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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조경의 페다고지를 논할 때다 Column: Pedagogy of Landscape Architecture
    대학 신입생 시절, 영어 토론 서클의 첫 텍스트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였다. 원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용에는 쉽게 공감이 갔다. 진정한 교육은 선생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게 책의 메시지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요즘 나는 교수법이나 교육론으로 번역되는 페다고지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올해로 조경학과에서 교수로 생활한 지 20년이 되는 나는 오는 가을 학기부터 1년간 연구년을 가질 참이다. 과연 내가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수업방식이 최선인가? 매너리즘에 빠져 유사한 수업내용과 과제를 반복하지는 않았는가? 내 수업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교육 현장의 실존적 고민을 연구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로 삼았다. 최근에는 우리 학과 교수들과 학생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교과 과정의 개편과 신규과목 개설에 관한 논의는 늘 있어 왔지만, 이번 논의는 보다 절박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여러 교수가 지닌 역량을 어떻게 수렴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점점 감소하는 대학원 입시 지원율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등이 핵심 주제다. 교과 과정의 구성과 수업 간의 교육 내용 조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교수 방법에 대한 문제까지도 함께 토론할 계획이다. 페다고지에 관한 논의는 교육 과정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는 두 학교에서 학과장을 맡아 교육 과정을 계획하는 일을 경험했다. 조경학과의 교육 과정이 이론theory, 테크닉technique, 실기praxis의 세가지 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은 역사와 비평, 인접 분야에 대한 지식을 다룬다. 테크닉은 생태나 공학적 지식과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실기는 주로 스튜디오 과목으로 현장 중심의 프로젝트 수행 역량을 다룬다.학교마다 어떠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비전이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교육 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내가 조경 교육 과정을 다룰 때 고민했던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론, 테크닉, 실기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교수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한 선배 교수가 던진 질문은 늘 나를 고민하게 해왔다. 조경의 현실 상황이 열악한데 지나치게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것이 타당한가? 너무 많은 이론적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준비시키는 데 소홀하지 않는가를 늘 염두에 두곤 했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핵심 영역과 주변 영역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조경가에게 요구되어 온 지식이나 기술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생태적 지식과 땅을 다루는 기술이고, 후자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한정된 시간의 교육 과정에서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셋째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경 교육은 해외 대학의 교육과정을 도입해 변용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졸업생이 취업하는 시장이 상이한 상황에서 유사한 교육 과정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에게 적합한 조경 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기는 어렵다. 공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테크닉이나 실기보다 이론이 과잉인 상황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조경 고유의 지식 체계와 기술력이 빈곤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없다. 최근 조경계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건설 경기의 위축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질 높은 서비스로 대응하지 못한 내부적 상황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빈곤한 실무분야의 근원을 따지다 보면 조경 교육의 부실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육 현장의 교수들은 교육에 관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했는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학계는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에 인색한 편이다. CELACouncil of Educators in Landscape Architecture를 비롯한 여러 외국 학회에서는 조경교육에 관한 다양한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조경 교육 과정과 교육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한국조경학회지』(2015년 2월)에 실린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의 ‘조경 교육에 있어 학습자 중심 스튜디오 수업의 쟁점’이라는 깊이 있는 연구를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미래를 변화시키려면 교육에 주목해야 한다. 후속세대에게 좋은 조경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일이다. 이제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자.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 교육 현장의 고민을 나누자. 그리고 교육의 내용과 결과물을 공유하자. 좋은 시도와 성과는 많은데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조경 교육,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대학정원이 축소되고 취업난이 가중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서울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마곡지구에 본격적인 식물원을 도입하면서공원과 결합하는 작업의 코디네이터인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를맡고 있다.
  • [에디토리얼] 하지운이다 Editorial: Her Name Is Ha Ji Un
    12년 전의 봄, 한두 주짜리 단기 프로젝트를 열 개정도 진행하는 기초 디자인 스튜디오 첫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출석부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한 여학생 이름 옆 칸의 소속이 경제학과로 적혀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쪽을 보니 얌전한 인상의 여학생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기본적인 드로잉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을 테고 또 과제물이 적어도 매주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분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흘려 생각하며 수강을 허락했다. 다음 주, 그는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석이 아니라 외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임을 곧 깨달았다. 조용하고 수줍은 여학생이 한 주 만에 레게 머리의 힙합 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세 번째 주는 복고풍 세라복에 단발이었다. 한 주가 또 흐르자 노란색 긴 머리와 빨간 원피스의 조합이었고, 그 다음 주엔 검은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스커트의 오피스 걸 룩. 매주 화장 색조와 톤이 급변했고, 목과 귀와 팔과 발의장신구가 달랐음은 물론이다. 이 다채로운 변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의 설계 작업에 주목하지 못했다. 학기가 삼분의 일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 의상, 화장, 장신구가 모두 주별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로, 또 때로는 설득하는 도구로 자신의 신체까지 사용한 셈이다. 설계 성과물의 일부인 그의 외양은 학기말까지 매주 달라졌다. 순전히 설계안의 개념 때문이었다. 인형을 동반하기도 했고, 장난감 권총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종 발표 때는 급기야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학기에도 그 여학생이 조경학과에 나타났다. 조경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구실로 불러 물었다, 조경이 좋니? 네. 조경이 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 왜 조경이 좋은데? 그러자 매우 논쟁적이지만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일상적인 공간에, 장소에,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요.” 그 학기에도, 학회가 주최하는 여름 디자인 캠프에서도, 또 졸업 작품 때도 평범한 선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왔다. ‘설계 잘 하는 학생’이라는 어떤 관례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결과물은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스튜디오 시스템과 관성에 젖은 설계 교육에서는 생산되기 힘든 독특한 생각,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설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지운이다. 