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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젠틀맨의 놀이터
    #39 ‘하하’의 존재 이유 스토우Stowe 정원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혀 가자 윌리엄 켄트William Kent는 라우샴Rousham 정원과 스타우어헤드Stourhead 정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모두 켄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원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식 정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조경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켄트의 세 대표작, 스토우 정원, 라우샴 정원, 스타우어헤드 정원을 접하게 된다. 당시에 이들 정원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산물로 이해되었다. 완전히 새롭고 모던한 것이었다. 당시 켄트의 정원을 접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의 정원을 따라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제 자신의 영지를 풍경화식으로 개조하는 젠틀맨1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1730년대 젠틀맨 클럽의 가장 큰 화제는 ‘정원 만들기’였다. 1739년에 발행된 『커먼 센스Common Sense』2라는 저널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요즘은 젠틀맨이 모이면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나는 요즘 시멘트와 흙을 가지고 노느라 여념이 없네’라고 자랑하기 일쑤다.” 이 무렵 풍경화식 정원은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골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유행이 되다 보니 본래 스토우 정원에서 추구했던 정치적, 사회적 이상을 담은 이념성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누가 정원 건축물을 더 근사하게, 더 많이 세우는가 경쟁이 벌어졌고, 그림처럼 픽처레스크하게 만드는 데 모두들 주력하는 듯싶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예를 들어 페트레 남작Lord Petre (1713~1743)처럼 식물 수집, 재배와 배치에 전념하는 경우도 있었고, 캐롤라인 왕비가 켄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던 ‘풀 뜯는 소와 밭 가는 농부의 평화로운 장면’을 그림에 포함시키고자 애쓰는 젠틀맨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를 두고 ‘장식 농장ornamental farm’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작게는 몇십만 평에서 크게는 몇백만평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직업을 갖지 않고 물려받은 재산만으로도 먹고 살만큼 당시의 젠틀맨이 돈과 시간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그 넓은 땅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미 기초적인 풍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원의 이상적 모델로 부상했던 ‘목가적 풍경’이 사실은 영국의 전원을이미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미 중세부터 주요한 양모 수출국이었으므로 드넓은 목초지가 있었고 사냥과 목재생산을 위한 깊은 숲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물이 있었고 강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으며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길렀다. 이러한 환경은 중세의 장원에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게다가 이 풍경의 소유주였던 지주 계급의 젠틀맨은 이미 근사한 저택과 비록 ‘구식’이나마 넓은 정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그에 잇대어 풍경화식으로 지을 것인가 등이 었다. 보통은 기존의 정형식 정원을 그대로 두고 토지를 더 할애하여 풍경화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았다. 본래의 경관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스타파주staffage를 배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연못을 파고 수목을 적절히 심어주면 원하던 풍경이 어느 정도 연출됐다. 본래는 정원과 그 외곽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구분하기 위하여 정원 주변에 담장을 두르곤 했으나 자연스러운 풍경을 추구하다 보니 담장이 눈에 거슬렸다. 정원과 외곽의 전원 풍경이 서로 단절되지 않도록 ‘하하ha-ha’라는 ‘선큰담장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하는 풍경화식 정원의 발명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의 데자이에 다르장빌Antoine-Joseph Dezallier d’rgenville (1680~1765)3이라는 바로크 정원가가 처음으로 선보였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1695년에 영국에서 일하던 어느 프랑스 정원가가 선큰 담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미뤄 보아 프랑스에서는 이미 선큰 담장이 꽤 실용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바로크 정원과 주변의 과수원, 농장을 구분하기 위해 적용했다. 데자이에 다르장빌은 1709년, 『정원 조성의 이론과 실제La Théorie et la Pratique du Jardinage』라는 방대한 내용의 책을 발표하고 선큰 담장의 원리를 설명했다.4 이 책은 1712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스티븐 스위처Stephen Switzer(1682~1745)라는 런던의 정원가가 그 책을 읽고 선큰 월의 아이디어가 썩 쓸모 있다고 여겼다. 