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을 읽고 몇 마디 거들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내용이었으면 좋겠다는 원고 청탁을 받았다. 편집주간의 글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 그들의 참신한 태도와 작업 방식에 나 또한 박수를 보내며 내가 설계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운영해 오면서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낼까 한다. 학부 졸업 후 나 또한 풍운의 꿈을 안고 설계사무소에 입사했다. 첫 출근 날 강남역에 내려 사무실로 걸어가는데 지하 역사 안의 레코드 가게에서 아침부터 음악이 울려 퍼졌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환희의 송가가 등 뒤로 웅장하게 흘렀다. 마치 내 첫 출근의 위대한 첫 걸음을 환희로 채워주는 듯했다. 전율을 느꼈다. 영광스러운(?) 나의 조경 설계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7년이 흐른 후 내 사무실을 열었다. 마흔둘의 나이에 한 창업이라 주변에서는 좀 늦은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동업으로 시작했기에 마음의 부담을 나눌 수 있었다. 건설 경기가 계속 악화되어 매출 대비 고정 지출의 규모가 너무 커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서로 독립해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지만, 처음의 선택은 옳았다.
지난 호에 실린 소장들의 창업 이야기를 읽으며 참신한 작업 방식과 환경은 물론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가진 젊은 그들의 역동성을 느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갈 능력을 지닌 그들에게 안도감을 느꼈다. 부러움이 앞선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력 충만한 분위기에서 좋은 설계안이 나온다고 믿고 직원들과 허물없이 호형호제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설계사무소라 하더라도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참신하고 의욕 충만한 새로운 설계사무소여도 대표자에게는 결코 뒤로 할 수 없는 책임이 따른다. 설계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오류는 일 잘하는 임원이 해결할 수 있다. 세금이나 회계 문제는 전문 세무사에게 맡기면 된다. 하지만 대표 소장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첫 번째는 직원과의 약속이다. 최근 몇 년간 경기가 계속 나빠지고 회사의 수주가 바닥을 찍는 악순환이 연속되면서 사무실의 대표는 나름 최선을 다해뛰고 또 뛴다고 생각하는데 직원들이 그 노력을 반도 몰라주는 것 같다. 또 직원들은 열심히 하는데 대표가 보기에는 무언가 모자라고 성이 차지 않는 다. 대표의 눈에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고 다그치기 시작한다. 경영자와 직원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서로가 이해해 주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리라고 인정해 버린다. 어쩌면 ‘회사’라는 통념과 선입견 속에서 비롯된 사용자와 피사용자 간의 거리감은 아닐까?
이 어쩔 수 없는 입장 차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하나 있는 듯하다. 내가 직원이었을 때를 기억해 내는 것. 나는 그 당시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무엇이 불만이었고 무엇에 만족했는지 다시 떠올리는 것. ‘나는 설계사무소를 이렇게 이끌어갈 것이다’라는, 처음 지녔던 자신만의 신념을 부적처럼 지니고 살아야 한다. 무언의 다짐도 약속이다.
대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그리고 직원으로 채용한 사람을 믿어야 한다. 이런 약속이 직원들과 새끼손가락을 건다고, 계약서를 쓴다고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첫 생각을 잊기 마련이다. 이 정도면 됐다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사무실 가족들과 함께 쌓아온 탑이 기초부터 흔들린다. 창업하면서 큰 꿈을 꾼 바로 그때 가슴 깊숙한 곳에 스스로 묻어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내 곁에 있는 ‘스마트 피플’들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도 없었다”는 빌 게이츠의 회고를 잊지 말자.
두 번째는 설계사무소의 생명력 문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1981)라는 영화가 있다. 약 8만 년 전, 동굴에서 사는 울람 족은 자연에서 생겨난 불을 이용해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부족의 습격과 야생 동물의 공격으로 불을 꺼뜨리고 만다. 추위에 떨게 되고 불의 필요성을 새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울람 족은 불을 자연에서만 얻어왔던 터라 다시 불을 구하기 위해 부족 중에 선발된 세 명이 멀고 긴 여정에 나선다.
목숨 걸고 불을 찾아 떠난 여정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불을 가지고 돌아오지만 물속에 빠뜨려 천신만고 끝에 얻은 불을 잃는다. 결국 여행 중 구해낸 여성의 부족에게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다시 불을 얻게 된다. 영화에서 불의 의미는 생명이며 힘이다. 불을 중심으로 가족이 모일 수 있었고 불이 있어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지킬 수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불을 지키려 애썼다. 불을 잃게 되자 모든 것을 걸고 불을 찾아 나섰다. 불은 반드시 구해야 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이 있는 종족이 곧 힘 있는 종족이었다. 설계사무소에서 불과 같은 존재는 누가 뭐래도 설계다. 설계는 우리가 지켜야 할 힘이며 생명이다. 설계사무소가 갖추어야 할 최종병기다.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새롭게 시작하는 그들, 꿈틀대는 생명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춘 그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설계를 찾아서.
이재연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2006년 조경디자인 린을 설립했다. 2013년 조경박람회 초대 작가로, 2014년에는 정원문화 심포지엄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