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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연수구 주제공원조성 설계 현상공모 당선작
송도공원
솔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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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은행 수목관찰원
· 위치 : 중원구 은행동 1,932번지 일원· 면적 : 34,760㎡(10,515평)· 조경설계 : 1·2차 - 오렌지엔지니어링(주), 3차 - 동일기술공사(주)· 시공 : 1·2차 - (주)영진토건, 3차 - (주)우신건설· 기술자문 : 한택식물원 신용모 이사· 사업기간 : 2001년 3월∼2003년 7월
지난 2001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에는 작은 수목관찰원이 들어섰다. 당초 양묘장 부지로 활용도가 떨어지던 땅에 다양한 수목을 식재하여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었다. 인근은 주택밀집지역이고, 당시 휴식공간이 부족했기에 이곳은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그리고 2002년. 바로 옆에 위치하던 1만톤 규모의 배수지가 용도 폐기되자 수목관찰원을 확장, 조성하게 되었다. 이 때 배수지 한곳은 벽체를 그대로 이용하여 연못을 조성하였고 나머지 배수지 한곳은 콘크리트 벽체 일부와 상수도관 10여미터를 노출, 존치시겨 방문객들이 배수지의 상징물로 알 수 있도록 조성했다.계속된 수목원 확장으로 올해 초에는 무단 농작물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는 시유지에 관내 공공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지장수목을 이식하여 중국 단풍, 칠엽수, 소사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숲을 조성하게 되었다. 출발은 작은 수목관찰원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규모를 갖춘 그럴듯한 수목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덩굴식물원에는 문주 형태의 시설물을 설치하여 등나무, 능소화, 인동덩굴, 으름, 다래, 등 10여종의 덩굴식물을 심었고, 연못 주변에 위치한 향기원에는 우리의 산책하며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산초나무, 정향나무, 생강나무, 구상나무 등과 향기가 백리까지 간다는 백리향, 인동, 꽃향유, 배초향 등 10여종의 식물을 심었다.연못 아래 길을 따라 조성된 관목원에는 4월에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피우는 팥꽃나무를 시작으로 노랑병아리꽃나무, 분꽃나무, 조팝나무, 갈기조팝나무, 참조팝나무, 댕강나무와 가을 의 붉고 탐스러운 열매를 자랑하는 백당나무, 가막살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다. 수목원의 정상부에 위치한 수생식물원에는 정화능력이 강한 옥잠화, 노랑어리연꽃, 부들, 고랭이, 속새 등 다양한 수변, 수생 식물이 심겨져 소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이외에도 자그마한 주제원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약용식물원, 미나리아제비원, 철쭉원, 원추리원, 기린초원과 요즘의 어린이들은 자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는 무, 배추, 가지, 파, 매밀 등이 심겨진 채소원과 사과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등이 심겨진 유실수원 등이 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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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습니다
"어렵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다."큰 조직에 있다가 다소 늦게 독립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겼다. 어떤 분은 "몇년 더 한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고, 어떤 분은 "인생 내리막길에 웬 대형사고냐?"고 농을 던지기도 하셨지만, 나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 중에 하나일 뿐이지,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나이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또 여성이라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중에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내가 설계사무실을 시작한 것은 내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일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꿈을 찾고 싶어서이다. 아직 꿈은 찾지 못하였지만 언젠가는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동안 너무 안주하며 살아 온 내 삶에 대해 더 이상 늦기 전에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작하였고, 아직은 초기라 어려운 일이 많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다.
