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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북서부 풍경]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
‘도시-지역을 위한 지도책(Atlas For a City-Region)’은 2020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 사이 초국경지역의 미래와 그 형태, 한계 등을 조사한 후원 연구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질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첫째, 초국경지역이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에 존재하는가? 둘째, 만약 존재한다면 어떻게 지도에 그릴 것인가? 셋째, 인구 이동과 기후 변화의 장기적 영향, 그리고 브렉시트의 영향을 고려했을 때 향후 200년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18개월에 걸친 연구 프로젝트는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같은 주제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세미나도 병행됐다. 초국경지역의 증거들은 일상적으로 초국경적 활동이 관측되는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의 농장과 마을, 공동체에서 현지 조사를 통해 수집됐다. 또한 우리는 지역의 미래 형태를 알려줄 수 있는 요소인 풍경 속 땅 무늬를 관찰했다. 현지 조사의 결론 중 하나는 새로운 국경을 그리는 것이 아닌 국경을 넘나드는 일상적 흐름(벡터)을 포함하는 지도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경을 선이 아니라 풍경으로 이해하면 아일랜드 북서부 지역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있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글(2024년 6월호)에서는 아일랜드 북서부에 초국경지역이 존재하는지를 다뤘다. 이를 위해 현지 조사를 기반으로 초국경지역의 존재 증거를 15권의 책으로 정리했고, 이 증거들은 지도에는 없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묶인 공간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글에서는 나머지 두 질문을 다룬다. 초국경지역을 어떻게 지도에 그릴 수 있을까? 향후 200년간 그 지역은 어떻게 발전할까?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는 하버드 GSD 조경학과 교수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조경의 내러티브와 그 실체를 탐구하고 풀어낸다. 그는 경관 현지 조사(landscape fieldwork)라고 부르는 현장 중심 연구 방법을 통해 복합 경관에서 사람과 환경을 핵심 요소로 다룬다. 이 연재의 번역을 맡은 강준호는 하버드 GSD를 졸업한 뒤 도허티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건축가와 정원사로 일하며 조경과 건축의 접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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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먹고 바람 마시던 곳, 소쇄원
관념의 힘
2006년 베를린에 서울정원이 들어선 이후 한국 정원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유럽 정원은 물론이고 중국 정원, 일본 정원과도 다르면서 더 이해하고 싶다고 한다. 단지 그 이유뿐만 아니라 서양 조경과 정원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것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양 문화권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사유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차이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관념의 힘과 유럽인들의 실증적 본능이다. 유럽인은 무엇이든 눈으로 보아야 하고, 만지고 느껴야 비로소 그 ‘존재’를 믿는다. 자연에 있는 것은 모조리 가져다 식물원이나 정원에 심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저명한 정원 디자이너이자 저술가인 페넬로페 홉하우스(Penelope Hobhouse)는 매일 들어가 일해야 하지 않는 정원은 정원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그들에게 베를린 서울정원 툇마루에 앉아 빈 마당이나 먼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이따금 이들의 실물(實物) 집착증이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한국 정원엔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떤 꽃이 피는지 잔뜩 궁금해하는 청중에게 다소 도발적으로 “사유(思惟)만으로도 정원이 성립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때 물음표로 가득한 청중의 표정을 보니 조금 미안했다. 그래서 윤선도의 오우가를 들려주며 물, 돌,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빛이면 족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원 개념에는 성리학이나 도가적 자연관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유럽 정원처럼 식물, 시설물, 조형물을 채우고 배합하고 조합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예상한 대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하다 보면 같은 지구상에 살지만 서로 얼마나 다른지 재삼 확인하게 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지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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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MDL
자연의 표현과 확장
젊은이의 패기
호기로운 시작
작년 이맘때쯤 PWP(Peter Walker and Partners)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피터 워커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을 보았다. 나이를 찾아보니 1932년생 91세, 오랜 세월을 버티며 조경 현업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그와 비교하면 아직 엠디엘은 걸음마를 뗀 수준의 어린아이일 뿐이다. 조경가 정영선의 전시를 보고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살짝 소원해졌던 조경과의 관계에 다시 불꽃이 튄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다. 회사를 시작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펜을, 마우스를, 호미를 든다.
