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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마감에디토리얼을 쓰다가
    “비행기 의자 하나 사드릴게요!” 얼마 전 남기준 편집장이 던진 진심어린 농담이다. 사연은 이렇다. 봄과 여름이 때 이른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날, 마감전쟁을 치르는 동료들을 나 몰라라 뒤로 한 채 학회 참석을 구실로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에디토리얼이라도 빨리 넘겨야겠다고 작심했다. 굳은 결심의 효과였을까. 어깨를 펼틈도 없이 좁은 이코노미 좌석은 집중을 넘어 몰입의 경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구상, 검색, 커피, 흡연, 산책 등 글쓰기의 필수 과정이라고 여겼던 일련의 습관을 강제로 생략당하니 글이 단숨에 풀렸다. 육필로 휘갈겨 쓴 원고를 옆 자리 승객에게 빌린 노트북으로 타이핑한 후 모니터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착륙 후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서 ‘원고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원시와 첨단이 뒤섞인 이 이상한 프로세스에 아마 독자들은 물음표를 던지실 것 같다. 몸은 바다 건너 멀리 있었지만 그 어느 달보다 빨리 끝낸 원고를 칭찬하며 편집장은 한 달에 한번 마감 때마다 국내선이라도 꼭 탈 것을 권했고, 마침내 비행기 의자 선물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떠올린 것이다. 이제 2년 반이 넘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매달 잡지의 첫 지면에 무언가를 쓴다는 게 영 어색하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한 A4 두 장의 짧은 글, 하지만 한 달 내내 어깨를 내리누른다. 사례는 나의 힘! 서점과 온라인을 두루 헤매며 국내외 저명 전문지는 물론 잘 나간다는 상업 잡지의 에디토리얼을 사례 연구하기도 수차례. 그러나 답은 없다. 근사한 스타일로 간명하게 독자들을 사로잡는 멋진 글들을 흉내 내보지만 결국 아류의 티를 보정할 수 없다. 그달에 실리는 내용을 두루 안내하면 모범생이 쓴 교과서 서문처럼 재미가 없어진다. 공들여 기획한 특집에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끌어들일 요량으로 특집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중언부언이 되기 십상이다. 약간의 메시지를 담거나 주장을 넣으면 진부한 계몽이나 어설픈 설교의 곁길로 샌다. 최근에 마음 꽂힌 책이나 작품에 초점을 두면 먹물 버릇이 발동해 당장 고루한 논문이라도 쓸 태세다. 이른바 조경계의 현안(?)이란 걸 다루자니 수영복 입고 지하철 타는 기분이고, 그 현안을 다른 프레임으로 진단하자니 매국노 취급당할 게 뻔하다.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프로 편집장과 편집팀장, 그리고 아마추어 편집주간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수다를 떠는 용도로 쓰는 ‘단톡방’의 대화내용을 버무려 집단 창작이라는 미명 하에 이 지면에 적은 적도 있다. 잡지 리뉴얼 때부터 지금까지 어려울 때마다 고견을 들려주고 있는 몇몇 선배들로부터 얻어내는 아이디어나 정보를 가공해 싣기도 한다.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 세미나의 줄거리를 옮긴 적도 몇 차례. 심지어 어느 제자와 나눈 대화를 조금 살을 붙이고 가다듬어 기록하기도. 고백하자면 어느 학기의 종강 때 수강생들에게 나눠주었던 편지를 에디토리얼에 재탕으로 우려 싣기도 했다. 참으로 놀랍고 곤혹스러운 사실은 의외로 이 지면을 읽는 독자가 많다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편집부에 들려오는 여러 소문을 종합해 보면, 비교적 열독률이 높은 지면은 에디토리얼과 잡지 제일 뒤쪽의 코다CODA, 본문 중간중간의 텍스트 양이 많지 않은 짧은 연재 글들이라고 한다. 특히 잡지의 첫 쪽이다 보니 이 지면을 펼치고 잠시 시간을 투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에디토리얼보다는 열심히 만든 특집, 그달에 힘준 작품, 필자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연재 글들에 시선을 던져 주십사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앞에서 구구절절 징징거리며 늘어놓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에디토리얼 지면은 매달 잡지의 마감일을 지연시키는 주범이 된다. 디지털 출력본의 교정까지 끝내고 인쇄소로 넘어갈 준비가 완료된 상황, 모두가 목을 빼고 내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 대략 난감이다. 또 한 달이 흐르고 어김없이 만난 막다른 길, 머릿속을 산만하게 떠다닌 글감 세 조각을 소개한다. 원래는 다음의 세 가지 주제가 강력한 후보로 경쟁했는데 마감에 몰려 쓰다 보니 어디론가 휘발된 모양이다. 첫 번째 후보는 조경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 최정민 교수(순천대학교 조경학과)가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라펜트, 2016년 7월 10일)라는 칼럼을 통해 6월호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주었다. 공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는데, 이 지면보다는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깊이 있게 다루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가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 일이나 결과물을 대변하지 못하고 … 조경이 하는(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면, 40년 넘게 정든 이름이라 아쉬움 가득하지만 개명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경은 조경에 갇혀 있다. 경합을 벌인 두 번째 후보는 용산공원. 수면 아래에서 잠잠하던 용산공원이 지난 4월 이후 심심찮게 언론을 타고 있다. 공원에 들어갈 ‘콘텐츠’를 선정하는 공청회 이후의 일이다. 2012년의 국제 설계공모 이후 당선작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실종되었던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쟁점의생산 과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그 핵심 이슈가 시간을 역행하는 양상이라 우려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의 비논리적인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의 책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추진하는 것과 예산의 전액 삭감에 따른 계획 중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슈다. 심도 있게 기획해 본문에서 다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마지막 후보는 이번 특집인 파빌리온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8월의 특집 ‘파빌리온’은 무더위에 지친독자들을 의식한 계절형 기획이다. 폭염으로 가득한 한여름의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나만의 자유의파빌리온을 찾아보시길. 참고로, 비행기 의자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중고로 나온 물건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5년08월 / 328
