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동남부 교외에 있는 크레떼이(Creteil)란 구역에 가면 일명 ‘동그란 아파트’ 를 만날 수 있다. 센 강변에 위치한 크레떼이의 동그란 아파트는 건축 당시 설계자의 야심적인 작품이었을 게 분명한 타원형 주거평면들로 이루어져서, 한 때 화제를 일으켰던 곳이다. 크레떼이에 살고있던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친구의 사촌 집에도 들를 일이 생겼는데, 그곳이 마침 그 유명한 ‘동그란 아파트’여서 드디어 동그란 평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집 안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타원형 원주들이 탑처럼 올라가 있는 모양의 건물 외관은 멀리서도 한 눈에 뜨일만큼 독특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디자이너가 외형미에 특별히 공을 들인 집들답게 타워들의 배치와 건물들 틈 사이의 공간구성도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친구의 사촌과 인사를 나누고 본래의 용건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집주인에게 자연스럽게 ‘동그란 아파트’에 사는 느낌을 물어보았다. 밝게 웃으며 대화하던 친구의 사촌은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답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너무 불편해요. 처음에는 이 아파트가 건축디자인이나 조경 미학 등의 측면에서 온통 화제가 되었고, 신문 잡지에 기사도 많이 났어요. 하지만 유명세를 탄 것에 비하면 막상 여기서 사는 사람들한테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예요.” 우선, 이사오던 첫 날부터 한 마디로 살림살이를 어떻게 들여놓아야 할 지가 막막해서 답답하기 시작했단다. 책상이나 책꽂이, 침대, 기타 가구들을 놓는데 있어 공간이 가장 절약되고 버리는 공간이 없게 하는 방식은 벽쪽으로 대부분의 가구들을 붙이면서 배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가구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좀 길다랗고 큰 가구의 경우는 둥그스름하게 휘어지는 벽과 반듯한 직선형태의 외곽선을 가진 가구 사이에 틈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또 외곽쪽이 둥그렇게 휘어진 벽을 가진 방이나 거실, 부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생활하면서 그 익숙하지 않은 형태 때문에 모든 것이 어색하고 마음이 영 편안하지가 않은 상태에서 지내오고 있다는 것이다. 시내에 있는 직장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면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매일 약간씩 어색한 느낌이 새삼스레 다가온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알 수 없는 가벼운 짜증도 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손님인 나 자신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형태가 주는 시각과 몸의 경험에서 가벼운 긴장이 느껴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인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잠시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로 유명한 백악관 오벌 오피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면이 타원형인 그 방의 바닥 카펫에는 미국 대통령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 방의 타원형꼴은 물론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유니버스, 그러니까 글로브라고 하는 전지구적 세계의 상징을 담고 있다. 마치 중국 북경의 천단이 둥근 원형 평면의 건물로서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권력과 우주적 통치의 정당성을 황제 즉 천자가 부여받는 것을 뜻하는 우주의 축소판인 것과 유사하다. 미국 대통령은 타원형 평면의 오벌 오피스에서 마냥 편안한 휴식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특별하게 불편한 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벌 오피스의 타원형 평면은 우주적 권력의 행사와 통치에 관한 느낌, 그리고 항상 감도는 일정한 정도의 가벼운 긴장 속에서 방의 주인의 의식이 깨어있도록 자극을 주고 있을 것이다. 그가 긴장에서 모두 벗어나 푸근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오벌 오피스를 벗어나 직사각형 모양의 다른 어떠한 공간으로 이동해야 하리라.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하학적 도형 중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완전한 형태를 골라보라는 질문에 절대 다수의 전문가들이 원을 꼽았다고 한다. 중심으로부터 원주의 모든 지점에 이르기까지의 거리가 동일하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자기완결성을 표현하는 원. 원심력과 구심력, 인력, 안팎으로부터의 압력이 가장 고르게 분배된 균형상태의 모습 등, 우주의 물체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제반 힘들을 고려할 때 가장 안정적인 형태 또한 원이다. 그래서 물방울은 원 혹은 타원형을 추구하게 되고, 대다수 동물들의 생명 재생산과정을 보호하는 각종 알들 또한 어미의 뱃속에서 원구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산란의 과정에서 눌려 타원형 구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 타원은 그 원의 변형으로서 우주를 움직이는 대다수 운동물체가 이 타원을 따라 움직인다. 강가에 굴러다니는 자갈들도 물결에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갈아지면서 처음 모습이 어떠하든 점차 둥그스름한 모습을 지향하며 변형되어 간다. 하지만 그러한 완전성과 보편성, 균형성은 인간의 공간인지에 있어서만은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한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현재 앉아있는 이 방안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물체들의 90퍼센트 이상은 원이나 타원같은 둥그런 형태가 아니라 네모난 형태, 그것도 거의가 다 직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다. 