엠디엘은 겁 없는 20대의 패기로 무장한 1인 기업으로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창업 지원과 1인 기업 열풍이 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존감이 생겨났다. 설계안을 가지고 그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당히 조경가 세 글자를 명함에 새기고, 인도 허왕후 기념공원 설계공모(2016)에 출품하면서 조경계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조경계 선배들과 경쟁해서 3등의 성적을 거두면서 어깨가 더 올라갔다. 건방지게도 이 정도면 경쟁할 만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민망하지만, 스물다섯 살의 호기로움이 조경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으니 그걸로 부끄러움은 덮을 수 있지 않을까.
느슨한 네트워크,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어린 나이에 겁 없이 회사를 차린 후폭풍일까. 경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인허가, 대관 업무 등 경험과 대처 능력이 필요한 영역에서의 부족함은 쉽게 메꾸기 어려운 부분이다. 호기롭게 회사를 차렸는데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했던가. 대학원 시절부터 봐왔던 스튜디오테라의 네트워크 구조에 영감을 받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뭉치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현재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조경작업소 이룸(계획), 수수플랜(설계), 드오르(정원), 시대조경(공간), 스튜디오테라(협력), 경남종합조경(시공)이 함께하며 서로의 부족함과 빈틈을 채워 나간다. 따로 또 같이 뭉쳤다 흩어지며 주어진 공간에 다양한 시도를 해나간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아
조경을 하고 있지만, 설계와 시공으로 업역을 한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세상만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사업과 기술, 방향에 대해 언제나 고민하고 쉽게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늘 조경의 업역이 교육, 계획, 설계, 시공, 재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조경 분야의 확장, 자연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2016년 창업진흥원 프로그램으로 식물 재배기 사업을 구상한 적이 있다. 비록 실체화에는 실패했지만,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조경설계 바깥의 분야로도 세계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정된 공간과 재료를 다루는 조경 분야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엠디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일을 도모하는 중이다. 그중 하나는 식물 구독 서비스인 ‘더초록’과 한국판 랜드진(Landezine) 조경 플랫폼 ‘엘에이-베이스(La-base)’다. 신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조경 분야에서는 아직 생소한 라이다LiDAR 센서, 360도 카메라를 이용한 맵핑을 통해 대상지를 보는 다양한 방법을 도입하고, AR과 VR을 활용해 설계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등 신기술의 도입에 힘쓰고 있다.
설계자가 재미있으면 클라이언트도 재미있다
우리가 설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재미와 즐거움이다. 대상지를 머릿속으로 체험하고 상상하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설계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 아닐까. 계획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누가 더 재미있는 공간을 상상하는지 신입부터 소장까지 경쟁한다. 설계안을 그리고 있는 직원 뒤로 가서 꼰대처럼 묻기도 한다. ‘너는 이 공간이 재미있니?’ 계획하는 사람이 공간을 계획하면서 재미를 느낀다면 그 안은 그 누가 봐도 즐겁고 재미있는 공간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즐거운 과정에서 즐거운 결과물이 나오고, 이는 프레젠테이션 과정에서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설계안은 지금도 즐거움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불나방 정신
수많은 공모, 우리만의 것을 한다.
