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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로 또 같이] 조경이상 따로 또 같이,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다
    1 처음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2016년 여름 조경디자인캠프 뒤풀이 자리였다. 스튜디오 튜터들이 모여 설계를 하면서 느꼈던 문제를 토로하다 우리끼리의 불만 제기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일을 기획해 보자고 했던 게 발단이었다. 그해 겨울 우연한 기회에 다시 모였고, 관심이 있을 만한 주변의 젊은 조경가들에게도 연락하여 첫 모임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지향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감대는 있었다. 지금이 위기의 상황이라는 불안감과 지금보다 더 나은 조경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공감대의 근저에 있었다. 조경의 위기의식과 불안감은 굳이 젊은 조경가들만의 것은 아니며 새로운 것도 아니다. 조경은 늘 위기였고 가장 호황일 때조차도 불안해했다. 불안감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으로 변이되었다. 그리고 불만과 자부심이 결합되었을 때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기보다 우리의 힘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고 바꾸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이 생겨났다. 소명 의식은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에 대한 욕구와 맞닿아 있었다. 다만 그 욕구는 배타적인 이익 집단을 만들기 위한 실천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 이 그룹은 일종의 인적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그 자체의 목표와 의지를 설정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목표와 의지가 발현되고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플랫폼의 역할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공동의 의지는 존재하나 하나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그룹을 통해서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다양성의 공존을 구축하고자 한다. 내부적으로 서로의 공감대를 찾고 함께 할 일을 만들어나가면서도 서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고자 한다. 다양한 생각과 지식을 공유하지만, 이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더욱 명확히 하려고 한다. 우리가 진단한 조경의 위기의 근본 원인은 다름의 부재에 있고, 더 나은 조경에 대한 해답 역시 차별화된 다양성의 구축에 있다고 믿고 있다. ‘조경이상’이라는 이름에도 다양성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국어사전에서 이상의 뜻을 찾아보면 열여섯 가지의 의미가 있다. 어떠한 이상의 의미를 선택하느냐보다는 그 어떤 의미를 선택해도 된다는 점이 조경이상이라는 이름에 담긴 기본적인 가치이자 태도다. 이상적 조경을 만들어나가려 하는 이들, 조경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 조경 같지 않은 이상한 조경이 좋다고 하는 이들, 저마다 다른 이상을 지닌 이들이 같은 꿈을 꾸게 하는 빈 그릇 같은 것, 그것이 조경이상이다....(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따로 또 같이] 팀 동산바치 따로 또 같이,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다
    1 (2018년 식목일, 학생점자도서관에서 다 같이 호미를 들고 있다.) 최영준(이하 최) 그러고 보니 이 동네였죠? 3년 전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YAP의 대상지를 보고 걸어서 국숫집에 들어갔던 게. 김지환(이하 김) 그러네요. 오늘처럼 비가 오려는 날씨였는데. 안기수(이하 안) 카톡 전화만 엄청나게 하다가 처음 만났었지. 최 도면 놓고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에 대한 이야기도 했지만, 우리의 조경 토크가 국수 면발만큼이나 길게 길게 이어졌죠. 김 사실 우리가 참 다른 사람들인데 말이나 톡이 끊이지가 않았어요. 안 다르니까 서로에게 배울 점이 있었겠지. 내가 시공이야기하면 너희 둘이 재미있었을 거고, 지환이가 하는 정원 설계는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고, 지환이는 영준이가 미국 일, 중국 일 하는 게 재밌었을 거고. 최 그러게요. 우리가 비교적 좁은 조경 테두리 안에서 서로 큰 교차 없이 지내오다가 ‘지붕감각’(2015 YAP,『 환경과조경』 2015년 8월호, pp.142~143 참조)을 접점으로 삼아 여기까지 왔네요. 김 제가 몸담았던 회사의 시공을 안 팀장님이 계속 맡아주셨고, 영준 형과는 나름대로 국제적인 합사를 했었는데, 결국 ‘지붕감각’ 덕에 여기까지! 안 SoA(2015 YAP 당선팀)의 이치훈 소장님과 스튜디오 엘의 이대영 소장님은 명예 멤버쯤 되는 거네. 최 하하, 그렇습니다. 