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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절제하면서도 다양하게
    프로젝트 또는 공간의 성격에 따라 최대한 절제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절제된 틀이나 표현 안에서 최소한의 변이를 통해 어떻게 단조로움을 탈피할 것인가가 이러한 경우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사진의 공간은 이러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사례다. 어두운 색상의 화강석 포장재를 간결하게 배치했는데, 두 가지 규격(30 × 150cm, 7.5 × 37.5cm)의 화강석을 활용해 미묘한 띠를 형성했다. 포장석은 틈새를 접합하지 않은 오픈 조인트open joint로, 포장석끼리 최대한 밀착하도록 손으로 배치한hand tight 디테일이다. 30cm 너비 모듈의 화강석 띠 중 중앙의 한 개 열은 줄무늬 패턴의 스테인리스 스틸 그레이팅을 배수로의 덮개로 설치했다. 7.5cm 너비 모듈의 화강석 띠 중심을따라서 교목을 일정한 간격으로 식재했는데, 수목 보호대tree grating에는 배수 그레이팅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재료와 디자인을 적용했다. 재료와 디자인 언어를 최소한으로 제한해 의도적으로 간결하고 조용한 공간을 조성했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9호(2017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조덕순 풀꽃갤러리 아소 관장 풀꽃의 문화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날 아소갤러리를 찾았다. 대구의 강남인 수성구 한복판. 풀꽃과 야생화를 위한 전용 갤러리, 아소는 전혀 전원적이지 않은 도심 한가운데 있다. 그날 갤러리 내부에는 일곱 점의 풀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크지 않은 건물임에도 각자에게 주어진 공간이 상당히 넉넉하다. 야생화라니, 우리 산야 어디선가 피어나고 있을 너무도 흔한 미물이건만. 여느 수목원의 꽉 찬 온실을 짐작하던 나에게 아소는 반전이었다. 철과 금, 콘크리트와 같이 변치 않는 것들을 경외하던 때가 있었다. 아니, 그리 먼 예전도 아니다. 아무리 조경에 연을 둔 젊은이라 할지라도 이삼십대에 풀과 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느끼는 건 사실 무리다. 변명이지만,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글쎄, 인생의 반이라는 불혹을 넘겨서인지 혹은 그다지 매혹될 대상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이제껏 아무 감흥 없이 지나치던 당연한 것들이 눈물 나게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 전봇대 밑에 오밀조밀 돋아난 풀이라든가 깜박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노을빛이라든가…. 아끼는 사람에게, 그리고 초대를 받았을 때 꽃을 선물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인 것 같다. 불과 얼마 후면 사라져버릴 그 꽃의 아무 것도 아니게 찬란한 순간을, 그 덧없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9호(2017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정원 탐독] 정신과 육체를 치유한 안달루시아의 정원
    안달루시아에서 정원을 묻다 한 시간 넘게 차창으로 낯선 풍경이 흐른다. 여행자의 낯선 시각이 더해진 탓이겠지만, 덮어주는 나무도 없이 맨흙이 드러난 채 눈앞에서 벌떡 일어선 산맥이 심장을 쿵 소리 날 정도로 떨어뜨린다. 이 마음의 서늘함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척박함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서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돌산에 줄 맞춰 심어 놓은 올리브나무가 끝도 없다. 가까이 할 수 없게 막아서는 자연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때론 달래며 공존을 지속해 오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자연만큼이나 경이롭다. ...(중략)...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환경과조경 349호(2017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라이언 집으로 가는 길
    구글 어스로 고향 집을 찾은 실화를 그린 ‘라이언’을 보고나면 새삼 어릴 적 동네가 궁금해진다. 로드뷰로 찾아보니 초등학교 때 살던 동네가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다. 작은 마당이 있던 우리 집은 큰 대문 집 옆으로 난 골목의 네 번째 집이었다.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거나 연탄재를 눈에 굴려 이글루를 만들며 놀았다. 술래잡기, 배드민턴, 고무공으로 하는 미니 야구, 골목에서 놀 거리는 늘 풍성했다. 셔틀콕이나 고무공이 큰 대문 집 담장을 넘어가면 가슴 졸이며 벨을 눌렀다. 커다란 개가 컹컹 짖어댔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나와 남동생은 늘 함께 놀던 두 번째, 세 번째 집 남매들과 술래잡기를 했다. 캄캄할 때까지 놀다가 우리 집 남매가 서로 충돌해 동생 이마가 찢어지고 내 앞니 두 개가 부러진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옆집 오빠는 훗날 공군 사관생도가 되었는데, 어른이 된 한참 후까지 내 가짜 앞니를 놀렸다. 