회사의 시작이 공모이기도 했고, 이름난 설계사무소가 아니다 보니 일을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은 공모가 가장 적합했다. 이름을 가리고 어떤 설계안이 가장 대상지에 부합하는지 가려내는 설계공모는 쟁쟁한 선배들과 계급장 떼고 붙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빛을 보면 환각에 이끌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정말 수많은 공모와 제안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생산 작업이 고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즐거운 생각을 대중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만으로 늘 설레고 즐겁다.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는 엠디엘 설계안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공간이 주는 묵직함, 한강에 필요한 스케일과 공간감에 대해 고민했다. 자연과 인공의 레이어가 공존하는 환경의 조성에 관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술사사무소 이수, 스튜디오테라와 함께 큰 이견 없이 협업을 진행하며 앞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는설계안의 높은 가능성을 보았다.
여울공원 전시온실(식물원) 건립사업 설계공모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 건축사사무소, 요앞 건축사사무소와 협업했다. 공간의 구조가 자연스러운 대류를 발생시키고 그에 따른 온도와 습도가 형성되는 것을 계획의 방향성으로 잡았다. 공간적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환경에 맞춰 식생대를 조성한 온실을 제안했다.
동부간선도로 지하차도 상부공간 기획 디자인 공모
동부간선도로 지하화 공간 상부 공원에 서울 아레나 파크를 제안했다. 크고 작은 공간, 운동, 놀이, 문화, 정원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하는 아레나들이 모여 공원을 형성하는 코딩에 의한 공원 조성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2등에 그쳤지만 그 가능성을 타 공원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직원들과 함께 계획하면서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의 프로젝트
청량리 4구역 가로공원
청량리 4구역 기부채납 공원 중 가로공원 부분의 제안 공모 당선으로 작업한 작품이다. 청량리에 새롭게 조성되는 랜드마크인 65층 주상복합아파트의 앞마당 같은 공간으로, 하루의 일조량이 낮은 대상지 특성을 설계안에 녹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에 제안한 캐노피 워크와 일부 시설이 BF 심의로 인해 삭제됐고 인허가 과정도 순탄치 않았지만 곧 개방을 앞두고 있다.
공간와디즈
크라우드 펀딩의 대표 주자인 와디즈의 첫 오프라인 스토어 외부 공간 설계를 맡아 진행했다. 성수동의 옛 건물 마당 공간을 법정 주차 공간, 다양하게 교류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소, 활동적 체험형 행사가 가능한 공간으로 풀어냈다. 현재는 누적 방문객 30만 명이 넘는 성수동의 핫플레이스로, 제품 및 콘텐츠 홍보 행사, 팝업의 성지가 됐다.
영도 마리노 오토캠핑장
차를 타고 지나가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부산항대교. 그 교각 하부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도시와 바다의 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캠핑장을 조성했다. 초기의 원형 순환 동선과 캠프 사이트에 변화가 있어 아쉽지만 부산 시민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에게 한번쯤 가봐야 하는 캠핑장으로 소개되고 있어 뿌듯하다.
부경대학교 백경광장
부경대학교는 숲과 보행로, 차량 통행로로 이용되던 학교의 유휴 공간을 보행 전용 광장 겸 휴식과 소통, 지역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넓은 광장을 원하는 학교의 의지와 소나무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절충해 설계안을 만들었다.
봉래산 헬기장 실외정원
우리가 설계한 프로젝트 중 최초로 상을 받은 공간이다. 부산 영도구의 봉래산 헬기장을 정원화하는 프로젝트로, 영도구 천혜의 바다 경관과 봉래산의 숲 경관을 아울러 경험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산지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계획에 어려움을 겪던 직원들이 데크 상세도를 그리며 김수희의 ‘멍에’를 하루 종일 틀었던 즐거운 기억이 남아 있다.
