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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풍경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10주기 회고전
    물 위를 뛰어 건너는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한 남자를 포착한 사진(‘생 라자르 역 뒤에서’, 파리, 프랑스, 1932)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결정적 순간’의 미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풍경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작가만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는 개념으로, 미국과 프랑스에서 출판된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집 제목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사진 한 컷에 담겨지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구성하는 사물들이 정돈되고 조직화되어 미학적으로 특정한 의미를 띠는 어떤 ‘절정Clement Cheronx’의 순간을 의미한다. 스토리가 풍부한 이 사진은, 이번 전시를 구분하는 세개의 큰 구성 중에서 ‘거장의 탄생-그의 초기작부터 1947년 MOMA까지’에 속하는 카르티에-브레송의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카메라를 처음 움켜쥐었을 때부터 이러한 장면을 포착했다는 것은 천재적인 능력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느 특정한 순간에 우연히 이런 피사체를 발견하고 포착했다고만 생각하면 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저널리즘 교수인 클로드 쿡먼Claude Cookman은 카르티에-브레송이 “사전에 연구하고 계획을 세워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그토록 철저한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을 ‘행운’과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작가가 되기 전의 행보 또한 그의 이런 능력이 단순한 천재성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한다. 카르티에-브레송은 화가가 되기 위해 1926년부터 2년간 미술아카데미에서 입체파 예술가 앙드레 로트Andre Lhote로부터 기하학과 황금분할, 신성한 비율, 구도의 법칙 등을 배우며 예술적 재능을 발전시켰다. 전시 감독 김이삭은 그가 이 2년의 시간 동안 “미술을 통해 구도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창조적 성취를 이루는 데 필수 불가결한 ‘자기 통제’와 프레임의 ‘내적 침묵’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또한 회화를 할 때부터 교류했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살바도르 달리Salvadore Dali,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공방의 화폭에서 거리와 세계의 풍경으로 그의 시야를 넓히게 된 결정적인계기가 된다. ‘풍경landscape’은 사전적으로는 ‘눈으로 보았을 때 한 번의 조망으로 포착되는 사물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번 전시의 메인 테마인 ‘영원한 풍경’을 접하게 되면, 그의 작품은 이러한 단어의 나열이 한정할 수 없고 수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의 조망이고, 분명 한 장의 정지된 사진이지만 생동하는 영원성과 살아 숨 쉬는 영혼을 갖고 있기에 오직 이미지로서의 커뮤니케이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1968년 사회변혁운동으로 프랑스가 급진적인 변화를 겪는 동안 이와 관련된 사건의 현장을 찍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시기에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정적인 프랑스 브리의 광활한 평원을 찍었다(‘브리’, 프랑스, 1968). 어떠한 움직임도 없는 정적인 풍경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결정적 찰나’가 잘 나타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늘어선 큰 키의 가로수들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며 시선을 깊이 이어진 길의 끝으로 이끈다. 이 사진은 보는 이의 심리 상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언제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관심을 두었던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이라서 일까? 단 한 명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 사진에서조차 관객들이 자신만의 휴머니즘humanism을 찾아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번 전시의 메인 테마는 ‘풍경’이지만,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과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전시는 마지막 구성인 ‘순간의 영원성’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에 앞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먼저 탐색한다. 그러나 카르티에-브레송 의 사진은 그런 단계를 생략한 채, 날 것의 생생함을 곧 바로 담아낸다. 달리 스냅숏snapshot의 마이스터Meister라 불린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작가의 피사체가 되었다는 인식을 전혀 하지 못한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찰나를 포착하는 그의 능력은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는 사진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으며, 그렇게 찍힌 사진은 삶의 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통한다. 카르티에 앙리-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작가라면 어느 개인의 세계에 대해 내면적인 부분만큼, 외면적인 것에 대해서도 진정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물을 찍는 과정에서 그 인물을 둘러싼 환경의 중요성도 인지한 카르티에-브레송은 그만의 ‘주변 환경을 포함하는 포트레이트environmental portait’를 제시했다. 한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소품, 의상, 배경 등을 통해 그 인물의 내면까지 담아낸 사진을 완성한 것이다. 담배, 차tea 그리고 고양이를 비롯 사진 곳곳에 배치된 소품들이 사진의 주인공을 스포트라이트하는 방식을 찾아내는 것도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을 보는 특별한 재미가 될 것이다. HCB재단과 매그넘Magnum Photos이 공동 주최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10주기 회고전인 ‘영원한 풍경’전展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을 포함하여 카르티에-브레송이 생전에 제작한 총 253점의 오리지널 프린트Original Print가 함께 전시된다. DDP 디자인 전시관에서 3월 1일까지.
