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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의 한계: 제도는 정당한가?
    연재를 시작하며: 제도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필자는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대형 건축사사무소가 아닌 이른바 아틀리에 사무실에서 건축 실무를 했다. 서른을 훌쩍 넘겨 도시로 전공을 확장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설득력 있으면서 독창적인 안을 제시하는 것이 십여 년 해왔던 일에서 가장 우선되는 가치였다. 그것은 달리 말해 ‘특수해’를 만드는 것이다. 건축 프로젝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 지구나 신도시 중심지를 위한 설계, 쇠퇴한 구도심의 도시재생 계획 같은 도시 스케일의 작업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취했다. 대상 공간의 특수성과 소유자 또는 이용자의 차별적인 요구를 읽어내고 그것을 부각해 디자인의 근거로 삼거나, 혹은 공간을 구성하고 재료를 적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대담한 형태와 새로운 기능 관계를 취하는 등의 접근 방식이다. 그러나 특수해에 해당하는 개별 공간은 도시계획과 각종 법규, 지침이라는 ‘일반해’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다. 어떠한 개별적이고 임의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더라도 우리 사회가 합의한 도시 공간의 요소들이 갖춰야 할 기능과 미덕을 확보하기 위해 일반해는 필요하다. 더욱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과 공간 환경이 소위 ‘디자인’을 통해 특수해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시민 다수가 거주하고 이용하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필요를 담는, 비슷하고 반복되는 공간 요소들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최소한의 기준인 일반해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렇다 면 우리의 도시 공간이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은 이 일반해에 그 원인도, 해법도 있는 것 아닐까? 근대 이후 도시계획과 각종 공간의 형태 규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스티븐 마셜(Stephen Marshall)이 엮은 『도시 규제와 계획(Urban Coding and Planning)』(2011)1과 에런 벤-조셉(Eran Ben-Joseph)이 쓴 『도시의 규정(The Code of City)』(2005)2을 비롯해 많은 연구자의 이론적 접근과 여러 나라의 방대한 사례를 되짚는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 좋은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다수의 제도 개선 연구가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관련 법 개정과 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격월로 연재할 글을 통해 필자가 이러한 성과에 견줄 개선 방향과 해법을 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연구를 우리 도시의 현실을 사례로 뒷받침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일반해가 우리 도시의 보편적인 모습―공간적 형태와 그에 결부된 현상―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모습을 구성하는 여러 ‘차원’을 따라 살펴보되 다양한 형식과 위계의 도시 제도와 결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도시계획, 건축 법규처럼 범위가 확정적인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것은 이 연재의 목적이 관련 법제들을 개론적으로 전달하려는 데 있지 않으며,4 몇 가지 법제로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는 접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 공간을 만드는 질서는 우리가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합의한 ‘사회적 규약’으로서 ‘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가 만든 도시의 모습 도시를 정의하는 다양한 관점과 표현이 있지만, 도시는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하고도 복합적이며 수많은 사람이 물리적으로나 비물리적으로 밀도 높게 개입한 공간적 장치라고 한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도시는 지극히 인위적인 공간 현상이다. 건축역사학자 스피로 코스토프(Spiro Kostof)가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5 비정형적 도시 조직을 가진 옛 도시들을 으레 ‘자연발생적’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심지어 도시 형태적 우월성의 근거로 삼는 것은 도시의 본질과 어긋난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길과 그에 이어지는 독특한 형태의 광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세 도시 시에나(Siena)도 실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디자인을 엄격하게 강제한 결과다.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일견 혼돈 그 자체인 옛 이슬람 도시들조차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에서 기인한 일관된 배치 원칙을 품고 있다.6 즉 도시를 식물의 자생 군락지처럼 지리적 특성이나 기후 조건의 필연적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은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거나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충분치 않다. 결국 도시의 모습, 즉 도시 공간의 형태와 거기서 일어나는 공간적 현상은 사람에 의한 의식적 행위의 집합적 질서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2023년 현재,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 대도시의 모습을 설명하는 질서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작동해 왔을까? 