"인생은 운칠기삼" - 조경을 시작하게 된 계기근래 여성들은 많은 교육을 받아 자식들에게 조언을 넘어 자식의 전공선택, 직업, 결혼 등 인생 방향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내 어머니께서는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하셨고, 사회경험도 없는 전형적인 주부였다.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어떤 일을 조언할 만큼 식견은 없었고, 법대를 가면 법관이, 상대를 가면 대기업의 (지금으로 말하면) GEO, 공대를 가면 최소한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보편적 사고를 지닌 분이셨으며, 자식들에게 무엇을 강요할 만큼 강한 성품을 지닌 분은 아니셨다.더욱이 딸인 나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안 했던 분이다. 그저 한 집안이 잘 되려면 아들, 그것도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고를 가진 보통 부모님이었다. 그래서 나의 전공 선택 과정은 매우 자유로웠다.대학과 학과 선택은 나 혼자의 몫이었는데, 처음에 조경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으로 미술에 흥미가 있어서 였다. 조경학을 하면 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잘 모르고 선택하긴 했지만 비교적 내게 잘 맞는 것을 보면 시작부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 설계가의 꿈오랫동안 일을 해오면서 구조적인 문제, 예산의 문제로 인해 내 의지대로 일을 해 나갈 수 가 없었던 경우가 매우 많았다. 조경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없었던 시기에는 발주자도 조경에 대해 잘 모는 경우가 많아서, 매우 어설프긴 했지만 내 의도대로 설계를 한다는 것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는 경험과 철학이 부재하여 부끄러운 설계만 한 듯 하다.지금은 발주자, 관련자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니, 어떤 경우에는 초기 의도와 달리 정체성도 없는 이상한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지기도 하여 허탈감, 자괴감 등으로 마음이 얼룩지고 아쉬움만 남게된다. 설계자, 발주자, 시공업자 모두가 자그마한 일이라도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자식을 키우듯 정성을 다하는 팀웍으로 일을 하였으면 한다. 일의 규모를 따지기 전에 의미와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과 일을 했으면 하지만 아직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그러나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힘들었던 시간이 곧 즐거운 시간“-즐거웠던 시간일을 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이다. 그 때는 마스터플랜을 잡는데도 조경하는 사람들이 배제된 시기였다.현상공모가 늘 그러하듯 마지막 며칠 동안은 조막손도 아쉬운 때인데, 마침 내가 조막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밤새며 즐겁게 일을 하고 새벽 5시에 사무실을 나오는데,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정경 - 약간 청회색의 하늘과 실루엣으로 보이는 건물들, 신선한 공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환경미화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 에 대한 기억은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요즘도 가끔 새벽녘에 귀가할 때면 20년전 하고는 많이 변한 환경이지만 그 때의 감동이 다시 잔잔한 내 가슴속에 퍼지는 듯 하다.힘들었던 시간은 곧 즐거운 시간과 연결된다. 마치 바람이 많이 들어간 공이 탄력을 받듯 어려움이 클수록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더 크다.
"사람과의 관계" - 힘들었던 시간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힘들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부딪히며 풀어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사람문제로 일을 겪으면 한 동안 의기소침하여 위축도 되고 가슴도 아프지만 난 오늘도 일을 하고 있다.조경설계는 시공결과가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말이란 설계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도면은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수단이다. 설계자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한다.우리의 환경은 지금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환경에 적합한 설계 및 시공이 되어야 한다. 국민소득은 10만불도 안되는 사회에서 국민소득 2, 3만불 되는 사회 환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또한 우리 국민들이 공공공간을 대하는 의식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국토, 우리 국민들의 정서, 우리들의 경제력, 공공공간이라는 특성상의 행정력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외국의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좋다는 등식은 맞지 않을 것이다.이런 모든 상황 - 예산, 시공성, 공간 이용자의 권리, 행정력 등 - 을 고려해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을 담는 단순함을 지향했고 그렇게 설계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 설계자질 운운하며 매도할 때는 정말 맥이 빠지고 힘들었다.
"긍지를 갖자. 그리고 심지 깊고 긴 안목으로..." - 조경인이 품었으면 하는 꿈들장안평 골동품상가에 가보면 같은 반다지도 가격 차이가 천차만별이다. 어떤 반다지는 당대의 유명한 장인이 좋은 자재로 제작해 수 천만원을 호가하고 어떤 것은 이름 없는 목수가 흔한 송판으로 제작해 불과 몇 십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당대의 장인만이 역사의 주인공인가? 난 송판으로 만든 반다지에서 따뜻한 삶의 숨결을 느낀다.모두 최고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인데 우리 모두 긍지를 가지고 일하자. 같은 어린이놀이터라도 입지가 다르고, 이용자가 다르다.심지어 인접부지에 있는 같은 성격의 공간을 설계한다 해도 시점이 다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직업은 얼마나 신나는 직업인가?대학에서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능력, 급여, 여타 이유로 전업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글이라도 쓰게 된 것은 우직하게 이 일을 오래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경업계가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시장규모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면서 발생된 것이 인력문제이다. 특히 IMF때 기술자를 육성하지 않아 현재는 경력자가 부족한 것 같다. 나 역시 경력자 한 사람이 5개월만에 그만두면서 회사 설립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3∼5년 후면 인력문제는 지금보다는 많이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현재의 자그마한 이익에 신경 쓰지 말고 좀 크게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인생에서도 설계에서도......