성장과 확장
엠디엘은 이제 10년 차를 바라보고 있다. 하다가 망하면 취업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회사지만 이제는 망하거나 약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가득하다. 피터 워커를 보면 아직 우리에게는 60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거나 무한한 시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간 동안 어떻게 성장하고 확장하며 세계관을 구축해 나갈지 궁금해진다. 자연을 표현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땅을 벗어나 우주의 공간으로 자연을 확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엠디엘(MDL)은 조경을 포함한 세상만사에 관심을 둔 젊은 친구들이 모인 집단이다. 설계자가 계획하는 과정이 즐거우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용한다고 믿는다. 자연 앞에서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유지하고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선 유행이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혁신적인 것을 산출하고 도입하며 자연을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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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천이었으나 천이 아니고 천인 그곳
에피소드 1. 2006년 7월의 폭우
용감한 어린이는 용감한 청소년으로 자랐다. 신도시를 뒤로 하고 이사 간 곳은 양재와 과천의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무려 세 번째 중학교. 교복이 예쁘다는 이유로(각주 1) 학교를 고르고 나서 후회막심하게 양재천과 시민의 숲을 따라 왕복 한 시간이 걸리는 등하교를 반복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입학 사이. 드디어 입시와 결별하고 귀국해 여유를 즐기고 있던 여름 어느 날, ‘비 내리는 양재천을 걷자’는 마음으로 우비를 입고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길에 빗줄기가 강해진다고 느꼈지만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설마 문제가 생기겠나 하며 온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즐겼다(고등학생 시절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더욱 그랬던 듯하다). 양재천을 따라 과천 방향으로 한 30m 걸었을까, 수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꿀렁꿀렁.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고 곧바로 발길을 되돌려 귀가를 서둘렀다. 건넜던 징검다리는 이미 물에 잠겨있었다. 수초의 높이가 줄어든 듯 착시가 일어났다. 영국 고전 드라마 ‘닥터후(Docotor Who)’에 나오는 우는 천사(The Weeping Angel)(각주 2) 마냥 눈 깜짝하는 순간 수면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내 인생 첫 수해를 직면했다. 도망이다, 도망.
공원이 된 하천
1997년 양재천은 탄천과 함께 ‘하천종합공원’으로 새롭게 (재)등장했다. 강남구 구간을 시작으로 서초구와 과천시가 합세하면서 약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대규모 하천 공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가장 나중에 진행된 과천시 구간의 양재천 복원 사업은 2003년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타당성 검토 용역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2005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착공됐고, 2006년 말 준공이 완료됐다.(각주 3)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여러 변화가 진행됐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곳이 많으니 공원에 완료란 단어가 있을까 싶다.
다시 말해 2000년 초반까지 양재천에 지금과 비슷한 ‘공원’의 형태가 확연하게 드러난 지역은 강남구와 서초구였다. 과천시 구간 양재천 주변은 본격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이었고, 이쪽의 양재천은 ‘공원’보다는 아직 ‘천변길’이란 단어가 더 어울렸다. 오히려 화훼 판매를 위한 비닐하우스와 소규모 농사가 이루어지는 복합 농업 경관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강남구부터 서초구를 지나 천변을 따라 걸어오면 하나둘씩, 그러다 갑자기 떼로, 비닐하우스의 둥그런 천장이 자유롭게 자라난 가로수 위로 드러났다. 당시 양재천은 도회적 아파트 경관부터 농업 경관까지 도시다움과 시골다움이 스르륵 연결되는 경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레몬색 니트 조끼는 15세 소녀의 심금을 울렸다.
2. ‘우는 천사’는 닥터후 시리즈에 등장하는 독특한 설정의 포식자 종족으로, 긴 방영 기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이 시리즈에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호러 외계인이다. 양자적 방어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으로, 살아 있는 생물에게 관찰 당할 때는 몸이 석상이나 관찰되지 않을 때는 사냥을 시작한다.