한국전쟁 이후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등 사회경제적 틀이 가장 근본적인 질서를 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라면 그 어떤 것도 용인되었다는 뜻이다. 부동산을 매개로 한 자본 축적의 욕망 또한 우리 도시의 강력한 주형(鑄型)으로서 우선순위를 차지해왔다. 물론 이를 공공의 이익에 반하지 않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위의 가치 질서가 실제 도시 공간에 투영되어 구현되는 과정에는 다양한 위계의 법정, 비법정 계획과 수많은 법규와 지침 등으로 구성되는 실행 질서가 작동한다. 이 연재는 한국 도시의 모습을 만든 여러 위계의 질서 중 이 실행 질서에 초점을 맞추며, 이를 ‘제도’라는 용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근대 이후 도시를 만드는 제도는 그 지위 자체로 합리성과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그 강제력을 인정받는다. 한국의 현대 도시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학자와 실무자가 지속적으로 비판해왔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듯, 도시 제도는 완전하지도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든다. 또한 본질적으로 도시 제도는 특수해가 아닌 일반해의 성격이 강하므로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때 오히려 불합리한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공의 이익과 특정 집단의 이익 사이를 중재하기보다 오락가락한다. 그 와중에 개개인은 수혜와 대가의 계산서에 일관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연재에서는 제도가 만든 도시의 모습에서 특히 이런 점들을 다각적 차원으로 들춰내고자 한다. 이번과 다음 회에서는 그에 앞서 제도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 즉 제도는 정당한지 그리고 효율적인지 다룬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이리저리 헤집는 방식으로. 각주 정리 1. Stephen Marshall ed., Urban Coding and Planning, London: Routledge, 2011. 2. Eran Ben-Joseph, The Code of the City: Standards and the Hidden Language of Place Making , Cambridge: The MIT Press, 2005. 3. 대표적으로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건축의 품격 향상을 위한 건축물 형태 규제 개선방안 연구’(2011), ‘근린생활환경 향상을 위한 건축물 규제 개선 기본방향 연구’(2012), ‘사람 중심 가로 조성을 위한 도시설계 연구’(2015), ‘장소기반 전략계획을 위한 도시계획체계 개선방안 연구’(2018) 등이 있다. 4. 한국어로 쓰였으나 전공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법 조항을 옮기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5. Spiro Kostof, The City Shaped: Urban Patterns and Meanings Through History , London: Thames & Hudson, 1991, pp.10, 70~71. 6. Marshall, 앞의 책, p.10. *환경과조경417호(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모던스케이프] 주택 정원의 유행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은 ‘낙엽을 태우면서’(1938)에서 낙엽을 타는 냄새가 갓 볶은 커피와 잘 익은 개암이 생각날 정도로 좋다고 했지만, 삼십여 평의 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쌓이는 낙엽을 긁어모으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잔뜩 푸념을 늘어놓았다. 낙엽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비에 젖거나 흙 속에 묻혀 지저분해지니 날아 떨어지는 족족 뒷시중 들 듯 치워내야 했으니, 정원 관리가 번거로워도 부지런히 챙겨야 하는 일임을 아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표현이다. 한편으로 벚나무, 능금나무, 단풍나무, 담쟁이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칙칙한 낙엽으로 뒤덮인 상황을 묘사한 글을 읽다 보면, 문득 작가의 정원이 궁금해진다. 교수이자 작가인 이효석이 몸소 가꾸던 정원일 것인데, 이 시절 지식인의 주택 정원은 과연 어땠을까 싶은 것이다. 수필이 발표된 1930년대는 일부 계층에서 주택에 정원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주택 정원에 관심을 두고 가꾸기에 열중한 이는 대체로 문학인, 음악인, 교수, 사업가 등이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해외 유학 경험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효석과 함께 구인회(九人會) 동인이었던 소설가 이태준(1904~미상)은 도성 밖 성북동으로 이사하고 ‘나무와 꽃 속에 싸인 초옥草屋’을 꾸몄다. 지금은 수연산방이라는 전통 찻집으로 바뀌었지만, 이태준 생전에는 음악을 전공한 부인 이순옥과 함께 마당 곳곳에 다양한 수종을 심고 가꾸어서 대중 잡지에 정원이 소개될 정도였다. “샛노란 꽃이 산들거리고 파초와 석류나무가 있으며, 담장에는 한련과 봉선화, 다알리아, 씨 없는 개량종 해바라기를 식재했다. 나무를 집 울타리 삼아 뺑 둘렀고 그 아래에는 갓나무, 진달래, 채송화, 백일홍을 가득 심었다. 정원 한편에는 텃밭을 두어 채소를 심었다.” 특히, 부인 이순옥의 화초에 대한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이 다알리아는 일본서 주문해왔는데 보통 다알리아는 꽃이 피면 무거워서 고개를 숙이는데 이것은 그대로 꼿꼿하게 서있다고 해서 사왔어요. 그리고 이 해바라기는 꽃 가운데 씨가 생기지 않고 가운데서부터 꽃잎이 족– 연달아 나와서 여간 이쁜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어떤 유명한 미술가가 이 꽃을 보고 기가 막히게 감탄하고 칭찬을 했다고 해서 사다 심었어요.” 정원에 심기 적절한 원예 품종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신선하지만, 정원에 해바라기를 심게 된 이유가 (어쩌면 반 고흐일지도 모르는) 어느 유명한 화가의 해바라기에 대한 감상평 때문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참고문헌 길지혜·박희성, “1920~30년대 한국 주택정원 인식과 정원가꾸기 양상”, 『한국조경학회지』 50(2), 2022, pp.138~148. “나무와 꽃 속에 싸인 초옥, 소설가 이태준씨 댁”, 『신가정』 1933년 6월호. “自然的으로 만든 庭園, 은행가 김연수씨 댁”, 위의 책. “장안의 국제결혼 스윝홈순례 류일한씨”, 『여성』 1937년 11월호.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1938. 사진 출처 그림 1. “조선말을 사랑한 선비 작가 이태준”, 「한겨레」 2015년 10월 1일. 그림 2. “나무와 꽃 속에 싸인 초옥, 소설가 이태준씨 댁”, 『신가정』 1933년 6월호, pp.127~129. 그림 3. 『신가정』 1933년 6월호. *환경과조경417호(2023년 1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2022년을 보내며