조경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나는 “조경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 번 속에 묻었다. 졸업 작품 리뷰에 초청한 한 조경가도 똑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조경시키기 아까운 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조경 현실이 그런 독창성과 상상력을 포용하고 배가시켜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꼭 탄탄한 실력을 갖춘 조경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졸업 무렵 지운이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 프로젝트에서 인턴을 잠시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어느 조경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오 년이 흘렀을까, 한 심포지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예전의 그 하지운이 아니었다. 악수 외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조경에 찌들고 지친 지극히 평범한 조경설계사무소 대리급 직원으로 변한 그가 한눈에 보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운이다! 얼마 전 한 페이스북 친구가 링크한 기사를 읽고 평소에는 거의 안 해본 ‘공유’라는 걸했다. 그리고 아쉬움과 반가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로 이렇게 적었다. 하지운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ühne라는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드라마 ‘미트Meat’를 다루며 출연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다. 드라마의 내용과 진행에 대한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한국에서 배우 지망생이었나요? 여배우 하지운의 답이 이어진다.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본디지 페이리즈Bondage Fairies의 ‘헤드 온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하지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형식의 조경 설계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 호 ‘설계 교육’ 특집을 의식해서 쓴 에디토리얼의 초벌 메모 파일을 지웠다. 표준화된 설계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설계 교육은 조경가로서의 기본기를 연습시키는 전문 교육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양 교육이기도 하다, 조경 교육 인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지운을 다시 만나니 하지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설계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아직 불안정한 게 한국 조경학의 현실이니 보편적인 틀을 고민하는 게 먼저겠지만, 평균의 그물을빠져나가는 잠재력과 가능성에도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운을 다시 생각하니 이번 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머리카락만으로 공간 만들 생각을 한 조리나 소장 같은 조경가로 하지운을 자라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나의 공원
    대단한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이번호 코다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한창 개봉 중인 영화 이야기는 아니니 괜한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길. 1. 공원을 보다.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란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네 컷의 사진이다. 잡지에 사용한 적도 있고, 단행본에 참고 이미지로 쓰기도 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공원이다. 뭐 대단히 유명한 곳은 아니다. 분당 까치마을에 있는 ‘벌말공원’이란 자그마하고 평범한 공원이다. 실제로 공원으로 이용(?)해 본 기억도 거의 없다. 그저 무심히, 묵묵히 지나쳐 갔을 뿐이다. 거의 매일.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려면 그곳을 거쳐 가야 했으니까. 그런 곳을 카메라에 담은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집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유일한 녹색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 꾸준히 한 공간의 사계절을 기록해보리라 마음먹고 나서 떠오른 첫 번째 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두 달짜리 나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한밤중 시간대를 달리해 가며, 5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특히 빗발이 흩날리거나 소복이 눈이 쌓인 날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당시는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지 않은 때여서, 슬라이드 필름 값을 아끼겠다고 한 번에 열 컷 이상은 찍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같은 앵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맨 처음에 촬영한 사진을 인화한 후 드럼 스캔을 받고 그걸 출력해서 카메라 가방에 넣어 놓고는 매번 들여다보며 셔터를 눌렀다. 바닥에 나만 아는 촬영 포인트도 표시해놓고, 줌렌즈의 줌 기능도 고정시켰다. 그렇게 해서 건진 ‘벌말공원의 사계’를 담은 네 컷의 사진을 재탕, 삼탕 우려먹었다. ‘이용’하지 않고 바라보거나 지나간 공원이지만, 여러 갈래의 출근길 동선 중에서 벌말공원을 경유하는 코스를 잡은 건 최단 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공원이 있어서였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는…. 2. 공원을 읽다. 네 컷의 사진에 이어 떠오른 건 두 권의 책이다. 조경비평 봄 멤버들과 함께 쓴 『공원을 읽다』(나무도시, 2010)와 환경과조경 편집부가 엮은 『한국의 공원 - PARK_SCAPE』(도서출판 조경, 2006). 『한국의 공원』에는 선유도공원부터 포항환호해맞이공원까지 총 서른 곳의 국내 공원을 수록했다. 특히 절반 이상의 공원은 사진을 새로 촬영했다. 그 덕에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선유도공원, 올림픽공원, 하늘공원, 평화의공원을 그 해에만 서너 번 방문했고, 일산호수공원, 길동자연생태공원, 여의도공원, 파리공원, 서울숲,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분당중앙공원, 서대문독립공원, 용산가족공원, 울산대공원도 한 번 이상 찾았다. 순전히 촬영을 목적으로…. 그렇게 많은 공원을 자주 방문한 경우는 그 해가 유일했다. 당시 잡지원고에 종종 등장하던 파리공원도 솔직히 그 때 처음 가보았다. 다음 해에 국내조경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쓸 일이 생겼는데, 이때의 답사가 무척 유용했다. 공원 중에서는 선유도공원, 하늘공원, 올림픽공원, 일산호수공원, 평화의공원을 그 글에 소개했다. 특히 선유도공원, 하늘공원, 올림픽공원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서울숲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서서울호수공원과 북서울꿈의숲은 완공전이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공원 리스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의 공원』이 답사의 추억으로 남은 책이라면, 『공원을 읽다』는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으로 기억되는 책이다. ‘근대, 극장, 정치, 정원, 놀이공원, 산, 물, 네트워크, 노인, 밤문화, 안전, 도시’ 등 12가지 키워드로 공원을 들여다 본 기획이었는 데, ‘노인, 밤문화, 안전’처럼 의외의(?) 키워드가 등장해 교정 보는 내내 흥미진진 했다. 특히 이경근의 ‘도시의 산, 한국의 공원’은 자신 있게 주변에 일독을 권했다. 『한국의 공원』이 주요 공원의 현장 답사를 이끌었다면, 『공원을 읽다』는 공원에 대한 다양한 담론 탐색을 이끈 셈이다. 3. 공원에 가다. 출근길에 지나쳐 간 공원을 빼고, 가장 많이 찾은 공원은 일산호수공원이다. 아마 방문 기록 2위는 마로니에공원이나 분당중앙공원이 아닐까 싶다. 마로니에공원은 목적지는 아니었다. 대학로 주변에서 데이트를 꽤 많이 한 덕분에 그 공원을 종으로 횡으로 참 많이도 지나다녔고, 그늘이 좋아 쉬어 간 적도 많다. 순전히 공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빈도로만 따지면 일산호수공원, 분당중앙공원 순이다. 일산과 분당에서 몇 년씩 살았으니까. 근데 신도시 두 곳에서 산기간은 비슷한데, 공원을 방문한 횟수는 제법 차이가 난다. 여가 시간을 보내는 패턴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 아이한테 미안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말 방콕을 즐기는 건 똑같다. 다만 분당에 살 때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거나 아주 어렸고, 공원도 차를 타고 15분 이상 이동해야 했다. 일산으로 이사한 후 아이는 신나게 뛰어 놀 나이가 되었고, 현관문을 열고 단지를 빠져 나와 6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공원이었다. 일산을 떠나 파주로 이사한 후에도 파주에 있는 공원이 아니라, 일산호수공원을 찾았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자전거를 타게 된 이후에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놀았고, 공원에서 진행되는 행사도 몇 차례 구경했다. 요즘처럼 무더운 한여름에는 해질 무렵 노래하는 분수대 주변에서 치맥을 즐기기도 했다. 일상과 공원이 가장 밀접했던 한 때였다.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10월호 특집으로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를 준비하고 있다. 그냥 이 질문 하나만 던지고, 7명의 에디터가 각자 떠오른 생각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써보기로 했다. 누구는 직관적으로 떠오른 공원을 소개하겠지만, 누군가는 이 질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나의 공원은 어디에도 없다’며 왜 그러한지를 따질 것이다. 공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나 장면을 소환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느슨하게 공원의 일상과 쓰임과 필요와 의미를 엉기성기 재구성해 볼까 한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이번 달 코다에 ‘나의 공원’ 이야기를 다해버렸으니, 다음 달 특집에는 뭘 써야 하지?