"여성이기 전에 직장인" -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일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일이라기 보다는 재미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다.일을 시작한지 2년쯤 되었을 때니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이다. 국민관광지 프로젝트를 할 때였다. 하루는 출근을 하니 P. M이 공무원과 예산검토를 위해 지방을 가야한다고 해서 급하게 출장을 갔다. 당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돌아올 생각은 않고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관방 하나를 빌렸는데, 신입과 다름없었기에 말도 못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남자 십 여명에 여자는 혼자서 "혼숙"을 한 셈이다.여러가지로 불편하여 앉아서 밤을 새우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아 일어나니 한 사람이 다리 한 쪽을 내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상의는 벗고 팬티만 입고 자는 것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밤새 일을 하다 엉켜서 자는 것을 보곤 웃음이 나왔다.아마도 그 분은 나를 여자로 보기 전에 같이 일을 하는 동료로 생각해 주었던 것 같고, 그런 경험도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일을 하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인생은 혼자서 헤쳐 가는 것“-여성소장으로서의 어려움여성소장으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라고 하면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성만이 공유하는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법적으로는 양성평등이 대부분 보장되어 있으나 사회나 가정에서의 의식은 여성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고 있어서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 중에서도 육아문제는 육체적인 문제를 넘어 정신적으로 번민하게 할 때가 많다.설계업계에서 질 높은 여성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육아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여성들에게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그러나 조경을 하는 여성후배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무엇을 급하게 바꾸려하지 말자고. 1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고 10년 후면 또 변할 것이니까 조급하게도 느긋하게도 생각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며 살자고.남자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고 헛소리도 해가면서 푼다고 하는데, 직장을 마치고 나면 나에겐 또 다른 책임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보니 직원들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인생은 혼자서 헤쳐가야 하는 것이고 술이라는 항생제가 아닌 스스로의 자기조절과 극복을 통해 모든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강한 치료법이다.이제는 성에 의한 구분의 시대는 지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소장이라서 힘들지 소장 앞에 또 다른 수식어가 붙지 아니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안 영 애 Ahn, Young Ae안스디자인 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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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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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하우젠 정원의 라 그로테
이번 여름 필자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그녀의 마지막 영혼을 보기위해 조금은 무거운 마음과 조금은 설레는 맘으로 하노버로 향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유리 진열장에 담겨 있는 듯 했고 햇살이 좋았다. 끝없이 길게 늘어선 알레를 뒤로하고 들어선 곳. 써프라이즈 ! 거기에는 괴암도 없었고, 동굴도 없었다. 그대신 바로크 양식의 매우 조화롭고, 완벽한 비율로 세워진 자그마한 건물이 잘 가꾸어진 정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는 마치 하나의 공간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이태리의 타롯정원을 연상케 했으며, 특히 내용을 감히 추측할 수도 없는 외형디자인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타롯정원의 정문을 떠오르게 했다. 니키의 오랜 동료이자 협력자였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는 타롯정원 정문을 설계하면서 정원의 비범한 마술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정원은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 남아주길 원했고 정원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외부의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의도했었다. 가로로 길게 늘어선 거대하고 육중한 벽사이로 둥근 입구만 있을 뿐이었다. 기대에 차서 바라본 동굴이라는 곳은 타롯공원의 입구 이상의 실망감을 주는 듯 했지만 이는 잠시, 작지만 결코 작지않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스미는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다가 갔다. 탄탄한 구성과 니키의 특허품격인 유리 창틀이 니키임을 말해주었고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입구의 첫 번째 공간을 들어서면서 난 한번 더 숨을 들이쉬며 이내 쓰러질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타롯정원에서 느꼈던 거대함과 웅장함, 화려함과는 또 다른 삶의 깊이와 니키의 영혼이 그곳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니키는 이곳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 가고 싶었을까. La Grotte - 동굴 헤른하우젠에 위치한 정원과 역사적 동굴인 라 그로테는 1638년 백작 게오르그가 궁전 살림용으로 농장을 건설하게 되고 이후 백작 요한 프리드리히가 이 건물을 1666년에 여름궁전으로 증축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큰 정원 "그로센 가르텐"의 시초였다. 이후 궁전을 확대하면서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그로테(동굴)와 그러쎄 카스카데(큰 폭포)가 건축되었다. 이후 백작이 사망하자 그의 아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정권을 물려 받게되었고 아우구스트와 그의 아내 소피는 정원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들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이때 세워진 건축물들이 정원극장, 누보 쟈르뎅, 큰 지하궁의 조형장식, 남쪽끝에 위치한 파빌리온, 그리고 갤러리 건물들이었다. 소피는 그의 글에서" 헤른하우젠 정원만이 우리가 자랑할만한 것이며, 이 정원이야 말로 실로 아름답게 잘꾸며져 있다"라고 남겼다. 그후 그녀의 아들 하노버 공작 게오르그 누드비히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이 정원은 정기적으로 여름 궁전으로서 화려한 축제행사를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불가피한 긴축재정과 관리소홀로 점차 몰락하게 되었는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오히려 잘된 운명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새로운 취향에 따라 바로크풍 정원을 풍경정원으로 리모델링하였는데, 이를 피해갈 수 있었고 이로인해 원래 바로크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인플레이션, 자금의 가치 하락 등으로 정원은 몰락하게 되고 결국 하노버시는 1936년에 정원을 구입하여 복구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창조적인 기념물 보존"이라는 이념에 따라 현존하는 것들을 다시 복구하여 원상태로 다시 되돌리는 것 뿐만 아니라 정원에 다른 여러 가지 추가장식 요소들을 첨가하여 개선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전망 테라스, 미로정원, 특별정원들은 복구공사에 보여준 도시민들의 열정과 역사적인 헤 른하우젠 정원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영송 (주)소토대표(구송앤주)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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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갇혀있는 그림을 꺼낼 수 있는 날을 위해......