3. 이양주, “양재천을 더욱 건강하게”, 『과천 지역연구』, 수원경기개발연구원, 2007, p.130.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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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너나들이 놀이터
도심권 용산가족공원 거점형 어린이 놀이터 조성 설계공모 당선작
서울시는 2021년부터 권역별 거점형 어린이 놀이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단편적 놀이 시설로 구성된 놀이터에서 탈피해, 아이들의 창의성을 향상하고 폭넓은 활동을 유도하는 놀이터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간 추진해 성공을 거둔 ‘창의 어린이 놀이터 재조성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26년까지 시내 5개 권역에 1개소씩 거점형 놀이터를 조성할 계획으로, 현재 광나루한강공원(2022년)과 보라매공원(2024년)의 놀이터가 완공됐다.
지난 4월 공고된 ‘도심권 용산가족공원 거점형 어린이 놀이터 조성 설계공모’는 도심권 어린이 놀이터의 특색있고 독창적인 우수 설계안을 발굴하고자 진행됐다. 잔디 광장 옆에 자리한 기존 놀이터와 주변 유휴 공간(약 3,700m2)을 대상지로 제시했다. 공모 지침은 공원의 기존 이용 행태를 존중하고, 놀이 시설이 서로 연계되어 확장성을 갖는 놀이터 설계안을 요구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모험 및 체험 활동을 수용할 뿐 아니라, 보호자를 비롯한 인근 시민이 휴식과 산책 등 다양한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복합 여가 공간을 제시해야 했다.
김수연(인터조경기술사사무소), 김현민(스튜디오일공일 엘앤씨), 민병욱(경희대학교 교수), 유송영(현대건설), 이남진(바이런), 진승범(이우환경디자인), 최혜영(성균관대학교 교수)의 심사 결과, 당선작은 유엘디조경설계사무소의 ‘용산 너나들이 놀이터’가 차치했다. 입상작에는 지엘에이디자인의 ‘용산가족공원 상상나래’와 조경설계호원의 ‘용산놀이마을’이, 가작에는 해율조경설계사무소의 ‘놀이의 거미줄’과 스케이프나인의 ‘벙커(Bunker 185)’가 선정됐다. 이 중 당선작을 간략히 소개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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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평공원 2단계
도시와 공원을 연결하는 녹지 보행 네트워크
지난 5월 대유평공원 2단계 조성이 완료됐다. 대상지는 조선시대엔 정조가 설치한 국영농장 ‘대유둔전’으로 활용됐고, 1960년대에는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며 근대 산업화의 터전이 됐던 곳이다. 하지만 2003년 담배공장 폐쇄 후 20여 년간 도심을 단절시키는 장애물로 전락했다.
수원시는 이러한 대상지를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2017년 해당 부지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면서 초기 단계부터 부지 중심에 공원을 두었다. 덕분에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와 대형 상업 시설이 자리 잡은 부지 가운데에 누구나 이용 가능한 대규모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에이치이에이(HEA)가 설계한 대유평공원은 2021년 10월 말 1단계 준공(『환경과조경』 2022년 8월호)을 완료하고, 지난 5월 17일 2단계 조성을 마쳤다. 시대 변화에 따라 막히고 단절됐던 대유평이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된 것이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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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영선 업고 튀어
비가 많이 자주 오는 요즘이다. 비를 보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다.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 아이유의 ‘레인 드롭(Rain drop)’, 태연의 ‘레인(Rain)’. 최근엔 이 노래들을 제치고 이클립스의 ‘소나기’가 비 오는 날 플레이리스트 꼭대기를 차지했다. 정작 노래 가사엔 ‘비’란 단어가 다섯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나의 애착 곡들을 제칠 수 있던 이유는 이 노래의 배경 때문이다. 최근 선풍적 인기를 이끈 ‘선재 업고 튀어’의 ost다. 드라마 애청자로서 소나기를 듣고 있으면 비를 맞고 있는 류선재에게 노란 우산을 씌어주는 임솔이 생각나며, (나의 추억인 마냥) 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류선재 역할을 맡은 변우석의 피지컬, 서로만 바라보는 두 주인공의 서사,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섬세한 연출 등 다양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타임 슬립이다. 유명 아티스트 류선재의 죽음으로 절망했던 열성 팬 임솔이 최애인 류선재를 살리기 위해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2008년으로 돌아간다. 타임슬립 연도가 2008년인 점이 드라마를 보게 했다. 나에겐 2008년은 이마를 뒤덮은 풀뱅 앞머리와 머리카락 끝이 귀와 닿을 정도의 C컬로 말린 풍성한 버섯 머리가 유행하던 학창시절이다. 그네 의자에 앉아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던 생크림을 바른 식빵을 먹기 위해 갔던 캔모아 카페,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화려한 자막과 효과로 편집한 UCC 등. 그 당시 내가 직접 가던 장소와 했던 것들이 드라마에 나오니 반갑기 짝이 없었다. 시대 배경이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두 주인공의 반전 같은 사랑 이야기가 드라마에 과몰입하게 만들었다(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람에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2회 엔딩부터가 진짜다).