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서울 수목원’, 서울역 고가의 새로운 밑그림을 그리다 ‘서울역 7017 프로젝트’ 당선작 발표
    지난 5월 13일, 서울시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4월 27일 기술 심사에 이어 본 심사가 29일 진행되었으며, 승효상 서울시 총괄건축가(심사위원장)를 포함해 국내외 건축·도시·조경 전문가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평가에 참여했다. 심사 결과 최종 당선작으로 네덜란드 건축가인 비니 마스Winy Mass(MVRDV)의 ‘서울 수목원The Seoul Arboretum’이 선정되었다. 2, 3등작은 조성룡(조성룡도시건축)의 ‘서울역고가: 모두를 위한 길The Seoul-Yeok-Goga: Walkway for All’과 조민석(매스스터디스)의 ‘흐르는 랜드마크: 통합된하이퍼 콜라주 도시Continuous Landmark: Unified Hyper-Collage City’가 수상했다. 이번 공모전은 국제 지명 초청 공모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수상작 3팀을 비롯해 후안 헤레로스Juan Herreros(estudio Herreros),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Topotek 1), 창융허Chang Yung Ho(Atelier FCJZ), 진양교(CA 조경기술사사무소) 등 총 7팀이 참가했다. 최종 심사 결과 발표에 앞서 5월 10일에는 산책과 소풍 장소로 서울역 고가를 개방하는 ‘고가에서 봄’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역 고가 도로, ‘사람길’을 제안하다 당선작인 비니 마스의 ‘서울 수목원’은 서울역 고가를 대상지 주변 17개의 보행길과 연계된 하나의 공중 정원으로 만들겠다는 설계안을 제안했다. 서울시에 식재되어 있는 수목을 가나다순으로 심고, 그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를 유도해 지역 활성화를 촉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승효상 심사위원장은 “서울역 고가를 넘어선 지역으로 녹색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시민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프로세스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서울역 고가의 가장 큰 문제로지적되었던 안전성을 개선하는 데에서 다른 작품보다 높은 디테일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 비니 마스는 같은 날 진행된 인터뷰에서 “설계 개념인 수목원은 목적이 아닌 다양한 맥락을 이어주는 도구로 제시한 것으로 파편화된 도시 맥락을 연결하고 그 과정에 시민의 소통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매개체로 기능할 것”이라고 당선작을 설명했다. 2등작인 조성룡의 ‘서울역 고가: 모두를 위한 길’은 고가를 따라 놓인 주요 도시 거점에서 비롯된 7개의 공간(이야기)을 제안하고 이를 기존 고가 위아래로 중첩되며 이어지는 3개의 보행로로 엮어 내겠다는 안을 선보였다. 김영준 MP(김영준도시건축)는 “로컬 디자이너로서 시간에 따른 지형과 서울역 일대의 변화에 대한 리서치와 면밀한 분석 내용이 두드러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제시한 비용 절감과 운영·관리의 방식이 우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 오히려 안전성과 운영·관리라는 근시안적인 필요성만을 충족시키는 다소 소극적인 제안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리서치 내용과 서울역 고가가 갖는 문제에 대한 분석력이 두드러진 것에 비해 최종적으로 제시된 설계안이 구체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3등작인 조민석의 ‘흐르는 랜드마크: 통합된 하이퍼 콜라주 도시’는 서울역 고가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이어지며 8개의 공간 개념(산의 재구축, 환영광장, 평범한 산책길, 흐르는 랜드마크, 도시등불, 도시마당, 3차원 역사 복원, 서울성곽 연결)을 통해 마치 콜라주처럼 각 공간의 경험을 하나의 시퀀스로 이어준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기본 가이드라인에 제시된 구조 보강과 관련된 내용을 균형감 있게 선별하여 부분적인 고가 철거 작업을 진행하고 유용한 부분만을 활용하자는 안이었다. 김영준 MP는 “7개 작품 중 가장 완결적인 형태를 제안한 안이었다. 서울역 고가의 문제를 구체적인 디자인을 통해 잘 풀어내었으나, 기존 고가의 상당 부분을 철거하거나 변형한다는 점이 역사성을 존중하자는 공모의 의도와 상충되었다”고 전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서울 수목원’ 승효상 심사위원장은 “현재 1등작으로 선정된 비니 마스의 작품도 서울역 고가의 확정적인 미래상이 아니며, 그 모습을 찾기 위한 밑그림으로 기능할 것”이라했다. 서울시는 앞으로 프로젝트가 완료될 때까지 지역 주민 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회의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며 당선안을 구체화할 예정이라 밝혔다. 덧붙여 “설계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한 후 6월 중으로 비니 마스와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라 전했다. 조성일 본부장(서울시 도시안전본부)은 “본격적인 구조 보강작업은 10월부터 시작되고 작업 진행 상황에 따라 구간별로 단계적 시공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향후 사업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덧붙여 “모든 구간을 2017년까지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으며, 2017년 3월까지 전체 사업 대상지 중 일부 구간만을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아직 전체 구간의 완공 시기는 정해진 바 없다”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 당선작 발표에 앞선 지난 5월 7일, 교통 문제 해결과 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을 담은 ‘서울역 일대 종합 발전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구조 보강 작업 시 실시될 교통 통제에 따라 발생할 교통 혼잡을 최소화하기 위한 우회경로 확보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시는 동서 간선 도로 보강, 숭례문 서측 교차로 신설 등 주변 16개 교차로에 대한 개선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모든 공사는 교통 통제가 이루어지는 시기인 10월 전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조본부장은 “교통 개선 계획에 따른 공사가 완료되고 서울경찰청과 교통 통제에 대한 협의가 마무리되면 서울역 고가에 대한 전면 교통 통제를 시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시는 ‘서울역 북부 역세권 개발’을 앞당기는 계획을 통해 서울역 고가 도로의 대체 교량을 건설하는 사업이 최대한 이른 시기에 실시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북부 역세권 개발 계획은 서울역 옆 철로 부지에 대형 컨벤션 센터와 호텔 등을 짓는 사업으로, 지난 2008년부터 민간 사업자 공모를 진행했지만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업자를 찾지 못했다. 서울시는 용적률이나 인센티브 등 규제 완화를 통해 빠르면 오는 9월 사업 공모에 나설 계획이라 밝혔다. 