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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옴스테드
    1822년 4월 26일, 센트럴파크의 설계자이자 현대 조경의 창립자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태어났다.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을 맞아 미국 전역에서는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강연회가 줄을 잇고 있으며, 옴스테드의 도시 철학과 공원관을 재해석함으로써 동시대 도시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공간적 불평등에 처방전을 구하는 학술대회들도 연이어 열리고 있다. 옴스테드의 생애와 업적을 갈무리한 다양한 아카이브도 구축되어 이제 클릭 몇 번이면 그가 남긴 글과 도면을 누구나 직접 만날 수 있다. 『환경과조경』은 이미 2년 전부터 2022년 4월호를 옴스테드 특집호로 엮는 구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지속되는 코로나19의 여파로 한국조경학회와 연계한 옴스테드 세미나, 해외 기관과 공동 주관하는 전시회,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 옴스테드 세션 등 초기의 여러 계획을 발전시키지 못한 채 2022년 봄을 맞고 말았다. 채 두 달이 남지 않은 시점에 이번 특집 ‘옴스테드 200’을 다시 기획할 수밖에 없었지만, 참여 필자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그나마 옴스테드의 삶과 업적, 공원관, 저작과 작품, 기록물을 폭넓게 아우르는 지면을 꾸릴 수 있게 됐다. 옴스테드 관련 한국어 논문을 출간한 경험이 있는 연구자들을 급히 섭외했는데, 마감 시간이 촉박했음에도 모두 흔쾌히 집필을 수락해주었다. 오랜 기간 옴스테드 공원 철학의 형성 배경을 연구해온 조경진(서울대 교수)은 이번 원고를 통해 그의 책과 글에 담긴 공원관을 재해석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되짚었다. 옴스테드의 공원 복지 개념을 주제로 논문을 출판한 바 있는 김민주(환경과조경 출판‧기획팀)는 이번 특집에서 옴스테드가 남긴 글과 공공 프로젝트, 그리고 그를 다룬 주요 저작을 꼼꼼히 목록화했다. 옴스테드의 파크웨이와 19세기 북미의 어바니즘을 다룬 여러 편의 글과 논문을 발표해온 신명진(서울대 박사과정)은 옴스테드가 계획한 일련의 선형 공원을 도시 그린 인프라의 선례로 재평가하고 현대적 의미를 탐색했다. 조경사 연구자 두 명도 기꺼이 특집에 참여해주었다. 임한솔(ULC 에디터)은 옴스테드의 성장 과정, 두 번의 여행과 작가·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 센트럴파크 감독관 시절과 공모전 당선, 위생위원회 사무국장 경력, 전업 조경가로서의 다각적 실천 등 생애 전반과 업적을 살폈다. 김정화(막스플랑크예술사연구소 4A_Lab 연구원)는 미국의회도서관의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와 ‘옴스테드 어소시에이츠 레코드’, 페어스테드의 ‘옴스테드 아카이브’ 등 관련 아카이브를 면밀하게 소개하면서 각 아카이브의 배경과 구조적 특징, 최근의 변화와 움직임까지 개괄했다. 편집부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기자는 촌각을 다투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옴스테드 재단, 센트럴파크 컨서번시 등 관련 기관과 계속 접촉하며 다양한 문건을 협조받았고 특히 많은 시각 자료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했다. 월간지의 특성상 조금 더 충분한 준비 기간을 확보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지만, 그 명성에 비해 한국어로 정리된 옴스테드 관련 자료가 매우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면 이번 호 특집이 여러 독자들에게, 나아가 향후의 국내 옴스테드 연구자들에게 적어도 입문 가이드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자평해 본다. 1903년 8월 28일,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매사추세츠 주 웨이벌리에서 81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특집을 꾸리며 여러 자료와 기록을 분주히 들추다 당시의 부고 기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의 사망 다음 날 「뉴욕 타임스」에 실린 장문의 부고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센트럴파크와 프로스펙트 공원뿐 아니라 미국 여러 도시의 뛰어난 공간들을 디자인한 위대한 조경가”로 시작하는 부고 기사는, 그를 다룬 후대의 그 어떤 전기들보다 생생한 목소리로 옴스테드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담고 있었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의 광풍 속에서 도시 위생과 시민 건강을 위해 미국 전역의 여러 도시에 대형 공원과 공원 녹지 시스템을 정착시킨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그는 도시 혁신의 비전을 지향하는 조경가(landscape architect) 직명을 창안하고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직능을 창설한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도시 사상가이자 사회 개혁가였다.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을 맞은 2022년, 기후변화와 팬데믹에 신음하는 지구촌 곳곳의 조경가들에게 도시와 공원, 사회와 공공 공간이 맺는 함수 관계를 다시 조회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옴스테드[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행군과 식물
    군인 시절 가장 힘든 훈련은 행군이었다. 20년간 끼니와 운동에 소홀히 했던 내 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수십 킬로미터를 걷는 일을 버티지 못했다. 훈련 중 다친 무릎이 때때로 아팠지만, 부대의 모든 병사는 행군을 해야만 했다. 같은 무게의 군장을 메고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행렬. 짧은 휴식 시간을 기다리는 긴 발걸음. 그 곁에 있었던 식물을 기억한다. 농지 사이 연못에 핀 노랑어리연꽃, 개울 옆 풀밭에서 하늘거리던 금꿩의다리, 도로변에 줄지어 피었던 좁쌀풀과 개망초, 그리고 검은 숲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은사시나무. 행군은 힘들었지만 식물은 아름다웠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니 행복하겠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그때의 행군을 떠올린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해도 일은 일.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의 일도 공평하게 무겁고 기나긴 여정이다. 다만 나는 그 행렬 속에서 식물을 헤아리는 중이라고, 늘 하지 못했던 대답을 이 글로 대신한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오픈니스 스튜디오 작지만 강하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스튜디오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대학원에서 조경 설계를 전공한 뒤 현장 중심의 설계 경험을 쌓기 위해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 입사했다. 