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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본질을 따르지 못하는 이름은 대상의 성질을 왜곡하거나 한계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 제도권 조경의 개념이 들어선 건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한국 제도권 조경의 창립자들은 미국의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새로운 전문 분야를 들여왔고, 이 개념의 번역어로 조경造景(지을 조, 경치 경)을 택했다. 하지만 이미 ‘조경’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다듬는 일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온 상황이었다. 대중의 인식 속 조경과 전문 직능과 학문 분과로서의 조경의 간극이 점차 커졌고, 그 이름이 조경(학)의 목적, 대상, 영역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 『환경과조경』은 ‘이달의 질문’이라는 꼭지를 통해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 등 다양한 의견이 도착했다. 답변 중 일부를 인용해 이 특집의 의도를 설명한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특집 원고는 2022년 2월 22일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을 통해 먼저 발표된 바 있다. 진행 배정한,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다시, 조경의 이름을 묻는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호수공원, 용산공원 등 대규모 국제 조경설계 공모 운영과 진행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며 공모전 결과와 당선작에 대한 보도자료를 작성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보도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면서도 유독 ‘조경’이나 ‘조경가’는 다른 용어로 고쳐 표기하곤 했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조경가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의 작품이 용산공원의 미래를 그릴 설계안으로 당선되었다”는 문장에서 ‘조경가’는 예외 없이 다른 단어로 수정됐다. 조경전문가, 조경디자이너, 조경건축가는 그나마 조경을 남겨준 몇 안 되는 경우다. 거의 모든 언론이 안드리안 회저의 직명을 공원전문가, 공원설계가, 공원디자이너, 도시공원계획가 등으로 바꿔 적었다.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조경에 무지한 탓이라고 분노할, 조경의 사회적 인식이 아직 이 정도라고 낙담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경가로는 의미 전달이 안 된다고 판단해 머리를 쥐어짜 새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미 익숙해서 둔감해졌지만, 여러 지자체의 조경 담당 부서명들은 조경이라는 이름의 난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조경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조직은 푸른도시국이다. 이 낭만적인 이름을 단 부서 밑에 공원조성과, 공원녹지정책과, 자연생태과, 산지방재과, 그리고 ‘조경과’가 있다. 조경과의 담당 업무를 찾아보면 수목 식재 사후 관리, 시설물 관리, 가로수와 녹지대, 가로변 꽃 가꾸기 정도다. ‘한국조경헌장’(2013)이 정의하듯 조경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해 인문적·과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라면, 푸른도시국은 ‘조경국’이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조경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대학에서 조경 교육이 시작된 1973년도에도, 내가 조경학과에 입학한 1987년도에도, 다시 35년이 지난 2022년에도 조경은 조경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애증의 이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공이 조경이라고 말하면 대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반응한다. “아, 나무랑 꽃 심고 정원 만드는 거죠? 나무 많이 아시겠어요. 부러워요.” 당대의 지성을 이끄는 어느 철학과 교수가 내 방에 불쑥 방문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처가에 땅이 좀 있는데, 무슨 나무를 심으면 유망할까요?” 한국조경학회 이름으로 용산공원 일을 맡아 진행할 때마다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를 동반한 질문을 받곤 한다. “조경학회가 이런 복합적인 도시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어요?” 어느 경우든 막상 대답이 궁하다. 한국조경헌장의 정의를 암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뇨, 조경은 나무 심고 돌 놓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공원도 설계하고 단지도 계획하고 도시 경관의 큰 골격도 짜고 그래요.” 영어 단어를 조금 섞어 써도 재수 없이 하지 않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 상대라면, “조경, 영어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에요”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내 기분은 좋지 않지만 상대의 반응은 좀 낫다. 뭔가 알아듣는 표정을 지을 때가 많다. 그런데 조경에 해당하는 영어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일까? 그렇지 않다.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한국어로 번역한 게 조경이다. 이 번역어 ‘조경’이 문제의 핵심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제도권 조경(학)의 창설자들은 미국식 개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수입해 고심 끝에 조경이라는 말로 옮겼다. 하지만 이 전문 분야의 역할과 가치는 새로웠던 데 반해, 분야 명칭으로 선택된 조경은 이미 다른 뜻으로 통용되던 말이었다. 1920년 이후 일간지 전문을 제공해주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1962년부터 조경이라는 단어가 기사에 등장한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관계없이 1960년대에 쓰인 조경이라는 말의 뜻, 말할 필요도 없다. 나무와 꽃 심고 돌 놓는 것, 관상수 재배, 가드닝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상 언어에서 조경은 바로 그 조경이다. 조경을 하나의 학제(discipline)이자 전문 직능(profession)인 출발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도착어로 삼기에는 조경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미 사회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제도권 조경은 늘 목놓아 소리치며 조경은 그게 아니라고 다른 거라고 강변하고 주장해왔지만, 조경은 결국 조경이다. 조경은 조경이라는 말에 갇힌 셈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선택된 조경(造景). 