  • [CODA] 여행의 기술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어딘가로 떠나기를 결정하고 출발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려 6개월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고 동행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날 때마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볼지, 어떤 맛있는 음식(술)을 먹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나 파리, 런던 등 대도시와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의 도시를 따라가는 여행. 가보고 싶은 장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에서 따박따박 빠져나가고 있는 여행 경비 따위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먹고사는 일을 잠시 제쳐 두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 벌어질 미지의 일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 때문에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현실 탈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그전에 마쳐두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걱정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슬그머니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향이 부담스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1 여행 전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환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그의 예민한 관찰에 열렬히 동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풍경의 사이사이는 낯선 환경의 고달픈 현실이 채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란, 답사를 위해 준비한 새 신발은 길이 들지 않아 걸을수록 상처만 내고, 기상이변으로 기온은 40도까지 치솟는데 한국에서는 흔하게 팔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없는 식이다(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과 딸랑 얼음 두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함께 내밀곤 했다. 얼음이 든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유럽 문화의 체험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매력적인 노천 카페를 두고 결국 익숙한 스타벅스에 찾아들곤 했다. 예전에는 전 세계의 맥도날드화를 우려했다면 지금은 스타벅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우리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고향의 맛이었다. 낯선 것을 열망해 떠난 여행에서 다시 익숙한 것을 소망하는 아이러니라니!). 신체적 욕구의 충족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여행의 질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해지니 사소한 의견 차에도 감정이 예민해졌다. 관심사와 스타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팀을 나누어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돌발 상황도 속출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희망한 그 모든 곳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두는 것과 치밀하게 동선을 짜는 것은 다른 일이다. 꼼꼼한 답사 계획을 짜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접어두고) 여건이 되는대로 또는 그날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러 지역을 단체로 움직였던 이번 여행에서 습득한 ‘여행의 기술’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도시를 차근차근 둘러보거나 한 공간을 음미하며 답사하기보다는 빠르게 둘러보고 파악하기, 그리고 대책 없이 나열해 놓은 답사지 리스트를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포기하기가 주요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행의 빛나는 순간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이를테면 주요 스팟을 징검다리 건너듯 답사하다가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큰 기대 없이 돌아선 길에서 마주친 길거리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식이다. 그리고 보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거리나 광장 혹은 공원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좋은 계절 탓인지 공원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극성수기 해변 모래사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라솔들처럼 낯선 사람들과 큰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거나 누워서 햇볕을 즐기거나 홀로 앉아 있다. 서양인들은 햇볕을 종교처럼 여긴다는 상식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잘 꾸며진 공원뿐만 아니라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그렇게들 앉아 있다. 하다못해 파리 센 강의 더러운 지천 양편에도 맥주 한두 병을 든 젊은이들이 마치 술집의 바인 양 줄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많은 실내 공간을 오픈스페이스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집부 카톡방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소풍을 겸해 ‘공원’ 특집을 기획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공원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미세하게 들여다보자고 했다. 공원의 원조인 서구의 공원과 우리의 공원 문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공원이나 거리가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도 고민해보자고 했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