  • [편집자의 서재]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편집자의 서재에 쓸 책을 고민하다가 나의 서재를 확인했다. 독서 패턴을 알아보기 위함이랄까. 디자인과 관련해서는 형태와 도구에 대한 실험 또는 기술에 대한 관심에 따라 구매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2000년대 나온 책이 상당수였다. 고전으로 분류할 만한 건 찾기 어려웠다. 항상 새롭다는 것들 중에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이 좋았고, 떠오르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작업과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사들이는 책도 마찬가지였고, 대개 화려한 이미지가 가득했다. 두 달 전쯤 그달의 눈요기를 책임져줄 책을 찾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의 검색 습관에 따라 이런 저런 책을 추천했는데, 그날은 까만 바탕의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폰트로 제목만 달려 있는, 처음엔 ‘이게 뭔가 싶은’ 책을 추천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출판사 로고에 불과했지만,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노먼 포터, 최성민 역, 작업실유령, 2015)라는 질문을 던지며 아랫입술을 깨물게 했다. ‘그러게. 내가 좋아한다고는 하는데, 도대체 그게 뭐지’싶은 거다. 충격이었다. 노먼 포터Norman Potter가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논하는 그 독특한 방식은 그동안의 환상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힘든 일이라는 건 질릴 만큼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 자체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치 10대 청소년이 아이돌에 갖는 환상처럼 말이다. 내지의 절반 이상을 실무에서의 디자인 노동 과정과 그 고뇌에 할애하고, 그 부분을 짙은 주황색 내지에 담아낸 책의 편집 방식부터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왔다.1 “디자인작업의 10%는 영감에 의존하고 나머지 90%는 고된 노동, 즉 일종의 예술적 업무행위로 이루어진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거지, 책의 형식과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미친 짓임에도 이 책에 언급된 내용을 잘 해낼 수 있으면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더 나은 디자인 교육(수습)의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찾아낸다 해도 넌 웬만하면 실패할 것이다.’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아닌가? 처음 이 책을 받아들면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책으로만 읽힐 수 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처럼 가끔은 논점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튀기도 하지만, 결국엔 끊임없이 디자인의 사유와 산물에 숨은 (노동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나아가 디자인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단순히 도면 위의 스케치 아티스트가 아닌 실천적 디자인을 갈구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직업적’ 소명을 열렬히 설명한다.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 말이다. 두 달간 거의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이런 저런 생각을 끄적이고 밑줄을 그어대어 지저분해진 책을 다시 펼쳤다. 밑줄 친 부분은 “믿지 말아야 한다”, “~하기 어렵다”, “바람직하지 않다”, “착각이다”, “~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로 안된다”까지 상당수가 부정적인 서술어로 마무리 짓는 문장이다. 얼마 전 나를 가르쳤던 교수가 한 말이 오버랩 되었다. “어쩌면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이 쉽게 갖게 되는 (변화를 이끌겠다는 식의) 영웅 심리를 버리지 못하거나 마음 한 구석에 숨겨 놓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쉽게 스스로를 포기할지 모른다.” 포터는 그런 영웅 심리를 끌어내리려고 한 것일까? 끊임없이 겸손의 태도를 갖길 바라며 학교에서 배운 건 디자인의 몇 가지 기본 사항을 확인한 데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1년 간, 타협과 양보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고백(?)’하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담당 에디터로 있으면서 이 연재를 ‘그들이 설계하는 법: 화려한 모습 편’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기획 의도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는 초년생 디자이너와 학생을 주요 독자층으로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실패한 경우보다는 잘된 프로젝트나 남에게 보여주기에 좋은 경우를 보여주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건 아닌지. 또 주관적인 편집을 거친 이야기에 현실을 잘 모르는 목표 독자층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는 (90%의) 노동을 배제한 채, (10%의) 영감과 화려함만을 읽어내는 것은 아닌지. 지나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질문’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60세를 훨씬 넘긴 어느 유명 디자인 스쿨의 교수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이 책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공식적인 자리였음에도 결국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그 갈피를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던진 “디자이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모른다. 그럼에도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라고 짧게 답할 뿐이었다. 그때서야 ‘요약: 학생은 디자이너이다’라는 8장의 제목을 시작으로 조각난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듯했다.2 “우리를 기다려 주는 역할 따위는 없다. …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되묻는 … 학생이 확신할 수 있는 바가 하나 있다면 … 창의적 도전이 어떤 속성을 띨지는 닥쳐 보아야 알지, 예견할 수는 없다 … 단지 ‘근본 원리’를 바탕으로 적절한 결정을 내리려는 태도, 직업윤리에 관해 진솔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스스로에게 촉구할 뿐이다.” 포터가 책의 첫 문장으로 “당신은 제도판 위의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 조직하는 사람이다”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인용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본문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던 저 일련의 조각들을 어떤 순서로 읽느냐에 따라 실망과 좌절을 느끼기도 했으며, 희망과 도전의 실버라이닝silver lining(밝은 희망)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포터와 그 ‘60대 교수’가 쉬운 답을 기대하지 말 것을 주지시키면서도 한 가지에는 분명한 답을 제시했다. ‘정신과 태도가 기술과 도구를 앞선다.’ 즉 유행을 타지 않고 행동의 중심이 되는 소명 의식과 직업적 윤리의식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읽어낸 걸까. 몇 날 며칠 이어진 야근에 지친 어느 인턴 사원은 실무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이가 고작 디자인 고전 하나 읽고 내뱉는 ‘끄적임’에 불과한 외침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띠워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당신의 서재 또한 10%의 화려한 기술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저자가 강조한대로, 이 책에 담긴 그 어떤 권고나 처방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현대 운동의 정신과 손을 맞잡고 싶다 해도, 그 정신이 그냥 찾아와 주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밖에 나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 용산기지의 공원화와 세계유산 등재 용산공원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규명 학술대회
