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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원 도시 서울
    세계 도시의 공공 아젠다, 공원 오늘날 세계 주요 도시의 공원과 녹지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공원 정책 컨설턴트인 피터 하닉Peter Harnik은 “공원이 주요한 공공 아젠다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많은 도시들이 보다 더 좋은 공원 체계를 갖추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세계 여러 도시들은 새로운 공원을 만들고 녹지를 보존함으로써 도시 이미지를 제고하고 도시 경쟁력을 증진시키고 있다. 싱가포르가 그 대표적인 예다. 1960년대 초부터 리콴유 수상의 리더십에 따라 ‘정원 도시Garden City’를 표방하며 도시 녹화에 힘써왔으며, 그 결과 많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정원 속 도시A City in a Garden’로 비전을 재설정하면서 녹색 공간 확충을 위한 공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략적 개발 부지인 마리나 베이Marina Bay 매립 공간을 상업 공간으로 개발하지 않고, 식물원형 공원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로 조성한 것도 도시개발 패러다임의 큰 변화다. 또한 산지형 공원을 보행교로 연결하거나 건축물에 수직 정원vertical garden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외에도 뉴욕, 밴쿠버, 취리히 등 전 세계의 도시들은 공원녹지 수준 향상에 도시 정책의 핵심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은 어떠한가? 지난 30여 년 동안 도시 공원은 양적인 확대뿐만 아니라 질적인 수준도 현격하게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원인은 1995년 부터 도입된 지방자치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시장들은 생활 공간의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는 공원과 공공 공간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2013년 9월 2일자 논설은 서울 시장의 공원 정책에 대한 관심을 다루고 있다. “서울 시장의 공원 사랑은 유별나다. 역대 5명의 민선 시장은 모두 자기 이름표를 단 공원을 하나 이상씩 갖고 있다. (중략) 큰돈 들이지 않고 자기 이름표를 새길 수 있는 사업 중 공원만한 것도 없다.” 이제 서울의 공원녹지는 세계 도시와 비교하여도 손색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서울의 공원녹지 정책의 변화 과정과 현재 정책의 지향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공원녹지 관점을 투영한 도시 비전인 ‘공원 도시, 서울’의 가능성과 과제를 점검하고자 한다. 서울시 도시 공원 정책의 변화 민선 1기 조순 시장은 취임 후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서울시 공원녹지 최초의 전략 계획인 셈이었다. 소극적인 공해 방지 차원을 넘어서 환경친화적 도시를 만드는 수단으로 공원녹지를 확보해야한다는 취지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산업 시설 이전지를 공원화하는 시도도 이루어져 OB 공장 부지, 파이로트 공장 부지가 공원화되었으며, 양재천에서 자연형 하천복원과 길동생태공원에서 생태 공원의 개념이 구현되었다. 무엇보다도 회색의 여의도광장을 녹색의 여의도공원으로 변화시킨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민선 2기 고건 시장은 ‘생명의 나무 1,000만 그루 심기’를 정책 목표로 삼는다. 도시녹화 사업에서 성과 목표를 설정하고 접근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계획은 광범위한 나무 심기 사업을 통하여 실질적인 녹지량을 증진시켰다는 평가를 할 수 있고, 공공 기관 담장 철거, 학교 공원화, 옥상 녹화 등 다양한 방식의 녹지 확보를 시도했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이 시기에는 쓰레기 매립지인 난지도를 월드컵공원화하였고, 정수장으로 활용하였던 선유도를 공원화하면서 공원 설계의 질적인 수준도 향상시켰다. 민선 1기와 2기에는 공원녹지의 양적 확충이 주를 이루었고 도시 산업 재편에 따른 이전적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민선 3기 이명박 시장의 경우 ‘생활권 녹지 100만평늘리기’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공공 공간과 공원녹지를 도시 공간 재편의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서울광장과 청계천 복원은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이라는 점과 도시마케팅 측면에서 활용하였다는 점이 새로운 시도였다. 문화관광 타운으로 구상한 부지를 서울숲으로 공원화한 것도 개발보다는 환경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변화를 잘 반영한 사례다. 민선 4기 오세훈 시장은 ‘생활권 녹지 100만평 확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지역적 형평성의 관점에서 강북에 북서울꿈의숲과 강서에 서서울호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신규 공원녹지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공원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남산 르네상스 사업을 통한 남산공원의 접근성 개선과 한강 르네상스 사업을 통한 여의도한강공원 등 7곳의 한강공원 리모델링이 그러한 예다. 민선 5기 박원순 시장 역시 이전 민선 시장처럼 도시공원과 공공 공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시장으로 취임하기 이전에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면서 세계공원연구소를 창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민선 5기의 변화는 거버넌스 방식으로, 공원 계획과 운영을 위하여 여러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공조경가 그룹을 출범시켜 정책 개발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2013년부터는 ‘서울 꽃으로 피다’라는 캠페인을 통하여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생활 곳곳을 녹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민선 3기인 2003년 설립된 서울그린트러스트는 시민 주도의 도시 공원 및 도시숲 운동으로 시민참여 공원 조성 및 운영이 활착하는 데 기여하였다. 최근 도시 녹화 및 공원 조성 과정에서 시민이나 기업 등 다양한 주체의 참여가 확산되는 추세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이며, 2014년 설립된 한국조경학회 정원학연구센터 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부터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및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시 공공조경가 그룹 공원혁신분과 위원장으로 ‘푸른도시 선언 및 전략계획’ 수립을 위한 실무위원장으로 일하였다.