그 모든 추억이 ‘래미안’이라는 새 이름표를 달고 봉인되어 있었다. 영화 ‘라이언’의 주인공은 들판과 골목과 집이 25년 후에도 예전 그대로 남아있어서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구글어스로 주인공이 예전 기억을 확인하는 장면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나의 작은 골목을 떠오르게 만든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실화 ‘스노든’은 미 국가안보국의 불법 개인 정보 수집을 폭로한 내부 고발자의 이야기다. 이메일이나 문자뿐 아니라 SNS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고 노출되는 사생활이 정보 수집의 유용한 소스가 된다는 사실, 공포 영화보다 더 오싹하다. 스노든을 보고나면 당신은 반드 시 노트북 카메라에 테이프를 붙이게 될 것이다. * 환경과조경 349호(2017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시화: 시가되다' 인류학적 현장 연구와 예술
    ‘작가’ 또는 ‘예술가’를 모집하거나 초대하는 일은 주로 전시나 예술 프로젝트를 위한 경우가 많았지만, 주지하다시피 ‘도시재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프로젝트를 위해 작가 또는 예술가를 모으는 사례가 최근 몇 년 들어 늘어났다. 주로 지역 미화와 활성화, 또는 지역 커뮤니티를 위해 예술가를 동원하는 경우다. 여기서 작가/예술가는 일종의 사회복지사/사회적 노동자social worker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의 정체성을 예술가‑사회적 노동자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이들이 ‘예술가’로 초대받아 ‘사회복지사’의 일을 하게 되는 경우 예술가는 심각한 정체성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예술가를 ‘예술가’로서 초대해 ‘사회복지사’로서 일해주기 바라는 주체와 만날 경우, 예술가와 초대 주체 간에 불편한 관계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 관계가 일어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종종 ‘도시재생’ 또는 ‘문화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때로는 실질적인 ‘재생’을 위해, 때로는 가시적인 재생은 포기했으나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기 위한 전국 방방곡곡의 지역 리서치 사업에서 예술가들이 일종의 예술가‑연구자로 활동하게 되는 경우다.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환경과조경349호(2017년 5월호)수록본 일부
    • 진나래 [email protected] / ‘일시합의기업 ETC’, ‘잠복자들’ 공동대표
  •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 3월 3일~5월 7일,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조경이나 건축, 도시를 전공한 학생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용어 ‘용적률’.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물 연면적 비율을 의미하는 이 몇 자리 숫자는 신문의 부동산란이나 TV 뉴스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용적률이 높다는 것은 한정된 토지에 더 넓은 면적을 지닌 건축물을 세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건축물의 투자 가치, 즉 돈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서울은 용적률을 놓고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소비자(토지, 건물 소유자)는 제한된 부지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급자(건축가)는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자신의 설계 철학을 드러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통제자(정부)는 이들이 법과 제도를 어기지 않는지 감시한다. 세 선수는 땅, 법, 건물을 놓고 지난 50년간 어떤 게임을 벌여왔을까.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이하 용적률 게임)’에서 그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중략)... *환경과조경349호(2017년 5월호)수록본 일부
  • 416안전공원 상상 공모전 스튜디오 M.R.D.O의 ‘하늘로 오르는 304개의 선들, 304개의 빛들’ 대상 수상
    지난 4월 20일 ‘세번째 416 봄을 준비하는 사람들(세월호 참사 3주기 안산지역 준비위원회)’이 주최하고 ‘416안산시민연대’가 주관한 ‘416안전공원 상상 공모전’의 결과가 발표됐다. 416안전공원 상상 공모전은 세월호 참사 사상자를 기억하기 위한 공원 조성에 대해 논의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마련된 아이디어 공모전이다. ‘모두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라는 주제로 공원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것이 이번 공모전의 목표다. ...(중략)... *환경과조경349호(2017년 5월호)수록본 일부
  • 드론-VR 융합 기술, 조경 분야 활용 가능성 높다 황동규 마을숲수목생태연구소 대표