    분주했던 2022년이 저물어간다. 올해 잡지 지면에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와 한국 조경 50주년이었다. IFLA 2022 조직위원회 사무국 역할을 맡아 일 년 내내 전쟁터 같았던 환경과조경 편집실을 정리하다 2022년 과월호들을 다시 펼쳤다.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 조용준 소장(CA조경기술사사무소) 특집으로 1월호를 꾸렸다. 평평한 땅, 생성적 경계, 보이지 않는 깊이, 반응하는 표면 등 그의 설계 사고와 중심 개념을 만날 수 있었다. 3월호에는 IFLA 2022의 주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특집 ‘미리 보는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를 기획했다. 7개월 뒤인 10월호 특집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에는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에서 열린 IFLA 2022의 성과를 기록했다.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는 기후변화와 도시 위기에 대응하는 조경가의 비전과 전략을 심층 논의하고 지혜를 모았으며, 이를 통해 한국 조경계 또한 혁신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근대 조경의 창립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탄생 200주년(4월 26일)을 맞아 4월호 특집 ‘옴스테드 200’을 구성했다. 참여 필자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옴스테드의 삶과 업적, 공원관, 저작과 작품, 기록물을 폭넓게 아우르는 지면을 꾸릴 수 있었다. 5월호에 특집으로 담은 ‘Z+T 스튜디오’의 작업들은 동시대 중국 조경설계의 진격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전통의 무게와 개발 시대의 속도전 모두를 넘어선 작품들에서 중국 조경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6월호 특집 ‘공원, 고쳐 쓰기’는 도시공원의 리노베이션을 둘러싼 복원과 변경, 보존과 재생의 충동 등 여러 난제를 국내외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짚었다. 창간 40년을 맞은 7월호(통권 411호) 특집으로는 한국 조경의 기반을 질문하는 기획,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올렸다. 한국 조경의 태동과 함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과 대상, 영역을 포괄하지 못하며 조경의 사회‧문화적 역할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이슈를 일곱 가지 시선으로 다뤘다. 이어서 8월호 지면에는 조경계가 당면한 현안 중 하나인 자격 제도의 문제를 담았다. 2023년에 새 회장단을 꾸릴 한국조경협회가 8월호 특집 ‘조경설계 자격제의 문제와 대안’에서 제시된 과제를 적극 추진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11월호 특집으로는 북서울꿈의숲에서 열린 ‘2022 서울정원박람회’의 주요 작품을 배치했으며, 지난 8월에 개장한 새 광화문광장도 두 편의 비평과 함께 비중 있게 다뤘다. 이번 12월호에는 한국 조경 50년의 성과와 『환경과조경』 40년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기록한 ‘한국 조경 50, 환경과조경 40’을 마련하며, 매년 본지가 주최하는 ‘올해의 조경인’과 ‘젊은 조경가’ 선정 결과를 싣는다. 제25회 올해의 조경인으로는 IFLA 2022 조직위원장으로 활약한 조경진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원장, 한국조경학회 회장), 제5회 젊은 조경가로는 정원에서 공원에 이르는 다양한 유형의 조경 설계와 시공에서 성과를 낸 최윤석 소장(그람디자인)이 선정됐다. 눈 밝은 독자들은 2022년에 『환경과조경』이 시도한 몇 가지 변화를 쉽게 알아챘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 중 하나는 본문 첫 순서로 근작과 조경가 인터뷰를 배치한 지면이다. 다른 지질, 다른 분량, 다른 구성으로 실험한 이 꼭지에 대해 공간의 형태와 문법뿐 아니라 조경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2월호에 랩디에이치(Lab D+H)의 ‘타임워크 명동 공유 정원’으로 처음 선보인 이 지면에 지난달 11월호까지 에이치엘디자인(HLD)의 ‘LH 시그니처 가든’, 김아연의 ‘전주 야호 맘껏숲놀이터’, 오피스박김의 ‘현대자동차 영남권 연수원’, 바이런의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조경작업소 울의 ‘광나루 모두의 놀이터’, 얼라이브어스(ALIVEUS)의 ‘포스코 파크1538’, CA 조경기술사사무소의 ‘KT 디지코 가든’, 디자인 스튜디오 엘오씨아이(loci)의 ‘미래농원(mrnw)’을 담았다. 또 다른 새 기획은 본문 후반부에 배치한 ‘어떤 디자인 오피스’였다. 이 꼭지에는 매달 한 회사를 선정해 설계 작업과 설계사무소 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조경하다 열음, 안마당더랩, 본시구도, 오픈니스 스튜디오, 엘피스케이프, 조경설계 디원, 얼라이브어스, 안팎, 조경그룹 이작,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가 참여했는데, 기사가 나간 뒤 인턴과 신입사원 지원자가 적지 않게 늘었다고 한다. 올해 1월호부터 시작한 박희성 교수(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의 연재 ‘모던스케이프’는 도시공원과 도시계획은 물론 동물원, 경마장, 관광, 전차, 식목일, 어린이 등이 근대 도시의 풍경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탐사하는 내용으로 많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았다. 내년에도 모던스케이프 시즌2가 이어진다. 지면의 청량제 역할을 해온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의 ‘풍경 감각’과 유청오 포토그래퍼의 ‘유청오의 이 한 컷’ 또한 내년에도 계속된다. 한국 조경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기록될 2022년을 이렇게 통과한다. 늘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 편집위원과 필자, 번역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3년에도 『환경과조경』은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에서 소통하는 공론의 장이 될 것을 약속드린다.