당시엔 아직 ‘하하’라는 용어가 없었고 다만 ‘움푹 들어간 담장’으로 설명했다. 스위처는 1718년에 발표한 자신의 정원 서적에서 다르장빌을 인용하고 스케치까지 정성스럽게 그려서 삽입했다. 스위처는 젠틀맨 클럽에 끼지 못하는 정원가였다. 젠틀맨이 모두 두 팔 걷어붙이고 정원을 만들던 시대였으므로 스위처 같은 정원가들은 그늘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스위처 또한 위탁을 받아 조성한 여러 정원이 있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랜슬롯 브라운Lancelot Brown(1716~1783)이라는 젊은 조경가가 홀연히 나타나 스위처가 만든 작품들을 쓸어버리고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처가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히 글을 썼기 때문이다. 오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쓰고 발표한 정원 이론을 묶으니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서적(『Ichnographia Rustica』)이 되었다. 후세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위처의 업적이 과소평가되고 있으니 재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윌리엄 켄트의 전임자 찰스 브리지맨Charles Bridgeman(1690~1738)5이 스토우 정원에 처음으로 하하를 도입했고 초기에 그와 함께 일했던 윌리엄 켄트가 이를 정원 전체 경계로 확장했다. 이들의 작업을 옆에서 꾸준히 지켜보았던 호레이스 월폴 경Horace Walpole(1717~1797)6 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원의 경계를 허물고 그 자리에 도랑을 판 뒤 그 안에 담장을 세운다는 아이디어는 실로 기발했다. 별 생각 없이 산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움푹 들어간 담장을 만나면 ‘하! 하!’라고 감탄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7 감췄다고 해서 담장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담장이나 울타리는 본래 방목지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호하기위해 세웠다(이어지는 ‘인클로저-풍경의 사유화 과정’ 참조). 정원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원과 전원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축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로 정원을 둘렀다. 풍경화식 정원에서는 이를 도랑 속에 감추어 마치 정원과 전원이 하나의 풍경인 것처럼 눈가림했고 이렇게 탄생한 하하의 기막힌 눈속임은 지금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분노한 환경주의자들이 산업 재벌의 영지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하고 서민과 권력자 사이의 경계를 ‘민주적’으로 위장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도시 밖의 도시, 도시 안의 도시
    제기동, 구로4동, 황학동 제기동 약령시장, 남구로역 주변의 빌라 지구, 황학동 중앙시장과 같은 지역을 거닐다 보면, 언뜻 유사해 보이는 서울 내 저층 고밀지의 다채로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기동 청량리역에 인접한 약령시장과 청과물시장 일대는 1934년 6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서울 밖 교외 주거지로 낙점된 곳이다.1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양호한 주거지 조성을 위한 기반 시설이 들어서지만, 온전한 주거지로 자리를 잡기보다는 1960년대 전후부터 전국의 약재상과 청과물 도소매 상인의 주요 활동 무대로 널리 이용된다(그림1). 황학동에는 한국전쟁 이후 벼룩시장이 개설되었고, 이는 점차 주방 기구부터 각종 식자재와 양곱창을 판매하는 초대형 재래시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는 물품 판매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식당을 개점하려는 자영업자들에게간판과 메뉴, 식자재와 주방 용품을 포함한 원스톱 창업 컨설팅도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청계천 변 주상 복합 개발, 그리고 동대문 패션 상가의 변용과 함께 황학동은 도심 속 변두리 공간으로 서서히 쇠퇴하고 있다(그림2). 구로동은 개발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 서울시 정책에 따라 영등포 부도심권의 커뮤니티 센터—이를테면 불광동이나 수유동과 유사한 기능—로 지정되었다.2 비교적 영세한 주택지가 우선 개발된 후, 1990년대 다세대 주택과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서울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남게 된다.3 그럼에도 토지구획정리가 일괄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격자형과 자연 발생형 가로가 혼재되어 있고, 과소 필지와 부정형 필지가 다수 남아 있다. 여기까지는 세 지역이 어떻게 서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신시가지로 조성된 서울의 구시가지 세 지역은 이러한 차이점과 함께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진다. 모두 20세기 중반 사대문 밖 ‘신시가지’로 개발된 21세기 서울의 저층 ‘구시가지’라는 점이다. 이들 대상지는 1920~1940년대까지 논밭이었거나 혹은 일부 가옥이 점유하고 있는 미개발지였다. 도심부 인근이라 고용 중심지로부터의 접근성이 좋았고, 넓고 평평한 배후지를 갖고 있어 해방 전후 신시가지 개발을 위한 적지로 여겨졌다. 1940~1960년대 이후 주요 시가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현재 다수의 노후화된 주택과 퇴색한 상업 판매 시설이 뒤섞여 있고, 이 지역 안팎으로는 각종 뉴타운과 지식 산업 단지가 개발 중이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러한 서울의 구시가지는 기성 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낀 세대’다. 