근데 이제 남은 맥문동은 어디에 더 심을까요? 김 기수 형이 더 던져주시죠. 안 그래, 조오기가 좀 비어 있네. 으차. 2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섬분꽃나무를 심으려 한다.) 김 안 형이 무릎이 좋지 않으니 제가 일단 돌을 옮기고 분을 빼볼게요. 이 정도는 형에게 많이 배워서 이제 후딱 합니다. 최 솜씨가 프로네요. 김 사실 사무실에만 앉아 있었다면 이런 거 전혀 몰랐을 거예요. 안 팀장님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죠. 최 맞아요. 우리는 각자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려왔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궤적, 서로의 매력과 마력의 힘! 김 맞아요. 특히 안 팀장님은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멘토 역할을 잘해주셔서, 설계할 때 시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셨죠. 최 안 팀장님의 전문 지식과 친절한 해설이 우리의 목마름에 얼마나 큰 해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안 내가 촉매제가 되었다면 기쁘지. 그런데 너희 둘도 다른 환경에서 다른 전문 지식, 내공을 쌓아 와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보기 좋다. 최 소장은 한국 일 할 때 김 소장에게 한국의 실정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고, 김 소장도 설계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긴 것 같아 좋아 보여. 최 정말 저는 김 소장님 없이는 한국에서 아무 일도 못했을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제반 지식뿐만 아니라 냉철한 판단을 듣고 의논하며 좋은 조경 시스템을 많이 구상할 수 있게 되어서 더 좋아요. 김 제가 조경의 문화를 바꾸고자 만든 조경작업장 라디오LADIO의 비전이 거기에 있습니다. 안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좋은 선례가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겠지. 최 믿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30도만 틀어볼까요?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따로 또 같이] 하루.순 따로 또 같이,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다
    1 ‘하루.순’의 구성원들 간에는 이미 친분이 있었고, 공동 연구나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해 왔다. 예술과 도시, 역사와 건축, 공원/정원/식물 문화, 도시재생 등의 키워드로 요약되는 공동의 관심사를 실제의 장소에서 구현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 새로운 형태의 문화로서 도시 정원, 유연한 통합과 연대를 실험해 보고자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온실과 문화실험실 운영을 계획하면서 우리와 장소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명칭도 거듭 고민했다. 온실의 명칭인 ‘하루’는 한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이 포함된 24시간을 뜻하는 우리말이며, 또한 같은 소리의 일본어에는 ‘봄(春)’ 또는 ‘뻗어나가다(張る)’라는 뜻이 있다. ‘하루’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이러한 의미가 온실에 어울린다고 보았다. 문화실험실 ‘순’은 새싹筍이라는 뜻과 가까운 미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soon’으로부터 나왔다. 우리 그룹의 이름 ‘하루.순’은 이 두 장소에서의 실험과 우리 연대가 추구하는 바를 담고 있다. 2 역설적이게도 각기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분야가 다르기에 함께 할 수 있다.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해야 할까. 하루.순의 현 구성원은 모두 같은 대학원의 박사 과정 출신이다. 지도교수는 서로 다르지만, 한 연구실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421호 연구실 티타임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협업으로 왔다. 인생에서 가장 짙은 시기를 함께 보내며 친분을 쌓았고, 각자의 전문 분야와 성향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협업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 마리나 원 Marina One
