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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늙은 근대성과 도시 공공성의 스펙터클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공공 공간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는 무엇인가?
서울시는 지난 6월 16일 제출된 82개 작품 중에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으로 이_스케이프(대표 김택빈)와 장용순(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상구(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팀이 공동으로 제안한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을 최종 선정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요구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 공간 설계는 세운상가의 민간 소유 영역을 제외하고 서울시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공중 보행 가로인 데크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당선작을 중심으로 설계안을 들여다보자. 당선작, 2등작, 그리고 3등작은 일견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인식의 차이를 갖고 있다. 애매모호한 가치를 설정하거나 경직된 건축화의 태도로 일관한 안들과 달리 당선작은, 세운상가를 둘러싼 공간 담론, 세운상가에 대한 공적 개입의 타당성, 세운상가 내부목소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도시와 삶의 흔적에 대한 존중이란 네 가지 측면에서 볼 때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는다.
‘Modern Vernacular’ 즉 ‘현대적 토속’이란 제명이 대변하듯이 당선작은 공공공간에 개입함으로써 세운상가를 넘어서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좀 더 큰 틀에서의 도시 역사, 공간 구조와 장소성을 보완하거나 복원하는 데 가치를 부여했다. 당선작의 보행 데크 활성화는 크게 보면 남북축의 기능에 의존한다. 세운상가의 동서축 연결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느슨하다. 개발 시대 세운상가라는 거대한 구조물로 인해 단절되었던 동서 양축과 기존 도시 조직의 연결에 대해 여백과 흐름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본 점은 인위적 개입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어서 좋다. 남북을 잇는 보행 데크를 복원하여 구체적인 프로그램 공간을 삽입하고 세운초록띠공원 자리는 종묘와 연결되는 경사진 광장으로 전환하는 제안이 남북축 보행 데크 활성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렇듯 남북과 동서축에 대해 서로 다른 언어로 접근한 것 역시 도시 구조의 역사와 장소성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듯하다. 당선작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세운상가의 공공 공간에 대한 개입은 여전히 개념과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거기엔 세운상가 내부의 치열한 목소리가 들리기 않기 때문이다. 세운상가를 소유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주체로 분리해서 접근하다 보니 복잡하게 얽힌 내부의 목소리를 공공이 소유한 공공 공간으로 이끌어낼 수 없었다. 이는 결국 세운상가 활성화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즉 추진하기 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서울시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가 공공 공을 다루는 전략적 태도다. 본질이 문제의 핵심을 우회하고 있는데, 세운상가는 과연 활성화 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빅 플랜을 넘어서기 위한 공공 공간 개입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될 수 있을까?
세운상가를 개발 시대의 빅 플랜Big Plan의 상징이라고 보자. 시대가 바뀌고 도시적 상황이 변화했다. 가장 크게는 세운상가를 지탱해 온 도시 산업 생태계의 몰락을 들 수 있다. 이제 다른 가치로 세운상가의 시대성을 읽어 내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태도와 접근이 과연 공공 공간인 데크의 활성화이어야만 했을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울시가 내세운 세운상가 보행 데크 복원이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거대 스케일의 보행 데크가 완성되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보행 녹지축이 형성된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이 도심에서 남북으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도 한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보행 데크를 통해 연결된 남산은 향후 용산과 한강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곧 종묘, 북악산, 삼각산을 통해 백두대간이 한강까지 이어지는 생태계의 중요한 연결 통로의 회복을 상징하는 역할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환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가?
이영범은 1986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영국 AA 스쿨 대학원에서 도시 공간 이론으로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는 시민단체인 도시연대에서 커뮤니티디자인센터를 설립해 주민참여 디자인을 통한 마을만들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도시의 죽음을 기억하라』, 『뉴욕 런던 서울의 도시재생 이야기』(공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다』(공저),『건축과 도시, 공공성으로 읽다』(공저), 『사회적 기업을 이용한 주거지 재생』(공저), 『새로운 도시재생의 구상』(공저), 『우리, 마을만들기』(공저), 『도시 마을만들기의 쟁점과 과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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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경의 페다고지를 논할 때다
Column: Pedagogy of Landscape Architecture
대학 신입생 시절, 영어 토론 서클의 첫 텍스트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였다. 원서를 읽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용에는 쉽게 공감이 갔다. 진정한 교육은 선생이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게 책의 메시지였다. 시간이 한참 흐른 요즘 나는 교수법이나 교육론으로 번역되는 페다고지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올해로 조경학과에서 교수로 생활한 지 20년이 되는 나는 오는 가을 학기부터 1년간 연구년을 가질 참이다. 과연 내가 학생들과 함께 진행하는 수업방식이 최선인가? 매너리즘에 빠져 유사한 수업내용과 과제를 반복하지는 않았는가? 내 수업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교육 현장의 실존적 고민을 연구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로 삼았다.
