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그린은 영국 현대조각의 개척자인 헨리 무어(1898~1986)가 그의 아내 이리나와 함께 46년간 생활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곳으로 현재 헨리 무어 재단의 야외 전시장으로서 그의 많은 작품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완벽하게 연출되어 있는 곳이다.
요크셔 조각공원 인근의 광산 지역이었던 캐슬포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는 지방학교의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부상으로 제대를 하면서 조각을 접하게 된다. 헨리 무어 이전에는 영국 현대미술에 있어 조각에 대한 전통이 전무하였다. 1919년 그는 요크셔 조각 공원에 있는 리즈미술대학의 전신인 리즈미술학교에 조각을 배우는 첫 학생으로 입학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 학교에는 조각을 배우는 시설이 전혀 없어서 그만을 위한 조각 스튜디오를 학교 측에서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장학금을 받고 런던에 있는 왕립미술대학에 입학을 한다. 1924년 여행 장학금을 받은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6개월간 여행하면서 많은 대작을 직접 감상하면서 견문을 넓혀 나갔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졸업 후 7년간 왕립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왕립미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던 러시아인 이리나 라데츠키를 만나 1929년에 결혼을 하고, 아방가르드 예술인들의 예술마을인 햄프스테드에 정착하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1932년에 첼시 예술학교 조형학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조각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은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의 집과 작업공간이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자 헨리는 부인과 함께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져 있는 페리 그린의 호그랜드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남은 여생동안 가족들과 지내면서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그는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들을 맞이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46년에 그토록 바라던 딸을 낳게 되었다. 딸 메리Mary의 출생은 그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패밀리 그룹’과 같이 엄마와 아이가 등장하는 가족애를 다루는 작품들이 이후에 많이 등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리즈 중의 하나인 ‘리클라이닝 피겨’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고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게 되어 엄청난 부를 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그의 작품이 하늘과 나무와 함께 자연 속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 호그랜드에서의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1972년 그는 엄청난 상속세를 피하기 위하여 헨리 무어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부인과 딸인 메리를 자산관리를 하는 이사로 선임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헨리는 수입도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77년에는 1년 소득세를 백만파운드나 냈을 정도였다. 같은 해 이러한 세금의 부담을 경감하고 대중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 진작 그리고 그의 조각품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선단체인 헨리 무어 재단을 설립한다. 설립과 함께 그는 많은 작품과 페리 그린의 70에이커(283,500㎡)에 달하는 대지, 그리고 그 안에 위치한 3채의 스튜디오와 2채의 창고건물을 재단에 기증하였다. 반면에 호그랜드는 2004년 재단이 구입하기 전까지는 헨리 무어의 가족들이 계속 소유하였다. 그러나 헨리의 부인인 이리나가 죽은 후에 아무도 이곳에 거주를 하지 않아 집은 빠른 속도로 훼손되었다. 재단이 구입을 한 후에야 이곳은 2년여 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2007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