  • [편집자의 서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조경학과 학생들이 대상지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오는 것처럼 국문학과 학생들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혹은 밤샘 술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문학의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나는 우연히 청양에 들렀다가 내가 사랑하는 시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에 헛되이 돌멩이를 던지며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나희덕의 시 ‘천장호에서’를 읽으며 과거에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천장호에는 적막 대신 거대하고 시뻘건 청양고추·구기자 조형물과 뜬금없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이 끔찍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번 달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국제공모를 다루면서 늦기 전에 세운상가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았던 터라 아쉽게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뜨기에게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의 시집이었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자신의 시와 영화에서 줄곧 과거의 서울에 대한 향수를 노래해왔다. 최근작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강남의 재개발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0년대 말죽거리(양재동) 일대의 풍경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는 1990년대의 압구정동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욕망의 통조림 공장’1이나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럇샤이마세 구정 가라, 오케’2 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공간에도 언제나 폭력과 부패가 넘친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혐오의 감정 속에 왠지 모를 그리운 마음이 뒤섞인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운상가에 대해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3, ‘고담시市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4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5고 고백한다. 이 모순된 감정은 특히 시집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 ‘모텔, 카사블랑카’에서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산다’는 구절로 압축된다. 시금털털할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사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존할 수 없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다가도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6라는 아름다운 시구에서는 알듯 말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주말 세운상가를 답사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페인트칠이 누더기처럼 지저분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많이 훼손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시멘트 계단, 비아그라, 흥분제, 도청장치, DVD, CCTV를 모두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슥한 상점,건물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길게 누워있는 세운상가는 과거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은하철도999를 현실 세계에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처음 세운상가 입구에 들어설 때는 ‘여기서 걷다가 어디 이상한 골목에 끌려가 장기를 떼이고 버려지는 게 아닐까’하는 무서운 상상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쪽으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무언가를 날랐다. 칼빵(?)이 한두 개쯤 있는 무서운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체불명의(?) 상점 상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가장 낡고 허름한 진양상가에서는 그 어둡고 쇠락한 건물 속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세운상가 일대에서 본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한동안 세운상가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성급한 행정과 건축가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실패한 건축으로 인식되었다. 지역 슬럼화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철거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 평가다. 하지만 그 B급의 정서가 없었다면 세운상가가 지금처럼 영세한 부품 가게, 특수 용품점, 소규모 작업공장 등을 하나로 품는 독특한 장소성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오피스텔 단지와 공원으로 바뀐 세운상가를 상상하는 것은 천장호에 세워진 고추와 용 조형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더디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철거 대신 활성화를 택한 세운상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활성화 과정에서 특유의 B급 정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세운상가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7으므로.