나는 이 단어의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어긋나는 현상이 한국 조경의 50년 역사를 뒤엉키게 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한국 조경(학) 50주년을 맞은 2022년,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첫걸음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이름 ‘조경’에 대한 긴 호흡의 연구와 토론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우려가 공존할 것이다. 반세기 지켜온 이름을 이제 와 버릴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조경의 사회·문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 가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공감은 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기 쉽지 않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다시 번역한다면 결국 대만처럼 경관건축(景觀建築)인가. 중국처럼 원림건축(園林建築)으로 옮길 이유는 없다. 일본의 조원(造園)은 조경보다 협소한 느낌이다. 일부 건축가나 조경가처럼 ‘조경 건축’이라고 쓰는 방법도 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과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은 고심 끝에 명함에 ‘조경건축가’를 넣자 적어도 ‘인식’면에서는 모든 게 해결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건축에 치이는 다수 조경인들은 건축이라는 두 글자에 바로 공분하며 경관‘건축’이나 조경‘건축’에 강하게 반발할 게 분명하다. 이미 몇몇 대학의 학과명에서 볼 수 있듯 조경 앞에 환경이나 생태나 도시를 덧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건 조경보다 더 옹색하다. 스마트 도시, 그린 인프라 같은 유행어를 섞어보자는 의견도 있을 텐데, 그건 10년도 못 갈 궁여지책,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출발어를 도착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참에 조경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도 넘어 업역을 넓혀야 한다고, 그런 확장을 만방에 선언할 새 이름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땅을 넓히고 싶다 고백한다고 그런 땅이 우리에게 다가올까. 여러 쟁점이 뒤얽힌 어려운 문제지만, 우선은 적확한 진단과 다각적 토론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1 보론: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 『환경과조경』은 2019년에 ‘이달의 질문’ 지면을 꾸린 적이 있다. 그해 12월의 질문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에 보내온 독자들의 답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몇 가지 답을 조금 줄여서 아래에 붙인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독서 모임에서 ‘번역’의 문제를 다룬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이 질문 역시 어쩌면 번역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경(造景)’이라는 한자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번역되어 쓰였을까. 요즘 정원, 가드닝이 뜨면서 조경이라는 말과 뒤섞여 사용되다 보니 그 뜻이 더욱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덩달아 조경가, 조경 설계 같은 말들로도 의미 전달이 잘 안 된다. 제법 긴 설명이 필요하다. 명함이나 프로필에 ‘조경건축가’라고 쓴 적이 있다. 딱히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무슨 일을 하시냐는 질문은 좀 뜸해졌다. 번역의 문제인지 용례의 문제인지, 아무튼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박승진, 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영국 사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한국조경협회에 상응하는 영국 단체명은 ‘Landscape Institute’다. 학과 단위로 독립된 조경학과는 셰필드 대학(University of Sheffield)이 유일한데, 학과명은 ‘Department of Landscape’다. 모두 우리의 조경협회, 조경학과는 동일한 의미와 범위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우리 업역을 명확하게’, ‘학과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이 쉽게 인지하도록’ 등의 이유로 ‘Architecture’를 더한 ‘Landscape Architecture Institute’,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결과는 압도적 반대로 무산. 왜일까? 결국 우리 업역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학제간 교육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조경만 가르치라는 말인가 등이 다수 의견이었다. ‘조경’이 ‘조경가’의 사고와 신념의 범위를 담기에 적어도 그들 생각에는 충분하지 못했던 듯하다.”(정해준, 계명대 교수) “조경의 이름이 부끄럽다면 그것은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비루했기 때문일 것이며, 조경의 이름이 자랑스럽다면 그것 역시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찬란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의 이름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고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조경이 스스로의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그 이름은 내가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부끄러운 일들과 자랑스러운 일들이 담기에는 충분했다.”(김영민, 서울시립대 교수) “조경의 의미를 담는 이름이 부족하기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가 부족한 게 아닐까?”(조용준, CA조경 소장)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조경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누군가 그런 것도 박사가 있냐고 되묻길래 당황한 기억이 있다. 1970년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조경’이라는 말을 가져다 썼고, 이 용어가 더 넓은 범위의 토지, 도시, 경관 디자인을 포함하지는 않으니 완벽한 번역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고 푸념하기엔 한국 조경이 태동한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간 우리 분야의 전문성을 제대로 대중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건 아닐까. 조경이란 말이 현재 근사하게 통용되고 있다면, 과연 ‘조경,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한 이름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을까?”(이명준, 한경대 교수) “조경이란 단어가 쓰인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의미는 건설의 조경, 훼손된 경관을 꾸미는 분야로 특정 지어졌다. 조경이란 이름으로 생태 복원에 참여하려 하면 생물, 생태, 환경공학 분야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조경은 생태계 기본 원리에 따르기보다 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에, 환경 복원 분야에 조경이란 이름으로 참여하면 전문성을 내세우기 곤란하다.”