    마리나 원(Marina one)은 마리나 베이(Marina Bay) 금융 지구에 위치한 혁신적이고 지속가능한 고밀도 고층 건물로, 정원 속 도시(City within a Garden)를 꿈꾸는 싱가포르에 부합하는 공간이다. 중앙 뜰과 네 개 타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대대적인 식재 경관은 건물의 구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네 개 타워의 외벽이 격자형의 도시에 착안해 만들어졌다면, 내부는 수목과 식물이 울창하게 자라는 정원을 수용한다. 내부의 중앙에 위치한 녹색 심장(Green Heart)은 조각조각 나뉜 건물과 식재 요소를 통합한다. 이곳은 마리나 베이 지구의 가장 큰 공공 경관 지역으로 계획되었는데, 다양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지상층에 위치한 네 개 입구를 통해 중앙 뜰에 들어설 수 있으며, 커다란 반사못의 수면에는 하늘이 담기고 3층 높이의 폭포가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Gustafson Porter + Bowman Local Collaborating Landscape Architect ICN Design International Architect Ingenhoven Architects Local Collaborating Architect Architects 61 Engineer BECA Carter Hollings & Ferner Façade Consultant ARUP Lighting Consultant ARUP Residential Interior Designer Axis ID Main Contractor joint venture company owned 60:40 by Hyundai Piling Contractor Sambo E&C Client M+S Pte Ltd. Singapore, a company owned by Khazanah and Temasek Location Maxwell Rd, Singapore Gross Floor Area 341,000m2 Ground Level Landscape Area 3,700m2 Year 2011~2018 Completion 2018 Photographs Gustafson Porter + Bowman, HG Esch 구스타프슨 포터 + 보맨(Gustafson Porter + Bowman)은 혁신적이며 현대적인 조경 설계를 실천하는 설계사무소로 장소의 본질을 물리적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경, 건축, 엔지니어링,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외부 컨설턴트를 설계팀에 포함시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의 다이애나 기념 분수, 베이루트의 제이토네 광장, 암스테르담의 퀼튀르파르크 베스테르하스파브릭(Cultuurpark Westergasfabriek), 웨일스 국립식물원의 글래스하우스(Great Glasshouse) 등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
    • Gustafson Porter + Bowman / Gustafson Porter + Bowman / 2018년05월 / 361
  • 비슬라 블러바드 Vistula Boulevard
    바르샤바(Warszawa)의 비슬라 블러바드(Vistula Boulevard)는 역사적 공간과 새로운 도심지를 잇는 장소다. 인근의 관광지를 고려해 다양한 용도의 여가 공간을 조성했으며, 이는 강물을 도시 자원으로 누리게 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기능을 연결한다. RS 아르히텍투라 크라요브라주(RS Architektura Krajobrazu)는 단절된 비슬라 강(Vistula River)의 맥락을 복원하고자 했다. 우선 독창적이며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조성하고, 이 공간을 원활히 오갈 수 있게 해 일관된 도시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또한 일 년 내내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즐길 수 있는 여가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지역 커뮤니티를 설계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비슬라 블러바드는 바르샤바 시가 개최한 설계공모의 결과물이다. 길이가 2km에 달하는 대로는 직선형의 보행로와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포비실레(Powi le)와 포잠체(Podzamcze) 사이의 공간과 통합적으로 설계되었다. 보행로의 선형은 수변에 조성된 자전거 도로와 나무, 파빌리온 등의 수직적 요소를 강조하는데, 이로 인해 동선과 대상지의 용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 Site Plan Designer RS Architektura Krajobrazu Architect Artchitecture Client The Capital City of Warsaws Location Warsaw, Poland Area 8.7ha Year 2013~2015(stage 1), 2016~2017(stage 2) Completion 2017 Photographs RS Architektura Krajobrazu, UM Warszawa RS 아르히텍투라 크라요브라주(RS Architektura Krajobrazu)는 주택 단지, 오피스 빌딩, 스포츠 경기장, 공원, 인프라스트럭처 등 대규모경관을 다루는 설계사무소다. 폴란드에 자리한 이 사무소의 전문 분야는 옥상 녹화 기술 등을 활용해 건물 내외부를 녹지와 통합된 공간으로만드는 것이다. 폴란드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에서 경험을 쌓은 조경 팀을 꾸리고 있으며, 199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조경 분야에 뛰어들어 다양한 조경 회사, 조경수 회사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자연 경관, 인간이 만들어낸 경관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진행하며, 틀에 박힌 일과 반복되는 일상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 힘쓰고 있다.