    • 양다빈
  • 살고 싶은 집으로의 초대 ‘즐거운 나의 집’, 아르코 미술관에서 2월 15일까지
    “귀를 기울이자, 한 시간이 지나 저기 작지만 영원한 순간이 부드럽게 나를 요람처럼 흔들며 깨우는 신선한 목소리가 들린다. 집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헤르만헤세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에서 ‘집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침에 대문을 나서면서부터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기까지, 때로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떠난 여행 중에도 ‘집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2014년 12월 12일부터 2015년 2월 15일까지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리는 ‘즐거운 나의 집’ 전시회는 ‘집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시각화한 전시다. 아르코미술관과 글린트의 협력 기획전으로 까사미아와 대림바스가 후원했다. 전시는 ‘기억의 집’에서 시작해 ‘현재 살고 있는 집’을 거쳐 ‘살고 싶은 집’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집에 대한 추억과 낭만 “우리 삶에는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의 집, 현재 사는 집,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이 있다. 이 세 가지 집이 겹친 곳에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현재의 ‘집’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전시는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기억의 집’을 형상화한 제1전시실을 들어서며 관객들은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느낌을 받는다. ‘집’을 얘기할 때 으레 떠올리곤 하는 일상의 사물들과 ‘집’을 구성하는 공간들이 재구성되었다.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현관문에 다가서자 현관 센서등이 기다렸다는 듯 켜지며 관객에게 작은 즐거움을 준다.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관객들을 맞이하는 상패, 액자, 화병, 시계 등의 일상의 사물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물건들이지만 동시에 집주인의 취향과 기호를 읽을 수 있는 물건들이다. 찌개 끓는 소리, 그릇 내려놓는 소리, 식기와 집기가부딪히는 소리 등이 맛깔스럽게 담긴 영상과 소담한 식탁을 재현한 베리띵즈의 ‘마주앉는 식탁’은 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본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나’ 문득 그리워진다. 금민정의 ‘비밀기지 만들기’는 다락방에 대한 추억을 환기한다. 지붕과 맞닿은 높고 좁은 다락방에서 아이들은 꿈을 키우곤 했다. 하지만 도심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세대들에게 ‘다락방’은 생소한 공간이다. 금민정은 바닥에 붙은 낮은 다락방을 만들어 공간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관객들과 함께 나눈다. 에스오에이SOA의 ‘자기 몸과 생각에 집중하다’는 화장실을 아름다운 사색의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는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오물을 받아내는 화장실이 전시실에서 가장 깨끗하고 빛나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하늘거리는 샤워 커튼과 빛나는 조명은환상적이다. 다가가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변기 뚜껑과 그 위에 적힌 글귀는 사색을 유도한다. 집, 나의 쉴 곳은 어디에 제1전시실에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추억의 집을 보여주었다면, ‘현재 사는 집’을 주제로 한 제2전시실에서는 삼포 세대의 불안과 물질화된 욕망이 농축된 집을 보여준다. 옵티컬레이스의 ‘확률가족’은 에코 세대(1979~1992)의 최대 독립 자금과, 에코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1955~1963)로 이루어진 4인 가족의 향후 30년간의 가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도록 그래픽화한 작품이다. 부동산 조사 연구자와 그래픽 디자이너의 합작품인 이작품은 자신의 소득 및 대출 가능 금액과 부모의 증여 가능액을 합한 금액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전시 공간의 바닥과 벽면을 활용한 입체적인 그래프는 관객이 그래프상의 꼭지점이 된 느낌을 받게 한다. 본격적으로 그래프 안으로 들어가기 전, 관객은 열 개의 문 중 자신의 소득 수준이 적힌 발판 앞에 있는 문에 선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적자를 의미하는 흰색 발판이 절반 이상을 채운 그래프를 마주한다. 숨이 턱 막힌다. 조혜진의 ‘섬’은 철거 지역에서 수집한 간유리와 철제대문을 이용해 주상 복합 빌딩을 만든 작품이다. 작품설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세련된 설치물이 폐자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도시의 고급 개발 지역 역시 폐허와 쓰레기 더미 위에 지어졌다. 무너진 폐허에서 나온 폐자재를 고급 주거 문화의 상징으로 만든 작품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역설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다시 집으로 제3전시실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아카이브 전이다. 제2전시실에서 ‘집’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안감을 보여주었다면 제3전시실에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 현재 한국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주택불안을 앞서 경험하고 그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는 일본, 스웨덴, 핀란드 등의 주택 정책을 패널로 소개한다. 또한 ‘집’과 관련한 50여 권의 서적과 새로운 마을형태와 대안 주택을 제시하는 건축가들의 평면도도전시된다. 많은 사람들이 동요로 알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은 존 하워드 페인 대본, 헨리 비숍 작곡의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에서 불린 곡이다. 이 노래는 미국 남북 전쟁 때 전쟁에 지친 군인 사이에서 남군, 북군 할 것 없이 유행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집을 떠난 군인들이 불렀던 노래를 전시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나의 쉴 곳은 작은집, 내 집 뿐이네’라고 맘 편히 노래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시의 제목은 ‘즐거운 나의 집’이다.