  • [시네마 스케이프]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소 매력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은 한일 공동 제작 영화다. 영화제측은 나라 현 고조五條 시에서 촬영할 것, 일본인 스태프와 배우를 기용할 것, 고조의 지역 축제인 불꽃놀이를 포함시킬 것을 조건으로 제작비를 지원했다. 조건은 창작자에게 제약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독이라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도시에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주변에 고조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검색을 해봐도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난감하다. 무엇을 제일 먼저 해야 할까. 우선 답사를 가야지.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시청 직원이 제일 좋겠다. 시에 대한 기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인문·사회 분석을 하는 거지. 만약 시청직원이 타지 사람이라면 그 동네 사람을 소개받아서 그곳 사람들만 아는 오래된 이야기부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듣는 거야. 이런 자료들이 모아져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장건재 감독은 영화를 두 개의 챕터로 나누었다. 흑백 영화인 첫 번째 챕터에서는 감독이 겪었던 낯선 도시에서의 사전 답사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영화감독 태훈이 통역과 함께 고조에 답사 가서 시청 직원을 만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고조는 나라 현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4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소박한 고조 역 앞, 오래된 가옥, 좁은 골목, 여관, 동네 카페 등의 장소는 예전의 정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지극히 서민적인 독일의 풍경
    #54 뮌헨의 영국정원 - 유럽 최초의 ‘민주적’ 정원 프랑스에서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잠시 스치고 지나간 유행병과 같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좀 달랐다. 프란츠 공의 작은 정원 나라를 선두로 하여 서서히 전역에 확산되어 19세기 중반에 그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독일 조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굵직한 풍경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스켈Friedrich Ludwig Sckell(1750~1823), 베를린·포츠담의 문화 경관을 만든 페터 요셉 르네Peter Joseph Lenné(1789~1866), 동쪽 폴란드와의 접경 지역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모두 풍경화로 바꾸어 놓은 퓌클러-무스카우Pückler-Muskau(1785~1871) 공 등이다. 풍경화식 정원이 독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느릿느릿한 독일인의 정서에 맞았을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자연 종교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 그에 더해 18세기 말, 독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낭만주의를 구현하기에 풍경화식정원만한 것이 없었다. 지난해 9월호 연재 ‘26.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히의 정원 풍경화’에서 미학자 히르시펠트를 잠깐 언급했다. 그가 드레스덴에 있는 어느 풍경화식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미학자 요한 게오르크 줄처Johann Georg Sulzer(1720~1779)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묘사했다. “외로운 산책을 즐기는 현자 중 발길이 숲 속에 이르러 문득 이 웅장한 기념비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인물이 여기 이렇게 높이 기려지고 있다니. 마침 보름달이 둥실 떠 이를 환히 밝히고 사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떡갈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깊은 한이 서려온다. 다시 눈을 들어 그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2 조선의 방랑 시인 뺨치는 이런 시구들은 당시 독일 문학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외로운 방랑자’, ‘죽음 같은 고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풍경화식 정원을 널리 퍼지게 한 1세대의 감성이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서는 폴크스파크volkspark라는 건조한 개념이 등장하여 풍경화식 정원의 키워드가 되었다. 폴크스파크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백성을 위한 커다란 정원’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원이다. 이 역시 히르시펠트가 던진 개념이다. 이후 독일의 풍경화식정원은 곧 시민 공원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공원을 조성할 때 풍경공원Landschaftspark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1789년, 바이에른 공국의 군주 칼 테오도르는 뮌헨에 있는 자신의 넓은 수렵원을 개조하여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뮌헨에 탄생했다. 공원의 면적은 총 375헥타르로 뵈를리츠 정원의 3배가 넘는다. 처음엔 왕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르 정원이라고 불렀다가 영국풍을 따랐다고 해서 ‘영국정원’으로 개명되었다. 물론 영국의 왕립 정원들도 이미 백성들에게 ‘개방’되긴 했지만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왕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시민들을 위해 만든 것은 뮌헨의 영국정원이 처음이라고 뮌헨 사람들은 자부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 칼 테오도르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파리에서 대혁명이 일어난 해의 일이었으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주어 민심을 한 번 다독여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참모였던 미국인 벤자민 톰슨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뮌헨의 영국정원이 자리 잡은 곳은 오래전부터 군주들이 사슴 사냥을 하던 곳으로서 이자르 강을 따라 깊은 숲과 평야가 번갈아 펼쳐진 매력적인 곳이었다. 