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가(年歌), 시계를 되돌리다’ 展 개최
600년 역사를 통해 살펴보는 ‘광화문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광화문 광장의 600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광화문 연가(年歌), 시계를 되돌리다’ 展을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고 있다. 지난 7월 30일 개막을 시작으로 9월 2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광장조성을 계기로 광화문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시계를 되돌려 광화문의 역사와 문화, 국가와 시민의 밀고 당김,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되돌아 보는 ‘세월의 노래(年歌)’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광화문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구성 및 주요작품
전시는 도입부, 5개 존의 본 전시,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는 시대 흐름을 연결시켜주는 이미지 연표, 각 시대 광화문 일대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는 모형과 항공사진, 그리고 사진, 영상, 실물 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 _ ‘시간역전’에서는 광화문 발굴 지층 이미지를 통해 광화문에 쌓인 600년 세월의 두께를 보여준다.
1존 _ ‘조선의 주작대로’ 육조거리를 거닐다대형 모형을 통해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양정도와 육조거리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2존 _ 광화문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우뚝서니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 1914년 육조거리에는 ‘광화문통’이라는 낯선 이름이 붙었다. 나아가 그 자리에 식민통치의 최초기관이 들어서고 ‘광화문’마저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 앉자 500년 왕도정치를 실현하던 ‘육조거리’는 조선 사람들을 식민통치 하기 위한 ‘광화문통’이 되고 말았다. 2존에서는 대형 모형을 통해 일제강점기 훼손되고 왜곡된 광화문 풍경을 보여주고, 일제식민정부가 그들의 통치를 선전하고 홍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3존 _ 전쟁과 혁명…“광화문으로, 광화문으로”36년 만에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좌우이념의 대립으로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선포되었으며, 1948년에는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경성부는 서울시로, 광화문통은 세종로로 다시 태어났다. 3존에서는 이 과정에서 광화문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힘겨루기 장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역사의 중심무대로서 광화문의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4존 _ ‘화려’와 ‘남루’ 사이에서4ㆍ19 혁명으로 막을 내릴듯 하던 독재와 권위주의는 5ㆍ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그 뒤 다시 20여 년 동안 지속됐다. 4존에서는 콘크리트 광화문 복원, 이순신 장군 동상 설치, 세종문화회관 건립 등 경관 변화,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공론의 장으로서 광화문, 그리고 사직골 대머리집 외상장부와 이를 재현한 영상 등이 전시된다.
5존 _ 광화문의 주인은 누구인가88올림픽 이후 조선총독부 철거, 지구의 날, 밀레니엄2000, 월드컵 응원, 촛불시위 등‘국가의 공간’에서 점차 ‘시민의 광장’으로 전이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을 살펴보며, 새로 조성되는 광장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드넓은‘광장’이 되기를 바라본다.
에필로그 _ 광화문 정경(情景), 우리 삶의 기억월간 포토넷(www.mphotonet.com)에서 기획한 사진 전시회다. 1940~1970년대까지 광화문의 모습을 촬영한 현일영, 이형록, 한영수, 한정식, 주명덕, 전민조 등 6명의 사진작가가 본 광화문의 정다운 풍경들을 전시한다.
이수학, 아뜰리에 나무(Lee, Soo Hag․Landscape Architecture Atelier Namoo)
인문학적 풍경 01, 이국의 땅에서
시인 정끝별이 이야기했듯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국의 땅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이란 생소한 학문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써내려간 그녀의 네 번째 시집인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2005) 말미에는 "고고학적 상상력과 시"(성민엽)라는 제목의 해설이 붙어 있다. 문학을 위해 고고학을 공부했다던 그녀는 이제 다시 문학의 자리로 돌아온 듯하지만, 몸은 아직도 이국의 땅을 딛고 있다. 어떤 인터뷰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의 형식을 택하는 것"이라며 "삶을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 가운데 시야말로 가장 강력한 형식"이라고 말했던 그녀의 글에는 적지 않은 울림이 있었고, 때론 결연함이 때론 처연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의 『초벌그림을 그리다』(도서출판 조경, 2006)에 실려있는 “고고학적 풍경 02”란 타이틀이 붙어 있던 ‘전곡선사박물관 국제현상설계’ 출품작을 들여다보며 허수경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터뷰 중에도 허수경이 먼저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녀가 배운 고고학에 대해, 고고학적 상상력에 대해서 언급하자 그제서야 고고학적 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터뷰 때 나눈 허수경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아 그러고보니 그의 가방에 들어있던 그녀의 첫 번째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가 있었다. 그래도 그날의 주연은 오규원이었다. 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오규원이 최고라고 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계속 허수경이 맴돌았다. "나에게 조경은 한 편의 시와 같다"던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했기에 오규원의 시로부터 풀어가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독일어도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홀연히 독일로 떠나버린 허수경을 생각하며 늘 궁금했듯이, 그에게도 비슷한 궁금증이 생겨서 그랬을까? "갓 배운 언어를 익히면서, 슈퍼마켓에서 산 생필품 꾸러미를 작은 몸으로 끙끙대고 나르면서" 적응한 독일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허수경은 어느 인터뷰에서 (독일로 떠났을 때를 돌아보면서) “20대가 저무는 나이였고 그대로 있다간 굳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며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나를 내몰았다”고 했다.
