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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재대학교 조경학과, 전문 인력을 배출하는 네 가지 로드맵 구축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배재대학교 설립자의 가르침이다. 배재대학교는 130년의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배재학당이 운영하는 대학이다. 1885년 고종황제에게 ‘대한제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라’는 어명이 담긴 배재학당 현판을 하사받아 국한문과·영문과·신학과 등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대학을 설립했다. 설립자 아펜젤러 선교사의 교육 철학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민족 시인 김소월, 독립운동가 서재필, 한글 학자 주시경이 대표적이다. 배재학당은 현재의 배재유치원,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에 이르렀으며 학당 동문은 10만 명, 대학 동문은 5만 명에 달한다. 그중 배재대학교 조경학과는 1996년 원예조경학부 환경녹지학 전공으로 신설되어 조경 학부생을 모집하고, 조경 전공 대학원 과정을 마련했다. 23년이 흐른 올해는 조경학과로 독립해 건축·예술·디자인대학으로 새롭게 편제되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59호(2018년 3월호)수록본 일부
  • 당당한 홀로서기 “이제 조경학과입니다” 이시영 배재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최근 학과 개편 과정에서 대부분의 조경학과가 통폐합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과 달리 배재대학교 조경학과는 오히려 학부에서 분리돼 ‘조경학과’라는 이름으로 당당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이에 학과장을 맡고 있는 이시영 교수를 만나 학과 분리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Q. 배재대학교 조경학과에 대해 소개해 달라. A. 대전은 인구 150만 명이 넘는 큰 규모의 광역시인데 배재대학교를 제외하면 조경학과가 없다. 그러다 보니 ‘공원녹지기본계획’ 수립 등 대전시의 조경과 관련한 대표적인 역할을 배재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수행하고 있다. 배재대학교 조경학과는 본래 원예학과에서 시작됐다. 약 20년 전 시대의 필요에 의해 원예학과에서 원예조경학과로 변경됐다가, 올해 새 학기부터 원예학과와 조경학과가 분리돼 운영된다. 학과가 생긴 지 20년이 되다 보니 대전시청을 비롯해 5개 구청의 공무원으로 진출한 졸업생이 많다. 지방은 공직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정책 결정이 가능한 인적 인프라도 많다. 산업 분야에도 300여 개 시공 업체에 졸업생들이 포진해 있고, 지역에 자리를 잡은 업체 대표들도 있다. ...(중략)... *환경과조경359호(2018년 3월호)수록본 일부
  • [LWI 미래포럼] 연대를 생각하며 FORUM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자신의 학문 수양 발전 과정을 회고하며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라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흔히 40대를 불혹의 시기라고 한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한국 현대 조경의 나이도 대략 4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한국조경학회가 1972년에 설립되었고, 조경학과의 첫 학번이 73학번이다. 참고로 필자는 1974년생이다. 불혹의 시기를 지나고 있으니, 조경이나 필자나 여러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철학과 방향이 확고해야 하리라. 공자도 15세는 지우학志于學으로 학문에 뜻을 둔 시기라 했고, 30세는 이립而立으로 학문의 기초를 확립하고 마음을 확고히 해 뜻을 세우는 나이라 했다. 불혹을 위해서는 지학과 이립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한국 조경이나 필자의 나이 모두 마흔을 넘었는데, 지학과 이립이 잘 된 것인지 필자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사십대 중반을 맞으며 고민이 많은 필자에게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2013)는 기억에 오래 남는 책 중 하나다. 유시민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핵심은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연대하라”로 압축된다. 인류 최초의 도시라 불리는 우루크의 통치자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도 비슷한 문구가 나온다. “인생의 처음과 끝은 정해져 있으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놀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다.” 유시민은 여기에 ‘연대’를 더한 셈이다. 물론 그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연대를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공동선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연대다. 