    • RS Architektura Krajobrazu / RS Architektura Krajobrazu / 2018년05월 / 361
  • [이미지 스케이프] 벚꽃 편지지
    비 오는 날 가장 운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여러분은 어디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저라면 자동차 앞 좌석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듣는 음악은 정말 운치 있지요. 음악이 더해진 비 오는 창밖 풍경은 한 편의 영화가 됩니다. 특히 앞자리는 창에 맺힌 빗방울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입니다. 가끔 윈도 브러시를 작동시키면 하늘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고 새 그림을 그리는 느낌도 듭니다. 비 올 때 한 번쯤 여유를 갖고(이게 중요한 포인트!) 시도해 보시길. 작년 이맘때쯤, 비 오는 봄날이었습니다. 차를 세워둔 연구실 뒤편 길에는 벚꽃이 한창이었는데, 낮 동안 내린 봄비로 꽃잎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덕분에 차는 꽃잎으로 단장을 한 상태였죠. 아주 예뻤습니다. 앞자리에 앉으니 하늘을 배경으로 한 꽃잎들이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주신하[email protected] /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 / 2018년05월 / 361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종이 작업
    설계를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설계하는 법’에 대한 원고 의뢰를 받은 후의 중압감은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2015년 10월, 단 사흘간의 고민을 통해 설계사무실을 열 때의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라는 사람의 설계 철학은 무엇인지 무한 갈증을 느끼며 잘 다니던 회사를 무작정 퇴사했다.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나의 설계 철학은 무엇일까? 이번 원고의 주제는 다행히 ‘설계하는 법’이기에 그나마 무게를 덜고 나의 설계 방법을 써 내려가 보기로 한다. 2003년 여름, 신입 인턴사원으로 설계사무소 생활을 시작했을 때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으랴. 무작정 주위를 살피며 배워볼 만한 건 무엇이든 배우려 하던 시절이었다. 일반적인 설계사무실의 구조가 그러하듯 사무실 전체가 드로잉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있었고 나 또한 드로잉을 잘해보려는 욕심으로 가득했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다. “드로잉을 잘해야 조경을 잘한다. 디자인을 잘해야 조경을 잘한다. 실시 설계를 잘해야 조경을 잘한다. 계획안을 잘 잡아야 조경을 잘한다. 나무를 많이 알아야 조경을 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시절, 조경 설계에 무식하게 접근하던 내 모습을 지금은 잊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잘한다’ 시리즈가 지금의 기초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종이 작업’은 아름답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 한해서지만. 드로잉 도구를 이용한 감각적 표현과 멋과 기교를 낼 줄 아는 이의 무한한 펜 스킬은 많은 이에게 종이 작업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나 또한 손 드로잉을 통해 디자인을 하고 공간을 구성하지만, 설계를 시작하고 10년간은 어떻게든 드로잉을 잘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프로젝트에서 종이 작업 공부를 한 셈이다. 종이 작업의 절대 강자 드로잉은 설계 작업의 가장 화려한 방법으로 인식되며 국내 조경 설계의 가장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드로잉은 내게 지루함의 연 속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인가 사이트 베이스 맵 위 에 옐로 페이퍼를 깔고 드로잉을 하는 멋진 조경가의 이상이 즐겁지 않고 반복적인 일상의 연속이 되어버린 바로 그때,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드로잉만 을 통한 설계 방법은 일면 원시적인 방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보고 배운 게 그뿐인지라 조경 설계에 입 문한 후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여 있던 것이다. 종이와 펜을 잡고 있던 나는 내 종이 작업의 한계를 보고 말았다. 프로젝트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른바 아파트 조경 설계가 저급한 설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내 손을 거쳐 간 아파트 프로 젝트의 숫자만 건설기술인 경력 증명에 10쪽 넘게 기 재되어 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10여 년의 종이 작업 의 한계를 보았을 때, 또 맡겨진 아파트 프로젝트. 하지 만 그때는 조금 달라졌다. “저 이번 아파트 프로젝트에 는 일주일에 한 번 현장에 나가 볼게요.” 에버랜드 디자 인 그룹의 책임 디자이너 시절, 좋아하는 파트 장에게 나지막이 드린 나의 소망 섞인 통보였다. 허락을 구하 는 듯했지만 실은 통보였다. 현장에 나가고 싶었기에.