(홍태식, 당시 한국생태복원협회장) “명명이란 행위는 단순하지 않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저 있기만 할 뿐 인지되지 않았던 대상을 수많은 대상으로부터 선택하고 분리하여 특정한 존재로 불러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상에 이름을 붙일 때는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며, 파악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적확한 개념어를 찾는 일이 이어져야만 한다. 조경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이 용어가 지칭하는 행위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 인식은 본래부터 조경이란 용어가 실재하는 행위를 온전히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난 40여 년간 조경이란 분야가 다루는 영역이 확장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건 조경이란 이름이 적확한 명칭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이름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적절한 이름이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경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인식은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 조경이 곧 50돌을 맞는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 조경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조경이란 명칭의 적절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김진환, 당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과장) “유튜브를 실행한다. ‘조경’을 검색하고, 조회순 정렬을 클릭한다. 가장 위에 위치한 영상의 제목은 ‘최상의 조경! 강원도 횡성군 별장 전원주택 연수원 매매.’ 조회수는 무려 33만이다. 영상은 6분 정도 진행되며, 말없이 5천평 고급 별장의 외부 공간을 살핀다. 뒤로 돌아가 스크롤을 내린다. ‘래미안의 클래스를 경험하라’라는 제목으로 아파트 조경을 홍보하는 여섯 번째 영상과 미국 건축평론가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의 책 『공간 혁명』을 소개하는 여덟 번째 영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상 제목에 ‘주택’과 ‘조경’이 함께 놓인다. 전공자가 기대하는 영상은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찾기 어려운 걸 보니, 유튜브 세계와 전공자의 머릿속 간극은 꽤 넓어 보인다. 이제 질문에 답해보자. ‘조경’은 그 의미를 담기에 충분하지 않은 이름이다. 유튜브 안에서도.”(이형관, 당시 앤더스엔지니어링 차장) 각주1. 이 글의 많은 부분은 2021년 6월, 환경조경나눔연구원의 칼럼 시리즈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통해 발표된 바 있다. 더 읽을거리 ·오휘영, “우리나라 근대 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1)~(2)”, 『환경과조경』 2000년 1월호, pp.48~51, 2월호, pp.30~33. ·우성백, 『전문 분야로서 조경의 명칭과 정체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논문집』, 2016, pp.11~12. ·Brian Davis & Thomas Oles, “From Architecture to Landscape: The Case for a New Landscape Science”, Places October 2014, placesjournal.org/article/from-architecture-to-landscape/?cn-reloaded=1 ·Charles Waldheim, 배정한·심지수 역, “건축으로서 경관 Landscape as Architecture”, 『경관이 만 드는 도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론과 실천』, 9장, 2018, pp.196~217. ·Joseph Disponzio, “Landscape architect(ure): A Brief Acccount of Org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and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92~200. 배정한은 2014년 1월호부터 『환경과조경』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과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를 지었고, 『라지 파크』와 『경관이 만드는 도시』를 번역했다.
    • 배정한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은 다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50년 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신문물이 이 땅에 들어왔다. 신문물은 현대성(modernity)의 상징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는 시대가 지향한 가치를 보여준다. 근대화의 길을 가기 위해 이 땅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지워지고, 국토와 자연은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새로운 분야가 필요했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그것이었다. 이 신문물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조경(造景)’이었다. ‘경관을 조성한다’는 의미이니,1 뜻으로 보면 이보다 더 나은 말이 있을까 싶다. 50년을 써 왔으니 아주 익숙하고 친근하다. 그래서 애정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 흔히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조경이 뭐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질문자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자신은 없었는지 되물었다. 고래 잡는 건가? 포경과 조경의 어감이 비슷해서였는지, 지금은 금지된 포경업이 당시엔 인기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우리는 설명해야 했다. 쉽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지만, 상황은 반복되곤 했다. 시대는 변하고, 조경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다.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농담이거나 자신이 무지에 대한 자백인 시대가 되었다. 이젠 묻지 않는다 2021년 가을, 광주 '아시아 예술정원' 설계 공모안 심사가 있었다. 한 심사위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왜 조경기술사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이죠? 그는 그 예술정원이 조성될 자리 한가운데 위치한 시립미술관의 장이었다. 조경이 이런 걸 해요? 도시재생이나 단지 규모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조경가라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질문이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은 조경이 뭐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아는 조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조경과 다르다. 우리의 조경을 열심히 설명해도 설득당할 것 같지도 않다. 