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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축조경관
    엽서자연1 언제부턴가 지하철 역사에는 지방 자치 단체 홍보 포스터가 여기저기 걸려 있다. 저마다 지역색을 진하게 드러내는 관광 아이템을 앞세우고, 정감 있는 캘리그래피로 쓴 흥겨운 문구도 빠지지 않는다. 거의 모든 포스터의 배경은 그 지역에서 연중 가장 멋진 날에 극적인 조망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채도를 한껏 높여 촌스러워 보이는 사진도 있지만, 몇몇 사진은 우리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지명이 생소하더라도 당장 열차표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그곳에 가면 과연 사진 속 그 경관을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선명한 사진 속 아름다움은 머릿속에 분명한 하나의 자연 경관으로 각인된다. ...(중략)... 1.영국의 비평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Problems in Materialism and Culture』(Verso, London, 1980)에서 “자연이란 언어 중 가장 복잡한 단어다(Nature is one of the most complex words in language)”라고 했듯이 자연을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humanity, culture) 이외의 것(otherness)”을 공간 환경을 다루는 이 글에서의 의미로 줄여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 환경의 반대 성격의 대상’이 될 것이다. 도시와 이격되어 물리적,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자연환경이 주가 되는 장소 또한 이 글에서 의도한 자연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그룹(SWA Group)에서 다양한 성격의 설계 및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조경가협회상(ALSA Honer Award),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공동 설립하고 L.A., 센젠, 상하이에 이어 서울 오피스를 꾸려 나가는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콘크리트의 가능성 4 - 인프라스트럭처
    사진의 공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콘크리트를 마감 재료로 사용했다. 뒤쪽 고가 도로 구조물과 왼편의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계단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행로에 초점을 맞춰보자. 차도와 인접한 약 3m 남짓한 폭의 보도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인도에 사용하는 현장 타설 콘크리트cast-in-place concrete로 마감했다. 현장 타설 콘크리트 보도는 약 2.4m마다 균열 조절 줄눈을 배치해 온도 변화에 따른 재료의 갈라짐을 예방했다. 보도와 인접해 약 4m 폭의 산책로가 있는데, 인도의 균열 줄눈과 동일한 이음매를 가지고 있어 언뜻 보면 같은 현장 타설 콘크리트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산책로는 일정한 크기의 모듈로 제작된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판이다. 이 판은 캔틸레버 구조로 바다 위에 떠 있으며, 오른편의 도시와 왼편의 부두pier 시설을 연결한다. 각각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모듈에는 일반 벽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유리블록이 끼워져 있다. 유리블록은 모듈의 수평 방향과 32도 기울어진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기울어진 레이아웃에 따라 이음매와 만나는 부분의 유리블록들은 크기를 짧게 변형하거나 생략했다. 유리블록의 모서리가 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스테인리스 스틸로 프레임을 짜 맞추었고, 유리블록의 아래를 뚫어 콘크리트 판 밑으로 빛이 투과되도록 설계했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엄석만 전 비산 2, 3동장 백만 원의 도시재생
    지난해 대구 비산동 골목 정원을 자주 찾았다. 학생들과 답사를 갔고, 몇몇 지인과 시간을 내 구경을 가기도 했다. 타지에서 도시와 조경에 관심 있는 분이 오시면 꼭 보여드리는 장소다. 전주나 부산으로 치자면 한옥마을이나 감천마을 같은 단골 메뉴인 셈이다.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의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에 한 번쯤 공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오래된 콘크리트 골목의 지역성과 서민적인 재료, 때로는 펑키하고 키치한 미적 감각, 하지만 매우 기능적이고 문화적으로 풍부한 뉘앙스를 가진 곳. 감천마을만큼 크지 않고, 그만큼의 관광객도 없지만 이곳의 골목 정원은 훨씬 더 훌륭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혹은 주입된 사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일상적 감각이 외부로 표현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와서 후다닥 벽화를 그려 놓고 사라져버리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같은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
  • [명사의 정원 생활] 헤르만 헤세의 정원, 방랑과 안주를 되풀이하는 자를 위한 영혼의 안식처