수백 년에 걸쳐 역사 문화 자원을 축적한 구도심이나 현대적인 감각으로 단장한 신시가지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어정쩡한 주변인이다. 늘 전환기의 위기에 내몰리면서도 구도심과 신시가지가 누리고 있는 각종 혜택으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오래 거주한 사람과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뒤섞여 있어 상인들의 결속력도, 거주지의 사회적 자본도 취약한 편이다. 생활 환경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낮지는 않지만 대체로 쇠퇴가 진행 중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던 판매 시설 임차인들마저도 상권 쇠락에 따른 무력감을 호소한다(그림3). 그럼에도 전면 철거 후 재개발의 대상이 될 만큼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지는 않다. 토지 소유 구조도 매우 복잡하고, 더욱이 최근 왕십리 뉴타운과 같은 21세기형 재개발로부터 20세기의 저층 시가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신시가지의 구시가지화 이렇게 오늘날 서울의 구시가지는 대체로 전환기의 주변인으로서 정체와 쇠퇴,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 대한 향수와 복고가 공존하는 장소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개발이냐 보존이냐’는 식의 이분법적 처방전이 요구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과거의 신시가지가 오늘날의 구시가지가 되면서 때로는 낙후되고 때로는 새로운 수요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도시다운 특질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도시 공간의 낡음과 닳음, 개별 건축물에 대한 다시쓰기와 고쳐쓰기, 그리고 새로운 용도를 담기 위한 점진적 재개발을 통해 소박하지만 자연스러운 멋과 일상의 격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성숙미를 더해가고 있는 지역의 사례는 국내외 여러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맨해튼 동쪽에 있는 브루클린이 그러한 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브루클린 브랜드Brooklyn brand’나 ‘브루클린 라이프 스타일Brooklyn lifestyle’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4 런던에 위치한 복합 문화 클럽인 ‘브루클린 볼Brooklyn Bowl’, 스톡홀름에서 맛볼 수 있는 ‘브루클린 맥주’, 독일과 스위스 등에서 널리 판매되고 있는 ‘브루클린 스펙터클즈Brooklyn Spectacles’ 안경은 브루클린 브랜드가 해외 수출에 성공한 사례다. 더 이상 값비싼 맨해튼에 대한 저렴한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나 젊은 창업가, 스타일리스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지면서 브루클린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처음부터 이러한 지역성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브루클린은 1810년대 맨해튼에서 증기선이 왕래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개발된 신시가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뉴욕 외곽에 만들어진 신규 교외 주거지이자 지금의 구시가지인 셈이다.5 1920년대 자동차의 대중화와 함께 폭발적인 도시화를 겪었지만, 20세기 후반 지역의 쇠퇴와 함께 각종 폭동과 사회 문제의 진원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시가지가 구시가지로 변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지역성이 오래된 지역성을 대체하고, 부분적인 증축과 재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아가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적 구성원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때 비로소 모방하기 어려운 도시의 품격이 발현된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새로운 현실 SBS 프리즘 타워 조경에 대한 몇 가지 소고
    아카데미의 지원 김정윤(이하 김): 양화한강공원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글림처 특훈 교수Glimcher Distinguished Professor로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었죠? 박윤진(이하 박): 포트폴리오를 제출한 후 파이널 리스트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초청받고 보니 우리 같이 젊은, 그것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 전 초청자들은 피터 워커Peter Walker, 켄 스미스Ken Smith,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 등 미국에 주요한 업적을 남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들이었습니다. 김: 심지어 우리 다음해에는 아드리안Adriaan Geuze이 초청되었죠? 박: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아드리안의 후학인데, 후학이 선학보다 먼저 초청받은 경우네요. 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오하이오 대학교의 결정에는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스토스Stoss의 크리스 리드Chris Reed도 우리의 경우와 비슷한 의도에서 선정되었다고 했지요.아무튼, 친환경 재생 에너지에 관한 스튜디오를 진행했고, 우리의 강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요. 대강당이 거의 꽉 찼고, 반응도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양화 프로젝트에 관한 질문이 많았고, 당시 건축학과장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나무를 뽑는 아주 나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What a bad landscape architect!