하지만 사업자를 찾더라도 ‘서울역 7017 프로젝트’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대체 교량 설치가 어려울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역 7017 프로젝트’는 노후화된 서울역 고가를 녹지·문화·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하고 쇠퇴한 공간에 활력을 불어 넣어 지역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해 나가기 위한 시도”라며 이번 공모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날 비니 마스는 “좋은 프로젝트에는 항상 복잡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만큼 잡음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잡음이 더 많은 가능성과 논의를 일으킨다는 것도 분명하다”며 ‘서울 수목원’이 많은 사회적 참여를 유도하는 촉매로 기능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당선작 발표 소식을 들은 일부 시민들은 “사업 계획에 대한 계약을 확정하기에 앞서 얼마나 많은 의견 수렴이 가능할지”, “완공 후 유지·관리비는 어떻게 충당할지”, “서울역 고가 수목원 조성에 따른 교통 체증은 어떻게 해결할지” 등 이번 사업에 대한 의문과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본지는 다양한 가능성과 현실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분석하고 향후 ‘서울 수목원’과 서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이슈를 되짚어보고자 『환경과조경』 327호(2015년 7월호)에 지명 초청작 7작품과 비평을 수록할 예정이다.
    • 양다빈
  • Waterlicht 네덜란드 베스터보르트, 심해에 잠기다
    ‘우주쇼space show’라는 이름의 다양한 천체 현상이 지구인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뉴스를 간간히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천체 현상은 자주 일어나지도 않고, 관측환경은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날씨가 좋아도 한 지점에서 길게는 수 시간, 짧게는 몇 분에 불과한 시간동안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희소성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이유이지 않을까. 지난 2월 말, 네덜란드의 라인Rijn 강과 에이설IJssel 강 사이에 위치한 베스터보르트Westervoort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빛의 쇼가 펼쳐졌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두 시간 반. 4헥타르의 땅에 펼쳐진 물빛이라는 뜻을 가진 푸른빛의 양탄자, ‘바터리히트Waterlicht’가 바로 이번쇼의 주인공이다. 150분의 마법, 바터리히트 바터리히트를 디자인 한 단 로세가르데Daan Roosegaarde(스튜디오 로세가르데 대표)는 “최신 LED 조명 기술이 접목된 빔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가상의 홍수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며 “제방 위를 따라 걷다가 방수로 flood channel에 다다르면 마치 심해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 것”이라고 이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바터리히트에 적용된 기술은 기본적으로 ‘스모그 프리파크Smog Free Park’ 프로젝트에 사용했던 방식과 동일한 것으로, 빛이 공기 중의 입자에 부딪혀 산란되는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조명과 날씨 그리고 시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광대한 대지 위에 펼쳐진 푸른빛은 다수의 LED 조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중첩시킨 강력한 세기의 빔이 산란된 것이다. 대상지 주변부를 따라 여러 개의 프로젝터를 놓아 기기마다 뿜어내는 빔이 공기 중에서 서로 교차하도록 했다. 프로젝터에 설치된 전동기는 주기적으로 빔의 방향을 변화시켜 이러한 효과가 더욱 배가되도록 했다. 조명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날씨와 시간이었는데, 땅과 수면의 온도 변화에 따라 수증기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간대에 맞춰 빛을 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광경을 볼수 있는 시간은 저녁 7시 반부터 열시까지, 단 두 시간반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 이전은 충분히 어둡지 않고, 그 이후에는 공기 중의 수증기 입자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회적 디자이너 로세가르데 바터리히트를 만든 로세가르데는 패션에서 건축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디자이너다. 그는 ‘일단 저지르고, 직감을 따를 것Just do it and follow your intuition’이라는 그의 신념처럼 자유분방하고 직관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다양한 기법과 소재를 적용한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그럼에도 바터리히트처럼 로세가르데의 작품을 설명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그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아무런 조명이 없는 도로를 달리는 야간 주행 차를 위한 녹색 빛의 ‘글로잉 라인스Glowing Lines’, 자동차의 움직임에 반응해 빛이 나는 조명을 설치한 ‘스마트 하이웨이Smart Highway’, 오래된 암스테르담 중앙역의 전면부를 무지갯빛 디스플레이로 새롭게 단장한 ‘레인보우 스테이션Rainbow Station’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세련된 빛의 예술을 선보이고 있다. 로세가르데는 자신의 작업을 ‘시적 테크놀로지technopoetry’라 부르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단순히 예쁜공간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최첨단 기술의 적용과 인식의 변화라는 두 가지 요소 사이를 오가는 작품을 선보이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가 ‘2015년 네덜란드 100대 친환경 리더’의 5위권에 오르고, 『포브스Forbes』가 발표한 ‘창조적 변화를 이끄는 100대인사’에 선정되기도 한 데에는 디자인을 통해 사회적 공헌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목표 의식이 있다. 그렇다면 이 푸른빛의 양탄자는 어떨까? 대지 예술, 그 이상의 메시지 이번 프로젝트에서 파트너십을 구성한 라인 강과 에이설 강을 관리하는 수자원협회의 헤인 피에페르Hein Pieper 회장은 작년 발간된 OECD 리포트를 언급하며, “네덜란드의 제방 설계와 시공 능력의 수준은 세계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그래서인지 네덜란드 해안가를 둘러싼 제방 너머의 물이 갖고 있는 파괴적인 힘을 인지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며 이번 프로젝트가 단순한 대지 예술로서 기획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바닷물을 막고 있는 제방에는 문제가 없다. 국민의 인식 부족이 이러한 홍수 예방 문제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며 사람들에게 네덜란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물에 잠긴 도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으며, 바터리히트는 5월 초 이 프로젝트의 국가적 파급력을 눈여겨 본 ING 그룹과 라인 박물관Rijnmuseum의 후원을 받아 암스테르담 박물관 광장Museumplein Amsterdam에 설치되기도 했다. 피에페르 회장은 “물의 예술(제방)에 대한 관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며 이번 프로젝트가 갖는 의의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사람들이 하루 동안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정보의 80%이상이 이미지 기반의 시각적인 효과에서 비롯된다고한다. 우주쇼에 등장한 여러 행성과의 눈 마주침이 천문학적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바터리히트는 수천만 원 규모의 광고나 인터넷 배너보다 이러한 직간접적 경험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 양다빈