    • 조한결
  • 오도바이를 탄 조경가 조경가 고 이광빈의 1주기 맞아 추모전 개최
    작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청담동의 갤러리 원에서는 조금은 생소하지만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오도바이를 탄 조경가’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조경가 고故 이광빈(1972~2013)1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그와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경신원, 김아연, 박희성, 배정한, 손방, 송영탁, 신준호, 안세헌, 오형석, 정욱주, 주신하가 준비하고, 가원조경, 현디자인,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91학번, 서울대학교 조경미학연구실이 후원한 이번 추모전에는, 고 이광빈이 생전에 설계를 하면서 그렸던 드로잉 수십여 장이 전시되었으며, 전시장 한쪽에는 그가 그림을 그렸던 작업실도 재현되었다. 또 ‘이광빈의 작업실’ 맞은편에서는 그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했던 애니메이션 ‘서커스Circus’도 상영되었다. 고 이광빈은 ‘손 드로잉’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조경가다. 단지 손재주가 있었다거나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렸던 조경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거의 모든 설계 구상과 작업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생산되는 환경 속에서도 손 드로잉의 역할과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광빈의 드로잉은 그가 생전에 발표했던 글 제목인 ‘드로잉, 탐구와 소통을 위한 미디움’(『LAnD: 조경·디자인·미학』, 도서출판 조경, 2006)에서 나타나듯 ‘탐구’와 ‘소통’을 위한 매체로 기능했다. 그는 자신의 드로잉이 설계안을 재현하는 그림보다는 설계 과정에서 ‘창조적 탐구를 위한도구’로, 또 설계 주체 및 여러 이해 당사자 간의 ‘소통수단’으로 작동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탐구와 소통을 실험했다. 전시회가 마무리된 후, 여러 선후배와 함께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한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만나 조경가 이광빈과 이번 전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 교수는 그의 20대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덩치가 꽤 컸어요. 근데 그 덩치에 안 맞게 여렸고요. 재즈를 즐겨 들었죠. 설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 ‘꾸역꾸역’했어요(웃음).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죠.” 전시된 드로잉의 섬세함과 자신감에 차있는 선의 움직임에 놀라움을 표시하자, 김 교수는 “한 장의 드로잉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보았나요”라는 질문을 역으로 던졌다. 고 이광빈이 그림 한장을 그리기 위해 들였던 시간을 알면 그리 놀랍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김 교수는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때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설계를 참 좋아했어요. 자리에 앉아서 계속 그렸죠. 그렇게 ‘꾸역꾸역’, 아주 섬세한 그림을 그리다가도, 어느 순간 ‘할리 데이비슨’을 타러 나가곤 했어요.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또 그림을 그렸어요. 꾸역꾸역.”전시회의 기획 의도와 관련하여 김 교수는 “단지 한 개인을 추모하는 것에 그치지 않길 바랐다”며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전시회가 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50평 넘는 전시실에 모두 펼쳐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정교한 드로잉은 그의 설계에 대한 열정과 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그의 추모전이라는 것도 중요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드로잉을 통해 “설계에 대한 애정은 물론 관심조차 찾아보기 쉽지 않은 지금의 젊은 세대, 그리고 과거의 열정을 잃어버린 듯한 기성 세대 조경가들 모두에게 설계가 주는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설계에 대한 열정과 고민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드로잉 전’을 계속 기획하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지금은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이러한 ‘수작업’이 설계과정의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다”며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드로잉 작품을 모아 한 곳에 전시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러한 드로잉은 전시를 목적으로 준비된 것들이 아니고, 중간 단계의 결과물이다 보니 보관이나 수집, 분류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번 전시에도 방대한 양의 드로잉이 수집되었지만, 그의 사고의 깊이만큼 정교하게 분류하고 기록하기에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며, 조경 분야도 아카이빙archiving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최종 결과물들만큼 중간 과정이나 체계적으로 분류된 기록들에서, 조경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조경가 이광빈이 좋아했던 음악가 빌 에반스의 가장 빛나는 시기로 평가받는 작품은 ‘익스플로레이션즈explorations’다. ‘탐험’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을 나타내며, 공간이든 음악이든 창조적인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 그 자체다. 고 이광빈은 드로잉 또한 그런 원동력을 바탕으로 설계자가 내적 사고를 통해 생산해내는 결과물이며 소통 수단이자 설계를 완성하는 도구라 했다. 그가 드로잉을 통해 실험하고자 했던 ‘탐구’도,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의 가치를 보여준다. 재즈를 즐겨 듣고, 키보드로 음악을 만들고, 외롭고 답답할 때면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세계를 탐험했던 ‘오도바이를 탄 조경가’ 이광빈, 그의 설계에 대한 고민과 열정은 수많은 드로잉 속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라 믿으며, 이번 전시가 훗날 그의 ‘탐구와 소통을 위한 드로잉’을 재평가하는 기반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 양다빈
  • [시네마 스케이프] 업 집은 그냥 집일 뿐이야