  • [칼럼] 조경계의 화이트 스완
    ‘화이트 스완(white swan)’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반복적으로 일어나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경제학 용어로, 뉴욕 대학교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교수가 『위기의 경제학(Crisis Economics)』(2011)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졌다. 그는 모든 경제 위기는 시기와 상황에 따른 고유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지만, 통화 정책의 완화, 금융 시스템에 대한 느슨한 감독, 과도한 차입에 의한 자산 가격 거품, 투자자들의 지나친 탐욕 등 공통적 요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며 예방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같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인 ‘블랙 스완(black swan)’과 대비되는 이론이다. 블랙 스완은 월스트리트 투자 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2007년 월스트리트의 허상을 파헤친 동명의 책을 출간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전 세계의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최근에 벌어진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블랙 스완이라면, 카카오 먹통 사태와 레고랜드발 금융 위기, 세월호 참사에 이어 수많은 사전 징후에도 전혀 대비하지 않아 소중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정부의 정상적인 사전 대응이 있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화이트 스완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거래량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고, 강원도 레고랜드의 지급 보증 거부 사태가 낳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의 혼란으로 건설 경기가 얼어붙고 있는 상황에서 조경계의 긴장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조경 분야의 블랙 스완의 예로 폭우, 가뭄, 혹한 등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예측 불가능한 식생 환경을 들 수 있다. 이상 기후로 식재 수목이 예전과 다르게 높은 하자율을 보이고 있지만, 최근의 불규칙한 기후변화는 통계 예측 수준을 넘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반면 조금만 더 면밀히 살펴보고 준비하면 충분히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는 화이트 스완도 있다. 올해 탄생 반세기를 맞은 한국 조경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과 함께 학문과 산업 모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고도 성장기에 급속한 개발로 인해 훼손된 국토의 상처를 치유하고 도시 환경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누구보다 조경인들이 앞장서 왔다. 하지만 여전히 조경은 위상에 걸맞은 사회적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조경 분야에 대한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그중 하나다. 조경계가 잘 나가던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지’ 하며 우리의 권익을 찾는 데 침묵해왔다. 반면 건축 등 인접 분야는 정부의 지원과 업역 확대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분주히 움직인 결과, 설계대가를 현실화하고 설계공모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그들만의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런 결과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한건축사협회나 건축공간연구원과 같은 정부출연 연구 기관의 치밀하고 지속적인 연구와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조경 분야도 조경진흥법을 마련하고 체계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조경진흥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요원하다. 한국조경협회를 비롯한 여러 조경 단체는 여전히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쌈짓돈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경 분야의 정책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환경조경발전재단 또한 조경진흥법에 지원 관련 조항이 명시되어있음에도 여전히 관련 기관에서 정책 자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법과 시행령 등 제도적 장치없이는 정부의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경계는 그동안 능동적 준비와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늘 위기를 겪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 조경계의 첫 번째 화이트 스완이다. 조경이 사회적 가치나 중요도에 비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조경 분야를 지원하는 강력한 중앙부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장기적으로는 국토교통부의 일개 녹색도시과를 넘어 산림청과 환경부 그리고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조경 관련 사업을 모두 아우르고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녹색 정부 부처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조경가로서 전문성을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자격 제도도 보완해야 한다. 건축가처럼 창의적 디자인을 수행하는 조경가에게 조경기술사와 기사로 대표되는 엔지니어 라이센스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나 다를 바 없다. 올해 한국조경학회와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는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가칭 ‘조경사’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경가를 위한 법정 단체를 구성하고 ‘조경사’ 제도를 도입해 정책적, 제도적 지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도 올해 조경진흥법 제5조에 따른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의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제도’ 신설로서 ‘조경사 제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늦었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조경계도 앞으로 진행 상황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조경계의 두 번째 화이트 스완은 조경 분야의 성장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대학에 50개가 넘는 조경학과가 있고 매년 1,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지만, 대다수 학생은 전공인 조경 분야로 진출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설계, 시공, 자재 할 것 없이 조경 업계 모두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조경계가 호황일 때 대부분의 학생이 조경설계가가 되고 멋진 조경시공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MZ세대의 특성상 건축, 토목 등 타 분야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지만, 기후위기라는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 어떤 분야보다 역할이 크고 비전이 있는 조경 분야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후진 양성을 소홀히 해온 선배 조경인의 노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제라도 미래의 전문 조경인이 될 조경학과 학생과 후배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비전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인재 양성이야말로 건강한 조경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올해는 한국 조경이 50주년을 맞이하고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가 30년 만에 다시 한국 광주에서 성공리에 개최된 뜻깊은 해다. 코로나19 사태로 여전히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도, 세계 40개 나라에서 1,500여 명의 조경가가 참여해 어느 대회 못지않은 성황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한국 조경의 위상과 저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경가는 코로나19와 기후위기로 야기되는 도시 환경과 생태계의 변화, 인류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선도적이고 실천적인 해법을 제시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탄소중립적인 미래로 옮기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조경계가 과거의 성장을 이어가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려면 학회와 관련 단체는 전략적 연구를 바탕으로 안정적 미래를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하며, 업계도 인재가 우리의 업을 계승할 수 있도록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풍경 감각] 매일의 호흡법
