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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82년생 환경과조경, 마흔 살이 되다
    『환경과조경』이 만 나이 마흔 살을 맞았다. 1982년 7월, 국내 최초의 조경 전문지 계간 『조경』이 창간되었다. 1985년 6월(통권 9호), 『환경 그리고 조경』으로 제호를 잠시 바꿨고, 10호부터는 『환경&조경』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며, 1992년 1월(통권 45호)부터 월간지 『환경과조경』으로 전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 번의 결호도 없이 40년간 간행된 『환경과조경』은 한국 현대 조경사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한국 조경의 성장 신화를 기록해왔을 뿐 아니라 조경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며 그 경계를 확장해왔다. 2013년 10월호(통권 306호)부터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옷을 갈아입은 『환경과조경』은, 조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고 일상의 조경 문화는 풍요로워졌는데도 정작 제도권 조경은 위기에 빠진 역설적 환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지향과 좌표를 재설정했다.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꾸는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글로벌 정신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 기지, 이 세 가지 좌표를 매달 지면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원칙으로 삼았다. 2021년 8월, 400호를 펴내며 쓴 에디토리얼에 500호 시대를 향하는 『환경과조경』이 묻고 답해야 할 과제를 이렇게 적었다. 첫째, 한국 조경의 전문성과 수월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둘째, 조경 저널리즘의 역할을 기록과 비평을 넘어 이슈 생산과 소통으로 확장한다. 셋째, 다음 세대 조경가와 미래 세대 비평가를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한국 조경의 2030년대를 기획한다. 『환경과조경』의 지난 40년 여정에 변함없이 동승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이 세 가지 과제를 풀어갈 도전적 노정에도 늘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린다. 한층 더 풍성한 지면으로 꾸릴 40주년 기념호는 오는 12월로 잠시 미루지만, 우선 이번 호에는 한국 조경의 기반을 질문하는 기획 특집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올린다. 1970년대 초, 한국 조경의 태동과 함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과 대상, 그 영역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며 조경의 사회적‧문화적 역할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의 범주를 제한하는 장애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것은 번역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트)에 적확한 번역어로 조경(가)이 아닌 다른 말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 조경(학)의 실천 영역과 학문 범주를 포괄할 수 있는 개명이 필요한가? 올해 2월 22일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의 발표 원고들을 다듬어 수록하는 이번 특집이 조경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의 명칭을 둘러싼 신중한 토론의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다음 달에는 40주년 특집의 두 번째 순서로 가칭 ‘조경사’ 자격제 신설의 배경과 필요성을 논의하는 특집이 예정되어 있다. 창간 40년 기념 ‘2022 조경비평상’에는 예년보다 글쓰기의 수준과 글의 완성도가 높은 네 편의 평문이 제출되었으며, 정평진의 응모작 “거리에 대한 권리: 철거된 ‘르네상스 호텔’과 공개공지, 그리고 이우환의 ‘관계항’”을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글은 도시 공공성의 매개 수단인 공개공지의 한국적 현실과 과제를 선명한 문제의식과 단단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추적하고 발견한 수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수상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한국 조경의 최전선을 이끄는 비평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이번 달에 특히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는 ‘파리공원 리노베이션’이다. 1987년에 문을 연 파리공원은 한국 조경 설계를 변화시킨 기점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교목과 넓은 잔디밭, 판에 박힌 정자와 퍼걸러, 몇 가지 운동 시설과 놀이 시설을 적절히 섞으면 곧 공원이라고 생각했던 대중과 전문가들에게 파리공원은 공원도 ‘디자인’해야 하는 대상임을 일깨워 주었다. 틀에 박힌 공원 패러다임을 ‘설계’라는 도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파리공원의 실험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최근 들어 20세기 후반에 만든 도시공원을 고쳐 쓰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복원과 변경, 보존과 재생, 기념과 이용의 충돌이라는 난제를 풀어낸 방식에 대해 다양한 토론과 비평이 이어지길 기다린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너의 목소리가 들려
    길을 걷다 보면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건넨다. 내달리는 차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건만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세요”라고. 그저 지나는 길인데도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며 기계들이, 나를 나무란다. 평소엔 신경조차 쓰이지 않던 기계의 목소리를 피곤하고 지친 날에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나곤 한다. 한 독립서점이 일상에서 쓰일 만한 따뜻한 문장 몇 개를 스티커로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다. 고마워, 사랑해, 응원해, 괜찮아, 힘내 같은 너무 뻔한 말들이라 제작하면서도 재고로 쌓이겠다고 생각했다는데, 예상과 달리 금방 동났다고 한다. 때론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마디가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 아닐까. 우리가 서로에게 들려줘야 할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뻔하고 보잘것없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말 아닐까? 물론 길가에 고마워, 사랑해, 힘내 같은 말을 읊조리는 기계가 있다고 상상하면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긴 하지만……. 대신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얕은 말을 전해볼까 한다. 괜찮아요. 모두 다 잘될 거예요.
  • 파리공원 리노베이션 Renovation of Paris Park, Seoul
    과거라는 구원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는 속편을 쓰는 것과 같다. 전작이 시원치 않다면 어떻게 쓰더라도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작이 명작일 경우 고민은 많아진다. 전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가자니 속편을 쓰는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속편이 아니게 된다. 1987년의 파리공원을 새롭게 만드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가 그러했다. 파리공원은 한국 현대 조경의 담론에서 처음으로 조경 설계가 작품으로 인정받은 프로젝트로 회자되곤 한다. 명작 앞에서 작가는 존경과 비판의 줄타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줄타기는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고, 존경 두 스푼에 비판 한 스푼 같이 비율을 결정하는 문제도 아니다. 태도의 결정, 이것이 줄타기의 본질이다. 우리는 현재의 과오를 다가올 미래가 해결해주리라 믿으며 모든 책임을 과거에 전가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죽은 시간이며, 미래는 희망의 시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늘 과거를 비판하며 새로운 시간에 희망을 품는 사실이 미래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한다. 미래를 구원할 유일한 길은 실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던 과거로 돌아가 버려진 가능성을 다시 찾아내 복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벤야민에게 과거는 미래의 유일한 구원자다. 1987년의 파리공원은 완벽할 수 없었다. 근린공원이 갑자기 기념공원이 되어야 했고, 시간과 재원 모두 넉넉하지 못했으며, 설계를 구현할 기술과 재료도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에서 구원해야 할 대상은 원 설계자들이 품었던, 그러나 이루지 못했던 조경가로서의 꿈만은 아니었다. 옛 도면, 보고서, 인터뷰 기사, 비평, 사진을 수없이 헤아리다 보니 구원해야 할 과거의 꿈을 외진 귀퉁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근린공원의 꿈이었다. 파리공원이 명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사실 근린공원이 아니라 기념공원이기 때문이다. 한국성을 현대적 조경의 언어로 해석하고 이를 프랑스적인 그 무엇인가와 어울리도록 만드는 것이 1987년 파리공원 설계의 과제였다. 지금의 파리공원은 최선을 뛰어넘는 새로운 해답이었다. 그래서 파리공원의 기념성은 지워진 곳을 다시 그려주고 놓친 부분을 채워주면 됐다. 제안서를 준비하기 위한 답사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는 그동안 이 공원이 한불수교 100주년을 상징하는 기념공원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산책로가 만들어져서 좋은데 계단이 불편하다고, 농구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청년들이 그늘이 없어 땡볕에 앉아 있는 것이 안쓰럽다고 했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 나는 비로소 태도를 정할 수 있었다. 상징 1987년 파리공원 설계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남쪽에는 손님인 프랑스의 공간, 북쪽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인 한국의 공간으로 공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파리공원에서 서울광장과 영지는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서울광장은 삼태극 포장 패턴,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조각 타일로 마감된 장식 벽, 전통 식재와 같은 한국적 언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제 서울광장의 한국성은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알아보기 어려운 흔적 정도만 남아 있게 됐다. 주인의 자리인 만큼 누가 보더라도 한국적이어야 했고, 동시에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라는 시간에 어울려야 했다. 지금의 낮은 담을 전통담 쌓기 방식으로 높여 벽을 통해 공간이 확실히 인지되게 했다. 흑색 전벽돌을 사용하고 절제된 마감 처리를 통해 과거의 차용이 아닌 현대적 감각의 전통으로 느껴지게 했다. 삼태극 역시 현대적으로 다시 표현하고자 흑과 백의 화강석을 사용했다. 사라진 일월오봉도는 화강석에 레이저로 정교하게 다시 그려내고, 그 앞에는 정갈한 한국식 정원을 만들었다. 서울광장은 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아담하고 작다. 큰 벽천 뒤에 가려져 숨겨진 느낌의 공간이다. 계단을 올라와야 하고 공원의 주 동선과는 상관없이 북측에 홀로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찾을 이유가 그다지 없는 곳이다. 공원이 늘 북적이는 주말에도 여기를 찾는 이들은 드물다. 처음에는 소심한 주인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범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꿀까도 했지만, 공원 한 군데 정도는 아는 사람들만 찾는 조용 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우리가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은 시끌벅적하게 주최자를 치켜세우며 손님을 맞는 서양의 방식과는 다르다. 