혁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런 매력적인 땅을 백성에게 내준들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군인들을 위해주말 정원을 지을 생각이었다. 좀 더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군 주말 정원 위원회를 결성하고 톰슨에게 럼포드 백작의 작위를 주어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공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대혁명이 터졌고 럼포드 백작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시민 공원을 짓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럼포드 백작은 이제 공원 조성 위원장의 자격으로 루드비히 스켈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스켈은 당시 바이에른 공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정원 예술가였다. 대대로 왕실 정원사를 지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정원사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일찍이 그 재주를 인정받아 ‘국비 유학생’으로 파리 식물원과 베르사유에서 수학했다. 풍경화식 정원이 유행하자 다시 5년 동안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을 공부하고 돌아와 슈베칭엔의 바로크 정원 담당자로 부임했다. 기존의 바로크정원 주변에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당시는 왕실 소속 정원사들이 왕실 비용으로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다. 스켈에게는 그동안 영국에서 공부하고 슈베칭엔에서 일하는 동안 성숙해갔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캐퍼빌리티 브라운의 작품 세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켈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경가들은 하나같이 브라운의 커다란 ‘한 획’과 명상적인 정서에 이끌렸다. 스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원과 도시와의 화합을 꾀한 것이다. 그는 공원이 도시 안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웅장한 궁의 높고 낮은 실루엣이 공원의 녹색 실루엣과 서로 중첩되었다가 다시 풀어지는 관계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 안에서 바라보면 도시 실루엣이 ‘가장 아름다운 녹색 의상’을 입고 있는 듯 보인다. 이렇게 도시와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속에서 계층 간의 구분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스켈이 추구했던 풍경화식 정원의 이상이었다.3 이 점은 지금도 뮌헨 영국정원의 커다란 특징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페터 요셉 르네를 포함한 후배 조경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도시와 녹지가 하나로 얽혀 시민의 집과 정원이 된다는 생각은 이후 독일 도시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독일에서는 고층 건물을 거의 짓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건물 몸체의 높이가 30m를 넘어가면 녹색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든 간에 영국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테오도르 공의 정치적 이념 역시 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 주종 관계로만 이해했던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관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 대륙 최초의 이 ‘민주적인 그린’은 독일 조경사와 도시설계사뿐만 아니라 사회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중요한 정원이 1960년대 외곽 순환 도로가 건설되면서 남북으로 단절되었다. 지난 2010년부터 ‘영국정원 통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뮌헨 영국정원 운영 재단에서 발의하고 알리안츠 환경 재단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로 도로를 지하로 집어넣고 그 위에 남북으로 갈라졌던 정원을 다시 만나게 한다는 계획이다. 여론도 긍정적이므로 영국정원은 조만간 스켈의 원안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크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email protected]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2015년08월 / 328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다양성의 도시, 단조로움의 도시
    도시 다양성이란 무엇인가 눈을 감고 한 번 떠올려보자. 지난 몇 년간 경험한 도시 중 ‘다양성의 감각’을 가장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로 환경은 어디인가? 다양성의 대상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리적 대상일 때도 있고 사람이나 커뮤니티, 혹은 문화 환경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뉴욕을 다녀온 독자라면 태피스트리tapestry처럼 촘촘하게 짜인 맨해튼 도시 블록의 한 가로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업종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신사동 가로수길과 세 로수길의 교차점에서 만난 십인십색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 어느 곳을 떠올렸든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해당 가로에서 경험한 ‘무엇’이 그토록 다양하다고 느꼈는가? 나아가 이러한 다양성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다양성인가, 아니면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특성인가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이란 한 지역 내에 서로 다른 성격의 건축물과 가로, 용도와 사람, 서비스나 지역 문화가 그 고유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한 채 섞여 있는 특질이다. 여기에는 다양성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에 대해 접근하고 누릴 수 있는 ‘물리적 경험’의 차원과 함께 차이에 대한 관용이나 상호 존중 같은 ‘비물리적 인식’까지 포함된다(그림1, 2). 