    지난 7월 24일 서울시립미술관 세마홀에서 ‘용산공원의 세계유산적 가치 규명 학술대회’가 열렸다. 용산기지는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을 계기로 지난 100여 년 간 일본군 병영(1904년~1945년)과 용산미군기지(1945년~현재)로 사용되어 온 곳이다. 서울시는 2014년 3월‘역사도심 관리 기본계획’에 따라 근대 건축 분야 전문가 자문을 통해 용산공원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으며, 2014년 11월 ‘용산공원’은 ‘한성백제유적’, ‘성균관과 문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대상의 하나로 최종 선정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용산공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치를 규명하고 그 타당성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로 마련되었다. 조광 위원장(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은 기조 강연 ‘용산공원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보존’에서 “세계적인 도시 경쟁력 평가 항목에 문화 관광 분야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중 세계문화유산의 개수를 주요 평가 지표의 하나로 강조하고 있다”며, 서울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추진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조 위원장은 이를 위해 사료의 수집과 검증을 통해 명분을 수립할 것을 강조했다. 신주백 교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는 주제 발표 ‘동북아의 역사적 전개와 용산기지’에서 군사적 시설로 사용되어 온 용산기지를 동아시아 역사 흐름과 연계해 설명했다. 특히 일본군의 관점에서 용산기지가 중일전쟁의 후방기지 중 최전선 역할을 하게 되면서 100만 이상(2개 사단)의 군이 상주하기 시작한 시기(1916~1919년)와 제17방면군 사령부가 들어서게 된 이후 대미 작전의 최전방 사령부로 활용되는 시기(1945~1948년), 그리고 미군의 관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시점에 집중하여 용산기지가 세계사적 측면에서 갖는 군사 역학적 중요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신 교수는 이를 통해 “용산기지를 한국 근현대사를 넘어 동아시아사와 세계사가 중첩된 공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용산기지를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식민의 역사와 냉전(분단)의 역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의 역사를 ‘식민’으로 한정하는 실수를 범해 일본의 하시마섬 등 23개 일본 산업 시설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의 기준에 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이어진 두 번째 주제 발표 ‘용산기지의 변화 과정을 통해 본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용산기지가 현재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김종헌 교수(배재대학교 건축학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는 경성시가전도(1927)와 같은 지도나 다수의 배치도와 건축물 평면도 등의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1920년대 말 용산기지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서울의 중심에 “용산기지만큼 잘 보존된 근대 문화유산은 찾을 수 없다”며 용산기지를 ‘20세기’의 세계 유산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현재 제시된 용산공원 마스터플랜과 관련 계획은 이러한 역사적 유산의 현황을 잘 반영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며 보존해야할 유산과 보존 방식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김 교수는 현재 용산기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Ⅱ, Ⅳ, Ⅵ1에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마지막 주제 발표로 진행된 ‘도시공백都市空白 용산공원의 의미와 가치’의 발표자로 나선 김인수 대표(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는 더 나은 용산기지 공원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용산공원은 이미 공원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며 공원을 만든다는 명목 하에 불필요한 토목 공사나 철거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공원화 과정에서 ‘서울공원박람회’와 ‘중간 이용Zwischennutzung’과 같은 이벤트를개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서울공원박람회는 엠셔파크Emscher Park나 모리스 로사 에어필드 공원Maurice Rosa Airfield Park처럼 독일에서 산업 문화 유산의 활용방안을 고민할 때 도입했던 정원박람회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공원 조성과 같은 장기 프로젝트를 공공 이벤트화하자는 것이다. 실제 엠셔 파크는 버려진 제철소의 흔적을 공원과 문화 시설로 잘 활용한 사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점에서 청중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중간 이용’은 본격적인 재생 이전에 시설의 활용 가능을 확인하고 그 이용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 제한된 시간 동안 일반 시민의 이용을 허용하는 실험적인 방법이다. 김 대표는 “100년이라는 장소·시간·기능의 공백을 채우기에 앞서 치밀한 기획이 필요하며 용산기지의 중요성과 그 상징성에 상응하는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이벤트를 통한 시민의 의견 청취와 이용 행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토론은 조명래 교수(단국대학교 도시지역계획학과)가 좌장을 맡아 진행하였으며 최성자 위원(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송인호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소장), 한동수 교수(한양대학교 건축학부), 조건 연구원(동국대학교)이 참여했다. 토론자들은 대체로 용산기지(공원)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최성자 의원이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주제가 동시에 논의된다는 점은 의아하게 느껴졌다”고 밝힌 것처럼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한동수 교수는 서울시가 제시한 ‘도시 경쟁력을 상승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명분에 문제를 제기하며 “세계 속의 용산공원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 도시, 서울 시민의 삶 속에서 용산공원의 의미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정치·외교적 목적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경향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 자격으로 의견을 개진한 강철기 교수(경상대학교 산림환경자원학과)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용산기지의 공원화 과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우리 스스로 없애버리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현 교수는 군시설이라는 점의 민감성은 인정하면서도 “용산기지의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논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개하지 못해 아쉬운 관련 정보가 너무 많다”며 더 나은 논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보다 천천히 다루어야 하는 문제임에 분명”하다는 조명래 교수의 말처럼 100년의 공백 속 미지의 땅인 용산기지를 알아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관련 전문가들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지난 100년의 용산기지의 가치에 대한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100년을 바라봐야 하는 용산기지가 ‘공원화’와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두 가지 조금은 다른 길에 서있는 듯한 목표를 좇다 모두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서울시는 용산기지를 2023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용산공원은 용산미군기지 이전이 완료(2016년 말까지 평택으로 이전 예정)되는 시점인 2017년부터 2027년까지 1,156만m2 규모로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 양다빈
  • 제22회 조경디자인캠프, ‘용산공원, 경계를 넘어’ 주제로 조경학도들이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법
