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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조경비평상 심사평
총 네 편 출품, 조경비평 봄 심사
‘2015 조경비평상’에는 총 네 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심사는 ‘조경비평 봄’ 회원들이 맡았습니다. 심사자마다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인 심사 기준은 문제의식의 독창성과 주장의 타당성,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완성도, 비평가로서의 태도와 문장력이었습니다.
이번 응모작들은 비평의 소재가 다양화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작가나 작품 위주의 비평을 넘어 일상의 경관(응모작1, 2, 3)과 조경가 혹은 조경계의 문제(응모작4)로까지 비평의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글쓰기 못지않게 주관적인 서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절반을 차지했습니다(응모작2, 4). 작가가 있는 작품에 대한 비평에 비해 일상을 소재로 한 비평이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주관적인 서술 스타일의 글이 비평으로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재와 스타일에서 참신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비평’의수준과 완성도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응모작들은 다소 미흡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 편의 글에서 장점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그 장점에 대해 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응모작1.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보기 - 가로수’는 지적 의욕이 넘치는 글입니다.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료 조사와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데이터와 정보를 근거로 한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저자가 그 근거를 바탕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도 부실했다는 것이 공통된 심사 의견이었습니다. ‘가로수’와 ‘가로’에 대한 문제의식의 혼란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응모작2. ‘위로의 산책’은 문장 자체가 편안하게 읽힙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주관적인 시점으로 서술하는 형식에 대해서는 심사위원의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비평문으로서 부적합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참신한 전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적인 것을 넘어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 자체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그 문턱을 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저자의 기억, 감정, 생각 등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글로 풀어 쓴 부분과 공간에 대한 주관적인 분석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응모작3. ‘무제’는 삼청동을 ‘권력의 공간’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 글은 권력의 의미를 정치권력 외에 자본권력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기 때문에 삼청동이라는 장소 선택은 퍽 흥미로워집니다. 삼청동이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치 권력과 최근의 상업 및 자본 권력이 함께 나타나는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저자는 삼청동의 장소 특성을 논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서 삼청동만을 대상으로 한 고유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했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기존 논의의 반복에 머문 점이 아쉬웠습니다.
응모작4. ‘건축가 아닌 승효상 탐구 - 어느 30대 조경가의 길 찾기’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몰입도가 강한 글입니다. 문제의식과 주장이 선명하고 문장 자체가 잘 읽힙니다.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글은 우선 진실하고, 성공할 경우 우리 모두의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조경가로서 자신의 진로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경계의 문제 해법을 건축가 승효상과 건축계의 성공 전략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자칫 무비판적이고 순진하게 비춰질 위험이 있습니다. 세련미와 참신한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네 작품 모두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지구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각자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짜임새 있게, 끝까지 힘 있게 글을 쓴다면 좋은 비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사를 하면서 입상작을 내지 못한 결론이 심사자들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런 결과가 조경비평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 회마다 반드시 수상작을 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능성의 문은 늘 열어두되 그
결과에 조급해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당선작이 없어도, 가작 한 편 없어도 매년 신진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을 마련하는 주최측의 ‘은근과 끈기’를 응원합니다. 내년에는 조경비평상에 부합하는 글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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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IFLA 세계대회
아직 오지 않은 조경의 역사를 논하다
지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제52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IFLA)’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됐다. 최근 러시아는 매년 새로운 조경 디자인, 논문, 전문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등 ‘조경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 조경에 대한 시민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국가적으로도 조경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경제적·정책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번 IFLA 세계대회는 러시아에서는 처음 개최된 것으로 총 35개국에서 304명의 관련 전문가가 참여했다.
