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이 콘텐츠인 미술전의 실험, 인공자연 전
안동혁 HLD 소장 인터뷰
우리가 마주하는 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미지다. 최적의 콘셉트를 꺼내기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 하나의 선을 도출하기 위해 그린 곡선과 직선, 마우스와 키보드로 만든 수많은 도면. 이 같은 중간 작업물들은 최종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한 여정에서 쉽게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안동혁(HLD 소장)은 설계 과정에서 탄생한 이미지들에 주목했다. 그는 “원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설계에서 정말 과정이 중요하다. 이미지를 설계 최종 단계의 레프리젠테이션을 위해 만드는 방식도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중간 과정으로서 이미지 작업의 효용 가치 또한 높다. 설계안이 좋은 공간으로 구현될 것인지 검토하기 위해, 또는 공간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판단하고 보완하기 위해 이미지 작업을 하기도 한다. 실 제로 좋은 공간에서는 어느 방향으로 카메라를 향해 도 좋은 사진이 나온다. 설계로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지난 5월 22일부터 6월 5일까지 삼청동 가모갤러리에서 열린 안동혁의 개인전 ‘인공자연: 그리고 그 무대의 뒷편’은 중간 작업물의 가치를 보여주는 전시다. 2006년부터 2022년까지의 작업물은 안동혁이 디자인 행위를 통해 어떠한 방식으로 인공의 자연을 만들어왔는지 보여준다. 통념적 자연 또는 조경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인공적 결과물, 완성된 현실의 공간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작업물,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한 중간 작업물과 예술적 영감을 현실화하기 위한 스터디 작업물까지 다양한 층위의 작품이 전시됐다. 그는 인공자연 전을 “조경이 콘텐츠인 미술전의 실험”이라고 표현한다. 인공자연이란 무엇이고, 그의 실험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아직 한낮의 햇볕이 뜨겁지 않은 6월의 어느 날, 안동혁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인공자연 전의 초석은 오래 전부터 놓여 있었다. 안동혁은 조경 설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중간 과정물이 회화나 조각 같은 미술 전시의 콘텐츠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여러 사람과 논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운 좋게도 그 자리에 함께한 가모갤러리의 관장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 독특한 전시가 될 것 같다며 초청 전시를 제안했다.
원대한 비전을 품고 기획한 전시는 아니었지만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안동혁은 “조경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는 대중과 조경의 접점이 생겼다는 점이 큰 의의다. 전시 중 일반 관람객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조경이 이런 것도 하는 줄 몰랐어요’였다”며 “이번 전시가 미약한 시작이지만 전문 조경인과 일반 대중 사이의 연결고리, 조경과 미술 두 영역의 연결고리로 기능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천리포수목원 민병갈 추모정원
민병갈의 길, 설립자와의 동행을 콘셉트로 재조성
고 민병갈(Carl Ferris Miller)이 설립한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식물종(2022년 5월 기준 16,840분류군)을 보유한 수목원이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민병갈은 1962년 우연히 천리포에 방문했다. 그 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땅을 매입한 일을 계기로 한국 최초의 사립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을 만들게 된다. 1979년에 한국으로 귀화했고 식물 보존과 다양한 연구 활동을 펼쳐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라 불렸다. 그는 식물들의 피난처를 마련해 천리포수목원을 인간 중심이 아닌 공간, 식물들의 천국과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2002년 민병갈이 별세한 후에도 천리포수목원은 그의 철학을 이어 받아 식물 중심의 수목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그를 기리는 민병갈 추모정원을 조성했다.
지난 2022년 4월은 민병갈 서거 20주기였다. 이를 맞아 KB금융그룹의 후원을 받아 민병갈 추모정원을 1,080m2의 면적으로 재조성했다. 2021년 12월부터 수목원 임직원 의견 수렴, 외부 전문가 자문을 진행하고 2022년 2월 중순 설계를 완료해 4월 6일 공사를 마쳤다.