  • 걷고 싶은 도시 서울?
    ‘걷고 싶은 거리’로 대변되는 불편함 불행하게도, 또 역설적으로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는 이 도시가 걷고 싶지 않거나 걷기에 불편하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더구나 이를 행정의 치적으로 광고하는 것은 도시에 대한 오해이거나 걷는다는 행위의 도시적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증표다. 걷기에 불편하다는 것은 도시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이며,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도시의 글로벌 경쟁력에 커다란 상처를 준다. 1998년 7월 서울시는 시의 전반적인 가로 환경이 보행불안, 보행불편, 보행불리 등 보행삼불이라며 시민의 보행권과 삶의 질이 보장되는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사업을 추진하였다. 시에서 직접 추진한 걷고 싶은 거리가 열 군데이고 자치구별로 추진한 것도 상당수여서 서울시 전체로는 백여 군데의 ‘걷고 싶은 거리’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행삼불의 불명예는 가시지 않고 있으며, 보행권 확보라는 기본 취지는 사라지고 보도 폭만 두세 배 늘려 불법 주차 공간만 제공했다는 시민의 비난이 일고 있다. 게다가 보도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는 아찔하기까지 하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기사는 서울의 인도에서 걷기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냉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육백 년 전의 도시 구조에서 출발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 도시로 근대를 만났고 전쟁을 거치며 파괴되고 다시 급격하게 현대화되면서 자동차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오래된 도시에 자동차가 드나들다보니 인도를 만들기도 어려워서 서울 도로의 삼분의 이 가량은 인도가 없는 도로가 되었다. 그러나 50년이 채 되지 않은 신도시인 강남 거리의 보행 환경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면, 구조적 한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거리를 걷고 싶게 만들겠다는 행정의 포부와 15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서울의 인도에서 걷는 일은 개선이 되지 않는 것일까? 도시에서 ‘걷기’의 의미 ‘걷고 싶은 거리’는 최초로 걷기의 의미를 일깨웠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자동차의 통과에 역점을 두었던 개발 시대의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교통 체계에 대한 반성과 도시 공간의 질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걷기란 두 팔과 두 다리를 번갈아서 휘젓는 것으로 인간이 신체를 이동하는 행위다. 가장 원초적이자 근본적인 이동의 수단이다. 걷기는 운동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서 쳇바퀴를 굴리고 있다. 교토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있는 ‘철학자의 길’을 보면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과 운동을 넘어서 사색을 위한 물리적인 전희이기도 하다. 게다가 ‘걷기의 기적’ 같은 TV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 명상을 넘어서 일종의 정신요법의 효과까지도 있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걷는다는 산티아고의 순례길에 이르면 걷기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임에 틀림없다. 이런 걷기에 적합하고 보기에 쾌적한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겠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도시를 거부하는 ‘걷고 싶은 거리’ 도시와 자동차에 관한 오래된 편견이 이러한 오해의 출발이다. 이에 관해 두 가지 유의미한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 뉴저지의 래드번Radburn이다. 자동차로 30분이면 맨해튼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위치에 자리잡은 래드번은 미국의 대공황 시절에 만들어졌다. 사회적으로 주택 투기의 광풍이 한풀 꺾이고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래드번은 삼천 명 남짓의 인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하워드의 전원 도시와 페리의 근린주구 개념에 자동차가 결합된 미국식 교외suburban의 완성판이라고 할만하다. 래드번을 설계한 것은 자동차였다. 그러나 보다 엄격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자동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래드번의 보행로와 자동차로는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루에 채 수십 대의 차도 왕래하지 않는 한산한 도로이지만 고가도로나 지하도로 분리되어 있다. 전체단지를 순환 도로로 두르고 각 주택으로는 쿨데삭Cul-De-Sac으로 끝나는 진입 도로로 이어진다. 이른바 수퍼블록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신경증적인 보차분리를 통해 아이들이 안전하고 공원 같은 주거 환경을 만든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은 래드번을 평범하고 지나치게 차분한 전형적인 미국의 교외 마을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며 생기는 인구 변화는 공원과 놀이터를 텅 비게 만들었으며 보차분리 때문에 고립된 단지는 오히려 자동차를 필수로 만드는 역설을 만들기도 했다. 도시의 전통적인 거리보다는 산책로가 이어진 주거 단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경훈은 1963년 경기도 백령도의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스물넷에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건축을 공부했고,졸업 후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신탄진 고속도로 휴게소, 헤이리 랜드마크하우스 등의 건축 작업을 했다. 2003년부터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외에도 여러 하위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건축 작업과 글쓰기를 해왔다. 저서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가 있으며, 『세컨드 모더니티의 건축』, 『통섭지도: 한국건축을 위한 아홉 개의 탐침』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위압적 랜드마크에서 수평적 랜드마크로