있는 듯 없는 듯 약간은 말수가 없고 수줍은 주인이 오히려 한국적 공간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광장은 주말 아침 자전거를 타고 와 텀블러에 담은 냉녹차를 마시며 새소리와 함께 수필집을 읽다가 햇살이 뜨거워지고 아이들의 소리가 높아질 무렵 다시 돌아가는 그런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설계했다. 물 설명서를 보면 원 설계자들은 영지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진 않다. 용상(龍床)과 돈대(墩臺)를 추상화한 벽천이 주인공이고, 영지는 ‘그림자 연못’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벽천을 받쳐주기 위한 배경이었다. 애초에 바라 보는 수경 시설로 계획됐기 때문에 사람의 이용을 전제로 하지는 않은 영지였다. 하지만 1987년 개장하자마자 영지는 물놀이를 하려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용상을 상징하는 근엄한 벽천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그러다 보니 벽천 주변에는 볼썽사나운 안전 펜스가 쳐졌고, 영지에는 결국 화강석 스탠드가 덧대어졌다. 어떻게 해도 결국 아이들이 차지할 공간이 된다면 아예 아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과감하게 벽천을 없애자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래서 벽천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낡아버린 화강석 옷을 바꿔 입혔다. 그리고 펜스가 없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위압적인 벽천의 경계를 낮추고 계단식으로 완만하게 바꾸기로 했다. 부담스럽게 갑자기 떨어지는 영지의 경계도 손볼 필요가 있었다. 경계의 단을 늘려 물의 면적을 줄이기보다 영지의 바닥 높이를 들어 올려 공원에서 영지의 바닥까지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아예 물놀이가 가능한 바닥분수도 가운데에 만들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놀려면 보호자가 편해야 한다. 동측의 스탠드도 정비해 부모들이 영지에 풀어놓은 아이들을 보면서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늘과 앉을 곳을 최대한 많이 조성했다. 양천구청이 보수 수준이 아닌 전면적 재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가 영지 바닥에 생긴 균열 때문이다. 매년 구청은 파리공원 관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영지를 재설계하면서 최대한 유지 관리가 편하도록 바꿀 필요가 있었다. 수조 역할을 하는 구체와 바닥면이 분리될 수 있는 페데스탈 건식 공법을 제안했다. 이러면 포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구체와 상관없이 쉽게 교체가 가능하며, 반대로 구체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포장을 전면적으로 손봐야 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없으면 자전거나 킥보드를 탈 수 있는 광장이 되고, 물이 있더라도 얕은 수면 위에 주변 풍경이 비치는 이름 그대로의 영지(影池)를 만들었다. 잔디와 나무 사람들은 대개 공원 하면 잔디와 나무가 있는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어쩌면 공원의 본질은 잔디밭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일 수도 있다. 원 설계 계획안을 보면 동측에 잔디광장과 총림이 계획됐다. 계획안대로 시공이 안 된 것인지 이후 잔디에 나무를 심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리공원에는 계획된 넓은 잔디밭이 없다. 요새 외국에서는 잔디밭이 욕을 먹는 추세다. 생태적으로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외국에서 잔디밭의 대안을 찾은 이유는 너무나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좋으니까 많이 만든 것이다. 한때 공원의 잔디밭을 보호하기 위해 펜스를 쳤던 우리에게 잔디밭은 아직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공간이며 문화다. 이 공원에 제대로 된 잔디밭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었다. 잔디밭은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도시의 광장처럼 오픈스페이스로서 역할하려면 주변이 잘 구성되어야 한다. 주변에 할 것이 없으면 빈 공간은 버려진 공간이 된다. 그래서 북동측 입구 쪽에 새로운 작은 건물을 배치하고 그 앞에 잔디가 펼쳐지게 했다. 잔디밭 뒤로 운동 공간을 조성했다. 잔디밭 전면은 넓은 물의 공간인 영지로 시원하게 열리게 했다. 잔디밭을 다시 만들기 위해 무성해진 나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무를 정리한다는 계획에 어떤 주민들은 심하게 반대했다. 많은 나무가 반드시 건강한 숲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했다. 너무 밀식되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을 제대로 솎아주어야 더 건강한 숲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 했을 때, 어떤 이는 수긍했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한편 나무가 적은 곳에 새롭게 나무를 심어 줄 필요도 있었다. 한불마당은 아이들이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기에 최적의 장소인데, 부모들이 앉아 있을 곳이 없었다. 한 가족이 벤치와 그늘이 없어 경계석에 모여 김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한불마당 경계에 큰 나무들을 새로 심고 그늘과 함께 많은 벤치와 의자를 놓기로 했다. 이 설계가 과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나무 그늘 아래 연두색 의자가 가득 놓여 있는 파리 튈르리 정원 사진을 보여줬다. 이게 파리의 공원이라고. 파리에서는 나무 그늘과 의자가 있는 곳이 공원이 된다고. 그러자 그가 파리공원에 만드는 이 공간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프롬나드(promenade)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라고 덧붙였다. 포장 요즘 조경가들은 포장에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 좋아지다 보니 재료 생산과 디자인이 일체화되어 패키지로 제공된다. 오히려 손수 설계하는 것보다 패키지의 결과가 좋을 때가 많다. 1987년에는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재료의 품질도 형편없었고 디자인적으로 활용할 대안도 별로 없었다. 파리공원의 설계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개념을 구현할 포장의 패턴을 생각해야 했다. 그 고민이 담긴 공간이 중앙가로와 한불마당이다. 원 설계의 모든 공간이 중심축을 기준으로 확장되고 변주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앙 가로는 파리공원 설계의 개념적 뼈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원에 가보면 계획도에서는 그렇게 강력해 보이던 축이 보이지 않는다. 원 설계에서는 축이 세 개로 분절되고 각각 다른 포장 패턴으로 나뉘었다. 그러면서 존재감이 약화됐다. 그리고 중간에 건물이 들어가고 조형물이 놓이면서 시각적으로도 하나의 축이 사라졌다. 원 설계의 개념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중심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닳아서 보이지도 않게 된 바닥의 전통 문양을 새롭게 해석하여 상징성을 복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한국적이라고 느낄 태극기의 건곤감리(乾坤坎離) 64쇄를 응용했다. 흑백 패턴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란 강점이 있었다. 시공성을 위해 흑백의 조합을 수없이 테스트하고 64괘 중 여덟 개 괘를 골라 화강석 포장 패턴을 구성했다. 새로운 패턴을 공원의 가장 넓은 공간인 한불마당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한불마당은 한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상징하는 광장이다. 원 설계자들은 프랑스와 한국의 두 국기에 있는 적, 청, 백의 세 가지 색으로 두 나라의 화합을 상징하고자 했다. 문제는 실제로 적용된 패턴은 프랑스의 삼색기를 떠올리기에도, 태극기를 생각하기에도 애매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런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값싼 시멘트 블록에 염료를 섞어 새로 블록을 만들었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고급스럽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중심축에 사용된 괘 패턴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화강석으로 한불마당 전체를 재포장하기에 단가가 꽤 비쌌다. 둘째, 보수한 지 얼마 안 돼 폐기하기에는 상태가 양호했다. 셋째, 원형광장에 직선의 괘 패턴을 적용하기 위해 알고리즘 디자인까지 동원해 여러 대안을 마련했으나 현실적 시공 과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원 설계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담당 소장님은 지금의 시점에서는 적, 청, 백의 색으로 상징을 구현하는 방식이 직설적일 수 있지만, 이 역시도 시대의 반영이니 색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었다. 그래서 원래 포장 재료를 일부 활용하고 그에 맞추어 지금의 블록에 그때의 안료를 배합해 비슷한 느낌의 새 재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원래 포장 시공의 방식 그대로 적과 청의 괘를 곡선 형태로 담아냈다. 사람 원 설계안을 보면 현재 파리공원의 모습과 원 설계자들이 생각했던 이미지는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기념공원의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원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불마당을 제외하면 원 설계의 공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피크닉, 휴식, 명상, 산책, 전시 정도로 고상하고 세련된 프로그램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사람들은 조경가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저마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공간을 고쳐 쓴다. 기념 조형 공간 으로 설정한 야외 전시장은 농구장으로 바뀌었고, 명상과 감상을 할 수 있는 영지와 벽천은 아이들의 물놀이터가 됐다. 공원을 도시와 어느 정도 분리하기 위해 만든 경계부의 지형과 녹지대에는 순환 산책로를 만들었다. 조용한 숲속은 생활 체육 시설로 가득 찼고 어르신들을 위한 지압로가 생겼다. 이번 재설계에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담는 일에 제일 고민이 적었다. 이미 사람들이 정답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인기가 좋아 여러 팀이 대기하는 농구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두 개로 만들었다. 조금씩 늘어나 공원 한편을 차지한 운동 시설을 정리하고 두 개의 운동 공간을 조성했다. 그리고 생활 체육 시설뿐 아니라 제대로 된 근력 운동도 할 수 있고, 유튜브에서 인기인 타바타 운동을 할 수 있는 시설과 공간도 만들었다. 문화공원에는 어린이 놀이 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 는 이상한 법 때문에 휴게 시설인 그물 네트로 된 아이들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는데, 예상대로 아이들은 이 공간을 놀이터로 변화시켰다. 시공이 들어가기 직전 어르신들이 단체로 민원을 넣었다고 해서 추운 겨울날 공원에 갔다. 어르신들의 불만은 민원이라기보다 하소연에 가까웠다. 공원 건물이 재단장해 북카페가 된 이후 어르신들이 건물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공원에서 친구들과 만나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낙인데 그럴 공간이 없어졌다고. 총림에 밀식된 나무를 정리하고 그 아래에 둘이 마주 앉아 바둑과 장기를 둘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을 놓았다. 원래는 체스판이 부착된 시설물이었는데 바둑판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나는 겨울에는 어르신들이 새로 지은 커뮤니티 센터에서 바둑과 장기를 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경가는 공간을 결정하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사용되기 바라는 상상을 하며 설계를 하지만, 어떻게 쓸지는 사람들의 몫이다. 