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루클린 지역의 중심녹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브루클린 식물원은 프로스펙트 파크라는 초대형 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매년 75만명이 방문하는 이 식물원은 현재 20ha의 면적에 세계 각국에서 도입한 1만 종 이상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여가의 기능이 강하게 디자인된 온실과 세계 최고의 운영수준을 자랑하는 어린이정원 등 공원에는 존재하지 않는 안락한 공간 구성과 공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식물의 볼거리를 통해 도심내의 식물원으로서의 여가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1524년 이탈리아의 탐험가 G.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처음으로 발견한 뉴욕시(The City of New York)는 1664년 영국의 함대에 의해 강제 점령된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항만도시로 크게 번영하였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유럽과의 수출입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뉴욕시는 보스턴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의 중심이자 미국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뉴욕은 유럽의 문화를 미국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유럽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고 본토에 접목하여 미국의 문화로 다시 탄생시키려는 시도는 19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작가(Writer)였던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와 건축가였던 칼버트 보(Calvert Vaux)의 디자인으로 유명한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역시 유럽의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센트럴 파크의 성공적인 디자인으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칼버트 보는 미국에서 매우 촉망받는 조경가로 떠올랐다. 이에 힘을 받은 옴스테드와 보는 뉴욕 브루클린(Brooklyn) 지역의 센트럴 파크라고 할 수 있는 대형 공원인 프로스펙트 파크(Prospect���Park)의 디자인에 관여하게 되었고, 1861년 Egbert Viele이 수립한 “Mount Prospect Park” 계획을 토대로 1865년부터 프로스펙트 파크를 전체적으로 디자인하였다.
프로스펙트 파크 부지 안에 위치한 브루클린 식물원은 “Mount Prospect Park” 계획에는 대상 부지로 포함되어 있었으나 당시 발발한 남북전쟁(1861~1865)으로 인해 부지 매입이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석탄 사용 후 발생한 재를 버리는 장소로 사용되던 부지는 1897년 15ha의 부지가 뉴욕주의 법령으로 식물원 부지로 지정되었고, 1910년 Dr. Charles Stuart Gager가 식물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침내 브루클린 식물원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브루클린 식물원은 프로스펙트 파크와 함께 뉴욕 브루클린 지역의 중심녹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75만명이 방문하는 이 식물원은 현재 20ha의 면적에 세계 각국에서 도입한 1만 종 이상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제공 : 환경과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