    1960년대, 실패한 랜드마크 1960년대, 즉 ‘돌격의 시대’에 지어진 서울의 높은 건물들은 대부분 실패한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상적인 근대 건축의 모습을 한 이러한 건물들은 현재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건축미를 자랑한 건물 중에 비교적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은 남산의 교육연구정보원(구 어린이회관) 정도다. 호텔, 오피스, 공공 기관 등은 비교적 본래의 모습대로 남은 경우가 많이 있지만, 주상복합이나 아파트 등은 도시의 흉물로 남게 된 경우가 많다. 건축가 김수근이 한국기술개발공사에서 급작스럽게 설계한 세운상가는 근대 건축의 이상적 요소인 공중가로와 필로티 등의 구조를 지니고 있었지만, 1980년대 개발된 용산과 강남으로 건물의 상업 기능이 빠져나감에 따라 슬럼화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항상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는 쇼퍼shopper들의 속성이 쇼핑타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전자상가는 용산으로, 새로운 백화점은 강남으로, 소위 핫스팟의 이전 현상이 발생했다. 88올림픽 즈음부터 자가용 이용이 급증함에 따라 강북의 거주 인구는 줄어들고 주차장은 부족해졌다. 새로운 상업을 받아들이지 못한 세운상가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똑같은 현상은 현재도 일어나고 있다. 만약 용산 개발이 원안대로 이루어져 17개의 타워가 지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용산 민자 역사에 있는 쇼핑몰들과 새롭게 들어오는 대형 쇼핑몰 간의 생존경쟁이 불가피해지면서 지금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예를 들어 신도림역에 디큐브시티가 지어지자 근처의 테크노마트와 같은 쇼핑몰들은 상대적으로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1960년대의 교훈은 랜드마크 건물에서 기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상업 건물이나 주상복합 건물은 랜드마크가 되기 어렵다. 그나마 현재 남아있는 호텔과 오피스들은 기업의 성장 덕택에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건축미를 구가하며 지은 건물은 오너의 기호가 바뀌지 않는 한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며 도시에서 근대 건축의 추상성만을 더했을 뿐이다. 도시를 위한 더도 덜도 없다. 1970~80년대, 도시의 발전과 랜드마크 1970~80년대에는 서울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랜드마크가 필요하였다. 63빌딩과 N서울타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의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랜드마크이며, 외국인에게 서울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관광 명소다. 두 랜드마크는 주변 건물들에 비해 압도적인 높이로 상징성을 확보한다. N서울타워는 한국에 텔레비전 방송이 실용화되기 시작하면서 건립된 타워다. 63빌딩은 250m의 높이로 1985년 5월 완공되었는데,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현재도 계획 중인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금색의 거대한 형태의 63빌딩은, 88서울올림픽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수행했다. N서울타워는 진화하는 과학 기술력을, 63빌딩은 국력을 세계에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각각의 건물이 지어진 배경과 목표는 다르지만 두 건물 모두 시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랜드마크다. 1990년대 이후, 지역 개발의 다른 이름 1990년대 이후 서울에서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랜드마크’라 칭하는 다양한 지역 개발과 고층아파트 건설이 활발하였다. 지금까지도 랜드마크는 각종 일간지와 분양 광고 문구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이명박 시장이 재임하기 이전에도 민간에서부터 나름의 국제화(?)는 진행되어 해외 건축가들에게 호텔과 오피스 디자인을 맡기는 현상이 일어났다. 종로의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가 디자인한 종로타워가 지어졌고, 한국은행 앞에는 역시 부담스러운 모습의 포스트타워(중앙우체국)가 지어졌다. 자유롭고 현대적인 모양으로 위압감을 형성하는 공공 건물의 사례다. 강남 삼성동에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현대산업개발 건물도 알 수 없는 문양이 유리 커튼월에 붙어 있다. 이 세 건물 모두 택시기사님들에게는 뚜렷한 인상을 남겨 인지성을 확보하며 보행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개개의 건물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경우는 그래도 다행이다. 곤혹스러울 때는 폭이 넓은 건물이 큰 길 앞에 떡 버티고 서 산을 가리거나, 요즘 재개발된 아파트처럼 군집되어 단지 내부로의 시선을 차단하는 경우다. 아파트 단지의 철옹성 같은 모습은 주변의 작은 건물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명박 시장이 2006년 허가를 내 준 여의도의 서울국제금융센터IFC 몰는 외국 기업에게 99년간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서울을 두바이와 같은 국제 금융 지구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일환에서, 현재는 좌초된 용산 개발 사업의 오피스들과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IFC몰의 세 동 중 한 동은 텅텅 비어있는 실정이다. 개발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세훈 시장은 ‘디자인 서울’ 사업을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디자인 서울’에 관해 전면 광고를 하는 등) 열성적으로 추진하며, ‘한강 르네상스’ 사업과 노들섬 오페라 하우스 건립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정점은 DDP 건립으로 구현하였다. DDP는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그 정당성에 대해 뭇매를 맞으면서 지어졌고, 운영에 대해서 기대감 보다는 걱정이 많이 앞서고 있다. 송하엽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중앙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디자인과 건축 역사, 건축 이론을 가르치고있으며, 대안건축연구소를 운영하며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Reinventio’와 ‘바람같은 돌’이 있으며, 저서로는 『랜드마크,도시들 경쟁하다』, 역서로는 『표면으로 읽는 건축』이 있다.
