White의 제자였는데 화이트는 옴스테드의 사무실 출신이었다. 히데오 사사키 등이 그의 동료였다. 리차드 하그는 대단한 선생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리차드는 사무실을 열었는데 학생 중 드로잉에 능한 몇 명을 뽑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실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자연스런 일이었다. 졸업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육군에 복무했고 시애틀의 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리차드 하그 사무실과 자주 협업했고 나의 학교 친구들이 리차드의 직원이었기에 건축과 조경의 협업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1964년도에 나는 뉴욕으로 이주해 당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라라비 반스Edward Larrabee Barnes의 회사에서 건축가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래스카에서 일하면서 지형을 만들고 도로를 설계하는 데 익숙했고 조경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캠퍼스 등의 대규모 마스터플랜 등을 집중적으로 맡게 됐다. 때는 1960년대였다. 당시의 상당수 젊은이처럼 나 또한 사회적으로 공인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식이었다. 결국 시애틀로 돌아왔는데 이제 정말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유럽을 보고 싶어 장학금을 신청했다. 풀브라이트, 롬 프라이즈Rome Prize, 구겐하임 재단에 지원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합격하게 되면 고향을 벗어날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셋 다 합격하게 되었다. 결국 구겐하임과 로마의 미국 재단을 설득해 양쪽의 프로그램을 모두 누리는 것으로 조정했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화분, 장식을 넘어 생활로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타기 전에 늘 집 앞 식당을 거치곤 한다. 맛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지만 글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식당 앞 풍경은 훌륭한 영감을 주었다. 상도동 급경사지의 지형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옹벽 앞에서 홀로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작은 화분과 꽃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흙을 담을 땅조차 부족한 곳에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 식물을 심는다고 잘 자라줄지도 의문이고, 이런 경우엔 관리의 어려움도 뒤따른다. 큰 나무가 필요하지 않다면 이렇게 작은 화분을 이용하는 것이 녹시율도 높이고 경관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좋은 방법이란걸 식당 주인의 지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에 화분은 흔하다. 관리가 용이하면서 실내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인테리어 소재이기도 하다. 도심의 흔한 찻집에서도 실내에 녹색을 들이려는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나무에서 작은 나무 또는 인조목까지 화분을 채우는 식물을 다양화할 뿐만 아니라, 화분을 바닥에 그냥 내려놓거나 벽이나 테라스 난간에 걸어두는 등 활용법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화분의 활용은 실내에서 흙으로 식물의 생육 조건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는 걸 방증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지 관리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박수근미술관
    박수근미술관이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에 문을 연 지 14년이 지났다. 대표적인 작가 중심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박수근기념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건물 모두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했다. 미술관 건립 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기증하여 미술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낮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세 전시관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주변 풍광을 거스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기념관과 파빌리온은 박수근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마티에르’를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종호는 설계 노트에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박수근의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중요하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 나갔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새겨진 것이다.” 미술관의 외벽으로 화강석 깬돌을 성곽처럼 쌓았다. 여기에서 박수근 고유의 무채색의 거친 마티에르를 조우할 수 있다. 이 석축은 건축 외벽이라기보다는 성곽처럼 보이며 박수근 그림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이 석축을 강렬하게 경험하며 미술관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누구든 박수근 회화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박수근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결코 감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림의 소박함과 진실함에 감동받게 되고 그런 감동이 건축적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념관의 지붕 위를 걸어 박수근파빌리온에 이르는 길은 성곽에 닿아 있는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나 있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최우수작: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개발사업 및 택지개발사업(1단계) 조경(공원·녹지)