    헤세, 독일 지성인의 양심이자 정신적 스승 독일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는 흔히 구도자, 양심의 수호자로 불린다. 자전적 소설이라 평가되는 그의 작품들에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함께 청춘에 대한 그리움, 사랑·평화·자유와 같은 인간적 가치의 회복이 기저에 깔려 있다. 히틀러와 나치주의자의 편협한 민족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광풍 속에서도 헤세는 인간성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자연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스스로 “내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평한 역작 『유리알 유희』에서, 그는 이성과 양식이 고갈된 시대에 지식인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문명사적 해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경제적·기술적 진보의 시대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삶에 관심 가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나치주의가 붕괴된 이후 독일은 물론 전 세계에 그가 인간 정신과 문화의 상징 인물로, 혹은 정신적 스승으로까지 부각된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패터슨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상
    뉴저지 주 패터슨 시에 패터슨(애덤 드라이버 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산다. 인천에 사는 백인천 씨, 수원에 사는 김수원 씨와 마찬가지다(전자는 그 유명한 야구인, 후자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영화는 어느 월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 펼쳐지는 그의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매일 거의 같은 일상이지만 조금씩 다르다. 몇 가지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나긴 하지만 인생의 궤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패터슨은 매일 새벽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일어난다.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준비해 놓은 옷을 챙긴다. 시리얼로 아침을 해결한 후 도시락을 들고 걸어서 일터로 간다. 같은 길을 다시 걸어서 퇴근한 후에는 저녁을 먹고 반려견 마틴을 산책시킨다. 마틴을 묶어두고 바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그의 일주일을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패터슨이라는 도시가 오래 전부터 알던 곳 같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연작시 ‘패터슨’에 대해서도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어제, 한 은사님으로부터 하루 두 줄씩 일기를 쓰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일주일에 두 줄씩이라도 일기를 써야지 마음먹었다. 새해 다짐이란 걸 올해는 한번 해보기로 했다.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하게 되겠지.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 '박제풍경' 전 DDP 갤러리 문, 1월 19일부터 2월 10일까지
    1월 19일부터 DDP의 갤러리 문에서는 유럽, 아시아, 북미, 호주 등 네 개 대륙을 터전으로,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6명의 건축가와 조경가가 ‘박제풍경Stuffed Landscape’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 참여자들은 기획을 맡은 이상대 대표(유나이티드랩)를 비롯해, 『환경과조경』의 편집위원이자 연재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의 필자인 최이규 교수(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존 최 디렉터(John Choi, CHROFI), 송진영 교수(뉴욕 주립대학교 건축학과, 디오이노 건축사무소 대표), 염상훈 교수(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윤태훈 대표(SATHY)다. 큐레이터 이상대는 이들 모두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각기 다른 환경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문화적 충돌과 혼란스러운 감성 가운데 발현되는 ‘작가성’에 전시의 초점을 맞추고 “한국 고유의 유전자를 정의하려 하기보다 ‘현존의 문제’를 관통하는 소통 방식은 어떤 것들인지, 그래서 독특한 입지를 반영하는 나름의 특성들이 무엇인지를 탐문하고자 한다”고 기획의 변을 밝혔다. 참여 작가 모두 베이스캠프로 삼고 있는 도시가 다르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디자이너로서 성장한 탓에 ‘박제풍경’, 즉 “고유의 문화에서 타 문화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박제된 기억의 해석”이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필연적으로 각자에게 다른 이해와 표현 방식으로 드러난다. ...(중략)...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 숨 쉬는 공항, 쉼 있는 공항 풍부한 녹지와 실내 조경을 갖춘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장