컴퓨터의 화면과 자판 배열대, A4 용지, 책상, 책꽂이, 우리집 아이가 환히 웃는 사진이 담긴 사진 액자, 핸드폰, 신문지, 책장, 책장에 꽂힌 책들, 창문...... 정말이지 물마시는 컵의 평단면과 주전자, 필통만 빼놓고는 모두가 직사각형이다. 방의 평면도 직사각형이요 집을 앉혀 짓는 대지의 모양도 직사각형이다. 공기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점점 둥그스름한 모습을 모방해오고 있는 자동차나 고속열차 등등의 탈 것을 구성하는 공간도 본래는 네모난 직사각형들의 조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비행기조차도 좌석의 모습, 그리고 좌석배치가 된 평면의 기본은 직사각형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편안한 모양이요, 가장 다스리기 좋은 모양이며 인지하기에 가장 알맞은 틀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이렇게 인간의 공간인지의 틀은 특별나다. 우리가 알다시피, 네 귀가 반듯하게 나 있는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들은 자연상태에서 저절로 성립될 수 없는, 자연의 산물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간의 형태이기도 하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명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영화 “2002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는 카오스와 우연으로 가득찬 선사시대의 지구에서 독립된 지성과 반성능력을 갖지 못한 생물체들 앞에 나타나는 초월성과 지능, 그리고 독립적 의지를 지닌 존재를 표상하기 위해 여섯명이 모두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뤄진 가장 단순항 형태의 널빤지 혹은 비석을 등장시킨다. 그것은 대단히 조직적인 지성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 또는 신을 표상하는 모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고인류학자들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끼날 모양의 돌과 초기 인류가 만든 돌도끼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도끼 모양의 돌 외부에 일정하고 규칙적인 형태로 충격이 가해진 흔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적인 의지와 지성을 지닌 존재가 목적 합리성을 위해 도구를 만들기 위한 규칙성의 물리력을 가했는가 아닌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도끼날 모양과 흡사한 돌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하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타격이나 압력의 흔적을 담고있지 않으면 그보다 훨씬 거칠고 애매하게 생겼더라도 규칙적 물리력의 흔적을 지닌 돌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이 내팽겨쳐지는 들판의 잡돌멩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인간의 탄생이라는 것은 단순히 한 동물로서의 인간의 단계를 넘어서서 사회적인 무리를 이루고 살면서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인지의 틀을 습득하며 그것을 전수해온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만이 만들어 낸 시공간 인식의 독특한 틀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나가는 공간은 인간들이 사회적 과정을 통해 습득한 가장 보편적인 공간 인식형태인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동물적인 본능에 따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인간의 공간인지가 이렇게 ‘자연적 보편형태’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사회적 과정의 산물인 것은 사각형이라는 기본형태의 모습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인지하고 꾸리는 모든 공간이 필연적으로 ‘사회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이 ‘힘(권력)’과 ‘신성성’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그 위상들이 구분되고 재배치될 수 밖에 없다는 데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공간들은 그 사이에 반드시 위계가 매겨진다. 평등하거나 동일 가치를 지닌 공간은 없다. 신성성의 정도가 다르고 각 공간들이 담고 있는 권력의 성격과 위력이 모두 다르다. 인간들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과 분류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문화 과정과 결과의 누적에 의존한다.
얼마전 수업시간을 빌어 학생들에게 현재 서울에서 가장 신성성이 높은 공간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한참 머뭇거림과 침묵이 흐르다 겨우 나온 답들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남대문, 명동 성당 등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불리워졌다. 탑골공원 이야기도 나오다가 들어가 버렸다.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말한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평당 땅값이 제일 비싼 우리은행 명동지점 터나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말한 사람도 없었다. 주거지의 환경가치는 잔디밭과 나무가 심겨진 마당을 코 앞에 두거나 아니면 아예 홀로 구름 위에 높이 떠서 한강과 주변을 까마득히 내려다보는 첨탑의 기계적 합리성으로 양분되고 있다. 경제력의 공간은 정치력의 공간, 신성성의 공간들과 따로 분리되어 흘러가기 시작했다. 새로 힘을 얻는 공간들에서 사회의 가치관과 정당성, 신성성 개념은 쉽사리 조화될 틈을 얻지 못한다. 각 영역의 힘들이 때로는 모순적이다. 급격한 가치관과 문화논리, 사회 시스템의 변동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공간지각 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기초를 놓는 세계관들이 혼돈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송 도 영 Song, Do young ·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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