  • 기억이 사라진 도시
    기억의 감각을 잃은 피맛길 불현듯 대학 때 먹던 빈대떡 생각이 나 종로 피맛길을 찾아 나섰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열차 집’ 빈대떡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원래 나무판을 기차처럼 늘어놓고 빈대떡을 팔아서 ‘기찻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에 피맛길 초입으로 이사 오면서 정식으로 ‘열차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를 지나는 고관이나 사대부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다닌 뒷길이라 하여 피맛길로 이름 붙여진 이 골목길에는 빈대떡 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술집과 국밥집 등 저렴한 먹거리가 줄줄이 늘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 맛과 향과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면, 노릇노릇한 생선전들을 맛깔나게 구워주시던 시골 할머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국밥을 시장에서 뚝배기 채로 사오신 어머니, 지글지글 구워지는 빈대떡 소리를 친구삼아 함께 떠들었던 대학 친구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 열차집은 더 이상 없다. 피맛길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 그 감각의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공간에는 맛도 향도 없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 서있다. 정겨운 골목길이 있던 자리에는 번쩍거리는 상가가 대신 늘어서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에 ‘피맛골’이라는 간판이 어색하게 서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청진옥, 미진, 청일집 등 익숙한 옛 이름들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어보지만, 왠지 내 기억 속의 맛과 향이 아니다. 깨끗한 실내 공간에 옛날 대문처럼 가게 앞을 꾸며놓은 청진옥의 선짓국은 옛날의 향이 아니고, 새로운 가구와 깨끗한 벽으로 바뀐 청일집의 빈대떡은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미진은 그냥 동네 국수집과 다르지 않다. 같은 주인, 같은 재료, 같은 요리인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에게 피맛길의 선짓국과 빈대떡은 단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이자 내 감각이며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간직한 시간의 맛과 향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 음식들은 더 이상 같은 음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추억의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의 원천을 잃은 것이며, 그와 함께 내 몸속 감각의 기억 역시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며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기억을 넘나드는 감각의 문, 선유도공원 어느 따뜻한 봄날 선유도공원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늘어선 공원으로 들어서니 양화대교를 지나는 차 소리가 어느새 폭포 소리처럼 들린다.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물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콸콸콸, 졸졸졸, 보글보글… 물 솟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어느 대중목욕탕의 기억과 함께 온 몸이 느슨해진다. 붉은 벽돌의 ‘서울이야기’관을 돌아가니 마치 고대 신전의 폐허가 막 발굴된 것 같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이곳은 원래 정수 과정을 모두 거친 물을 송수하기 전에 담아두던 지하 정수 공간이었는데, 테니스장으로 사용되던 지붕 슬래브를 걷어내고 기둥을 그대로 살려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뒤쪽의 ‘서울이야기’관은 정화된 물을 영등포 지역으로 보내는 송수펌프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경사로를 타고 ‘녹색 기둥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마치 인간 군상처럼 줄 맞춰 서있는 기둥들이 나를 맞이한다. 각각의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벌거벗고 있고, 어떤 기둥은 레슬링 선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덩굴 코트를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아랫도리만 가린 채 헐벗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상부 콘크리트 슬래브를 잘라낸 흔적은 사람의 얼굴처럼 각각의 기둥에 다른 표정으로 남아 있다. 원래 지하 정수 공간을 반으로 나누던 벽이 있던 자리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기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기둥을 감싼 담쟁이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손짓하는 듯 살랑거린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선유봉과 채석장, 정수장의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살아나는 것 같다. 선유도는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하여 선유봉仙遊峯으로 불렸다. 뱃길로 연결된 양화나루 쪽 잠두봉蠶頭峯, 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한강의 절경으로 유명하여, 많은 풍류객들이 선유봉을 배경으로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의 ‘선유봉’ 그림을 보면, 가운데 우뚝 솟은 선유봉 자락에 소박한 초가집과 웅장한 기와집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황금빛 모래사장에는 배에서 갓 내린 선비 일행이 걸어가고 있고, 저 멀리 한강에는 양화나루 쪽으로 큰 배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자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자 일본은 제방을 쌓기 위해 선유봉의 암석을 캐내더니,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예 도로를 만들고 파내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본격적으로 한강 치수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후에도 미군은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해갔고, 1962년 제 2 한강교(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지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한은 1969년 서울 생으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한디자인(HAHN Design) 및 ‘생성/생태’ 건축철학연구소 대표이기도한 그는 건축, 철학, 영화, 종교에 관한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해 건축과 여러 분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2009년 ‘젊은 건축가상’, 2010년‘서울특별시 건축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M+, P-House,LUMA, White Chapel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 있다.