유시민의 정의에 나오는 ‘공동선’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조경이라는 한 분야의 연대를 꿈꾼다. 특정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 범 조경계의 전반적인 발전을 위한 연대를 지향한다. 범 조경계 내부의 연대는 물론이고, 외부 유관 단체나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이를테면, 철학—와의 연대도 필요하다. 그 동안의 여러 노력으로 어느 정도 체계는 갖추어져 있다. 더 긴밀한 유대가 필요하다. ...(중략)... *환경과조경359호(2018년 3월호)수록본 일부 조동길은 1974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2004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5년 자연환경관리기술사를 취득했다. 넥서스환경디자인연구원(주) 의장이면서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겸임교수다. 생태복원, 생태 조경, 정원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며, 『생태복원 계획·설계론』(2011, 2017 개정) 등 다양한 저술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 [편집자의 서재] 고양이 낸시
    동물은 복잡한 세상을 그리는 좋은 소재가 되곤 한다. 짧지만 권선징악을 압축해 보여주는 이솝우화부터 스탈린의 독재 정치를 풍자한 『동물농장』까지. 특히 귀여운 동물 캐릭터는 아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친근감을 줄 수 있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2016년 개봉한 ‘주토피아(Zootopia)’ 역시 동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편견’에 대해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시작은 평범하다. 토끼인 주디는 경찰관을 꿈꾸지만, 작고 힘이 약한 토끼는 경찰이 될 수 없다는 다른 동물의 비웃음만 산다. 하지만 여느 디즈니의 주인공처럼 주디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인 날쌘 몸놀림을 살려 경찰관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꿈의 도시 주토피아로 발령을 받는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식의 진부한 결말로 마무리될 것 같지만, 아직 러닝 타임은 한참이나 남았다. 영화는 주디가 주토피아에 도착하며 색다른 국면에 놓인다. 우선 주토피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동물(Zoo)의 이상향(Utopia)처럼 꾸며진 도시의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주디가 타고 온 기차부터 사뭇 다르다. 기차에는 햄스터같이 작은 동물이 내릴 수 있는 문, 비버가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문, 주디부터 기린까지 덩치 큰 동물도 불편함 없이 오갈 수 있는 문 등이 마련되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비롯해 사탕을 파는 작은 가게까지, 주토피아의 모든 시설에는 모든 동물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멋진 도시라는 걸 과시하듯 앵글은 화려한 주토피아의 모습을 몇 번이고 강조한다. 하지만 주토피아가 마냥 아름다운 도시인 것은 아니다. 주디가 경찰청에서 처음 맡게 된 임무는 불법 주차 단속. 경찰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동료들은 여전히 토끼는 작고 약하기에 위험한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토끼뿐만이 아니다. 여우는 교활하다는 통념, 육식 동물은 포악함을 숨기고 있다는 믿음 등 평화로운 도시 주토피아의 이면에는 편견이 가득하다. 영화는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로 나누어진 단순한 구도를 사용했지만 여기에 인종, 이데올로기, 성별, 지역, 출신 등 어느 것을 대입해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편견과 줄곧 싸워온 주디가 자신 역시 또다른 편견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영화는 좀 더 입체적이고 복잡하게 분화한다. 나 역시 편견인 줄도 모르고 당연하게 여겨온 일은 없었을까. 영화는 고민에 빠진 관객을 질책하기보다 위로한다. 우리는 “내일도 실수할 거고, 또 실수할 것(I’ll keep on making those new mistakes. I’ll keep on making them every day)”이지만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이든 계속 시도할 것(I wanna try everything)"(각주 1)이기 때문에. ‘주토피아’가 캐릭터 간의 갈등과 눈물 어린 화해의 과정을 통해 주제를 이야기한다면 『고양이 낸시』는 귀여운 에피소드를 통해 편견에 대해 말하는 만화다. 낸시는 고양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천적임에도 불구하고 쥐들이 낸시를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따뜻한 그림과 이야기로 풀어냈다. 가볍지만 때로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붕어빵 봉지를 품에 넣은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본래 트위터에서 한 장 내지 두 장으로 짧게 연재되던 만화가 책으로 출간될 수 있던 힘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쥐들이 고양이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낸시의 귀여움이다. 