‘미래의 역사History of the Future’를 중심 의제로 제시한 이번 행사에서는 잃어버린 경관의 재건과 재생의 사례를 바탕으로 조경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전과 기회에 대해 폭 넓은 논의가 전개됐다. ‘미래의 역사’를 위한 사흘간의 토론 이번 세계대회는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고, 총 95개의 세부 사례와 연구 발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첫 번째 세션, ‘동에서 서로: 현대 조경의 통합과 혁신’에서는 현대 조경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어떠한 연구방법론이 필요한가에 대한 발표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 속한 러시아에서 어떤 조경이 펼쳐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픽이 주목을 받기도했다. 두 번째 세션, ‘21세기의 역사와 자연 경관: 보전, 재건, 복원을 중심으로’에서는 문화 유산의 보전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 및 재생에 대해 미국, 러시아, 터키, 중국, 스웨덴 등 각 국가의 사례 연구가 발표됐다. 지형학적, 생태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른 각기 다른 해법을 공유했다. 세 번째 세션은 ‘그린-블루 인프라스트럭처와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을 주제로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 활용과 미래지향적 도시 시스템 등이 논의됐다. 워터프런트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시티, 에코시티,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문제, 미생물 연구를 통한 조경 분석, 돌로 만들어진 식재 기반 연구등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와 시스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2015 IFLA 세계대회의 주요 주제 발표
사흘 동안의 본 회의에 앞서 매일 두 개의 기조 발표keynote presentation가 진행됐다. 러시아에서 개최된 만큼, 러시아 주요 도시의 도시 경관 개선 프로젝트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1일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괄 조경가인 라리사 카누니코바Larisa Kanunnikova가 ‘경관 시나리오’를 주제로 향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될 경관 개선 사업을 개괄했다.‘생명을 위한 장소들 Places for Life’을 키워드로 도시 속에 녹색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할 것이라 밝혔다.
2일차 회의에 앞서 세르게이 쿠슈네트소프Sergey Kusnetsov 모스크바 총괄 건축가는 ‘2035 모스크바 강변 개발 사업’을 주제로 모스크바 강 주변 10,400헥타르 면적에 펼쳐질 대규모 경관 개선 및 도시 인프라 구축 사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사업은 2014년 모스크바 시정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작인 ‘메가놈 프로젝트Meganom Project’(설계: SUE Research and the Project Institute)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같은 날, 중국 투렌스케이프Turenscape의 조경가 콩지안 유Kongjian Yu는 ‘도시의 자연 속에 딥폼Deep Forms 만들기’라는 제목의 기조 발표를 하기도 했다. 딥폼은 다랭이 논과 같이 인간이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만들어낸 형태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딥폼 방식의 예로 자르고 채우기, 틀 세우기, 관개와 토지 개량, 수확을 제시하며, 이를 도시 속에 자연 환경을 재건할 때 적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홍수, 가뭄, 황사, 기근 등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조경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스웨덴 농업과학대학교Sweish University of Argriculture Sciences의 마리아 이그나티에바Maria Ignatieva 교수가 ‘러시아의 조경: 동서양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변화 흐름 속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어떤 영향을 받아왔는지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유라시아 지정학적 영향권에서 큰 다양성을 갖게 된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세계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오픈스페이스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많은 청중이 주목했다. 한편 같은 날, 올가 밀리샤Olga Militsa 러시아 국가문화유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의 역사적 정원과 공원에 대한 주state 단위 관리 시스템’이란 기조 발표에서 러시아 오픈스페이스의 변화 양상과 현재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사례로 제시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인 발표
이번 세계대회가 끝나고 게재된 리뷰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주제 발표가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김준현(서울대학교), 윈쟈엔(서울대학교), 황주영(서강대학교) 등이 세션 발표자로 나섰다. 김준현은 ‘공원 설계와 정치의 경계에서’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가 공원 설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공원 설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정치 영합적으로 조성된 공원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윈자엔은 ‘상하이 스쿠먼Shikumen 경관: 과거, 현재, 미래를 엮어내다’를 발표했는데, 스쿠먼의 ‘신천지Xintiandi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1990년대 이후 중국과 서양의 건축 문화 양식이 융합되는 과정을 해석했다. 황주영은 ‘예수회Jesuits로부터 유입된 시느와즈리Chinoiserie 취미에 대하여’에서 조경의 유입 경로에 새로운 의견을 개진했다. 흔히 조경은 서구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17~18세기에 유럽의 정원 문화는 중국의 시느와즈리(중국 예술풍의 일종)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심지수(서울대학교), 유수진(고려대학교), 이명준(서울대학교) 등이 포스터 발표자로 참가했다.
2016년은 이탈리아 튜린에서
제53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는 이탈리아의 튜린Tulin에서 2016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내년의 의제는 ‘테이스팅 더 랜드스케이프Tasting the Landscape’로, 환경,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으로 경관을 다루는 다양한 접근과 경험이 발표, 토론될 것이다. 참가를 원하는 조경가와 학생은 오는 8월 10일까지 영문 초록과 관련 서류를 공식홈페이지(http://www.ifla2016.com/)에 제출하면 된다.
- 심지수 / 서울대학교 통합설계미학연구실 / 2015년08월 /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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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
‘아키토피아의 실험’, 2015.6.30~9.27
건축가들은 때로는 파격적이었고, 낭만적이기도 했으며, 내밀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건축architecture이 꿈꾸는 유토피아utopia, ‘아키토피아architopia’를 쌓아올린 건축가들의 사회적 실험을 영상, 그래프, 텍스트,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소개한다.