사람들의 바람과 의지에 따라 공원은 언젠가 다시 바뀔 것이다. 도시공원을 고쳐 쓰는 일 김영민·이남진 인터뷰 공모 프로젝트에서 이남진과 김영민의 조합을 자주 보고 있다. 어떻게 팀을 꾸리게 됐는지 궁금하다. 이남진(이하 남)2020년 3월 바이런을 개소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파리공원 리모델링 프로젝트 소식을 접했는데, 워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팀원도 적어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김영민 교수가 먼저 함께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김영민(이하 영)이남진 소장과는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이남진 소장이 동심원조경에 근무할 당시 ‘서남권 활성화를 위한 국회대로 상부공원 설계공모’에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2019년 말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를 마무리하고 긴밀한 파트너십을 찾고 있었는데, 여러 회사와 협업해보았지만 나와 잘 맞는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다시 이남진 소장과 함께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를 진행하게 됐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바이런과 김영민의 컨소시엄이라기보다 내가 바이런의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파리공원은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공원이자, 조경 설계가 최초로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은 사례다.공원에서 보존할 것, 고쳐 써야 할 것,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의 목록을 어떻게 도출했나. 영 보통 해외의 공원은 쓰이지 않고 방치되는 경우 리모델링을 진행한다. 하지만 파리공원은 전혀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너무 잘 이용되고 있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잘 쓰여서 시설물이 노후된 점이 문제였다. 주민들의 이용률이 높은 데다 파리공원이 한국 현대 조경사의 분기점을 마련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어서, 이를 잘 고쳐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났다. 우선 파리공원에 관한 보고서와 논문, 사진, 자료를 보며 공원을 스터디했다. 연구 끝에 원 설계의 큰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남 양천구청이 파리공원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위한 밑작업을 많이 해놓은 상태였다. 별도의 운영위원회가 꾸려져 있었고, 파리공원의 기본 및 실시설계를 담당한 조경설계 서안에 공모 기본구상 용역을 맡겨 재정비 가이드라인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가이드라인에 공원에서 보존해야 하는 부분, 기본 틀은 유지하되 소극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 적극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를 준수하되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면서 설계를 했다. 영 구청이 요구한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지 콘크리트 바닥은 균열이 생겨 더 이상 물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균열을 메우는 정도의 보수가 아닌 전면적 재조성이 필요한 상태였다. 계획되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발걸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산책로도 정비가 필요했다. 지역 주민을 관찰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 것 또한 중요했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원에 가서 주민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기도 하고, 공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점이 바뀌었으면 하는지 묻기도 했다. 현장에서 발견한 주민들의 요구, 도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세심한 부분을 관찰하며 보존할 것, 고쳐 써야 할 것,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었다.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공원의 특성상 작은 공간에 프랑스성과 한국성이 어우러져 있다. 여기에 현대적 감각까지 더해야 했는데, 프랑스성, 한국성, 현대적 감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도록 했는가. 영 원작자의 개념과 의도를 따르되 약간의 변주를 주었다. 일단 파리공원의 공간 구조가 굉장히 독특하다. 공간이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설계안을 들여다보면 한국성과 프랑스성을 어떻게 표현할지, 두 나라의 관계를 어떻게 공간으로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공간 구조를 바꾸고 한국성과 프랑스성을 새롭게 해석할 경우, 리모델링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공원이 될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원작의 개념을 따르되,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나 본래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부분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고쳤다. 예를 들어 한불마당은 프랑스와 한국의 국기에서 영감을 받아 적, 청, 백의 포장 재료를 쓴 공간이다. 너무 직설적인 데다가 완성도에 아쉬운 면이 있어 기존 재료와 새 재료를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으로 재조성했다. 이전의 공원과 가장 달라진 점을 체험형 수경 시설, 살롱 드 파리, 미세먼지 안심 쉼터, 체육 시설 확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공간인가. 남 리모델링의 시작은 공원을 이용하는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데서 출발한다. 공모 단계에서 학생들과 함께 설문조사를 하고, 양천구청에 제기된 민원을 살펴보고, 주민설명회를 개최해 의견을 들었다. 공원에 찾아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도 했다. 이들의 말은 어떻게 보면 비전문적 의견일 수 있다. 당장 눈앞의 불편함만을 이야기하는 민원성 의견일 수 있지만, 이를 어떤 식으로 개선해야 할지 판단하는 게 전문가의 몫이기도 하다. 기존 주민 이용 시설을 어디로 옮기는지, 그 대로 유지하되 어떤 부분을 새로 교체할지 등을 최대한 자세히 주민들에게 설명해주려 했다. 다행히 큰 반박이 없었고 대부분 좋아했다. 소수의 편익을 위한 공간에 대한 요청은 가능한 배제했다. 영 본래 설계할 때 개념을 잡고 시작하는 편인데, 이번 프로젝트에는 개념보다는 직관적, 경험적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하루는 공원에 방문했다가 한 가족을 봤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고 부모가 김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결국 경계석에 앉아 김밥을 먹더라. 그걸 보며 광장을 둘러싼 앉을 공간을 충분히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공원에는 생각보다 청소년이 많다. 왜 공원에 오냐고 물어보니 학원에 가기 전 남는 시간에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카페에 가자니 돈이 들고, 앉을 벤치가 부족해 공원을 서성이거나 자판기 주변에서 수다를 떨다가 떠나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기존 운동 시설과는 달리 재미있게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어르신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경로당처럼 쓰던 건물이 북카페로 바뀌면서 머물 공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들을 위해 밀식된 나무를 정리하고, 바둑과 장기를 둘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을 만들었다. 이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위한 공간인 걸 아는지 벤치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바둑과 장기를 즐기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6월호 ‘공원, 고쳐 쓰기’ 특집에서 파리공원를 보여주는 이미지 중 하나로 모네의 화풍으로 그린 서울광장을 보내주었다. 어떤 용도로 만든 이미지인가. 영 직접 그린 건 아니고 실시설계를 담당한 바이런 김영찬 소장이 필터 효과를 이용해 만든 이미지인데, 파리공원의 이미지를 일반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보여줄 때 사용했다. 사실 파리공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공원에 에펠탑, 개선문 같은 직설적 오브제들이 놓여 있는데도 말이다. 주민설명회 프레젠테이션 마지막 장에 이 이미지를 넣었는데 호응이 아주 좋았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시키기 어려운 공원의 프랑스성을 한 장의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었다. 공원 조성 후 살롱 드 파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샹송을 틀어놓았다. 1차원적 표현이지만 주민 입장을 생각했을 때는 필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양천구청의 지원을 받은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남 양천구청은 행정적,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해줄 수 있는 부분은 전부 지원해줬다. 이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구청이 조경가를 전적으로 믿고 의견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경험상 조경가들을 끝까지 믿고 그들이 현장에 관여할 수 있게 해준 프로젝트가 잘된다. 현장에서 임의로 수정되어 시공되는 부분 없이 모두 우리의 검토를 받아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앞으로 남은 후반 작업에 필요한 인건비, 경비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공모 진행 당시보다 공사비가 두 배 이상 증가했는데, 설계비는 증액되지 않았다. 박윤진·김정윤 소장(오피스박김)이 “서울에서 공공 공간을 설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서울공예박물관’, 『환경과조경』 2021년 10월호)라고 말한 적 있는데, 공감한다. 대부분 설계가 끝나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설계 이후에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지원은 부족한 실정이다. 제대로 된 금액을 받지 않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나쁜 선례를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영 공무원의 역할이 컸다. 파리공원은 구청장의 공약인 프로젝트였고, 그만큼 여러 이해관계와 요구 사항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무리한 요구에 대응하지 않을 수 있게 양천구청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막바지에 추가된 음악분수는 사실 이러한 요구로 인해 만든 공간이다. 공사 기간이 짧아 고생했지만 주민들은 좋아하고 있다. 최근의 공원 리모델링 프로젝트들이 도시공원의 보존·재생 등에 대한 충분한 학술적·이론적 연구 또는 사회적 동의·공감대 없이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목동 중심축 5대 공원 리모델링 사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남 리모델링의 정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벽체 하나만 남기고 모두 고치는 것, 원형을 거의 그대로 남기고 마감만 새로 하는 것 모두 리모델링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공원 리모델링을 공모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의 계약 범위에서 설계가 가능한 회사에게 리모델링을 맡기면, 공무원과 주민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수동적 설계가 이루어질 확률이 크다. 