하얗고 부드러운 털과 분홍빛이 감도는 코. 딱하지만 고양이를 마을에 두면 위험하다며 만일의 일을 걱정하던 쥐들은 낸시를 만나자마자 외친다. “이런 망할! 정말 귀엽잖아!"(각주 2)집단이 이질적인 존재를 받아들일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은 낸시의 귀여움으로 손쉽게 사라진다. 만화이기에 가능한 설정이지만, “이런 망할! 정말 귀엽잖아!”라는 대사에는 쥐들이 고양이가 아닌 낸시 자체를 바라보았다는 의미가 녹아있는지도 모른다. 편견이 없는 어린 쥐들은 더욱 쉽게 낸시와 가까워진다. 후에 낸시가 북쪽에서 온 하얀 쥐가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어린 쥐들은 낸시가 혹여 마을에서 쫓겨날까 걱정부터 한다. 아이들에게 이미 ‘북쪽에서 온 하얀 쥐’나 ‘고양이’는 수식어에 불과하며, 낸시는 배려심이 깊고,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힘이 쎈, 하얀 털이 보드라운 친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와 조금 다르지만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물론 작가의 말처럼 “요즘엔 전혀 위험하지 않은 존재도 자신과 다르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만약 현실이었다면 더 갈등이 심화되고 낸시는 더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낸시에게 “분명히 좋은 친구들이 생길 테고, 그로 인해 행복"(각주 3)해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고양이 낸시』는 복잡한 사회를 단순하게 바라봄으로써 얻는 즐거움을 알려줄 것이다. 참고로 엘렌 심은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동물이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 인간에 대해 배우는 학교를 그린 ‘환생동물학교’를 연재 중이다. 주인을 그리워하는 동물이 가득한 AH-27반 학생들과 선생님을 통해 이번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엘렌 심의 작품 세계가 궁금하다면 ‘환생동물학교’를 통해 따뜻한 그림체로 그려낸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살짝 엿보시길! *각주 정리 1. ‘ 주토피아’의 OST ‘Try Everything’의 가사 일부. 2. 엘렌 심, 『고양이 낸시』, 북폴리오, 2015, p.43. 3. 이지혜, “[고양이 낸시] 엘렌 심 ‘제 고양이도, 독자분들도 낸시처럼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IZE 2015년 3월 23일.
  • [CODA] 기억의 매개체
    지난 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진첩을 찾았다. 부모님이 소중히 보관하고 계신 어린 시절 사진이 담긴 사진첩을 다시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왠지 사진첩이 사라지면 내 유년기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았다. 빛바랜 책장을 넘기니 익숙한 장면들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날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이지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건 당시 거실 커튼의 문양과 소파 팔걸이의 나무 색깔 같은 것들이다. 진짜 그 순간이 기억나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에서 봤기 때문에 기억한다고 생각하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영화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2017)은 기억에 관한 영화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마조리는 남편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 월터와 추억을 나눈다. 마조리의 딸 테스는 홀로그램인 월터를 못마땅해 하지만, 마조리가 세상을 떠난 후 인공지능 마조리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테스는 남편에게 말한다. “기억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야.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야.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아. 그래서 강렬한 기억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끊임없이 조금씩 유실되거든.” 인공지능인 월터는 인간에게 추억을 들으며, (딥러닝을 통해) 점차 실제의 그와 비슷해져가는 것처럼, 마치 진짜 인간과 추억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청혼을 받을 때 보았던 영화가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 아니라 ‘카사블랑카’였으면 좋았겠다는 마조리의 바람을 듣고 기억을 수정하는 인공지능 월터의 모습에서,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왜곡되기(윤색되기) 쉽다는 것을 영화는 드러낸다. 