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이차원적 매체지만, 어느 매체보다 다양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다. 벽면에 영사되는 영화의 한계는 수치적으로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담아내는 공간적 풍부함은 분명하다. 이는 마치 화가가 한정된 캔버스 안에서 다양한 깊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공간을 다루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화가들은 실제감을 표현하기 위한 공간에 대한 연구를 동반하게되는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과 동선을 함께 다루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과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는 회화를 능가한다. 인간의 착시효과를 이용한 영화의 공간 왜곡은 때로는 현란하게 때로는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공간은 매우 다양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공간은 절대적인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확히 한정된 물리적 요소로 둘러싸인 공간도 있지만, 심정적이고 상징적인 무형의 공간도 있다. 한계가 없는 광역의 공간도 있지만, 정확하고 사실적인 벽면들로 둘러싸인 공간도 있다. 또한 공간은 각각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 의미 및 시각적 드러남이 매우 달라진다. 그러한 사례를 들어보자.
영화 에서는 공유의 공간과 동시에 창녀가 등장한다. 사실 이 영화는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 원작 를 1980년대 버전으로 만든 영화로 자본주의적 코드와 쇼핑의 행위가 중요한 요소이며, 상업공간에서 위력을 발휘한 고전적 장식 인용의 포스트 모던이 드러나기도 한다. 원작이 매우 지적인 상황을 유도한 반면,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다소 속물적인 상황이 나타난다. 리처드 기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서있건 공간은 거리였다. 즉 공적인 공간으로 주인이 없으며,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 줄리아 로버츠와 그녀를 사용하기 위한 리처드 기어가 있다. 장소는 거리의 여자를 설명하는 중요하면서도 당연한 요소가 된다. 반면에 리처드 기어가 머무는 공간은 도로 만큼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하지만 선택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호텔(그중에서도 펜트 하우스)이다. 이 두개의 공간은 이미 주인공의 직업적 배경만큼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그녀가 쇼핑을 하는 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배타적 공간이
된다. 복장 - 즉 외모로 판단해보면 유니폼 같은 고급 브랜드들로 치장한 사람들의 영역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질적 복장을 갖춘 주인공이 들어섰을 때 무언의 압력과 구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들은 여러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 그 어떠한 대사보다 더 정확하게 상황설명을 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공간(장소)에 대한 심리적 적응이나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 있어서 공간에 대한 심리적 접근은 매우 다양한 장르에 걸쳐서 드러난다. 좀더 확장해서 말해보자. 이 상징적인 부분과 은유로서 공간을 간접 표현하고 있다면 공포물의 경우는 좀더 직설적인 면들이 있다.
동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의 경우도 자세히 보면 끊임없는 직선형 공간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직선형 공간의 특징은 방향이 다양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막힌 공간과 다름없다. 여기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 에서 충분히 보여지고 있다. 선형공간과 퍼즐식의 공간 개폐를 혼용한 영화인 는 미로 같기도 하고, 무한한 것 같은 수학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관객들은 배우들과 함께 퍼즐 같은 수학적 공간을 따라 가면서 심장 박동을 빨리하고 있다. 실제 한밤중 학교나 사무실 같은 곳의 복도 같이 단순한 공간에서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공간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단순해지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오히려 움직임의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이것이 두려움 일수도 있지만, 거꾸로 조금 느려지고 일상화 될 때는 한없이 지루하고 나태한 공간이 될 수도 있다.
폐쇄적인 선형 공간에 비해 넓게 펼쳐진 개방 공간의 경우는 조금 달라진다. 이 경우는 완전히 사람들 속에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숨길 수 없는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속의 공간들은 또한 수시로 변화를 이루면서 관객에게 다가서기도 한다. 마치 초 현실 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몽환적이면서도 작위적인 장치들을 구성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미지의 고정적 관념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의 경우가 그렇고, 등에서는 매우 팝 적인 요소들을 배치하기도 한다. 언 듯 보기엔 그냥 일상적인 배경들이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 장치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가 떠올리는 첫 번째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요되는 의미가 강하다.
이밖에도 영화에서 공간은 다양하게 펼쳐지고 진행된다. 그렇다면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건축에서는? 라즐로 모홀리 나기는 ‘공간’과 ‘건축’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브루노 제비는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으며, 공간은 건축의 주역이라고 하였다. 즉, 건축에서 사람들에게 제공하거나, 체험하게 하는 것은 시각적인 그림도 있지만, 육감을 동원한 시공간적 체험이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건축에 있어서 이러한 ‘건축’에서의 ‘공간체험’은 ‘실제 공간체험’을 하는 경우와 ‘공간 예 체험’의 경우로 이해할 수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간체험인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인 ‘공간 예 체험’은 건축 작업 시에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전에 예시되거나 인지되어 지는, 또는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그려내는 가상의 상황인 것이다. 이로써 고대부터 건축을 진행해온 많은 사람들은 온갖 상황을 빗대어 실제화 하였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공간의 표현, 공간의 인식은 간접적인 공간 체험임과 동시에 ‘공간 예 체험’에 해당되는 것이다. 임의의 상황으로 ‘공간’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성격’이 부여되는 것은 우리가 ‘공간’을 창조해 내는 과정에서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실례는 무수히 많다. 실제 건축이나 실내 공간을 디자인하는 필자의 경우도 이런 ‘공간 예 체험’을 상상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면서, 부여된 공간의 특질을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 건축 작업에 있어서 3D 또는 투시도동영상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상상하는 임의의 상황과 스토리를 적용하여 ‘공간’을 창조하는 경우가 많다. 건축가가 주인공이 되어서 공간을 떠도는 것이다.
홍성용 Hong, Sung Yong · 모이 도시건축디자인 소장, 계원조형예술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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