    세계로 가는 새로운 관문이 열렸다.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이하 2터미널)이 9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1월 18일부터 운영을 시작한 것이다. ‘인천공항 3단계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2터미널은 그린 에어포트, 에코 에어포트, 스마트 에어포트라는 세 가지 테마를 지닌 공간이다. 이 중 그린 에어포트의 핵심이 조경인데, 랜드사이드landside 시설 설계와 조경 중장기 계획 수립을 통해 구상안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 결과 녹지축을 연결해 향상된 경관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하는 ‘숨쉬는 공항, 쉼 있는 공항’이라는 콘셉트가 도출됐다. ...(중략)...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 [LWI 미래포럼] 4차 산업혁명과 스마트 조경
    매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되는 세계경제포럼WEF의 2016년 주제 ‘4차 산업혁명의 이해’는 많은 이슈를 제기했다. 특히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와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이 발간한 보고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는 미래 사회의 급격한 노동 시장 변화를 예견했다. 이 보고서는 전 세계 65%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주요 15개국의 9개 산업 분야에서 약 510만 개의 단순 노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가 구조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근로자가 습득한 기술 수명이 단축되고 오히려 전략적 전문 직군에 대한 인재 선발 경쟁은 심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변화를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가” 마크 베니오프Marc Benioff는 디지털 다위니즘Digital Darwinism이라고 정의한다. “디지털 적자생존 시대에서 속도는 곧 생존을 의미한다.” 기업과 개인 모두 디지털 고도화에 적응하라는 것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58호(2018년 2월호)수록본 일부
  • [편집자의 서재] 풍금이 있던 자리
    가파른 언덕을 따라 트럭이 오른다. 짐칸에 실린 박스가 탈탈 흔들리고, 조수석에는 서울살이 5년 차에 접어든 나영이 있다. 차창 너머 낡은 상자를 얼기설기 쌓아 올려 만든 듯한 동네의 모습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극은 나영이 이사한 집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되니 멋대로 상상해 볼 따름이다. 뮤지컬 ‘빨래’는 2005년 초연을 시작으로 무려 12년간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지금 당신에게 찾아온 가장 따뜻한 위로”라는 문구에 홀려 극장에 들어섰다가 눈물을 펑펑 쏟고 나왔다. 등장인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과 외국인 노동자. 그들이 혹은 우리가 겪을 법한 이야기를 그리 과장되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게 풀어 자연스레 웃음과 울음을 끌어낸다. 극 중 몽골에서 건너온 솔롱고와 나영은 한 옥상을 공유하며 빨래를 넌다.최저 임금을 받아 방세 내고 생활비로 사용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생활. 지친 나영이 “이런 곳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며 푸념을 늘어놓자 솔롱고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래도 하늘이 가깝잖아요.” 극에 몰입하고 있던 내 고개가 의아함에 기울어진다. 어느새 솔롱고는 옥상 난간을 짚고 아래에 펼쳐진 동네 풍경을 감상하는지 객석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그 커다란 눈에 어떤 희망과 낭만이 가득한데도 의아함은 계속 커져만 갔다. 옥탑방살이 3년 차. 내게 옥상은 세탁기와 빨랫줄이 놓인 자투리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생활 공간일 뿐이다. 물론 처음부터 옥상에 판타지를 품지 않았던 건 아니다. 화분으로 정원을 꾸민다거나, 여름에는 고기를 굽고 맥주를 즐길 수 있도록 테이블을 놓는 꿈도 꿨다. 하지만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옥탑방에 도둑이 들기 시작했고, 우리 집 옥상에도 이끼 낀 수조를 연상시키는 청록색 유리 덮개가 씌워졌다. 도둑 걱정에 잠들지 못하는 날은 사라졌지만, 여름이면 옥상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더운 공간으로 변한다. 옥상으로 창을 둔 화장실도 한증막 같아지는데, 농담 삼아 그 화장실을 ‘지옥’이라 불렀다. 봄과 가을에는 날이 선선해도 미세 먼지를 피해 유리 덮개에 난 창을 모두 닫아야 한다. 빨래는 뜨거운 햇볕 대신 달궈진 공기를 머금고 말랐다. 하늘이 깨끗한 날도 있지만, 창을 열면 건너편 옥상에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기 일쑤다. 어떤 노랫말처럼 옥상 평상에 누워 꿈을 꾸려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옥탑에 살거나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마음 놓고 하늘을 즐길 수 있는 환상적 조건의 옥상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온갖 단점에도 불구하고 옥상은 유명인의 성공기에도 종종 등장한다.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전부 추억이다, 가끔 옥상에서 내려다보던 풍경이 그립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내게도 이 옥탑이 즐거운 추억이 쌓인 공간으로 기억되는 순간이 올까. 