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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옴스테드 200 The 2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Frederick Law Olmsted
    현대 조경의 선구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생애와 업적 _ 임한솔 옴스테드의 공원관 _ 조경진 공원으로 만든 도시, 옴스테드의 선형 공원 _ 신명진 옴스테드 아카이브, 기억의 집 또는 아스날 _ 김정화 옴스테드가 남긴 것들 _ 김민주 옴스테드 200, 더 읽을거리 _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지금 이곳에 공 원을 만 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 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1850년대 센트럴파크의 필요성을 역설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1822~1903)의 말을 21세기에 되돌아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일상에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도시공원을 재발견했다. 잔디밭에, 물가에, 작은 벤치에 거리를 두고 앉은 사람들을 보며 도시공원은 “도심에서 자연으로의 최단 시간 탈출”을 가능하게 한다는 옴스테드의 말을 실감했다. 아직 팬데믹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 2022년,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1822년 4월 26일 생)을 맞이했다. 옴스테드는 조경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의 장을 연 선구자다. 현대 도시 공간 구조를 재편했을 뿐 아니라 현대적 개념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기틀을 세웠다. 미국 조경계는 이 역사적인 해를 기념하고자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본지도 이에 발맞추어 옴스테드의 생애, 주요 저작과 프로젝트, 공원관과 조경론, 옴스테드 아카이브 등을 살펴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등 격변을 겪고 있는 동시대 도시에 대한 시사점을 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진행 배정한, 남기준,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 2022년04월 / 408
  • [옴스테드 200] 현대 조경의 선구자, 옴스테드의 생애와 업적
    조경의 아버지 조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첫손에 꼽힐 인물이 있다. 조경의 원어인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를 전문업의 명칭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인공이자 도시공원의 전범으로 널리 알려진 센트럴파크의 설계자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Olmsted, 1822~1903, 이하 옴스테드)다. 옴스테드는 설계가로서 정규 교육이나 도제식 수련을 받은 적이 없다. 또한 조경가 외에 작가, 저널리스트, 사회 비평가, 행정 관료로도 불리는 등 다양한 일을 수행했다. 심지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조어를 최초로 발명하지도 않았으며, 그 명칭을 오랫동안 공유한 파트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옴스테드를 ‘조경의 아버지’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진정한 아버지는 유전자의 원천 그 이상이다. 아버지는 불완전한 개체의 성장과 자립을 지지하는 존재이며 때로는 존경의 대상으로, 때로는 반면교사로 떠오르는 규율 그 자체다. 옴스테드는 여러 직업을 두루 경험하고 설계와 글쓰기, 조직 운영을 종횡무진하며 조경업의 안팎을 살펴보고 그 정체성을 구축해냈다. 옴스테드의 남다른 삶의 궤적은 유동적인 경계를 지닌 직능의 미래를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옴스테드가 강조한 픽처레스크(picturesque) 자연미는 조경 직능의 전통이자 한계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옴스테드를 조경의 아버지로 기리고 추고하게 되는 것은 그의 업적 못지않은 흔적 때문이기도 하다. 옴스테드는 미국 전역에 걸쳐 500여 건의 작업을 수행했고 조경가로 일하는 동안 6,000여 건의 보고서와 서신을 남겼다. 옴스테드의 두 아들이 미국조경가협회(American Society of Landscape Architects)와 하버드 대학교 조경 프로그램을 설립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말하자면 옴스테드는 후대의 조경 종사자들에게 전범과 원리, 인력 체계까지 물려주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옴스테드의 후예로 산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서른이 되기까지: 현장의 배움들 옴스테드는 코네티컷(Connecticut) 주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태어났다. 옴스테드 가문은 하트포드에서 여덟 세대에 걸쳐 살았다. 성공한 포목상인 그의 아버지는 풍경 애호가였다. 유년 시절의 옴스테드는 가족을 따라 뉴잉글랜드와 뉴욕 북부 등지의 경치 좋은 곳으로 자주 여행을 다녔다. 전원 풍경의 아름다움과 영향을 강조하는 옴스테드의 미감은 이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풍경을 체험하며 남다른 시간을 보낸 반면, 옴스테드의 성장 과정은 정규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다. 옴스테드는 주로 목사들로부터 교육 받았는데, 예일 대학교 진학에 거의 근접하기도 했지만 옻독이 오르는 바람에 시력 문제가 생겨 학업에 몰두할 수 없었다. 대학에 다니는 대신 옴스테드는 다양한 현실 경험을 쌓았다. 뉴욕의 포목점에서 일하고 중국으로 무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측량과 화학, 과학적 농법과 농장 운영 등을 익혔다. 