나아가 한 장소에서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이국적인 행태가 오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전통적 환경과 대비를 이룰 때도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차이와 다름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나 상호 존중이 다양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긴 하지만, 때로는 한 커뮤니티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상당 기간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즉 수용하기 어려운 차이를 문화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에—고유한 문화가 한 장소에 온전하게 정착하고 결국 지역 다양성의 한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커뮤니티 일부가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모집단으로부터 분리·독립함으로써 다양성이 시간에 따라 분화되고 공간적으로 확산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실제 도시 공간에서 다양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요소가 무엇인지 좀 더 따져보자. 다양성의 세 가지 요소: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재화·서비스의 종류 많은 도시 이론가는 도시의 물리적 환경, 사회적 특성, 그리고 제공되는 서비스나 재화의 종류가 다양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라고 본다.1 첫째, 물리적 환경의 관점에서 작게는 가로의 표면을 덮고 있는 간판이나 건축물 크기, 건축 유형과 용도, 지어진 시기나 스타일, 외장재의 특성을 비롯해, 크게는 가로의 물리적 폭과 연속성, 필지 크기의 균질성과 도시 블록의 크기 등이 다양성과 단조로움의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용도와 건축 유형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홍익대학교 입구 주변은 1957년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지정된 후 1960~1970년대에 걸쳐 비교적 균질한 저층 주거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상업·문화·소비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최근 다양한 비주거 용도와 형형색색의 건축 스타일을 접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그림3). 그렇지만 상업화가 진행된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언제나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보인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같은 홍대 입구 지역이지만 도시 블록 전체가 상업화된 서교동에 비해 기존의 모습이 유지된 단독 주택 단지 환경에 게스트하우스, 공방, 제과점, 이자까야가 골목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있는 연남동에서 더 풍부한 다양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2. 둘째, 다양성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특성은 도시 공간의 소비자이자 문화의 생산자인 사람들이 나타내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차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거주자의 소득 수준, 직업군, 연령대, 인종과 국적, 언어와 취향이 다채로운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그림4). 반면 도시 변화에 따라 이러한 사회적 특성의 차이가 점차 옅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1~2인 가구를 대상으로 민간 주도의 소형 주택 공급을 확대하려는 ‘도시형 생활 주택’ 정책이 2009년 도입되었다. 그런데 하나의 주택 유형이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짧은 시간에 해당 지역의 사회 구성원이 교체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강서구 화곡동에는 2014년 인허가 건수 기준으로 서울시에 지어진 전체 도시형 생활 주택 중무려 9.1%에 해당하는 1,718세대가 들어서게 되었다.3 이로 인해 화곡동의 20~30세대 1~2인 가구, 특히 젊은 직장인 부부, 전문직종 1인 가구, 취업 준비생의 비율이 갑작스럽게 늘어났으며 이는 해당 지역 거주자의 연령대나 직업군이 오히려 유사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2015년08월 / 328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심각하게 놀기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나의 네 가지 설계태도―물어보기, 다시 그리기, 노동하기, 설계 안하기―와 설계 시작점에 관해 짧게 써보았다. 이번에는 2년 전 미국 뉴욕 MoMA PS1Museum of Modern Art PS1에서 주최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의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던 작품을 바탕으로 좀 더 구체적인 설계 과정에 대해 써보려 한다. YAP은 디자인 분야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매년 다섯 팀을 선정해 미술관 방문객을 위한 야외 휴양 공간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그리고 그 중 당선작은 MoMA PS1의 여름 웜-업Warm-Up 행사 때 사용될 임시 설치물temporary installation로 구현된다. 동료 회사와 뭉쳐 템프에이전시TempAgency라는 팀을 구성했고 다섯 파이널리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비록 우리 팀의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약 한 달간 혹독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설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그만큼 나누고 싶은 점이 많은 프로젝트다. 우리의 YAP 설계 과정은 놀이터 같았다. 아니, 그렇게만들려 노력했다―어떻게 보면 이것이 나의 다섯 번째 설계 태도다. My Hair is at MoMA PS1 프로젝트 이름 그대로 우리가 내놓은 설계안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미쳤다고, 이상하다고, 장난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신기하고 색다르고 만들어지면 가보고 싶다는 사람도 많았던, 아무튼 설계안에 대한 주변 반응이 너무나 대조적이면서도 다양했던 프로젝트임에는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도박 수준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정말 진지했다. 