필름 카메라를 쓰지 않게 되면서 더 많은 사진을 찍게 되었고, 휴대 전화의 카메라 기능이 발전하면서 사진 찍기는 일상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 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이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사진을 다시 보며 추억을 되새기는 일의 빈도는 내가 찍은 사진의 수와 비례하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에서도 기억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매체가 필요한 것일까? 개인의 기억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 역시 물리적인 무언가, 이를테면 공간이나 기념비(memorial)에 깃든다. 홀로코스트는 대표적인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각주 1)중 하나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문명권에서 기억은 “세속적인 용어이면서 종교성을 강하게 함축한다.” 영기(aura), 외상(trauma), 애도, 숭고, 정체성, 치유, 정화, 치료, 목격, 증언, 영혼 등은 기억 연구의 이론서에서 자주 보이는 용어이면서,(각주 2)메모리얼의 설계 개념을 설명할 때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기억을 종교적 계율로 강조하는 것은 유대교의 전통이다. “헤브라이어 성경에 항상 이스라엘이나 신을 주어로 하여 동사 ‘기억하다’가 169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이 유난히 강하다고 하는 유대교에서 그것은 전통적으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주로 기억(곧 암송과 제례)을 통해 표출되었다.” 기억은 마치 우리의 ‘살풀이’와 유사한 정화 내지 치유 능력을 지녔고,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벌어진 유대인 대학살은 ‘기억 산업’(기념관, 기념물, 박물관, 공식 행사, 그리고 매체와 문화 산업 등)의 붐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의 집단기억의 핵심이 되어 정체성의 근간이 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는 기억, 외상, 그리고 역사의 개념에 관한 일련의 성찰을 고무했다.(각주 3) 기념비나 기념 공간이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담고 있는 집단기억 역시 윤색될 수 있다. 한 장소에 얽힌 기억들도 재구성될 수 있으며, 기억의 경합 과정에서 대립되는 기억은 제거되기도 하며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기억의 매개체인 메모리얼은 어쩌면 매우 선별적으로 이 정도만 기억하자는, 그리고 나머지는 잊자는 사회적 합의일 수도 있다. 이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이해는 흥미롭다. “미국은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은 만들면서 자국사의 두 본질적인 측면인 원주민의 대학살과 흑인의 노예화는 외면한다. … 이른바 유럽의 팽창 이래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 행해졌고, 특히 1850~1950년의 100년은 유럽 대량학살의 ‘인종적 세기’이건만, 그것들은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이해되고 설명되었다. 식민지인들에게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었고” 그러한 유럽 중심의 담론 질서 속에서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유일무이하고 비교 불가능한 신화가 된다.(각주 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을 신탁통치했던 영국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했다. 얼마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며 대사관을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묵인과 동조 속에 전쟁과 학살은 끝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호에는 영국에서 진행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의 결과를 수록했다. 런던의 빅토리아 타워 가든에 조성될 이 기념비와 교육 센터를 위해 세계적인 건축가와 조경가들이 참여했다. 그들이 펼쳐놓은 아름다운 설계안 외에도, 메모리얼 조성을 주도하는 이들이(혹은 우리도) 무엇을 기억하려 하는지, 또 어떤 기억을 소거하려는 것인지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가 아닐까. *각주 정리 1. 사회심리학자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 속에는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이 내재해 있다고 전제했다. 즉 기억을 소유하는 단위는 개인이지만, 그 개인의 기억은 사회적으로 각인된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 가운데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확인된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기억은 사회화 과정의 산물이다. 최호근, “집단기억과 역사”, 『역사비평』 85, 2003, pp.160~165. 2. 최갑수, “홀로코스트, 기억의 정치, 유럽중심주의”, 『사회와역사』 70, 2006, p.105. 3. 위의 글, pp.103~112. 4. 위의 글, pp.113, 131~132.