주로 장인처럼 정원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회사였다. 작은 설계 스튜디오에서 전통적인 도제 방식으로 디자인을 배웠다. 일상에서 스승의 작업을 보조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스승의 습작을 트레이싱하면서 감각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디자인을 이끌어가는 방법뿐 아니라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는 방법,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방법 등 모든 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배울 수 있었다. 입사한 지 5년 정도 되었을 때는 서툴지만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그럭저럭해 내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6년 차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고민하던 무렵 우연히 한두 가지 개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자연스럽게 독립하게 됐다. 현재 스튜디오의 구성원은 몇 명이며, 최종 규모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대표 포함 8명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다. 최종적으로는 10명 정도의 규모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면 대표 디자이너가 모든 디자인 결과물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고, 동시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다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디자인 스튜디오의 경우 규모가 너무 커지면 대표 디자이너는 전업 매니저의 역할을 맡게 되기 쉽다. 반대로 규모가 너무 작으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제한되기 때문에 적정 규모가 중요하다. 작은 스튜디오의 장점은? 작은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운영 측면에서 간접비를 줄이고 일의 효율을 높여 원하는 일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를 가질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클라이언트가 담당 팀장이 아닌 스튜디오의 대표와 직접 소통한다는 점에서 신뢰를 줄 수 있다. 한 프로젝트를 디자이너 여러 명이 지원하는 구도에서 만족을 얻는 클라이언트가 있는가 하면, 대표 디자이너 한 명과 긴밀하게 소통하기 원하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후자의 경우 작은 스튜디오가 더 큰 강점을 갖는다. 내부적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조직은 큰 조직에 비해 프로젝트 단위로 팀을 유동적으로 개편하기 때문에 업무에 대응하기 쉽다. 촘촘한 직급 체계와 인사 구조를 가진 대형 사무실이라면 적용하기 어려운 대응 방식이다. 프로젝트마다 발 빠르게 팀을 재구성해 대응하는 방식은 때로는 구성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해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구성원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오픈니스 스튜디오의 팀원들을 소개해 달라 최재혁 대표 디자이너는 일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말하는 편이라 때로는 돌직구 상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뇌피셜’에 따르면) 속마음은 따듯하고 팀원들을 배려하고자 늘 노력한다. 김지학 디자인 매니저는 오픈니스 스튜디오에서 이제 5년째다. 프로젝트의 핵심을 파악하고 효율적인 진행 계획 수립과 업무 분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디자인 능력과 시공 기술 또한 훌륭해 정원박람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력도 있다. 변인환 컨스트럭션 매니저는 나이는 많지 않지만 시공 쪽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깊고 여행과 사진을 즐긴다. 전문가 수준의 사진 촬영 능력을 갖추고 있다. 김제인 시니어 디자이너는 디자인 감수성이 뛰어나다. 시와 피아노를 취미로 즐기는 그녀가 만든 디자인 결과물에서는 특별한 온기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장찬희 시니어 디자이너는 타고난 설계가 기질이 있는 디자이너다. 누구보다 꼼꼼하고 정확한 편이고 빠른 손을 가졌다. 박수미 디자이너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조경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디자인적 직관과 판단력이 좋고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팔방미인 디자이너다. 이우정 디자이너는 일러스트 작가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D 이미지 작업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박경자는 2021년부터 고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경기술사이자 문화재기술자다. 디자인 스튜디오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실험 정신과 유연한 사고방식, 그리고 디자인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다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임하고자 노력한다. 스튜디오를 개소한 2017년, 한강예술공원 시범사업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지름 8m의 거대한 튜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고무 보트 제작 업체를 수소문하고 다니면서 몇 차례 고비를 겪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만들어 냈을 때 느꼈던 성취감과 즐거움이 여전히 오프니스 스튜디오의 설계 DNA에 각인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픈니스 스튜디오의 디자인 스타일이 있다면? 어떤 대상이든 복잡하게 디자인하면서 품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쉽고 단순하게 만들면서 높은 품질을 내는 일은 어렵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더 나아가 감동을 주는 공간을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그런 작품이 고전이 된다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의 뜻에 휘둘리고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라갈 때가 많지만, 우리는 늘 이런 관점에서 일을 시작한다. 