성균관 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1990년 조경설계 서안(주) 입사, 현재 서안 근무 중........이상은 이력서에 기재 될 내 이력의 전부이다. 환경과 조경의 원고 청탁을 받고 잠깐 망설였다. 다름 아닌, 보다시피 조촐한 나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 아직 다른 이들에게 나설 만큼 빼어난 조경가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편집부에서 분명 나에게 청탁을 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지금까지의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혼잣말처럼 글을 써 보기로 했다.자신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하는 위선과 후배들에게 무지한 충고를 범하는 오만함이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경 설계를 하게 된 동기에 있어 극적인 상황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조경학과라는 학과에 대해 알게 된 후 공립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조경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해서 자연스럽게 진로를 잡았으며 학력고사 성적에 맞추어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재학시절에는 그냥 설계 과목이 좋았고, 설계만이 조경을 제대로 하는 것 같은 즐거운 착각 속에 살았다. 학교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밤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며,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설계에 대한 욕망을 술과 독설로 대신 그득 채우고 나면, 아침 해는 나의 뇌처럼 텅빈 하늘 중천을 떠다니곤 했던, 참으로 욕심과 의욕만 충만했던 학창시절 이었다. 다행히 졸업설계 전시장에서의 아직 깨지 않은 술과 독설로 무장한, 버얼건 얼굴의 필자를 가상히(?) 여기신 소장님 덕분에 실습생 신분으로 서안이라는 회사에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서안에서의 첫 요구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은 모두 잊으라는 것이었다. 언뜻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아마도, 업(業)과 학(學)을 혼돈하지 말라는 충고와 이제는 프로의 세계에 들어 왔다는 절대적 적자생존의 법칙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또한, 그것은 전혀 새로운 도전이었고 새로운 세계로의 시작이었다.공간에 대한 분석 과정과 공간성격의 도출과정 그리고, 공간을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선, 정말로 도면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세계에서 첫 대면했던 도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나를 당시의 흥분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하다. 그 때 작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도면이 아름다우면 그 공간도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샤프나 홀더를 갈고 제도판에 앉아 땀방울 떨어질까, 선 비뚤어질까 호흡마저 조절하며 도면을 치던(그리던) 시절, 얇은 트레이싱지를 뚫어지기 직전까지 힘주어 그어댔던 수많은 도면들, 그 안에 불어넣은 선들의 섬세함은 곧 설계자의 마음가짐이었으며, 삼각자는 나를 태우고 떠다니는 조각배요, 트레이싱지는 노 저으며 떠나는 0.3평의 무한한 꿈의 바다였다.그렇게 조경업계에 입문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단순히 뒤에서 버팀목으로 포진하고 있는 선배들을 믿으며 쫓아 다녔던 타 업종과의 협의며 회의는 늘 가슴 들뜨는 일이었고, 스스로 이미 조경업에 취해 있었으며, 건축, 토목 또는 그 밖의 모든 설계에서 조경이 똑바로 인정 되어야 한다는 조경의 확신에 대한 젊은 날의 빛나는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재 연 Lee, Jae Yeon 조경설계 서안(주) 실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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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 사람과 땅이 어울린 이야기 (16) - 9월, 산과 골을 만든다
이번 달에는 약속대로 지형(地形)을 다루면서 독자들과 만나기로 한다. 지난달의 나무와 관련해서 볼 때 지형과 나무의 관계는 사실 매우 밀접하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적당한 높이의 언덕위에 모여 심겨야 제격이다. 도시의 평지에 심기거나 가로수로 줄지어 심겨진 소나무는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원래 소나무가 산에서 자라는 나무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형이 항상 나무와 같이 어울려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나무 없이도 지형은 그 자체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소재다. 땅바닥면으로부터 조형의 대상으로까지 성장한 지형얘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토목의 땅, 조경의 땅