최근에는 우리 학과 교수들과 학생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교과 과정의 개편과 신규과목 개설에 관한 논의는 늘 있어 왔지만, 이번 논의는 보다 절박한 상황이 계기가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여러 교수가 지닌 역량을 어떻게 수렴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점점 감소하는 대학원 입시 지원율에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등이 핵심 주제다. 교과 과정의 구성과 수업 간의 교육 내용 조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지만, 교수 방법에 대한 문제까지도 함께 토론할 계획이다.
페다고지에 관한 논의는 교육 과정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나는 두 학교에서 학과장을 맡아 교육 과정을 계획하는 일을 경험했다. 조경학과의 교육 과정이 이론theory, 테크닉technique, 실기praxis의 세가지 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은 역사와 비평, 인접 분야에 대한 지식을 다룬다. 테크닉은 생태나 공학적 지식과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실기는 주로 스튜디오 과목으로 현장 중심의 프로젝트 수행 역량을 다룬다.학교마다 어떠한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라는 교육의 비전이 다르기 때문에 상이한 교육 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내가 조경 교육 과정을 다룰 때 고민했던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론, 테크닉, 실기 영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교수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한 선배 교수가 던진 질문은 늘 나를 고민하게 해왔다. 조경의 현실 상황이 열악한데 지나치게 추상적인 담론에 몰두하는 것이 타당한가? 너무 많은 이론적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준비시키는 데 소홀하지 않는가를 늘 염두에 두곤 했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핵심 영역과 주변 영역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조경가에게 요구되어 온 지식이나 기술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생태적 지식과 땅을 다루는 기술이고, 후자는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한정된 시간의 교육 과정에서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셋째는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의 조경 교육은 해외 대학의 교육과정을 도입해 변용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졸업생이 취업하는 시장이 상이한 상황에서 유사한 교육 과정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에게 적합한 조경 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기는 어렵다. 공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내용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테크닉이나 실기보다 이론이 과잉인 상황이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조경 고유의 지식 체계와 기술력이 빈곤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없다.
최근 조경계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건설 경기의 위축 등 외부적 상황 때문이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질 높은 서비스로 대응하지 못한 내부적 상황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빈곤한 실무분야의 근원을 따지다 보면 조경 교육의 부실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육 현장의 교수들은 교육에 관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했는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 학계는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에 인색한 편이다. CELACouncil of Educators in Landscape Architecture를 비롯한 여러 외국 학회에서는 조경교육에 관한 다양한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조경 교육 과정과 교육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한국조경학회지』(2015년 2월)에 실린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의 ‘조경 교육에 있어 학습자 중심 스튜디오 수업의 쟁점’이라는 깊이 있는 연구를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다.
미래를 변화시키려면 교육에 주목해야 한다. 후속세대에게 좋은 조경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일이다. 이제 조경 교육에 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자.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서로 교육 현장의 고민을 나누자. 그리고 교육의 내용과 결과물을 공유하자. 좋은 시도와 성과는 많은데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조경 교육, 서서히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대학정원이 축소되고 취업난이 가중되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서울시 공원녹지 총감독, 서울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 마곡지구에 본격적인 식물원을 도입하면서공원과 결합하는 작업의 코디네이터인 마곡중앙공원 총괄계획가를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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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하지운이다
Editorial: Her Name Is Ha Ji Un
12년 전의 봄, 한두 주짜리 단기 프로젝트를 열 개정도 진행하는 기초 디자인 스튜디오 첫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출석부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멈췄다. 한 여학생 이름 옆 칸의 소속이 경제학과로 적혀 있었다. 네, 하고 대답하는 쪽을 보니 얌전한 인상의 여학생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기본적인 드로잉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을 테고 또 과제물이 적어도 매주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 분량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고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흘려 생각하며 수강을 허락했다.