단순함과 모던함,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이제껏 오픈니스 스튜디오가 추구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트렌드의 변화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트렌드를 좇아 가볍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담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 지양하는 편이다. 그보다는 색과 질감, 스케일과 조형 등 기본적인 공간 요소를 균형감 있게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공간 안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다. 공간에서 시각적 균형미가 한눈에 드러나게 만드는 것에도 늘 신경을 쓴다. 식재 디자인의 경우 대상지의 미묘한 환경적 변수들을 감지하여 지속가능한 공간을 구현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그 후에 미적·사용자적 관점을 고려한다. 시설물 디자인에서는 부피감과 무게감의 표현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너무 투박하게 디자인해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느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반대로 너무 가벼워서 공간에 안착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디자인한다. 복잡한 형태와 어려운 디테일에 큰 관심이 없고, 가장 기본적인 조형성을 가장 맵시 좋게 드러내기 위해 쉽고 확실한 디테일 디자인에 집중하는 편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창업을 꿈꾸는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한다면?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다면 쉬운 게 자신의 스튜디오를 여는 일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되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디자인하는 게 즐겁고 그것에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일을 일로 대하는 순간 일은 떠나간다. 반대로 일을 친구 삼아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걷는다는 생각으로 가까이 두고 친하게 지내고자 하면 어느새 자신이 기대하던 것보다 많은 일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스튜디오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열심히 단련한 뒤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하면 좋다. [email protected]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는 외부 공간의 디자인 빌드 분야에 강점을 가진 디자인 스튜디오다. 단순하고 모던한 조형, 자연스러운 내러티브와 편안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다수의 개인 정원 및 공공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했으며.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공공 예술과 전시 프로젝트에도 폭넓게 참여해왔다. 한강예술공원,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예술놀이마당 전시에 참여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외부 환경 개선 설계를 수행했다.
  • [모던스케이프] 나무를 심자
    예로부터 ‘나무를 심는 일’은 기념할 일이 있을 때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마당에 심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민간의 전통이다. 오동나무는 속성수에 목질도 가벼워서 딸이 시집갈 때 혼수로 가지고 갈 가구의 재목으로 사용하기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밖에 우리는 결혼. 회갑, 승진 등 경사가 있을 때도 나무를 심는 것으로 축하를 했는데,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는 기념식수의 전통이 멀리 있었던 건 아닌 셈이다. 왕실에서도 나무를 심었을까 싶어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봤다. 왕실의 가족묘인 능소(陵所)와 원소園所에 보토補土하여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검색어를 식목(植木)으로 걸러봤다. 왕릉 일대에 식재한 것을 제외하면, 영남 지방 여러 고을에는 민둥산 때문에 재해가 빈번하니 벌목을 금하고 나무를 많이 심어 토양 유실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상소한 헌납(獻納)1 권엄의 의견이 유일하다. 나무 심기를 통해 상징과 기념을 넘어 실용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2 근대가 되면 동서를 막론하고 나무를 심는 일이 도시의 위생과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한국에서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식목의 기능에 가장 먼저 주목했다. 해외 도시를 경험한 바 있는 그들은 나무 심기가 노력에 비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종목일, 즉 식목일을 만들어 국민이 나무를 심게 할 것을 권장했다. “우리가 바라건대, 조선의 농상공부에서도 종목일을 작성하여 봄가을로 한 번씩 전국의 인민을 시켜 동네 빈터에 나무를 심게 하고 …… (그러면) 몇 해 지나지 않아 좋은 공원이 생길 것이고 그 나무들이 다 자라 쓸 만하게 되면 해마다 얼마씩 베어 팔아 그 돈을 가지고 공원을 정비하는 등 시민을 위해 쓸 일이 많을 것이다. …… 속성수인 백양목을 비롯하여 단풍나무, 전나무, 가죽나무 등을 일 년에 한 번씩만 심는다면 큰 수고로움 없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3 하였다. 그러고는 식목의 효과로 첫째는 산사태 방지로 산 아래 농가들이 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다는 점, 둘째는 공기 정화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한 셋째로는 나무로 공기가 깨끗해지면 전염병이 예방된다는 점, 넷째로는 그늘과 맑은 공기를 제공해 백성들의 휴식처가 마련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당시 조선의 주요 도시는 산업화로 인해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비위생적이고 무질서한 도시 환경은 근대로의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식목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각주 1.헌납은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4품 관직이다. 각주 2.『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0월 22일. 각주 3.「독립신문」 1896년 8월 11일.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