옴스테드의 아버지는 다양한 경험을 쌓은 20대 후반의 아들에게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 농장을 마련해주었다. 옴스테드는 이곳에서 농업과 관리 운영의 이론을 실천으로 구현해보았다.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옴스테드의 삶은 조경과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미학적, 실무적 측면에서 차근차근 조경 자산을 쌓아가고 있었다. 두 번의 여행과 작가 옴스테드 농장을 경영하던 1850년대 초, 옴스테드는 센트럴파크와 만나기에 앞서 그의 인생을 바꾼 여행을 두 차례 다녀온다. 첫 번째는 1850년에 6개월간 떠난 유럽 여행이다. 이때 옴스테드는 영국 리버풀의 버컨헤드 공원(Birkenhead Park)을 방문하고 큰 자극을 받는다. 옴스테드는 “민주주의 미국에는 이와 같은 민중의 정원(People's Garden)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고 공원의 접근성이 모든 미국인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여행에 함께한 친구의 추천으로 옴스테드는 1852년 「뉴욕 타임스」의 전신 「뉴욕 데일리 타임스(New York Daily Times)」로부터 취재 여행을 의뢰받는다.타임스는 옴스테드에게 남부 지방을 여행하며 노예제를 포함한 농업 방식과 경제에 대해 써줄 것을 요청한다. 옴스테드는 185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남부 여행을 다녀왔고 타임스에 일련의 글을 출판하며 이름을 알린다. 옴스테드는 글을 통해 노예제의 서부 확장에 반대하고 남부 지방의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다. 이 무렵 옴스테드는 작가의 꿈을 꾸고 있었다. 옴스테드는 두 번째 여행을 다녀온 뒤 신생 출판사의 파트너와 유명 월간지의 에디터를 맡기 시작한다. 단행본 출간에도 힘을 기울여 첫 번째 여행을 바탕으로 『어느 미국 농부의 영국 여행기(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1852)를 출간하고, 두 번째 여행을 바탕으로 세 권의 연작을 출판한다(1856, 1857, 1860). 그러나 작가의 운명 대신 조경가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옴스테드는 1856년 출판사 일로 영국 런던을 방문하며 여러 공원을 경험했고, 이듬해인 1857년 센트럴파크의 감독관(superintendent)으로 취업한다. 센트럴파크, 감독관에서 설계자로 옴스테드가 센트럴파크 감독관 자리를 얻은 지 몇 달 뒤, 영국 출신 신진 건축가인 캘버트 복스(Calvert Vaux, 1824~1895)가 감독관인 옴스테드에게 센트럴파크 설계공모에 함께 참가하자고 제안한다. 복스는 원래 앤드류 잭슨 다우닝(Andrew Jackson Downing, 1815~1852)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왔지만, 다우닝이 1852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상황이었다. 다우닝은 건축, 경관, 원예 등에서 선구적 이론을 제시한 바 있는 전문가였다. 옴스테드는 복스와 뜻을 함께하며 다우닝이 남긴 생각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전까지 설계 경험이 전무했지만 복스의 제안을 수락한 이후 낮에는 감독관, 저녁에는 설계가로서 공모전 준비 작업에 참여한다. 옴스테드와 복스는 설계공모에 ‘그린스워드(Greensward)’ 계획을 제출해 다른 32팀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당선된다. 이 제안은 탁 트인 잔디밭을 중심으로 풍부한 식재와 목가적 풍경을 갖춘 동시에 도시와 이용자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낸 수작이었다. 옴스테드와 복스는 지면 아래로 꺼진 횡단 도로를 제안함으로써 도시 교통을 고려하면서도 공원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도록 했다. 또한 공원 내에 분리된 동선 체계를 적용해 이용 행태에 따른 간섭을 줄이고 이용자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조정하도록 했다. 센트럴파크는 옴스테드의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며 그의 후기 작업에서 구체화되는 설계 원칙들의 시험장이었다 센트럴파크 조성은 19세기 뉴욕의 공공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규모의 사업으로 꼽힌다. 미국인 엔지니어, 아일랜드인 인부, 독일인 정원사, 아메리카 원주민 석공 등 2만여 명의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했으며, 암반을 부수기 위해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보다 더 많은 화약을 터뜨렸다. 3천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약 3,800만㎥에 해당하는 돌과 흙을 옮겼고 36개의 다리와 아치를 지었으며 11개의 고가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50만 그루의 교목, 관목, 덩굴이 식재됐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옴스테드는 총괄건축가(architect-in-chief)직함을 갖고 전방위로 활동했다.그러던 중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미국 위생위원회와 마리포사 이스테이트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옴스테드는 뉴욕을 떠나 워싱턴 D.C.로 간다. 그곳에서 옴스테드는 미국 적십자의 전신이자 북부 연합군의 의료 지원을 담당하는 미국 위생위원회(US Sanitary Commission)의 첫 번째 사무국장이 된다. 옴스테드는 센트럴파크 현장에서 갈고닦은 조직 운영 기술을 발휘하여 병영의 위생을 감독하고 의료 공급 체계를 구축하는 실무를 총괄한다. 위생위원회에서 2년가량 일한 옴스테드는 1863년,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금광 사업지인 마리포사 이스테이트(Mariposa Estate)에 관리자로 취직한다. 옴스테드는 요세미티(Yosemite)계곡에서 가까운 이곳에서 코네티컷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풍경에 익숙해진 한편, 민간의 상업적 이해관계로 인해 자연이 위협받는 것을 목격한다. 