라고 말입니다. (하하) 박: 힘든 프로젝트를 마치고, 그것의 과정과 결과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 주었고, 이분야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김: 또한 어너레리움honorarium(상금)도 그 당시 우리 사무실 수익보다 좋았지요? 박: 그렇습니다. 다음해인 2012년에는 호주 멜버른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전시와 특강, 워크숍을 진행했죠.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윌리엄 림William Lim과 출판한 『강남 대체 자연Gangnam Alternative Nature』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서울의 정체성을 한옥이나 과거의 패브릭이 남아있는 강북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일반적인 연구 동향이었던 반면, 우리는 그것을 강남에서 찾은 것이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2012~2013년에 유행했으니까, 그 전에 강남을 세계에 알린 셈이네요. 물론,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사실 저와 김대표 모두 어린 시절을 강남에서 보냈으니,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멜버른대학교로부터 가족 동반 비즈니스석 티켓, 최고의 숙소와 시급 그리고 귀빈 만찬까지, 싸이 급에는 못 미쳤겠지만, 디자이너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김: 멜버른 대학교의 젊은 교수들이 학장의 요구에 따라 전도유망한 아키텍트를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포착되었다고 했지요? 일면식도 없던 초청 담당 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왕슈王澍(당시에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중국의 건축가)도 몇 년 전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초청했다며, “너희들도 프리츠커상을 받을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었지요. 박: 그리고 당시 강연도 매우 성공적이었죠? 청중은 400명 이상 왔었고, 청중과의 호흡도 매우 좋았습니다. 호주의 한 설계사무소 대표가 “우리 사무실은 규모가 작아 양화한강공원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설계사무소는 우리의 3배 규모였습니다. 무척 놀라더군요. (하하) 그리고 당시강연에서 만났던 건축과의 한국 학생들도 우리를 매우 자랑스러워했어요. 김; 네. 바쁜 일정으로 인해 밥 한 끼 사주지도 못했네요. 아무튼, 이 시점에 우리가 수행했던 프로젝트가 상암동에 위치한 SBS 프리즘 타워입니다. 미디어를 다루는 방송국의 속성상 브랜드와 아이덴티티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미디어 아트와 인테리어 그리고 외부 공간을 다루는 협업 팀 세 곳을 초청하여 지명설계공모를 진행했고, 결국 우리가 당선되었지요. 수퍼 클라이언트 박: 클라이언트의 의도가 흥미로웠어요. 상암동 미디어시티에 위치한 주변 다른 방송국 건물과 비교해 볼 때 건물의 형태, 기능 그리고 외장 등은 최대한 단순하게 설계하되, 외부 공간과 인테리어를 통해 방송국의 아이덴티티를 찾고자 했으니까요. 조경 면적이 200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말 작은 공간이기 때문에 보통 관행적으로 하자면 설비나 토목에 끼워 넣어서 그저 나무 몇 그루 심고 마무리했을 만한 땅이잖아요. 우리에겐 이런 작은 공간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어 보고자 생각했던 클라이언트―수퍼 클라이언트(Super Client)―를 만난것 자체가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김: 특히, 우리의 아이디어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박:설계공모 때 우리가 만들었던 초기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죠? 김: 우리는 디자인 초기에 먼저 SBS의 목동 본사 건물과 그 주변을 리서치했어요. 민간 기업의 소유이지만 공공재라 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들어내는 건물의 랜드스케이프는 방문자에게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목동 본사는 방송국의 로고만 있었을 뿐 공간적으로는 SBS만의 아이덴티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프레젠테이션 제목도 ‘조경을 통한 SBS이미지 메이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방송국을 어떻게 하면 공간을 통해 기억하도록 할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어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인 로비 바깥쪽 3m 폭의 길쭉한 땅을 ‘포디엄podium’이라 이름 붙이고 인접한 1층 로비와 연결되어 읽히도록 했죠. 그리고 정문과 후문부에 각각 특징적인 수경과 수직적 조경을 제안하여 미디어 아트와 반응하도록했고요. 박윤진은 하버드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대학교(2008,2010), 오하이오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대학교(2012) 등에서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와 하버드 GSD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지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놀튼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수여해 온 글림처 특훈 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 박윤진·김정윤 / 오피스박김 대표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파올로 뷔르기
