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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보스토크
‘꼭 붙잡음’이라는 뜻의 ‘포착’은 사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사진은 시간을, 정확히 말하면 특정 순간을 포착한다. 피사체의 움직임, 빛과 그림자를 재빠르게 붙잡아 프레임 속에 가둔다. 이번 달 ‘이미지 스케이프’에서 주신하 교수가 말한 것같이 사진은 언제고 찍을 수 있지만 “그 순간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사진은 몇 픽셀 그 이상의 크기와 무게를 갖는다. 사진이 분절된 시간이라면 장대한 서사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한 문장이나 한 줄의 노랫말처럼.
사진에 대한 단상을 그럴듯하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난 사진에 ‘ㅅ’도 모른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한때 사진이 글보다 못하다 여겼다. 글보다 사진이 많은 책은 소장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내 기준에서 이미지는 한 번 보고 뭔지 알아차리고 나면 그만이고, 글이 적고 사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페이지는 훌훌 넘기다 금세 읽어버려 돈이 아까웠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내 책장에 사진이 많이 들어간 책이 꽂히기 시작했다. 『보스토크Vostok』, 올해만 들어 세 권째다.
『보스토크』는 2016년에 창간된 격월간 사진 잡지다. 창간호의 첫 문을 여는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은 유쾌한 이야기다. 우리는 새로운 사진 잡지를 만들어 세상에 보낸다. 이 잡지는 한국의 사진 지형에 어떤 깊은 균열을 낼 것이고, 이 작은 세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2이 문장에는 『보스토크』가 사진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비장한 선언이 담겨 있지만, 필자는 이는 유쾌한 일일 뿐이라며 가볍게 일축한다. 『보스토크』가 실제로 어떤 균열을 만들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에 버금가는 유의미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잡지는 예술, 디자인, 문학의 범주를 넘나들며 사진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사진계뿐만 아니라 사진계 밖의 독자도 끌어오고야 말겠다는 근사한 기획과 함께.
『보스토크』의 특집 앞에서 나는 종종 무장 해제되고 만다. 을지로 일대 재개발과 철거를 다룬 ‘사라지는 나의 도시’(2019년 3-4월호), 늦은 밤을 밝히는 일터의 풍경을 담은 ‘오늘도 야근을 마치고’(2019년 5-6월호)는 안 읽고는 못 배길 주제였다. 다시 보지 못할 도시 풍경과 그 속의 사람들, 고된 노동의 하루 끝을 담아낸 사진을 소장하지 않는 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직장인으로서 예의가 아니라는 둥, 말 같지도 않는 명분을 만들어냈다. 또한 보스토크 편집부는 최신호인 ‘SF 스타일’(2019년 7-8월호)에서 사진과 SF 소설의 만남을 주선했다. 무려 현실 세계와 평행 세계를 연결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현실 세계의 대상을 다루는 사진과, 눈에 보이지 않는 평행 세계를 다루는 SF의 거리는 언제나 생각보다 멀다. … 우리는 양쪽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네 명의 사진가가 찍은 사진들을 폴더로 묶어서 네 명의 소설가에게 보냈다. 규칙은 간단하다. 받은 사진을 보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소설을 한 편 써서 보내줄 것. 소설가들에게는 사진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3덕분에 나를 포함한 어떤 독자들은 사진에서 평행 세계로 진입하는 웜홀worm hole 같은 것을 찾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사진을 통한 다른 세계로의 여행, 그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을 즈음 어김없이 『환경과조경』의 마감도 돌아왔다. 바쁜 마감 중에 사진 하나하나를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사치다. 하지만 얼마 전 사진에서 어떤 이야기의 단서를 너무 열심히 찾아다닌 탓인지, 평소보다 이번 잡지에 실린 사진을 오래 그리고 길게 보았다. 특히 표지를 장식한 유청오 작가의 사진, 갯벌 위의 구불구불한 두 줄에 자꾸만 눈이 갔다. 어째서 저런 모양을 하고 있나. 누가 만들어 낸 걸까. 파도일까, 아니면 바다 속 생명체일까. 만약 하나의 줄이 외계의 문자로 조합된 문장이라면? 평행 세계의 누군가가 남겨 놓은 신호일지도. 나는 보스토크 편집부가 보낸 사진을 손에 든 소설가처럼, 사진이 포착한 순간에 이따금씩 머물렀다. 그때마다 잠시 어떤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것도 같았다.