아니면 인터넷에 떠도는 말처럼 기억은 희석되고 추억은 미화되는 것일까. 신경숙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의 제목이자 표제작인 ‘풍금이 있던 자리’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하지 못한 편지. 사랑하는 이가 아내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편지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한 여자에 얽힌 기억을 쏟아 놓는다. 지금 자신의 모습과 닮은,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머니를 밀어내고 집안 한구석을 차지한 여자가 미울 법도 하건만, 주인공은 여자를 내내 아름답게 그려낸다. 여자는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음식을 만든다. 쌀보다 보리가 더 많아 식감이 거친 쌀보리밥 대신 “어느 날은 보리를 다 빼고 쌀에 수수를 넣은 밥을 지었으며, 또 어느 날은 입에 쏙쏙 들어가기 좋을 만큼의 크기로 만두를 빚어서 밥 대신 만둣국을 내오기”1도 한다.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는 큰 아이를 위해서 콩을 넣은 작은 주먹밥을 손에 달라붙지 않도록 깻잎으로 하나하나 싸 도시락을 채운다. 갖가지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한껏 아름답게 묘사되고, 그 정성 어린 음식들의 이미지가 여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저만치로 밀어내버린다. 집안일에 지친 여자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본 주인공은 자신도 일에 찌들어 손금이 쩍쩍 갈라진 여자가 아닌, 은은한 향내를 풍기는 “그 여자 같이 되고 싶다”고 소망한다. 하지만 그 추억 사이로 끼어드는 몇 가지 기억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리를 다쳐 몸을 움직이지 못해 살이 찌자 남편에게 버림받은 점촌댁, 힘들 때면 칫솔질을 하며 울음을 숨기고, 잠시 돌아온 어머니가 막냇동생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여자의 모습, 집을 떠나던 날 여자가 주인공에게 건넨 마지막 말 “나처럼은… 되지 마.”2 결국 주인공은 남자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끝내 집을 떠난 여자처럼 주인공 역시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여자에 대한 기억을 계속 추억으로 간직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여자는 오빠들 속에 섞여 있는” 주인공을 알아봐 줬기 때문이다. 남자가 “처음 만난 그 날,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여자들 중에서 감기를 앓고 있는 여자가 바로 저라는 걸 알아줬던 것처럼.”3 아주 사소한 일로도 기억은 추억으로 탈바꿈한다. ‘빨래’의 후반부 솔롱고는 옥상에서 나영에게 프러포즈 반지를 내민다. 둘은 곧 거처를 옮기지만, 그 옥상은 둘도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나 또한 옥상에서 즐거운 일은 없었는지 기억을 더듬다 문득, ‘빨래’가 만들어진 지 10년도 더 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불법체류자임을 약점 잡아 임금을 떼먹는 악덕 고용주, 부당 해고의 두려움에 떠는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에게 쏟아지는 폭언 등이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10년 전 달동네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문제들도 여전하다. 앞으로 또 10년이 흘러도 ‘빨래’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수많은 옥탑에는, 서울 올 땐 꿈도 많았는데, 혼자 사는 엄마한테 편지 한 줄 못 쓰는, 꿈이 닳아 지워진지 오래되어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 청춘들이 또 머물게 될까4 궁금해진다. 1.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과지성사, p.24. 2. 위의 책, p.33. 3. 위의 책, p.28. 4. ‘빨래’의 넘버 ‘서울살이 몇핸가요’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서울 올 땐 꿈도 많았었는데/삼사 년 돈 벌어 대학도 가고/하지만 혼자 사는 엄마한테/편지 한 줄도 못쓰는 내 꿈은 내 꿈은/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지 오래/잃어버린 꿈/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기억이 안 나요”
  • [CODA] 옥상의 시선
    ‘왜 우리는 옥상에 낭만을 품는가.’ 오랜만에 조한결 기자에게 “그러니까 젊은 감성으로, 음… 요즘 핫한 옥상들을 직접 체험해… 맛깔스러운 글로 독자에게 한발 다가서는 어쩌고저쩌고”라며 기획 의도를 설명했더니 돌아온 원고의 가제다. 이미 “서울 자전거 출근기”란 생생한 체험기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모았던 그녀다(『환경과조경』 2015년 4월호 특집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 조 기자가 느릿느릿 그렇지만 그 특유의 감성으로 탐사해 갈무리한 글을 보니 이런저런 기억이 몰려온다. 원서동에서 일하던 시절, 나와 또래 동료들은 시시때때로 옥상에 올라 다투고 울고 화해하고 갖가지 뒷담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 시절 옥상은 대나무숲이자 해방구였다. 그 옥상에 뚫려 있는 구멍이 아래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진. 