건축가, 사진가, 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만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22명이 참여해 전시를 구성했다.
도시의 괴물, 세운상가의 꿈
이번 전시는 건축의 꿈과 욕망이 투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키토피아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아트밸리, 판교 신도시를 꼽으며 이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전시의 첫 장 ‘유토피아의 꿈’을 여는 세운상가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괴물 빌딩’1으로 불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이지만 그 시작은 화려했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의 ‘세운世運’ 상가는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로 완공되었다. 당시 세운상가의 설계를 맡았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은 쪽방과 판자촌이 즐비하던 소개 공지에 옥상 정원,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공중 보행로,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등 도시의 구조를 건축물에 압축한 파격적인 설계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시공사가 8개 회사로 조각나면서 당초 설계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완공되었고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 기본 설계 도면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 기사, 홍보 전단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세운상가의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이곳에 움트고 있는 새로운 미래에 주목한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사는 세운상가에 대해 “기본 설계 도면을 보면 원래 아주 미려한 건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메타볼리즘을 보여주는 진보적인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 실현되지 못한 건축가의 꿈이 미래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의 작업실을 옮겨온 듯한 전시의 배치는 관객을 세운상가와 그 일대의 청사진을 그리는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유토피아의 낭만과 현실
파주출판도시의 퇴근 시간, 사람들은 거리가 스산해지기 전에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랐다.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셔틀버스는 언제나 만석이었다. ‘출판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꿈의 도시’를 꿈꾸며 야심차게 출범한 출판도시의 밤거리와 주말 카페 테라스엔 도시로서의 생명력이 부족하다. 파주에 근무하는 직장인 500명을 설문 조사해 출퇴근 시간과 거리를 인포그래픽으로 나타낸 옵티컬레이스의 작품 ‘출판단지 가는 길’(2015)은 출판도시의 스산한 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밸리는 기존의 마스터플랜 식의 도시 개발의 대안으로 건축 코디네이터 개념을 도입해 출발한 도시다. 1부에서 소개한 세운상가가 1960년대 후반 기존 도심지에 정부 주도로 세운 아키토피아라면 2부 ‘건축도시로의 여정’에서 소개하는 파주의 사례는 1990~2000년대 도시 외곽에 민간이 주도해 이룩한 아키토피아다. 2부는 생태 도시, 민주적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의 낭만적인 기치 아래 이룩된 아키토피아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자족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와 절충하는 모습을 비춘다. 배형민, 정다운의 공동 영상 작업 ‘목소리의 방’(2008)을 통해 파주출판단지를 둘러싼 건축가, 건축주, 주민 등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의 이율배반
3부 ‘욕망의 주거 풍경’은 2000년대 이후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고 있는 판교 단독주택 단지를 조명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서울로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밀도 신도시다. 도시근교에서 여유와 멋이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건축주의 요구와 자신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짓고 싶어 하는 건축가의 이상이 맞물려 탄생했다.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도시와 동떨어진 반쪽 도시가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파주의 사례와 다른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판교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건물 크기에 비해 좁고 작은 창문을 가진일련의 단독 주택을 촬영한 이영준의 사진 작품 ‘왜 판교는 창문을 싫어할까’(2015)는 이웃과 함께 하는 ‘저녁’이 과연 판교에서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웃과 소통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의미에서 담장을 만들지 못하게 한 규정은 오히려 단지 곳곳에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주택의 창문을 극도로 작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최호철의 일러스트 작품 ‘판교택지개발지구-돈이 자라는 땅’(2005)은 평범한농촌 마을이 신도시 개발 붐으로 인한 부동산 투기로 어수선해진 모습을 묘사했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 누군가의 소박한 저녁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 백지와 같던 도시의 밑그림은 어느새 빽빽한 획으로 들어찼다. 저성장 시대, 앞으로 건축가들은 아키토피아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펼칠까. 이번 전시는 건축가들이 지금까지 펼쳐온 실험의 부산물과 열매를 소개하며 미래의 아키토피아에 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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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만지고 즐기는 ‘지붕감각’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