파리공원의 경우, 공모 기본구상 용역과 별도의 운영위원회가 있어 큰 도움이 됐다. 공모가 열리고 오래된 도시공원을 어떻게 리모델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영 도시공원의 리모델링은 아카이브 이슈와도 관련된 문제다. 리모델링에 앞서 당연히 충분한 학술적 이론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재는 아카이브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연구를 하려면 자료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공원 리모델링은 아카이브 작업이 끝날 때까지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지금 당장 진행해야 하는데 아직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으니 마냥 미뤄두어야 하는 것인가. 10년 뒤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아카이브가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리모델링에 바람직한 답을 주는 건 아니다. 참고가 될 뿐이다. 외국의 경우, 설계자가 리서치를 함께 진행한다. 이처럼 아카이브와 설계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파리공원 리모델링을 주제로 웨비나가 열리기도 했는데, 이처럼 학계와 업계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언젠가는 선유도공원, 서울숲 같은 대형 공원을 고쳐 써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공원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 남 비슷한 측면에서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아카이브가 부족하다보니 설계하는 사람들이 리서치를 하면서 리모델링에 접근해야 한다.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새로운 공원을 만드는 일과 비교하면 인력, 시간 등 소모되는 부분이 3배 정도 많다. 하지만 설계비와 기간은 일반 프로젝트와 똑같이 잡는다. 그래서 결국 계속 과업을 연장해 가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만약 다른 지자체가 공원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면, 기간을 넉넉히 잡아 급하지 않게 설계와 시공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시기적 이유로 일부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공원을 재개장했다. 앞으로 이 공간은 어떤 절차를 거쳐 어떤 모습으로 언제쯤 완성될 예정인가. 남 아마 7월호가 발간될 쯤에는 그 공간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추가된 음악분수도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지금 재개장한 공원은 1차 완성 단계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고 한다. 예상보다 더 많은 주민이 찾아와 발생한 문제도 차츰차츰 해결해 나갈 계획이다. 목마·신트리공원도 파리공원과 비슷한 단계를 밟고 있다. 지방선거로 인해 구청장이 바뀌었으므로 새로운 의사결정권자들과 의견을 나누고 파리공원의 경험을 토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목마·신트리공원은 완전히 공사가 끝난 뒤 개장하고 싶고, 파리공원처럼 현장에서 완공 때까지 계속 관여하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영 설계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공간을 완성하지 못한 채 공원이 개방되니까 오히려 더 많은 주민의 요구가 가시화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것이 도시가 살아있는 증거다. 많은 사람이 센트럴파크가 옴스테드의 설계안 그대로 완성된 줄 아는데, 사실 옴스테드는 사람들이 공원에서 운동하는 걸 반기지 않았다. 고상하게 자연을 감상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센트럴파크에는 많은 야구장과 소프트볼 구장이 있다. 공원은 이처럼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바뀌고 진화해나간다. 언젠가는 지금 고친 파리공원을 다시 고쳐 써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지금의 설계안을 비판하는 이도 있을 것인데, 당연한 일이다. 2022년의 공원을 2040년에도 잘 쓰고 있다면 이상한 일이다. 세대가 바뀌고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파리공원의 좋은 점과 우리가 놓친 다른 가능성을 후배들이 잘 포착해 더 좋은 공원으로 고쳐 쓰길 바란다. 글 김영민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사진 유청오 설계 총괄 김영민, 바이런 조경 설계 바이런(이남진, 김영찬, 강아람, 조희연, 우희준, 송지희), 서울시립대학교(이학송, 임지원, 김도훈, 이영현, 정혜율, 한지우) 건축 설계 심플렉스 건축사사무소 경관 조명 설계 이온에스엘디 발주 양천구청 위치 서울시 양천구 목동 906 면적 29,619.3m2 완공 2022. 5. 원 설계 기본설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유병림, 황기원, 양윤재) 기본 및 실시설계 조경설계 서안 시공 대능종합조경 발주 서울시 완공 1987. 7.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은 강아람, 이남진, 김영찬, 그리고 김영민이 함께 이끄는 디자인 회사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디자인하는 일상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좋은 설계 환경을 만들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며, 세종상징광장, 광화문광장, 파리공원 재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요 설계자로 참여했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이끌고 있다. 좋은 설계는 좋은 회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김영민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본질을 따르지 못하는 이름은 대상의 성질을 왜곡하거나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 제도권 조경의 개념이 들어선 건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국 제도권 조경의 창립자들은 미국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새로운 전문 분야를 들여왔고, 이 개념의 번역어로 조경造景(지을 조, 경치 경)을 택했다. 하지만 이미 ‘조경’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다듬는 일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온 상황이었다. 대중의 인식 속 조경과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로서의 조경의 간극이 점차 커졌고, 그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 대상, 영역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 『환경과조경』은 ‘이달의 질문’이라는 꼭지를 통해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 등 다양한 의견이 도착했다. 답변 중 일부를 인용해 이 특집의 의도를 설명한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특집 원고는 2022년 2월 22일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을 통해 먼저 발표된 바 있다. 진행 배정한,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다시, 조경의 이름을 묻는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호수공원, 용산공원 등 대규모 국제 조경설계 공모 운영과 진행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며 공모전 결과와 당선작에 대한 보도자료를 작성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보도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유독 ‘조경’이나 ‘조경가’는 다른 용어로 고쳐 표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조경가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의 작품이 용산공원의 미래를 그릴 설계안으로 당선되었다”는 문장에서 ‘조경가’는 예외 없이 다른 단어로 수정됐다. 조경전문가, 조경디자이너, 조경건축가는 그나마 조경을 남겨준 몇 안 되는 경우다. 거의 모든 언론이 안드리안 회저의 직명을 공원전문가, 공원설계가, 공원디자이너, 도시공원계획가 등으로 바꿔 적었다.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조경에 무지한 탓이라고 분노할, 조경의 사회적 인식이 아직 이 정도라고 낙담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경가로는 의미 전달이 안 된다고 판단해 머리를 쥐어짜 새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미 익숙해서 둔감해졌지만, 여러 지자체의 조경 담당 부서명들은 조경이라는 이름의 난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조경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조직은 푸른도시국이다. 이 낭만적인 이름을 단 부서 밑에 공원조성과, 공원녹지정책과, 자연생태과, 산지방재과, 그리고 ‘조경과’가 있다. 조경과의 담당 업무를 찾아보면 수목 식재 사후 관리, 시설물 관리, 가로수와 녹지대, 가로변 꽃 가꾸기 정도다. ‘한국조경헌장’(2013)이 정의하듯 조경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라면, 푸른도시국은 ‘조경국’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조경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대학에서 조경 교육이 시작된 1973년도에도, 내가 조경학과에 입학한 1987년도에도, 다시 35년이 지난 2022년에도 조경은 조경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애증의 이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공이 조경이라고 말하면 대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반응한다. “아, 나무랑 꽃 심고 정원 만드는 거죠? 나무 많이 아시겠어요. 부러워요.” 당대의 지성을 이끄는 어느 철학과 교수가 내 방에 불쑥 방문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처가에 땅이 좀 있는데, 무슨 나무를 심으면 유망할까요?” 한국조경학회 이름으로 용산공원 일을 맡아 진행할 때마다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를 동반한 질문을 받곤 한다. “조경학회가 이런 복합적인 도시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어요?” 어느 경우든 막상 대답이 궁하다. 한국조경헌장의 정의를 암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뇨, 조경은 나무 심고 돌 놓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공원도 설계하고 단지도 계획하고 도시 경관의 큰 골격도 짜고 그래요.” 영어 단어를 조금 섞어 써도 재수 없이 하지 않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 상대라면, “조경, 영어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에요”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내 기분은 좋지 않지만 상대의 반응은 좀 낫다. 뭔가 알아듣는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그런데 조경에 해당하는 영어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일까? 그렇지 않다.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한국어로 번역한 게 조경이다. 이 번역어 ‘조경’이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제도권 조경(학)의 창설자들은 미국식 개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수입해 고심 끝에 조경이라는 말로 옮겼다. 하지만 이 전문 분야의 역할과 가치는 새로웠던 데 반해, 분야 명칭으로 선택된 조경은 이미 다른 뜻으로 통용되던 말이었다. 1920년 이후 일간지 전문을 제공해주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1962년부터 조경이라는 단어가 기사에 등장한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관계없이 1960년대에 쓰인 조경이라는 말의 뜻, 말할 필요도 없다. 나무와 꽃 심고 돌 놓는 것, 관상수 재배, 가드닝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상 언어에서 조경은 바로 그 조경이다. 