  • [시네마 스케이프] 버드맨 기대되는 과정의 미덕
    서울역 고가 현상설계 프레젠테이션 당일 새벽, 최종 발표 자료와 함께 제출할 모델을 마무리 중이다. 한편에서는 모델 사진 촬영을 위해 조명 세팅이 한창이다. 새로 만들 건물과 기존 건물을 어떻게 구분하여 표현할지, 나무는 철사로 만들지 아니면 이쑤시개로 만들지 시험하고 있다. 메이플로 제작된 베이스는 무게도 엄청날 뿐더러 크기도 3m가 넘어서 어떻게 운반할지도 걱정거리였다. 24시간 영업하는 분식집에서 사온 떡볶이를 안주 삼아 맥주를 한 잔 걸치니 지난 몇 달간의 작업이 몇 시간 후면 끝난다는 설렘에 곧 다가올 긴장도 잠시 잊게 되었다. “설마 비 오는 건 아니겠지”라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한 것 같은데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왔다. 부랴부랴 덮개가 있는 용달차로 변경하고 계획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고정해서 이동시키기 힘든 고가와 건축물 모델을 미리 포장해서 시청에 먼저 도착했다. 심사장 주변에 화물용 엘리베이터로 올라올 모델 운반 동선을 파악하고 마무리 작업할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모델이 도착했고 막내 스태프는 칼과 본드가 든주사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찰나에 오래전 잠원동에서 족구하던 막내 시절이 생각났다. 담배 연기로 자욱한 사무실에서 밤새도록 연필 가루와 본드 냄새에 빠져 지내면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각혈하며 장렬하게 전사할 것 같아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동기들은 ‘조경’하고 있는데 나는 왜 여기서 칼과 본드를 들고 스티로폼을 자르고 창문틀이나 붙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로 징그럽게 오랜 시간동안 ‘조경’하며 살게 될지 그 짧았던 시절에는 몰랐다. 이제 심사장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여러명이 힘을 모아 육중한 모델을 옮긴다. 드디어 그동안 들인 노력에 대해 평가 받는 시간이 되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과정이 중요하다는 판에 박힌 표현이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 과연 적합할까? 누구나 인정받기 원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지 않은가.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한국조경사회, 다수공급자계약제도 세미나 상생의 길은 무엇일까
    지난 5월 14일 한국조경사회(회장 황용득)는 ‘조경시설물 디자인 침해 및 다수공급자계약 세미나’를 푸르지오밸리에서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는 ‘디자인권 보호와 침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만들고, ‘다수공급자계약제도’의 탄력적 운영에 관해 조경계 각 부문의 의견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조달청에서 실시하고 있는 ‘다수공급자계약제도’에 관해서는 설계·시공·자재 등 각 부문의 입장과 개별 기업의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건강한 조경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세 부문이 고르게 생존·성장해야하며, 이를 위해 공감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번 세미나 참여자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종합토론 시간 플로어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토론회로 끝내지 말고 향후 위원회를 구성해서 실행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도 개진되었다. 본지는 문제의식을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에서 다뤄진 ‘다수공급자계약제도’와관련된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MAS의 이해 발표 김성환 조달청 쇼핑몰기획과 사무관 다수공급자계약제도MAS란? 다수공급자계약제도Multiple Award Schedule(이하 MAS)란“공공기관의 다양한 수요 충족을 위해 품질ㆍ성능ㆍ효율 등이 같거나 유사한 물품을 2인 이상의 공급자와 계약하는 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해 공공기관을 위한 온라인 쇼핑몰이다. 수요기관은 민간 온라인 쇼핑몰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나라장터 쇼핑몰을 통해 직접 물품을 선택해 구매한다. 제도 시행 초기에는 TV, 냉장고, 컴퓨터 등 민간에서도 흔히 거래되는 상용 제품 위주로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는 데, 최근에는 조경시설물 등으로 그 대상 범위가 확대되는 추세다. 계약 대상의 기본 요건은 ‘상용화’ 및 ‘경쟁성’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품질 요건을 충족하는 물품이어야 한다. 일례로 조경시설물 중 퍼걸러는 계약 업체가 100여 개로 상당히 많은 업체의 제품이 등재되어 있다. 어떤 품목을 새롭게 MAS에 등재하려면 신규 계약 공고를 내는데, 연간 거래 실적이 3천만 원 이상인 기업이 3개사 이상이 있고, 공통 상용 규격 및 시험 기준이 존재하는 물품을 대상으로 한다. 상용 규격은 대개 단체표준을 따르는데, 만약 없다면 조달청에서 정한 규격이 있는 품목을 그 대상으로 한다. 표준 규격이 없는 경우는, 경쟁이 어렵기 때문에 수의계약과 비슷한 형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달청에서는 납품실적이나 경영 상태 등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는 자를 대상으로 가격 협상을 통해 연중 단가 계약을 체결한다. MAS의 특징은 공급자 중심의 단일 기업이 조달하는 방식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다수 업체에서 조달받는 방식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조달물자의 다양화로 수요기관의 선택권이 확대된다는 장점이 있다. 일정 금액미만의 경우 수요기관이 바로 납품을 요구하게 되지만, 일정 금액 이상이면 7개사가 경쟁해 평가한 뒤 납품을 요구하게 된다. 조달 업체에는 일정한 요건(신용평가등급 B- 이상, 납품실적 3건 이상)을 충족하는 경우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일정한 요건이란 가격, 품질, 기술인증 등 기본적인 수준의 조건이며, 그 수준을 완화하는 중이므로 좀더 많은 업체의 참여가 가능해질 것이다. 조달 업체에 진입한 후에도 계약 이행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가격인하, 할인행사, 2단계 경쟁 등)으로 경쟁이 실시된다. 조달청은 MAS를 확대하기 위해 작년 신규 물품을 크게 확대했으며, 앞으로 품목을 계속 늘려갈 예정이다. 2014년 기준 5,568개의 업체와 계약을 맺었는데, 이 가운데 중소기업이 98%를 차지한다. 2단계 경쟁 제도 MAS 2단계 경쟁은 중소기업의 물품의 경우 1억 원 이상은 의무적으로, 5천만 원 이상 1억 원 미만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대기업 물품의 경우 5천만 원 이상부터 의무적으로 적용된다). 