    이탈리아와 맞닿은 스위스 남단의 작은 도시 카모리노Camorino에는 커다란 유리 온실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뷔르기 스튜디오가 있다. 넓은 잎을 드리운 열대 식물 사이로 띄엄띄엄 놓인 큰 테이블, 햇빛이 살랑거리는 나무 그늘 아래 회의를 여는 모습이 이채롭다. 부인이 운영하는 시공 회사도 함께 입주했다. 디자인-빌드형태로 작업해 온 탓인지, 파올로 뷔르기 프로젝트의 눈에 띄는 특징은 우선 단단한 완성도다. 간략하게 정제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풍부한 미니멀리즘’으로 요약될 수 있는 모더니즘적 장인정신 덕분일 것이다. 나아가 파올로 뷔르기의 작업이 평범한 미니멀리즘에 비해 탁월한 이유는 각각의 프로젝트에서 강한 지역성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과 지역성이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만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억지스럽지 않은 무위無爲의 디자인’, ‘대상지의 핵심적 가치에 집중한 깊이’,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그 너머의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 미스터리한 공간’.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체험할 수 있는 짧은 감상평이다. 험준하고 압도적인 스위스의 경관 덕분일까? 주위 환경에 딱 들어맞게 설계한 그의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대상지에 대한 깊은 존중은 종교적인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이 색채를 통해 빛을 매만졌다면, 뷔르기는 소재의 물성을 통해 빛을 조율하고 주변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카르다다Cardada 산 정상의 전망대에서 석양을 반사하는 티타늄 난간과 한 스위스 디자이너의 개인 정원에 놓인 잎갈나무 목재 벤치의 간소함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경솔함이나 과도함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깨어있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뷔르기는 “처음 스케치를 시작할 때 프로젝트의 방향이나 클라이언트의 요구, 형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대상지가 내 소유의 땅인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드로잉을 묵혀가며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나간다고 밝히고 있다.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그의 공간에서 각각의 요소는 하나같이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마치 자연의 그것처럼, 뷔르기의 대지는 극도로 경제적이며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는 ‘지평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국 동양 조경의 ‘차경借景’을 말한다. 독립된 각각의 장소보다 그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중성적인 경관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조경’과 무언의 경관을 대화하는 공간으로 전이하는 ‘과정’이 바로 뷔르기 디자인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요체는 경관의 변화, 즉 흐름을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투시도라는 수단에 익숙해진 우리는 기본적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한 정적인 사고에 머물기 쉽다. 뷔르기가 강조하는 ‘움직임movement’의 디자인은 그러한 매몰된 시각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다. 그의 공간에는 항상 시퀀스가 있다. 연결과 단절, 그리고 통과되는 공간. 벽, 혹은 이어짐. 짧은 멈춤과 이동. 그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공간을 재발견한다. 한편, 외부에 노출된 조경 공간이 건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일 것이다. 조경가가 다루는 대상이란 대개 세월에 의해 빠르게 침식되고 어느샌가 그것을 담고 있는 거대한 경관에 흡수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경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낡음’과 ‘쇠락’에 대해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조경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제대로 나이 들어갈 수 있느냐,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달려있을 것이다. 억지로 현재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야말로 가짜의 선명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바래버릴 반짝이는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는 어렵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야 진짜가 될 수 있다. 뷔르기의 작품들은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체험해야만 살아 움직이는 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교훈을 웅변하고 있다. 뷔르기는 스스로 움직이는 시간과 쇠락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디자인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놓은 하나의 돌이 원하는 모양이 되는 데 오십 년 정도는 걸리기 때문입니다.” Q. 루이스 바라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A. 멕시코의 건축가 바라간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소수의 작품이 역설하는 바가 무척 깊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극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시적이고 강하다. 