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이해함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이 해관계와 맞물린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다시 생 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설계가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 인가? 이 모든 이해관계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설계를 하고 있는가? 소나무의 얼굴 방향이라도 알고 설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말하기는 쉬운 공간감은 느끼며 설 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현장 소장의 애로 사항이 무 엇인지 인식하며 설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식재 소재 의 국내 시장 수급 현황을 파악하며 설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건설사 대표 소장의 안목과 성향을 파악하고 설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현장 작업 반장의 고착된 식재 방식을 알고 설계를 하고 있는 것인가? 책상을 버린 것, 잘한 일이었다. 그 현장에서만 6개월 간 많은 이견과 충돌이 있었다. 종이 작업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즐거움도 있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주변에 많은 사람이 생겼다. 독창적 디자인은 개인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디자인의 완성인 목적물은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목적물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설계와 시공이 분리 발주되는 국내 건설 현장의 프로 젝트 진행 방식에서 발생하는 현장 소장의 다양한 설 계 변경 요구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며, 여 우처럼 영악하게 행동해야 했다. 내가 설계한 현장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들어 가 현장을 조율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이해관 계가 엉킨 실타래를 풀 해법을 찾았다. 나의 디자인에 부합하도록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나의 설계가 보였다. 종이 작업, 필요한 만큼의 생각만 정리할 수 있으면 된다. 각자의 방식에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하 겠지만, 설계 행위는 결국 물리적 재료와 환경을 활용 해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행하는 과정의 일부에 지 나지 않는 것 아닌가. 디자이너라는 호칭에서 오는 자 만심을 버려야 한다. 종이 작업 중심의 표현을 위해 디 자이너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건이 주어지지 않아 그렇지 못한 프로젝트가 비일비재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핑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책상에 앉아 유려한 디자인 선형을 뽑아내며 행복해 하고 실현되지 못할 다양한 개념과 설계 전략을 채우며 만들어내는 종이 작업에서 지금도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받고 있는 점,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종이 작업에 한정된 디자이너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앞서, 전체 프로젝트의 목적물 완성을 위한 철저한 목적 의 식과 이를 아우르는 유연한 사고를 통해 해법을 찾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설계가의 역할을 확장했으면 한다. 국내 설계 업계에 많은 어려운 점이 있는 것,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나 또한 종이 작업에서 끝이 나는 현실 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항상 도전하며 기회를 찾고자 한다. 디자인(행위의 기교)하지 않는 디자인(사고의 산물) 추측하건대, 국내 조경 설계 시장의 90% 이상은 건축 부문의 협력사로 진행되는 건축 외부 공간 조경 설계 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몇 개의 설계사무소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70~1980년대 부터 주로 진행되어 온 조경 설계에서 평면 드로잉은 의사 결정의 절대 강자였다고 본다. 2015년 10월, 급 히 설계사무실을 개소하며 처음 맞닥뜨린 건축 설계공 모 프로젝트에서 잊고 지내던 국내 조경 설계의 현실 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패턴 좀 그려주세요.” 포장 패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 만한 요구 사항이다. 자존심이 상한다. 마음이 아프다. 속이 상한다. 화가 난다. 무수히 많은 프로젝트 중 가장 밑바닥 조경 설계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10여 년의 종이 작업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매니 저의 시각에서 설계를 하던 나의 모습에서 하루아침 에 조경 패턴을 그리는 사람으로 변해버린 잊지 못할 사건이다. 