    어릴 적 꿈을 그대로 실현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꿈이 이루어지면 과연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은 학창 시절에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른이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혹시 알게 되더라도 ‘나’의 행복은 이미 사회나 가족의 구조 속에 너무촘촘히 구속되어 있기 마련이다. ‘나’보다는 그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때가 많다. 언젠가부터 내 욕망으로 산다기보다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지 가끔 불안해진다. ‘업Up(2009)’은 평생 동안 꿈꾸던 신비의 폭포를 찾기위해 수많은 풍선을 매단 집을 타고 떠난 칼 할아버지와 꼬마 러셀의 모험담이다. 어린 시절, 칼은 말이 없고 소심한 아이였다. 우연히 말괄량이 소녀 엘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본인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가 포도 소다 병뚜껑을 칼의 가슴에 달아주기 전까진 그랬다. 엘리가 어느 날 밤 창문을 넘어들어와 자기의 꿈은 남아메리카의 파라다이스 폭포로 탐험을 가는 것이고 폭포 옆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속사포 같이 쏟아내기 전까진 확실히 그랬다. 바로 다음은 어른이 된 칼과 엘리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약 4분간 대사 한마디 없이 칼과 엘리가 함께 살 집을 수리해서 꾸미는 장면으로 시작해 그들의 일상, 그들이 함께 꾸는 꿈과 좌절, 할머니가 된 엘리가 먼저 세상을 뜨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시퀀스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한 편의 시같이 그려진다. 최근 개봉해서 감동을 준 독립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4분으로 축약한 듯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아프게 아름답다. 영화는 엘리가 세상을 떠나고 칼이 홀로 남겨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엘리의 부재가 그녀의 빈 의자와 항상 둘이 같이 앉았던 빈 식탁으로 표현되어 칼의 상실감이 전달된다. 칼과 엘리의 아름다운 목조 주택은 개발 사업으로 들어선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있다. 칼은 집값을 두 배로 쳐 준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수없이 많은 자물쇠를 걸어 잠근 채 공사로 인한 소음과 먼지 속에서 살아간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엘리의 등의자, 엘리의 사진, 엘리와 같이 동전을 모은 저금통, 엘리와 함께 꾼 꿈이 담긴 ‘엘리’ 그 자체다. 결국 집을 비워주고 요양원으로 떠나는 날, 칼은 거대한 풍선 다발을 이용해 집을 하늘로 띄워서 탈출에 성공한다. 오래전부터 엘리와 함께 가고 싶었던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한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풍선이 하늘로 튀어 오르고 집을 대지에 고정했던 장치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오래된 목조 주택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다. 주변 고층 빌딩 사이에 고립된 섬 같았던 칼의 집은 풍선으로 띄워져 보란 듯이 자유롭게 날아간다. 형형색색의 원색 풍선 그림자가 회색 빌딩의 유리창을 화려하게 물들인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윌리엄 켄트와 스토우 정원
    #36 후원자 – 샤프츠베리 백작 때 1712년 11월 장소 나폴리에 있는 샤프츠베리 백작의 저택 등장인물 샤프츠베리 백작, 비서, 윌리엄 켄트 영국의 정치가이자 저술가, 초기 계몽철학자, 박애주의자였던 샤프츠베리 백작Shaftesbury, 3rd Earl of(본명은 Anthony Ashley Cooper, 1671~1713)은 그의 독특한 윤리적·자연주의적 종교관으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알렉산더 포프가 그를 흠모했다. 1712년, 백작은 지병인 천식을 치유하기 위해 1년 가까이 나폴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은 헨리 8세 이후 근 2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구교와 신교 사이의 분쟁을 뒤로 하고 앤 여왕의 통치하에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화가 왔으며 구교도와 신교도도 큰 갈등 없이 화합하며 지내는 듯했다. 문제는 앤 여왕이 후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에 앤 여왕이 갑자기 승하하는 경우, 후사 문제로 다시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비록 1701년에 다시는 가톨릭 왕이 영국의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는 법이 제정되었지만1 당시 프랑스에 망명하고 있던 가톨릭 왕 제임스 3세2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소위 자코바이트Jacobites라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 역시호시탐탐 반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샤프츠베리 아, 드디어 왔구나. 이번엔 로랭이군. 님프와 파우누스와 사티루스가 있는 풍경이라… 아주 좋군. 이번에도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군이 심부름을 했다지? 켄트 군은 아직 있나? 비서 예, 마이 로드. 제가 식사나 하고 가라고 해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샤프츠베리 켄트 군은 로마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지? 미술품 구매를 중재하는 건 체류비를 벌기위해서라고 했고. 그 친구 스승이 누구인가? 비서 주세페 키아리Giuseppe Bartolomeo Chiari(1654~1727)라는 마스터 밑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 런던에서 존 탈만John Talmann(1677~1726)과 같이 왔답니다. 존탈만이 젊은 화가 지망생을 몇몇 모아 팀을 짜서 왔다고 합니다. 모두 키아리 밑에서 공부하고 있고요. 샤프츠베리 존 탈만? 윌리엄 탈만William Talmann(1650~1719)의 자제? 수집가 윌리엄 탈만의 자제란 말이지. 흐음. 골수 가톨릭 가문이 아닌가. 그림을 수집하러 유럽에 다닌다는 핑계를 대고 사실은 제임스 3세를 옹립하기 위한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있어. 로마에 아마 연락책이 있는 모양이야. 비서 (사색이 되어) 마이 로드! 샤프츠베리 걱정 말게. 늘 그래왔지 않나. 이번에 거사를 한다 해도 실패할 걸세. 영국에서 가톨릭은 이제 더 이상 세력을 구축할 수 없어. 그나저나 켄트 군도 가톨릭인가? 그 친구 어딘가 호감이 가던데. 비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따라 왔을 겁니다. 그 친구 좀 백치 같은 데가 있어서 정치 쪽으로는 통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샤프츠베리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번에도 수고비 넉넉히 챙겨주게. 참, 자네도 잘 알다시피 우리 영국이 지난 몇십 년 동안 스페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지금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지 않은 가. 다만 문화적으로는 크게 내세울 게 없네. 미술이나 건축은 이탈리아, 프랑스에 비해 백 년 이상이 뒤져 있어. 음악은 독일이 앞서가고 있고. 그러니 우리 귀족들이 능력 있는 젊은이들, 특히 서민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적극 후원해야 한다네. 그게 우리의 의무야. 앞으로도 켄트 군에게 계속 주문을 넣게. 비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 참. 음악 말씀을 하시니 생각나는데 미스터 헨델이 런던으로 아주 이주했다는 데요. 하노버 왕실에서 많이 노하지 않을까요? 샤프츠베리 그거 일이 재미있게 되었군. 하노버 왕실에서 미스터 헨델을 곧 따라올 걸세. 하하하. 비서 네? 샤프츠베리 이 친구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생각해보게. 여왕 폐하께서 옥체가 미령하시니 조만간 후사 없이 승하하실 가능성이 크지. 그렇다면 다음 왕좌에는 누가 앉겠나. 계약대로라면 하노버 왕실에서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두고 보게 독일인이 영국 왕좌에 올라앉을 날이 머지않았네. 어허,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지을 것 없네. 유럽 왕족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 친인척 관계 아닌가. 조지 왕은 재목이 썩 시원치 않다지만 그 아들과 며느리는 똘똘해. 특히 왕자비 캐롤라인이 대단히 명민하고 씩씩해요. 라이프 니츠가 애지중지하며 기른 제자라네. 그런 여인이 나중에 왕비가 된다면 영국에 해 될 일 없을 걸세. 그건 그렇고 저 그림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비서 저, 마이 로드. 