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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담 ; 조경산학대전이 남긴 것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 2003년09월 / 185
  • 젊은 조경가, 당신은 희망입니다
    비개인 후, 강 건너 북한산을 바라보며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햇살을 봅니다. 며칠 전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햇살 볼 틈도 없었나 봅니다. 비개인 후의 하늘은 청명하고 그 하늘 자락 끝, 저 멀리 북한산도 가깝게 보입니다. 평소에는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북한산이 한 눈에 잡힐 듯 보이는 비개인 하늘을 보며 글을 씁니다.어쩌면 곁에 늘 존재하는데도 연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북한산의 모습이 조경설계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사실 설계란 작업은 비개인 후 문뜩 보여지는 북한산만큼이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그래도 그 흐린 날 속에서 빛을 내는 잠깐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고생하는 이런 모습들은, 그 희열(?)감에 앞서 어쩌면 바보스러운 선택이 아닌지 모릅니다. 조경학과를 다니면서의 미래에 대한 염려나 갈등은 조경설계를 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계속되고 소위 소장이라는 이름의 대표자가 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강약이 다르고 내용의 정도만 다를 뿐. 조화로운 삶보다 특별한 것을 위해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조경설계를 계속해온 이유, 그리고 계속하는 이유는 거창한 내용도 아닌 조금은 우직하고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처음 조경을 시작할 단계의 업계 상황은 지금보다도 열악하여 조경설계란 식재설계가 전부인 것처럼 오식되어 소위 뺑뺑이 그리기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배울 때의 거창한 미사여구와 치장과는 달리...그래서 오기가 생겼었습니다. ‘조경의 본때를 보여주자’ 라고.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터를 닦아 놓고 밑바탕이 되게 하리라고...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땐 작은 소망도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도심지에 조그만 땅이라도 사서 멋들어지게 설계하고 멋들어지게 시공하여 조경가의 손으로 만든 작은 공원을 기증하여 조경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용하게 하는 그런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특별한 것들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바다가 거기 있어서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는 시공 위주의 회사였고, 설계실이라는 이름속의 설계쟁이는 많은 생각을 담아 표현해내고, 멋이라는 것과 씨름을 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습니다.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도 싫고 그런 풍토에 안주하려는 모습도 싫어 이런저런 것을 핑계 삼아 편하고 인정받을 만한 곳을 과감히 떠나기로 했습니다.주머니 돈을 탈탈 털어 사무실을 차린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사무실을 부산에 차렸느냐고. 내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바다가 거기에 있어서...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고 그 외엔 별다름이 없었습니다.아무런 연고가 없었지만 부산의 생활은 멋보다는 맛을 느낄 수 있었고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일의 재미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기로 시작한 도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너의 무지에 대한 설득, 토목 전문가나 건축가와의 싸움(?), 공무원과의 한판(?), 직원들에게는 그들과의 싸움에서 절대 지지 말라고 호통도 치고 격려도 하고, 그 속에서 그래도 재미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 조그만 사무실을 내어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설계사무소 대표로 살아가기새삼스럽게 설계사무소를 내고 엔지니어링 협회에 등록하고 직원들과 토론하고 일을 하며 일과 연관된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가기.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기분이 좋기 마련이지만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혼자서 판단해야 하고, 모두가 퇴근한 후 홀로 앉아 구상을 하기도 하고, 다 못한 일을 집에 가서 마져 하려고(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도면을 둘둘 말아 들고 가기도 하고, 이번일 끝나면 어디 여행이나 가야지 하는 생각이 일에 치여 매번 밀리고.... 그리고 이러한 싫은 일들도 있고... 싫은 일 힘들게 하는 상황·이렇게 그려주십시오 하는 건축가의 주문·옥외 공간에 공간 이름 작명을 요구하는 주문·무슨 설계비가 그리 비싸냐며 경비도 안 되는 설계비 주는 이들·도면 납품 후 코딱지만한 설계비 반쯤 깍자는 이들·지난번 설계비 지금 줄테니 급히 도면 그려달라는 이들·저 이번달까지만 일하겠습니다 라는 젊은 조경가(?)·다시 일 할테니 월급 올려달라는 협상·다시는 조경안하겠다며 홀연히 떠나 숨어 살 듯 다시 조경하는 젊은 조경가(?)