이제껏 시도해보지 않은 도전적인 설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아니, 그보다는 “떨어지더라도 밋밋하지 않게 떨어지자”고 했다. 많은 공모전에 참가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놀면서 설계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클라이언트가 예술을 항상 접하는 큐레이터였기에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겠냐는 상상 혹은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템프에이전시 팀 구성을 설명해야겠다. 쿠토노톡KUTONOTUK의 나와 공동 대표 매튜 줄Matthew Jull, 그리고 맥도웰스피노자mcdowellespinosa의 두 공동 대표까지, 총 네 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버지니아대학교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 여섯 명―풀타임 네 명,파트타임 두 명―이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12월 초 가을 학기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고, 겨울방학 한 달 동안 학생들과 같이 일할 작업장은 학교 건물 안의 교실 한 곳에 마련했다. 거의 눌러 앉은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1일, 새해를 맞았을 때도 그나마 구색을 맞춘다고 어디선가 구해 놓은 샴페인 두병을 터뜨리며 컴퓨터와 드로잉 사이에서 우리끼리 자축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학생들과 같이 우선 아이디어부터 짜기 시작했다. 설계안 제출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리서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처음엔 별의별 토픽이 다 나온다. 마네킹, 잠수 어항, 나무 쓰레기, 거인 얼음, 정글, 돌 밭, 임대 노동 등등. 한 명당 20~30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내고 이미지, 논리, 내러티브 등 각 아이디어에 대한 큰 윤곽을 정리하여 3~4시간에 한 번씩 팀 멤버들과 교류하며 발전시켜 나갔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버트 험버 므핀다 칼룬가 커뮤니티 가든 수석 정원사
    “내가 원하는 정원은 가난하든 부자든, 덩치가 크든 작든, 노숙자이든 장님이든, 혹은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뉴욕의 대표적 지역 공동체 정원,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설립하고 30년 넘게 운영해 온 로버트 험버가 내비친 소망이다.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1980년대 초반의 맨해튼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그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긋나가던 10대 청소년들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정원을 선택했다. “저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냐고. 그들에겐 그러한 질문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니까요.” 그리고 그의 생각은 어린이와 노인을 비롯한 지역 주민 전체로 퍼져 나갔다. “10대들은 농구에 관심이 있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식물을 함께 키우는 것이 최고죠.” 그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공원의 한 귀퉁이를 시로부터 위임받았다. 한 번도 정원 일을 해 본적 없었지만, 동네 주민, 노숙자, 부랑자, 거리의 매춘부 등에게 도움을 청해 므핀다 칼룬가 가든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의 이름은 오래 전 이 부근에 있었던 흑인 매장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와힐리어로 지었다. “이전에 이 공원은 그저 빨리 걸어서 통과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죠.” 도시의 변방, 어둡고 위험했던 장소는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도 정원을 중심으로 마약상을 몰아내고 이미지를 바꾸었다. 노인 센터의 앞마당으로도 쓰이며 그들이 마음 편히 안전하게 채소를 가꾸고 소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다. 밥 험버의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은 점차 알려졌고 커뮤니티 가든의 모범 사례로 통하게 되었다. 관광객과 미디어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지역 주민에겐 보석과 같은 공간. 므핀다 칼룬가 가든은 오늘도 조용히 맨해튼의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밥 험버는 오늘도 여전히 그 곳을 지키고 있다. Q. 이 정원이 문을 연 첫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A. 아,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덧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원래 근처에 있는 어린이돕기협회the Children’s Aid Society에서 일했고, 주로 남자 아이들 그룹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자연스럽게 공원에서 소년들과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는데, 뭔가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협회에서 퇴직하고 난 후, 나는 여기에 좀 더 머물면서 공원 자체를 바꾸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공원에서 빈번히 볼 수 있던 마약 거래상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 후 정원을 가꾸는 기술을 점차 배우면서 동네 아이들에게도 뭔가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이 정원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Q. 어린이돕기협회의 일과 정원 일을 시작한 계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어린이협회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가? A. 지역의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단체다. 주로 집에 아버지가 없는 소년들인데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우리는 뉴욕 시 전체를 교실로 이용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연극이나 야구 경기도 보러갔으며 모여서 방과 후 숙제를 함께 하기도 했다. 