  • [PRODUCT] 실내로 들어온 ‘토인 라탄’ 다양한 색상과 형태로 따뜻한 느낌부터 캐주얼한 감성의 공간까지 연출 가능
    국내에서 라탄rattan 소재는 휴양지 외부 공간이나 데크가 있는 정원 등 야외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해외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실내에서도 라탄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토인 라탄’은 이러한 국내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실내 공간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다양한 라탄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국내 주거 공간에 적합한 사각형의 현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의 소파, 테이블 세트뿐만 아니라, 원형이나 곡선이 강조된 제품도 계획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취향에 맞는 제품을 골라 독특한 공간 연출을 할 수 있다. 또한 해외 라탄 제품과 다르게 한국인의 체형에 맞추어 제작했기 때문에 국내 이용자들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토인 라탄 파이버Fiber의 기본 소재는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합성 섬유다. 친환경 소재일 뿐 아니라 햇빛은 물론 수분에도 강하다. 프레임에는 부식에 강한 알루미늄을 사용해 내구성을 높여 빛과 압력에 잘 견디도록 했다. 오염됐을 때 물 세척이 가능하고 무게가 가벼워 관리가 편한 것이 장점이다. 또한 일반적인 브라운, 블랙 계열부터 원색의 파이버까지 다양한 색상의 제품이 마련되어 있어 기호와 공간의 분위기에 맞는 색상을 골라 사용할 수 있다. 형태 역시 다양해 휴양지의 따뜻한 느낌부터 캐주얼한 감성의 공간까지 분위기에 맞게 연출할 수 있다. 앞으로도 토인은 단순한 야외 가구를 넘어 실내외 어느 곳에나 다양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라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힘쓸 계획이다. TEL. 02-533-3720 E-mail. www.toinp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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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옥상달빛
    평범한 도시 남성의 옥상 경험은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공통분모가 가장 큰 옥상의 추억은 흡연이다. 추억보다는 현재진행형의 용도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리처드 클라인을 인용해가며 “담배는 숭고하다” 외친들 이미 담배는 천덕꾸러기를 넘어 공공의 적이다.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여전히 40%를 넘나드는데 도시의 거의 모든 공간에는 빨간색 금연 딱지가 선명하다. 옥상은 그나마 융통과 변칙이 묵인되는 일천만 흡연인의 해방구다. 옥상의 두 번째 추억에는 으레 주먹이 등장한다. “옥상으로 올라와.” 이 짧은 명령문 하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옥상은 군기 잡는 선배 앞에 무릎 꿇는 복종의 공간이(었)고, 학교 폭력의 전시장이(었으)며, 갖가지 명분의 싸움과 결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청소년기에 옥상에서 겪은 사건들을 망각할 능력이나 추억이라 포장할 배포가 없다면, 옥상은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의 공간이다. 세 번째 추억은 현실과 로망의 경계선상에 있다. 많은 이에게 옥상은 아련한 기억 저편의 사랑을 소환하는 가슴 먹먹한 장소다. 뭇 남성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여겼다는 공전의 히트작 ‘건축학개론’. 대학 새내기 서연(수지 분)과 승민(이제훈 분)의 어설픈 두 번째 데이트 장소는 개포동의 어느 아파트 옥상이다. CD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듣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신체의 모든 감각을 무장 해제시킨다. 옥상은 이렇게 이성은 물론 감성마저 마비시키는,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다. 이 셋 중 한둘은 우리 모두가 겪어 온 도시 삶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요즘 옥상 풍경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옥상이 우리 사회와, 동시대 문화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정말 다채로워지고 있다. 옥상에서 화분을 가꾸거나 상추를 기르며 짧게나마 노동의 희열을 맛보는 건 이미 고전이다. 더 진취적인 사람들은 블루베리 농사도 짓는다. 옥상을 이용해 빗물을 모으거나 옥상을 녹화해 기후 변화에 대처한다는 거룩한 명분의 사업도 활발하다. 옥상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이 주는 해방감을 느끼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건 이미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쿨한 곳, 핫한 곳 가리지 않고 도처의 옥상을 카페와 바가 접수하고 있다. 