수요기관이 5개 대상 업체를 선정하면 종합쇼핑몰시스템이 추가 2인을 제안요청 대상자로 자동선정하게 된다. 대상 업체의 제안서 평가 기준은 가격, 적기납품, 품질검사 등이다(종합평가 또는 표준평가를 활용). 조달 업체가 제안서를 제출할 때 제안가격은 제안요청 시점의 쇼핑몰 계약단가 이하로 가능하다. 단 중소기업간 경쟁물품은 계약가격의 90%까지만 허용하는 가격 하한선이 있다(즉, 현재 계약단가의 10% 초과 인하 불가). 제안서를 제출하지 않은 때는 쇼핑몰 계약가격을 제안한 것으로 간주된다. 조달청과 계약을 하는 순간, 납품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안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제안요청 대상자로 선정될 수 있다. 만약 납품업체로 선정되었는데 납품을 하지못하면 계약불이행이 되어 제약이 가해진다. 따라서 2년간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계약관리 측면에서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2015년 주요 제도 개선 내용 MAS와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적격성평가 신청 시 납품실적, 원산지 표시 등의 서류를 잘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종 단체 표준이 없는 경우 규격서가 세밀하게 작성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주의해야 한다. 2015년 제도를 개선하면서 그간 많은 민원이 제기되었던 납품실적 제출 요건이 완화되었다. 사회적 약자 기업에 대한 납품실적이 3건에서 2건으로 완화되었고, 재계약에 대한 납품실적 인정기간이 2년에서 3년으로 확대되었다. 더불어 공공기관 납품실적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MAS 업무처리규정을 개정하면서(2015년 3월 1일 시행) 계약가격 비교시스템을 구축해 우대가격(민간 거래 가격과 동일하거나 낮은 가격) 위반을 시스템으로 자동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거래정지나 환수를 진행하게 된다.
    • 김정은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파리, 혁명 전야
    #48 오 샹젤리제 - 앙투안 와토 바다 물거품에서 솟아오른 비너스가 육지에 첫 발을 디딘 곳은 펠로폰네소스의 키테라Cythera 섬이었다. 프랑스 로코코 화가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는 ‘키테라 섬으로 가는 길’ 혹은 ‘키테라 섬의 순례’ 등의 제목으로 비슷한 그림을 세 번 그렸다. 포구에 정박한 배와 배를 타고 순례를 떠나려는 듯 여행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남녀를 그린 것이다. 첫 번째 그림은 초기작이었던 까닭에 인물들의 동작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나중에 그린 원숙한 그림들이 훨씬 흥미롭겠지만 조경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이 첫 번째 그림에 관심이 간다. 그림의 배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구조물 때문이다. 이 구조물은 실존하는 것으로 파리 센 강변에 있는 생 클루Saint Cloud 정원의 캐스케이드 난간이다.1 문제는 그림의 해석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 인물들이 배를 타고 멀리 그리스의 키테라 섬으로 순례를 가려나 보다’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센 강을 건너서 맞은편의 생 클루 정원으로 가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비너스의 섬 키테라는 ‘사랑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파리 역시 사랑의 도시인데 파리를 키테라 섬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굳이 그리스까지 갈 필요가 있나. 강 건너 아름다운 생 클루 정원으로 가면 되는 것을. 그림 속 인물들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위 사랑의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곳이 목적지이니 여행자체가 사랑을 찾아가는 길에 대한 비유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현실도 아니고 상상의 세계도 아닌, 단순하게 연극 무대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키테라 섬의 순례’라는 연극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인물들의 화려한 여행 의상이 그런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무대 의상에 더 어울린다. 이렇게 모호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사회를 들뜨게 했던 연극과 연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17세기는 유럽 연극의 중심지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옮겨간 시대이기도 했다. 과시욕이 무척 강했던 무대 체질의 루이 14세에 의해 연극이 크게 번성 했다. 그는 대단한 연출가이기도 했다. 궁정 생활 자체가 연극이 되어 갔다. 아침에 기침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 대화 하나 하나가 각본에 의해 움직였다. 베르사유 궁과 정원은 궁정 생활이라는 연극을 종일 공연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앙투안 와토는 바로 이런 루이 14세 시대를 살았던 화가였다. 와토의 삶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작품처럼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국경 지방의 발랑시엔 출신이었다.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고 그 덕에 현실과 연극, 가면과 얼굴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음을 간파했다. 18세에 활동을 시작하여 만 35세에 결핵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불과 15년 남짓 작품 활동을 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냈다. 1717년, 와토는 파리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기 위해 그림을 한 점 제출했다. 그것이 ‘키테라 섬의 순례’ 시리즈 중 두 번째 그림이었다. 첫 번째 그림이 너무 연극 무대 같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왕립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형식에 맞추어 다시 그렸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은 이 출중한 그림을 어느 분과에 소속시켜야 할지 판단을 하지 못했다. 역사화도 아니고 전쟁화도 아니며 신화를 소재로 한 것도 아닌데 다가 초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풍경화로 분류하기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다. 논의 끝에 ‘품격 있는 야외 연회를 그린 그림fête galante’이라고 정의내렸고 이것이 새로운 장르로 확립되어 갔다. 이 그림을 연회 장면으로 해석한 것은 그림 속 등장인물 대부분이 제목과는 달리 배 타러 온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선착장에서 떨어져 남녀 한 쌍씩 짝을 지어 풀밭에 눕거나 앉아 있는데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포즈가 아니다. 