우리의 조경과 그들의 조경이 다르다 한국에서 조경 공간의 정책을 다루는 기초자치단체는 226개다. 이 가운데 조경을 국局 단위로 편제하여 조경 정책을 집행하는 지방정부는 한 곳도 없다. 푸른도시국에 조경과가 조직된 특별한 서울시를 제외하고는과 단위 조직을 갖춘 지자체도 없다. 대부분 조경은 공원녹지과 또는 공원과, 녹지과, 산림환경과 등에 팀 단위로 명맥을 유지한다. 정원운영과에 조경팀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경을 “토지와 경관을 계획·설계·조성·관리하는 문화적 행위”(한국조경헌장)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글자 그대로 조경이 경관을 조성하는 일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공원과, 녹지과, 정원과 등에 조경팀이 있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지? 언어학자에게 기대어 이해를 구해본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_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은 자의적이라고 한다. 조경이라는 기표(signifiant)와 조경의 기의(signifié)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조경의 정의와 사람들이 갖는 조경에 대한 이미지나 의미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와 의미는 사회 속에서 필연화된다. 그렇게 필연화된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의 의미와 역할을 한정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1. 조경(造景)이라는 한자는 동사와 명사로 구성된 단어 구조 자체가 예스럽고, 조(造)라는 범용적인 동사가 개성이 없어서 오히려 예술적인 창작보다는 기술적 제작이나 시공에 가깝다고 한다. 김영민, “조경(造景)이라는 말,” 「라펜트」 2021년 8월 12일. 최정민은 한때 LH에서 정붙일 만한 아파트 단지, 좋은 공원, 살 만한 신도시에 대해 고민했었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 다니던 시절에는 설계 공모전에 열심히 도전했다.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 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은 과잉 의식도 있었다. 지금은 순천대학교 산림자원조경학부 조경전공 교수로 학생들에게 설계하는 방법을 안내하면서 조경의 미래에 대해 생각 중이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잘 모르는 사람 M과의 대화
    M은 수락산 자락에서 가까운 동네에 10년째 살고 있다. 지방 소도시 출신이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 이후로 40년 가까이 쭉 서울에 살았으니 이제 서울 사람이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사회단체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산도 가깝고 단지에 나무도 많아 산책하기에 좋다고 한다. 그를 둘러싼 ‘조경’의 흔적은 이것이 다다. 지인 중에 조경에 관련된 사람이 없고, 조경을 잘 알지도 못한다. 나도 그를 모른다. 그래서 M은 이 인터뷰에 초대됐다. 건축은 구조잖아요 건축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 M은 5초쯤 망설이다가 ‘구조’라는 답을 내놓았다. 의외다. 아마도 최근 화제가 된 광주 아파트 공사 현장 붕괴 사고를 떠올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는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는 대뜸 A와 B를 말했다. A는 잘 알려진 건축가인데, 책과 강연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B 역시 그의 책을 읽어서 안다고 한다. 아는 조경가가 있는지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름답게 꾸미는 거 아닌가요? M은 내가 조경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 건축은 그렇고, 그런데 조경은 뭘까요? 아름답게 꾸미는 거요. 5초가 걸리지 않았다. 나쁜 대답이 아니다. 조경 행위의 핵심을 간결하게 설명한 셈이다. 정답에 가까우려면 유용, 건강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하고 끝맺음에서 인문, 과학, 계획, 설계, 예술 같은 용어들이 이어져야 하는데, 핵심은 놓치지 않은 셈이다. ‘아름답게’는 조경 행위가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으뜸일 듯하다. ‘아름답지 않으면 조경이 아니다’라는 명제도 성립 가능하다. ‘꾸민다’는 행위도 반드시 장식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없을 듯하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창의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연구와 기획, 설계와 시공이 모두 ‘꾸민다’는 행위에 속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M은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았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처음 들어 보는데, 좀 의외네요. ‘조경’은 친숙한데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는 심히 낯설다는 M.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설명해줄 수 있어요? 우선 랜드스케이프에는 다정한 느낌이 없어요. 좀 높은 곳에서 어떤 도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요. 경관이라고 번역하면 자연보다는 도시적 풍경이 떠올라요. 그러니까 뒤에 아키텍처를 붙여서 생각해 보면, 건축물로 가득한 도시에 대해서 큰 스케일의 어떤 건축적 행위를 하는, 예를 들면 도시계획 같은 행위가 연상돼요. 우리말 조경에서 느껴지는 예술적이고, 자연, 식물 같은 친근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요. 어떤 게 맞는 거예요? 아, 다 맞는 거예요. 정원은 조경인가요? 조경이라고 하면 우선 정원 스케일의 구체적인 공간이 연상된다고 했다. 서울처럼 복잡한 도시에는 반드시 조경이 필요하다고 했고, 아직 멀었다고 했다. 거꾸로 정원은 굉장히 사랑스러운 단어이며, 정원을 연상하면 집, 가족, 행복 같은 좋은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조경이 연상되지는 않는다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원도 조경입니다. 아, 그렇겠네요. 광장도 조경입니다. 아, 네. 가로수 심는 것도 조경입니다. 그렇지요. 산림을 가꾸고, 하천을 살리는 것도 조경입니다. 그래야겠지요.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박승진은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설계를 공부했다. 조경설계 서안에서 오랫동안 설계 실무를 했고,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겸임 교수로 조경학 관련 수업을 맡고 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조경’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와 '조경', 왜 자꾸 의심받는가? 여러 국내외 조경 전문인들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듯이,1 이름에 대한 불만과 의심은 한국 조경 전문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건축가 찰스 왈드 하임(Charles Waldheim)은 하버드 GSD의 조경학과 학과장 시절 쓴 논문의 결론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두 단어의 조합에서 비롯되는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며, 프랑스어의 페이자지스트(paysagiste)에 가장 근접하는 랜드스케이피스트(landscapist)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2 스스로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칭하고, 맨해튼 북부 리뉴얼 등 큰 규모의 도시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시작했던 옴스테드조차 “랜드스케이프라는 말도 별로, 아키텍처라는 말도 별로, 그 두 개의 합성어도 별로”3라고 했다니, 대체 문제가 뭘까. 