·이 회사에 와서 열심히 일하고 배우겠다고 하며 꼭 뽑아달라고 하더니 1년쯤 후 그냥 그렇게 직장인이 되어가고 있는 이들·건축설계나 토목설계가들이 무진장 월급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매월 한차례 모여 자기 사장 소장 헐뜯고 욕하는 이상한 젊은 모임·자기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 절대 투자를 안 하는 이·할일이 많은데 어쩔 수 없이 의뢰받은 일을 직원들에게 작업 설명하기·평소에 바쁘다고 전화조차 못한 채 지내다가 심의 교수명단 보고 찾아가야 할 때 그렇지만 묵묵히 자기일하고 밤일하며 힘들어도 내색 안하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입니다. 격주휴무하자 해놓고 그것을 빼앗는 내 자신이 밉습니다.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조경설계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조경일을 미워하기보다 사랑했고 힘들어하기보다 재미있어했고 벽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벽을 넘어보거나 뚫어 버리고자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 언제나 자리를 펴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경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비오는 날의 풍경어느 날 작업 중인 프로젝트의 디테일 때문에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쉘터의 낙수물을 조절하는 레인체인과 배수구의 디자인이 필요했습니다. 레인체인(Rain Chain)은 낙수물이 물홈통 대신 낙수구에 걸어놓은 사슬을 말합니다. 물홈통을 따라 흘러내린 물은 보이지 않지만 의뢰인은 비오는 날 처마를 따라 흐르는 물이 눈에 보여지는 풍경을 원했습니다. 보통은 쇠사슬을 매달아 물 흐름을 유도하는데 기존의 레인체인은 그에 장식성을 더해 물이 흐르지 않는 경우에도 경관성이 있게 보여지는 제품이 몇 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품 자체가 무겁고 물 흐름에 대한 저항이 커서 주변으로 물이 튀어나가는 문제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 흐름과 경관성을 고려하여 심플한 형태를 선택하고 시제품보다 굵기를 더해 심플한 형태로 제작 의뢰한 후 레인 체인과 바닥이 만나는 퇴수구의 디테일을 매만져야 했습니다.레인체인에 연결되는 경우 퇴수구 위에 작은 자갈을 깔거나 트렌치에 직접 연결하거나 또는 물확을 놓아 물고임이 있게 하는 방법이 있지만 의뢰인의 대상지는 화강석으로 포장된 자리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모임공간이기 때문에 돌출된 물확의 설정은 어렵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마련된 일은 화강석 통돌에 퇴수구에 맞는 구멍을 뚫어내고 포장면과 일체화 된 놀이로 양각한 연꽃잎을 새겨 넣기로 했습니다. 마침 의뢰인의 정원엔 고풍스런 석등 몇 개가 있었고 그 형태는 교묘한 이중성으로 존재하였습니다. 비오는 날 레인체인을 타고 흐르는 낙수물이 연꽃잎을 따라 타고 흘러 들어가는 퇴수구의 모습은 비가 오지 않아도 비오는 날이면 더 궁금해지는 비오는 날의 풍경이 될 수 있습니다.조경 디자인을 하면서 커다란 흐름은 엮어나가고 이어나가 그림을 그려나가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우리들의 눈높이나 발끝 앞의 풍경은 소홀한 것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커다란 흐름도 중요하지만 작은 디테일도 소중히 여기는 습관과 여러번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 듯 싶습니다.내 앞마당, 길거리 광장 안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의 존재도 소중하지만 보도블럭 틈 그늘진 곳에 뿌리내리고 자라는 개미자리의 흰풀꽃을 소중히 여길 줄도 알아야겠지요. 보도블럭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개미자리’의 아주 작은 흰꽃이나 무성한 풀섶 속에 보랏빛 웃음을 감추고 있는 깨알보다 작은 꽃을 피우는 ‘꽃마리’를 보신 적은 있나요. 한겨울, 봄을 기다리는 한 알의 씨앗을 생각하며얼마 전 어느 학생에게 그의 미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고프다고 대답했습니다. 조경설계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지금 힘들더라도 그래도 참고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라고 하고 싶습니다. 먼 훗날 가서 다른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다음세대, 조경을 사랑하는 세대에 작은 밑거름이 되었다는 자긍심을 느껴 보십시요.많은 날 연무에 끼여 보이지 않던 북한산이 비갠 후 눈에 확 들어오듯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자태를 드러낸 북한산을 보듯, 어쩌다 그런 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날들의 희열을 느끼는 그런 세상을 기대하며...우리들의 앞날은 당신들이 희망입니다. 김정수 Kim, Jeong Su(주)환경디자인 아르떼 대표 디자이너
  • 어렵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습니다
    "어렵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다."큰 조직에 있다가 다소 늦게 독립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겼다. 어떤 분은 "몇년 더 한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고, 어떤 분은 "인생 내리막길에 웬 대형사고냐?"고 농을 던지기도 하셨지만, 나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 중에 하나일 뿐이지,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나이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또 여성이라는 것도 역시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중에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내가 설계사무실을 시작한 것은 내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일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꿈을 찾고 싶어서이다. 