오히려 야외에서 벌어지는 연회 장면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림 왼쪽에서 배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딘가 행선지를 향해 떠난다기보다는 물놀이를 하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돛대 주변을 분주히 날아다니는 큐피드와 어린 천사들, 그리고 오른쪽에 서 있는 비너스 동상은 굳이 사랑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곳이 바로 사랑의 섬인 것이다. 사랑의 연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앙투안 와토의 ‘품격 있는 야유회’ 작품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림이 또 한 점 있다. 1719년경에 그린 샹젤리제Champs-Élysé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샹젤리제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명품 상점이 즐비한 파리의 대로를 떠올리게되지만 실은 그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샹젤리제 정원을 말하는 것이다. 샹젤리제는 엘리시안의 들Elysian Field, 즉 그리스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극락이다. 그러니 샹젤리제 정원은 파리 사람들의 지상 낙원일 것이다. 이 샹젤리제 정원 역시 루이 14세의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1613~1700)가 1667년에 디자인한 것이다. 원래 농경지였던 곳인데 튈르리 정원의 축을 연장하여 넓은 가로수 길을 내고 길 양쪽에 숲을 만들었다. 가로수 길에는 느릅나무를 두 줄로 심고 길이 끝나는 곳을 원형 광장으로 마무리했다. 이 광장이 지금은 열두 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모이는 원형 교차로가 되었으며 가로수 길 역시 폭도 넓어지고 길이도 연장되어 지금의 샹젤리제 거리가 되었다. 샹젤리제의 숲은 바로크의 원칙에 따라 질서 정연한 격자형으로 조림되었고 숲 한가운데에 긴 육각형의 공터를 만들어이를 샹젤리제라 불렀다. 비록 격자형으로 나무를 심었다고는 하지만 나무 사이의 공간이 넉넉하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숲 속에 수많은 사각형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파리지엔들이 모여들어 품격 있게 야외 연회를 즐겼다. 앙투안 와토의 그림은 바로 이런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여인들의 비단옷, 등을 보이고 있는 신사의 한 쪽 어깨에 걸친망토와 실크 스타킹, 이들의 우아한 포즈와 토실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로 미루어 보아 상류층의 야유회임에 틀림이 없다. 높은 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여신상이 장면의 한가로움을 더욱 강조해 준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고 있는 양상을 보면 격자형의 질서가 많이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사실과 다르다. 앙투안 와토가 화가적 재량을 발휘하여 르 노트르의 디자인을 ‘수정’한 것이다. 그것이 우아한 야유회의 분위기에 더 적합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오십 여년 후, 이 그림을 보고 지금의 우리처럼 “어, 여기가 샹젤리제야”했던 인물이 있었다. 클로드앙리 와틀레Claude-Henri Watelet(1718~1786)라는 재력가 겸 미술 수집가였다. 그는 와토의 그림을 보며 이런 식으로 르 노트르의 질서를 약간 흩트리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 여겼다. 그의 책상 위에는 루소의 저서, 영국의 훼이틀리와 챔버스 등이 발간한 정원 책이 쌓여 있었다. 센 강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그는 수년 전부터 그곳에 정원을 조성하면서 계속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었다. 챔버스의 중국풍 영국 정원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중국식 목교도 만들어 세웠으며 훼이틀리가 제안한 방식대로 장식 농장을 만들기 위해 물레방아, 낙농장, 양봉장 등 농업과 관계된 스타파주를 넣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고자 하니, 바로크의 후예로서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데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 때 앙투안 와토의 그림이 해답을 주는 듯했다. 정형적 원칙을 그대로 둔 채 조금만 어지럽힌다면 적절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파리의 풍경화식 정원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사랑과 놀이와 아름다움을 담고자 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걷고 싶은 도시, 질주의 도시
    난폭 운전자가 본 보행 친화 도시 15년 전, 처음 자동차 주행 연습에 나선 날이었다. 차에 동승한 베테랑 강사는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내 안에 잠재된 난폭 운전자의 자질을 발견하고야 만다. 이와 함께 방어 운전이 중요하며 한국에서는 특히 오토바이를 조심하라는 진심 어린 조언도 해 주었다. 늘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서인지 아직 난폭 운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린 적은 없지만, 문득 ‘잠재적 난폭 운전자’의 눈으로 본 현대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특히 이들이 보기에 보행 친화적인 도시는 대단히 억압적이고 불편한 장소가 아닐까? 최근 조사에서 미국 도시 중 가장 좋은 보행 환경을 가진도시 3위로 선정된 보스턴이 적절한 예다.1 잠재적 난폭 운전자에게 보스턴은 아주 불편한 장소다(그림1). 우선 차선의 폭이 통상 10피트(약 3m)로 국내 3.2~3.5m 기준보다 좁고, 차선 우측에 있는 자전거 도로와 그 옆의 가로 주차 공간에 출입하는 자전거와 저속 주행 차량에 대해 늘 신경을 써야 한다. 더욱이 도심에서는 무단 횡단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좁은 폭의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고속 주행 자체가 어렵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격자형 가로망이 드물어 방향감각을 잃기 쉽고, 주차 요금이 비싸기도 하거니와 빈 공간의 주차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미숙한 운전자—여기서의 미숙함은 운전 경력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의 예외 없이 자가 운전자가 된 지 얼마지나지 않아 주차 위반 고지서나 견인 통지서를 받는다. 잠재적 난폭 운전자에게 보행 친화 도시는 곧 무덤이다. 