나는 수십 년 전, 멕시코시티에서 그와 조우할 기회가 있었다. Q. 그의 작품 중 당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은? A. 멕시코시티의 개인 주택이자, 목장인 쿠아드라 산 크리스토발Cuadra San Cristóbal과 엘 페드레갈El Pedregal Gardens을 들 수 있겠다. 그 곳은 이제 사라져 버려 불과 몇 장의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정원은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당시 그곳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요즘에는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개인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 그의 집과 사무실, 작업실 등에서 받은 감동이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루이스 바라간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길라르디 하우스Gilardi House 또한 인상 깊게 남아 있다. Q. 나는 당신 작품의 특징을 ‘간소한 풍부함richness in simplicity’으로 요약했다. 바라간과도 닿아 있지만, 스위스의 자연 환경 때문인지 왠지 도가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A. 도가적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Q. 『장자』에서는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신의 작품은 그야말로 미니멀하지만, 동시에 풍부한 감정과 짙은 감수성이 느껴진다. 다시 말해, 작품에서 많은 것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많은 요소가 설계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수단으로 상당히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대상지에 꼭 맞는 듯한 당신의 작업에서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A. 사실 당신이 파악한 것이 나의 철학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건 다양한 분야에 대한 나의 호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몬드리안 등의 예술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예술가는 대개 처음엔 대상에 대해 낭만주의적이지만, 점차 그것들을 압축해간다.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주제로 한 연작을 20년 넘게 꾸준히 발표했다. 극도로 정제되고 간략화된 아티스트로서의 태도가 내가 조경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작은 정원이든, 큰 프로젝트이든 나는 항상 그러한 경계를 탐색하고 그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찾아 헤맨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재료와 디테일]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
    조경사에서 접하는 이집트 정원의 장방형 연못, 이탈리아 빌라 정원의 노단식 분천, 프랑스의 기하학적 수로 등 인류 문명과 함께 한 수많은 물의 모습은 애초부터 ‘보이는 물’1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이 만든 ‘보이지 않는 물’2일까? 경관용 꽃과 나무를 가꾸고 물고기를 기를 수 있도록 조성한 인공적 수경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자연적으로 공급하고 흘려보내기 위한 기능적 수로일 뿐인가? 아마도 이 두 가지는 굳이 분리할 필요가 없는 합목적의 결과물일 것이다. 스테이트타워 남산, 서울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는 이오피스 빌딩의 외부 공간에서 ‘보이는 물’과 ‘보이지 않는 물’을 살펴보자. 공개 공지인 이곳은 정방형 매스와 유리 파사드의 단순한 건축과 그에 걸맞은 단정한 외부 공간으로 예사롭지 않은 수 공간 디테일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물이 기능에 따라 하나는 잘 보이는 곳에, 다른 하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곳에서 공존한다. 습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은 뚜껑을 덮어 가리고 ‘보이는 물’은 치장하기 바쁜데 둘 다 여름 한 철 바삐 기능할 뿐 겨울만 되면 하릴없이 건조할 따름이다. 이 두가지 물은 분리할 이유가 별로 없다. 화강석 뚜껑(땅에 파묻힌 U형 측구의 덮개)을 열어 버리고, 거울못의 모서리(수조 마감부)를 잘라 측구 수로관 쪽으로 길만 터주면, ‘보이지 않는 물’과 ‘보이는 물’이 동시에 기능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그림1).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합천영상테마파크
    이번 달의 대상지는 합천영상테마파크다. 천만 흥행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할 목적으로 조성된 곳으로, 이후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 쓰이고 있다. ‘공간 공감’은 주로 외부공간을 설계적 언어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질적 관점보다는 독특한 공간 성격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았다. 영화 세트장은 기본적으로 내부 지향적이다. 이 공간안에 들어서면 바깥 세상을 잊고 오로지 기획자가 준비한 주제에만 몰입하게 된다. 차경에 익숙한 조경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외부 경관의 간섭을 찾아볼 수 없는 위요된 공간 속의 도시는 확연히 무대로서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문객들은 이 페이크fake의 경관과 디테일에 몰입할수록 공간에 빠져드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오래된 건축물의 파사드, 간판, 전봇대, 벽보, 낡은 가로등에 이르기까지 특정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신경 쓴 요소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페이크의 소품은 영상물의 시대 고증과 무대 미술 수준을 드러내며, 동시에 방문객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장치가 된다. 