나의 한 페이스북 친구는 주중의 격무를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주말용 옥탑방을 얻은 후 혼자 밥 먹고 술 마시며 빔 프로젝터로 영화 본다는 자랑질 포스팅을 매주 한다.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랄까, 여럿이 옥상을 함께 쓰는 움직임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정쩡하게 버려져 있던 옥상이 도시의 그 어느 공간보다도 다양한 멀티 플레이어 역할을 하며 우리의 라이프스타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옥상을 마음껏 즐기고 살면서 동시에 옥상에서 작품까지 생산하는, 부러운 도시인이 있다. 기자 출신의 화가 김미경은 서촌에 거주하면서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 풍경과 골목길, 서촌의 꽃과 사람들을 화폭에 옮긴다. 동네 친구들 옥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서촌 옥상 화가”라 불린다. 그는 옥상의 매력을 이렇게 전한다. “옥상에서 보는 서촌은 어마어마한 바닷속 풍경인 듯도, 축소된 세계 지도인 듯도 하다. … 옥상에서는 전체 구도가 확연하게 보여 좋다. 동네가 산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어디서부터 길이 시작되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동서남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내가 자리한 곳이 어디인지를 객관화해 볼 수 있어 좋다. 그 새로운 면들이 겹치고 풀리고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선과 면, 그리고 새로운 구도를 찾아낼 때마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펜 터치가 정다운 그의 ‘옥상화’ 엽서를 보노라면 서울의 또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는 옥상이 있다. 연구실에서 다섯 걸음만 내디디면 검박하면서도 화려한 옥상 테라스다. 여느 옥상처럼 어수선하게 방치되던 곳을 동료 정욱주 교수가 정갈하게 디자인해 고쳤다. 꼼꼼한 디테일의 데크, 장방형의 내후성 강판 플랜터, 그 속에 날아와 스스로 자란 이름 모를 야생의 꽃과 풀, 단정한 철제 의자와 여유로운 목제 평상이 전부지만 그 조합의 시너지가 만만치 않다. 압권은 옥상을 향해 달려오는 관악산 풍광과 기운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산 풍경도 아니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니다. 산허리를 바로 눈앞에서 뚫고 대면할 수 있는 도시의 이 비경을 김미경 작가라면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그이처럼 재주가 없고 성실하지도 못한 나는 내가 정해 놓은 한 지점에서 같은 장면의 사진을 이따금 찍을 뿐이다. 옥상에 가만히 앉으면 날이 밝아 오고 해가 저물 때의 기온 변화를 스마트폰이 아닌 피부로 알 수 있다. 땅거미, 오래 잊고 지낸 이런 단어가 다시 생각난다. 도시의 초록이 봄과 여름과 가을에 어떻게 다른지 실물로 배운다. 감각의 연합, 즉 공감각synaesthesia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님을 온몸의 감각으로 직접 느낀다. 어느 가을밤, 나를 삼킬 듯한 달빛을 옥상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옥상의 여러 얼굴을 포착하고자 기획한 특집 ‘옥상다반사茶飯事’를 싣는 이번 호 에디토리얼에는 그 달빛의 감동을 전해야겠다 싶어 제목을 ‘옥상달빛’으로 일찌감치 고정했다. 도무지 전할 방도가 없는 글쓰기 재주, 지면이 춤을 춘다. 애꿎은 네이버에 옥상과 달빛을 쳐 넣으니 가수 ‘옥상달빛’이 제일 먼저 뜬다. 아, 이런 듀엣이 있구나! 뭔가 글감을 포착한 직감이 들어 그들의 음악을 재생한다.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를 듣다가 방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불러내 “너, 옥상달빛 아니? 이 노래 완전 좋은데?” 물으니,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서 이런 답이 돌아온다. “아빠, 아니 교수님, 공부 좀 하셔야겠어요. 벌써 7, 8년 된 노랜데요? 드라마 ‘미생’에도 OST로 나오잖아요.” (얼마 안 됐네. 다 지우고 다시 써볼까? ‘미생’의 명장면들에도 옥상이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든 엮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연재물을 점차 줄여나가면서 특집 중심의 구성, 즉 독립된주제의 단행본 성격을 띤 구성을 실험해 볼 계획이다. 가까운 예로는 자전거를 주제로 특집 원고와 작품을 엮었던 2015년 4월호를 들 수 있겠다. 실험의 첫 걸음으로 이번 호에서는 옥상을 주인공으로 발탁해 보았다. 많은 관심과 피드백 부탁드린다. 참, 이달에는본문 편집 디자인에도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알아차리신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린다.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을 연재하고 있는 최이규 교수(계명대학교도시학부)가 『와이드 AR』과 『건축평단』이 공동 주최한 ‘2017 올해의 발견, 매체기고부문’에서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칼럼] 옥상, 공간이 되다