아마도 우리가 다루고 싶은 일의 ‘스케일’ 그 자체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큰 규모의 프로젝트일수록 협업하는 전문가 모두가 자기 전문성을 주도해야 한다. 항상 같이 일하는 건축, 도시계획, 도시 설계, 토목 등에 비해 연식이 짧고 규모도 작은 조경 분야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려면 더 많은 난관을 뚫어야 한다. 아마 옴스테드도 그랬을 것이고, 오피스박김도 그렇다. 하지만 옴스테드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것을 내 직업의 공식 이름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조경의 아버지’께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준이 명칭에는 문제가 없다. 직군(profession)과 전문인(professional)은 시대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알렉스 크리거(Alex Krieger)는 미국의 이상주의가 어떻게 도시 공간에 구현되었는지를 다룬 책 『언덕 위 도시(City on a Hill)』를 통해 미국의 도시화에서 1세대 조경가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19세기 중반 이후 옴스테드를 비롯한 미국 조경가들을 “행동에서는 사회개혁가, 정신에서는 로맨티스트, 그리고 야망에서는 유토피안(social reformers in action, romantics in spirit, and utopians in ambition)”4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들은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도시인의 일상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의 여러 문제를 예측하고, ‘자연의 도시화Making Nature Urbane’(크리거가 조경에 대해 서술한 장의 제목)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전문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그렇다면 수목학과 도시를 배웠고, 1:10 스케일과 1:5,000 스케일의 평면/단면을 모두 그릴 줄 알고, 토목 엔지니어와 수리 엔지니어를 어떤 경우에 부를지 알고, 간단한 건축 구조도 배웠고, 생태학의 기본을 알고, 경관을 대하는 인간의 행태를 배운 우리 전문 직군에 대한 현 사회의 요구와 기대는 무엇인가? 현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소양을 가진다면 우리를 뭐라 부르던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름을 가진 어떤 직업인도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의해야 하는가? “서로들 조경이 ‘이것’이라고 정의하지만, 사실 조경의 매력은 정의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과 정의로운 도전 의식에서 비롯되지요. 당신에게 조경은 무엇입니까?”라는 박윤진(오피스박김 대표)의 질문에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는 “첫 번째는 정원 예술(garden art), 두 번째는 조경 엔지니어링(landscape engineering 물, 토양, 식물상 등을 다루는 자연공학), 세 번째는 공공 공간 데코레이션(public space decoration)입니다”라고 대답한다.5 회저가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지 다시 질문해 보고 싶지만, 현재 오피스박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과 내가 GSD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업 내용의 대부분을 이 세 카테고리 중 하나, 혹은 두세 개의 합으로 설명할 수 있고, 굳이 하나로 정의하거나 부르려 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뭐라고 불리는 것 자체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2001년의 박윤진이 조경의 ‘매력’이라고 말했지만, 현 시점 한국의 조경 전문인에게는 이 애매함을 걷어내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결여를 예술성 혹은 유연성이라고 포장하다 보면, 지금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일들마저 힘들게 쟁취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설득하고 만족시켜야 할 발주처가 있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 요구와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후변화 시대인 만큼 오히려 예술보다는 엔지니어링에 가까워져야 한다. 물론 여전히 결과물의 공간 경험과 아름다움은 우리 전문성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관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경’은 오히려 ‘건축’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보다 더 포괄적이고, 이 시대에 적합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예를 들어, 우성백·배정한, “조경은 Landscape Architecture인가”, 『한국조경학회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2016, pp.11~12. Charles Waldheim, “Introduction: Landscape as Architecture”,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3), 2014, pp.187~191. 2. Charles Waldheim, 위의 논문. 3. Victoria Post Ranney, ed., The Papers of Frederick Law Olmsted: Vol.5. The California Frontier 1863–1865 ,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p.422. 4. Alex Krieger, City on a Hill ,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153. 5. 박윤진·김정윤, “Personality: Conversation with Adriaan Geuze (1)~(2)”, 『환경과조경』 2001년 7월호~8월호. 김정윤은 박윤진과 함께 2004년 로테르담에서 오피스박김을 설립, 2006년 서울에 사무실을 개소한 이래 민간과 공공 분야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수행해 오고 있다. 2019년 가을, 하버드 GSD 교수(Assistant Professor in Practice of Landscape Architecture)로 임용되어 교육과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내 이름은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더 매그너스