지형은 말 그대로 땅의 모양을 말하고 지형을 만진다는 것은 땅의 모양을 다듬고 고치는 일이다. 실제 외부공간에서 지형을 만지는 일은 주로 작은 언덕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이 되어서 외부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마운드 (mound)를 둔다 또는 마운딩(mounding)을 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골프장의 페어웨이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이 잔물결로 굽이치듯 땅의 표면에 파동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언듈레이션 (undulation; 땅에 파동두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모두 영어식 표현이지만 실무에서는 그렇게 통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땅을 다루는 일은 토목의 권한내에 있다. 몇천세대가 살게 될 큰 택지지역의 지반 고르기와 경사가 급한 곳을 깍아내는 절토(切土)와 낮은 땅을 높이는 성토(盛土)등의 개념은 토목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토목이 다루는 땅의 스케일, 즉 규모는 통상 조경의 땅보다는 훨씬 커서 조경이 보이고자하는 땅의 섬세한 경관적 바램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다. 조경의 땅은 작기는 하지만 지형의 변화가 미세해서 토목의 거시적인 눈으로는 잡아내기 힘들다. 조경의 땅이 토목의 땅에 비해 작고 미시적이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토목의 땅다루기에 필요한 모든 조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덧붙이도록 하자. 비가 내린 뒤 생기는 땅 표면의 물길 잡기나 절토와 성토의 토량계산 등은 단지 토목만의 일이 아니라 조경의 땅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기본적 이해들이다.
언덕이나 동산(童山)같이 아래의 땅에 비해 솟아오른 지형을 제주도 쪽에서는 오름이라고 부른다. 있는 그대로의 땅의 조형적 속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군 시절, 6.25당시 격전장으로 유명했던 철원평야의 백마고지(白馬高地)에서 대공 발칸포기지 공사를 할 때의 경험인데 - 훈련 철에는 칼같이 훈련받고 훈련 끝나면 예외 없이 시멘트와 골재와 씨름하는 우리나라의 야전공병은 정말 훌륭한 군인임에 틀림없다 - 그 넓은 철원평야의 한가운데 백마고지만 볼록 솟아있는게 신기했다. 백마고지의 정상에서 보면 주변의 철원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추수 직전의 가을 저녁 무렵 석양빛을 받고 있는 철원평야를 보신 적이 있는지. 그때의 철원평야는 곱기도 했고 또 힘차기도 했다. 소음이 전혀 없는 한적함 속에서 - 민통선내 철원평야의 조용함과 평안함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 들녁의 황금색이 온 천지에 넘쳐났다. 옷과 얼굴이 시멘트로 범벅이 된 사병하나가 화랑담배를 피면서 철원평야를 내려다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무 것도 지금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기억하나가 그 길고 힘들었던 시간을 일순간에 녹여낸다.
오름의 공간은 꼭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애틀 교외의 개스웍스파크 (Gas Works Park)는 70년대 초반 정유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만든 공원이다. 미국 조경가 해그 (R. Haag)는 공무원들과 시민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정유공장의 일부 시설이 공원에 그대로 남도록 했는데 이 결정이 결국 이 공원을 시애틀의 명물이 되도록 만든다. 공원에 일부러 남겨진 정유공장의 시설은 옛날 이 공원의 자리가 어떻게 쓰였었는지 또 무슨 과거를 갖고 있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훌륭한 책자이고, 공원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게하는 일종의 영상매체이다. 정유공장시설외에 공원에는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높이 20여 미터의 작은 동산이 그것인데 주말이면 많은 시애틀시민이 이곳으로 올라와 연을 날리며 바람을 즐긴다. 동산에서 내려다보는 만(灣) 저쪽의 시애틀 도심의 스카이라인은 한편의 대단한 파노라마이다. 폐유에 의해 오염된 토양이 토양박테리아에 의해 자
연정화되는 몇 십년동안 생육이 어렵기 때문에 이 공원 내에는 전혀 나무를 두지 않았다. 나무가 없는 까닭에 잔디와 초지류로만 덮인 동산의 외형 윤곽선은 멀리서 봐도 그대로 참하게 살아있다. 20여 미터의 높이의 동산하나가 사람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공간적 감흥을 전해주는 사례이다. 시애틀이건 제주
도건 어디건 간에 동산은 오르는 맛,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맛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이는 맛이 같이 있어야 한다.
진 양 교 Chin, Yang Kyo·(주) 토문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무소 부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