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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3) 정체성: 개성, 전통 그리고 한국성
  • 환경과조경 2009년 3월
미처 준비되지 않은 질문

어느 대학의 특강을 마치고 질문을 받았다. 필자의 작업이 우리 전통과는 어떻게 연결이 되냐고... 기하, 콜라주와 다이어그램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파워포인트 이미지들이 made in Korea라고 하기엔 석연찮다고 생각했나보다. ‘난 전통조경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내 작업을 하는 동안 전통을 염두에 둔 적은 없다’가 솔직한 대답이었겠지 싶다. 필자가 지금까지 수행한 작업들이 전통적 측면과 밀접하다고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작업의 주된 주제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템적 요소-예를 들면, 꽃담, 팔각정, 전통문양-위주의 소품적이고 평면적인 전통의 구사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의 대답은 한국인에 의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와 사고를 바탕으로 발현된 것이므로 그것이 전통문양이나 청사초롱을 달지 않았다고 해도, 혹은 직선적인 기하로 치우친 평면이라고 해도 한국성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뭐 이랬던 것 같다. 별로 흔쾌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항상 머릿속에 전통을 되뇌지 않았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조경이 동시대의 우리 문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분야이면서 주변 맥락과 밀접하게 교감해야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맹목적이고 직설적인 전통의 구현은 오히려 시공간상의 엇박자적 분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질문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 혼용되고 있는 다양한 단어들-전통, 한국성, 이즘, 태도, 경향-을 ‘정체성identity’이라는 키워드로 포괄하는 것으로 정리를 시작한다.


정체성: 개성, 전통 그리고 한국성

설계에서의 정체성은 작업의 본질적인 이유이며, 나와 남을 뚜렷하게 구별시키는 어떤 것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조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개인 혹은 설계사무소의 고유성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다. 정체성은 개인의 스케일에서 논의될 수도 있고, 국가나 민족적 스케일에서 다뤄질 수도 있다. 개인의 스케일에서는 설계가로서 구별되는 개성personality이나 태도attitude로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 하지만 국가나 민족의 스케일에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선 구성원 간의 특질적 공감이 드러날 때 정체성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국가 혹은 민족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우리는 조경의 전통성tradition과 한국성Koreaness을 거론해 볼 수 있다. 개념적으로 전통성이 동일성에 치우친 것이라면, 한국성은 동일성과 차이를 모두 수용하는 개념이다. 전통성이 영토화 과정이라면, 한국성은 재영토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은 구성원에 의해 과거로부터 계승된 양식일 뿐 아니라 국가나 민족에 의해 고급문화high culture로 지정되어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공식적인 대외 홍보기능도 담당한다는 점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찬란한 문화, 역사를 자랑하는 과거를 갖고 있으며, 이들 시대의 문화는 계승할 가치가 있는 대표적인 전통으로 주목받는다. 따라서 그 시대의 아이템들이 구현되거나 그 당시의 이론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 공간을 재현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조경으로 인식되고 있다. 반면 한국성은 보다 포괄적인 개념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전통과 한국성을 시각적으로 살펴보려면 새벽에 TV방송을 마무리하는 애국가의 배경이미지를 보면 될 것 같다. 우리의 자연, 전통문화와 더불어 역동성, 한류, IT강국 등 지금의 우리를 잘 설명해주는 매체들이 등장한다. 한국성은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묘사되고 표출되고 있지만, 한국성과 조경설계의 연관성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명쾌하게 설명된 기억은 희미하다.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작게는 개별 설계가들의 개성의 구현과 크게는 조경설계의 한국적 동시대성 구현에 대한 논의를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하여 전개해보는 것이다. 진지하게 필자의 설계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와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작업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조경설계의 정체성에 대한 체계적인 고민으로서 이 글을 구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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