오늘 크라플리 경Sir John Cropley(1633~1713)에게 편지 쓰신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샤프츠베리 참, 그랬지. 잊을 뻔했네. 구술할 테니 받아적게나. 인사말은 늘 하던 대로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이렇게 쓰게. “경께서 지난 번 편지에서 말씀하시길 새로 지은 저택에 어울리는 정원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지요. 지상 낙원을 만들어 여생을 쾌락하게 지내고 싶다는 데에 저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송구하나 저는 신께서 부르실 날이 머지않은 듯합니다. 먼저 가서, 신의 정원에서 경과 함께 거닐 날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의 정원은 어떤 곳일까요? 곧 그곳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늘 새로 그림 한 점을 주문해서 받았습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바로 저런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의 풍경을 그린 것 같습니다. 저 멀리 푸른 산이 아득히 보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만灣인가 봅니다. 강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평화롭게 흐르고 있습니다. 주변의 능선에는 아름다운 빌라나 성이 서 있는데 암울한 고딕 양식도 아니고 폐허도 아닙니다. (가만, 그런데 저 원형 신전은 폐허가 아닌가. 쯧쯧, 옥의 티로구먼) 그래요. 모든 사물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합니다. 물은 잔잔하고 훈풍이 수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갑니다. 장면 앞에는 큰 나무가 서서 그늘을 드리워줍니다. 해가 이미 반쯤 넘어가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고 님프들이 동굴을 떠나춤을 추러 나타났습니다. 파우누스와 사티로스도 이에 합류했고요. 파우누스는 플루트를 연주하고 사티루스는 젊은 님프에게 춤을 청합니다. 이 어찌 즐거운 낙원의 정경이 아니겠습니까.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큰 도시, 작은 도시
    뉴욕은 지나치게 크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상위 도시들은 시간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았다. … 이들은 대체로 부유한 나라에 있는 중간 크기의 도시다.”1 이러한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사에 따르면 ‘도시 규모’와 ‘살기 좋은 환경’ 사이에는 꽤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일까?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부유한 도시들—이를테면 멜버른, 비엔나,밴쿠버, 헬싱키 등—에서 공통적으로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특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대도시는 그 거대함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한 도시 문제로 신음해야 할 운명일까(그림1) 흥미롭게도 이미 1990년대 말 미국 시카고의 리처드 데일리 전 시장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처럼 보인다. “뉴욕은 지나치게 크다.” 데일리 시장은 … 두 팔을 양 옆으로 쭉 펴며 덧붙였다.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도 너무 크다.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은 너무 작다. (우리) 시카고가 딱 적절한 크기다.”2 이러한 “딱 적절한 크기”의 도시에 대한 추구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신규 도시 개발에 대한 수요가 큰 시기에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을 전후로 1970~80년대에 적정 규모의 도시에 대한 논의가 정점에 다다른다. 미국 밀워키 대학교 데이비드 벅 교수나 하와이 대학교 궉인왕 교수에 따르면 특히 작은 도시(小城镇 xiǎo chéngzhèn)에 대한 정책적 추구가 이 시기에 두드러졌으며, 이는 중국에서 큰 도시의 수에 비해 작은 도시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3 작은 도시에 대한 정책적 선호는 1980년 개최된 국가도시계획 콘퍼런스에서 잘 드러났다. “큰 도시의 성장을 억제하고, 중간 도시의 확장을 적절히 추구하며, 작은 도시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라”는 원칙이 여기서 선언되었고,4 같은 해 12월 중국 도시 개발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국무원에서 이를 승인하게 된다.이렇게 한 지역이나 국가에서 몇몇 도시가 과도하게 성장하는 것을 규제하자는 주장을 반-수위도시론anti-primate city 혹은 반-대도시론anti-metropolitanization이라 부를 수 있다. ‘수위 도시’란 한 국가나 지역에서 인구, 경제, 일자리, 서비스 등의 측면에서 그 비중이 지배적인 도시를 말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서울(혹은 수도권)이, 중국 양쯔 강 델타 지역에서는 상하이가 수위 도시에 해당한다(그림2). 국내에서도 수도권 과밀 해소나 지역 균형 발전과 같은 일종의 반-수위도시론이 서울의 행정 기능 분산이나 지방 거점 도시 육성을 통해 구체화된 바 있다. 좀 더 지역적으로는 서울주변에 분당(계획 인구 39만 명)이나 일산(27만 명)과 같이 비교적 큰 규모의 신도시 개발이 가져올 폐해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적이 있다. 이에 따라 수도권 신도시 정책을 인구 10만 이하의 미니 신도시 건설로 선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건혁 교수는 “자족적 신도시의 적정 인구 규모”에 대해 20~30만 명을 그 기준으로 삼아도 별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구 집중은 해당 지역이 여러 가지 도시적 매력이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에 인구를 강제로 분산시키기보다는, 제한된 수의 신도시를 만들고 인구 집중에 따른 여러 문제를 계획적으로 잘 해결하면된다고 주장했다.5 안 교수의 주장이 옳다. 다수의 미니 신도시를 건설하여 인구 집중의 폐해를 해소하자는 주장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더욱이 현재 분당이나 일산의 규모가 너무 커서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문제가 일어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적정 규모 이론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 질문해 보자.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는 큰 도시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 이에 답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떠한가. 지금의 도시 규모가 적절합니까? 혹은 인구 천 만의 도시와 백 만의 도시 중 삶의 다양성, 주거 만족도, 출퇴근의 편리성을 모두 고려하면 어느 쪽이 더 좋습니까? 이쯤 되면 난처하다. 적정성 자체와 여기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에 대한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도시의 적정 규모에 대한 고민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도시 규모는 일정한 하한선과 상한선 사이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도심지 면적의 하한선, 즉 최소 규모는 도시민들이 요구하는 음식이나 땔감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최소 영토로 결정되며, 상한선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최대 면적이라고 보았다.6 꽤 그럴듯한 논리임에도 여기에는 큰 약점이 있다. 