국립민속박물관 내의 추억의 거리와 유사한 전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몰입과 페이크의 경관 외에도 이곳은 시간과 생활의 축적에 의한 장소성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연출된 1960~70년대 풍경이 향수를 자극하지만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공허한 느낌마저 전해진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배경이지만 실제 풍경에선 그러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확실히 2D를 위한 공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특정 드라마나 영화에 의해 부여되었던 장소성이 약화된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장소성은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서 충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속 촬영 장소로 활용되면 장소의 생명력이 유지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폐허가 되기 십상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Popular Vote: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Landscape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Landscape Design Competition
    장식 패턴을 매개로 한 통일감 있는 공간 구성 1920년대에 자일스 길버트 스코트 경Sir Giles Gilbert Scott은 군 병원과 크리켓 필드로 사용되고 있던 대지에 캠브리지의 새로운 캠퍼스를 계획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서관이 자리 잡았다. 동쪽의 캠 강River Cam을 향한 직선의 축은 클레어 칼리지Clare College를 관통해 도서관 정문의 드높여진 기단에 닿는다. 한 세기 동안 캠브리지 대학교의 확장이 계속되면서, 이제 캠퍼스는 도서관을 넘어 서쪽으로 넓게 펼쳐진다. 때문에, 원래 캠퍼스의 중심부로부터 클레어 칼리지를 거쳐 진입하도록 계획되었던 극적인 경험은 퇴색되어 버렸다. 도서관 주위로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된 주차장들로 인해 이웃 건물들과 함께 형성하던 균형감과 리듬이 깨지고 소외된 면이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차와 자전거들을 피해, 상당한 면적의 아스팔트 위를 걸어야 한다.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동선은 더욱 심하게 꼬여 있다. 지식의 성전을 나서자마자 차량으로 번잡한 외부 공간은 이용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도서관의 출입문을 경계로 안과 밖 사이의 상황은 급작스런 변화를 보인다. 내부는 캠브리지의 특권 의식을 드러내는 디자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각종 패턴과 장식들은 도서관에대한 강렬한 인상을 줌으로써 이용자의 경험을 풍부하게 한다.우리는 현재 출입구에서 멈추어 있는 도서관 영역의 경계를 외부공간 landscape으로 이전했다. 정문의 살에 조각된 패턴을 모티브로 삼아 표면을 구성함으로써, 내부와 외부의 연결을 꾀하였다. 패턴은 경사로, 계단, 조형 요소folly, 앉음벽 등으로 분화된다. 만나고, 연구하고, 잠깐 멈춰 쉬는 장소로서, 접근성 또한 향상되었다. 식물들은 패턴 위로 자연스럽게 웃자라며, 위요감과 야생의 맛을 느끼게 한다. 추가되는 소형 건물pavilion은 외부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시 행사를 위해 사용된다. 이것은 도서관이 대중을 대면하는 장public face을 확장시키고, 방문자와 상시이용자들 모두가 부담 없이 들러 차를 마시고, 아름다운 캠퍼스의 풍경을 즐기는 곳이다. 이곳의 길들여진 자연은 도서관 이용의 경험에 생동감을 주며, 도서관과 캠퍼스 사이의 새로운 경계가 되며, 또한 도서관의 기능이 외부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데릭 드레이퍼(Derek Draper)+막스 프레이저(Max Fraser) / Atomik Architecture
  • Joint 1st Prize: The-Cave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Landscape Design Competition
    (Archi) Tectonic Landscape 텍토닉적 사건, 지질학적 규모의 변화로서 뜻밖의 틈unexpected crack은 문화와 자연을 잇는 심미적이고 숨겨진 비움의 공간이다. 이 틈이 변방frontier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 즉 기회로 인식되어야 한다. 지식을 대변하는 장소로서의 도서관은, 문명 그 자체와 동의어다. 반면, 숲이란 진정한 자연의 이미지로서, 지식과 대비되는 경험이 일어나는 곳이다. 케이브The-Cave는 그 간극에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지식과 경험의 매개 공간이다. 케이브는 지식과 경험 간의 사이 공간이다. 케이브는 지식이 경험되는 곳이다. 케이브는 사람들이 강의와 컨퍼런스, 회의, 이벤트, 전시, 콘서트, 워크숍 등을 공유하는 곳이다.케이브의 입구는 다섯 군데의 접근 통로access chimneys로 구성된다. 무장애 원칙에 의해 조성되는 이 통로들은 진출입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화재 등의 비상 시 대피로로도 사용된다. 케이브를 통한 이용자들의 이동은 덕트와 케이블 상부로 설치된 독립적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 지하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은 지오텍스타일 패브릭과 골재, 배수관으로 이루어진 외부배수 체계로 구성된다. 지상보다 높여진 구조물은 강철과 유리 소재다. 덧붙임 건축의 이름으로 정의되는 공간을 정의하는 것은 사람의 활동이다. 동시에, 자연nature이란 오직 인간이 그것을 심미적 대상으로 관조할 때만이 경관landscape이 된다. 동굴이란 사람들의 활동에 의해 건축이 된다. 동굴은 심미적 공간으로 인식될 때 경관이 된다. 동굴은최초의 문화적 건축이며, 인간의 경관이다.