    유례없는 대형 오픈스페이스이자 한국 현대 도시사의 굴곡과 복잡한 도시 형태가 뒤엉켜 있는 용산공원과 그 일대는 지난 몇 년간 많은 조경가, 도시설계가, 건축가에게 섣불리 손대기 어려운 난제로 꼽혀왔다. 미래 조경가들은 용산공원의 경계부에 ‘도시 재생’의 해법을 어떻게 제시할까? 44명의 미래 조경가들이 초대형 공원인 용산공원과 다양한 주변 도시 조직의 경계에 적용할 수 있는 도시 재생의 실천적 해법을 탐색했다. 지난 7월 20일부터 31일까지 한국조경학회(회장 김성균)가 주최한 제22회 조경디자인캠프가 서울대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가 교장을, 윤희연교수(서울대학교)가 교감을 맡았다. 주제는 ‘용산공원, 경계를 넘어’. 이 까다로운 대상지에 장소 고유의 가치를포용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덧대어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과제가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가 ‘도시 공원의 사회적 가치와 거버넌스’를 주제로, 송도영 교수(한양대학교)가 이태원의 계층성과 인종성에 대해,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가 용산의 100년간 이야기와 그 역사성에 대해, 김연금 소장(조경작업소 울)이 경리단길이 던지는 도시 재생에 대한 질문을 주제로 4일간 특강을 진행해 대상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학생들은 사례지 답사를 통해 설계를 진행하는 대상지를 직접 걷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스스로 파악해나갔다. 학생들이 그리는 용산공원 일대의 미래 조경디자인캠프는 최혜영(West 8), 강중구(AECOM Hong Kong) 튜터의 스튜디오 A, 김세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영민(서울시립대학교) 튜터의 스튜디오 B, 다니엘 오(고려대학교), 나성진(전 JCFO) 튜터의 스튜디오 C로 나눠 공원과 도시 조직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경계부―이태원길·서빙고, 남영동, 경리단길 일대―를 각 스튜디오의 대상지로 다뤘다. 스튜디오 A는 이태원길에서부터 서빙고로 이어지는 용산공원의 동측 경계 부분을 대상지로 다루며 도시속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다. 대상지의 물리적·비물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훗날 용산공원이 그 경계들과 어떻게 작동할지 상상함으로써 용산공원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해보고자 했다. 스튜디오 B는 남영동을 대상지로 삼아 공원과 도시의 매개를 탐구했다. 서울역을 관통하는 철도와 한강대교부터 시청까지 뻗어 있는 한강대로 사이에 위치한 남영동은 공원과 도시를 매개하는 연결 고리로서의 잠재력이 크지만 지금까지 도시의 낙후된 후면부로 남아있는 곳이다.스튜디오 C는 남산식물원과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시작해 용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경리단길을 대상지로 다루며 경계공간의 오픈스페이스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해야 할지 고민했다. 남산, 용산공원, 한강을 잇는 경계 공간이자 서울의 ‘길’ 문화와 ‘경사지’ 지형을 대표하는 경리단길의 오픈스페이스 디자인에 대한 실험을 통해 서울의 도시 공원들이 어떻게 서울의 변화에 긴밀히 대응하며 도시 재생의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탐구했다. 캠프의 마지막 날, 용산공원 경계부를 대상지로 한 총 15개의 작품이 제출되었고 학생들의 열띤 발표가 이어졌다. 서영애 소장(기술사사무소 이수),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 서예례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용현 교수(공주대학교)가 리뷰를 맡았다. 대상은 공원과 도시 사이에서 중간적 성격을 띠는 남영동 일대의 오픈 스페이스의 면적, 도시 건축물의 용적률, 식재의 밀도 등에 변화를 주어 프로그램, 동선, 경험 및 활동의 볼륨을 증가시키는 안을 제안한 스튜디오 B의 ‘볼륨을 키워요’(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명조, 서울대학교 유지민, 청주대학교 윤병두)가 차지했다. 대상에게는 한국조경학회장상이 수여됐다. 최우수상에는 ‘Weave it’(부산대학교 김종명, 서울시립대학교 김병호, 서울대학교 신채영), ‘Operation of fabric: flexible entrance’(부산대학교 엄성현, 서울대학교 송기현)가선정됐으며 한국조경사회장상이 수여됐다. 우수상은 ‘녹사평, 초록으로 물들다’(경희대학교 백규리, 서울여자대학교 박지연, 계명대학교 손원석), ‘전망, 전망’(청주대학교 김용환, 서울여자대학교 구수진, 서울대학교 이호상), ‘Project CC’(서울시립대학교 이진선, 강원대학교 김서현,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 최우석)가 차지했다. 또한 올 해부터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각 스튜디오별로 한 명씩 인기상을 시상했다. 김예지(동아대학교), 안로사(부산대학교), 이호상(서울대학교) 학생이 인기상의 영예를 안았다. 대상을 수상한 김명조 학생은 “밤을 정말 많이 샜다. 하기 싫은 건 쉬운 일이라도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이번에는 몸은 힘들었어도 정신적으로 너무 즐거웠다”고 캠프를 수료한 소감을 말했다. 같은 팀의 유지민 학생은 “학기 중에는 과목을 여러 개 병행하니까 설계에집중하기 힘든데 캠프에서는 설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며 조경디자인캠프가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윤병두 학생은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설계를 함께 하면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싶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며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학생들과 교류를 나누는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길고도 짧았던 2주 “학생들에게는 계속 미안한 점이 있었습니다. 캠프 진행한 200동 9층이 너무 더웠죠? 아마 한국에서 제일더웠을 겁니다. 지금 가장 더운 철이고 다른 건물들과 달리 중앙 냉방 시스템이라 6시만 되면 에어컨이 꺼져서 정말 물속에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조경디자인캠프의 수료식에서 교장을 맡은 배정한 교수는 더운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남아 작품을 만들었던 학생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말 그대로 이열치열. 44명의 조경학도들은 뜨거운 여름을 열정으로 맞섰다. 무더울수록 맵게 익어가는 빨간 고추처럼 학생들의 눈빛이 2주 전보다 자신감으로 맵게 빛났다. “처음에는 ‘방학인데 이걸 왜 했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캠프가 끝나갈수록 ‘일주일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조원들과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2주 간의 캠프 기간이 금방 지나갔고 아쉬워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조경디자인캠프를 마치며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 백규리 학생(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학과)을 비롯해 소감을 발표한 많은 학생들이 2주 간의 프로그램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에어컨을 틀지 못해 더운 작업실에서 작품을 마무리했다는 학생들에게는 ‘뜨거운 계절’을 보내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 조한결
  • 미완의 광복, ‘북한’을 바라보는 예술적 시선 ‘북한프로젝트’, 2015.7.21~9.29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립미술관SeMA은 독립, 분단,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과제를 통찰하는 전시 ‘북한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북한을 어떻게 제시하고 상상하며 재연결할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기획된 이 전시는 정치적 상황이나 교류 사업과 같은 기존의 남북한 관련 주제에서 벗어나 북한을 예술의 주체로서 바라보는 한편, 우리가 북한을 예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북한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전시 제목에 쓰인 ‘프로젝트project’라는 용어는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인 전략을 의미한다. 북한에 대한 장기적인 시선을 포함하는 ‘북한프로젝트’는 ‘앞으로 나아가pro 만들어가는 것ject’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행동하고 있는 지금의 실행 자체를 강조한다. 북한을 프로젝트함으로써 규정짓기 어려운 북한이라는 존재가 끊임없는 의미작용을 거쳐 하나의 규정된 정의의 작품object이 되려고 하는 과정, 그러나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이 이 프로젝트의 의의다. ‘북한프로젝트’는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북한의 시각예술 분야(유화, 포스터, 우표)를 조명하는 국내외컬렉션이 첫 번째, 최근 북한의 풍경과 주민의 일상을 촬영한 외국 작가들의 사진이 두 번째, 마지막은 북한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영상 설치 작업이다. 북한 유화는 북한 화가들이 작업한 작품이며 네덜란드 로날드 드 그로엔 컬렉션Ronald de Groen Collection, 포스터는 네덜란드 빔 반 데어 비즐 컬렉션Win van der Bijl Collection, 우표는 한국 신동현 컬렉션Shin Donghyun Collection으로 구성되어 한국 최초로 공개되었다. 