    현대 도시는 ‘옥상의 숲’이자 ‘옥상의 바다’라 할 만하다.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옥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 옥상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지표 혹은 지상의 눈높이에서는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동선 상에서도 대면할 일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네 눈에서 가깝지 않아 마음에서도 멀어진 것일까. 세상 만물의 의미와 용도를 해석하는 사전에서는 옥상屋上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사전은 옥상을 “지붕의 위, 특히 현대식 양옥 건물로서 마당처럼 편평하게 만든 지붕 위”(표준국어대사전)로 정의한다. 영어로는 루프탑rooftop인데, 이는 “the outer surface of a building’s roof”(Oxford English Dictionary)이다. 결국 옥상은 “건물 지붕의 외부 표면” 정도로서 태생부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운명 지어진 곳일지도 모른다. 지붕에 종속되어 덤으로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담아내는 혹은 담아내야 할 기능에 애초부터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대부분 옥상은 건축물 혹은 건물주主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유동적이고 가변적으로 이용되는 편이다. 건물의 주 기능을 보조하거나 건물을 이용하는 인간의 활동을 거드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가끔은 실내 금연 구역을 피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야외 흡연 구역이 되고, 때로는 가스통, 에어컨 실외기, 물탱크 등 실내에 두면 너무 크거나 위험한 것들을 올려두는 지상의 지하실이 되며, 이따금 꽃과 화단, 평상이나 장독대를 놓아두는 공중의 마당이 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오늘날 옥상은 더 이상 도시의 주변적 존재가 아니다. 이제 옥상은 건물의 일부로서 버려지고 방치되는 공간이 아니라 웰빙, 힐링, 생태 등 사회 문화적 코드와 맞물려 그 자체가 독자적 기능을 지닌 하나의 건축 요소이자 실재하는 공간으로 무한 변신 중이다. 일부러 찾아가는 일이 드물었던 옥상을 언제부턴가 기꺼이 제 발로 찾아 오르고 있다. 지금 옥상은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탄생 중이다. 엄격히 옥상은 ‘허공虛空’이나 다를 바 없다. 적극적인 건축 행위를 통해 구축된 공간이 아니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의도하고 건축된 것이 아닌 까닭에 통상 공간이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옥상에는 벽도, 천장도 없이 오직 바닥만 주어진다. 말하자면 옥상은 공간이 아니라 ‘텅 빈 공중’으로, 건축물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허공이기 때문에 옥상은 어떠한 변신도 포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옥상은 공중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기온, 바람, 습도 등 외부 환경에 상대적으로 민감하고 방수, 환기, 채광 등에서도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옥상은 빛이나 공기, 온도 등과 원초적으로 교감을 이루는 장소로 거듭날 여지가 있다. 옥상의 비존재성 혹은 비물질성은 역설적으로 가꿔지고 채워질 수 있는 옥상의 잠재력을 웅변한다. ‘자연과의 열린 만남’이라는 내재적 유용성이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강화된 형태는 정원庭園이 된 옥상이다. 도시의 일반 옥상이 ‘녹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의 모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공중의 녹지’로 변모하고 있다. 옥상을 정원으로 가꾸고 꾸미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기쁨과 희열 이상이다. 옥상 정원은 도시의 미기후를 조절하거나 녹색의 집합 경관을 창출하는 생태적·환경적 가치뿐만 아니라 도시민에게 새롭고 즐거운 시각적 자극과 생태적 삶의 회복을 주는 사회적 가치도 창출한다. 이러한 이유로 옥상 정원을 통한 도시 녹화가 공공 사업의 대상으로 부상 중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옥상은 ‘농사’라는 전통적 행위가 발생하는 농지農地가 되기도 한다. 버려졌던 옥상이 인간의 원초적 노동이 행해지는 ‘생산의 공간’이 된다는 것은 비단 농촌 문화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옥상의 도농 결합은 도시민이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고 화학 비료와 농약으로부터 안전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이다. 