물론 도시가 최초로 형성될 시점에 규모의 상·하한선이 존재한다는 설명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상·하한선이라는 기준 자체가 시대와 관습의 산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땔감을 구하는 방법이나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영토라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가 하나의 규모에 대한 기준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한 시대의 상·하한선은 다른 시대에 큰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선 초 한성부의 방어를 위한 적정 성곽 규모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시기에 방어를 위한 최적의 성곽 규모와 얼마나 다를지 떠올려 보자. 적정 규모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시·공간적 맥락성과 함께 도시 규모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잠재적 요소—이를테면 도시의 지형적 특성, 주요 이동 수단의 기술적 수준, 또는 한 사회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도심지 크기나 과거 도시 개발의 관습—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자진감리自進監理 양화한강공원에 관한 몇 가지 소고
    산수전략 김정윤(이하 김): 우리가 2006년 로테르담에서 서울로 오피스를 이전한 후, ‘서울은 이래야 한다’라는 명제thesis를 만들어 놓고 일을 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3년 정도 일을 하다 보니 그 시점까지 우리가 수행했던 공공 공간 설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자세’를 발견할수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산수전략山水戰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산과 물을 다루는 전략을 우리 스스로 발견했던 것이죠. 아마 이걸 깨닫게 된 계기는 2007년 청라신도시 호수공원 설계공모 때 출품작 제목을 ‘산수전략’이라고 쓰기 시작했던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산수전략은 무엇입니까? 박윤진(이하 박): 일단, 산수전략의 첫 번째 의미는 산과 물을 다루는 기술입니다. 두 번째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우리나라의 지형적 혹은 경관적 문맥을 되살려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그대로의 복원이 아니라 동시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함의하는 동시대적인 복원, 즉 ‘시학적 복원’을 하자는 설계 전략입니다. 세 번째는 산수 문화의 일상적인 가치를 인정하되, 산수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혹은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수행한 ‘강남 대체 자연Gangnam Alternative Nature’ 리서치가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 외에도 산수전략에 대한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계속 진행 중인 어젠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김: 그간 우리는 많은 대형 오픈스페이스 설계공모에 참여했지만, 그중 실시설계까지, 그야말로 끝까지 기회가 주어진 경우는 양화한강공원이 처음이었죠. 우리가 양화에서 가졌던 산수전략은 무엇이었나요? 박: 우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다른 프로젝트와 비교해본다면 양화한강공원은 가장 가벼운(?) 경쟁을 통해 당선된 경우라 말할 수 있습니다(하하).아무튼, 양화한강공원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한강의 수문학적 특수성을 면밀히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강에 엔지니어링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방재기능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포지션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즉, 엔지니어링과 무관하게, 그 표피를 ‘장식하는 디자인으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양화한강공원에 어떤 수문학적인 기능을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김 대표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양화 프로젝트는 산수전략의 첫 번째 항목인‘기술’ 혹은 ‘엔지니어링’에서 출발했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과거 한강은 수운이 발달한 바다와 같은 큰 강이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가지 여가 문화가 꽃을 피웠죠. 수많은 정자가 있었고요. 마치 조선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할까요. 그러나 지금은 서울이 대도시가 되면서 고수부지의 아래 위에방재 시설로서 보가 설치된 것이 가장 큰 변화죠. 양끝에 보가 생기다보니 접시 물처럼 찰랑거리는 고인 물과 다름없었던 거죠. 그래서 지금은 모래 이동이 중지되었고, 하류에서 올라오는 뻘과 지천에서 나오는 모래뻘이 한강 호안을 변화시키고 있죠. 이렇게 접시 물 같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1m씩 수위가 변하기도 하죠. 따라서 우리가 한강에서 가장 주목했던 것은 뻘이었어요. 여름에 범람할때마다 엄청난 양의 뻘이 한강 변에 쌓이게 되었죠. 이는 유지 관리의 문제를 항상 불러왔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뻘을 더 원활하게 유통시킬 수 있는 공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김: 결국 우리는 한강을 낭만적인 물길로만 보기에 앞서 도시의 인프라스트럭처로 본 거죠. 박: 그렇죠. 뻘에 의해 효용가치가 좌우되는 호안이라고 봤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잘 다루는 것이 공원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봤어요. 김: 그리고 거기에 지형과 동선이 잘 부합하게 설계함으로써 공원으로서의 공간 경험을 만들어 내려고 했었죠. 인프라스트럭처이면서 경험을 만들어 내는 공원, 즉 인프라스트럭처 시스템과 지형과 동선이라는 각각의 시스템이 관계하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경험의 매트릭스’를 의도했습니다. 박: 사실은 많은 정책 입안자들이 ‘한강을 과거로 복원시키자’, ‘모래밭이 있는 강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쉽게 했었지만, 댐이나 보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처의 기본적 변화 없이는 낭만적 그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인 뻘에서 출발했던 거죠. 박윤진은 하버드 대학교 GSD를 졸업하고 Sasaki Associates,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고 치치 지진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함께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 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 대학교(2008, 2010), 오하이오 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 대학교(2012) 등에서 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GSD 졸업 후 네덜란드 West 8 등에서 실무를 쌓았다.