    어 그래, 조경아. 이름 때문에 고민이라고? 네가 못났으니깐 네 이름도 못난 거지. 왜 이름 탓을 해. 알았어. 잠깐, 농담이야. 이제부터 진지하게 상담해줄게. 네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다 이유가 있지. 너 원래 미국 출생이잖아.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네 이름을 너희 할아버지인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지어준 건 알지? 그런데 너희 할아버지도 지어놓고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진 않았대. 일단 아키텍처가 붙는 게 무슨 아키텍처의 유사품 같잖아. 친구들이 자꾸 물어봤대. 아파트 건축, 목조 건축, 서양 건축, 빨간 건축처럼 건축의 한 종류냐고. 그런데, 너 원래 이름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가 아니었던 건 알고 있니? 원래 네 이름은 랜드스케이프 가드닝(landscape gardening)이었어. 근데 너희 할아버지는 그 이름이 너무 싫었던 거야. 물론 멋있는 정원사도 있었지. 그러면 뭐해. 정원사라고 하면, 다들 진딧물 잡아주고 잔가지 쳐주는 밥 아저씨를 떠올리는데, 그래서 개명한 거야. 친척들이 난리가 났지. 왜 이름을 멋대로 바꾸냐고. 일설에 의하면 너희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인 복스(Calvert Vaux)가 그랬다는 설도 있는데, 일단 할아버지인 옴스테드가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한 거지. 어쨌든 친척 할머니 중 반 렌셀러(Mariana Griswold Van Rensselaer)라고 목소리 큰 분이 있었는데, 새 이름을 엄청 싫어하셨대. 그래서 지금 이름이 낫다고 할아버지가 엄청 설득했다고 하더라고. 이름이 가드닝이면 평생 놀림 받는다고, 차라리 이름에 아키텍처가 들어가는 게 낫다고. 여기서 하나 궁금해질 거야. 왜 하필 남의 이름인 아키텍처를 가져다 썼을까? 그래 너랑 친한 건축이. 걔 이름이 아키텍처야. 걔가 원래 너희 할아버지 친구 손자였거든. 원래 그 집안도 별 볼일 없었어. 할아버지는 석공에, 아버지는 목수였거든. 그런데 얘가 커서 엄청 잘 나가는 거야. 부잣집 애들하고 같이 놀고 잘 나가는 예술가들도 인정해주고. 그래서 옴스테드 할아버지도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거지. 네가 어릴 때 맨날 형, 형 하면서 건축이 쫓아다녔잖아. 맨날 걔 말투도 따라 하고, 똑같아지고 싶거든. 그 사람의 자리, 위치까지 말이지. 이런 걸 상징적 동일시라고 해. 하지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완전히 똑같아질 수는 없지. 넌 건축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건축이가 진짜 무서운 애거든. 얘가 뜨니까 석공이었던 걔네 할아버지, 목수였던 아버지까지 무시하고 모르는 사람 취급했거든. 그게 근사한 직업은 아니니까 좀 창피했던 거야. 그러다 보니 걔네 할아버지랑 친했던 너희 집도 완전히 무시했어. 정원사나, 목수나, 석공이나 고상해 보이진 않았거든. 그런데 막상 너로서는 그게 안 되지. 건축이랑 똑같아지려니깐 너의 근본을 부정해야 하고, 그렇다고 따라 하려는 걸 이제 그만두려니까 이름도 바꿔가면서 건축이를 롤 모델로 살아온 너의 과거도 부정해야 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된 거지. 너는 지금까지 건축이의 욕망을 네 욕망인 줄 알고 살아왔단 말이야. 그런데 막상 그 욕망이 네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는 이미 너의 고유한 욕망은 없는 거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게 히스테리야. 네 이름이 싫은 건 바로 전형적인 히스테리의 증상인 거지. 재미있는 건 네 한국 이름 조경은 엄밀히 말해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의 번역어가 아니야. 뜻은 통하긴 하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지. 번역하자면 경관 건축이 되어야 하잖아. 영어는 두 단어인데, 네 한국 이름이 한 단어인 것을 봐도 이건 완전히 다른 거지. 더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 조경은 한국 전문 분야 이름 중에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쓰는 이름이야. 일본에선 조원, 중국에서는 원림이라고 하거든. 한국 사람 대부분은 일본도 싫어하고 일본 이름은 더더욱 싫어하는 거 잘 알 거야.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는 전문 분야의 이름들은 100년 전에 만든 새로운 일본어거든. 도시, 공간, 윤리, 사회, 민주. 지금 우리가 쓰는 전문 용어는 전부 서양어를 번역한 일본어인거지. 건축만 하더라도 원래 일본에서는 조가(造家)라고 했어. 그런데 바꿨어, 건축으로.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서양 번역어가 아니었으니까. 일종의 콤플렉스였거든, 일본이 한번 서양이랑 붙었는데 도저히 이길 수 없단 걸 깨달아. 그래서 일본은 철저히 동양은 열등하고 서양은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돼. 아예 일본을 서양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지. 그러니깐 원래 자신들이 쓰던 말은 열등한 것이고 서양의 말은 우월하게 되어버려. 그래서 요즘의 일본 조경가들은 원래 자신들이 쓰던 조원이란 이름 대신 서양 그대로의 란도스케푸(ランドスケープ)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때 나타나는 증세가 뭐라고 했지? 맞아, 이것도 일종의 히스테리야. 그런데 히스테리라고 해서 너무 걱정할 것은 없어. 너만 그런 게 아니니까. 대부분의 한국 전문 분야의 이름들은 죄다 히스테리 증세를 수반하거든. 그것도 이중의 콤플렉스로 인한 히스테리 증세가 나타난 거지. 첫째는 서양의 이름을 욕망해야 하는 히스테리. 둘째는 서양의 것을 욕망해야 하는 일본의 이름을 욕망하는 히스테리. 그런데 조경은 영어 이름의 번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니야. 완벽히 너의 고유한 이름이야.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알아? 너는 너 혼자 콤플렉스가 없는 것이 또 콤플렉스가 되는 거야. 남들은 콤플렉스가 두 개나 있는데, 나는 왜 없지? 나도 서양 이름 제대로 따라 하고 싶고, 멋있는 일본어 이름이면 좋겠는 데 나만 내 이름이야. 그런데 막상 그 서양 이름을 보면 남의 이름을 따라 한 거야. 따라 해도 콤플렉스, 안 따라 해도 콤플렉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지젝(Slavoj Žižek) 형이 한 말이 있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그냥 살아. 정 이름이 짜증나서 못 살겠다면,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더 매그너스로 이름을 바꾸든가. 너는 지금 네 이름이 진짜 너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너는 호랑이인데 이름이 야옹이인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이게 이름과 본질의 문제가 아니거든. 저기 꼬리를 흔들고 있는 동물이 뭐지? 그래, 멍멍이야. 여기 노랗고 두툼하게 생긴 건 뭐지? 명란 계란말이지. 그런데 넌 뭐지? 이 질문을 던지는 너는 멍멍이, 명란 계란말이랑은 달라. 쟤네는 그거라고 부르는 이름이 기표고, 그 대상이 기의야. 그런데 넌 그렇게 기호화가 되지 않아. 너는 이름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지. 넌 주체야. 네 가 주체라는 점이 개, 계란말이랑 다른 점이야. 그런데 주체가 뭐냐고? 위대하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형이 “주체는 세상과 본질 사이의 거리다”라고 말씀하셨지. 거리가 뭐지? 그치,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주체는 빈자리의 형식에 불과해. 이 비어 있는 주체의 자리가 바로 너야. 보통 사람들은 대상이 있으면 이름이 있고 대상과 이름이 합쳐지면 기호가 된다고 생각해. 아니거든.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면 왜 히스테리 증세가 나타나고 강박증이라는 게 있겠냐. 의미는 소급적으로 발생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게 그런 의미였다고 알게 되는 거라고. 지금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첫사랑은 나중에 보니까 그게 첫사랑인 거야. 더 쉽게 이야기해줄게. 엄마를 한 번 생각해봐. 