남기준_프랑스 유학 이야기부터 해보고 싶다. 전에 들었거나 전해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입학 통보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무작정 떠났다. 나 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같다. 불어는 원래 잘 하는 편이었나?
이수학_그 어처구니 없음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놀라울 뿐이다. 유학 갈 형편도 아니었고, 실력도, 돈도 없었다. 불어는 유학 떠나기 전 석달 동안 학원 새벽반을 다닌게 전부다. 그 덕분에 프랑스에 도착한 다음 1년 후에야 입학할 수 있었다. 발단은 후배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였다. 미국 유학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출국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후배가 그랬다. "선배는 유학 안 가나?" 그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며칠을 몸살을 앓았다. 소금쟁이처럼 쉽게 움직이며 사는 삶에 대해서 늘 이야기했었기에, 가서 굳이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시간을 보내고 올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철저하게 준비해서 떠난 유학이 아니었다.
남기준_그럼 그렇게 불현듯 홀연히 떠난 프랑스에서의 시간들은 만족스러웠나, 아니면 실망스럽고 힘들기만 했나?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는데, 무엇을 배우고 얻었나?
이수학_사실 설계를 배우고 싶어서 떠났는데, 이론만 실컷 배웠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다행이다 싶다. 선생님이 모두 다섯 분이었는데, 건축사회학, 지리학, 유럽의 생태, 정원의 역사, 서양에서 경관이란 무엇인가, 동서양 비교 경관론, 설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조경이론들을 배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선생님 다섯 분이 모두 자기 책이 있었고, 거기에 자신만의 이론이 담겨 있었고, 그 책이 곧 교재이자 수업의 전부였다는 점이다. 사실 그래서 불어 실력이 부족해도 어느 정도 수업을 따라 갈 수 있었다. 또 라쉬스 교수가 작품을 발표하면 다른 교수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아티클을 발표했다. 그 글들을 모아 펴낸 책도 있을 정도인데, 그렇게 이론과 실제가 끊임없이 만나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공고히 다져나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론 시트로엥 공원을 설계했던 질 끌레망처럼 다른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의견을 표명하고 글을 발표했다. 그때 거창하게 이론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들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런 생각들이 나중에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커져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완전히 무작정 떠난 것은 아니고 한 가지를 가지고 갔다. 좀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로 창덕궁 후원이었다. 학교 다닐 때 한번 갔었고, 유학 가기 바로 전에 친구를 따라서 한번 더 가볼 수 있었는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정말 너무 좋았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여러 책들을 뒤적거렸는데, 기존의 정원 관련 책에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없었다.
나중엔 아트란띠끄 정원만을 소재로 논문을 완성했지만, 처음엔 창덕궁 후원과의 비교 연구를 주제로 생각했었기에, 프랑스에 있는 동안 끝까지 놓지 않은 연구 주제가 결국 창덕궁 후원이 되었다. 공부를 하는 동안 파리에 있던 한국문화원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그곳엔 영인본 홍재전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필요로 했던 기본 자료들이 모두 있었다. 결국 창덕궁 후원에 대한 공부가 조선의 역사로까지 확장되었고, 라쉬스 교수를 비롯 여러 선생님들의 이론적인 안목이 어느새 내게로 전해졌는지, 나중엔 작지만 나름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결과도 내놓을 수 있었다(한국조경학회지에 수록된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 기존의 책에 원하는 대답이 없다고 해서 과연 내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새로운 창덕궁 후원과 만나게 된 셈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 큰 장점이 아니었나 싶다. 지리적 거리가 어떤 사실을 굉장히 객관화시켜준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프랑스에 있는 동안 '한국은 일본과 중국과는 무엇이 다르냐?' 우리는 공자나 맹자, 노자의 사상을 마치 우리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건 중국 것이 아니냐'면서, 한국의 사상은 무엇인지 물어왔다. 그런가하면 산수화에 대해서도 중국과 일본, 한국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했다. 그런 상황들 덕분에 프랑스에 있으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우리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들이 이어졌고, 탁월한 식견이 돋보이는 김윤식의 글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옥성 안-바롱의 한국 산수화에 대한 글에서 몇 가지 단서들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정리된 것들이 발표한 논문 이외에 더 있는데, 게으름 때문에 모두 정리하진 못했다. 다시 해야되는데 이러고 있다.