    새벽의 수영장. 레인 한쪽 끝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코앞에 바닥의 타일이 보일 정도로 깊이 내려간다. 손발을 뒤로 크게 휘저어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레인의 절반쯤에 다다르면 숨이 찬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갔다 오면 속력이 줄어들 테니 ‘조금만, 조금만 더’를 되뇌며 손발을 재촉한다. 드디어 반대편 끝에 손이 닿는다. 수영장 바닥을 치고 올라와 참았던 숨을 몰아 마신다. 레인을 잠영으로 헤엄치고 나면 실력이 좀 나아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초급반 때에는 키 판을 부여잡고 얼굴을 물 밖에 내놓고도 숨이 가빴는데…’하며 몇 번이고 자꾸만 잠영으로 수영장 바닥을 오간다. 수영을 마치고 돌아와 일과를 시작한다. 메일을 확인하고 원고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져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렵다. 참았던 숨을 하루 종일 나눠 쉬는 기분이다. 숨 가쁘지 않아요? 오랫동안 수영을 해온 분들이 숨을 쉬며 하라고 건네준 말이다. 사실 ‘이렇게 열심히 해야 느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가볍게 들은 것이 뒤늦게 생각난다. 이제는 적당한 호흡법을 생각한다. 때때로 속력을 줄여 숨을 넉넉하게 쉴 것. ‘조금만 더’는 즐겁지만 이후 밀려오는 피곤함은 무거우니까. 내일도 수영장에 다녀오고 원고를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
    사람, man 사람에게는 누구나 경험하는 공간이 있다. 어떤 사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장소 자체가 감명을 준다. 뇌리에 남은 공간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그 공간을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로 만들어준다. 다양한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 설계를 거쳐 하나의 장소로 만들어지고, 우리가 의도한 대로 어떤 사람에게 소중한 장소로 기억에 남는 경험과 즐거움을 주는 설계를 하는 사람. 우리가 꿈꾸는 디자이너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아닌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것을 적정하게 제시하는 설계가(디자이너)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조경사무소는 나를 위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엄연히 클라이언트가 있고,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해결책을 최적의 비용으로 도출해 요구한 것 이상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설계로 평가받아야 하는 프로페셔널 집단이다. 나무, tree 무성한 잎은 한낮 뙤약볕 아래에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고, 형형색색의 단풍은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게 해주며, 한 줄로 늘어선 가로수는 나그네의 길을 인도하고, 한데 모인 숲은 대자연이 되어 청정한 공기를 제공하고, 아픈 땅을 치유해준다. 누구나 다 아는 나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무실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기본적인 도구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여러 장점이 많은 나무도 물, 햇빛, 토양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생명을 잃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나무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밥벌이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사무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잘 만든 설계로 장소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며, 그 결과로 얻은 과실을 우리 사무실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사무실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물, 햇빛, 토양이 되어 함께 사람과 나무를 잘 키워야 한다. 그렇게 튼튼하게 자란 나무가 다시 우리 사람들에게 좋은 양분을 돌려주는 그런 오피스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나무’다. 전지적 참견 시점 우리는 공동주택, 리조트 단지, 공원 등 규모가 큰 대상지를 설계한다. 업무 특성상 이용자나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는 소규모의 프로젝트가 아니므로 설계 결과물이 이용자들에게 닿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러한 시차 안에서 하는 일련의 노력이 우리의 설계 과정이며, 어느 예능 프로그램 제목처럼 전지적으로 참견해 시‧공간을 뛰어 넘고자 노력한다. 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용자가 공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상호 간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한 디자인을 고민하고, 분석하고, 예측한다. 최적의 설계안을 도출하기 위해 거치는 모든 연속적인 과정이 우리의 설계 과정이다. 다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참견자일 뿐 직접적인 이용자가 아니기에 우리의 설계와 완성작 사이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이 부분이 항상 아쉬우므로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시공 모니터링(이용자의 행태와 환경 변화에 따른 공간의 변화 과정), 선진 답사, 현장 조사와 설문 과정 등 최소한의 간접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파트너십 업무 방식은 크게 계획설계과 실시설계로 분류하여 진행하고 있다. 공모, 현상 등 경쟁 프로젝트 및 계획이 필요한 디자인 파트와 실시설계 및 일반 프로세스 업무를 담당하는 실시 파트로 구분했으며 직원들의 성향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 이 방식은 완성도 높은 설계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운영 방안이며,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형할 수 있도록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있다. 역량 있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운영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조직(팀)이 공동 업무를 통해 만드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팀워크와 관계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개인의 사적인 삶은 지향하지만,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행동은 지양한다. 이러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진 스타 설계가가 없어도 내실 있는 성과와 경쟁력으로 클라이언트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재까지는 전통적인 직급 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질서와 에티켓을 위한 것이지 디자인 과정에서의 직책은 무의미하다. 더 합리적인 디자인에 따라 설계 방향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다 함께 맞춰가고 있다. 물론 경험과 노하우는 경력이 많을수록 더 있겠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는 지위 고하가 없으므로 디자인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수평적인 대화와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다. 기나긴 과정 2016년 봄, LH의 설계공모로 시작한 세종2차 e편한세상(DL) 프로젝트는 공동주택치고는 그나마 빠르게 2021년 준공되어 주민들이 입주했다. 