잊지 않으리라 지금도 생각하며, 그 건축사 사무소와는 결별했다. 아니, 결별을 당했다. 그들이 말하는 조경 패턴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건축 설계공모에서 무수히 많이 보이는, 건축 물을 중심으로 한 큰 흐름이 보이는 선형 패턴 작업. 나도 예전에 했으며 지금도 다들 많이 하는 그 디자 인.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계획안을 잡지 않 았다. 아니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약간의 강렬한 펜 스킬을 이용한 ‘행위의 기교’를 보여주었다. 계획안을 보낸 지 10분 정도 지나 실무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장님, 보내주신 계획안 잘 봤습니다. 그런데 약간 흐름이 보였으면 합니다. 중심에서 뭔가 잡아주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패턴 있잖아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200%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3일 동안 협의가 진척되지 않았다. 그 일은 버리는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다소 반항적인 드로잉을 끝으로 경험적 사고와 현실적 해법 설계 표현의 중요한 방법인 드로잉이 기교가 되어 조 경 패턴으로 인식되고, 그런 인식을 가진 협력사(또는 발 주처)의 의사가 국내 조경 설계 시장을 오래 전부터 무 너뜨리고 있었다. 조경 설계의 내공이 성장도 하기 전 에 조경 설계란 고작 패턴 만들기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모두 그렇지만은 않을 테지만, 아주 많은 경우 외 부의 인식이 그렇게 고정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되짚어 볼 필요도 있다. 우리가 먼저였다. 예전 의 나도 그랬고, 다른 많은 이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멋스럽게 드로잉을 하고 행위의 기교를 부리며 디자인 을 하는 것이 조경 설계의 전부인 것처럼. 설계사무실을 운영하며 프로젝트를 선별해 수주하기란 매우 어렵다. 처음 사무실을 열며 다짐했던 많은 생각이 무너지며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며 다듬어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주요 프로젝트인 경우에는 다양한 접근을 위해 창의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를 바탕으로 임하고 있다. 10년 동안의 시공사 디자인 그룹 재직 경험이 지금 설계의 근간을 만들고 있다. 국내의 어느 설계 조직에서 디자인 제안 후 5~6개월 이내에 준공하는 모습을 1년에 대여섯 번 경험하며, 시공하는 동안의 현장 지원과 조율을 경험할 수 있을 까 싶다. 이번 원고를 쓰며 확인해보니 다양한 프로젝 트에서 디자인 제안부터 실시 설계, 그리고 현장 지원 과 조율까지 경험했다. 설계의 전체 프로세스를 진행 하며 얻은 경험적 사고를 통해 습득한 현실적 해법은 기본적인 창의적 사고와 함께 설계를 해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사고와 해법을 찾기 위해 개념적 의미는 배제한다. 쉽게 말해 말장난은 하지 않으려 한다. 전략적 사고로 도출되는 언어가 아닌,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한 표현은 지향한다. 과거의 내가 드로잉과 종이 작업에 미쳐 있었다면, 요즘 설계가들은 언어적 유희를 통해 만들어낼 수 없는 대상의 개념을 표현하려고 하 는 것 같다. 어떠한 행위의 기교가 아닌 목적 대상이 있는 사고의 산물로서 디자인을 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 예장 행위의 기교에서 벗어나 목적 대상의 본질에 대해 생각 했다. 남산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애국가에 등장하는 서울의 남산은 서울의 앞산이며 안산(案山)이기도 하다. 비슷한 성격의 사업을 장충과 회현에서 진행했으며, 예장(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 설계공모)은 마지막 남은 남산 자락의 재생 사업이었다. 앞서 진행된 회현이나 장충과 달리 복합 기능을 담는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했다. 이 점이 남산 자락 재생의 근본 목적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었는데, 약 7,000평의 사이트는 곤돌라 스테이션과 버스 주차장의 기능을 수행하며 동시에 남산 재생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이후 2016년에 곤돌라 스테이션은 취소되었다). 이율배반이다. 하지만 설계는 항상 문제와 함께 시작한다. 이를 해결하는 자가 설계가다. 시작부터 가지고 있는 문제, 그리고 프로젝트가 진행 되며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와 이견 속에서 설계가는 본래의 목적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다. 그림이 필요하면 그려야 하고, 대화가 필요하면 대화해야 하고, 설계가의 자존심이 걸림돌이 된다면 가차 없이 버릴 줄 알아야 하며, 현실과 타협해 야 한다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선 충분히 타협해야 한다. 숲이다. 디자이너의 얄팍한 기교와 과장은 사전에 차단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숲으로 만들어라. 무엇을 행하려고 하는 이들의 욕망을 잠재워야 한다. 그것이 1,000만 시민의 숲을 대하는 설계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2년 4개월, 고된 시간이었다. 