  • 시장의 교체와 시정의 변화 : 민선 20년의 흐름을 읽다
    크게 보고 흐름을 읽자 “시장市長보다 시정市政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시정보다 시민市民이 더, 더 중요하다.” 지난 해 출간한 책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마무리 부분에 “좋은 시장 < 좋은 시정 < 좋은시민”이란 제목의 글을 넣어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참한 도시든 아름다운 도시든 정말 좋은 도시를 원하고 그런 도시에서 살고 싶다면 우선은 좋은 시장을 뽑아야겠지만 거기에 멈추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시장이 욕심꾸러기 시장市場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로지 시민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바른 시정市政을 확정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시장이 얼굴이라면 시정은 몸통이다. 시장이 이미지라면 시정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다. 시장 선거 때부터 후보의 됨됨이뿐만 아니라 그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바람이 담긴 정책, 즉 ‘시정’을 면밀히 살펴야 하고, 시장을 뽑은 뒤에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가 약속한 대로 시정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시장으로 하여금 좋은 시정을 펼치도록 하는 일을 누가 할까? 바로 시민이다. 시민뿐이다. 좋은 도시는 오직 좋은 시민만이 누릴 수 있다. 아름다운 도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아름다운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도시다. 그래서 시장보다, 시정보다, 시민이 더 중요한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에 따라 1995년 6·27 지방 선거로 민선 1기 서울 시정이 출범한 이래 민선 5기까지 20여년을 보냈고, 이제 눈앞에 닥친 6·4 지방 선거를 통해 조만간 민선 6기를 열어갈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 시민들은 조순, 고건,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까지 다섯 명을 서울 시장으로 뽑았다. 다섯 명의 서울 시장들이 지난 20년 서울 시정을 이끌어 왔다.시장이 바뀔 때마다 시정 또한 바뀌었다. 미세한 변화도 있었고 아주 큰 변화도 있었다. 연속된 흐름도 있었고, 정반대의 역류도 있었다. 서울 시정을 조금 크게 보았으면 한다. 지난 20년은 꽤 긴 시간이었고 우리의 현대사 격동기의 한 매듭을 지은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다. 시장의 교체와 그에 따른 시정의 변화를 크게 보고 흐름을 읽어보고자 한다. 과거와 현재, 그 흐름을 읽으면서 서울의 미래를 가늠하고 꿈꾸기 위해서다. 민선 1기와 민선 2기 1990년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1995년 7월 1일 민선 1기 ‘조순 시정’이 시작되었다. 부활한 지방자치제도에 따라 시행된 첫 번째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조순 시장과 그의 시정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왜 서울 시민은 조순 후보를 시장으로 선출했고, 시장이 된 그는 어떤 시정을 펼쳤을까? 조순 시장의 ‘개발은 이제 그만’ 초대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조순 시장은 취임식 하루전날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취임식을 무기연기한 채 사고 수습에 전념했다. 두 달 후인 9월 1일 남산 백범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진 뒤 각 부서 업무 보고를 들었다. 도시계획국의 업무 보고 때 용산, 뚝섬, 마곡, 문정 등 서울시 대규모 미개발부지 전략 개발 구상 보고를 듣다가, 아직도 서울에서 이런 식의 개발을 지속할 것이냐며 보고를 중단시켰다. 미래를 대비한 전략적 구상을 당장의 개발 계획으로 오해한 탓도 있었겠지만 서울 시정에 대한 조순 시장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순 시정은 무엇보다 안전과 방재를 중시하였다. 시정 과제의 첫 번째 꼭지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서울’이었다. 40여년 지속되어온 개발 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100여명의 전문가들로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녹색서울계획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환경을 중시하는 환경 정책이 본격화되었고, 문화와 예술과 복지 정책이 강화되었다. 시민단체들의시정 참여 사업을 유도하였고, 교통행정과에 ‘녹색교통계’를 신설하여 보행과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통 정책을 바꾸려 노력했다. 정석은 1962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학사(도시공학) 및석·박사(도시설계) 학위를 받았다. 서울연구원(1994~2006)과 경원대학교(2007~2013)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에 재직 중이다. 북촌, 인사동, 걷고 싶은 도시, 마을 만들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저서로는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저성장시대의 도시정책』(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blog.naver.com/jeromeud)와 페이스북(facebook.com/jerome363)으로 시민 대중과 열혈 소통 중이다.
  • 서울의 오늘을 읽다
    지자체 장을 뽑는 지방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민선 시장 시대가 시작된 이후, 대도시의 행정가는 도시의 구조와 형태, 삶과 문화를 그리는 ‘그랜드 플래너’의 역할을 해왔다. 그들의 선언과 비전에 따라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도시의 큰 밑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대한민국 수도서울은 그 영향이 크고 깊었다. 민선 6기 시대의 도시 정책에는 과연 어떤 철학과 비전이 담기게 될까? 아니 담겨야 할까? 건축, 도시, 조경 전문가들이 ‘시정, 기억, 랜드마크, 거리, 공원’을 열쇳말 삼아 대도시 서울의 오늘을 비판적 시선으로 조명해본 이번 특집은 서울의, 우리의 ‘내일’을 위한 제언이다. 1. 시장의 교체와 시정의 변화 _ 정석 2. 기억이 사라진 도시 _ 조한 3. 위압적 랜드마크에서 수평적 랜드마크로 _ 송하엽 4. 걷고 싶은 도시 서울? _ 이경훈 5. 공원 도시 서울 _ 조경진
    • 편집부
  • [칼럼] 서울, 경계 긋기와 경계 허물기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혹은 고층 건물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나 자신이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천만이라는 많은 인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데 큰 불편 없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서울은 진정 아무 문제도 없는 도시인가 서울의 사대문 안은 600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강남으로 확장된 현재의 서울시는 백제 시대부터 계산하면 2,000년의 역사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서울은 짧게는 600년 동안, 길게는 2,000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 중에서도 한국 전쟁 후 부터 현재까지의 60년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세계 도시로 발돋움한 오늘의 서울로 성장하기까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이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등 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이 있었으나, 이러한 성장통이 있었기에 오늘의 서울이 가능했다. 서울의 변화는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전후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1990년대까지는 대규모개발 위주의 과격한 변화가 주를 이룬 ‘경계 긋기’ 작업이었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친환경적, 친문화적, 친보행적 개발이 대세를 이룬 ‘경계 허물기’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 방향의 전환은 뉴 어바니즘으로 불리는 보행자 중심의 서구 도시 개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방자치제와 지자체장 직선제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표를 의식한 시민 중심의도시 행정이 전국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피부에 와 닿고 가시적 효과가 큰환경, 교통, 경관, 문화, 복지 등이 도시 행정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의 근간이 되는 토지이용계획은 대표적인 경계 긋기라 할 수 있다. 2000년 이전까지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인 토지에 주로 경제적, 기능적 관점에서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녹지지역 등 평면적, 기하학적 경계를 만들고 분리시켜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리한 개발을 관행으로 일삼아왔다. 