1. 보스토크 프레스 편집부, 『보스토크』, 보스토크프레스.
2. 김현호, “잡지는 가볍게 바다를 가르고”, 『보스토크』 2016년 11-12월호, p.6.
3. 『보스토크』 2019년 7-8월호,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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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시적 공간
기억하기 쉬운 내 이름은 선생님들의 좋은 표적이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좋아서,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와서 이름이 불렸다. 칠판 앞에서 문제를 풀기도 했고,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날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한 일은 교과서를 읽는 것이었다. 문학보다는 비문학이 읽기 편했다. “이 바보!”나 “느이 집엔 이런 거 없지?” 같은 소설 속 대사를 감정과 사투리를 제대로 살려 읽을 걸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시 읽기 역시 곤혹스러운 일 중 하나였는데, 소설과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단어와 단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 침묵의 길이가 문제였다. 몇 안 되는 글자를 후루룩 읽어버리려 하면 ‘누가 시를 그렇게 읽냐’는 꾸짖음이 돌아왔다. 단어와 문장을 음미할 수 있는 틈, 그 짧은 여유를 두는 일이 뭐 그렇게 민망했는지 애꿎은 내 이름만 원망했었다.
침묵의 힘을 깨닫게 된 건 뜻밖에도 영화 ‘동주’(2015)에서였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쿠미와 마주 앉은 동주는 자신의 시집의 제목을 천천히 발음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네 어절 사이사이에는 공백의 시간을 대신하는 영상들이 자리한다. 시인으로서 고뇌와 열망, 몽규를 향한 열등감이 빚어낸 동주의 모습들이 하늘, 바람, 별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마지막 단어인 시를 발화하는 순간, 장면은 잠시 프리즈 프레임으로 멈춰서며 침묵을 직설적으로 영상화한다. 신기하게도 그 찰나의 정적이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동주를 보고 나선 종종 눈으로만 읽던 시를 소리 내 읽고 싶어졌다.
독자에게 소개할 만한 조경 작품을 찾다보면 이따금 시적 공간, 문학적 공간이라는 표현을 만난다. 시와 문학,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니 그러한 공간 역시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게시물을 클릭하면 대체로 서정적 분위기가 가득한 사진이 모니터를 채우곤 한다. 좋은 곳도 있고, 마음에 차지 않는 곳도 있다. 그렇게 작품을 뜯어보다 보면 시적 공간, 문학적 공간이라는 표현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저편으로 잊혀지기 일쑤였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또 한 번 그러한 표현과 마주했다. “오랜 고목들이 풍성한 녹음을 만들어내고 있어 디테일한 식재 계획보다는 문학적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공간 계획에 더 많은 힘을 쏟았다.”(‘윤동주 문학동산’, pp.32~39)
사전에서는 ‘시적(문학적)’을 ‘시(문학)의 정취를 가진, 또는 그런 것’1이라 정의한다. 즉 시적(문학적) 공간이란 ‘시(문학)의 고요한 느낌이나 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느낌이나 맛은 지극히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지만, 그간의 작품 서치 경험에 비추어보면 많은 사람이 간결한 공간에 고즈넉한 자연이 가미된 곳에서 시적 분위기를 느끼는 것 같다. 오래전에 읽었던 건축가 이종건의 글이 생각났다. 그는 『시적 공간』에서 “시에 의한 사물의 의미화 작업은, 짓기 작업에서 사물(의 완성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곧 사물 페티시즘에 대한 경계를 시사한다. 건축가들은 대개 작품의 완성도를 디테일에서 찾는다.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위한 디테일인지 묻는 일을 종종 망각한다는 것이다. … 우리 전통 건축이 보여주는 비정합적이고 느슨한 결구와 기하학적으로 경직되기보다 흐트러진 질서에 기초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2고 말한다. 어쩌면 느슨함, 흐트러짐 등 시가 품고 있는 너그러움이 시적 공간과 맥이 닿아있는 게 아닐까.