위생위원회와 마리포사 이스테이트 경력은 옴스테드가 조직 운영 기술로 상당히 인정받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위생위원회 경력은 옴스테드가 자신의 조경 설계 필수 원칙 중 하나로 위생 공학을 강조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마리포사 이스테이트에서 일하던 당시, 옴스테드는 요세미티 보호구역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됨으로써 환경 보존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기도 했다. 1865년 제출한 요세미티 보고서에서 옴스테드는 사익으로부터 공익을 보호하는 것을 정부의 의무라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옴스테드는 미국 국립공원 체계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업 조경가로서의 활동과 이어지는 실천 1865년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옴스테드는 이후 30년 동안 전업 조경가로 활동한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캘버트 복스와 센트럴파크 작업을 마무리 짓고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을 설계한 것이다. 두 사람은 옴스테드, 복스 앤드 컴퍼니(Olmsted, Vaux & Co.)라는 사명으로 1872년까지 함께 활동한다. 그 뒤 옴스테드는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조경가(Frederick Law Olmsted, Landscape Architect)라는 직함으로 1884년까지 활동하다가 이후 회사의 이름을 몇 차례 바꾸게 된다. 옴스테드는 1895년 현업에서 물러나고, 그를 도와 일하던 두 아들인 존 찰스 옴스테드(John Charles Olmsted, 1852~1920)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주니어(Frederick Law Olmsted Jr., 1870~1957)는 1898년부터 옴스테드 브라더스(Olmsted Brothers)라는 사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이 회사 이름은 1961년까지 존속했다. 옴스테드가 세운 회사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전역에서 공원 설계, 공원 시스템 설계, 주거 단지 설계, 대학 캠퍼스 설계, 국립공원 계획, 도시계획 등 6천여 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옴스테드의 회사는 조경업의 전문성을 발전시키고 다음 세대 전문가를 교육하는 일을 거의 홀로 감당했다. 찰스 엘리엇(Charles Eliot)과 워런 매닝(Warren Manning), 윌리엄 라이먼 필립스(William Lyman Phillips) 등 그와 관련된 전문가 다수는 훗날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무엇보다도 두 아들은 미국조경가협회의 창립 멤버이며, 특히 옴스테드 주니어는 하버드의 조경 프로그램을 설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조경재단(Landscape Architecture Foundation)은 옴스테드의 이름으로 매년 장학생을 선정함으로써 그 역사와 유산을 기리고 있다. 옴스테드의 유산 픽처레스크 자연미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담아내고 대지의 구체적 맥락과 공간의 실용적 기능을 고려하는 옴스테드식 설계는 그가 떠난 지 거의 12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조경 설계의 기본으로 유효하다. 세간에는 센트럴파크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옴스테드의 작업은 대형 공원 외에도 도시 규모의 녹지 계획과 자연환경 보존, 주거 단지와 캠퍼스 설계를 아우른다. 옴스테드는 미국 국회의사당과 시카고만국박람회를 위한 조경가로 지명되는 등 국가적 프로젝트를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옴스테드를 조경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동인은 옴스테드의 시작보다는 이후의 과정에 있을 것이다. 현대 조경이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 사회적 불평등, 질병과 오염의 문제를 도시화와 산업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9세기의 옴스테드도 고민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이상과 현실을 이어붙이고 미학과 공학을 접목시키려던 옴스테드의 염원은 지금 여기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 예나지금이나 설계는 보이는 것만을 바꾸지 않는다. 참고 자료 ·National Association for Olmsted Parks,“About the Olmsted Legacy”(www.olmsted.org/the-olmsted-legacy/about-the-olmsted-legacy) ·National Association for Olmsted Parks,“Olmsted 200, Meet Mr. Olmsted-LIFE”(olmsted200.org/frederick-law-olmsted/life/) ·Library of Congress,Collection: Frederick Law Olmsted Papers”(www.loc.gov/collections/frederick-law-olmsted-papers/) ·Library of Congress,“Today in History-April 26”(www.loc.gov/item/today-in-history/april-26/) ·Greensward Group,“Central Park History” (www.centralpark.com/visitor-info/park-history) 임한솔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감영 원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경, 건축, 역사에 관심을 두고 설계와 이론,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다르게 보고자 한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온오프라인 매거진 유엘씨(ULC)를 만들고 있다.