이러한 무모한 개발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그린벨트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대규모 도시 외곽에 그린벨트(도시개발제한구역)가 지정되었는데, 경계선 안과 밖의 차별적 행위제한에 따른 그린벨트 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린벨트 해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1년 제주도 그린벨트의 전면적 해제를 시작으로 수도권에서도 부분적 해제가 이루어져 개발과 보존의 부자연스러운 구역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의 한강 개발은 수로를 정비하고 둔치를 조성하여 일면 정돈된 강변 경관을 만들었으나, 이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가 되고 말았다. 모든 제방이 직선형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자연 하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 흐르는 곳과 흐르지 않는 곳을 직선적으로 경계 짓고 말았다. 이러한 비생태적 경계 긋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콘크리트의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유연한 자연형 하천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한강공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980, 90년대의 주택지 재개발과 재건축은 저층주거지 한가운데에 고층의 나 홀로 아파트를 만들어 기존 주거지와의 물리적·사회적 경계를 만들고 말았다. 기존 도시 조직의 붕괴와 원주민의 낮은 재입주율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 주도의 ‘도시 재생’ 개념을 도입하여 대규모의 택지 개발보다는 중소규모의 현지 개량 혹은 정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경계 긋기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2000년 넘는 역사의 층위가 공존하고 있는 박물관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강동의 암사동에서는 원시 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한성백제 시대의 몽촌토성, 조선 시대의 왕궁, 도성, 정자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전후 폐허에서 시작해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한옥부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거 양식이 부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다. 따라서 서울은 서로 다른 시기를 대표하는 지역 간의 시간적 경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역사성과 조화성이 충만한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최근 들어 도시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서 만들어진 사회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환경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도시 가운데 특히 서울은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계층 간의 경계가 매우 두껍다고 할 수 있는데, 소외 계층이 평등하게 도시 환경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저소득층 주택과 골목의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시설 개선,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복지 시설의 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개발과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는데, 21세기 들어오면서 이들 경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음은 다행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해야 서울은 진정한 세계 일등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경제성 중심의 개발 행태, 전시성 생색내기 행정,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시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주민, 전문가, 행정가 등 사회 구성원 모두가 뜻을 모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을 모아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계 허물기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빈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버지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환경설계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였고,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환경심리와인간행태』, 『경관분석론』, 『조경이 만드는 도시』, 『도시경관계획론』 등이 있으며, 한국조경학회, 한국농촌계획학회, 한국경관협의회, 한국인공지반녹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을 맡아 조경을 통한녹색환경복지의 평등한 구현과 그린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임승빈[email protected]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에디토리얼] 내 고향 서울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뜨내기일 뿐이다.” 얼마 전 열린 한양 도성 학술회의, 작가 김훈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부산에서 났지만 백일을 갓 넘겨 서울로 이주했으니 내 고향도 서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고 답한다. 서울과 고향 사이에 등호를 넣지 못하는 나는 서울의 구경꾼이나 이방인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참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스물 세 개의 주소가 찍혀 있다. 2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다. 덕분에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 서울의 변화와 발전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내가 서울을 고향이라 말하지 못하는 건 단지 유목민 같았던 이사의 역사 때문일까? 아마도 거주한 장소의 숫자보다는 그곳들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고향의 부재를 낳았을 것 같다. 어쩌면 고향은 공간이기보다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고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힘을 빌려 시간의 역류를 꿈꾼다. 기억은 시간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고향, 그것은 곧 기억이다. 초록의 산야보다 콘크리트 주차장이 더 익숙한 원조 아파트 키드이지만, 나에게도 장소의 기억은 여러 개의 파편으로 조합되어 남아있다. 그러한 단편들의 콜라주가 그나마 나의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은 고향의 매개체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연 날리던 들판이 롯데월드가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의 로데오거리에선 스릴 넘치는 화약 놀이 카니발이 열렸었고, 타워팰리스 자리에선 총천연색 만국기 아래를 달리며 스케이트를 탔다.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이 물리적으로 사라졌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이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고향의 파편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맡에서 아이패드의 스크린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고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옛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2012년에 서울시가 시행한 ‘서울시민의 고향 인식도’ 조사를 보면 매우 놀랍게도 시민의 81.1%가 서울이 고향이다, 또는 고향 같다고 응답하고 있다.