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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설의 산
    Mountain of legend (중략)…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중략) 백굽이로 흐르는 시냇길을 따라 들어가는 마을입구, 마을 앞에 넓고 트인 논과 밭, 그리고 앞 시냇물, 그리고 마을 뒤에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은 안평대군의 발문에서 표현된 도원의 모습이다. 에덴에서 표현된 이상향이 과수로 이루어진 숲과 물 그리고 근심 없는 삶이라면 무릉도원은 도화 숲과 시냇물 그리고 신선의 마을로서 표현된다. 도원에 들어가는 방법은 백굽이로 휘어져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이 굽이굽이 흐른다는 것은 좌우의 산이 서로 교차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형국을 장풍국 명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뒤에 있는 도화 숲은 주산(主山), 마을 앞에 넓게 트인 곳은 명당(明堂), 앞 시내는 명당수(明堂水)라고 풍수지리에서는 말한다. 장풍국의 명당이란 주변 산세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외부로부터 보호된다. 이러한 지형은 외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기에 전쟁을 피해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된다. 흔히 말하는 십승지가 바로 이와 같은 터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산은 신앙의 대상이자 삶의 터전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어머니와 같은 보호막이며, 우리와 같이 호흡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산은 우리 마을의 이름 없는 뒷동산에 이르러 삶의 쉼터를 형성한다. 여기에는 전설이 있고 민중들의 희노애락이 묻어 있다. 꿈틀거리는 산은 마을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민중의 삶에 믿음과 희망을 준다. 어머니 山! 호랑이 山! 연꽃과 같은 山! 부자를 만들어 주는 山! 재상을 만들어 주는 山! 바로 우리의 산은 민중들의 염원이며 삶의 터전인 것이다.
  • 소나무를 추억하다
    Reminisce about Pine Tree (상략)솔수펑이에 소나무들이 팔려가면서 놀란흙이 드러난 솔숲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경우가 숱했으므로 멀리서도 소나무가 없는 휑한 자리는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들로 숲을 이루던 때를 떠올리는 일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 테지만, 저녁 빛이 비껴들 때 솔숲은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붉고 늙은 소나무 보굿에 맑고 밝은 볕뉘가 스며들면 마치 관능적인 관음보살상을 보듯, 어디에서도 다시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지만, 소나무들이 매우 흔했으므로 때때로 무관심했다. 우리 마을 숲정이를 돌이켜보면 소나무들로 빽빽했던 시절도 한때였다. 지금은 참나무류가 소나무들 보다 더 너른 영역을 차지했다. 넓은잎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겨울이면 왜소해진 솔숲은 한결 더 도드라져보였다. (중략)어느 집 마당에 숲에서 잘라낸 소나무들이 발구에 실려와 쌓이기 시작하면 굳이 ‘성주풀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그 집에서 집칸을 늘리거나 아니면 헛간이라도 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붕에 볏짚이엉을 올리든 기와를 올리든 집에 뼈대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소나무들이었다. 대들보는 물론이거니와 하다못해 작은 서까래까지 모든 소나무들은 숲에서 베어다 썼다. 왕실은 물론 서민들이 짓는 집까지 소나무로 지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나무가 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제사상에 올리는 까닭에 지역마다, 집집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략)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 고분이든, 선비들 그림이든, 심지어 자주 쓰던 그릇에 등장했던 소나무도 많았던 만큼 어쩌면 제값을 받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명품’이란 이름으로 값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솔숲에 소나무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이 잘하는 일은 아닐 것이지만, 어느 한쪽을 거덜 내는 짓 또한 잘하는 짓은 아닐 것이다. 깊은 산골 소나무는 방구들을 덥히는 땔감으로도 쓰여야 하고, 또 누군가의 집을 짓는 부재로도, 가구를 제작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문제는 소나무를 파낸 다음 뒤처리 문제였다. 도심의 공원이나 도시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저택으로 팔려갈 때, 소나무를 파낸 자리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이 잦았다. 하다못해 꼴풀이라도 길러야 했지만, 도무지 산주인들은 무관심했다. 한겨울 마루에 놓인 무쇠난로에 소나무를 땔감으로 넣을 때면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들이 내뿜는 어떤 향기는 온전히 나무 냄새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그 비밀을 영영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당장은 나무 타는 냄새만으로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넉넉하게 기뻤다. 숲에서 사라지는 것이 어디 소나무뿐이겠는가 마는 조금 더 오랜 세월 청정한 소나무들과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을 끝내 놓지 못했다. 솔숲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에 대한 어떤 묵시록은 아닐까.
    • / 2013년06월 / 302
  • 식영정
    Sigyongjeong 식영정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일원면적 28,039㎡에 위치하며, 조선 명종 때의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조영한 정자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주변에 자리한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산실인 환벽당, 취가정, 소쇄원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화합하는 순응의 미학을 공간적, 지형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1979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이후 2009년 9월 18일 명승 5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Sigyeongjeong which is located in San 75-1, Jigok-ri, Nam-myeon, Damyang-gun, Jeollanam-do was constructed by a great scholar Kim, Sung Won and his father-in-law Im, Eok Ryeong in the King MyeongJong’s reign of Joseon dynasty. It is 2gan(front) by 2gan(side) size on the center of the turtle-shaped rock. The aesthetic of adaption is connected spatially, topographically, and functionally with Sigyeongjeong, the valley and the lake. It was appointed as Scenic Spots and Places of Historic Interest no.57.
    • / 2013년06월 /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