아니 비루한 싸움이었다. 프로세스의 각 단계를 넘기며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공모부터 설계 준공까지, 그리고 예정된 설계 변경까지, 프로젝트 PM을 직접 수행했다. 건축사사무소의 협력사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기에 저작권을 가지고 오지도 못하지만 그만큼 나에게는 애절한 프로젝트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다. 철거와 터파기는 6개월 전에 완료됐으며, 예전과는 달 리 이제 나의 역할과 권한이 제한되어 있다. 설계 준 공과 동시에 현장 설계 변경에 대한 조율 권한이 없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시공 중에 현장 설계 변 경을 할 수 있는 사항이 어떤 것이 있을 것이며, 변경 사항이 예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설계의 근본 목적을 훼손할 것인지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행했다. 이제 내일이면 최종 납품이다. 2년 4개월의 기나긴 여정이 일단락되는 순간이기 도 하며, 새로운 시작이 전개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원고를 쓰며 잠시 컴퓨터의 프로젝트 폴더들 제목에 담긴 지난 시간의 애환을 떠올려 본다. 다양한 나의 모 습이 스쳐 지나간다. 거만한 아티스트, 프로페셔널 엔지니어, 속없이 비비적대는 설계가, 수다쟁이 동네 남 동생, 고집불통 협상가, 나무 찾아 헤매는 산사람, 세 속에 물든 사업가, 피곤에 찌든 설계쟁이, 이 모두가 나의 모습들이었다. 예장을 설계하며 본래의 목적을 지켜내기 위한 나의 모습들이었다. 그게 바로 이번 호 원고에서 보여줄 수 있는 나의 설계 방법이 아닌가 싶다. 김호윤은 기술사사무소 아텍과 삼성에버랜드 디자인 그룹에서 조경가로서 영업, 설계, 공사의 관계를 조율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는 조경설계 호원(Landscape Design Office HOWON)을 설립·운영하고 있으며, 바른 설계 집단을 구성하고자 기본을 중시한 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박길종 길종상가 관리인 미술이 만드는 도시
    도시에 대한 지배적 인상은 대개 사람의 눈높이 근처에서 만들어진다. 작은 화분 하나, 닳은 문고리 한 짝, 계단 난간의 유려한 선이나 담뱃재를 떠는 휴지통 모양의 영리함에서, 혹은 미술관 리플릿이 놓인 책장이나 쉼터의 벤치, 동네 술집의 아담한 간판에서 우리는 한 도시의 시민들이 공동으로 성취해 낸 문화적 수준을 느낀다. 거대한 건축물이나 도로는 세계화된 자본과 권력의 의지를 통해 단시일내에도 이식될 수 있지만, 전능한 자본의 물결도 습관의 층과 결이 배어든 수천수만 가지의 일상적 오브제까지 적실 수는 없다. 어느 나라의 고속 전철도 속도는 비슷할지 몰라도 객실 의자의 팔걸이와 테이블의 부드러움, 쿠션의 지지력에는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작가와 장인들이 쌓아온 노력의 세월, 실력의 민낯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디테일, 그리고 딱 그만큼의 사회적 눈높이가 쌓여 물건은 기쁨의 대상이 되고,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사랑스런 경관이 된다. 우리는 어떤 문제든 돈으로 사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너무 쉽게 버리고 갈아치우는 시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한다는 광고성 문구가 이상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부엌은 셰프의 주방이 되어야 하고, 침실은 특급 호텔 같아야 하고, 거실은 쇼룸이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수많은 디자인 매체가 부추긴다. 인테리어 데코 상품을 파는 사람은 스스로를 라이프스타일 디렉터라 칭한다. 남이 정의해 준 멋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라 착각하며 물건에 치여, 스타일에 치여 사느라 다들 피곤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습관적인 고급 지향, 틀에 박힌 데코, 현실과 불일치한 책상머리의 허세가 거리를 꽉꽉 채워진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있다는 개탄이 적지 않다. 잘 만든 하나보다는 형편없는 다량이 비좁게 들어찬 도시. 이제, 기름기 걷어내는 도시의 재편이 절실하다. 소박하고 영리하며 지적인 길과 광장. 현명한 사람이 꾸민 집처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인정하는 디자인.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가구 디자이너 박길종이 어떤 잡지에서 툭 뱉은 한마디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사용하는 게 있으니까, 새로 만들 필요도 없구요.” 물건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물건을 자기 삶의 기준에 맞게 만들 수 있는 흔치 않은 디자이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집 또한, 인테리어가 없는, 그냥 ‘집’이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최이규[email protected] / 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 2018년05월 / 361
  • [정원 탐독] 자연과 함께 디자인하기