조경을 하나의 학제(discipline)이자 전문 직능(profession)인 출발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도착어로 삼기에는 조경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미 사회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제도권 조경은 늘 목놓아 소리치며 조경은 그게 아니라고 다른 거라고 강변하고 주장해왔지만, 조경은 결국 조경이다. 조경은 조경이라는 말에 갇힌 셈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 나는 이 단어의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어긋나는 현상이 한국 조경의 50년 역사를 뒤엉키게 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한국 조경(학) 50주년을 맞은 2022년,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첫걸음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이름 ‘조경’에 대한 긴 호흡의 연구와 토론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우려가 공존할 것이다. 반세기 지켜온 이름을 이제 와 버릴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조경의 사회·문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가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공감은 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기 쉽지 않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다시 번역한다면 결국 대만처럼 경관건축(景觀建築)인가. 중국처럼 원림건축(園林建築)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일본의 조원(造園)은 조경보다 협소한 느낌이다. 일부 건축가나 조경가처럼 ‘조경 건축’이라고 쓰는 방법도 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과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은 고심 끝에 명함에 ‘조경건축가’를 넣자 적어도 ‘인식’면에서는 모든 게 해결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건축에 치이는 다수 조경인들은 건축이라는 두 글자에 바로 공분하며 경관‘건축’이나 조경‘건축’에 강하게 반발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몇 대학의 학과명에서 볼 수 있듯 조경 앞에 환경이나 생태나 도시를 덧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건 조경보다 더 옹색하다. 스마트 도시, 그린 인프라 같은 유행어를 섞어보자는 의견도 있을 텐데, 그건 10년도 못 갈 궁여지책,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출발어를 도착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참에 조경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도 넘어 업역을 넓혀야 한다고, 그런 확장을 만방에 선언할 새 이름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땅을 넓히고 싶다 고백한다고 그런 땅이 우리에게 다가올까. 여러 쟁점이 뒤얽힌 어려운 문제지만, 우선은 적확한 진단과 다각적 토론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1 보론: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 『환경과조경』은 2019년에 ‘이달의 질문’ 지면을 꾸린 적이 있다. 그해 12월의 질문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에 보내온 독자들의 답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몇 가지 답을 조금 줄여서 아래에 붙인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독서 모임에서 ‘번역’의 문제를 다룬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 질문 역시 어쩌면 번역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경(造景)’이라는 한자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번역되어 쓰였을까. 요즘 정원, 가드닝이 뜨면서 조경이라는 말과 뒤섞여 사용되다 보니 그 뜻이 더욱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덩달아 조경가, 조경 설계 같은 말들로도 의미 전달이 잘 안 된다.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하다. 명함이나 프로필에 ‘조경건축가’라고 쓴 적이 있다. 딱히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은 좀 뜸해졌다. 번역의 문제인지 용례의 문제인지, 아무튼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영국 사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조경협회에 상응하는 영국 단체명은 ‘Landscape Institute’다. 학과 단위로 독립된 조경학과는 셰필드 대학(University of Sheffield)이 유일한데, 학과명은 ‘Department of Landscape’다. 모두 우리의 조경협회, 조경학과는 동일한 의미와 범위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우리 업역을 명확하게’, ‘학과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이 쉽게 인지하도록’ 등의 이유로 ‘Architecture’를 더한 ‘Landscape Architecture Institute’,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결과는 압도적 반대로 무산. 왜일까? 결국 우리 업역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학제간 교육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조경만 가르치라는 말인가 등이 다수 의견이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적어도 그들 생각에는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정해준, 계명대 교수) “조경의 이름이 부끄럽다면 그것은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비루했기 때문일 것이며, 조경의 이름이 자랑스럽다면 그것 역시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찬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의 이름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고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조경이 스스로의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그 이름은 내가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부끄러운 일들과 자랑스러운 일들이 담기에는 충분했다.”(김영민, 서울시립대 교수)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조용준, CA조경 소장)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조경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누군가 그런 것도 박사가 있냐고 되묻길래 당황한 기억이 있다. 1970년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조경’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고, 이 용어가 더 넓은 범위의 토지, 도시, 경관 디자인을 포함하지는 않으니 완벽한 번역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고 푸념하기엔 한국 조경이 태동한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 우리 분야의 전문성을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건 아닐까. 조경이란 말이 현재 근사하게 통용되고 있다면, 과연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까?”(이명준, 한경대 교수) “조경이란 단어가 쓰인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의미는 건설의 조경, 훼손된 경관을 꾸미는 분야로 특정 지어졌다. 조경이란 이름으로 생태 복원에 참여하려 하면 생물, 생태, 환경공학 분야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조경은 생태계 기본 원리에 따르기보다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에, 환경 복원 분야에 조경이란 이름으로 참여하면 전문성을 내세우기 곤란하다.”(홍태식, 당시 한국생태복원협회장) “명명이란 행위는 단순하지 않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저 있기만 할 뿐 인지되지 않았던 대상을 수많은 대상으로부터 선택하고 분리하여 특정한 존재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상에 이름을 붙일 때는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파악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적확한 개념어를 찾는 일이 이어져야만 한다. 조경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이 용어가 지칭하는 행위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인식은 본래부터 조경이란 용어가 실재하는 행위를 온전히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난 40여 년간 조경이란 분야가 다루는 영역이 확장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건 조경이란 이름이 적확한 명칭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이름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적절한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경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김진환, 당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과장) “유튜브를 실행한다. ‘조경’을 검색하고, 조회순 정렬을 클릭한다. 가장 위에 위치한 영상의 제목은 ‘최상의 조경! 강원도 횡성군 별장 전원주택 연수원 매매.’ 조회수는 무려 33만이다. 영상은 6분 정도 진행되며, 말없이 5천평 고급 별장의 외부 공간을 살핀다. 뒤로 돌아가 스크롤을 내린다. ‘래미안의 클래스를 경험하라’라는 제목으로 아파트 조경을 홍보하는 여섯 번째 영상과 미국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의 책 『공간 혁명』을 소개하는 여덟 번째 영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상 제목에 ‘주택’과 ‘조경’이 함께 놓인다. 전공자가 기대하는 영상은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찾기 어려운 걸 보니, 유튜브 세계와 전공자의 머릿속 간극은 꽤 넓어 보인다. 이제 질문에 답해보자. ‘조경’은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하지 않은 이름이다. 유튜브 안에서도.”(이형관, 당시 앤더스엔지니어링 차장) 각주1. 이 글의 많은 부분은 2021년 6월,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의 칼럼 시리즈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통해 발표된 바 있다. 더 읽을거리 ·오휘영, “우리나라 근대 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1)~(2)”, 『환경과조경』 2000년 1월호, pp.48~51, 2월호, pp.30~33. ·우성백, 『전문 분야로서 조경의 명칭과 정체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논문집』, 2016, pp.11~12. ·Brian Davis & Thomas Oles, “From Architecture to Landscape: The Case for a New Landscape Science”, Places October 2014, placesjournal.org/article/from-architecture-to-landscape/?cn-reloaded=1 ·Charles Waldheim, 배정한·심지수 역, “건축으로서 경관 Landscape as Architecture”, 『경관이 만 드는 도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론과 실천』, 9장, 2018, pp.196~217. ·Joseph Disponzio, “Landscape architect(ure): A Brief Acccount of Org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and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92~200. 배정한은 2014년 1월호부터 『환경과조경』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과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를 지었고, 『라지 파크』와 『경관이 만드는 도시』를 번역했다.