북한 유화는 ‘조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유화’의 함축적 표현이다. 1950년대 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유화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점차 민족적 감성에 맞는 미술의 발전이 요구됨에 따라 미술가들은 ‘북한식 유화’를 만들어 이에 부응했다. 조선화를 바탕으로 한 유화는 마치 한국화처럼 바탕에 양감의 표현을 최소화한 표면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번 로날드드 그로엔 컬렉션은 혁명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들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작품 위주로 구성되었다. 내용면에서 국가 체제의 이념 구현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북한 주민과 북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다. 북한 포스터는 선전화라고 불리기도 하는 만큼 선전을 위한 표제어와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계도를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북한 포스터 컬렉션인 빔 반 데어 비즐 컬렉션은 포스터가 북한 사회에서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제작되며 대중 선전 도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섹션이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별로 나뉘어 전시된 포스터는 각 시기에 국가가 당면한 과제를 북한 주민에게 구호를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우표 생산국 중 하나인 북한은 그 규모만큼이나 다양한 소재와 방식을 자랑한다. 신동현 컬렉션은 북한의 우표들이 해외 컬렉터에 의해 평가되고 결정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우표를 정리하고자 만들어졌다. 이 컬렉션은 북한의 『조선우표목록』에 수록된 공식 발행 우표의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어 우표에 반영된 북한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의 닉 댄지거Nick Danziger, 네덜란드의 에도 하트먼Eddo Hartmann, 중국의 왕 궈펑Wang Guofeng이 담은 북한의 도시 건축, 풍경, 인물 사진을 통해 최근 북한의 모습을 만나보는 섹션 또한 마련되었다. 뉴스가 다루지 않는 북한 일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도주의적 시각보다 북한 건축 공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공산 국가 건축에 대한 꾸준한 작업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진은 북한 주민의 일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는 작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시각을 삶의 풍경, 도시 공간의 공허함, 사회주의 국가의 구성원과 건축물이 보여주는 스펙터클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분단 현실을 다뤄온 강익중의 ‘금수강산’, 냉전기 소련과 미국의 우주 개발 경쟁과 북한 땅굴 사건을 병치해 리서치 자료와 함께 보여주는 박찬경의 ‘파워통로’, 그리고 사진과 글쓰기로 현장에 대한 기록과 문제제기를 제시하는 노순택의 ‘붉은 틀 #I-01’,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일상을 이야기하는 이용백의 ‘우리에게 희망은 언제나 넘쳐나’가 전시되었다. 또한 남북 구분이 없는 하나의 세상을 작품을 통해 염원하는 탈북 작가 선무, 3D 가상현실 기법을 이용해 관람객에게 DMZ에 들어가 보는 경험을 선사하는 권하윤, 남북한 피아니스트의 음악적 대화를 통해 대립의 극복을 시험한 전소정의 작품이 초대되었다. 북한 예술가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시각을 포함하는 이번 전시는 서로간의 대화를 위한 세 가지 다른 시야의 맵핑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람객 모두 북한에 대한 시각을 교환하며 담론과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것을 다시 본다 7월 28일 서울시립미술관은 북한대학원과 공동으로 ‘북한프로젝트’전과 연계한 학술 심포지엄인 ‘북한을 바라보는 것을 다시 본다’를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은 정치와 경제적 틀에 국한되어 논의되던 북한에 대한 관심을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기획되었으며, ‘북한의 Visual Art’, ‘북한의 문화, 문화로의 북한’, ‘라운드테이블-북한(이) 바라보기’, 이렇게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각 섹션은 북한 노동신문에 나타난 최고 정치 지도자의 사진과 북한의 기록 영화, 그리고 북한의 미술과 북한을 그린 우리나라 영화와 같이 각기 다른 매체를 대상으로 북한이 제공하는 시각과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사이의 온도차를 조망했다. 북한의 시각예술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섹션에서 변영욱 기자(동아일보)는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역대 지도자들의 모습은 권력의 정당화와 체제 유지를 위해 정밀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방편이라고 해석했다. 김승 교수(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는 북한 기록 영화에 담긴 표상 분석과 그 내러티브에 담긴 의미 체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북한의 문화에 대한 두 번째 섹션에서 발표한군 드 궤스데르Koen de Ceuster(Leiden University)의 사상예술성 탐구와 북한 예술에 대한 예술성 판단의 유무에 대한 논의는 북한 미술의 미적 특질, 향후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전영선(건국대학교)은 북한을 소재로 한 우리 영화를 통해 북한을 그리는 시각의 시대적 변화 양상을 소개했다. 북한을 다룬 영화는 시대나 유행에 따라 초점이 되는 구체적 대상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한정된 스펙트럼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논의는 북한에 대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함을 떠올리게 했다. 북한과 관련한 여러 가지 매체들을 대상으로 하되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번 심포지엄과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다.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주최 측의 말대로 우리의 시선과 시각은 결코 중립적일 수도 순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것’의 의미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전시 이후에도 북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한편,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접근 방식을 성찰하는 기회가 된다. 접근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임을 북한 관련 예술을 통해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안진희 /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조경학 박사과정
  • 지도의 이면을 항해하다 ‘신지도제작자’, 2015.8.5~26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 활동가로 잘 알려진 한비야의 책 제목인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지도가 가진 사회문화적인 메타포를 잘 보여준다. ‘지도’란 우리가 잘 아는 세상을 의미하고 ‘지도 밖’이란 미지의 세계 혹은 소외된 공간이나 사람들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지도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사실 지도는 만드는 사람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안에 담기는 정보가 선택되고 가공된다. 즉 지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관계망을 드러내고 시대의 관습을 투영하는 매체인 셈이다. 그래서 지역적 맥락을 중시하는 도시, 조경, 건축분야에서는 맵핑mapping을 분석 도구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디자인의 생성 도구로 확장하기도 한다. 맵핑이 디자이너에게 창조적 과정이 되고, 더 나아가 예술가들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공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실제와 재현된 지도의 간극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 5일부터 26일까지 송원아트센터에서는 통상적인 지도의 형식과 개념을 넘나들며 맵핑의 범주를 확장하는 전시 ‘신지도제작자’가 열렸다. 한국, 프랑스,독일 등 14명의 작가와 디자이너, 건축사가가 참여해 드로잉, 설치, 회화, 미디어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세상을 지도화했다. 