    가상현실VR이나 사물인터넷IoT 등 최근 주목받는 첨단 기술을 조경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첨단 기술을 결합해 조경 관련 자원 조사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황동규 대표(마을숲수목생태연구소)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황 대표는 2014년부터 드론과 VR 기법을 결합해 식생, 문화재, 농촌 자원을 조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한 대상지만 80여 개소에 달한다. 그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마을숲을 보존하기 위해 드론 촬영을 시작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노거수는 단순히 오래된 나무가 아니라 역사가 담긴 식생의 표본이다. 마을숲 같은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기록화 작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드론 촬영만으로는 대상지 전체를 담기 어려웠다. 그래서 찾게 된 기술이 바로 VR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9호(2017년 5월호)수록본 일부
  • 디자이너의 상상을 현실화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황지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대개 수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건물 구성 요소의 형태가 복잡할수록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만에 당신이 원하는 집이 뚝딱 완성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패브리케이션fabrication 기법 덕분이다. 이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을 총칭하는 말로, 현재 캐드CAD 같은 프로그램으로 만든 3차원 도면을 입력해 입체적인 물체를 만들어내는 3D 프린팅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지금은 건물 구성 요소를 3D 프린터로 만들어 조립하는 수준이지만, 미래에는 건물 자체를 3D 프린터가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세운상가에 이 같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기술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서울시의 ‘다시·세운 프로젝트 창의제조산업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조성된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3D 프린터, 레이저 컷, 대형 CNC 장비로 원하는 것을 만들어 볼 수 있다. 과연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조경, 도시, 건축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세운상가 개방형 디지털 제작소에서 각종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관련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황지은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중략)... *환경과조경349호(2017년 5월호)수록본 일부
  • [편집자의 서재] 당신의 사물들
    “질문 하나. 그것은 내가 걸을 때 함께 걸으며, 내가 멈추면 함께 멈춘다. 그것은 여행의 친구이며, 카메라와 어울리고, 빛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내게는 콤플렉스다. 질문 둘. 또 다른 그것은 무언가를 바로 잡고, 매끄럽게 하며, 살을 붙인다. 그것은 두근두근 긴장감의 시작이자 마침표이며, 울분과 짜증 유발자이다가 어느 순간 작은 희열을 안겨주며 제 할 일을 마친다. 그리고 내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남자 K는 내가 던진 두 가지 질문에 5분 만에 답을 올렸다. 1번은 담배, 2번은 펜이라면서. 1분 후 S는 선글라스와 키보드(혹은 펜)라는 답을 올리며 확신에 찬 어투로 덧붙였다. “내가 둘 다 맞췄지!”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여자 K와 P는 둘이서 상의를 했다며 역시 선글라스와 펜이란 답을 주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L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대신 그는 책상 우측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20여개의 유리병 중에서 수십 자루의 검정색 빅Bic 볼펜이 담겨 있는 투명한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빅 볼펜만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땐, 볼펜들이 너무 깨끗해서 새것을 모아 놓은 줄로만 알았다. 유리병의 진공 기능 때문일까? ‘수십만이 넘는 글자, 어쩌면 수백만에 육박하는 점과 선과 면의 기억이 그 유리병에 박제’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 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였다(유성 볼펜의 수명은 약 1,000에서 1,500m 정도다). 그와 마주했을 때에는 ‘디자이너는 역시 예민한 존재들’이란 생각만 얼핏 했었다. 그는 요즘엔 폴 스미스Paul Smith 볼펜으로 갈아탔다며 한참 동안 자신의 도구에 대한 추억을 풀어 놓았다. 그렇게 『당신의 사물들』에 대한 독회는 각자의 ‘나의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두 명의 K와 S, L, P 그리고 나는 한 손에는 『당신의 사물들』을 들고, 머릿속에는 나만의 사물 두 가지에 대한 추억을 담은 채 L의 사무실에 모였다. 