    인간 대 식물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과실수는 인간과 가장 오래, 깊게 인연을 맺고 사는 지구의 생명체다. 특히 사과나무는 그리스·로마의 신화는 물론이고 여러 종교의 성경에도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인류의 문명과 인연이 깊다. 현재 사과는 재배종이 7천여 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데 여러 ‘품종’으로 불리는 이 다양한 사과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 식물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자생종과는 다르다. 한때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은 최대 사과 재배지였다. 그 흔적이 아직 가로수에도 남아 있지만, 도시 뉴욕의 상징이 사과라는 것도 이를 잘 증명한다. 지금도 사과는 좀 더 크고 단맛이 강화되도록 끊임없이 재배종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 자연에서 생존했던 야생의 사과는 잊혀졌다. 지나친 유전적 변형이 일어난 품종 사과나무가 급속히 자생력을 잃어가고 단맛의 증폭이 다른 영양분의 결핍을 일으키는 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품종 사과의 어머니격인 야생 사과는 카자흐스탄 인근의 중앙 유럽 산악 지대에서 자라는 ‘말루스 푸밀라(Malus pumila)’로 최근 밝혀졌다. 물론 이 야생 사과의 특징은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사과 품종들과는 매우 다르다. 열매도 작을뿐더러 그 맛도 시고 떫어서 지금의 사과 맛이 아니다. 먹기에 적당하지 않지만 이 야생 사과는 재배종 사과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고 사과 고유의 특징을 다시 복원하는 데 꼭 있어야 할, 생물학적으로 귀한 식물이다. 사과나무뿐만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인류와 식물은 그야말로 동고동락해 왔다. 애증과 공생의 고리가 아주 깊고 복잡하다. 인간은 식물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식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지만, 식물 입장에서도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구 전체에 지금과 같이 번식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인간만큼 식물을 파괴하는 생명체도 없지만 인간만큼 식물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생명체도 없는, 서로에게 참 묘하고 복잡한 공생 관계다. 사과나무에 얽힌 자생종과 재배종의 문제가 최근에는 정원에서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오경아[email protected] / 오경아가든디자인연구소 대표 / 2018년05월 / 361
  • [시네마 스케이프] 쓰리 빌보드 강렬하고 품위 있는 추모 공간
    전투복을 입은 주인공과 “죽은 딸을 위해 세상에 맞서는 엄마”라는 카피를 보고, 폭력과 차별에 맞서 장쾌하게 복수하는 영화를 상상했다. ‘쓰리 빌보드’는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영화다.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절대적인 영웅도 없다. 주인공인 엄마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다. 누구보다 싸움도, 욕도 더 잘한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매번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고, 관객의 예상도 번번이 빗나간다. 폭력과 분노가 충돌해서 빚어낸 결과로 남는 것은 고요와 숭고함이다. 누구하나 우아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는데 희한하게도 품격이 느껴진다. 한편의 블랙 코미디가 끝날 때쯤 기어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뜨거움의 정체가 궁금하다. 인종 차별, 젠더, 가족주의, 그 어떤 장르로도 묶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영화다. 주인공의 추모 공간과 그 추모 방식이 낳은 영향에 주목해 보자. 영화의 첫 장면, 안개 낀 한적한 도로변 들판에 서 있는 세 개의 낡은 대형 광고판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앞으로 초래할 사건과는 달리 아름답고 시적인 풍경이다. 여기저기 찢겨진 채 방치된 광고판은 1980년대 이후로 그 기능이 멎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광고 회사를 찾아가 계약금을 걸고 광고를 의뢰한다. “내 딸이 죽었다”,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건가? 웰러비 서장”, 몇 개의 단어로 광고판을 차례로 채운다. 경찰서장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공권력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이 대담한 광고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방송에도 보도된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모처럼 좋은 영화가 많은 계절이다. 어제 본 영화를 오늘 본 영화가 덮어쓰고, 오늘 본 영화는 내일 또 어떤 영화로 묻힐지 모르겠다. ‘쓰리 빌보드’는 이달에 오늘까지 본 영화 중 최고다. 잠시 멈춰서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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