이웃과 함께 농촌의 삶을 체험하고 수확의 기쁨을 나누면서 도시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작지로서 옥상은 자연스럽게 애그리테인먼트agritainment가 실천되는 지역 사회의 공공 자산이 된다. 자연을 직접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넘어 옥상은 근래 여가, 오락, 소비 등의 가치가 더해진 새로운 도시 문화 인프라로 급부상하는 중이기도 하다. 옥상에 들어선 극장,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를 찾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공과 자연, 내부와 외부가 혼재되는 옥상은 그것이 담아내는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게다가 옥상은 콘크리트 벽에서 벗어난 탈일상적 해방감,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적 쾌락, 날씨나 시간에 따라 새롭게 창출되는 심미적 분위기 등을 제공하면서 현대인의 감성적 소비 욕구를 충족시킨다. 분명 옥상은 처음부터 자신의 고유한 가치나 용도를 가진 채 태어나지 않았다. 옥상의 기능이나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거나 확실하게 제기된 적도 없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옥상은 단순한 ‘지붕 표면’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간’으로서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공간으로서 옥상은 공공성을 담지한다. 새롭게 발견된 도시 면적이면서 도시 형태나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다양한 도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하는 기폭제다. 이는 우리가 이제야 갖게 된 옥상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유이기도 하다. 김미영은 현재 서울연구원 초빙부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홍익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관심 분야는 도시의 문화 예술 공간, 공간의 문화사, 공간의 사회학 등이며, 공간의 문화 사회적 기능과 의미를 발견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과 저서로는 『서울 사회학』(공저, 2017), 『옥상의 공간사회학』(공저, 2012), “현대 공공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 고찰”, “호텔과 ‘강남의 탄생’”, “‘오감(五感) 도시’를 위한 연구 방법론으로서 걷기” 등이 있다.
  • 옥상다반사 Rooftop Lifestyle
    루프탑 카페, 루프탑 콘서트, 루프탑 시네마 등. 루프탑rooftop, 옥상은 도시의 낭만을 느끼고 자연을 만나는 소위 ‘힙’한 장소의 하나로 최근 부쩍 주목받고 있지만, 꽤 오래전부터 다양한 쓰임새의 가능성을 보여 왔다. 지붕의 다른 형태로 물탱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잉여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정원으로 꾸며 하늘과 풀을 접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하고, 텃밭이 있는 생산의 공간이기도 하다. 놀이터나 수영장은 옥상에 계획되는 고전적 여가 프로그램이다. ‘녹화’를 통해 끊어진 도시의 녹지축을 연결하고 미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공 지반이기도 하며,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도시재생의 거점이 되리라 기대되기도 한다. 이번 지면에서는 도시의 삶을 직조하는 물리적 토대로서 옥상, 그리고 옥상을 무대로 펼쳐지는 생활의 풍경에 주목하고 옥상을 매개로 한 다양한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반사茶飯事’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처럼 예사로운 일이란 의미다. 이번 특집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성큼 다가선 옥상, 그곳에서 가능한 다반사를 찾아 탐사를 떠나보자. 진행 김정은, 김모아 디자인 팽선민
    • 편집부
  • [옥상다반사] 우리는 어떻게 지붕 위에 모이게 되었나
    옥상의 등장 한국에 옥상은 언제쯤 등장했을까. 일제 식민지기,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역사적 양식을 차용하거나 서양식에 일본식을 혼용한 건축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철근 콘크리트가 사용되고 배수와 방수 기술이 발달하면서, 평지붕에 옥상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대에는 청사나 철도역사 같은 공공건물이 건축되는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부산부청사에 옥상 정원을 설계한다거나 부산역에 옥상 공원을 만든다는 짧은 기사를 찾을 수 있다.1 ...(중략)... 1. “釜山廳屋上庭園”, 「매일신보」 1912년 2월 20일;“釜山驛屋上公園”, 「매일신보」 1912년 6월 16일. * 환경과조경 358호(2018년 2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