    산림천택 여민공지 평평한 땅에 못이 많다는 의미의 평택. 이는 곧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의미한다. ‘산과 숲’, ‘내와 못’을 일컫는 산림천택은 오랫동안 동식물의 서식처이자 인류의 생활공간이었다. 평택은 과거 ‘여덟 갈래의 물줄기가 에워싸고 흐르는 지형’을 의미하는 하팔현河八縣이라고도 불렸으며 지난 100년간 그러한 산림천택을 ‘백성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與民共之(여민공지)’을 도시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산림천택 여민공지’라는 설계 개념은 이러한 터를 활용하여 국제적 수준의 도시 환경을 위한 기틀을 다지고 산림천택의 공간을 시민들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여 평택 고덕 신도시가 미래의 국제적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변 공원 복합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는 수변 중심 공원을 제안한다. 도시민의 야외 활동 유형의 변화는 물론 증가하는 자연 체험에 대한 요구와 도심 생산 활동 참여를 고려한 프로그램과 관련 시설을 도입했다. 수변 데크, 모래사장, 물놀이 공간과 같은 휴게 공간과 엑스스포츠로 대표되는 물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수성엔지니어링 + 어리연조경디자인 + 최정민 설계 참여 / 수성엔지니어링 + 어리연조경디자인 + 최정민 설계 참여
  •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개발사업 및 택지개발사업(1단계) 조경(공원·녹지)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설계공모
    LH가 주최한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개발사업 및 택지개발사업(1단계) 조경(공원·녹지)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공모전의 결과가 지난 7월 21일 발표되었다. 최우수작으로는 수성엔지니어링과 어리연조경디자인 컨소시엄이제출한 ‘산림천택 여민공지’가 선정되었다. 우수작에는제이티이엔지의 제출안이 선정되었으며, 가원조경설계사무소와 디알에이디자인그룹 컨소시엄의 제출안이장려작으로 뽑혔다. 발주LH 위치경기도 평택시 서정동·장당동, 고덕면 일원 사업면적2,677,064m2 조경면적501,864m2 추정공사비466억원 이하 상금 최우수작(1점)_조경(공원·녹지 등)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권, 용역금액: 11억 2,200만원 이하(관리 용역 포함) 우수작(1점)_3개 업체 응모시: 상금 2,000만원/ 4개 업체 이상 응모시: 상금 2,500만원 장려작(1점)_3개 업체 응모시: 상금 1,000만원/ 4개 업체 이상 응모시: 상금 1,500만원 참여작(전체)_1,000만원 이하(3,000만원/4위 이하 업체수) 심사위원 김진오(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학과 교수) 이상석(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강찬수·안상욱·김선일·김호겸(LH 조경) 이명훈(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교수) 박영규(LH 도시계획) 유제호(LH 토목)
    • 양다빈
  • 우수작: 그린 플러그Green Plug 화성동탄(2)지구 택지개발사업 4단계 조경(공원·녹지)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설계공모
    플러그에 대한 단상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러그. 사전적 의미의 ‘플러그’는 전기 회로를 ‘쉽게 접속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코드 끝에 부착하는 ‘접속 기구’다. 또한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을 때는 ‘작동의 매개체’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고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하고 가변적인 접속을 허락한다. ‘쉽게 접속하기 위한 편리함’과 ‘작동의 매개체’로서의 플러그. 그렇다면 사람들이 도시에 보다 쉽게 접속해서, 도시를 보다 활력 있고 생동감 있게 작동시키는 ‘도시의 플러그urban plug’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길, 공원 등 다양한 오픈스페이스는 도시를 작동시키는 매개 공간으로서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단, 매개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오픈스페이스는 다양한 커뮤니티의 요구를 수용하고 커뮤니티간의 네트워크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나의 용도에 특정화되지 않는 가변적이고 융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오픈스페이스는 사람들을 보다 쉽게 도시에 접속시켜 도시를 생동감 있게 작동시키는 ‘도시의 그린 플러그’가 된다. ‘그린 플러그Green Plug’는 도시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어 ‘작동하는 도시operating city’ 동탄의 모습을 제안한다.
    • 신화컨설팅 + 성호엔지니어링 + 홍윤순 / 신화컨설팅 + 성호엔지니어링 + 홍윤순
  • 최우수작: 참[站]: 삶의 쉼표를 주는 공원 화성동탄(2)지구 택지개발사업 4단계 조경(공원·녹지)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 설계공모
    도시의 가파른 성장을 통해 도시민에게 부족한 삶의 보금자리는 늘어났지만, 도시인의 삶은 점점 더 여백 없이 무한 질주를 강요받고 있다. 동탄 신도시의 4단계 공원은 도시민의 삶에 ‘쉼표’가 될 것이다. 4단계 대상지는 오산천에서 무봉산까지 걸쳐 있어 수직적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참’은 동탄 신도시 4단계 공원의 지형적 특성인 수직적 고저차를 분절하고 천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선형의 지루함을 조절하여 도시인에게 ‘삶의 쉼표’를 주는 설계 전략이다. 동탄고유의 경관인 들녘, 여울, 마루를 모티브로 하여 세 가지 참의 유형을 고안했으며 수평적으로는 10분 거리의 간격으로, 수직적으로는 10m 높이의 간격으로 계획했다. 도시 생태원Urban Eco Garden(근린공원 1, 2, 3호) 대상지는 도시와 자연의 경계부이며 개발로 인한 훼손이 덜하다. 높은 자연성을 활용하여 현재의 지형과 식생은 변형시키지 않고 수직적으로 분리된 동선과 공간을 연결하여 인위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변화를 즐기도록 한다. 선납제 연지원(근린공원 2호)을 중심으로 도시의 동서 녹지축을 따라 ‘하천-들-도시-숲’의 한국적 경관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참’은 공원과 도시가 결합하는 주요 결절점, 주요 전망 공간 등에 위치하며 ‘한국적 신도시’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내고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돕는다.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 동부엔지니어링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 동부엔지니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