도로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난폭 운전이 결코 바람직한 행태는 아니므로 보행 친화 도시에 대한 이와 같은 불편함은 응당 감수해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보행자, 혹은 최단 경로를 따라서 가로를 자유롭게 횡단하려는 사람jaywalker과 자동차 운전자, 특히 고속 주행을 즐기는 조이 라이더joyrider 사이에 종종 갈등 관계가 형성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폭 운전자에게 보행 친화 도시가 불편한 것처럼 보행자에게 자동차 중심 도시는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다양한 계획 기법을 통해 보행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차 의존도가 높은 근·현대 도시에 대한 비판은 이미 20세기 초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피터 노튼Peter D. Norton 교수에 따르면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미 1910~1920년대 이후 ‘돼지 같은 난폭 운전자road hog’나 ‘미친 속도광speed demon’ 같은 용어가 보행자 안전을 위협하는 운전자를 비난할 때 널리 쓰이게 되었다.2 같은 시기 보행 중 교통사고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는 대체로 보행권을 옹호하는 판결이 우세했으며, 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제한하고 운전자를 계몽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3 도로라는 공간을 합법적으로 활보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용자 간의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 시카고에서 옐로우 캡Yellow Cab Company이라는 택시 회사를 설립한 헝가리 태생의 사업가 존 헤르츠John Hertz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자동차의 시대motor age에 살고 있다. … 이에 따른 교육이 필요하며 자동차 시대에 맞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4 여기서 말하는 책임감에는 아마도 보행자의 안전이 중요한 것처럼 운전자가 신속하게 주행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역시 포함될 것이다. 헤르츠에 따르면 차량의 주행 공간인 차도에 예고 없이 보행자가 걸어 들어오는 것은 범죄 행위이므로 자동차에 대해 일방적으로 속도 제한을 요구하거나 교통사고 발생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에서 점차 확고해진 자동차의 우월적 지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지속되었다. 이를테면 1960년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자동차가 다른 저속 이동 수단 모두를 대체해야 한다는 잘못된 이념에 따라 많은 도로가 도시의 시공간을 집어 삼켜버렸다고 표현했다. 이와 함께 그는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그럴듯한 예시를 덧붙인다. “만약 도로에 차가 없다면 보스턴 역사 지구의 인구 모두가 걸어서 한 시간 이내에 보스턴 공원에 모일 수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이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 영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5 국내에서도 자동차 중심 도시에 대한 비판은 예외가 아니다. 강병기 전 도시연대 대표는 “(현대) 도시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아스팔트 정글로 바뀌었고, 자동차는 정글의 맹수처럼 엄청난 사람을 살상하고 있다. …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는 … (사람을) 소외시키며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6 가해자와 피해자 이처럼 가해자로서의 ‘자동차’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보행자’ 혹은 ‘도시민’을 대립 구도로 보며 보행 친화 도시로 의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은 오늘날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소위 “보행삼불步行三不의 도시”—보행이 불안(不安)하고, 불편(不便)하며, 불리(不利)하다—라고 일컬어지는 서울의 가로를 한번 관찰해 보자.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언제 길을 건너야 할지 노심초사 기다리는 노약자, 배달 음식을 싣고 횡단보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이를 보며 아이에게 선 주행 후 보행의 슬픈 현실을 알려주는 부모는 물론, 프루인John J. Fruin이 제시한7 보행자 인체 타원만큼의 공간은 고사하고 서로 몸을 완전히 밀착한 상태로 달리는 만원 버스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승객을 흔히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전문가의 품격
    13 The Buck Stops Here 클라이언트와의 만남 약속 시간보다 30분에서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있다. 차가 막혀서, 내비게이션이 거지 같아서, 길눈이 어두워서, 사무실에 있기 싫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긴 시간이었다, 을로 산 것이…’라는 생각이다. 클라이언트와의 교류 클라이언트(대형 건축설계회사, 회장님, 친구들)는 순수한 영업의 대상인가? 비즈니스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그림이 아닌 술과 골프로 일을 따내야 하나? 그 해답이 이젠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요즘은 고령화 현상으로 외로운 독거 노인이 많이 생기는 나이 60이 넘어서도 이들과 친구로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 적이 있었으니 친구 되기에 더 쉽지 않을까? 클라이언트의 두 타입: 정신적으로 독립심을 주는 부류와 업무적으로 독립심을 주는 부류 정신적 독립심을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한 그런 거 있잖아요” “뭐랄까…, 싸면서도 임팩트 있고 사람들의 눈을 확 사로잡는 그런 공간” “이 예산으로 10배 아니 100배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전문가 아닌가요” “이걸 내가 할 줄 알고 결정할 줄 알면 왜 전문가한테 맡깁니까” “뭐라고 말씀 드리긴 뭐한데, 그냥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오늘 회의 내용 반영해서 내일 다시 봅시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때려치우고 싶은가? 아니면 그냥 때리고 싶은가? 디자이너라면 흔들리면 안 된다.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선禪에 입문이라도 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힘은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지 아니한가. 재빨리 클라이언트로 ‘변신’해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클라이언트는 잘 모른다. 우리도 우리가 뭘 하는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잘 모르는데 클라이언트는 오죽하겠는가.헌데 놀라운 사실은 (솔직히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말이 하나도 안 통하는 외국인도 자기 욕하는 건 느낄 수 있듯이, 일을 잘 모르는 순수한 클라이언트도 우리가 대충하는거 다 안다는 거다.이런 클라이언트는 프로젝트 진행에 따라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마감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해지는 편이다. 자신이 초기에 잘 모르고 한 일에 대해어떤 보상을 하고자 하는 심리가 아닐까? 어쩌면 클라이언트도 디자이너의 관점을 점차 이해하게 되는 것일 수도…. 업무와 관련된 독립심을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 “내가 원하는 결과물의 이미지는 ‘이것’이고 ‘이런’ 분위기가 나왔으면 합니다.” “이 예산 안에서 당신이 만들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십시오.” “당신이 전문가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내가 결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계획은 명확해진다. 시작과 끝이 있으며, 소위 ‘수정’이 상대적으로 적다.