빅 볼펜으로 꽉 채워진 유리병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수집벽으로 이어졌다. 여자 K는 빈 상자로만 집 안의 벽 한 면을 채워놓았다고 한다. 쓸모를 다한 ‘빈’ 상자가 서로 어울려 무언가 새로운 패턴을 구축하는 걸 바라보는 것이, 그저 즐겁단다. 아마도 새로운 상자가 들어오면 기존의 상자 중 어떤 것은 빠져나가거나 새로운 위치를 부여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패턴의 조합이 탄생할 테고. 나로선 상상하지 못한 취미(?) 활동이다. 그녀의 또 다른 수집벽은 다 쓴 몽당 색연필 모으기로 밝혀졌다. 설계를 처음 시작한 대학교 때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 수백 자루가 넘어서 세 박스를 빼곡 채우고 있다며, 증거 사진을 내보였다. 마음이 짠했던 대목은, 어느 순간부터 몽당 색연필 박스가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다는 ‘고백’이었다. 설계 도구와 환경이 달라진 탓이다. 아날로그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몽당 색연필 모으기라는 수집벽을 방해했다는 죄로, 우리 일동은 제도판과 결별한 설계 환경을 구박했다. 다양한 스케일의 빵빵이에 대한 추억이 양념으로 곁들여졌고, 그녀가 선호하는 색연필 브랜드가 프리즈마Prisma임도 드러났다. 나는 선호하는 문구 브랜드가 있었던가? 두 번째 독회 모임을 시작하며, 여자 시인 49명이 함께 쓴 『당신의 사물들』을 읽은 후 각자의 사물들을 두 가지씩 꼽아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사물? 내 인생의 사물? 가장 기억에 남는 사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물?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물?’ 아마 이 책의 글쓴이 49명도 편집부의 기획 의도를 처음 들었을 때,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앞서 이야기한 빅 볼펜이나 유리병, 상자나 몽당 색연필처럼 사물과 수집벽은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렇다면 수집벽과 무관하면서 내게 유의미한 사물은 무엇이 있을까? 아련한 추억, 강렬한 집착, 씁쓸한 기억, 소중한 소유, 색다른 경험을 동반한 사물들도 있을 것이다. 약과 베개를 꼽은 P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복숭아 씨앗 베개라는 신문물을 우리에게 전파했다. 베기만 해도 머리가 시원해지는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임상 증언과 함께. 도장과 함께 통상적으로 사물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사무실을 꼽은 남자 K도 ‘소중함’과 ‘사물’이 왜 자연스럽게 켤레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건 S의 아빠의 일기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가 아닌 아빠의 유품인 일기장이 담겨있는 보자기를 풀지 못하고 있다며,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정조는 『당신의 사물들』에서 아버지의 숟가락을 떠올린 김소연 시인의 그것과 닿아 있다. ‘사물거리다’라는 동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 그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아리송한 것이 눈앞에 떠올라 자꾸 아른거리다’이다. 당신에게는 자꾸만 떠올라 아른거리는 그 무엇이 있는가? 『당신의 사물들』은 바로 그 사물들의 존재를 곱씹게 해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었다. 특히 맨 앞에 실려 있는 허수경 시인의 ‘손삽’만으로도 책값 12,000원의 보상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녀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손에 들면 딱 적당한 삽 하나. 늘 꽃삽이라고 불렀다.” 첫머리에서 던진 두 가지 질문은 내가 고른 두 개의 사물에 대한 힌트였다. 그들과 그녀들의 답은 절반만 맞았다. 첫 번째는 모두의 예상대로 선글라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나는 선글라스 없이 사진 찍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콤플렉스를 가려주는 선글라스는 그래서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물이다. 두 번째는 펜은 펜인데, 빨간펜이다. 이십대 후반 이후로 교정, 교열, 윤문을 보는 내 손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물이다. 심 굵기가 0.5, 0.7, 1.0 등 각기 다른 수성 볼펜과 유성 볼펜은 물론이고 젤리펜과 플러스펜까지 대여섯 종류의 빨간펜이 손과 가장 가까운 곳에 늘놓여 있다. 나름 각각의 쓰임도 따로 있다. 색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빨간펜만은 입사 이후 언제나 내가 문방구에서 구입해 썼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다음 독회할 책은 S가 추천한 『반란의 도시』다. 이제 ‘나만의 도시는 어디일까?’란 숙제를 풀어야 할 차례다. S가 애착을 넘어 집착하는 손톱깎이란 사물을 도시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녹여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은,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