떠오르는 엄마의 의미가 있지? 5살 나 혼내던 우리 엄마, 19살 수험생 뒷바라지하던 우리 엄마, 22살 군대 갔을 때 울었던 우리 엄마. 지금 네가 생각하는 엄마의 의미는 지금의 네가 예전의 기표를 관통하면서 생기는 거야. 과거 기억의 산물인 거지. 결국 모든 의미는 사후에 만들어질 수 밖에 없어. 라캉(Jacques Lacan) 형님이 『에크리(Ecrits)』(1966)에 그렸던 그래프를 그대로 그려볼게. 가로지르는 S는 이름이야, 이게 기표지. 이름은 그냥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런데 어떤 상징을 거치기 전의 주체 △가 기표를 관통해. 소급적으로 말이야. △가 기표 S를 관통하는 그 지점에서 의미가 발생해. △가 관통한 기표는 뭔가 달라져. 동일한 S인데, 의미가 만들어지고 다른 S'가 되어버리는 거야. 이 과정을 거쳐서 규정되지 않았던 주체 이전의 주체인 △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서 비로소 주체 S'가 되는 거지. 그런데 그 주체는 빗금이 쳐져 있어. 뭔가 결여된 주체라는 뜻이야. 빗금이 지워진 완벽한 주체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주체인 이상 결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결여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잃어 버려야 할 무언가야.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은 반드시 증상을 수반해. 그러니까 네 이름이 변변찮아서 너의 진짜 의미가 가려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오히려 네가 과거의 이름 S를 소급하면서, 지금의 너 때문에 멀쩡한 이름 S'가 후져지는 거야. 어떻게 이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불가능하지. 그건 주체의 조건이기 때문이야. 완벽한 주체는 애초부터 있을 수도 없어. 무엇인가를 결여해야 주체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냥 살아가라는 거야. 네 이름이 알렉산더 라인하르트 폰로엔그람 더 매그너스가 되어도 결국 넌 열등감 덩어리일 수밖에 없어.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축이라고 자기 이름이 다 완벽하게 마음에드는 줄 알어? 걔도 정신적으로 고민이 많아. 너랑은 좀 다른 문제이지만, 이제 유일하게 남은 길은 열등감을 너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거지. 다시 한 번 더 말해 줄게. 그냥 즐겨, 너의 열등감을. 그 징후를.1 각주1. 이 글과 관련한 상세한 이론적 분석과 참고 문헌들은 다음 글에서 참조하기 바란다. 김영민, “건축의 얼굴”, 『건축평단』 12호, 2017, pp.12~36. 김영민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며, 세종상징광장, 광화문광장, 파리공원 재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요 설계자로 참여했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번역했으며,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건축의 경계에서 조경을 묻다
    학부에서 건축을, 대학원에서 조경을 전공하고 건축 매체와 조경 매체 모두에서 일을 했다. 분야를 오고가다 보니 조경 매체에 있을 때는 건축 출신으로, 건축 매체에 다시 오니 조경 출신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양분야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으면서 동시에 타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환경과조경』에서 일하던 초기에 조금 의아했던 건 의외로 ‘조경가’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중 매체에서도 잘 쓰이지 않았다. 물론 건축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일간지 등의 대중 매체에서 건축전문가, 건축설계사 같은 단어를 쓰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경가 스스로도 조경가라 칭하는 것을 주저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건축인의 시선 회사의 동료들에게 ‘조경하면 떠오르는 것’에 대해 가볍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기자들은 ‘규모는 다양하겠지만, 식물을 다루는’ 또는 ‘기후 환경/친환경 등’ 시스템적 접근을 하는 업역이라고 답했다. 작게는 화분부터 마당/정원, 오픈스페이스, 공원, (대규모) 놀이터, 워터프런트 등의 작업이 떠오른다고 했다. 막내 기자는 건축학과 학생 때는 조경이 공원처럼 도시적 작업이라고 생각했으나, 요즘에는 ‘플랜테리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실내에서 식물이 많이 보여서 ‘그럼 저것도 조경에 속하는 걸까’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트렌드에 민감한 세대구나 싶으면서도, 학계와 업계의 괴리를 드러내는 현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자가 아닌 직원들은 (예상대로) 조경을 가드닝/식재 혹은 정원과 동일시 하는 편이었고, 조경가라는 단어를 낯설게 느끼기도 했다. 건축 전문지를 만들며 결국 자주 접하게 되는 조경은 건축물의 외부 공간이다. 종종 건축가들은 조경가가 화룡점정처럼 적재적소에 식재를 해 건축가가 의도한 혹은 의도치 않았던 장면을 완성하게 되는 데 감탄을 표하기도 한다. 혹은 새로 완공된 건축물의 사진 촬영 시점을 정할 때, 수목이 어느 정도 잎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데, 소위 ‘사진발’을 위 한 것이지만 건축의 완성의 의미 역시 조경이 부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건축가들에게 조경가의 콘셉트를 듣는 일은 흔하지 않다. 모두 잘 알다시피 조경은 건축물 시공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계획이 시작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조경가가 주도적으로 개념을 펼치기 쉽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건축물의 외부 공간까지 직접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도 있으니, 업역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인접 분야 전문가들 혹은 대중들이 조경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정도는 다르지만 인접 분야 모두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전적 의미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는 전제 하에, ‘건축(가)’, ‘조경(가)’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조경’의 사전적 의미는 “경치를 아름답게 꾸밈”(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이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말에 따르면 핵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전에 함께 제시된 용례 “이번에 새로 만든 공원은 조경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를 보면, 인식이 식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건축은 상황이 다른가? 국어사전은 ‘건축’을 “집이나 성, 다리 따위의 구조물을 그 목적에 따라 설계하여 흙이나 나무, 돌, 벽돌, 쇠 따위를 써서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건축가’는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 건축 계획, 건축 설계, 구조 계획, 공사 감리 따위의 일을 한다”고 정리하고 있다. 