아직 꿈은 찾지 못하였지만 언젠가는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 동안 너무 안주하며 살아 온 내 삶에 대해 더 이상 늦기 전에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작하였고, 아직은 초기라 어려운 일이 많지만 난 이 생활이 즐겁다. "인생은 운칠기삼" - 조경을 시작하게 된 계기근래 여성들은 많은 교육을 받아 자식들에게 조언을 넘어 자식의 전공선택, 직업, 결혼 등 인생 방향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나, 내 어머니께서는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하셨고, 사회경험도 없는 전형적인 주부였다.아버지 역시 자식들에게 어떤 일을 조언할 만큼 식견은 없었고, 법대를 가면 법관이, 상대를 가면 대기업의 (지금으로 말하면) GEO, 공대를 가면 최소한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보편적 사고를 지닌 분이셨으며, 자식들에게 무엇을 강요할 만큼 강한 성품을 지닌 분은 아니셨다.더욱이 딸인 나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안 했던 분이다. 그저 한 집안이 잘 되려면 아들, 그것도 장남이 잘되어야 한다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고를 가진 보통 부모님이었다. 그래서 나의 전공 선택 과정은 매우 자유로웠다.대학과 학과 선택은 나 혼자의 몫이었는데, 처음에 조경을 선택한 것은 개인적으로 미술에 흥미가 있어서 였다. 조경학을 하면 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잘 모르고 선택하긴 했지만 비교적 내게 잘 맞는 것을 보면 시작부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 설계가의 꿈오랫동안 일을 해오면서 구조적인 문제, 예산의 문제로 인해 내 의지대로 일을 해 나갈 수 가 없었던 경우가 매우 많았다. 조경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없었던 시기에는 발주자도 조경에 대해 잘 모는 경우가 많아서, 매우 어설프긴 했지만 내 의도대로 설계를 한다는 것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는 경험과 철학이 부재하여 부끄러운 설계만 한 듯 하다.지금은 발주자, 관련자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니, 어떤 경우에는 초기 의도와 달리 정체성도 없는 이상한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지기도 하여 허탈감, 자괴감 등으로 마음이 얼룩지고 아쉬움만 남게된다. 설계자, 발주자, 시공업자 모두가 자그마한 일이라도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자식을 키우듯 정성을 다하는 팀웍으로 일을 하였으면 한다. 일의 규모를 따지기 전에 의미와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과 일을 했으면 하지만 아직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그러나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힘들었던 시간이 곧 즐거운 시간“-즐거웠던 시간일을 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이다. 그 때는 마스터플랜을 잡는데도 조경하는 사람들이 배제된 시기였다.현상공모가 늘 그러하듯 마지막 며칠 동안은 조막손도 아쉬운 때인데, 마침 내가 조막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밤새며 즐겁게 일을 하고 새벽 5시에 사무실을 나오는데,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정경 - 약간 청회색의 하늘과 실루엣으로 보이는 건물들, 신선한 공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환경미화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 에 대한 기억은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요즘도 가끔 새벽녘에 귀가할 때면 20년전 하고는 많이 변한 환경이지만 그 때의 감동이 다시 잔잔한 내 가슴속에 퍼지는 듯 하다.힘들었던 시간은 곧 즐거운 시간과 연결된다. 마치 바람이 많이 들어간 공이 탄력을 받듯 어려움이 클수록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더 크다. "사람과의 관계" - 힘들었던 시간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힘들다.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부딪히며 풀어나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사람문제로 일을 겪으면 한 동안 의기소침하여 위축도 되고 가슴도 아프지만 난 오늘도 일을 하고 있다.조경설계는 시공결과가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말이란 설계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도면은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수단이다. 설계자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한다.우리의 환경은 지금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환경에 적합한 설계 및 시공이 되어야 한다. 국민소득은 10만불도 안되는 사회에서 국민소득 2, 3만불 되는 사회 환경을 생각하면 안 된다. 또한 우리 국민들이 공공공간을 대하는 의식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국토, 우리 국민들의 정서, 우리들의 경제력, 공공공간이라는 특성상의 행정력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외국의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좋다는 등식은 맞지 않을 것이다.이런 모든 상황 - 예산, 시공성, 공간 이용자의 권리, 행정력 등 - 을 고려해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을 담는 단순함을 지향했고 그렇게 설계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 설계자질 운운하며 매도할 때는 정말 맥이 빠지고 힘들었다. "긍지를 갖자. 