지도와 예술의 만남,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대화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이 워낙 다르고 작업에 담아내는 내용의 간극도 상당히 크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양면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배치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상대적인 방식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병치했지요.” 전시의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심소미의 말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하던 참여 작가들이 어떻게 맵핑을 해석하고 표현하는지 그 다양함에 주목하는 것은 ‘신지도제작자’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전시장 초입에 전시된 카롤린 코바쏜Caroline Cobasson의 ‘블랙아웃 맵Blackout Map’(2013)은 지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블랙아웃 시리즈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접이식 지도에 검은 스프레이를 뿌려 시각적 정보를 모두 지워버렸다. 마치 밤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둠과 적막이지나간 자리에 언뜻언뜻 남아있는 지도의 흔적이 마치 은하수처럼 떠오른다. 코바쏜의 작업이 직관적이고 정서적으로 자연의 광대함과 무한한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면, 부로 데튜드Bureau d’tudes의 ‘세계 정부World Government’(2013)는 현실 세계의 구조적인 관계망을 논리적으로 보여준다. 동시대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맵핑하는 카토그래피cartography 작업을 해왔던 작가는 자본주의 발전과 유형에 대한 관계망을 구체화한 ‘권력 지도’를 선보였다. 이 엄청난 양의 정보 앞에서 관객은, 작가가 구축한 세계를 해석하느라 머리가 바빠진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을 가득 채운 픽토그래픽pictographic과 컬러풀한 버블은 그 자체로 지도의 배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의 아우라aura를 뿜어낸다. 반면 유창창의 ‘COME’ 시리즈는 불안과 공포를 신경질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해보기 위해 지도 앞으로 한 발 다가서 보면 지도 안의 정보는 꼼꼼하게 지워져 있다. 유창창의 지도 작업은 2010년경 한참 사회가 각종 참사와 분쟁들로 소란스러울 때 등장산되고 흘러내리면서―실제 작품에 뿌려진 것은 작가의 정액이다―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전시장 한편에는 1966년판 유라시아 지질구조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순수한’ 지도는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디자인과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기도 해서 의외로 이 전시에 잘 녹아든다. 그 바로 옆에는 임선이의‘붉은 눈으로 본 산수’(2008)가 전시되어 있다. 지도의 등고선을 칼로 오려내 켜켜이 쌓아 올린 작업이다. 흔히 조경가나 건축가들은 대상지의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용으로 ‘콘타를 뜬다’. 그런데 임선이 작가는 무한한 수공의 노력을 통해 이러한 등고선 지도contourmap를 조각으로 만들어 새로운 풍경을 맵핑한다. 보이지 않는 장소,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 과거의 지도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분쟁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는 맵핑도 있다. 줄리앙 코와네Julien Coignet의 ‘군도Archipel’는 고지도에서부터 현재의 지도까지 시간을 달리하는 지도를 중첩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작가는 구글 검색을 통해 한반도 주변 섬들의 과거와 현재 지도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가상의 풍경을 만들었다. 남한, 북한, 일본 등 세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현재는 분쟁 중인 곳도 있고 과거에는 다른 나라 영토였던 섬도 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마치 고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토나 국경의 개념이 얼마나 한시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드러낸다. 지도에 얽혀있는, 혹은 지도가 드러내지 않는 삶을 드러내는 작가들도 있다. 이들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주관적 시선과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린다 하벤슈타인Linda Havenstein의 ‘구룡 워크The Guryong Walks’(2015)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장소 아닌 장소no place’ 구룡마을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시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들을 들춰내는 작업은 은폐된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한다. 김태헌은 너무 좁아서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성남의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도시의 빛바랜 색들을 채집해 재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이 작가는 1990년대 말쯤 성남 개발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작업과 리서치를 많이 했습니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작업들을 일찍 시작한 셈입니다. 최근에는 작은 회화 작업을 주로 하셨구요. 선생님의 초창기작업을 연상하고 전시를 부탁드렸는데, 자연스럽게 그 두 가지 작가적 태도가 연계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라며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태헌 작가가 색을 채집하는 방법은 의외로 원시적이고 노동집약적이다. 일례로 오래된 문을 발견하면 그 표면에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낸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가 그 색을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이다. “수십 년의 때가 묻은 색을 페인트를 섞어서 똑같이 만들어 내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추상화처럼 전시되어 있는 ‘성남 구시가지의 색’(2015)은 이렇듯 작가가 직접 땀 흘려 채집한 45가지 골목길의 색들이다. 실제 작가들이 몸으로 체험하며 만들어내는 작업은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작업을 주로 해온 미디어아티스트 자우녕의 작업이 그렇다. 나룻배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님과 함께 광나루에 살았던 작가는 어린 시절 한강의 모래사장에서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기억 때문에 한강에 남아있는 모래를 찾아 전시하려던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는데, 서울에서 남양주, 팔당댐까지 모두 걸으며 모래를 찾았지만 남아있는 모래사장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유품처럼 강물에 떠내려온 물건들을 발견했고 그 죽음의 잔재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시장에서 복원했다. “처음에 이 오브제들을 보았을 때 기획자의 입장에서 너무 당황했죠. 그때 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전시물들에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는 게 보였어요.” 그렇게 자우녕의 작품은 전시장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의 삶을 애도하고 기억하면서 맵핑의 범주를 고민하게 한다. 그밖에도 전시장에는 시각을 청각으로 전환한 백정기의 ‘맑은 밤 혼자 걷는다’(2011)나 일상 속 장소에 깃든 개인적인 기억과 몸의 움직임, 주관적인 감성의 흔적등을 자신만의 지도화한 김정은의 ‘부유하는 장소 맵핑Floating Place mapping’(2015) 혹은 통계를 활용한 다이어그램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 맵핑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험이나 기억, 지각, 이데올로기, 사회 문제 등 지도에 담긴 주제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지도’의 복합적 성격과 가능성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번 전시의 상당수 작업들이 온전히 작업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몸으로 겪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예술 작품과 공간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작업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한 전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같지만 끝없이 반복된 노동 이후에 찾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공통된 숙명을 느끼게 한다.