    • 배정한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은 다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50년 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신문물이 이 땅에 들어왔다. 신문물은 현대성(modernity)의 상징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는 시대가 지향한 가치를 보여준다. 근대화의 길을 가기 위해 이 땅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지워지고, 국토와 자연은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새로운 분야가 필요했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그것이었다. 이 신문물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조경(造景)’이었다. ‘경관을 조성한다’는 의미이니,1 뜻으로 보면 이보다 더 나은 말이 있을까 싶다. 50년을 써 왔으니 아주 익숙하고 친근하다. 그래서 애정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 흔히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조경이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질문자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자신은 없었는지 되물었다. 고래 잡는 건가? 포경과 조경의 어감이 비슷해서였는지, 지금은 금지된 포경업이 당시엔 인기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우리는 설명해야 했다. 쉽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지만, 상황은 반복되곤 했다. 시대는 변하고, 조경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농담이거나 자신이 무지에 대한 자백인 시대가 되었다. 이젠 묻지 않는다 2021년 가을, 광주 '아시아 예술정원' 설계 공모안 심사가 있었다. 한 심사위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왜 조경기술사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이죠? 그는 그 예술정원이 조성될 자리 한가운데 위치한 시립미술관의 장이었다. 조경이 이런 걸 해요? 도시재생이나 단지 규모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조경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질문이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아는 조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조경과 다르다. 우리의 조경을 열심히 설명해도 설득당할 것 같지도 않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이 다르다 한국에서 조경 공간의 정책을 다루는 기초자치단체는 226개다. 이 가운데 조경을 국局 단위로 편제하여 조경 정책을 집행하는 지방정부는 한 곳도 없다. 푸른도시국에 조경과가 조직된 특별한 서울시를 제외하고는과 단위 조직을 갖춘 지자체도 없다. 대부분 조경은 공원녹지과 또는 공원과, 녹지과, 산림환경과 등에 팀 단위로 명맥을 유지한다. 정원운영과에 조경팀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경을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한국조경헌장)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글자 그대로 조경이 경관을 조성하는 일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공원과, 녹지과, 정원과 등에 조경팀이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지? 언어학자에게 기대어 이해를 구해본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_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은 자의적이라고 한다. 조경이라는 기표(signifiant)와 조경의 기의(signifié)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조경의 정의와 사람들이 갖는 조경에 대한 이미지나 의미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와 의미는 사회 속에서 필연화된다. 그렇게 필연화된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의 의미와 역할을 한정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1. 조경(造景)이라는 한자는 동사와 명사로 구성된 단어 구조 자체가 예스럽고, 조(造)라는 범용적인 동사가 개성이 없어서 오히려 예술적인 창작보다는 기술적 제작이나 시공에 가깝다고 한다. 김영민, “조경(造景)이라는 말,” 「라펜트」 2021년 8월 12일. 최정민은 한때 LH에서 정붙일 만한 아파트 단지, 좋은 공원, 살 만한 신도시에 대해 고민했었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 다니던 시절에는 설계 공모전에 열심히 도전했다.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 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은 과잉 의식도 있었다. 지금은 순천대학교 산림자원조경학부 조경전공 교수로 학생들에게 설계하는 방법을 안내하면서 조경의 미래에 대해 생각 중이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잘 모르는 사람 M과의 대화
    M은 수락산 자락에서 가까운 동네에 10년째 살고 있다. 지방 소도시 출신이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 이후로 40년 가까이 쭉 서울에 살았으니 이제 서울 사람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사회단체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산도 가깝고 단지에 나무도 많아 산책하기에 좋다고 한다. 그를 둘러싼 ‘조경’의 흔적은 이것이 다다. 지인 중에 조경에 관련된 사람이 없고, 조경을 잘 알지도 못한다. 나도 그를 모른다. 그래서 M은 이 인터뷰에 초대됐다. 건축은 구조잖아요 건축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M은 5초쯤 망설이다가 ‘구조’라는 답을 내놓았다. 의외다. 아마도 최근 화제가 된 광주 아파트 공사 현장 붕괴 사고를 떠올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는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대뜸 A와 B를 말했다. A는 잘 알려진 건축가인데, 책과 강연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B 역시 그의 책을 읽어서 안다고 한다. 아는 조경가가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름답게 꾸미는 거 아닌가요? M은 내가 조경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건축은 그렇고, 그런데 조경은 뭘까요? 아름답게 꾸미는 거요. 5초가 걸리지 않았다. 나쁜 대답이 아니다. 조경 행위의 핵심을 간결하게 설명한 셈이다. 정답에 가까우려면 유용, 건강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하고 끝맺음에서 인문, 과학, 계획, 설계, 예술 같은 용어들이 이어져야 하는데, 핵심은 놓치지 않은 셈이다. ‘아름답게’는 조경 행위가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으뜸일 듯하다. ‘아름답지 않으면 조경이 아니다’라는 명제도 성립 가능하다. ‘꾸민다’는 행위도 반드시 장식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창의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연구와 기획, 설계와 시공이 모두 ‘꾸민다’는 행위에 속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M은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았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처음 들어 보는데, 좀 의외네요. ‘조경’은 친숙한데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는 심히 낯설다는 M.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설명해줄 수 있어요? 우선 랜드스케이프에는 다정한 느낌이 없어요. 좀 높은 곳에서 어떤 도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요. 경관이라고 번역하면 자연보다는 도시적 풍경이 떠올라요. 그러니까 뒤에 아키텍처를 붙여서 생각해 보면, 건축물로 가득한 도시에 대해서 큰 스케일의 어떤 건축적 행위를 하는, 예를 들면 도시계획 같은 행위가 연상돼요. 우리말 조경에서 느껴지는 예술적이고, 자연, 식물 같은 친근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요. 어떤 게 맞는 거예요? 아, 다 맞는 거예요. 정원은 조경인가요? 조경이라고 하면 우선 정원 스케일의 구체적인 공간이 연상된다고 했다.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에는 반드시 조경이 필요하다고 했고, 아직 멀었다고 했다. 거꾸로 정원은 굉장히 사랑스러운 단어이며, 정원을 연상하면 집, 가족, 행복 같은 좋은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조경이 연상되지는 않는다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원도 조경입니다. 아, 그렇겠네요. 광장도 조경입니다. 아, 네. 가로수 심는 것도 조경입니다. 그렇지요. 산림을 가꾸고, 하천을 살리는 것도 조경입니다. 그래야겠지요.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박승진은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설계를 공부했다. 조경설계 서안에서 오랫동안 설계 실무를 했고,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겸임 교수로 조경학 관련 수업을 맡고 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조경’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왜 자꾸 의심받는가? 여러 국내외 조경 전문인들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듯이,1 이름에 대한 불만과 의심은 한국 조경 전문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건축가 찰스 왈드 하임(Charles Waldheim)은 하버드 GSD의 조경학과 학과장 시절 쓴 논문의 결론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두 단어의 조합에서 비롯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프랑스어의 페이자지스트(paysagiste)에 가장 근접하는 랜드스케이피스트(landscapist)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2 스스로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칭하고, 맨해튼 북부 리뉴얼 등 큰 규모의 도시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옴스테드조차 “랜드스케이프라는 말도 별로, 아키텍처라는 말도 별로, 그 두 개의 합성어도 별로”3라고 했다니, 대체 문제가 뭘까. 아마도 우리가 다루고 싶은 일의 ‘스케일’ 그 자체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큰 규모의 프로젝트일수록 협업하는 전문가 모두가 자기 전문성을 주도해야 한다. 항상 같이 일하는 건축, 도시계획, 도시 설계, 토목 등에 비해 연식이 짧고 규모도 작은 조경 분야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려면 더 많은 난관을 뚫어야 한다. 아마 옴스테드도 그랬을 것이고, 오피스박김도 그렇다. 하지만 옴스테드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것을 내 직업의 공식 이름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조경의 아버지’께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준이 명칭에는 문제가 없다. 