단,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며 시간에 대해 엄격하다(클라이언트의 관대함은 프로젝트 초기에만 기대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 이렇게 아주 상반된 두 클라이언트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쉬운 선택은 클라이언트가 하고, 어려운 선택과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디자이너가 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선택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실현 가능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줘야 한다.왜? 책임은 디자이너가 모두 지게 되므로. 디자이너라면 언제나 다음의 문구를 염두에 둬야 한다. “THE BUCK STOPS HERE(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 쓰여 있는 말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이다).” 14 무너지는 경계 요즘 클라이언트는 도시·조경·건축·인테리어 등 유관 분야를 분야별로 접근한다거나 별도의접촉을 취하지 않는다. 일 자체의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면 무기(분야)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분야의 구분은 무의미함’을 전제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건축가에게 외부 공간을 의뢰하고, 조경가에게 건축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그러다 어떤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당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줘요”라는 주문을 듣게 된다. 여기서 능력은 ‘당신의 인맥을 총동원하고, 가능한 모든 역량으로 주변 분야를 섭렵하여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는 의미다.조경 설계 역시 업무 범위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업무 역량을 일반화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도 조경 분야와 밀접한 디자인 문제 해결 능력과 함께 인접 분야―도시, 건축, 토목, 인테리어, 친환경기술, 경관―와 코웍collaboration work하는 스킬은 반드시 요구된다.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해만든 프로젝트 그룹을 기반으로, 2005년도에 디자인로직을 설립했다.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 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 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LH 조경 부문 자문위원,인천시 도시디자인 자문위원, 코레일 조경 심의위원을 역임했고, 한국도로공사 사옥, 한남더힐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되었으며, 세종문화회관예술 정원, 호텔 롯데 제주, 용현 SK VIEW 등을 설계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캐서린 구스타프슨 구스타프슨 앤 포터(런던) / 구스타프슨 거스리 니콜(시애틀) 설립자 겸 소장
    오늘날의 조경은 캐서린 구스타프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30년이 넘는 실무 경력을 통해 그녀가 현대 도시의 공적 경관에 지난 세기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감수성의 지평을 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프랑스 쉘 본사Shell Petroleum Headquarters의 물결치듯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조형적 사면은 모든 조경가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점토 모델을 이용한 디자인 과정, 원예 전문가와의 협업, 3D 밀링머신 CNC, 바닥 분수, 스크림scrim 사용 등 조경 디자인에 있어서 방법론적 혁신을 주도했다. “하늘로 열린 모든 것은 조경가의 영역The sky is mine. For all landscape architects, anything under the open sky is a landscape architecture issue”이라는 그녀의 강렬한 매니페스토는 그녀야말로 세계 조경을 이끌어갈 실력과 담대함을 가진 리더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한다. 최근 대표작인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아트 뮤지엄 중정이 보여주는 섬세함과 고상함의 깊이는 놀랍다. 1,000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완전히 비워졌을 땐 ‘스크림’에 의해 더욱 풍부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스크림이란 마치 투명한 막과 같이 얕은 물을 포장면 위에 흘리는 기법이다. 2000년 뉴욕 자연사 박물관 정원에 처음 도입된 이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스미스소니언에서 네 곳에 배치된 0.25인치 깊이의 수막은 공간에 통일적인 느낌을 구축하는 한편, 행사가 있을 때에는 마른 포장면이 되어 복합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신발에 묻은 물이 갤러리 입구에 진입하기 전에 마르도록 거리까지 계산하는 철저함도 보였다. 건물의 역사와 기능을 깊이 연구하고 원예 전문가와 협업해 온실과 같은 공간임에도 난대성 식물이 아니라 워싱턴의 온대성 기후에 어울리는 식물로 공간을 구성해 중정의 성격을 지켜냈다. 아이코닉한 조경 공간을 조성하는 디자이너의 대표 주자로 알려졌으면서도 고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상지의 특수성과 개성에 부합하는 디자인을 주장하는 구스타프슨은 개념적인 면에서 조경 설계의 앞선 이론을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뉴욕 패션기술대학교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FIT)에서 패션을 전공하고 파리에서 활동했다. 프랑스에서 조경이라는 분야에 눈을 뜬 그녀는 베르사유에서 조경을 공부하고프랑스에서 17년간 설계가로 활동했다. 이후 영국 런던과 미국 시애틀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지금까지 실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영미권과 프랑스어권 문화와 역사에 두루 해박한 보기 드문 경력을 지녔다. 그녀에 의하면 디자인의 참신함과 신선함은 사회적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할 때 가능하다. 구스타프슨의 디자인에서 언제나 휴먼스케일과 강한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Q. 당신과 같이 섬세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워싱턴 주 야키마Yakima 출신이라는 점이 좀 의외였다. A. 내가 조경가로 전환하기 전 패션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매끄러운 곡선의 지형을 직물의 결에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패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 작업의 영감은 고향인 야키마의 풍경에서 온 것이다. 그곳의 언덕은 마치 물결치듯 흐르면서 매우 조형적인 형태를 띠는데 나에게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고원의 사막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오직 세이지브러쉬 뿐이며 얼마 되지 않는 빗물은 수로망을 통해 모여 관개에 이용된다. 