    • 김정은
  • 셀가스카노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2015 런던 하이드파크, 2015.6.25~10.18
    ‘런던에 상륙한 사이키델릭 번데기’, ‘무지갯빛 애벌레’등은 올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런던 하이드파크 내 위치한 현대미술관인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매년 여름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청해 선보이는 한시적인 건축 프로젝트다. 요약하자면 낮에는 카페로 쓰이고 밤에는 포럼이나 오락을 위해 활용되는 300m2 면적의 파빌리온을 세워 약 4개월가량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서펜타인 갤러리 측은 올해의 파빌리온을 지을 초청 건축가로 스페인의 건축 스튜디오 셀가스카노selgascano를 선정했다. 재미있는 디자인playful design과 대담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 이들 신예 건축가가 완성한 파빌리온은 건축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한없이 가벼운 디자인 이번 파빌리온은 마치 두 마리 애벌레를 X자 형태로 겹쳐 놓은 듯한 모습인데, 스틸 프레임을 사탕 포장지같은 얇은 막과 리본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다채로운 색깔의 이중 외피는 반투명한 플라스틱인 불소수지필름(ETFE: 콘월에 있는 온실인 에덴 프로젝트를 덮고 있는 재료)으로 만들어졌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의 여러 구멍을 통해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갈 수 있으며, 구조물의 외부와 내부 레이어 사이의 ‘비밀 통로secret corridor’를 통과할 수도 있다. 건축가는 대상지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런던에서 이동하는 방식에서 이 작업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레이어가 많아서 혼돈스럽지만 구조화된 흐름을 보여주는 런던의 지하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국의 왕립 공원에 번데기 모양의 파빌리온을 만든 셀가스카노는 부부 건축가인 호세 가스José Selgas와 루시아 카노Lucía Cano가 1998년 마드리드에서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셀가스카노의 작업은 건축에서 드물게 쓰이는 합성 재료synthetic materials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들은 독특한 색채와 자연을 참조하는 디자인을 추구했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이나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셀가스카노는 대중이 “구조, 빛, 투명성, 그림자, 가벼움, 형태, 예민함, 변화, 놀람, 색채 그리고 재료와 같은 단순한 요소를 통해 건축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 결과 탄생한 파빌리온의 “각 출입구는 색채와 빛 그리고 놀라운 형태의 공간을 통해 특별한 여행을 허락한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디렉터인 줄리아 페이튼-존스Julia Peyton-Jones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파빌리온이 “여름내내 사람들이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생생한 이벤트가 펼쳐지는 장소”라며, 올해의 프로젝트가 ‘파티 파빌리온’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했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여름 금요일을 택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서 열리는 이벤트 무대인 ‘공원의 밤Park Nights’을 기획해왔다. 올해 프로그램으로는 음악, 공연, 토크, 영화상영 등이 있다. 이러한 시즌은 서펜타인 갤러리의 공동 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매년 10월진행하는 마라톤 행사와 함께 절정을 이룬다. 실제 올해 파빌리온의 심장부는 카페와 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오픈스페이스다. 영국의 홍차 전문 브랜드인 포트넘앤 매이슨Fortum & Mason은 파빌리온 내에 베이스를 차리고 아이스크림 카트를 운영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에서 아이스크림뿐만 아니라 이 브랜드를 유명하게 만든 애프터눈티 세트인 햄퍼링Hamperling도 즐길 수 있다. 이들의 디자인 의도는 매혹적으로 작동한다. 화창한 날이면 파빌리온의 벽과 바닥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에 의해 몽롱한 색깔이 어른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파빌리온 내부의 조명에 무지개처럼 (혹은 신호등처럼) 빛나는 ‘번데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 이곳은 “인스타그래머들의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instagram에서는 이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동굴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셀가스 역시 사진 재생이 파빌리온의 핵심 부분임을 인정했다.1 재미와 기능 사이 셀가스카노의 파빌리온은 투명성과 가벼움은 확보했으나 디테일과 안전 문제에 대한 지적은 면하지 못했다. 사실 리본 테이프가 스틸 프레임에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는 모습은 미덥지 않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이 장난기 넘치지만 연약한 구조물이 자신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2 그래서 건축의 기본적인 기능을 충족시키기 못하는 이 파빌리온은 ‘건축architecture’이 아니라 ‘사물thing’이라는 비판을 불러 오기도 한다. 한 건축 비평가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의 경구를 떠올리며, “이 파빌리온은 6개월 동안 디자인되고 완성되는, 툭 등장했다 사라지는 재미있는 궁전이며 건축적 미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반면 셀가스와 카노는 이 파빌리온이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완벽하고 세련된 보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실험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디자인에 대한 일각의 비판(즉 디테일이 결여되었다거나 조잡하다는 평가)은 일부 짧은 조성 기간이나 제한된 예산 등의 기본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셀가스는 한 인터뷰에서 제작비와 시간 부족으로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하려던 원래 계획을 변경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건축가 초청부터 완성까지 최대 6개월을 넘지 않는다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위한 예산은 없다. 파빌리온의 조성 비용은 후원―올해의 주요 후원은 국제적 금융기업인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가 했다―이나 현물지원, 그리고 완성된 구조물의 판매를 통해 충당된다. 그러나 이 판매 금액은 전체 비용의 40%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스밀랸 라디치Smiljan Radi 의 2014년 파빌리온은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Hauser & Wirth art gallery로 옮겨졌다. 올해의 파빌리온도 세컨드 홈Second Home에 팔려 LA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예정이다. 경비는 많이 들지만 수명은 짧은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상당한 모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이 좀더 스펙터클하고 오락적 성격을 강화한 구조물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주장5도 설득력을 가진다.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실제 프로젝트에 비해 훨씬 더 실험적인 기회를 제공한다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제작비 조달의 한계 앞에서 스폰서를 위한 기능 위주의, 수집 가능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험적인 공공 프로젝트의 가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지난 2000년 서펜타인 갤러리의 후원금 모금 파티를 위해 자하 하디드Zaha Hadid에게 설계를 의뢰한 임시 야외 천막이 예상 외로 인기를 얻으면서 연례행사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시적인 프로젝트는 드문 일이었고, 서펜타인 갤러리는 파빌리온 시리즈를 통해 영국 안팎에서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공공 갤러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혁신성은 지속적으로 건축 실무의 영토를 넓혀 왔지만 영국에서는 작업하지 않았던 신진 건축가를 초청하는 작가 선정 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그간 렘 쿨하스Rem Koolhaas,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등 스타 건축가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2013년의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 2014년의 스밀랸 라디치 그리고 올해 셀가스카노 등은 고국 밖에서의 작업이 드문,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건축가들이다. 이들은 연간 30만 명이 방문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 파빌리온이 예술과 사회·문화적인 행사들과 결합되며 대중과의 신선한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도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문제점 역시 지적되는 최근, 혹자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갤러리의 앞마당을 넘어, 좀더 다양한 경계에 있는 디자인을 지원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파빌리온이 재료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는 혁신적이고 매혹적인 건축인지 혹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그 무엇에 불과한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건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고, 보다많은 사람들에게 건축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건축의 본질을 탐구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공공적 가치는 아직 유효한듯하다.
    • 김정은
  • [시네마 스케이프] 암살 근대의 풍경
    “경성,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올 여름 대중적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은 경성 암살 작전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에서 경성은 커피라는 것을 마실 수 있는 곳, 즉 근대화된 도시를 의미한다. 그녀는 아기 때 유모의 품에 안긴 채 만주에 온 후 간도 학살을 목격하고 독립군의 명사수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 접하게 될 경성의 낯선 근대 풍경은 영화에서 어떤모습일까. 1930년대의 경성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종교, 군사, 교육의 중추 기능을 집중시킨 도시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외주로 만든 영화 ‘경성’은 경성의 하루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당시의 실제 풍경을 볼 수 있다. 새벽에 기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활기찬 일상과 화려한 본정의 밤거리가 담겨 있지만, 지배자의 시선으로 대상화한 경성 풍경이 주를 이룬다. 최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몇 편 발표되었지만 당시의 풍경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화 ‘암살’은 1910년대의 손탁 호텔부터 영화 속 주요 배경인 1933년의 경성역, 미쓰코시 백화점과 선은전 광장, 명치정과 아네모네 카페, 서소문거리와 주유소를 비교적 세심하게 재현하고 있다. 남산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신사이로는 만리재와 경성역의 원경까지 볼 수 있다. 선전용 영화가 아니면 엽서나 사진 같이 박제된 이미지로만 접했던 근대 태동기의 풍경이 담겨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