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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Gibberd
  • 환경과조경 2009년 4월
프레드릭 기버드의 정원

정원은 어느 특정인만의 전유물, 혹은 특정 분야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속의 정원이 있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상 공간 내에서 정원을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수많은 실험과 시도가 반복될 때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이 출현하게 되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아름다우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가정 주부였던 로즈마리(Rosemary Verey )여사나 영화 감독이었던 데릭 저먼(Derek Jarman)의 정원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 하자면 20세기 영국 건축가를 대표하는 한 사람인 프레드릭 기버드Frederick Gibberd(1908~1984)가 그의 마지막 생애의 28년을 살았던 곳의 정원을 들 수 있다. 근대건축의 개척자 중의 한명으로 평가 받고 있는 기버드는 도시설계가이기도 하면서 조경가라고 할 수도 있다. 초기의 풀먼 코트Pullman Court(1934~1935)를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할로 뉴타운(Harlow New Town)계획, 런던 히드로 공항 터미널, 리버풀의 로마 가톨릭 성당(1962~1967) 등 그는 많은 건축물과 도시계획을 남겼다. - 중략 -

기버드가 구입하기 이전에 저택에 정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원의 많은 부분이 소유주들이 바뀌면서 첨가되어 왔다. 이 저택의 역사는 1907년 법정 변호사인 뉴먼(FJ Newman)이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든 것부터 시작된다. 저택 앞의 장방형 연못과 라임 가로수길은 이 당시의 흔적이다. 1920년에 저택은 공무원인 블랙쇼(John Blackshaw)에게 팔렸고 그는 장방형의 연못 끝부분에 정자를 세우고 저택의 입구에 오두막을 지었다. 이후 한 명의 소유주가 더 바뀐 후 1936년 의사인 랙(Victor Lack)이 저택을 구입 후 이곳을 작은 농장으로 개조한다. 이후 농장은 다시 부동산 시장에 나오고 5년이 넘도록 새로운 주인을 만나지 못하다가 집을 찾던 기버드의 눈에 띈다.

건물이 많이 낡은 상태였지만 다시 지을 수는 없었다. 재미있게도 그가 도시의 종합계획자였지만 그린벨트 안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재건축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계획의 책임자라 하여도 특혜를 받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주거건축에 대한 이상향을 이곳에서 구현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실내 인테리어를 새롭게 하고 지붕의 기와를 바꾸고, 테라스를 만들거나 넓히는 등 개보수에 중점을 두었다. 연못, 잔디밭, 숲속의 빈터, 가로수길은 81개의 조각품, 큰 도기화분, 그리고 건축물의 잔재를 위한 무대로서 기버드에 의해서 차례차례 첨가되거나 변모되었다. 하지만 기버드는 이 정원을 위한 어떤 마스터플랜도 제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바로 자신 스스로가 고객이기 때문에 그림을 준비할 이유도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변화시킬 수많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곤 하였다. 기버드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한 사고를 가진 직관적 정원사였다. 식재를 한 후 그것이 적합하다면 잘 자라서 주변과 조화를 이룰 것이고 아니라면 뽑아버리거나 정리하고 다른 것을 또 식재하면 된다는 단순하지만 실험적이고 실천적인 자세로 정원을 가꾸어 갔다. 이러한 그의 방법은 최근에 영국 문화유산기금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원 복원 프로그램에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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