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반은 서울 태생이고, 나머지 반은 다른 지역 출신이다. 이들에게 서울은 고향‘이기’보다는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것은 패티김이 노래한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서울의 찬가, 1969년)라는 역설과 다르지 않다. “아,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서울, 1982년)는 이용의 맹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네버 포겟 오 마이 러버 서울”(서울 서울 서울, 1988년)이라는 조용필의 고백도 고향을 갖고자 하는 보편적 욕망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이라 여기고 싶은 건 서울이 육백 년의 역사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다. 산 많고 강좋은 도시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짧은 시간에 일구어낸 기적 같은 경제 발전때문도 아니다. 63빌딩이나 DDP 같은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으로 열망하는 건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이 일상생활의 현실과, 또 그 기억과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그의 고향 풍경과 삶을 담은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우리 자신의 삶과 정신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자신 외에 도시의 중심부란 없다.” 도시의 핵심은 사람이며 삶임을 강조한 것이다. 도시 자체가 정치의 최전선이었던 지난 10여 년간 서울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꿈꾸었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은 도시의 구조와 형태를 재조직하고 삶과 문화를 재편성하는 그랜드 플래너를 자임했다. 계획가로서의 서울 시장들, 그들이 선언하고 추진해 온 서울의 비전과 대형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희망과 어떻게 접속해 왔는가? 이번 호의 서울 특집은 이런 의문에서 기획되었다. 애초에 구상했던“그들의 서울, 우리의 서울”이라는 주제는 “서울의 오늘을 읽다”로 축소되었지만, 그들의 ‘세계 도시서울’, ‘걷고 싶은 서울’, ‘디자인 수도 서울’, ‘공유도시 서울’, ‘푸른 도시 서울’이 서울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정석,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의 조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이경훈,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송하엽,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의 조경진 등 조경, 건축, 도시 분야의 베스트셀러 필자들이 이번 특집에 흔쾌히 참여해 주셨다. 이들은 시정市政, 기억, 거리, 랜드마크, 공원을 단면으로 잘라 건강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 살이를 디자인해야 할 우리 전문가들의 과제를 드러내 주고 있다. 김훈은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나는 내 고향 서울이 만인의 … 고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타향사람들아, 서울이 당신들의 고향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부산시민공원이 남긴 것
    특집의 원고 청탁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하야리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금연휴의 다음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일찍 부산에 도착한 사진작가는 그 연휴에 엄청난 인파가 부산시민공원에 몰렸다고 전했다(그래서인지 이달의 사진에 사람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개장 직후라지만 우리나라 도시 공원의 인기가 이렇게 높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5월의 부산은 더웠다. 공원을 걷는 연인들이 그늘을 찾으며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치마다 이미 주인이 있어 앉을 자리를 찾아헤매는 이들의 조급한 눈초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늘이 좀 부족한 것 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공원의 나무야 자랄 것이고, 그늘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공원이라 그런지(?) 공간보다는 시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인의 로망인 저 푸른 잔디밭을 둘러싼 각종 놀이 시설에서, 바닥 분수에서, 미로 정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공원의 시설은 무료이니 웬만한 테마파크 못지않은 매력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람을 쐴 때 대개 바다를 찾는다. 그런데 내륙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섰으니, 이 새로운 유형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공원 문화도 학습하며 형성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 시민들은 부산의 유일한 공간에서 공원 문화를 탐색하는 단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본 후 공원의 북문으로 나서는데, 지금은 아주 일부만 남은 캠프 하야리아 시절의 담장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의외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100여 년간, 부산 시민의 지척에서, 이 큰 공간이 저 담장 아래 꽁꽁 숨겨져 있었겠구나 싶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 특집의 두 필자인 김승남 사장과 강동진 교수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하야리아공원포럼을 통해 오랫동안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에 노력해 온 만큼 현재 공원의 모습에 아쉬움도 컸다. 특히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토양 오염을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인 하펜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승남 사장은 독일에서도 역시 기름이 유출되었으나 5년에 걸쳐 천천히 치유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부산시민공원의 경우는 ‘싸고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덮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물들도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부재를 새것으로 바꾸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안쓰럽다. 디자인의 완성은 디테일이 아니던가. 옛 건물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겠지만,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하야리아 담장의 파편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장소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군 기지의 토양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반환되는 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는지,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떻게 치유와 보존을 병행 혹은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에는 기억의 숲이 조성되어 있다. 캠프 하야리아 곳곳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곳에 모아 가식해 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된 공간이다. 개인적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산시민공원에서 지금 자연스러운 경관은 이렇게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대 내부의 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와 부전역 사이에는 삼각형 모양의 주거 지역이 쐐기처럼 부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효율적인 공원 토지 이용’과 뉴타운 계획을 이유로 이 주거지역을 철거하고 공원 부지로 편입시켜 부지를 정형화했다. 