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타임 슬립이란 장르를 언제 알게 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처음은 2012년에 방영한 ‘옥탑방 왕세자’다.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의 왕세자 이각과 신하 3인방이 세자빈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중 현대로 타임 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 신문물에 적응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과거의 관계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드라마를 통해 타임 슬립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고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 혼자만의 타임 슬립 붐이 일었고 타임 슬립 드라마와 영화는 다 챙겨 봤다.
타임 슬립 영화, 드라마를 보면 타임 슬립으로 과거와 미래 중 어디로 갈지 고민하곤 한다. 둘 다 가고 싶어 고르기 어렵지만 과거에 마음이 더 기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개발되지 않은 땅을 사 한탕 크게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최근 어느 할머니의 말로 인해 속물적 이유 말고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의 주인공인 조경가 정영선이다. 전시 연계 학술행사인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에서 진행된 ‘정영선과의 대화’는 정영선이 날것의 대상지를 마주한 그때 그 당시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특히 포스터 한가운데를 차지한 바위가 상상력을 키웠다. 이 바위는 남해 사우스케이프의 암각 동산으로, 정영선은 암각 동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 바위를 없애보려고 했지만, 깨다 지쳤는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 바위가 너무 좋더라고요. 보자마자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다듬어, 주변을 두른 건축물의 다른 고유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물과 꽃을 더”(44쪽)해 만들었다고 했다. 이를 들으면서 정영선이 마주했던 다듬지 않은 바위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이때로 타임 슬립해 정영선 옆에 서서 그와 똑같은 시선으로 바위를 보며 그의 고민의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을 뿐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대상지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긴 게 정영선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더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기후가 정말 위기구나를 실감하는 요즘이라서 날것의 자연을 만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이가 선재를 살리기 위해 선재를 업고 튄 것처럼, 자연을 구하기 위해 (정)영선을 업고 튀어야 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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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기대만큼이나 걱정되는 마음도 컸다는 걸 고백한다. 어떤 변명을 해봐도 자격지심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조경이 나무 심는 일로 인식되지 않길,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는 식물을 무기로 공간을 치장하는 일로 여겨지기를 않길,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보이길. 정영선이 식물을 손수 심고 작은 정원을 가꾸며 기뻐하는 소박한 할머니처럼 비춰지기보다 그의 작업 영역이 전 국토 곳곳에 퍼져 있는 모든 공공 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꾸 표제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땅에 쓰는 시’. 이 낭만적인 수사들을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꾸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감성에 치우친 표현이 아닐까 하고 들여다봤더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경학과에 입학한 뒤 들은 첫 수업에서 조경의 정의를 배웠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한 종합 예술 과학.”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는 일은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한 일일 것이다. 시는 운율, 울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언어의 특성을 이용해 문학 작품 중에서도 회화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르이니 종합 예술이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제 해결되지 않은 건 ‘과학’이다. 깨닫고 나니 생명, 자연, 식물, 지구, 기후 위기 같이 사람들에게 더 닿기 쉬운 어휘에 밀려 설계, 계획, 마스터플랜, 도면 등 과정을 담은 단어들이 저 먼 곳으로 밀려나면 어떡하나 시키지 않은 우려가 시작됐다. 늘 그렇듯 사서하는 걱정을 떨치기가 더 어렵기 마련이다.