공동주택 프로젝트는 계획, 설계를 거쳐 공사하고 입주하는 그 기간까지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공동주택의 특성상 건축을 필두로 다양한 협력 공종의 협업을 통해 땅을 나누고, 때로는 분산된 토지를 다시 합치고 그 안에 머무를 사람들의 특성(분양, 임대) 및 세대수를 정하고, 무엇보다도 그 생김새가 도시와 어울리는지를 전문가 집단이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기간에 조경가는 법적으로 필요한 녹지 면적과 교목, 관목의 수를 추산하고, 세대수에 따른 부대시설(놀이터)을 어떤 디자인으로 할지 고민하고, 그 도시가 정한 법률에 부합된 설계인지를 평가(사업 승인)받고 나서야 실제 공사를 위한 실시설계를 한다. 이러다 발주처의 상황이 바뀌거나 감독관이 변심(?)하면 원래대로 할지, 옆집보다 더 좋게 해줄지 말지(특화설계)를 고민한다. 시간과 비용에 대한 검증이 끝나면 드디어 공사를 시작한다. 건설 공사의 마지막 작업인 조경 공사가 완료되면 도면대로 시공됐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주한다. 오늘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단지는 몇 년 전에 설계해 납품한 것일까. 준공된 곳을 가서 보면 우리가 설계한 곳이 맞는지 머뭇거리거나 촌스러운 디자인에 손발이 오그라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는 의도대로 시공되어 반가울 때가 많다. 무엇보다도 그곳을 이용하는 아이와 부모의 밝은 미소를 보면 따뜻한 마음이 들며 조경가로서 뿌듯하다. 아쉬워서 기대되는 2019년 가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건축사무소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쁘냐? 재미 있는 프로젝트 하나 있는데 시간되면 네가 꼭 해줬으면 좋겠다.” 늘 그렇듯 해외 프로젝트의 실행 확률은 반반. 제주 프로젝트 이후 대규모 리조트 단지 설계에 목마르던 때라, ‘콜’을 외치고 시작한 베트남 호치민 프로젝트. 아무것도 없는 대상지의 면적이 몇 헥타르라는 기초 데이터만 가지고 건축과 함께 진행하며 경계 내에서 이쪽으로 풀빌라, 여기엔 워터파크, 저쪽에는 도시와 조경, 때로는 건축 배치 및 입면까지 간섭(?)하며 즐겁게 프로젝트에 임했다. 아쉽게도 기본계획 마스터플랜과 동영상 편집까지 마무리하고, 최종 기본계획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위한 현지 출국을 일주일 남기고 코로나19라는 돌발 변수에 발목이 잡혔다. 하늘길이 막히고 두세 달의 기다림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금세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직원들과 해외 답사 겸 나들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더더욱 아쉽다. 이제 코로나19가 슬슬 풀리고 있으니 다시 추진되길 기대해본다. K-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비전 2030 한국의 공동주택 브랜드와 완성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베트남 등 동남아에 진출하여 최고급 주거 단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장점인 주거 설계 능력과 노하우를 살려서 조경 설계를 하나의 브랜드처럼 만들어 진출해보고 싶다. 더 나아가 건설사나 건축이 아닌 조경가가 주도해 계획, 설계부터 시공까지 토털 디자인을 한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케이팝(K-Pop)이나 케이푸드(K-Food)처럼 조경 산업도 하나의 글로벌한 콘텐츠가 되도록 도전해보고 싶다. 현재 조경 외에 디자인 분야의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여 더욱 심도 있는 설계와 더불어 영역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조경 분야도 점점 더 다원화되고 영역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설계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성장은 고사하고 생존마저 힘든 시대다. 동시에 그린 비즈니스 시장은 더욱 수요가 팽창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태생은 조경 설계이므로 그 뿌리는 유지하되, 영역의 확장을 통해 조경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는 토털 디자인 회사로 진일보하여 앞으로의 10년을 맞이하고자 한다. [email protected]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는 자연 공간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디자인을 모토로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다가오는 시대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보다 앞서 나갈 수 있도록 열정적인 자세로 일하고 있다. www.mnt5.com
  • [모던스케이프] 창경궁 대온실 건립과 진화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芙蓉地) 권역을 지나 불로문(不老門)을 향해 가다 보면 우측 담장 너머 창경궁 북측에 자리한 대온실이 보인다. 조선의 궁궐에서 하얗고 투명한 대형 유리 온실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낯선 일이라,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대온실의 등장에 각양각색으로 반응한다. 조선의 궁궐에 근대 건축물이 있으니 신선하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지 유산이니 철거가 마땅하다, 궁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궁궐은 오직 조선다운 전근대 풍경이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개항 이후 가장 급진적으로 변한 곳은 다름 아닌 궁궐이다. 잘 알려진 경운궁(덕수궁)의 석조전이나 정관헌, 경복궁 집옥재, 창덕궁 희정당 등 전각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채로운 재료와 문양, 조명, 가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창경궁의 대온실과 프랑스식 자수화단, 분수의 앙상블과 대칭적 마감은 경운궁 석조전 일대의 경관만큼이나 근대적이다. 1909년에 조성된 대온실은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건립 계획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만든 시설이다. 대온실의 설계자는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 1856~1921)인데, 대온실 정면의 자수화단과 분수는 누가 설계하고 조성했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건축가가 아닌 원예학자가 대온실 설계를 했으니 주변 조경도 함께 다뤘을 수 있고, 아니면 온실 시공을 한 미상의 프랑스 회사가 조경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쿠바 하야토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학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신주쿠교엔(新宿御苑)의 식물원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1896년 식물원에 최초로 서양식 온실을 건립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창경궁 대온실 설계는 신주쿠교엔의 대온실 건설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신주쿠교엔의 서양식 온실은 1945년 미국의 폭격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옛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데, 창경궁 대온실은 이 온실의 1/4 규모로 작지만 외관은 매우 닮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일본 궁내청 소장 창덕궁 사진첩』, 2006. 문화재청, 『창경궁 대온실 기록화 조사 보고서』, 2007. 김정은, “일제강점기 창경원의 이미지와 유원지 문화”, 『한국조경학회지』 43(6), 2015, pp.1~15. 김정화, 『우리나라 식물원의 기원과 진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昌慶苑植物園 培養室開放 西洋化를 公開”, 「중앙일보」 1932년 3월 6일.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museum.seoul.go.kr) 문화재청 홈페이지(www.heritage.go.kr) *환경과조경416호(2022년 12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광장의 공원화