다음 주, 그는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석이 아니라 외모가 몰라보게 달라진 것임을 곧 깨달았다. 조용하고 수줍은 여학생이 한 주 만에 레게 머리의 힙합 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세 번째 주는 복고풍 세라복에 단발이었다. 한 주가 또 흐르자 노란색 긴 머리와 빨간 원피스의 조합이었고, 그 다음 주엔 검은 커트 머리에 타이트한 스커트의 오피스 걸 룩. 매주 화장 색조와 톤이 급변했고, 목과 귀와 팔과 발의장신구가 달랐음은 물론이다. 이 다채로운 변신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의 설계 작업에 주목하지 못했다. 학기가 삼분의 일이나 흐른 뒤에야 겨우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 의상, 화장, 장신구가 모두 주별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부라는 것을.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매체로, 또 때로는 설득하는 도구로 자신의 신체까지 사용한 셈이다. 설계 성과물의 일부인 그의 외양은 학기말까지 매주 달라졌다. 순전히 설계안의 개념 때문이었다. 인형을 동반하기도 했고, 장난감 권총 같은 소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종 발표 때는 급기야 뽀글뽀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기에 이르렀다.
가을 학기에도 그 여학생이 조경학과에 나타났다. 조경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연구실로 불러 물었다, 조경이 좋니? 네. 조경이 뭔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럼, 왜 조경이 좋은데? 그러자 매우 논쟁적이지만 아주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일상적인 공간에, 장소에,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요.” 그 학기에도, 학회가 주최하는 여름 디자인 캠프에서도, 또 졸업 작품 때도 평범한 선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작품’을 들고 왔다. ‘설계 잘 하는 학생’이라는 어떤 관례적 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결과물은 모범답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스튜디오 시스템과 관성에 젖은 설계 교육에서는 생산되기 힘든 독특한 생각,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설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지운이다.
조경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학생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어 나는 “조경하기 참 아깝다”는 생각을 여러 번 속에 묻었다. 졸업 작품 리뷰에 초청한 한 조경가도 똑같은 말을 내 귀에 속삭였다. “쟤는 조경시키기 아까운 애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조경 현실이 그런 독창성과 상상력을 포용하고 배가시켜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꼭 탄탄한 실력을 갖춘 조경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담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졸업 무렵 지운이는 광주아시아문화전당 프로젝트에서 인턴을 잠시 하게 되었다고 알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어느 조경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오 년이 흘렀을까, 한 심포지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예전의 그 하지운이 아니었다. 악수 외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조경에 찌들고 지친 지극히 평범한 조경설계사무소 대리급 직원으로 변한 그가 한눈에 보였다.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운이다! 얼마 전 한 페이스북 친구가 링크한 기사를 읽고 평소에는 거의 안 해본 ‘공유’라는 걸했다. 그리고 아쉬움과 반가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로 이렇게 적었다. 하지운이다!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ühne라는 극단이 공연하고 있는―240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진행하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드라마 ‘미트Meat’를 다루며 출연 배우를 인터뷰한 기사다. 드라마의 내용과 진행에 대한 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 한국에서 배우 지망생이었나요? 여배우 하지운의 답이 이어진다. “원래는 조경가였어요.
5년간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요. 연기자는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요. 다만 집안이 보수적이었기에 이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 베를린에서는 독립영화를 찍기도 했고, 본디지 페이리즈Bondage Fairies의 ‘헤드 온Head On’이라는 뮤직비디오 촬영에도 참여했지요.” 하지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형식의 조경 설계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 호 ‘설계 교육’ 특집을 의식해서 쓴 에디토리얼의 초벌 메모 파일을 지웠다. 표준화된 설계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설계 교육은 조경가로서의 기본기를 연습시키는 전문 교육일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자기 주도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교양 교육이기도 하다, 조경 교육 인증 제도가 필요하다는 류의 이야기를 적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지운을 다시 만나니 하지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설계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아직 불안정한 게 한국 조경학의 현실이니 보편적인 틀을 고민하는 게 먼저겠지만, 평균의 그물을빠져나가는 잠재력과 가능성에도 시선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운을 다시 생각하니 이번 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자꾸 겹쳐서 떠오른다. 머리카락만으로 공간 만들 생각을 한 조리나 소장 같은 조경가로 하지운을 자라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