    • 파블로 페르난데스(Pablo Fernández), 아누스카 드 라 엔시나(Anuska G. de la Encina) / G226-Arquitectura
  • Joint 1st Prize: Farm Walk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Landscape Design Competition
    캠퍼스 농장 고전과 모던이 기묘하게 합쳐진 캠브리지 도서관 건물은, 건장하면서도 날카롭고, 권위적이면서도 둔탁하지 않으며, 금욕적이면서도 풍성하고, 냉엄하면서도 껍데기를 벗어 던져 버린 듯한 멋진 작품이다. 하지만 친근하기보다는 사뭇 압도적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중세의 수도원을 연상시키듯 엄숙하고, 지나치게 형식미에 치우친 정적인 외부 공간은 한 세기가 지난 요즘의 분위기와 쓰임에 맞지 않다. 곳곳에 배어있는 불필요하게 엄격한 엘리트주의, 과도한 포장 면적, 부담 없이 앉아 쉴 수 있는 공간 및 야외 회합 장소 부족 등의 문제들을 관찰할 수 있다. 팜워크는 이에 대해 캠퍼스 농장이라는 극단적인 프로그램적 처방을 투여함으로써, 도서관이 비단 연구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학 안팎 다양한 층의 시민들을 위한 공적인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몇몇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단일 경작물로 전체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기념성을 확보하려는 의도, 그로 인해 또다시 제도적인 유지관리의 틀이 필요해지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타자화된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농업 경관이 아닌, 프로그램적 수단으로서의 작물 정원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도서관의 각 부분과 실에 대응하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 다원성을 기본으로 커뮤니티가 자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평범하고, 부담 없고, ‘쉬운’ 외부 공간을 제시했다. 지역 사회를 위한 도서관 음식이란,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매개체다. 상아탑의 딱딱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데 있어, 음식을 함께 키우고 나누는 것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어 보인다. 작물을 돌보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매번 새롭고, 동적이며, 변화하는 장소.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길 수 있으면서도, 시각과 촉감으로 영감을 주고, 생명력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 도서관과 대학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에 봉사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캠브리지 도서관이 팜워크가 꿈꾸는 장소다.
    • 최이규 / Group Han Associates, New York Office
  • Joint 1st Prize: Around The Library Cambridge University Library Landscape Design Competition
    접근 높은 삶의 질과 자연적 면모, 유서 깊은 기념비적 건축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캠브리지의 핵심적 전통이다. 자일스 길버트 스코트 경Sir Giles Gilbert Scott이 디자인 한 건축물이 캠브리지 라는 도시적 스케일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금욕적이고 압도적인 존재감은 이용자가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절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서관 주위로 새로운 전이 공간threshold을 만들고,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러한 중간적 공간은 대상지의 출입로를 재정의하게 될 것이다. 외부 공간에 대한 개입은 건물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이용 방식을 둘러싼 가능성들은, 도서관을 둘러싼 문화적·사회적 활동들을 촉진시키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두 개의 이질적인 도시적 맥락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캠브리지 캠퍼스의 남쪽은 사뭇 흩어진 독립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동쪽은 캠브리지 도심과 연결되는 부분으로서, 밀도가 높고, 중정이나 중앙 광장을 가운데 둔내향적인 대학 건물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시 형태urban morphology를 현대적인 언어로 새롭게 쓰려 한다. 1950년대 카슨Casson과 콘더Conder의 시즈윅Sidgwick 캠퍼스 계획과 동일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 블란딘 투제리스(Blandine Touzeris), 시몬 루빈(Simon Rubin / Simon Rubin & Blandine Touze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