  • [옴스테드 200] 옴스테드의 공원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미국 지성사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조경가이자 작가, 사회 비평가, 공공 행정가로서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국 답사기, 남부 노예 제도 취재기, 공원과 도시에 관한 에세이, 서간문 등 그가 남긴 글은 실로 분량이 엄청나다. 전기만 해도 10종이 넘고, 그를 다룬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여러 편이다. 옴스테드가 남긴 물적 유산만큼 그가 지성사에 남긴 유산은 찬란하다. 옴스테드의 글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당대 사상가들을 살펴보면서 옴스테드 공원관의 형성 배경과 특징을 살펴본다. 옴스테드가 처음 접한 공원은 조지프 팩스턴(Joseph Paxton)이 설계한 버컨헤드 공원(Birkenhead Park)이었다. 옴스테드가 1850년 뉴욕에서 출발해 리버풀에 도착한 후 처음 찾은 버컨헤드는 당시 리버풀 인근의 신도시였다. 배낭을 메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버컨헤드 공원을 꼭 가보라는 권유로 찾게 되었다. 이 우연한 만남으로 옴스테드와 공원의 인연이 시작됐다. 옴스테드에게 공원은 미국 사회가 꿈꾸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공간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사유하는 암체어(armchair)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센트럴파크 감독관 직책을 맡고, 공모전 당선 후에는 설계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답사를 통해 쌓은 경험과 독학으로 축적한 지식을 결합해 자신의 공원관을 형성했다. 이후 미국 여러 도시의 공원을 계획하면서 공원에 대한 옴스테드의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공원에 관한 옴스테드의 글 옴스테드의 대표적인 글에서 공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852년 출간한 『어느 미국 농부의 영국 여행기(Walks and Talks of an American Farmer in England)』에서 그는 버컨헤드 공원을 ‘민중의 정원(People’s Garden)’이라 지칭한다. 옴스테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에 감동한다. 그러한 풍경은 미국 도시에서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에서는 가난한 농부도 여왕처럼 공원을 즐긴다고 표현한다. 무엇보다 시민의 세금으로 조성한 이 공원이 시민이 소유하는 공간이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빵집 주인도 자기 동네 공원에 자긍심을 가진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공원: 백과사전적 관점(Parks: An Encyclopedic View)”(1861)이라는 글은 유럽 도시공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다룬다. 당시는 센트럴파크 설계 공모 당선 후 실시설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례 연구 기록물을 살펴보면 옴스테드가 유럽 공원의 역사와 여건을 잘 숙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설계가가 궁금해할 주제인 공원의 상대적 크기와 면적당 수용 인원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옴스테드가 공원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수행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870년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사회과학협회 총회에서 발표한 글 “공공 공원과 도시의 확장(Public Parks and the Enlargement of Towns)”에서 옴스테드는 공원에 관한 생각을 보다 선명하게 밝힌다. 도시가 급속하게 확장할 때 맑은 공기, 밝은 햇빛, 푸르름을 제공하는 자연 공간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광활함은 공원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한다. 밀집된 도시와 차단된 곳에서 시민들이 산책하면서 고요함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먼 미래를 보고 도시의 확장을 고려해 장기적 관점에서 공원 계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원의 역할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문화인이 되기 위한 시민 교육의 장이고, 둘째 심신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활력 공간이며, 셋째 시민에게 자긍심을 주며 도시를 매력적으로 하는 공유 자산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공원론이다. 옴스테드는 1886년 글 “마음 상태의 건강한 변화(A Healthy Change in the Tone of the Human Heart)”에서 존 러스킨(John Ruskin)을 인용하면서 문명화된 사람은 질서, 정교함, 깔끔함 같은 특성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품격 있는 도시는 섬세한 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교회, 도서관, 갤러리, 온실, 정원, 기념물, 공원 등 공공 공간의 수준이 도시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도시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보편적 시민의 예술 감각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왜 옴스테드가 좋은 공원을 만들고자 했는지, 왜 공원을 통해 시민 교육을 하고자 했는지 이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형성 배경 몇 편의 글을 통해 살펴본 공원에 대한 옴스테드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공원은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곳이다. 둘째, 계층 갈등을 비롯한 사회 문제 해결의 장이다. 셋째, 시민 교육의 공간이다. 넷째,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장소다. 이러한 공원관 형성에는 동시대 사상가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영국의 낭만주의 사상가인 존 러스킨과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1849)에서 “건축은 사용 목적이 무엇이든 그 모습이 인간 정신의 건강, 힘, 그리고 즐거움에 기여하도록 하는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칼라일은 『의상철학(Sartor Resartus)』(1836)에서 “육체, 자연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영혼, 신 등 보이지 않은 것으로 상징하는 의상”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옴스테드는 공원과 같은 공공 건축이 도시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옴스테드가 캘버트 복스(Calvert Vaux), 제이컵 레이 몰드(Jacob Wrey Mould)와 함께 작업한 센트럴파크의 베데스다(Bethesda) 테라스에는 러스킨의 영향이 선명히 드러나 있다.