민병갈 추모정원은 천리포수목원의 밀러가든(Miller Garden) 중심부에 위치한다. 주변 공간과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모티브를 얻어 ‘민병갈의 길, 설립자와의 동행’이라는 콘셉트의 정원을 조성했다. 민병갈의 나무 공간, 추모 공간, 휴게 공간을 거닐며 식물을 감상하고 때로는 쉬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식물이 행복한 공간’을 꿈꿨던 민병갈의 뜻을 잇기 위해 식물이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수목원을 만들고자 힘썼다. 대상지의 지형, 토양, 향 등을 분석해 추모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식물을 선정하고 시간이 지나도 잘 자랄 수 있도록 식재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월간 『환경과조경』 창간 40주년 기념 조경비평상 가작: 거리에 대한 권리
철거된 ‘르네상스 호텔’과 공개공지, 그리고 이우환의 ‘관계항’
들어가며: 비非–건폐지라는 언어 거리는 대화의 수단이다. 어떤 간격으로부터 생산된 공간은 기호나 음성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화한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이 대화에 있어 상대와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각주 1)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사이 공간은 ‘침묵의 언어’로, 사람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 기관을 동원해 거리와 공간이 담고 있는 정보를 인지하며, 그것을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구사한다.
이는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인공적으로 생산된 사물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도 활용됐으며, 인간의 정주 환경을 구성하는 도시 공간의 적정성을 분석하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다. 예컨대 도시를 이루는 길과 건물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비–건폐지는 현대 도시가 지녀야 할 공공성에 대한 발화들이 전개되어온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었다. 한국 도시가 이 같은 언어를 습득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근래의 일로, 그 구사력의 수준은 도시를 구성하는 외부 공간의 질을 평가하는 주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대상: 역삼동 231번지의 공개공지
2021년 1월, 테헤란로 한가운데 조성된 거대한 공개공지는 ‘한 세대를 거친 공개공지 제도가 현 시점에서 어떤 종류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역삼 센터필드’(2021)가 들어선 테헤란로 231번지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르네상스 호텔’(1988)이 있던 곳이다. 30여 년의 터울을 두고 다른 제도 조건 아래 세워진 두 건물의 대지 점유 방식은 매우 대조적이다. 그 차이는 공개공지에 철거된 호텔의 외벽 일부와 그 경계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공개공지 의무화 전, 올림픽 개막에 맞춰 준공된 르네상스 호텔은 고층으로 갈수록 면적이 줄어드는 형태로 설계되어 상하층의 면적 차이에 따른 몇 개의 옥외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비슷한 시기 서울역 앞에 세워진 ‘게이트웨이 타워’(1991)와 르네상스 호텔 맞은편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상록회관’(1991)에도 나타난다. 승효상은 상록회관과 르네상스 호텔의 코어(승강기, 피난 계단 등으로 구성된 수직 동선)를 중심으로 저층부까지 여러 겹의 켜가 중첩되는 형식이 지닌 제스처가 당시 백지 상태였던 테헤란로 주변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테헤란로에 들어선 건물들은 공개공지의 설치 의무화라는 새로운 제도적 조건 아래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달라진 거리와 공간은 전보다 높은 수준의 공공성을 구현하게 됐는가, 아니면 기존에 지니고 있던 모종의 공공적 가치를 훼손했는가. 이 질문은 곧 각 건물이 생산한 도심 내 외부 공간을 보행자와 시민이 얼마나 자유롭게 전유할 수 있는지, 그로써 이루어지는 ‘침묵의 대화’가 얼마큼 풍요로울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물음에 대한 답은 공개공지 제도의 출처와 한국에 도입된 배경의 간극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공개공지 제도는 뉴욕의 ‘조닝 레볼루션’(1960)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도 입안자는 그로부터 이 년 전 완성된 미스 반 데 로에의 ‘시그램 빌딩’을 통해 국가 기관뿐 아니라 사적 소유의 대지와 건물 역시 공공 영역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시그램이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다른 건물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지점은 완결된 입방체로 만들어졌다는 데 있지 않았다고 보았다. 미스는 전체 대지 중 건물 전면의 상당 면적을 비워둔 채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광장으로 계획했다. 이는 대지 대부분을 건물로 점유하고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면서 테라스를 형성하는, 소위 웨딩 케이크 형태의 건물과 시그램 빌딩의 가장 큰 차이였다. 이후 뉴욕에는 실외뿐 아니라 실내에도 수많은 공개공지가 설치돼 도시 환경의 질을 높이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시그램과 웨딩 케이크의 차이는 곧 공개공지 제도가 도입되기 전 준공된 르네상스 호텔과 그 이후의 건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간극과 같은 것이다. 