그리고 심지 깊고 긴 안목으로..." - 조경인이 품었으면 하는 꿈들장안평 골동품상가에 가보면 같은 반다지도 가격 차이가 천차만별이다. 어떤 반다지는 당대의 유명한 장인이 좋은 자재로 제작해 수 천만원을 호가하고 어떤 것은 이름 없는 목수가 흔한 송판으로 제작해 불과 몇 십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당대의 장인만이 역사의 주인공인가? 난 송판으로 만든 반다지에서 따뜻한 삶의 숨결을 느낀다.모두 최고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인데 우리 모두 긍지를 가지고 일하자. 같은 어린이놀이터라도 입지가 다르고, 이용자가 다르다.심지어 인접부지에 있는 같은 성격의 공간을 설계한다 해도 시점이 다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직업은 얼마나 신나는 직업인가?대학에서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능력, 급여, 여타 이유로 전업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글이라도 쓰게 된 것은 우직하게 이 일을 오래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경업계가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시장규모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면서 발생된 것이 인력문제이다. 특히 IMF때 기술자를 육성하지 않아 현재는 경력자가 부족한 것 같다. 나 역시 경력자 한 사람이 5개월만에 그만두면서 회사 설립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3∼5년 후면 인력문제는 지금보다는 많이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현재의 자그마한 이익에 신경 쓰지 말고 좀 크게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인생에서도 설계에서도...... "여성이기 전에 직장인" -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일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일이라기 보다는 재미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다.일을 시작한지 2년쯤 되었을 때니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이다. 국민관광지 프로젝트를 할 때였다. 하루는 출근을 하니 P. M이 공무원과 예산검토를 위해 지방을 가야한다고 해서 급하게 출장을 갔다. 당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돌아올 생각은 않고 저녁 무렵에야 비로소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관방 하나를 빌렸는데, 신입과 다름없었기에 말도 못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남자 십 여명에 여자는 혼자서 "혼숙"을 한 셈이다.여러가지로 불편하여 앉아서 밤을 새우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아 일어나니 한 사람이 다리 한 쪽을 내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상의는 벗고 팬티만 입고 자는 것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밤새 일을 하다 엉켜서 자는 것을 보곤 웃음이 나왔다.아마도 그 분은 나를 여자로 보기 전에 같이 일을 하는 동료로 생각해 주었던 것 같고, 그런 경험도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일을 하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인생은 혼자서 헤쳐 가는 것“-여성소장으로서의 어려움여성소장으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라고 하면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성만이 공유하는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법적으로는 양성평등이 대부분 보장되어 있으나 사회나 가정에서의 의식은 여성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고 있어서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 중에서도 육아문제는 육체적인 문제를 넘어 정신적으로 번민하게 할 때가 많다.설계업계에서 질 높은 여성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육아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여성들에게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그러나 조경을 하는 여성후배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무엇을 급하게 바꾸려하지 말자고. 1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고 10년 후면 또 변할 것이니까 조급하게도 느긋하게도 생각지 말고 미래를 대비하며 살자고.남자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시고 헛소리도 해가면서 푼다고 하는데, 직장을 마치고 나면 나에겐 또 다른 책임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보니 직원들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인생은 혼자서 헤쳐가야 하는 것이고 술이라는 항생제가 아닌 스스로의 자기조절과 극복을 통해 모든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강한 치료법이다.이제는 성에 의한 구분의 시대는 지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소장이라서 힘들지 소장 앞에 또 다른 수식어가 붙지 아니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안 영 애 Ahn, Young Ae안스디자인 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 내안에 갇혀있는 그림을 꺼낼 수 있는 날을 위해......