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로 제작된 테라스 장식물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낮과 밤의 서사가 세련되게 표현됐다. 옴스테드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와 같은 당시 초월주의자들의 자연관에도 영향을 받았다. 초월주의자들에게 도시는 악이고 자연은 지고의 존재로 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도시에 공원을 만드는 것은 인간 회복의 한 방편이었다. 에머슨은 『자연(Nature)』(1836)에서 “자연은 몸과 마음에 치료 효과를 주어 심신을 정상으로 회복시킨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에머슨의 영향을 받은 소로는 야생 자연인 월든에서 한동안 생활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월든(Walden, Life in the Woods)』(1854)을 저술했다. 그는 월든 호수에서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옴스테드에게 공원은 자연과 교감하면서 신의 내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저작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에 주목해야 한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가가진 선진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문화적 소양의 부재를 지적했다.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드 토크빌의 생각은 옴스테드에게 영향을 미쳤고, 공원이라는 유럽의 민주적 공간과 제도를 미국 사회가 빨리 수용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에게 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계층 갈등이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문화적 소양을 습득하고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장으로서 공원은 유용한 도구였다. 옴스테드는 이를 잘 수용했다. 스위스 철학자 요한 게오르크 치머만(Johann Georg Zimmermann)의 『고독(Solitude)』(1791)은 당대에 잘 알려진 저작이었다. 그는 『고독』에서 풍경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며, 건강한 고독은 자기 회복을 위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경향이라고도 말했다. 옴스테드도 어릴적부터 자연 풍경이 주는 치유 효과를 체감하고 있었다. 옴스테드 연구자들은 치머만의 사상이 옴스테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본다. 공원에서 우리는 자연 경치의 명상을 통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위협받지 않는 상태를 경험한다. 치머만은 건강한 상태의 고독을 자기 시간에 대한 몰입과 지나친 은둔으로 사회생활에서 격리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라 했다. 당시 새로 등장한 공원은 치머만이 말하는 건강한 고독을 경험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의미와 한계 옴스테드 공원관이 갖는 의미와 시사점은 무엇인가. 옴스테드식 공원은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확대 및 재생산됐다. 어쩌면 아직도 전 세계의 공원은 옴스테드의 우산 아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옴스테드의 공원관과 실천 행위는 이후 전문가들의 공원 계획, 설계와 큰 차이를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옴스테드는 당대의 사상을 자신의 공원 만들기라는 실천 행위를 통해 구현했다. 도시의 자연인 공원은 쓰임새 있는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바람 직한 미래상이 담긴 공간이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옴스테드의 공원은 그 가치와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탄탄한 철학이 있는 공원, 확고한 비전이 담긴 공원이기에 생명력이 길다. 이러한 점은 옴스테드의 개인적 역량에서 기인한 것이기 하다. 그는 인문적 소양을 갖추었고 사회적 발언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공원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높여 주었다. 물론 그와 함께 일한 캘버트 복스와 제이컵 레이 몰드의 디자인 역량이 옴스테드의 추상적 차원의 이상을 뛰어난 디테일 디자인으로 구체화시키는 데 힘이 되기도 했다. 옴스테드 공원관의 한계는 무엇인가. J. B. 잭슨(J. B. Jackson)은 “과거의 공원과 미래의 공원(The Past and Future Park)”(1994)이라는 글에서 옴스테드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조경가이자 도시설계가로서 그의 작품은 통상적으로 숭배되지만, 그의 사회 철학에 나타나는 엘리트주의, 반도시적 논조, 자연환경에 대한 강조 등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의 공원 개념은 사회 계층의 단편화, 고독한 경험과 가족적 경험의 지향, 개인과 환경의 수동적 관계를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적절한 비판이다.센트럴파크는 초기에 산책 등 수동적 레크리에이션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층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여러 계층의 화학적 결합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원을 계속 리모델링하면서 여러 계층이 공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후 많은 비평가는 옴스테드의 공원이 도시에 담을 쌓았다고 비판하면서 도시와 소통하는 공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견 타당한 의견이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변화하는 도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는 만병통치의 해법을 주문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옴스테드의 공원은 지금도 여전히 잘 이용된다. 잭슨이 지적하는 계층별 이용 분리, 공원 경험 방식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사회학적인 문제다. 오늘날에도 공원을 이용하는 방식은 ‘따로 또 같이’다. 즉 개인적 방식과 때로는 집합적 방식이 혼용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방해받지 않는 상태를 더 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뉴노멀의 공원 이용법’일 것이다. 공원은 시간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하나의 가능태다. 옴스테드는 공원의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제시한 것이며, 이후 다른 형식과 내용의 공원을 창출하는 것은 후대 공원 설계가의 역할일 것이다.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조경진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 한국조경학회장, IFLA 2022 조직위원장, 정원도시포럼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옴스테드 200] 공원으로 만든 도시, 옴스테드의 선형 공원