직군(profession)과 전문인(professional)은 시대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알렉스 크리거(Alex Krieger)는 미국의 이상주의가 어떻게 도시 공간에 구현되었는지를 다룬 책 『언덕 위 도시(City on a Hill)』를 통해 미국의 도시화에서 1세대 조경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19세기 중반 이후 옴스테드를 비롯한 미국 조경가들을 “행동에서는 사회개혁가, 정신에서는 로맨티스트, 그리고 야망에서는 유토피안(social reformers in action, romantics in spirit, and utopians in ambition)”4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들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도시인의 일상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의 여러 문제를 예측하고, ‘자연의 도시화Making Nature Urbane’(크리거가 조경에 대해 서술한 장의 제목)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전문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렇다면 수목학과 도시를 배웠고, 1:10 스케일과 1:5,000 스케일의 평면/단면을 모두 그릴 줄 알고, 토목 엔지니어와 수리 엔지니어를 어떤 경우에 부를지 알고, 간단한 건축 구조도 배웠고, 생태학의 기본을 알고, 경관을 대하는 인간의 행태를 배운 우리 전문 직군에 대한 현 사회의 요구와 기대는 무엇인가? 현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소양을 가진다면 우리를 뭐라 부르던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름을 가진 어떤 직업인도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의해야 하는가? “서로들 조경이 ‘이것’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조경의 매력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과 정의로운 도전 의식에서 비롯되지요. 당신에게 조경은 무엇입니까?”라는 박윤진(오피스박김 대표)의 질문에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는 “첫 번째는 정원 예술(garden art), 두 번째는 조경 엔지니어링(landscape engineering 물, 토양, 식물상 등을 다루는 자연공학), 세 번째는 공공 공간 데코레이션(public space decoration)입니다”라고 대답한다.5 회저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질문해 보고 싶지만, 현재 오피스박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과 내가 GSD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업 내용의 대부분을 이 세 카테고리 중 하나, 혹은 두세 개의 합으로 설명할 수 있고, 굳이 하나로 정의하거나 부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뭐라고 불리는 것 자체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2001년의 박윤진이 조경의 ‘매력’이라고 말했지만, 현 시점 한국의 조경 전문인에게는 이 애매함을 걷어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결여를 예술성 혹은 유연성이라고 포장하다 보면, 지금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일들마저 힘들게 쟁취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설득하고 만족시켜야 할 발주처가 있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후변화 시대인 만큼 오히려 예술보다는 엔지니어링에 가까워져야 한다. 물론 여전히 결과물의 공간 경험과 아름다움은 우리 전문성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관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경’은 오히려 ‘건축’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보다 더 포괄적이고, 이 시대에 적합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예를 들어,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2016, pp.11~12. Charles Waldheim, “Introduction: Landscape as Architecture”,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87~191. 2. Charles Waldheim, 위의 논문. 3. Victoria Post Ranney, ed., 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Vol.5. The California Frontier 1863–1865 ,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p.422. 4. Alex Krieger, City on a Hill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153. 5. 박윤진·김정윤, “Personality: Conversation with Adriaan Geuze (1)~(2)”, 『환경과조경』 2001년 7월호~8월호. 김정윤은 박윤진과 함께 2004년 로테르담에서 오피스박김을 설립, 2006년 서울에 사무실을 개소한 이래 민간과 공공 분야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오고 있다. 2019년 가을, 하버드 GSD 교수(Assistant Professor in Practice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임용되어 교육과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내 이름은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더 매그너스
    어 그래, 조경아. 이름 때문에 고민이라고? 네가 못났으니깐 네 이름도 못난 거지. 왜 이름 탓을 해. 알았어. 잠깐, 농담이야. 이제부터 진지하게 상담해줄게. 네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다 이유가 있지. 너 원래 미국 출생이잖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네 이름을 너희 할아버지인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지어준 건 알지?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도 지어놓고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진 않았대. 일단 아키텍처가 붙는 게 무슨 아키텍처의 유사품 같잖아. 친구들이 자꾸 물어봤대. 아파트 건축, 목조 건축, 서양 건축, 빨간 건축처럼 건축의 한 종류냐고. 그런데, 너 원래 이름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었던 건 알고 있니? 원래 네 이름은 랜드스케이프 가드닝(landscape gardening)이었어. 근데 너희 할아버지는 그 이름이 너무 싫었던 거야. 물론 멋있는 정원사도 있었지. 그러면 뭐해. 정원사라고 하면, 다들 진딧물 잡아주고 잔가지 쳐주는 밥 아저씨를 떠올리는데, 그래서 개명한 거야. 친척들이 난리가 났지. 왜 이름을 멋대로 바꾸냐고. 일설에 의하면 너희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인 복스(Calvert Vaux)가 그랬다는 설도 있는데, 일단 할아버지인 옴스테드가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한 거지. 어쨌든 친척 할머니 중 반 렌셀러(Mariana Griswold Van Rensselaer)라고 목소리 큰 분이 있었는데, 새 이름을 엄청 싫어하셨대. 그래서 지금 이름이 낫다고 할아버지가 엄청 설득했다고 하더라고. 이름이 가드닝이면 평생 놀림 받는다고, 차라리 이름에 아키텍처가 들어가는 게 낫다고. 여기서 하나 궁금해질 거야. 왜 하필 남의 이름인 아키텍처를 가져다 썼을까? 그래 너랑 친한 건축이. 걔 이름이 아키텍처야. 걔가 원래 너희 할아버지 친구 손자였거든. 원래 그 집안도 별 볼일 없었어. 할아버지는 석공에, 아버지는 목수였거든. 그런데 얘가 커서 엄청 잘 나가는 거야. 부잣집 애들하고 같이 놀고 잘 나가는 예술가들도 인정해주고. 그래서 옴스테드 할아버지도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거지. 네가 어릴 때 맨날 형, 형 하면서 건축이 쫓아다녔잖아. 맨날 걔 말투도 따라 하고, 똑같아지고 싶거든. 그 사람의 자리, 위치까지 말이지. 이런 걸 상징적 동일시라고 해.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완전히 똑같아질 수는 없지. 넌 건축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건축이가 진짜 무서운 애거든. 얘가 뜨니까 석공이었던 걔네 할아버지, 목수였던 아버지까지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 취급했거든. 그게 근사한 직업은 아니니까 좀 창피했던 거야. 그러다 보니 걔네 할아버지랑 친했던 너희 집도 완전히 무시했어. 정원사나, 목수나, 석공이나 고상해 보이진 않았거든. 그런데 막상 너로서는 그게 안 되지. 건축이랑 똑같아지려니깐 너의 근본을 부정해야 하고, 그렇다고 따라 하려는 걸 이제 그만두려니까 이름도 바꿔가면서 건축이를 롤 모델로 살아온 너의 과거도 부정해야 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된 거지. 너는 지금까지 건축이의 욕망을 네 욕망인 줄 알고 살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막상 그 욕망이 네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는 이미 너의 고유한 욕망은 없는 거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게 히스테리야. 네 이름이 싫은 건 바로 전형적인 히스테리의 증상인 거지. 재미있는 건 네 한국 이름 조경은 엄밀히 말해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번역어가 아니야. 뜻은 통하긴 하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지. 번역하자면 경관 건축이 되어야 하잖아. 영어는 두 단어인데, 네 한국 이름이 한 단어인 것을 봐도 이건 완전히 다른 거지. 더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 조경은 한국 전문 분야 이름 중에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쓰는 이름이야. 일본에선 조원, 중국에서는 원림이라고 하거든. 한국 사람 대부분은 일본도 싫어하고 일본 이름은 더더욱 싫어하는 거 잘 알 거야.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는 전문 분야의 이름들은 100년 전에 만든 새로운 일본어거든. 도시, 공간, 윤리, 사회, 민주. 지금 우리가 쓰는 전문 용어는 전부 서양어를 번역한 일본어인거지. 건축만 하더라도 원래 일본에서는 조가(造家)라고 했어. 그런데 바꿨어, 건축으로.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서양 번역어가 아니었으니까. 일종의 콤플렉스였거든, 일본이 한번 서양이랑 붙었는데 도저히 이길 수 없단 걸 깨달아. 그래서 일본은 철저히 동양은 열등하고 서양은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돼. 아예 일본을 서양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지. 그러니깐 원래 자신들이 쓰던 말은 열등한 것이고 서양의 말은 우월하게 되어버려. 그래서 요즘의 일본 조경가들은 원래 자신들이 쓰던 조원이란 이름 대신 서양 그대로의 란도스케푸(ランドスケープ)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때 나타나는 증세가 뭐라고 했지? 맞아, 이것도 일종의 히스테리야. 그런데 히스테리라고 해서 너무 걱정할 것은 없어.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대부분의 한국 전문 분야의 이름들은 죄다 히스테리 증세를 수반하거든. 그것도 이중의 콤플렉스로 인한 히스테리 증세가 나타난 거지. 첫째는 서양의 이름을 욕망해야 하는 히스테리. 둘째는 서양의 것을 욕망해야 하는 일본의 이름을 욕망하는 히스테리. 그런데 조경은 영어 이름의 번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야. 완벽히 너의 고유한 이름이야.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 너는 너 혼자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또 콤플렉스가 되는 거야. 남들은 콤플렉스가 두 개나 있는데, 나는 왜 없지? 나도 서양 이름 제대로 따라 하고 싶고, 멋있는 일본어 이름이면 좋겠는 데 나만 내 이름이야. 그런데 막상 그 서양 이름을 보면 남의 이름을 따라 한 거야. 