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공원 디자인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놀튼 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온 글림처특훈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제니퍼 키스맷 토론토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 시정의 까다로운 전문가 회의를 지역 방송에 공개하고 실시간으로 트위터를 통해 시민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중과 토론으로 소통하는 도시계획가, ‘캐나다의 미래를 이끌어 갈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 걷는 도시의 전도사, 휴먼 스케일의 도시를 실현하는 전위대로서 전 세계 어바니스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토론토의 도시계획국장, 제니퍼 키스맷이다. 2012년 공직에 임명되기 전에는 캐나다 굴지의 도시컨설팅 기업인 ‘DIALOG’의 공동 창업자이자 탁월한 도시설계 컨설턴트로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복잡하고 따분한 남성적 문화가 주도적인 도시 분야에서 그녀는 이미 스타였다. 그러나 그녀를 진정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녀의 아이디어다. 명쾌하고 또렷한 논리와 진정성 있는 소신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냈다. 그녀는 누구나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느끼는 경험과 얼핏 사소해 보이는 관찰에서 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했던 등하굣길의 모험이 어째서 한 세대가 지난 지금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는지 스스로 원인을 찾아보고 느낀 것을 나누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비단 학생의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경제를 살리는 일에도 걷는 사람들, 특히 걷는 학생들의 역할이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설득력을 더했다. 걷는 사람들은 운전자에 비해 지출이 20% 가량 많다고 한다. 걸으면서 많은 자극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전거 이용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다양한 도시 환경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쌓은 경험도 값지다. 잘 사는 도시, 살기 좋은 도시로 유명한 밴쿠버에서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도시 문제는 가난도 범죄도 공해도 아닌 ‘외로움’이었다고 한다. 사람 간의 연결과 연대 또한 걷는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키스맷의 관찰이다. 고밀도 주거 단지에 걷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할 경우, 주차장, 엘리베이터, 유닛으로 연결되는 단순한 동선 구조가 즉흥적인 만남의 기회를 앗아가고 일종의 수직적 교외 지역vertical suburb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키스맷은 인간이 걷도록 설계된 존재라는 것을 믿으며 도시 또한 그러한 자연적 서식처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걷는 사람의 규모에 맞게 계획된 도시, 그러한 도시가 성장을 추동하는 도시다. 그녀는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 도시’ 이론을 통렬히 비판하며 그러한 단순 도식화와 거리에 대한 무지, 위계를 상실한 공간 개념이 완결적인 마을 형성을 저해하고 넓은 면적에 밀도를 흩뿌림으로써 사람과 건물과의 관계 설정을 무력화했다고 설명한다. 차를 타고 다닐 경우, 건물과 거리 사이의 상호 작용이 사라지고 도시적 맥락의 중요성은 현격히 줄어든다. 공원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도시 공해가 증가하며, 대중교통은 낮은 밀도로 인해 실용성이 급격히 줄어든다. 키스맷은 기존의 현대 도시계획이 각각의 토지 이용을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실질적으로 건물과 거리 사이가 벌어지고 그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는 결과가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지적한 ‘거리의 눈eyes on the street’, 혹은 ‘공원의 눈eyes on the park’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도시 철학인 ‘모두를 위한 도시’라는 명제는 ‘보행자 생태계’, ‘보행자 일조권’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던져준다. 토론토를 예로 들면, 최근에 이루어진 성장 중 약 40%가 걷기 편한 작은 면적의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활동이 있어야 걸을 맛이 나는, 걷기 좋은 도시가 되는데, 사실 명품 건축보다는 서민들의 어설픈 건축 스타일이 늘어선 곳이야말로 가장번성하는 거리였다는 관찰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공적 영역을 무시하는 거만한 건물은 결과적으로 시민의 건강을 해치는 반면,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으로서위치하는 건물은 공적 공간을 보호하고 보행자의 위상을 드높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거리와 대화해야 하며 보행자는 건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거대하고 디테일이 없는 빈 벽으로 형성되는 대형 마트나 호텔 건물이 도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유다. 한편, 건축 스타일은 환경 윤리적 측면과도 연결되는데, 지속성, 복원가능성, 시간에 따른 가변성이 높은 재료와 공법으로 지어진 건물이 장기적으로 도시 폐기물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감하며 좋은 도시를 만든다는 주장 또한 되새겨 볼 만하다. 제니퍼 키스맷은 창조적인 도시계획을 강조한다. 특히 도시계획가는 복잡하고 어려운 도시 문제를 시민에게 차근차근 쉽게 설명해 줄 의무가 있음을 역설한다. 본 인터뷰에서는 그녀의 대표적인 소통의 철학이 담긴 혁신 사례들을 간략히 다루어 본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공간 공감] 삼성출판사 공개공지
    서초동에 위치한 삼성출판사 사옥에는 정원이 딸려 있다. 이 정원은 사유지이지만, 동네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개공지다. 좁은 골목과 건물만 빼곡할 것 같은 장소에서 만난 뜻밖의 열린 정원은, 공간의 질에 대한 논의와 별개로 사유 공간의 공공적 활용에 대한 이야기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겨울에 방문한 정원이라 을씨년스럽고 황량하기까지 하다. 겨울의 흔적을 통해서 푸르렀을 때의 상황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지만, 다행히 지난 여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찍어 둔 사진이 있어서 참고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공간 구성을 살펴보면, 삼성출판사 건물이 안쪽 벽을 맡고 그 좌우는 높은 코르텐 스틸 벽면과 자작나무에 의해 위요되어 있다. 특히 코르텐 스틸의 단순명료한 질감과 과감한 스케일이 눈에 띈다. 이미 만들어진 공간에 대해 호불호를 말하기는 쉽지만, 설계 단계에서 재료와 스케일에 대한 확신을 갖는 데는 오랜경험이 요구된다. 입구 주변은 단차를 극복하기 위해 설치된 계단이 둘러싸인 느낌을 주고 있어, 공간 전반에 걸쳐 정원다움의 기본 속성 중 하나인 위요감은 꽤효과적으로 설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 서 있으면 주변 요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하게 ‘내부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곳이 과연 공개공지로서 적합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가를 따져볼 수 있다. 공개공지는 건축주가 일정 인센티브를 받고 공공에게 제공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개방성과 접근성이 매우 중요하며, 다른 사례를 떠올려 보아도 스퀘어나포켓 파크의 형태로 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도전적인, 너무나 도발적인 마르틴 라인-카노와의 대화