    공원의 시작, 그리고 옴스테드 공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하늘이 보이는 넓은 공간, 녹음이 짙은 수목과 수풀, 잔디밭과 구석구석 연결하는 소로, 혹은 긴 수변을 따라 녹음과 수 공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한강공원을 떠올릴 수도 있다. 작년에 진행된 용산공원 국민참여단 정기 워크숍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용산공원을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세계적인 공원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공원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뉴욕 센트럴파크의 설계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근현대 공원의 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다 훑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도시 발전에 공헌한 옴스테드의 업적을 두 가지만 꼽아야 한다면, 나는 센트럴파크로 대변되는 그린 오픈스페이스와 보스턴 도시 그린 인프라를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선형 공원을 선택하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회자된 선형 공원은 아마 뉴욕의 하이라인(High Line)일 것이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에도 불구하고 맨해튼이 녹음 가득한 장소로 느껴지는 데에는 센트럴파크만큼이나 하이라인의 시각적 효과가 큰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선형 공원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서울만 해도 한강공원이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있고, 삼각지에서 연남동까지 이어지는 경의선숲길은 세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양재천이나 탄천 같은 수변 선형 공원은 대규모 주거 단지 조성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최근 국회대로 지하차도 및 상부 공원화로 7.6km에 달하는 선형 공원이 예정되는 등 선형 공원 조성 뉴스가 끊임없이 조경계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듯하다. 그러나 하이라인이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라도, 그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선형 공원의 시작도 19세기의 도시 팽창과 그 궤를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팽창과 확산, 끝없이 높아지는 인구 밀집도, 뒤바뀌는 사회 구조, 민주주의 기반의 다양한 철학과 개념은 도시와 전원의 균형과 사회 복지에 대한 옴스테드의 고민과 만나 선형 공원이라는 도시 조직을 빚어냈다. 옴스테드의 도시 인프라, 파크웨이 19세기 중반, 뉴욕과 보스턴을 비롯한 북미 북동부 주요 도시들에서는 민주주의 도시의 미래상에 대한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다. 옴스테드는 북미 전반의 도시화와 기존 도시 조직의 팽창, 인구 과밀을 피할 수 없는 미래라고 보았으며,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화된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1 이로 인해 벌어질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가지 해법이 바로 센트럴파크로 대변되는 목가적 초원을 갖춘 공원과 주요 교통 인프라로서 공원, 즉 옴스테드가 ‘파크웨이(parkway)’라고 지칭한 공간이었다. 1870년대, 옴스테드와 그의 파트너 캘버트 복스(Calvert Vaux)가 시도한 첫 번째 파크웨이는 뉴욕 주 버팔로의 공원 시스템이었다. 조경사학자 프랜시스 코우스키(Francis R. Kowsky)는 이 설계안이 “공원과 도시의 통합적 확장”으로 요약된다고 말했다.2 공원과 공원을 파크웨이로 이어 도시계획의 기반을 만든 이 시도는 옴스테드의 어바니즘을 극명하게 반영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옴스테드와 복스만이 도시공원의 시스템화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조경가 로버트 모리스 코플랜드(Robert Morris Copeland)는 1869년 한 일간지 지면을 통해 보스턴을 아우르는 광역 공원 계획을 제안한 바 있다.3 유럽에서도 프롬나드(promenade) 등 대도시의 조직과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다학제간 논의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옴스테드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설계와 문헌에서 드러나는 도시관 혹은 어바니즘을 파크웨이와 공원 시스템 설계에서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옴스테드는 유럽에서 북미로 건너온 기존의 보행 중심 대로가 19세기 미국의 산업 도시에서 요구되는 공공 공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주거 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새로운 도시 구조에 알맞은 새로운 도로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4 옴스테드의 파크웨이는 일과 주거의 분리, 레크리에이션 수요의 증가, 교통수단의 발달, 녹지 접근성 등을 근거로 공원과 도로를 결합한 공간적 도시 인프라였다. 특히 뉴욕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과 함께 제시한 파크웨이 설계를 살펴보면, 파크웨이를 통해 녹지 비율을 높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향유하는 공공 녹지 공간, 즉 공원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으며 고속 차도를 별도로 지정해 교통망 기능을 놓치지 않으려 한 점이 눈에 띈다.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신명진은 뉴욕에서 미술건축사학을 공부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현대 조경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통합설계미학연구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 [옴스테드 200] 옴스테드 아카이브, 기억의 집 또는 아스날