조경의 목표와 결과는 잘 설명된 셈이다. 결국 조경의 작업 과정을 이야기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배정한은 “많은 언론 기사와 인터뷰는 정영선의 조경을 ‘땅에 쓰는 시’로 비유하곤 한다. …… 그러나 ‘시’라는 어휘가 연상시키는 감상적인 의미가 그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작업을 낭만적인 영역에 가둬버릴 위험도 있다”고 말한다. 이어 정영선의 여러 말을 인용하며 “그가 말하는 시는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정리하며 “정영선의 작업을 정영선 고유의 경관으로 만드는 것은 부지의 조건과 맥락을 세심하게 독해하고 섬세하게 연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쓰는 시’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의 태도는 ‘관계’ 혹은 ‘관계 맺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22쪽) 이를 통해, 시라는 단어가 조경의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에 집중했기에 선택된 단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정영선의 작업을 시라 일컫기보다 작업 태도와 그 과정을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김아연은 정영선 조경 속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이며,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25쪽) 정영선의 작품은 단순한 형식을 다루는 것을 넘어 서식처에 기반을 둔 생태계를 품은 생태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본래 자연이었던 것과 설계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김아연의 말처럼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정영선 조경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영선은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깊은 울림이 뜻하는 바는 김아연이 말한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와 결이 같을 것이다. 스스로자自, 그러할 연(然)이라는 한자에서 볼 수 있듯 자연스러움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아모레퍼시픽사옥과 같이 ‘보이는 정원’(각주 1)도 있다. 하지만 대상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생태계의 원리를 더 깊이 따르고 그 흐름이 진짜 자연을 향해 흐를수록, 정영선의 작업처럼 자연과의 경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조경은 더욱 보이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조경을 잘해서 사람들이 절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아도 또 듣고 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조경 작업 이야기를 하는 것. 피곤하고 고되지만 그 방법뿐이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조경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이다.(각주 2)
**각주 정리
1. 이명준, “비평: 정원섬, 보이는 정원”, 『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 p.30.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 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예술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생태적 성능을 지닌 경관을 만들기 위한 조경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 랜드폼을 디자인하는 실험이 빈번하지 않은 국내에서 아직 조경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필요가 있다.”
2. 김경주의 시 ‘드라이아이스’의 한 구절.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낭만은 그런 것이다/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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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삼원색처럼 다채로운 쉼터, 써클 트리오 퍼걸러
이용자의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다목적 쉼터
하나의 퍼걸러 안에서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건의 휴게 시설 전문 브랜드 ‘푸르너스(Prunus)’는 다양한 이용자의 행태를 고려하며 자연을 비롯한 외부 공간과의 조화를 꾀하는 휴게 시설을 제작한다.
써클 트리오(Circle Trio) 퍼걸러(이하 써클 트리오)는 부산의 한국과학영재학교 단지 내 오작공원에 조성한 대형 조합 퍼걸러다. 학생 기숙사인 직녀관과 견우관 사이 오작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써클 트리오는 학생과 교직원의 창의적 활동과 휴식, 친목 도모를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조성됐다.
써클 트리오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박스 형태 건축물의 단조로운 경관을 상쇄할 수 있는 원형의 셸터로 디자인됐다. 크기가 다른 3개(대, 중, 소)의 원형 퍼걸러를 삼원색 다이어그램처럼 배치했다. 각 공간에는 학생과 교직원의 다양한 휴식과 학습 행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가든 테이블, 평상, 바 테이블 등 다양한 휴게 시설물을 설치했다. 또한 퍼걸러 지붕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을 때 지붕 선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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