승효상의 말처럼 저층부의 더 많은 대지를 점유함으로써 만들어진 옥외 공간이 도시 가로에 기여하는 하나의 ‘켜’로 기능하려면, 그로부터 보행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충분한 접근성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반대의 경우 이는 단지 내부 공간의 질을 제고하는 장치이며, 공공 보행로에 밀착된 거대한 담장으로 세워질 뿐이다. 이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승강기와 계단 등 수직 동선이 건물 중심부에 위치해 테라스로의 직접적 접근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내부를 경유해야만 하는 르네상스 호텔이 주변의 도시 가로와 보행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은 특별히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의 사정 또한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동안 한국 도시에서 건물 상부의 옥외 공간은 위험한 차도와 거대한 건물로 과밀해진 서울에서 공원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 장소로 여겨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도심 내 외부 공간에 대한 조경계의 논의 또한 ‘옥상 공원’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2 김수근 역시 1970년대 여의도 마스터플랜의 보차 레벨 분리 계획과 세운상가의 공중 보행로 등 도심지 대단위 개발 계획을 통해 입체화된 도시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구상들은 국가의 재정적 한계로 인해 번번이 계획안으로 머물렀다. 결국 도심지 외부 공간의 개편은 개별 필지 단위의 민간 개발을 통해 공개공지라는 전혀 다른 양상과 목적 하에 이루어졌으며, 그 배경에는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행사가 있었다. 아시안게임을 앞둔 군부 정권은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도시 미관을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할 것을 지시했고, 당시 서울시가 발주한 ‘서울시 주요 간선도로변 도시설계안’은 한국 도시에 적용된 공개공지 제도의 모태가 됐다.3 외부인에게 가장 노출이 많았던 길목인 을지로와 마포 일대에 집중적으로 각종 면세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필지 단위의 재개발이 일어났다.4 이 시기 『환경과조경』은 ‘빌딩조경’5 섹션에서 도심 내 비–건폐지를 다뤘는데, 당시 공개공지 조경 설계는 대부분 기본 배치 계획 이후 사후적 개입에 머물렀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때 현대적 도시 경관이라는 외양은 사유지의 공유와 이를 누릴 시민의 권리보다 우선되는 가치였다.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조성된 공개공지의 모습은 도시 공간의 주인으로서 시민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유로운 접근과 이용이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거대한 조형물 또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입구가 폐쇄되고 주차장과 영업장으로 점유된 공개공지에서 시민들이 머물 자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르네상스 호텔 철거 이후에 대한 기대는 이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분명한 건 압도적 규모의 공개공지에 의해 과거 호텔의 옥외 공간이 차지했던 대지의 상당 부분이 보행자가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건 여전히 검은 양복을 입은 관리 요원들에 의해 통제된 행동만이 허가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센터필드의 공개공지에서 자전거를 끌고 걷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행위는 제재 대상이다.6 서울은 또 하나의 그럴듯한 도시 경관을 얻게 됐지만, 공공 공간에 대한 관심과 관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건물이 얻는 용적이나 높이의 혜택에 비해 공개공지가 도시 가로에 기여 하는 바는 아직 미약하다. 사유지의 일부로 만들어진 이 장소에 대한 권리가 시민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라는 인식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에드워드 홀, 최효선 역, 『침묵의 언어』, 한길사, 2013.
2. 민현식, “생활하는 장소로서의 옥상조경”, 『환경과조경』 1984년 10월호; 윤승중 외, “옥상조경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책.
3. 강병기, “이달의 건축환경문화 작품해설”, 대통령자문 건설기술·건축문화 선진화위원회, 2006년 9월.
4. 박정현, “올림픽 파사드: 체면, 가면, 입면”,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국립현대미술관, 2021.
5. 황기원, 이규목 외, ‘빌딩조경’, 『환경과조경』 1987년 5월호. 정영선의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한 6건의 빌딩조경 사례를 소개한 전후로 약 2년간 12개호에 걸쳐 빌딩 외부 공간을 다뤘다.
6. 건축비평가 이언 보든(Iain Borden)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을 비지배적 공간 전유의 한 예로 들었다. …… 지배 세력은 이윤지향적 이용의 논리, 동질화의 목표, 도시 공간의 통제라는 맥락에서 개인의 저항적인 이용을 특히 ‘스케이트 스토퍼(skatestopper)’라는 형태로 저지하려고 한다. 우베 레비츠키, 난나 최현주 역, 『모두를위한 예술?』, 두성북스, 2013.