야키마 밸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서, 이 지역은 물을 저장하고 집약적으로 활용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 나의 작업들이 물을 세심하게 통제하는 것은 야키마의 인공적인 수자원 활용에서 배운 것이며 땅을 하나의 형상form으로 이해하는 방식 또한 고향에서 자라며 습득한 것이다. Q. 당신의 작업에는 ‘기억’이라는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A. 약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기억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얻어왔다. 기억이란 대상지에 대한 역사를 주조해내며 사람들이 그 장소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당신의 부모님장미를 키우는 데 각별한 정이 있었다면, 당신은 장미 화단을 걷거나 장미의 냄새만 맡아도 과거에 일어났던 풍경과 사건들을 회상하게 되고, 그것들이 지금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식물이 그런 역할을 한다. 일례로, 미국 동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단풍나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 집 주위나 동네를 물들였던 붉고 노란 색의 변화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조건이 조성되면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 개인사에서 어떤 변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영국 런던의 한 정원 프로젝트에서 나는 소위 ‘기억의 식물’이라는 식재 계획을 세웠다. 영국의 평범한 농가에서 흔히볼 수 있는 초화류나 관목들로 구성한 것이다. 그때 이용한 식물은 블루벨bluebells, 수국, 동백 등이다. 할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Q. 패션에서 조경으로 전환한 계기는 무엇인가? A. 나는 베르사유의 프랑스 국립조경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u Paysage in Versailles를 다녔는 데, 그것은 순전히 학교가 루이 14세의 채소 정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르 노트르Le Nôtre의 걸작 한가운데 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나는 패션 디자인 일을 하면서 조경이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것이 나의 길임을 직감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재료와 디테일] 불의 아들, 화강석
    지구는 거대한 돌덩이다. 우리는 어디서든 돌을 볼 수 있다. 돌과 함께 한 인류의 역사는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석과 돌무덤 등 기념비적 이용부터 시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석조 건조물에 이르기까지 석재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판테온, 중세의 교회 건축 등 석조 건조물에는 그 시대와 민족의 생활 양식과 풍토가 표현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불교문화의 산물인 신라의 석굴암과 다보탑,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있다. 석재 기술은 기념비를 넘어서 일반 서민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맷돌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구에서부터 돌확, 석등 등 정원 점경물과 교량의 상판과 기둥, 화단의 마감벽 등 구조재를 포함해 그 종류가 다양하다. 서양 문화의 수입과 경제 발전을 겪으며 이러한 장식재로서의 쓰임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석재의 대부분을 이루는 화강석의 강도가 워낙 강해서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가공이 어렵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특유의 장중함과 미려함을 살릴 수 있는 가공 기술의 발달로 인해 석재의 이용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흔하게 볼 수 있던 돌이 고급 재료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면서 구조재 보다는 장식재로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돌은 그 생성 기원에 따라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조경용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석재는 화성암의 일종인 현무암과 화강암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화강석(화강암)이다. 현무암은 마그마가 땅 위로 분출되거나 지표 부근에서 빠르게 굳어서 생긴 암석인데 반해, 화강암은 땅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서서히 굳어져 생긴 암석으로 그 결정 입자가 현무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고 강도 역시 높다. 또한 문양으로 나타나는 결정 입자의 크기나 모양 또는 구성 물질이 다양하다는 측면도 화강석이 자재로서 갖는 장점이다. 이 화강석을 쓰임에 알맞게 쪼개어 가공하는 방법에는 돌눈에 따라 구멍을 일렬로 파고 쇄기를 박아서 쳐내는 방법과 기계톱으로 얇게 켜내는 방법이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결의 무늬는 시간을 거스르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돌 자체가 갖고 있는 생성과정의 유구함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석파정
    흥선대원군의 별서로 잘 알려져 있는 석파정石坡亭은 개인 소유의 서울시 유형문화재다. ‘석파정’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거대한 암반 비탈의 자연 경관을 적극적으로 감상 요소로 끌어들인 공간이다. 소재가 석파정이다보니 한국 전통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술로 흐르기 십상이지만, 그러한 관점은 다른 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니 자연과 인공 간의 균형감을 중심에 놓고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자연스러움’은 한국의 조경가에게 부여된 의무 같은 덕목이다. 자연 소재를 활용하는 설계 분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경관이라는 공공재를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억지스러움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간의 자연스러움을 어떤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을까? ‘자연은 직선을 싫어한다. Nature abhors a straight line’는 명제는 18세기의 한 영국인이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우리 설계 동네의 가이드라인처럼 통용되고 있다. 이 문구는 조금 더 확장되어 자연과 인공, 곡선과 직선의 이분법적 인식에 대한 토론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건 은연중에 곡선이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대변인의 지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직선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곡선이 자연과 밀접하다는 인식은 논리적으로 명쾌하지 않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