    성균관 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1990년 조경설계 서안(주) 입사, 현재 서안 근무 중........이상은 이력서에 기재 될 내 이력의 전부이다. 환경과 조경의 원고 청탁을 받고 잠깐 망설였다. 다름 아닌, 보다시피 조촐한 나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 아직 다른 이들에게 나설 만큼 빼어난 조경가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편집부에서 분명 나에게 청탁을 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지금까지의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혼잣말처럼 글을 써 보기로 했다.자신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하는 위선과 후배들에게 무지한 충고를 범하는 오만함이 스며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경 설계를 하게 된 동기에 있어 극적인 상황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조경학과라는 학과에 대해 알게 된 후 공립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조경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해서 자연스럽게 진로를 잡았으며 학력고사 성적에 맞추어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재학시절에는 그냥 설계 과목이 좋았고, 설계만이 조경을 제대로 하는 것 같은 즐거운 착각 속에 살았다. 학교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밤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며,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설계에 대한 욕망을 술과 독설로 대신 그득 채우고 나면, 아침 해는 나의 뇌처럼 텅빈 하늘 중천을 떠다니곤 했던, 참으로 욕심과 의욕만 충만했던 학창시절 이었다. 다행히 졸업설계 전시장에서의 아직 깨지 않은 술과 독설로 무장한, 버얼건 얼굴의 필자를 가상히(?) 여기신 소장님 덕분에 실습생 신분으로 서안이라는 회사에 첫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서안에서의 첫 요구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은 모두 잊으라는 것이었다. 언뜻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아마도, 업(業)과 학(學)을 혼돈하지 말라는 충고와 이제는 프로의 세계에 들어 왔다는 절대적 적자생존의 법칙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또한, 그것은 전혀 새로운 도전이었고 새로운 세계로의 시작이었다.공간에 대한 분석 과정과 공간성격의 도출과정 그리고, 공간을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선, 정말로 도면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저마다의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세계에서 첫 대면했던 도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나를 당시의 흥분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하다. 그 때 작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도면이 아름다우면 그 공간도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샤프나 홀더를 갈고 제도판에 앉아 땀방울 떨어질까, 선 비뚤어질까 호흡마저 조절하며 도면을 치던(그리던) 시절, 얇은 트레이싱지를 뚫어지기 직전까지 힘주어 그어댔던 수많은 도면들, 그 안에 불어넣은 선들의 섬세함은 곧 설계자의 마음가짐이었으며, 삼각자는 나를 태우고 떠다니는 조각배요, 트레이싱지는 노 저으며 떠나는 0.3평의 무한한 꿈의 바다였다.그렇게 조경업계에 입문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단순히 뒤에서 버팀목으로 포진하고 있는 선배들을 믿으며 쫓아 다녔던 타 업종과의 협의며 회의는 늘 가슴 들뜨는 일이었고, 스스로 이미 조경업에 취해 있었으며, 건축, 토목 또는 그 밖의 모든 설계에서 조경이 똑바로 인정 되어야 한다는 조경의 확신에 대한 젊은 날의 빛나는 광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재 연 Lee, Jae Yeon 조경설계 서안(주) 실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