    벌써 6년이 지났다. 그해 가을은 광장의 계절이었다. 가을을 넘겨 이듬해 봄이 움틀 때까지,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타오르게 한 집회에 연인원 1,500만 명이 참가했다. 차디찬 계절의 뜨거운 광장을 통과하며 『환경과조경』은 특집 ‘광장의 재발견’을 기획했다(2017년 3월호). 특집 서문 일부를 다시 옮긴다. “……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래 최대의 인파, 광장의 역사를 새로 쓴 날 …… 우리는 광장을 뒤덮은 인파를 보며 주체적 시민의 힘에 압도되기도 하고, 그 축제적 가능성에 전율하기도 한다. 한국의 도시민에게 광장은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긴 침묵 후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를 통해 시민이 주체가 된 광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광장을 매개로 집단적 정치 참여를 축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폭발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광장이 형성되고 있는 지금의 광화문광장 현상은 광장과 광장 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 여러 공공 공간 가운데 광장만큼 일상적 이용과 비일상적 이용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공간이 있을까. 광장만큼 도시와 장소의 맥락, 정치와 역사적 상징과 관련된 공간이 있을까.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광장이 녹음을 드리운 공원과 유사한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김정은, 당시 편집팀장). 4년 전 여름, 만든 지 10년도 안 된 광화문광장을 천억의 예산을 들여 뜯어고치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잃어버린 역사성 회복’과 ‘시민의 일상과 조화된 보행 중심 공간화’라는 석연치 않은 명분을 앞세운 서울시는 많은 전문가와 시민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강행했다.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하는지 소통과 토론을 생략한 채 정치 일정에 맞춰 완공 시점을 못박고 과속으로 질주한 사업. 누가 봐도 전시성 포퓰리즘의 산물이었다. 급기야 2019년 초,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환경과조경』 2019년 3월호는 당시 에디토리얼의 제목처럼 “새 광화문광장, 토론은 이제 시작”이기를 바라며 당선작 ‘깊은 표면’과 수상작들을 무려 다섯 편의 비평문과 함께 게재했다. 2020년 여름, 토건 시대에 버금가는 속도로 사업을 주도하던 서울시장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공사는 이미 시작됐지만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새 시장은 10년 전 자신이 만든 광장에 새 옷을 입혔다. 숙의와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직진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는 결국 올해 8월 초, 공원의 옷을 입고 일단락된다. 서울시 보도자료의 머리글은 “녹지 면적 3.3배로 늘어난 ‘공원 품은 광장’”이다. 광장의 1/4을 녹지로 채웠고, 녹음이 풍부한 편안한 쉼터에서 일상의 멋과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5천 그루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역사성 회복과 접근성 향상을 명분 삼아 시작된 공간 정치 프로젝트가 자연 브랜드와 휴식 아이템이 한가득 연출된 공원으로 귀결된 셈이다. 8월의 광장은 나무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 바닥분수에서 첨벙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10월의 광장 위에선 다시 누군가를 퇴진시켜야 하고 또 누군가를 구속해야 한다는 외침이 맞붙어 충돌하고 있다. 봉건 왕조의 흔적과 근현대사의 파편이 흩어져 쌓인 혼돈의 장소를 낭만의 광화문‘공원’으로 교정할 수 있을까. 선한 공간의 대명사인 공원으로 모순의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지난한 굴절과 수정 과정을 겪으며 마무리된 새 광화문광장 당선작 ‘깊은 표면’의 최종안을 싣는다. 설계자 조용준의 디자인 노트와 이명준, 정평진 두 비평가의 글을 함께 싣는 것은 광화문광장이 여전히 우리의 토론을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광장의 필요충분조건이 좋은 설계인 것은 아니다. 광장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만들어진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틈
    평소보다 짙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학교 화장실에는 그리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얀 전등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고, 평범한 회색 가벽이 화장실 두 칸을 나누고 있었다.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가벽과, 가벽에 붙은 화장지,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보였다. 그날 밤 가벽과 바닥 사이의 한 뼘 채 되지 않는 틈에는 여러 개의 그림자가 모여 만든 검고 선명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휴대폰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와 찰칵 셔터 소리를 냈다. 설계 스튜디오로 돌아와 숨을 골랐다. 다음날까지 결과물을 제출해야 했고, 늦은 시간이지만 환하게 불이 켜진 설계실에는 과제를 하는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가벽 아래로 손을 뻗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모른다. 혹시라도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 따지기는커녕 누구인지 확인조차 못했고, 옆 칸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간 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낯선 화장실에 갈 때면 바닥과 가벽 사이의 틈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길게 늘어져 흐늘거리는 휴지 그림자 위로,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쥔 낯선 손이 불쑥 솟아오를 것 같아서다. 10cm도 되지 않을 그 틈을 막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손이 닿을 듯한 높이의 낮은 가벽도, 벽면의 크고 작은 구멍도 전부 신경 쓰인다. 오래 전 짙은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야 할 화살을 작은 틈에 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두 막아주는 매끈하고도 완전한 벽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글·그림 조현진 | 연필 드로잉에 디지털 채색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지의 기억을 읽고 장소의 서사를 담는 디자인
    조경이 하는 일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먼저 찾게 되는 것은 그 지역만이 가진 이야기들이다. 문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땅이 생겨남으로써 발생한 자연과 사람의 현상적 이야기들. 그것은 역사, 지리, 기후, 생태, 인문 등 대지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 디자인에 앞서 그 장소가 지닌 이야기를 탐색하고, 그 공간이 요구하는 적합한(올바른) 이용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서 풀기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가장 먼저 그곳의 내력을 살핀다. 오랫동안 배어 있던 본 모습, 원래의 쓰임, 여기에 왜 이렇게 큰 나무가 남아있는지 등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품는다. 사실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설계 수순이다. 그런데 의외로 프로젝트를 의뢰한 사람도 그런 내력을 모르고 오히려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계안에 지역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하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제공해주어, 그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성 찾기와 공간 디자인 공간을 다룰 때 시각적 디자인의 완결성은 공감각적 측면에서 신선함, 안정감, 흥미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각적 디자인보다 먼저 하는 일은 장소성 찾기다. 장소의 가치와 쓰임을 정립하고 그것을 가장 적합한 형태로 공간에 녹여내는 것이 좋은 공간 디자인이다. 최근 진행한 부산 사상구 감전당산공원이 그랬다. 구청장 보고회 때 발표의 절반 이상을 장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데 썼다. 오래된 나무가 있고 주택가가 밀집한 지리적 연유를 고지도와 함께 설명하고,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담당 국장은 이런 방식의 설계 보고회는 처음 본다고 놀라며 사업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은 이후에 선보인 계획안의 디자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전당산공원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풍경을 추측할 수 있는 옛 지도는 오래된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특정 장소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리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은 공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장소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알리는 일련의 과정이 공간을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디테일 설계를 하면 할수록 디테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디테일은 직접 시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다루기 까다로운 영역이다. 