    옴스테드 르네상스와 아카이브 클릭 몇 번만으로 모니터 위에 옴스테드가 남긴 메모나 스케치를 띄울 수 있는 날이 도래했다. 이제 더 이상 아카이브의 복잡한 카탈로그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거나, 고요함과 고독이 짓누르는 분위기에 위축되거나, 데카르트적 공간처럼 똑같이 생긴 책꽂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된다. 단 1mm라도 더 찢어질까 해진 종이를 조심스레 넘기지 않아도, 문서를 뒤적이다 언제부터 존재했을지 모르는 먼지를 들이마시지 않아도 된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조경계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디지털 아카이브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7월 26일 미국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은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리소스 역할을 하기 위해” 옴스테드의 글과 기록물을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제공한다고 발표했다.1 뉴욕시는 이보다 앞서 2017년 겨울, 시 아카이브(NYC Municipal Archives)가 소장하고 있는 옴스테드의 1857년 센트럴파크 공모전 제출작 ‘그린스워드(Greensward)’를 디지털화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2 최근에는 1998년 설립 이후 경관과 조경가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써온 미국의 문화경관재단(The Cultural Landscape Foundation)도 이러한 움직임에 합류했다. 지난 1월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조경 유산(What's Out There: Landscape Architecture Legacy of Frederick Law Olmsted)’이라는 이름의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 기념 이니셔티브를 마련하면서, 옴스테드와 그의 조경 유산 2 백여 곳에 대한 포괄적인 온라인 가이드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3 열병과도 같은 옴스테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현상은 일면 빅데이터 시대 또는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이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이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씨앗은 이미 20세기 말 옴스테드 르네상스의 부상이라는 토대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4 1960년대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의 ‘인간과 자연: 옴스테드 전(Man and Nature: The Olmsted Exhibition)’에서 촉발된 옴스테드 다시 보기는, 1979년 옴스테드의 집이자 사무실이었던 페어스테드(Fairsted)의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 지정, 그리고 옴스테드 유산의 보존과 인식 증대를 목표로 한 두 조직의 설립으로 이어졌다.5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페어스테드에 위치한 ‘옴스테드 아카이브(Olmsted Archives)’다. 이 지면에서는 옴스테드 관련 아카이브를 소개한다. 물리적 실체이자 공간으로 존재하는 기록 보관소뿐 아니라 최근의 디지털 아카이브까지 아우르며 각 아카이브의 설립 배경과 구조적 특징, 더 나아가 최근의 변화와 움직임을 짚어보려 한다.6 옴스테드 아카이브(들) 미국의회도서관의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 미국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옴스테드 컬렉션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Frederick Law Olmsted Papers)’다.7 앞에서 언급한 디지털 아카이브가 구축된 것은 2018년으로 최근 일이다. 그러나 컬렉션 자체가 탄생한 시점은 옴스테드 가문이 도서관에 자료를 기증한 1947~1948년과 1968~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년 옴스테드 전기 작가인 로라 우드 로퍼(Laura Wood Roper)가 자료 3천 점을 기증하고 1981년 도서관이 추가 자료를 구매하면서 1996년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 체계가 마련되었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를 구성하는 자료는 1777년과 1952년 사이에 생산된 약 2만4천 개 항목으로, 옴스테드의 조경 작업뿐 아니라 가족사, 친구와 동료 관계, 협업, 개인 생활에 관한 자료가 74개 상자에 담겨 있다. 그중 미국의회도서관이 강조하는 기록물로는 요세미티 국립공원 보호의 단초가 된 1864년 요세미티 지역과 숲에 대한 예비 보고서, 남북전쟁 중 아내에게 보낸 군인들의 고통에 관한 편지, 1865년 파트너십 갱신과 새로운 프로젝트 수행에 관한 옴스테드와 캘버트 복스 간의 서신, 1877년 미국 국회의사당 부지 식재에 관한 연필 스케치, 센트럴파크 설계에 영향을 미친 영국 버컨헤드 공원에 대한 노트 등이 있다. 자료는 트리(tree) 구조로 정리되어 있다. 기록물 유형에 따라 저널, 서신, 주제 파일, 연설문 및 글,기타 문서, 추가 문서, 특대형 문서 등 8개 시리즈로 나뉘어 있다. 각 시리즈는 생산 연대에 따라 다시 세분되어 있다. 기록물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회도서관이 제공하는 전자 파일 형태의 검색 도구(finding aid8)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2018년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가 디지털 아카이브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용자와 아카이브 사이의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이 줄었다. 42쪽에 달하는 검색 도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검색 필터를 갖춘 인터페이스와 여러 가지 메타데이터9 항목을 활용해 찾고자 하는 기록물을 그물망web에 건져 올릴 수 있다. 각주 1.Library of Congress, “Famed Landscape Architect Frederick Law Olmsted's Papers Now Online”, 2018. 6. 26. 각주 2.Quinn Bolewicki, Matthew Minor, “Digitizing the Greensward”, 2017. 12. 21. 각주 3.TCLF, “Olmsted 200 Digital Website and Book Launch”, 2022. 1. 7. 문화경관재단은 이와 동시에 옴스테드의 유산 중 덜 알려져 있거나 분실 또는 위협에 처한 경관을 조명하는 기록화 작업(Landslide 2022: The Olmsted Design Legacy)도 진행한다. 각주 4.옴스테드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문화경관재단 대표 찰스 번바움(Charles A. Birnbaum)의 2022년 3월 1일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강연 ‘우리 안의 옴스테드(The Olmsted in All of Us)’를 참조할 수 있다. youtu.be/-yrj31C5OK8 각주 5.1980년 비영리 단체인 센트럴파크 컨서번시(Central Park Conservancy)와 국가 조직인 옴스테드 공원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Olmsted Parks)가 설립됐다. 각주 6.오늘날 미국의 조경 아카이브 사례로는 다음을 참조. 이명준, 김정화, 서영애, “미국 조경 아카이브 구축 동향과 특성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47(6), 2019, pp.1~11. 공원 아카이브의 의미와 사례에 대해서는 『환경과조경』 2020년 3월호 특집 “공원 아카이브, 기억과 기록 사이”를 참조. 각주 7.미국의회도서관 웹사이트(hdl.loc.gov/loc.mss/collmss.ms000067)를 통해 온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다. 각주 8.findingaids.loc.gov/exist_collections/ead3pdf/mss/2001/ms001019.pdf 각주 9.데이터를 설명해주는 데이터로, 속성 정보라고도 한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찾는 데 도움이 되는 항목이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페이퍼’의 경우 문서 제목, 생산자, 주제어, 유형, 식별 번호, 소장 위치와 같은 메타데이터를 제공한다.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김정화는 막스플랑크예술사연구소(Kunsthistorisches Institut in Florenz ‒ Max-Planck-Institut) 내 식물을 테마로 한 다학제 연구 집단 4A_Lab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일제 식민지기 임업 시험장을 중심으로 근대 국가의 과학적 숲 디자인을 연구 중이다. 도시경관연구회 보라(BoLA)의 멤버로 조경 아카이브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 김정화 / 2022년04월 / 408