건축가들 역시 이 사전적 의미가 건축의 문화적 의미를 충분히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계와 시공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건축 자재비가 드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해도 설계비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건축 설계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것은 조경이나 건축이나 마찬가지로 겪는 일일 것이다. 얼마 전 『SPACE』가 진행한 도시 설계에 관한 좌담에서 한 참여자는 “(도시 설계에 관해) 관리형 지식 생산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좋게 보면 도시설계 외연의 확장이고 지식 생산자의 다변화다. 안 좋게 보자면 아무도 전통적 의미의 도시 설계를 하고 있지 않은데 모두가 도시 설계를 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다. 씁쓸한 양면성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쩐지 ‘누구나 조경(에 해당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한 건축가는 이러한 현상이 도시, 건축, 조경 등을 아우르는 산업 자체가 불안정한 탓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 영역을 정의하는 데 고심하는 만큼 산업 생태계를 바로 세우는 데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김정은은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 『건축인(POAR)』, 『SPACE(공간)』, 『건축리포트 와이드(WIDE AR)』, 『환경과조경(laK)』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SPACE』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건축과 도시,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 여기’의 건축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 김정은 / 2022년07월 / 411
  • [조경, 그 이름을 묻다] 조경이라는 이름의 학과 업의 이인삼각 경기
    영어의 랜드스케이프 플래닝(landscape planning)을 우리는 흔히 조경 계획으로 번역한다. 물론 경관 계획도 랜드스케이프 플래닝이라 한다. 랜드스케이프 플래닝의 독일어에 해당되는 란트샤프츠플라눙(landschaftsplanung)은 환경 생태 계획으로 번역한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조경학을 더 공부하려면 생태조경학과와 환경조경학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논문 검색을 해보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를 랜드스케이프 건축이라 칭하는 논문이 적지 않다. 랜드스케이프가 어원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녀서 생기는 불가피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경이 스스로 혼란을 자초한 면도 있어 보인다. 대학의 조경 관련 프로그램의 명칭과 그 커리큘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초반 조경 분야의 공분을 낳은 랜드스케이프 건축이라는 표현은 조경에 대한 몰이해에서 유발된 것인지 의도된 도발인지 혹은 대안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건축 분야조차 조경이라는 용어를 선뜻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중의 인식 속 조경과 전문 직능이나 학문 분과로서의 조경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조경계 안팎에서 제기되어온 문제다. 조경이라는 명칭이 주는 사회적 선입견이 조경 분야의 동향이나 지향점과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사소하게는 번역, 나아가 제도, 우리 사회의 변화, 조경 분야의 발전 같은 구조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조경가들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프로젝트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기존 학문이나 업역 분류의 관점에서 조경의 정체성을 단정하기 더욱 어려워진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올해는 한국 조경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조경학회는 지난 50년의 성과를 되짚고 다가올 미래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조경50 비전플랜선언’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몇 가지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살펴보면 조경이라는 명칭과 관련된 논의에 약간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경의 정의에 대해 묻자 ‘도시의 숨구멍을 만드는 것’, ‘자연 카페’, ‘힐링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는 일’, ‘내 삶의 배경’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조경 전문가들이 종합과학예술, 외부 환경 조성, 휴식처라고 말한 것과 비교했을 때 일반인들이 조경을 더 감성적이고 현대 도시에서 필수불가결한 분야로 인식한다고 해석된다. 조경의 미래에 관해서도 일반인(82%)과 학생(76%)이 조경 전문가(47%)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업계의 현실에 주목하기보다는 사회적 이슈와 변화 속에서 조경의 미래 가능성을 밝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현대 조경의 활동 영역은 크게 확장되고 있다. 많은 교육 영역이 조경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조경의 범용성과 가능성을 시사한다. 최근 신임 교수진을 중심으로 연구 주제가 세분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개별 연구실의 명칭 또한 상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관/학/연’, ‘계획, 설계, 시공, 관리’ 등의 전통적 접근보다는 벽면 녹화 시스템, 생태계 복원, 경관 및 조경 관리 등 사회적 필요에 맞춘 세분된 활동이 나타났다. 그러나 의사 결정이나 정책 수립 과정에 조경의 정체성이나 전문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녹색 인프라 등 대규모 사업에 대한 시대적 필요성은 높으나 실행 사업으로 연계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제기됐다. 담론보다는 현장에 집중하는 활동이 더욱 필요하며, 세분된 조경 영역과 산업을 통합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됐다. 미래에는 자연 재해 및 재난에 대응하기 위한 회복탄력성 전략 수립에서 조경의 역할과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 탄소 중립, 도시민의 보건과 안전, 코로나19로 인한 문명 위기와 같은 시대적 아젠다를 조경에 통합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조경은 환경, 사회, 경제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시스템 구축과 함께 윤리, 공정, 평등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이유직은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다. 농촌 조경과 지역 개발의 현장에서 활동하며, 국가중요농업유산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한국조경학회 비전플랜위원장으로 ‘한국조경50 비전플랜선언’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