비밀을 보장하지 못하는 옥상은 더 이상 해방구가 될 수 없었고, 그 뒤로 우리는 옥상에 모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했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대학 교수 P는 “나도 가끔 화장실에서 내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아요. 그냥 속으로 웃었어요. 아마 그 시절 그분들도 그랬을 거예요.”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지는 않았지만 난 그 뒤에도 자주 옥상에 올랐다. 조한결 기자가 썼듯이 “지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중력을 거슬러 오를 만큼 옥상에는 심오한 매력이 있나 보다”. 그 옥상은 무엇보다 도시의 서로 다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게 매력이었다. 눈앞에는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끈 굴지의 대기업 사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 옆의 공원에서는 할아버지들이 크리켓 비슷한 경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돌아서면 창덕궁의 기와지붕이 겹겹이 펼쳐졌다. “우와, 궁궐이 보이는 옥상이라니! 왕보다 높네요.” P가 감탄했다. 옥상은 맨 콘크리트 바닥이었지만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가 올라왔다. 푸르게 흔들리던 잎이 갈색으로 변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덩굴줄기 위로 흰 눈이 쌓이며 한 해가 저문다. 그리고 다시 연두색 잎이 돋기 시작하면, 푸른 잎으로 뒤덮이는 계절을 기다렸다. 그런 기억이 그곳에서 보낸 몇 년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옥상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또 하나 있다. 10여 년 전, 이태원의 지역 연구를 하기 위해 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당시 누군가 해밀톤 호텔의 옥상 수영장이 음악과 술, 디제잉을 즐길 수 있는 클럽풀pool로 유명하다며 한번 올라가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답사하던 차림 그대로 옥상에 올랐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유분방한 외부 공간이 있다니. 머뭇머뭇 둘러보던 나는 구릿빛 피부에 레게 머리, 야자수가 그려진 수영복을 입은 남자들이 바라보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키니를 입고 선탠을 하는 외국인들 너머로 이슬람 사원이 보였다. 아직도 그때 촬영한 사진을 보면, 텍사스촌, 게이힐, 이슬람거리, 아프리카 거리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본토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태원을 그만큼 잘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까 싶다. 그리고 또 인상적인 장면은…. (마감의 초조함을 감추느라)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마지막 에피소드를 찾던 중, 옥탑에서 심리 상담실을 운영하는 L이 떠올랐다. 다짜고짜 L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요즘 옥탑 생활은 어떠신가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그런가요?” (불편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면이 있지. 그래도 독립된 공간이라 좋아.” “혹시 옥상이라 상담에 유리한 점은 없나요?” “마당이 있으니 내담자들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많이 느껴. 하늘과 닿아 있으니 텅 빈 것에서 시원함을 느끼지.” 오호라, (P의 표현을 빈다면) 뭔가 글감을 포착한 직감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 마당을 한번 살펴보고 실내로 들어가겠네요.” “당연히. 특히 남자들은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곤 해.” “옥상 마당을 대하는 데 남녀의 차이가 있나요?” “공간에 대해 남자들이 더 민감한 것도 같아. 구석구석을 살펴본 뒤, 꼭 먼 산을 바라봐.” “어떤 곳인지 파악하고 들어가나 봐요. 저 같으면 바로 목표 지점으로 갈 것 같아요.” “나도 바로 목적지로 가는 편이야.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태초에 남자들은 사냥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기 때문에 내면 깊이 불안이 있어. 그래서 일단 주변을 살피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다면 L에게 옥상은 어떤 장점이 있는지 궁금했다. “땅을 떠나 하늘과 맞닿은 나만의 공간이란 점이 좋지.” 땅을 떠나다니, 르 코르뷔지에는 옥상 정원의 의의를 잃어버린 지면의 회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땅을 걷다 보면 앞만 보고 걷게 되고, 방해하는 게 많잖아. 그런데 옥상에 있으면 그런 게 없어. 대신 내가 찾아가는 느낌이야. 화분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고. 뭐 다 잡초지만.” 이번 특집에 백종현 소장이 쓴 “잡초 정원, 자연 정원”이 떠올랐다. “이름도 붙여 줬어. ‘너!’, 필명은 ‘야!’. 하하, 그렇게 부르다보면 결론은 ‘나’로 돌아와.” “오, 옥상에서 하늘과 만나면서 잡초와 대화하고, 결국 나를 반추하시는군요.” “맞아, 옥상에서 하는 반추는 땅에서 하는 것과 달라. 비교 대상이 없어지거든. 오직 나만 보게 돼.” “우와,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심리 상담과 옥상은 참 어울리는 조합이네요. 이번 호 특집 ‘옥상다반사’에서는 선생님이 일상적 언어로 말씀하신 내용을 전문가들이 어떻게 풀어내는지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