    토포텍 1Topotek 1의 베를린 오피스에서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를 만났다. 그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강렬했고, 그의 오피스는 그의 작품 이상으로 절제된 표면이었다. 즐거움과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대화를 옮긴다. 고정희(이하 G): 지난 주말에 한국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어 감사하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땠는가? 마르틴 라인-카노(이하 R): 열흘 동안 인도를 경유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고 마지막에 한국에 머물렀다. 젊은이들의 팝 문화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고 느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음식이다. 몹시 독특하고 강렬하더라. 각종 김치 종류, 불고기에 미끄러운 홍합 미역국까지 모두 먹어보았다(웃음). 너무 강렬하고 독특해서 좋다 싫다 말하기 어렵다. ‘나중에 집에 가면 익숙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테니까’라는 마음으로 일단 모두 시도해 보았다. G. “집에 가면”이라고 했는데 어디를 말하는가? 베를린? 아르헨티나? 스페인? R. 일단은 베를린을 집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가톨릭인데, 열세살 때 독일로 이주했다. 그래서 독일 개신교에 대해서도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좀 복잡하게 섞였다. G. 더 이상 복잡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토포텍 1의 작품을 보면 다원적인 점이 눈에 띈다. 토포텍 1이란 이름을 제공한 토포텍처와 도시 광장이 다르고 공원이 또 다르다. 최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퍼킬렌Superkilen의 도시 구역은 대단히 강렬하다. 사회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R. 그렇다. 내 개인적인 출신과 성장 배경으로 인해 다원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무신론자이지만 가톨릭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외할머니는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은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종교다. 그 반면에 아버지의 유대교나 독일의 개신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는지나 자신도 잘 모른다. 이렇게 복잡한 종교적·문화적 배경과 이주자라는 사실이 내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것을 동시에 보고 이해하는 다원적 능력이 키워진 것 같다. 내게는 ‘낯선 것stranger’과 ‘이주migration’가 중요한 테마다. G. ‘낯선 것’이라는 테마는 도처에 나타난다. 특히 정원 자체를 낯선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매우 독특한 견해인 것 같다. ‘이주자들’이라는 테마의 경우, 특히 덴마크 코펜하겐의 수퍼킬렌 프로젝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이 점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토포텍 1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정되고 있는 ‘표면 전략surface strategy’에 대해 듣고 싶다. R. 표면 전략은 우리 디자인의 가장 핵심이다. 나는 대학에서 처음에 미술사를 공부했었다. 미술사 중에서도 정원의 역사에 관심이 컸고 나중에 정원 문화재 관리사가 되고 싶었다.1 그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정원으로 답사를 갔던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다음 프랑스 정원과 영국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의 역사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진진함을 알게 되었고, 현대 조경에서 역사적 맥락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느꼈다. 학문도 좋지만 직접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경학과로 옮겼다. 처음부터 정원의 회화적인 면에 매료되었다. 그래픽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바로크 정원의 파르테르, 소위 자수화단이라는 것을 보면 결국 표면에 수를 놓은 것인데, 나는 이를 평면 그래픽으로 이해했다. 영국 정원은 풍경화를 모델로 삼았으며, 현대에 와서는 로베르토 부를레 막스Roberto Burle Marx,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 등이 그래픽적으로 작업했다.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 때 피터 워커Peter Walker와 마사 슈왈츠의 설계실에서 6개월간 실습한 적이 있다. 그때 두 사람이 실험하던 랜드 아트 혹은 대지 예술을 보고 이야말로 예술적인 것과 조경적인 것을 연결하는 교량임을 깨달았다. G. 그렇지만 마사 슈왈츠의 작품을 보면 조경을 공간적인 것으로 다루는 면이 강하다. 그 밖의 모든 사람들도 조경을 3차원의 예술로 파악하고 있다. 당신만은 유독 정원과 경관의 2차원성을 주장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R. 3차원은 건축의 영역이다.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으면 그 내부에 3차원의 공간이 형성된다. 그 반면에 우리가 하는 작업은 외부의 표면, 즉 2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 산, 언덕, 호수, 모두 표면의 일부다. 3차원이 아니다. 지표면은 하늘과 직접 맞닿아 있다. 농담반 진담 반으로 신은 최초의 조경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구 전체의 표면과 지형을 다루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조경이다. 어떻게 보면 과대망상증에 가깝다(웃음). 지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우리 인간은 표면에 붙어서 살며 표면을 통해 우주와 소통한다. G. 그렇다면 표면에 그리는 그래픽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한 기호인 셈인가. R. 바로 그렇다. 예를 들어 페루 나스카Nazca의 지상그림geoglyph을 보면 우리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지표면에 부호를 그려 하늘과 소통했다. 나는 바로크 정원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바로크 정원은 거대하게 비어 있다. 채운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채워진 것들에 집중하지만, 빈 외부 공간에 들어서면 위를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지붕 덮인 건축의 폐쇄적 속성과 외부공간이 다른 점이며 외부 공간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하늘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다. 볼 것도 많고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이를 체험할 수 있게 하려면 공간을 비워야 한다. 대개는 빈 공간을 보면 채우고 싶어 한다. 빈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르겠다. 바로크 정원의 평면 기하학과 더불어 대형 연못은 하늘을 인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하늘과 지표면이 닿아 있다는 것을 이처럼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도 없다. 평면과 하늘로 압축한 것이다. 20세기의 바우하우스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환원reduction하고 절제한다는 점이 그렇다. 단지 비율만으로 승부한다. 사실상 바우하우스 디자인이나 바로크 정원 모두 ‘비움’이 특징이다. 나는 빈 것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