  • [옴스테드 200] 옴스테드가 남긴 것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현대 도시공원의 출발점이 된 센트럴파크의 설계자이자 현대적 의미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을 하나의 전문 직능으로 자리 잡게 한 사회 개혁가다. 옴스테드가 기존 정원 중심의 조원을 넘어 도시공원과 공원 시스템을 통해 도시 골격과 구조를 재편하는 조경을 주창한 데에는 도시민의 건강과 복지 증진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도시민의 건강 문제는 옴스테드의 시대 이후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인구 과밀과 지역 불균형, 도시 환경과 복지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공원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시민뿐 아니라 도시 자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공원은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옴스테드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작업을 되돌아보는 것은 현대 조경의 기원을 되짚는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도시를 위한 처방은 현재에도 필요하고 앞으로도 계속 요청될 미래 진행형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음에서는 옴스테드의 프로젝트와 그가 남긴 글, 그를 다룬 주요 저작을 살펴본다.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에 간략한 목록 형식으로 정리한다. 특히 옴스테드의 계획과 설계 작업과 관련된 전용 도면 검색엔진1이 따로 있을 정도로 아카이브가 체계화되어 있으므로, 공원의 이름과 지역, 완공 시기 정도만을 제시한다. 옴스테드에 대한 학술 연구 또한 이 지면에서 모두 소개하기에는 양이 많아서 주로 단행본 형식으로 출판된 책 위주로 기록한다. 옴스테드가 남긴 공간 옴스테드가 남긴 유산을 보존하는 기관인 옴스테드공원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Olmsted Parks)는 옴스테드의 프로젝트를 도시공원(urban park)과 파크웨이(parkway), 공원 시스템(park system)으로 구분해 기록하고있다.2 우리가 옴스테드의 작업 중 거의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센트럴파크는 대표적이자 원조 격인 도시공원이다. 그의 도시공원 중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대형 공원이지만, 주로 유원지와 유사한 기능을 한 대형 공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노동 계층이 많다는 것을 인지한 뒤 옴스테드는 19세기 후반 빈민 지역의 틈새 공간에 작은 공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또한 파크웨이와 공원 시스템을 조성했다. 파크웨이는 사전적으로는 드라이브하기 좋게 잘 꾸며진 도로를 칭하지만, 옴스테드의 파크웨이는 대형 공원 형식의 대규모 녹지와 녹지 덩어리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에 녹지대를 조성해 시민들이 녹지를 더 자주 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공원 시스템은 ‘그린 네트워크'와 일면 유사한 개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럿으로 나뉜 녹지를 서로 긴밀하게 연결해 하나의 체계처럼 작동하고 단일 공간일 때보다 더 큰 시너지를 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옴스테드가 계획한 공원 시스템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보스턴 공원 시스템에는 ‘에메랄드 네클러스’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여러 공간이 엮여 하나의 시스템을 이룬다. 이밖에도 주거 단지나 캠퍼스를 조성하기도 했다. 각주 1.ww3.rediscov.com/Olmsted에서 원하는 조건에 맞는 작품을 검색해 별도 페이지에서 당시의 도면을 보거나 미국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또는 옴스테드 연구 가이드 온라인(Olmsted Research Guide Online)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 각주 2.www.olmsted.org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김민주는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를 졸업하고,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공원관에 나타난 복지 개념’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 [옴스테드 200] 옴스테드 200 더 읽을거리
    1. 센트럴파크 Central Park Location Manhattan, New York, USA Area 3.41km2 2. 프로스펙트 공원 Prospect Park Location Brooklyn, New York, USA Area 2.13km2 3. 프랭클린 공원 Franklin Park Location Boston, Massachusetts, USA Area 2.13km2 4. 버팔로 공원 시스템 Buffalo Park System Location Buffalo, New York, USA Area 3.43km2 5. 에메랄드 네클러스 Emerald Necklace Location Boston, Massachusetts, USA Area 4.5km2 6. 백 베이 펜스 Back Bay Fens Location Boston, Massachusetts, USA Area 404,685m2 7. 아놀드 수목원 Arnold Arboretum Location Boston, Massachusetts, USA Area 1.07km2 8. 빌트모어 Biltmore Location Asheville, North Carolina, USA Area 32.4km2 9. 미국 국회의사당 그라운드 United States Capitol Grounds Location Washington D.C., USA Area 234,717m2 10. 나이아가라 폭포 주립공원 Niagara Falls State Park Location Niagara Falls, New York, USA Area 1.62km2 11. 시카고만국박람회장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 Location Chicago, Illinois, USA Date 1893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 2022년04월 / 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