감리나 시공을 병행하지 않는 설계자가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작은 요소에 공간의 정체성과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설계하고 싶어도 현장의 성격과 여건에 따라 공식적이고 효율적인 설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공에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디테일과는 다른) 디테일한 설계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다. 김해시의 작은 프로젝트에서 복잡하고 민감한 설계안을 내자, 담당 부서가 비공식 감리를 요청하는 상황이 생겼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공사의 외주 업체인 시설물 팀은 대충 빨리 마무리하고 현장을 떠나고 싶어 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꼼꼼하게 위치, 각도, 높이 등 하나하나를 조정하고 싶었다. 시청 담당자는 우리에게 감독의 권한을 넘겨주며 원하는 품질이 나오도록 시공사와 협의하도록 했고, 우리는 도면과 다르게 만들어온 시설물을 설계 의도대로 조정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작지만 완성도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을 본 다른 발주처도 비공식 감리를 자연스럽게 요청했다. 중요한 공정의 경우 자재의 종류, 색상, 시설물의 위치 등을 시공자가 설계자에게 허락을 받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비공식 감리를 진행했던 부산 금정구의 어느 쌈지공원 공사. 약 300평 공간에 경사지를 활용해 모던한 계단 공간과 상징 공간, 휴게 공간을 계획했다. 우리는 시공사와의 첫 미팅에서 도면과 공사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연락 달라, 공사의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며 서로 신뢰와 유대를 형성했다. 경사지에 계획한 UHPC 계단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복잡한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구조 도면을 본 철골 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벨을 못 맞춘다고 현장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복잡하긴 했다. 너무 복잡해서 레벨을 이해하고 철골 도면을 작성해 줄 수 있는 구조 팀을 구하지 못해 직접 작업했던 도면이다. 다행히 빠른 시간에 다른 철골 시공팀을 찾았고, 시공 팀은 복잡한 도면을 잘 소화해 상판만 얹으면 되는 깔끔한 계단 구조를 만들어냈다. 공간 계획의 실마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며 풀어나간다. 오래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설화의 짧은 문구에서 시작하기도 하며, 그 장소에서 필요한 이미지를 찾거나 그곳에 있었을 법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김해 경전철 하부의 작은 공간 시설물은 김수로왕의 탄생 장면을 묘사하며 가야 왕도 김해의 오랜 역사를 한번에 보여주었다. 해운대수목원의 생명의 숲은 수목원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작했다. 종류별로 모아놓은 묘목장 같은 수목 전시장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양한 식물과 자연 소재, 공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다. 김성완(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표)의 논문에서 시작된 영도 근대 역사 흔적 지도는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흔치 않은 종류의 일이다. 강영조 교수(동아대학교)가 100년 전 영도 지도를 입수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김성완 대표는 오래된 길에서 보아온 풍경을 ‘경관 유산’이라는 새로운 유산의 개념으로 제시하며 강영조 교수와 함께 2018년 한국조경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100년 묵은 영도의 도시 풍경 연구를 계기로 근대 영도의 흔적을 따라 걷는 탐방 지도와 안내 책자를 제작하고 전시 공간까지 조성했다. 100년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20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2022 아시아 도시경관상 본상에도 올라 현재 심사 중이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벽면 녹화 프로젝트인 율리 강변 풍경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며 시작했다. 대상지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볼 수 없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서쪽의 낙동강 변이 보이는 지역이었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보았을 강변의 풍경을 상상하며 대상지 벽면에 잔물결의 이미지를 담았다. 작은 공간의 설계 건축가와 함께하는 개인 주택, 카페 등의 조경 설계는 작은 공간이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개인 공간의 설계는 감리를 병행하고 시공사 선정에도 깊게 관여하며 진행한다. 작은 공간일수록 도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작은 바위, 야생화, 소관목, 이끼류 등을 배치할 때는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위치의 수목 한 그루, 바위 하나를 찾기 위해 공사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 공간 설계의 경우 거의 모든 공정을 다루다 보니 별도의 시공사가 있는 공공 공간 설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에 대한 애착이 더 가게 된다. 양산의 개인 주택 정원의 경우 더 좋은 공간으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약에도 없는 작은 정원 수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땅의 기억 아직 많은 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마다 깊은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발주부서의 의욕적인 업무 수행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과 타협하고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경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한 뼘이라도 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의 생각을 옮긴다. 조경이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이나 범위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러 분야와 협업하는 일들, 특히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많은 고민을 통해 공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가용 범위 내에서 분위기를 바꿀 방법과 재료를 찾아보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누군가의 일상 속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담백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언제든 편하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공간(모현호). 입사 초기에는 땅의 형태에 집중하며 디자인했다. 그 결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땅의 기억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소가 가진 이야기, 장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같은 것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만든 공간을 다수의 사람과 공유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앞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질 공간들을 기대한다(김경언). [email protected]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CAT Landscape Design Group)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생각하는 젊은 조경설계인들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의적인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쾌적한 삶과 사람의 가치가 보장되는 맑고 밝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는 다양한 영역의 공간과 시간을 우리만의 신선하고 새로운 역량으로 디자인해나간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CAT를 회사명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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