정평진은 건축 전문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관한 글을 쓰며 설계경기 아카이브 ‘스코어러(scorer)’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세상을 번역하다
페이퍼 워크, 프랙티스, 보이드, 매스, 마운딩, 라이프스타일……. 매달 나를 괴롭히는 단어의 목록이 길어진다. 『환경과조경』의 편집 지향점 중 하나는 외래어를 한국어로 순화하는 것인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신기하게도 조경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나열한 단어들을 한국어와 짝지어 보자면 페이퍼 워크-서류 작업, 프랙티스-실행/실천, 보이드-커다란 빈 공간, 매스-덩어리, 에지-가장자리, 마운딩-언덕 만들기, 라이프스타일-생활 양식 정도다.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미묘하게 뜻이 빗나가거나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외래어+한국어 형태의 합성어가 등장하는 경우 더욱 곤란하다. 건물이나 공간의 규모에서 비롯한 감각을 흔히 ‘매스감’(매스+감각)이라 표현하곤 한다. 커다란 건물이 주는 느낌, 거대한 건물의 크기가 자아내는 분위기, 큰 건물이 주는 감각, 머릿속으로 몇몇 문장을 나열하다 죄 없는 교정지를 노려 보며 빨간 펜을 내려놓는다. 그대로 두자, 결정하고 다음 문장에 집중하려 노력하지만 자음과 모음이 마음 어딘가를 쿡쿡 찔러대는 건지 속이 껄끄럽다.
영어의 동사를 명사처럼 쓰면서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마운딩’이 딱 적절한 예인데, ‘마운딩을 만들었다’와 같은 오류는 ‘언덕을 만들었다’로 바로잡으면 된다. 그렇다면 ‘조형 마운딩을 제안했다’는 어떨까. 물론 ‘조형적 언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로 고쳐 쓸 수 있지만, 필자 고유의 문체와 본래 문장 길이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을 살리며 글을 다듬기 쉽지 않다. 결국 빈도수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언덕 만들기보다 마운딩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뜻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 마운딩을 조경 동네에서 통용되는 보통명사로 삼기로 마음먹는 식이다.
‘세상을 번역하다’는 번역가 황석희가 명함 뒷면에 새긴 글이다. 이 감성적인 문장은 번역의 본질
을 꿰뚫는다. 과장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번역은 단순히 단어를 치환하는 걸 넘어 어떤 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이해하고 이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일에 가깝다. 대상에 대한 탐구 없이 진행한 번역은 세상을 왜곡한다. 영화 ‘데드풀’의 자막 작업을 하며 ‘괴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황석희에게 “엑스맨이라는 작품은 1960년대 인종차별을 메타포로 만들어졌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영화니 돌연변이 사이에선 괴물이란 말 사용하면 안 된다”는 메일이 도착한 것처럼.1
한창 이번호 특집을 점검하던 중, 오픈스페이스의 순화어 발표 소식을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선정한 단어는 ‘열린 쉼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오픈스페이스는 “건물·구조물 등이 많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비건 폐지로 유지되는 토지를 총칭해서 말하며, 공원‧ 녹지를 포함한 녹지공간의 개념”이며 “공원‧녹지‧운동장‧유원지‧공동묘지 등 공지가 많은 시설과 농지‧산림‧하천‧호소 등 건축물로 건폐되어 있지 않은 비건폐지를 의미하는 광의의 녹지”이니 말이다.(토지이음 용어사전)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국민 2천여 명을 대상의 설문에서 93.1%의 응답자가 열린 쉼터가 적절한 순화어라는 데 동의한 점이었다.
오픈스페이스는 조경뿐 아니라 도시, 건축 분야에서도 널리 쓰는 말이다. 대중이 의미가 대폭 축소된 열린 쉼터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건, 우리가 만든 오픈스페이스가 그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했다는 뜻일 테다. 우리의 바람과 달리 광장, 공원, 산림, 녹지축은 서로 상관없는 각개의 공간으로 읽힐 뿐이다. 사방으로 트여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의 카테고리는 슬프게도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단어의 의미는 소급적으로 발생하고, 사후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48쪽). 그러므로 조경의 의미는 조경이 행한 일, 즉 조경이 만든 공간과 시스템에서 비롯할 것이다. 결국조경의 의미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조경의 이름으로 좋은 것을 만들고, 사람들이 이를 궁금하게만드는 수밖에 없다. 교과서적 해답이지만 모범적 해결책은 가장 명쾌하고 기초적이며 해냈을 때 큰 효과를 낸다. 움베르트 에코는 ‘번역이란 실패의 예술(translate is art of fail)’이라 말했다.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는 완벽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예술로 만들어나가는 건 단어 주인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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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송길영, “[에스.티. 듀퐁클래식에 새긴 그의 스토리]번역가 황석희”, 포브스 코리아, 2018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