우연히도 즐겁게 구독 중인 문학 잡지 『릿터Littor』 8/9월호의 주제가 ‘누가 시를 읽는가’였다. 출판인, 작가, 서점 종사자, 유튜버, 동영상 제작자, 뮤지션 등 다양한 분야의 필진과 수기
공모로 참여한 독자의 글이 실렸다. 수 편의 글 중 한 문단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꿈꾸다 말고 마시는 자리끼처럼 나는 시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악몽과 꿈 사이에 청량한 물을 흐르게 하고, 꿈이 혈관에 스며들게 해서, 그토록 땀 흘리며 삼키던 열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것.”3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를 보내고 나니 거짓말처럼 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그득하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이번 가을에는 내게도 꿈꾸다 말고 마시는 자리끼 같은 시 한 편과 그와 어울리는 공간 하나가 생겼으면 좋겠다.
1. ‘시적’, 네이버 어학사전, 2019년 8월 26일 접속.
2. 이종건, 『시적 공간』, 궁리, 2016, pp.119~120.
3. 김겨울, “흐르는 말들”, 『릿터』 8/9월호,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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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든 동네정원, 2019 서울정원박람회
정원, 도시재생의 씨앗이 되다
바삐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자연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골목길 한편에 옹기종기 놓인 화분이나 콘크리트 틈에서 핀 꽃 한 송이에도 우리는 위로를 받곤 한다. 그래서일까 작게나마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확산하는 매개체로 곧잘 이용된다. 다가올 10월, 이러한 정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2019 서울정원박람회’가 서울로7017과 해방촌 일대에서 개최된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매년 정원 문화 확산과 정원 산업 활성화를 위해 서울정원박람회를 개최해 왔다. 5년 차를 맞이한 서울정원박람회는 한 가지 변화를 꾀했다. 노후 공원을 재단장해 시민들을 불러 모으는 대신 오래된 도시, 즉 시민들의 삶 속으로 직접 찾아가는 도시재생형 박람회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서울로7017과 백범광장 일대를 정원 문화를 확산하는 공간으로 꾸리고, 용산구 해방촌 곳곳에 시민들이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동네 정원을 조성할 예정이다.
만리동광장에서는 다채로운 정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정원 산업의 최신 정보와 트렌드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정원산업전이 진행되며 음악회, 버스킹 공연 등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문화 행사도 열린다. 백범광장에서는 여러 자치구가 정원 작가와 협업해 만든 자치구정원을 만나볼 수 있으며, 목공 체험을 비롯해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해방촌에는 작가와 학생, 지역 주민이 계획한 16개의 동네정원이 조성된다. 곳곳에 조성된 작은 정원이 도시재생의 씨앗이 되어 지역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동네에 새로운 커뮤니티를 구축할 것이다. 지난 서울정원박람회가 ‘면’적이었다면 2019 서울정원박람회는 ‘점’에서 시작해 ‘선’을 그려나간다. 만리동 광장에서 출발해 서울로7017, 백범광장을 거쳐 해방촌까지 이어지는 가든로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노후 도시에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하고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콘크리트가 가득한 해방촌 일대에 조성되는 작은 정원들이 공원 녹지 소외 지역을 초록으로 물들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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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세련되고 차별화된 공간을 연출하는 ‘스크린블록’
입체적인 줄무늬가 새겨진 파스텔 톤의 경관 옹벽 블록
블록은 아름답고 세련된 공간을 조성하는 유용한 소재다. 보도 블록부터 옹벽, 계단, 화단, 담장에 쓰이는 경관 블록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한 이노블록이 손쉽게 차별화된 경관을 연출할 수 있는 ‘스크린블록Screen Block’을 출시했다.
육면체의 스크린블록은 독특한 질감과 파스텔 톤의 색상이 특징인 조경용 경관 옹벽 블록이다. 한쪽 표면에 줄무늬 형태의 요철이 새겨져 있어 구조물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내구성이 뛰어나 건축물 내·외장재로 사용되며, 크기가 크지 않고 색감이 부드러워 실내 공간에도 잘 어울린다. I형, R형, L형 스크린블록을 조합하면 독특한 디자인의 담장이나 파사드를 만들 수 있다. 무게도 가벼운 편이라 중장비를 동원하지 않고도 운반하고 설치할 수 있어 편리하다. 또한 콘크리트 백화저감시스템 처리가 되어 있어 백화 현상 없이 오랜 기간 미관을 유지할 수 있다.
TEL.031-358-4711 WEB. www.inobloc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