이를 두고도 두 필자는 입을 모아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 오밀조밀한 주거 지역이 남았다면, 독특한 상업 공간과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 가며 공원의 경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없애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노력으로 기존의 계획을 변경시켜 몇몇 건물을 남긴 것도 의미 있는 결과다. 무엇보다 부산시민공원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남은 듯하다. 여하튼 부산의 시민들은 공원의 탄생에 크고 작게 기여했고,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도 그 성과의 일부다. 이 경험은 부산에 남아있는 다른 많은 것, 폐선부지나 워터프런트(북항), 달동네 등에서 다시 진화하리라 믿는다. 부산시민공원을 담은 6월호 특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용산공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때,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강하게 남은 지금,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닫고 싶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매혹의 공간, 정원을 이야기하다 9인의 정원 디자이너가 펼친 가든 토크
    정원 디자이너 9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올해 설립된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정원학연구센터(센터장 조경진)가 ‘정원문화 심포지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판을 깔았다. 부제는 좀 길다. ‘Garden Talk: 매혹의 공간, 정원을 디자인하다.’ 그 밑에 설명이 한 줄 더 달려있다. ‘아홉 명의 디자이너의 정원 이야기.’ 9인의 발표자는 30대 신진 디자이너부터 50대 중견 디자이너까지 연령대만 다양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숲 같은 대형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부터 설계 교육과 실무를 병행하는 대학 교수, 여러 프로젝트에서 색다른 플랜팅 디자인을 선보인 정원 디자이너, 쇼 가든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정원 설계사의 대표, 정원은 물론 인테리어 성격의 공간까지 통합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까지, 활동 무대도 경력도 다양했다. 그들이 풀어낸 정원 이야기도 개인 주택 정원부터 공공 정원, 전시회까지 그 폭과 결이 다채로웠다. 지난 5월 8일 고양국제꽃박람회와 코리아가든쇼가 펼쳐진 일산호수공원 내 플라워컨퍼런스룸에서 만난 정원 디자이너들의 9인 9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9인 9색 정원 이야기 “우리의 도시는 가꿈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한 정욱주 교수(서울대학교)는 복지관 정원 두 곳과 보육원 정원 조성 사례를 소개했다. 본지 4월호 특집 “다시, 정원을 말하다”에 “어느 정원의 8경”이란 제목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어울누리뜰’(지적장애인복지관)은 일반적인 개인 주택 정원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엄연한 정원이다. “가꾸는 도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그의 발표는 정원의 범주와 정의가 확장되고 있으며, 정원의 핵심 키워드인 가꿈이 왜 도시로 확산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아예 스몰 퍼블릭 가든이란 용어를 언급하며, 식물원이나 미술관처럼 공공이 만들었으나 법적으로 공원으로 분류되지 않는 곳, 개인이 만들었으나 공공에게 개방된 장소에 만들어지는 정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공 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의 지난함에 대한 그의 위트 넘치는 발표도 흥미로웠지만, 공공 정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그가 제시한 여러 근거(커뮤니티 활성화, 범죄율 저하 등)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의 발표 제목이기도 했던 “열린 정원, 공공 정원”이 도시를 풍요롭게 하리란 기대감도 싹텄다. 이어진 발표에서 이재연 소장(조경디자인 린)은 자신이 디자인한 세 곳의 정원을 소개했다. ‘삶 속의 정원, 일터의 정원, 장식적인 정원’으로 구분된 정원 사례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전달했지만, 그 정원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소개된 에피소드는 이미지에서 얻을 수 없는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전달했다. “오래된 정원은 가족사의 기록이다. … 때로 정원은 식물에대한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 정원은 시간이 완성한다.” 특히 1년 동안 경관이 변화하는 모습을 4계절 9절기로 나누어 디자인을 한다는 대목은 꽤 인상적이었다(그가 소개한 작품 중 한 곳은 이번호 48쪽에 수록되었다.) “때론 나뭇가지 하나가 정원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한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한 김용택 소장(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은 “도시 정원의 유형과 디테일”이란 제목 하에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가는지를 찬찬히 소개했다. 마치 원래 그러한 지형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속 정원의 모습이 섬세한 지형 조작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설명에서는 디테일의 중요성이 달리 보이기도 했다. 우현미 소장(디자인 알레)은 다채로운 오브제를 갖춘 쇼룸, 실내외 조경, 플라워 & 인테리어 데커레이션, 디스플레이 등 복합적인 디자인 솔루션을 제안하는 디자이너답게 현대백화점 옥상 정원을 비롯한 독특한 상업 공간 정원 사례를 소개했고,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네 개의 정원, 두 개의 질문”이란 타이틀로 개인 정원과 공공 정원(하나는 전시회)을 디자인하면서 각각 맞닥뜨렸던 근본적인 질문 두 가지를 던졌다. ‘당신이 꿈꾸는 자연은 무엇입니까’는 “통제 가능한 자연과 야생의 거친 자연”을 원했던 각기 다른 개인 정원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며 마주했던 물음이고,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입니까’는 한 사람의 꿈보다 여러 사람에게 의미 있는 자연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디자인한 공공 정원 작업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는 한옥 정원 한 곳과 가든 카페 한 곳을 디자인했던 경험을 나누어주었다. 특히 제대로 된 한옥 정원 사례가 많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가 소개한 율수원 디자인 과정은 그 의미가 더 커보였다. 또 사옥 1층을 가든 카페로 디자인한 사례는, 자신이 디자이너이자 클라이언트였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디테일 실험이 흥미로웠다. ‘화무십일홍’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작업을 한다는 조혜령 소장(정원사친구들)은 “식재 계획시 꽃의 화려함만을 고려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정원의 즐거움이 시각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후 자신만의 ‘정원 문화 사용법’을 들려주었고, 최윤석 대표(그람디자인)는 이제 국내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쇼가든에 얽힌 경험담을 전했다. 가장 대표적인 과일인 사과의 경우, 사람들이 사과 열매는 잘 알아도 정작사과나무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어서 쇼 가든에 일부러 포함시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색다른 아이디어와 접근방식에 시선이 쏠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든과 힐링은 같지 않다. ‘가드닝’과 힐링이 같다”는대목을 힘주어 강조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코리아가든쇼를 둘러보는 내내최윤석 대표가 이야기한 “정원은 늘 우리 곁에 있던 것이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남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