지난해 구름 풍선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신선놀음’에 이어 올해는 파동 형태의 거대한 지붕이 미술관 마당을 뒤덮었다. 갈대를 엮은 발로 만든 지붕이 바람에 너울거리듯 커다란 파동을 이루며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뉴욕현대미술관(MoMa-PS1), 현대카드와 함께 여는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8_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는 올해의 최종 건축가로 SoA(이치훈, 강예린)를 선정하고, 작품 ‘지붕감각’을 지난 7월 1일 선보였다.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oung Architects Program(YAP)은 뉴욕현대미술관이 신진 건축가를 발굴하고, 이들에게 프로젝트 기회를 주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공모 프로그램이다. 칠레(CONSTRUCTO), 이탈리아(MAXXI), 터키(Istanbul Modern)의 유명 미술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각국의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고 있으며, 지난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도입되었다. ‘지붕감각’은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 30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극대화된 지붕의 감각
최종 건축가로 선정된 SoA는 미술관 주변의 북촌 한옥마을과 경복궁의 지붕에서 영감을 받아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점점 사라져가는 지붕의 느낌을 되살려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지붕의 형태를 수직적으로 왜곡하고 과장시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시켰다. 또한 커다란 갈대발을 재료로 이용해 비와 바람에 스치는 갈대발의 소리와 움직임, 발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발이 만들어내는 그늘의 시원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지붕은 폭 1.5m, 길이 2.5km의 갈대발을 엮어서 만들었다. 강예린 SoA 소장은 “근 두 달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애타게 돌아다니며 ‘갈대발’을 생산하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한국에서는 더 이상 ‘갈대발’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작업 과정 중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SoA 팀은 중국 산둥 지방의 가장 큰 늪지대에서 갈대발을 생산하고 있는 마을을 찾아 3대째 갈대발을 만들고 있는 장인을 섭외해 갈대발 지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정관념을 부수는 대안 건축
‘지붕감각’은 2차원적인 형태의 갈대발을 철골 지지물에 ‘걸어’ 3차원의 공간으로 구현했다. 따라서 지붕감각은 갈대발을 말아 올리거나 걷어서 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갈대발은 소재의 특성상 덥고 습한데다 때로는 태풍까지 몰아치는 한국 여름 기후에 풍화되거나 마모되기 쉽다. 기후 상황에 따라 갈대발을 걷어 보관하고 마모된 부분은 여분으로 만들어 둔갈대발을 이용해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지붕감각’의 이러한 특징은 ‘건축은 한번 지어지면 변형할 수 없는 고정적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대안 건축의길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안과 밖, 반전의 묘미
‘지붕감각’의 가장 큰 묘미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느슨하면서도 안과 밖에서의 체험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작품 밖에서는 지붕감각의 거대한 크기와 과장된 형태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내부로 들어오면 소리, 향, 촉감 등 미시적 요소의 경험이 두드러진다.
당초 ‘지붕감각’의 내부 조경은 단순히 지형을 구축하고 잔디를 입히는 설정이었지만 롤 잔디의 비용과 관리 문제, 급박한 시공 일정 등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었다. 안기수 부장(울림조경), 김지환 과장(Studio L)과 함께 팀 동산바치를 결성해 ‘지붕감각’ 조경 부분의 설계와 시공을 진행한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은 “현장에서 테스트를 거쳐서 바닥 재료로 최종 확정된 바크는 우려와는 달리 철골 구조물을 안정적으로 받치고 소나무 수피 고유의 향을 공간 내부에 가득 채워 ‘지붕감각’의 감각을 진하게 더해주었다”고 전했다. 갈대발이 드리우는 그늘과 부드럽게 밟히는 소나무 바크, 수크렁과 관중 등의 식물이 어우러진 갈대발 내부로 들어오면 마치 숲 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갈대발을 지지하는 철골 지지대가 내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서 철재의 차가운 재질감을 완화시키고 기둥의 위압감을 줄이기 위해 둥근 마운드를 조성하고, 그곳에 여러 종류의 식물을 식재했다. 그중 가장 높게 쌓은 둔덕 위로 매트를 깔아 동선을 만들고 갈대발에는 구멍을 뚫어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이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최영준 소장은 “우리 팀이 가장 특별히 생각하는 둔덕이었는데, 미술관 측에서 이 마운드에 대해 ‘무덤 같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작가의 의도를 앞세우기 전에 공간에 대한 공공의 보편적인 인식도 존중해야 된다는 점에 수긍하고, 약간의 추가식재를 통해 논란을 잠재웠다”고 둔덕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미술관 제 8전시실에는 최종 우승팀과 최종 후보군의 설계안과 뉴욕, 칠레, 이탈리아, 터키에서 진행된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우승팀의 작품이 전시된다. 한여름, 도심 속 피서지를 선물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뜨거운 계절을 지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