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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달려라, 아비
Editor’s Library: Run, Daddy, Run
  • 환경과조경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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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 창비 | 2005

 불효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는 줄어든 지 오래고, 최근엔 전화도 통 드리질 못했다. 특히 2주 전에 집에 내려가겠다는 계획을 취소해 버린 것이 영 찜찜하다. 분명 엄마는 전날부터 (엄마 눈에만 핼쑥한) 딸을 살찌우려고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을 텐데. 어버이날까지 이어지는 5월 초의 황금연휴 기간에도 고향에 다녀오지 못할 것 같다. 할 수 없이 꼼수를 부렸다. ‘5월에는 ‘편집자의 서재’ 꼭지를 빌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특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부모님 전상서’를 올려 점수 좀 따야겠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소설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하지만 애초에 효도를 글로 하고자 한 심보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글이 영 써지질 않아 원래 쓰려고 했던 책을 막판에 바꾸어 버렸다.

우선 구구절절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글을 쓸 자신도 없거니와, 우리 엄마는 『엄마를 부탁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불멸의 첫 문장―“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에 도저히 이입할 수 없게 하는, 오히려 시골이라면 몰라도 도시에서는 절대로 잃어버릴 리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엄마는 ‘시골 흙바닥보다 도시 아스팔트길을 걸을 때 신이 나는 사람’이고, 삼촌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큰누나’이며, 아빠의 푸념에 따르면 ‘절대 지고는 못 참는 여편네’다. 그러니 제아무리 신경숙 작가가 2인칭 시점을 써서 독자를 소설 속으로 밀어 넣고, 그녀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눈물샘에 십자 포화를 퍼부어도 나는 여간해서는 소설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 3년 전(2005년) 출간된 김애란 작가의 『달려라, 아비』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았다.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스물다섯이던 김애란 작가는 젊은 작가답게 기발한 상상력과 경쾌한 문체로 이 시대의 새로운 ‘어머니’를 창조했다. 주인공 ‘나’는 반지하방에 사는 미혼모 택시 운전기사의 딸. 분홍색 야광 반바지를 입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달리는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자신의 탄생과 아버지의 가출, 외할아버지와의 일화 등의 신변잡기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떠난 아버지에 대해 원망이나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딘가 어리숙하고 철없는 아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상상했던 십수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동안 늘 눈이 아프고 부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 아버지의 얼굴에 썬글라스를 씌워드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1


이전의 한국 문학에서 결핍과 상처로 그려지곤 하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주인공이 보여주는 긍정의 태도에서 단순한 경쾌함과 발랄함을 넘어서 깊은 성숙미가 느껴진다. 주인공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은 주인공의 어머니 조자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전부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조자옥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조자옥은 만삭인 자신을 두고 애인이 도망갔을 때에도 홀몸으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탯줄을 자른 강인한 ‘어머니’이고, 고집 세고 욕도 잘하는 ‘택시기사’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2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3 주인공이 어머니가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미혼모 택시기사 조자옥의 삶을 위대하고 존엄하게 그려낸다.


『달려라, 아비』의 가장 큰 미덕은 심각하게 내용이 전개되는 상황에서도 유쾌한 농담을 건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담과 유머는 가벼움이나 경박함이 아니라 자기긍정에서 비롯된다. 이혼한 아내의 새 남편을 피해 잔디 깎기 기계를 타고 최고 시속으로 도망가는 아버지, 자신을 버리고 간 옛 애인의 부고 소식에 상심하며 잘 썩고 있을지 궁금해 하는 어머니 등 소설 전반에 따뜻한 유머 코드가 넘친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누구 딸이냐고 묻는 외할아버지의 능청스런 질문에 ‘나’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며 “조자옥이! 조자옥이 딸이오”라고 온힘을 다해 소리치는 부분이다. 내게 누구 딸이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쩌렁쩌렁 엄마 딸이라고 외칠 텐데. 아쉽게도 나는 엄마와 너무 똑 닮아서 누구 딸인지 이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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