따라 해도 콤플렉스, 안 따라 해도 콤플렉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지젝(Slavoj Žižek) 형이 한 말이 있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그냥 살아. 정 이름이 짜증나서 못 살겠다면,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더 매그너스로 이름을 바꾸든가. 너는 지금 네 이름이 진짜 너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너는 호랑이인데 이름이 야옹이인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게 이름과 본질의 문제가 아니거든. 저기 꼬리를 흔들고 있는 동물이 뭐지? 그래, 멍멍이야. 여기 노랗고 두툼하게 생긴 건 뭐지? 명란 계란말이지. 그런데 넌 뭐지? 이 질문을 던지는 너는 멍멍이, 명란 계란말이랑은 달라. 쟤네는 그거라고 부르는 이름이 기표고, 그 대상이 기의야. 그런데 넌 그렇게 기호화가 되지 않아. 너는 이름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지. 넌 주체야. 네 가 주체라는 점이 개, 계란말이랑 다른 점이야. 그런데 주체가 뭐냐고? 위대하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형이 “주체는 세상과 본질 사이의 거리다”라고 말씀하셨지. 거리가 뭐지? 그치,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주체는 빈자리의 형식에 불과해. 이 비어 있는 주체의 자리가 바로 너야. 보통 사람들은 대상이 있으면 이름이 있고 대상과 이름이 합쳐지면 기호가 된다고 생각해. 아니거든.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면 왜 히스테리 증세가 나타나고 강박증이라는 게 있겠냐. 의미는 소급적으로 발생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게 그런 의미였다고 알게 되는 거라고.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첫사랑은 나중에 보니까 그게 첫사랑인 거야. 더 쉽게 이야기해줄게. 엄마를 한 번 생각해봐. 떠오르는 엄마의 의미가 있지? 5살 나 혼내던 우리 엄마, 19살 수험생 뒷바라지하던 우리 엄마, 22살 군대 갔을 때 울었던 우리 엄마. 지금 네가 생각하는 엄마의 의미는 지금의 네가 예전의 기표를 관통하면서 생기는 거야. 과거 기억의 산물인 거지. 결국 모든 의미는 사후에 만들어질 수 밖에 없어. 라캉(Jacques Lacan) 형님이 『에크리(Ecrits)』(1966)에 그렸던 그래프를 그대로 그려볼게. 가로지르는 S는 이름이야, 이게 기표지. 이름은 그냥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런데 어떤 상징을 거치기 전의 주체 △가 기표를 관통해. 소급적으로 말이야. △가 기표 S를 관통하는 그 지점에서 의미가 발생해. △가 관통한 기표는 뭔가 달라져. 동일한 S인데, 의미가 만들어지고 다른 S'가 되어버리는 거야. 이 과정을 거쳐서 규정되지 않았던 주체 이전의 주체인 △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서 비로소 주체 S'가 되는 거지. 그런데 그 주체는 빗금이 쳐져 있어. 뭔가 결여된 주체라는 뜻이야. 빗금이 지워진 완벽한 주체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주체인 이상 결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결여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잃어 버려야 할 무언가야.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은 반드시 증상을 수반해. 그러니까 네 이름이 변변찮아서 너의 진짜 의미가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오히려 네가 과거의 이름 S를 소급하면서, 지금의 너 때문에 멀쩡한 이름 S'가 후져지는 거야. 어떻게 이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불가능하지. 그건 주체의 조건이기 때문이야. 완벽한 주체는 애초부터 있을 수도 없어. 무엇인가를 결여해야 주체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냥 살아가라는 거야. 네 이름이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로엔그람 더 매그너스가 되어도 결국 넌 열등감 덩어리일 수밖에 없어.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축이라고 자기 이름이 다 완벽하게 마음에드는 줄 알어? 걔도 정신적으로 고민이 많아. 너랑은 좀 다른 문제이지만, 이제 유일하게 남은 길은 열등감을 너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거지. 다시 한 번 더 말해 줄게. 그냥 즐겨, 너의 열등감을. 그 징후를.1 각주1. 이 글과 관련한 상세한 이론적 분석과 참고 문헌들은 다음 글에서 참조하기 바란다. 김영민, “건축의 얼굴”, 『건축평단』 12호, 2017, pp.12~36.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며, 세종상징광장, 광화문광장, 파리공원 재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요 설계자로 참여했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건축의 경계에서 조경을 묻다
    학부에서 건축을, 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건축 매체와 조경 매체 모두에서 일을 했다. 분야를 오고가다 보니 조경 매체에 있을 때는 건축 출신으로, 건축 매체에 다시 오니 조경 출신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양분야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으면서 동시에 타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환경과조경』에서 일하던 초기에 조금 의아했던 건 의외로 ‘조경가’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중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았다. 물론 건축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일간지 등의 대중 매체에서 건축전문가, 건축설계사 같은 단어를 쓰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경가 스스로도 조경가라 칭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건축인의 시선 회사의 동료들에게 ‘조경하면 떠오르는 것’에 대해 가볍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기자들은 ‘규모는 다양하겠지만, 식물을 다루는’ 또는 ‘기후 환경/친환경 등’ 시스템적 접근을 하는 업역이라고 답했다. 작게는 화분부터 마당/정원, 오픈스페이스, 공원, (대규모) 놀이터, 워터프런트 등의 작업이 떠오른다고 했다. 막내 기자는 건축학과 학생 때는 조경이 공원처럼 도시적 작업이라고 생각했으나, 요즘에는 ‘플랜테리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실내에서 식물이 많이 보여서 ‘그럼 저것도 조경에 속하는 걸까’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트렌드에 민감한 세대구나 싶으면서도, 학계와 업계의 괴리를 드러내는 현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가 아닌 직원들은 (예상대로) 조경을 가드닝/식재 혹은 정원과 동일시 하는 편이었고, 조경가라는 단어를 낯설게 느끼기도 했다. 건축 전문지를 만들며 결국 자주 접하게 되는 조경은 건축물의 외부 공간이다. 종종 건축가들은 조경가가 화룡점정처럼 적재적소에 식재를 해 건축가가 의도한 혹은 의도치 않았던 장면을 완성하게 되는 데 감탄을 표하기도 한다. 혹은 새로 완공된 건축물의 사진 촬영 시점을 정할 때, 수목이 어느 정도 잎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데, 소위 ‘사진발’을 위 한 것이지만 건축의 완성의 의미 역시 조경이 부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건축가들에게 조경가의 콘셉트를 듣는 일은 흔하지 않다. 모두 잘 알다시피 조경은 건축물 시공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계획이 시작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조경가가 주도적으로 개념을 펼치기 쉽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건축물의 외부 공간까지 직접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도 있으니, 업역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인접 분야 전문가들 혹은 대중들이 조경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정도는 다르지만 인접 분야 모두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전적 의미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는 전제 하에, ‘건축(가)’, ‘조경(가)’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조경’의 사전적 의미는 “경치를 아름답게 꾸밈”(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이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말에 따르면 핵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전에 함께 제시된 용례 “이번에 새로 만든 공원은 조경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를 보면, 인식이 식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건축은 상황이 다른가? 국어사전은 ‘건축’을 “집이나 성, 다리 따위의 구조물을 그 목적에 따라 설계하여 흙이나 나무, 돌, 벽돌, 쇠 따위를 써서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건축가’는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 건축 계획, 건축 설계, 구조 계획, 공사 감리 따위의 일을 한다”고 정리하고 있다. 건축가들 역시 이 사전적 의미가 건축의 문화적 의미를 충분히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계와 시공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건축 자재비가 드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해도 설계비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건축 설계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것은 조경이나 건축이나 마찬가지로 겪는 일일 것이다. 얼마 전 『SPACE』가 진행한 도시 설계에 관한 좌담에서 한 참여자는 “(도시 설계에 관해) 관리형 지식 생산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좋게 보면 도시설계 외연의 확장이고 지식 생산자의 다변화다. 안 좋게 보자면 아무도 전통적 의미의 도시 설계를 하고 있지 않은데 모두가 도시 설계를 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다. 씁쓸한 양면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쩐지 ‘누구나 조경(에 해당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한 건축가는 이러한 현상이 도시, 건축, 조경 등을 아우르는 산업 자체가 불안정한 탓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 영역을 정의하는 데 고심하는 만큼 산업 생태계를 바로 세우는 데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정은은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 『건축인(POAR)』, 『SPACE(공간)』, 『건축리포트 와이드(WIDE AR)』, 『환경과조경(laK)』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SPACE』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건축과 도시,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 여기’의 건축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 김정은 / 2022년07월 /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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