뭐,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 Q. 이곳에 정착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과 가족에 대해서 궁금하다. A. 우리 가족은 중남미 파나마 출신으로, 조지아 주로 이주했다. 나는 조지아에서 태어났고 취학 연령이 되었을 즈음 뉴욕으로 이사해 여기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지만, 내 친척 중에는 유창한 사람이 많다. 지금은 대부분 뉴저지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이번 독립기념일에도 가족들을 방문해서 휴일을 보낼 계획이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몇 있다. 자기들의 생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아버지가 있어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고 다니기도 한다.이 공원은 수십 년간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우정을 선물해 줬다. Q. 므핀다 칼룬가 가든의 초기 시절을 묘사한다면? A. 1980년대였고, 무척이나 거친 시절이었다. 공원에는 온갖 종류의 마약이 횡행했고 위험했으며 심하게 지저분하고 불결했다. 칼에 찔릴 뻔하거나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닥에 총알이 널려있기도 했다. 한마디로, 전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게 위협적인 곳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소년들을 데리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주중에는 함께 모여서 농구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남자아이였는데, 지역 주민이었던 델마 프리차드Thelma Pritchard 여사가 여학생 모임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공원에서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스물서넛 정도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프리차드 여사 또한 아직도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돌봤던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오면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나는 그것을 즐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2015년08월 / 328
  • [재료와 디테일] 콘크리트 벽돌, 그 변신은 무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늘 경계에 눈이 간다. 긴 담장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사용된 소재의 대부분이 벽돌이다. 붉은색 벽돌도 있고 회색 콘크리트 블록도 많이 보인다. 쉽게 쌓을 수 있고, 땅의 압력(사면 압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라면옹벽을 치지 않고도 좋은 입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널리 활용되었을 것이다. 몇 장씩 내어 쌓기도 하고 구멍을 만들어 내는 등, 벽돌만이 만들 수 있는 특유의 패턴으로 거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재료비를 많이 쓸 수 없는 외곽이나 사람의 시선이 덜 가는 외진 곳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요지에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를 소재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서 찾기도 한다. 벽돌이란 소재의 가치를 아는 일반인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벽돌을 활용해 건축물 내부를 구획한 공간을 우연히 본 적 있는데, 소재의 원초적 질감에 생경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소재가 외부에만 나오면 이상하게 저급한 재료로 치부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군부대 담장이나 예비군 훈련장의 시가 전투장, 혹은 저렴하게 지은 경비실 등에서 돈들이지 않고 손쉽게 지어진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새롭게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몇 해 전 지방의 한 정원박람회장에 작은 공간을 만들 기회가 있었다. 실제보다는 관념적인 공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업에 임했으나 결과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이대영[email protected] /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 엘 소장 / 2015년08월 / 328
  • [공간 공감]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공간 공감’ 코너에서 두 페이지로 다루기에는 그 무게감을 이기기 힘든 장소다. 국가대표 정원을 대상으로 허투루 설계 담론을 펼치다가는 뭇매를 맞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한 차례, 그것도 제한된 시간의 가이드 투어를 통해 담론의 깊이를 추구한다는 것 역시 무리수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위압적이거나 엄숙함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고 정갈하다. 불과 몇 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복닥거리는 현대의 삶과 대비되는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이 정원을 만들고 가꿔 온 다양한 스토리를 상상하면서 다른 각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참이다. 메르스 여파로 비교적 한산한 토요일 아침, 해설사가 인솔하는 무리에서 가장 뒤쳐져 걸으며 ‘후원 달리 읽기’궁리를 시작했다. 후원은 왕의 정원이었다. 정원의 첫 시작은 지금부터 약 610년 전인 태종 때였다. 여러 왕을 거치면서 확장과 수정이 행해졌으며, 230여년이 지난 인조 때 옥류천 일대까지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시 140년의 세월이 흘러 영·정조 때 부용정 일대를 조성했고, 순조 때 연경당을 지으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려 4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꿔 온 장소다. 당시 왕이 거닐던 후원의 모습은 또 다시 180여년이 지난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정욱주[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5년08월 /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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